후지산
후지산(Fujisan, 일본어: 富士山(부사산), ふじさん)은 일본의 혼슈 중앙부, 시즈오카현(후지노미야시, 스소노시, 후지시, 고텐바시, 슨토군 오야마정)하고 야마나시현(후지요시다시, 미나미쓰루군 나루사와촌)의 경계에 있는 휴화산이며, 해발 3,776m로 일본의 극점 중 최고점에 속한다. 1707년부터 휴지기에 들어간 상태로, 도카이도 신칸센이 그 근처를 지나간다. 2013년 6월 22일 제37차 세계유산 위원회 회의에서 후지산, 성스러운 장소 그리고 예술적 영감의 원천(영어: Fujisan, sacred place and source of artistic inspiration)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일본의 상징이자 일본인의 영산(靈山)으로 꼽히고,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인 후지 하코네 이즈 국립공원의 일부이다.[1]
개요
후지산은 산의 경사가 급하고 산 정상이 깎여 있으며, 눈으로 뒤덮여 있다. 수십만 년전부터 반복된 화산 활동으로 인해 형성된 성층 화산이며, 그 아름다운 풍모는 옛날부터 일본의 상징으로서 알려지고 있다. 일년 중 7월 내지 8월에 입산이 가능하며, 본래 여성의 입산이 금지되었다가 1868년부터 해금되었다. 맑은 날에는 100km 떨어진 도쿄에서도 보일 정도로 큰 후지산은 옛부터 일본의 상징이자 고대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저지에서 솟아 있으므로 화산체 그 자체가 높고 밑면은 지름이 35∼40km에 달한다. 북서쪽 산자락에는 오무로산(大室山)을 비롯하여 기생화산이 많고 남동쪽 사면에는 1707년에 호에이산(寶永山)의 폭발 화구가 생겨 산용에 변화를 주고 있다. 산체는 고미산(小御岳:2,314m), 고후지(小富士)의 더 오랜 2개의 화산체상에 분출한 현무암질의 용암류와 화산재, 화산사력(砂礫)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암은 유동성이 많아 아오키(靑木)평원과 같은 넓은 용암류(熔岩流), 후지 5호(湖)와 같은 언색호(堰塞湖), 용암 터널, 용암류상의 수해형(樹海型)을 형성하였다.
역사시대의 화산활동으로는 781년부터 1707년까지 10여 차례의 기록이 있는데 그 중에서 800년, 864년, 1707년의 분화가 특히 유명하다. 예로부터 일본 제일의 명산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야마나시현의 가와구치(河口) 호반에서 고미산(스바루 라인)까지는 유료 자동차 도로가 나 있고, 시즈오카현 쪽에는 오모테후지(表富士) 유료도로가 나 있다. 산정에는 최대 탐지거리 600km의 레이더를 갖춘 기상관측소가 있다. 후지하코네이즈(富士箱根伊豆) 국립공원의 대표적 관광지로, 전역이 특별 명승지로 지정되어 있다. 2013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2]
지명의 유래
후지산의 유래에 애해서는 아직까지 그 유래에 대해 뚜렷한 정설은 없다. 후지(富士)라는 이름의 어원을 두고 여러 설이 있다. 첫 번째는 타케토리모노가타리(竹取物語) 또는 카구야히메 이야기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카구야 공주 이야기를 보면 알겠지만 카구야 공주가 달로 떠난 뒤에 카구야 공주에게 받은 불사약을 지금의 후지산에서 태워 없애게 하여 후시산(不死山, 불사산)으로 불리는 것도 있고, 2번째로는 같은 이야기로부터 후지산에서 태워 없앴다고 하여 ふしの山(불의 산)로 불리는 것도 있다. 세번째로는 무지개의 발음인 후시(フシ)로부터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늘날 일본인에게서 후지산은 한국인들에게 백두산급으로 성지 취급 받으므로 후지사마(후지님)로도 불린다.
