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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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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릉(檀君陵)
단군릉 전경. 사진출처-우리민족끼리
북한이 복원하여 관리하고 있는 현 단군릉의 사진
단군릉 출토된 뼈.
:단군릉 안에 보관된 유골.

단군릉(檀君陵)은 평양직할시 대성구역에서 22 km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에 위치한 대리석으로 지어진 돌무지무덤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를 고조선의 지도자였던 단군(과 그의 부인)의 능이라고 주장한다.

1993년에 발견되었다. 약 1년만인 1994년 10월 11일에 개건된 단군릉은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기슭에 자리 잡았으며, 18층 건물에 해당하는 70m 높이에 아랫부분은 한 번이 50m, 높이는 22m인 9층의 계단식 무덤으로 1994년 준공된 것을 기념해 총 1994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된 피라미드 형이다.

단군릉 뒤쪽에는 무덤 입구가 있는데, 계단을 내려가 석