한국에서 후지산의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어서 부사산이라고도 한다. 사과의 품종 중 후지를 부사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후지산과 부사는 서로 무관하며, 한자도 다르다. 부사의 본래 이름은 후지로, 저 멀리 아키타현 후지사키정에서 개발된 품종이다. 후지 사과는 부유할 부(富)가 아닌 등나무 등(藤)을 쓰는데, 둘의 발음이 동일해 일어난 오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후지산 산이라고 써야 한다는 착각도 있지만, 외래어 표기법은 한자어 지명에서 산, 강 등의 의미를 지닌 원어를 제외한 부분이 한 글자인 경우에만 우리말의 '산, 강' 등에 해당하는 말을 덧붙이도록 한다. 富士는 두 글자라 덧붙여 읽지 않으므로 '후지산 산'이 아니라 후지산이 외래어 표기법으로도 옳다. 불(火)을 의미하는 고대 일본어 단어가 한국어와 관계 있는 '푸디~푸지'였는데 여기서 순음퇴화 및 구개음화가 일어나 '후지'란 이름이 나왔다는 학설도 존재한다.
지질
후지산은 4층 구조다. 1천만 년 전까지 후지산이 있던 자리는 해저였다. 현재 혼슈의 야마나시현 북부(고후시 부근)가 당시에는 해안이었다. 필리핀해판이 점점 북상하자, 먼저 현 후지산의 북쪽과 동쪽에 있는 미사카 산지와 단사와 산지가 혼슈에 충돌하며 융기하였다. 그 후 100만 년 전까지 화산 군도들이 줄줄이 혼슈에 충돌해 현 후지산의 모체가 되는 선(先) 고미타케 화산과 하코네 화산, 아시타카 화산이 만들어졌다. 당시 이즈 반도는 혼슈와 부딪히기 직전인 섬이었다. 수십만 년 전 이즈 반도가 혼슈와 충돌했다. 그 결과 후지산은 압력을 받아 거대한 폭발을 반복해 선 고미타케 화산은 5만 년 전에 고(古) 후지 화산이 새롭게 고미타케 화산 측면에서 분화해 고미타케 화산마저 덮어버렸다. 이 무렵 하코네 화산은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칼데라를 생성하였고(이시노 호수), 아시타카산은 분화를 종료하였다. 하코네산도 분화를 멈춘 수천 년 전에는 신 후지 화산이 새로이 분화하여 현 후지산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2900년 전에는 고텐바 암설(지반붕괴) 사태로 고 후지 화산의 산체가 현 고텐바시까지 무너져 내렸다. 이후 3000~2000년 전까지 정상부에서 10차례 정도 분화한 이후로는 측면으로만 분화했다. 이후 헤이안 시대에 조간 대분화(864년)를 비롯하여 여러 번 분화했지만 에도 시대의 호에이 대분화(1707년)를 끝으로 현재까지는 분화가 없다. 상당한 고봉(3,776m)으로 일본 내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최고봉이다. 아시아-환태평양 화산대에서 보면 한라산(1,947m), 백두산(2,750m)보다 훨씬 높고, 뉴질랜드 아오랑기 쿡 산(3,754m)보다는 조금 더 높으며 타이완의 위산(옥산, 3,952m)보다는 낮다. 후지산의 아래에서 일본 사가미 해곡 대지진이 발생한 원인인 사가미 해곡과 난카이 대지진의 원인인 난카이 해곡, 그리고 유라시아판과 북아메리카판의 경계인 이토이가와-시즈오카 구조선, 이렇게 세 판경계가 서로 만난다. 즉, 지질학적으로 후지산 일대는 일본 해구와 마주하는 도호쿠 동부 지방과 더불어 일본 최악의 지진 위험 지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후
후지산의 기후는 고산 기후이지만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꼭지점 중심부를 위주로 빙설 기후가 나타나고, 그 주변 고산 지대는 툰드라 기후를 띈다. 해발 고도가 2,000m 아래로 내려가게 되면 아극 기후가 나타난다.
인문 역사
전근대에도 물론 영산으로 취급받긴 했지만, 그 격은 지금보다는 낮았던 듯하다. 721년에 완성된 히타치국풍토기(常陸国風土記)에 이런 내용이 있다.
- 옛날 조상신께서 신들이 많은 곳을 다니시다가 스루가의 후지산에 도착하셨다. 해가 저물자 하룻밤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후지산신은 "추수제(新嘗祭)를 지내느라 금기를 지키는 중입니다. 오늘만은 양해해주십시오. 머물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조상신은 원망하며 욕하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너의 조상인데 어찌 머물지 못하게 하느냐. 네가 사는 산은 살아있는 한 겨울에도 여름에도 눈이 내리고 서리가 끼며 추위가 덮쳐서, 사람들이 산에 오르지 않아 음식을 바치지도 않으리라."
이번에는 쓰쿠바산(筑波山)에 가셔서 부탁하시자, 쓰쿠바산신은 "오늘밤에 추수제를 하는 중입니다만, 조상님을 기분 상하게 해드릴 수는 없군요." 하면서 대접하여 모셨다. 그러자 조상신은 기뻐하며 축복의 노래를 부르셨다.
"사랑스럽구나, 후손아. 높게 섰는가, 신령의 궁전이여. 하늘과 땅, 해와 달이 무궁하듯이 사람들이 이 신성한 산에 올라 축하하리라. 음식은 풍부하고 우리 일족은 언제까지나 번성하여 즐거움이 무궁하리라."
이런 이유로 후지산은 눈이 와서 올라갈 수 없다. 그러나 쓰쿠바산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노래하고 춤추며 먹고 마시는 것이 지금까지 끊이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쓰쿠바산은 오늘날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에 있는 해발 877m짜리 산이다. 히타치국풍토기에서는 후지산의 위엄이나 위용으로 묘사하는 '높은 산 정상에 눈이 쌓인 모습'을 과거에는 오히려 오르기 어렵게 한다는 이유로 저주로 보고, 후지산보다 한참 낮은 쓰쿠바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축복이라고 여겼다. 물론 이것은 8세기 히타치 지방의 인식을 반영한 기록이겠지만, 고대에는 지금보다는 후지산을 신성하게 여기는 정도가 낮았다는 한 가지 증거다.
수험도에서 유래한 후지강(富士講)이라는 종교단체가 에도 시대에 후지산 숭배인식을 퍼트렸다. 물론 그 이전에도 후지산은 신성한 산으로 숭배받기는 했지만, 후지강이 이를 더욱 강화하고 대중화했다. 후지강은 후지산을 여신으로 간주했다. 과거 일본에서는 '후지산에 여자가 오르면 재앙이 닥친다.'고 오르지 못하게 했는데, 후지강은 '여신이 계신 산에 왜 여자가 못 오르냐?'면서 지속적으로 금기에 도전하여, 이는 점차 금기가 풀리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유산
2013년 6월 22일에 후지 산, 성스러운 장소 그리고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는 이름으로 후지산 주변의 신사와 화산 지역 및 명승구들을 묶어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원래는 자연유산으로 등재를 하려고 했으나, 등산객들이 버린 쓰레기에 더해 등산로 화장실에 분뇨가 넘쳐 흐르는 관계로 무산되었다. 등산로는 자연훼손이 심하며, 지질학적으로 세계의 유명 산들에 비해 딱히 특별하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일본 정부는 자연유산 등재를 위해 친환경 화장실을 등산로 주변에 세우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자연유산 등재는 퇴짜 맞았지만 일본은 환경 평가에 관대한 문화유산 등재에 재도전하여 결국 등재에 성공하였다. 후지산이 일본 문화의 중요한 상징이며 수많은 그림과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는 등 문화적인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안 그래도 이전부터 후지산 환경 문제가 극성이었는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등산객이 더욱 몰려 환경 문제가 더 나빠졌고, 결국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유네스코가 문화유산 등록을 취소할 수도 있다는 발표까지 나왔다
상징
일본을 상징하는 이미지 중 하나로, 신칸센이 앞쪽을 내달리고 있는 눈 덮인 후지산의 모습은 현대 일본의 경제 부흥을 상징한다. 다만 위 사진과 같은 구도는 후지산의 남쪽 부분, 즉 시즈오카현 쪽에서만 볼 수 있다. 북쪽인 야마나시현에서 보면 산 정상에 큰 균열이 나있다. 일본 민족의 영산이자 일본의 상징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일본 매체에서는 수도 없이 다루어 일일이 그 예를 들 수 없을 정도이다. 일본인들은 새해 첫 꿈에서 후지산을 보면 매우 재수가 좋다고 한다. 대체로 3등이 가지, 2등이 매, 1등이 후지산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도쿄 수도권 외곽의 중산층 대상 중등형~고급형 주거 주택단지에서는 후지산이 잘 조망될 경우 프리미엄이 약간 붙는 경우도 많다.
관광
후지산의 위치는 일본 혼슈의 야마나시현과 시즈오카현 사이로, 날씨가 좋은 날에는 도쿄도나 가나가와현 등은 물론이고 100km 이상 떨어진 이바라키현이나 나가노현의 높은 곳에서도 보인다. 야마나시, 시즈오카 두 현의 경계를 걸치고 있어, 서로 후지산이 자기네 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시즈오카현에서는 경치 문단에 나온 사진처럼 남쪽에서 본 후지산을 앞쪽, 북쪽에서 본 후지산을 뒤쪽이라 하고, 야마나시 현에서는 그 반대로 북쪽에서 본 후지고코(富士五湖)와 함께 보이는 후지산을 앞쪽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신성한 산에 종교적 의미로 오를 경우 등산 대신 등배(登拜)라는 말을 쓰는데, 후지산도 등배의 대상이었다. 한국어에서도 사찰에 참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비슷한 경우라고 하겠다.
세계 각지의 명산들에 비해 경사가 심하지 않고 등산로 관리가 잘 된 편이라서 국민 대다수가 오를 수 있어 이른바 '국민 산'으로 통한다. 유료도로인 스바루 라인을 이용하면 5고메(5合目, 5부 능선) 주차장까지 사륜차, 이륜차, 또는 자전거 등으로 오를 수 있고, 5고메에서 부터 출발하면 당일치기 등반도 가능하다. 물론 이것은 여름철(7월~8월)의 이야기다. 애당초 등산로의 정식 개방은 7월과 8월뿐이다. 또한 등산로 마다 개방 시기가 다르다. 등산하기 전 모든 등산로의 개방 날짜를 확인하고 가야한다. 또한 제설 작업이 늦어지면 개방일이 지연될 수 있으니 한 번 더 확인하는 편이 좋다. 후지산 높이가 높이이니만큼 정상은 상당히 춥다. 1월 평균기온 -18.4℃, 8월 평균기온은 6.2℃로 1년 내내 밤엔 영하로 내려가곤 한다. 극단적으로는 1981년 2월 -38℃를 기록한 적도 있다. 히타치국풍토기에 기록된 "네가 사는 산(후지산)은 살아있는 한 겨울에도 여름에도 눈이 내리고 서리가 끼며 추위가 덮치리라." 하는 구절대로이다.
일본 전역에 있는 센겐 신사(浅間神社)는 후지산신을 주신으로 모신다. 센겐 신사들은 후지산을 센겐(浅間) 님, 혹은 센겐 대신(大神)이라고 부르며 신앙대상으로 삼는데, 센겐이란 말이 화산을 뜻한다고 한다. 메이지 시기 신불분리령 이후로는 국가신토에 발맞춰, 센겐 신을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등장하는) 코노하나노사쿠야히메(木花之佐久夜毘売) 여신과 동일시하였다. 센겐 신사들의 본부는 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시(富士宮市)에 있는 후지산혼구센겐 대사(富士山本宮浅間大社, 이하 센겐 대사). 후지산 꼭대기에도 센겐 대사에서 관리하는 신사들이 있다.
후지노미야 루트 등산로의 끝에는 후지산정상 센겐 대사 오쿠미야(富士山頂上浅間大社奥宮, 이하 오쿠미야)가 있다. 원래는 후지산 코보사(興法寺)가 있던 자리지만, 메이지 유신 시절 신불분리령으로 사찰이 사라지자 그 터에 센겐 대사가 오쿠미야를 세웠다. 센겐 대사 측도 오쿠미야를 말사가 아니라 또 다른 본사로 간주하는 듯하다. 오쿠미야 경내는 후지산 내에서도 특별보호지구로 따로 보호받는다는 듯하다. 은명수(銀明水)라고 불리는 약수가 근처에서 나와, 사람들이 받아가려고 한다.
요시다구치 루트의 끝에는 쿠스시 신사(久須志神社)가 있는데 오쿠미야의 말사지만 현판에는 후지산정상 오쿠미야(富士山頂上奥宮)라고 써 있다. 원래 쿠스시 신사에는 야쿠시지(藥師寺)라 하여 약사여래를 모시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약사여래의 약사(藥師/薬師)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야쿠시. 그런데 메이지 시기에 신불분리령으로 (오쿠미야 터에 있던 코보사와 마찬가지로) 야쿠시사가 해체되자 센겐 대사가 그 터에 또다시 신사를 세웠다. '야쿠시사'라는 본래의 이름에서 야쿠(藥/薬)를 '쿠스리'라고도 읽을 수 있으므로 여기서 쿠스(久須)를 따고, 시(師)와 발음이 같은 시(志)를 붙여 쿠스시 신사(久須志神社)라 이름을 지었다. 모시는 신은 오나무치(大穴牟遅, 오쿠니누시)와 스쿠나히코나. 두 신은 일본신화에서는 '국토를 만든 신'으로도 유명하고, 의약의 신이기도 하다. 약사여래를 모시던 절 터에 역시 의약의 신을 모신 것이다.
쿠스시 신사 북서쪽 가까이에는 금명수(金明水), 오쿠미야 가까이에는 은명수(銀明水)라는 약수가 나온다. 둘 다 각 신사에서 신찬에 올리는 데 쓰는데, 영험한 약수라 하여 등산객들이 받아가려고 한다. 신사에서 돈 받고 판다는 듯하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다이다라봇치라는 거인이 하룻밤 만에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을 만들겠다고 땅을 파서 흙을 쌓아올렸는데, 마지막 한 삽을 퍼올리려고 할 때 닭이 울어 그만 삽에서 흙을 흘렸다. 그때 쌓은 산이 후지산이고 신령이 흙을 푼 구덩이가 비와 호이며, 마지막에 흘린 흙이 비와 호 옆에 있는 미카미산(三上山), 즉 오미후지(近江富士)가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흙을 못 쌓았기 때문에 후지산 꼭대기가 평평해졌다. 다이다라봇치는 그 한 삽이 아까워서 비와 호의 물을 후지산으로 보냈는데, 그 호숫물이 금명수와 은명수라고 한다. 그리고 후지산 정상 가까이가 비와 호와 연결되어 호숫물이 금명수ㆍ은명수로 흘러나온다고. 일본 다도계에서는 오쿠미야에서 나오는 은명수가 유명하다고 한다. 과거에 약사여래를 모시는 사찰이 있던 것도 금명수, 은명수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에 따라서는 후지산 만년설 녹은 물이 흘러나온다고 보기도 한다.
일본에는 "후지산을 한 번도 오르지 않은 사람은 바보, 두 번 오른 사람 또한 바보(富士山に一度も登らぬ馬鹿、二度登る馬鹿)."라는 속담이 있다. 일본인들이 후지산을 사랑하는 마음과 막상 올라가 보면 참 별거 없는 과대평가가 심한 곳이란 이중적인 뜻이 있다. 화산은 토양이 식생에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참 휑해서 가까이서 보는 풍경은 명성에 비해 별 것 없기 때문이다. 일본인이든 외국인이든 멀리서 보는 게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평이 대다수다.
에도 시대 중엽, 신성한 산에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금기 때문에 등산할 수 없는 여자나 몸이 약한 노인, 아이 등이 대리참배할 수 있도록 후지즈카(富士塚)라는 조그만 언덕을 만들기도 했다. 후지강 개조의 제자 타카다 토시로(高田藤四郎)가 남녀노소 후지산을 참배할 수 있도록 1780년 (오늘날 도쿄에 있는) 미즈이나리(水稲荷) 신사에 후지즈카를 만든 데서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조산(造山)이다. 후지즈카는 대부분 신사의 경내에 있는데, 특히 (후지산신령을 제신으로 모시는) 센겐신사에 소재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센겐신사가 아닌 신사에 후지즈카가 있는 경우 또한 상당하다.
현존하는 후지즈카는 오래되어 보아야 18세기 말 - 19세기 초에 조성한 것이다. 몇몇 후지즈카는 일본의 중요유형민속문화재 또는 각 지자체의 유형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대에도 따로 후지즈카를 조성하기도 한다.
후지즈카의 크기는 저마다 다르지만 높이가 8-9 m 정도쯤 되면 큰 편이고 15m에 달하는 것도 있다. 작은 것은 높이가 고작 성인의 허리춤 정도에 불과하다. 어떤 후지즈카는 단순히 산 모양으로 흙과 돌 무더기를 쌓았을 뿐이지만, 어떤 후지즈카는 후지산에 있는 신사들이나 유명한 지역, 현재는 출입이 불가능한 곳 따위를 후지산에서 가지고 온 돌과 흙으로 제법 상세하게 재현하는 등 각양각색이다. 이런 후지즈카는 간토 지역에만 수백 곳이 넘는다고 한다.
신사에서 관리하는 후지즈카는 평상시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통제하다가 신사 측이 정한 특별한 날에만 '산 열기(山開き)'라 하여 들어가도록 허락하기도 한다. 후지산에 오르는 것을 등배(登拜)라 부르듯, 후지즈카에 오르는 것 또한 등배라 부르기도 한다. 신사들은 후지즈카의 꼭대기에 오르면 후자산 쪽을 향해 기도하라고 당부한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가나가와현 이세하라시에 있는 다이센산(大山)과 쌍둥이처럼 연결되어 '후지산에 오른 사람은 오야마산에도 올라야 하고, 오야마산에 오른 사람은 후지산에도 올라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서구인으로서 첫 등반한 이는 초대 주일 영국 공사로 재직한 러더퍼드 올코크(1809-1907)이다. 그는 1860년 9월, 영국 외교관으로서 받은 특권을 이용하여 (본래라면 금지되었을) 후지산 등산을 하였다. 러더퍼드가 후지산 밑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일행이 거의 다이묘 행렬 수준이었다고 한다. 중간에 숙박을 했는데 오유(大湯) 간헐천의 뜨거운 물 때문에 러더퍼드가 기르던 스코티쉬 테리어 한 마리가 죽는 사고가 있었다. 죽은 개를 마을 사람들이 꽤 정성껏 묻어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러더퍼드는 후지산을 거창하게 등산하고 돌아왔지만, 서양인이 함부로 후지산에 올랐다고 하여 존황양이를 따르는 무사들이 빡이 쳤다. 그래서 1861년 1월에 양이파 무사들이 습격하여 주일 영국 공사관도 아니고 주일 미국 공사관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던 헨리 휴스켄(Henry Heusken)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분화 가능성
후지산은 한동안 휴화산으로 분류되었지만 1975년 이후 명백한 활화산으로 재분류되었다. 역사적으로도 수 차례의 분화기록이 남아있어, 가까운 미래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서도 대책을 마련하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대분화가 일어난 시기는 1707년. 이 때 에도 시에까지 화산재가 밀어닥쳐 '호에이 대분화'라 불렸다. 다만 이후로는 큰 화산활동이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지산이 다시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심증이 산케이 신문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정황상 추정에 불과하지만, 대지진이 일어난 후 시즈오카현의 강진, 하코네 화산대에서의 군발 지진을 근거로 삼았다. 다만 일본 기상청에서는 진원지가 다르고 해당 지진과 후지산 폭발의 메커니즘이 다르다며 이러한 주장을 일축했다.
2011년 8월 26일, 후지산 부근의 마을들에서 수돗물을 틀면 수돗물이 데워져서 나오고, 새들이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다는 풍문이 돌았다. 2011년 말과 2012년 초의 겨울에 후지산 꼭대기의 만년설이 녹았다는 말이 있으나 후지산 꼭대기에 있는 건 일단 만년설이 아니라서 해와 계절마다 높이가 달라진다. 물론 눈이 많이 녹긴 했지만, 반드시 화산 폭발의 징조라고 보기만도 어렵다. 2013년 3월 30일, 후지산에서 이상징후가 포착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도카이 대지진과 묶이기도 한다. 실제로 1707년에는 동시에 일어났다. 또한 1707년 후지산 분화의 기록 등에 따르면, 분화 시작 49일 전인 10월 4일에 규모 8.6~8.7인 대지진이 발생했으며, 지진 피해는 도카이도, 기이 반도, 시코쿠까지 이르러 사망자만 2만 명 이상, 가옥 6만 호 파손, 쓰나미에 의한 유실 가옥이 2만 호에 이르렀다는 기술이 있다고 한다. 실제 도카이, 도난카이, 난카이 대지진의 원인인 난카이 해곡의 출발점이 후지산이니 후지산 분화와 난카이 해곡 대지진 간의 연관성이 큰 것은 당연하다.
2014년에는 일본 정부 차원에서 후지산 대폭발을 가정한 재난대비 실전 훈련 또한 대규모로 진행하였다. 후지산이 3백년 전처럼 대폭발 한다면 흘러내리는 용암을 피해 가나가와, 시즈오카, 야마나시 현 주민 75만명이 피난길에 올라야 한다고 한다. 日, 후지산 폭발 가정한 재난대비 실전 훈련 이번 훈련은 일본 기상청이 분화를 1~2개월 전에 미리 예측해낸다는 가정 하에 실시했고, 온타케산 분화처럼 돌발적인 '수증기 폭발' 상황은 상정하지 않았다. 후지산이 폭발한다면 시나리오는 크게 두 가지로 예상된다. 하나는 864~866년에 일어난 분화처럼 화산 폭발로 마그마가 흘러내리는 경우, 또 다른 하나는 1707년 '호에이 분화'처럼 화산재를 대량으로 뿜어내는 분화가 일어나는 경우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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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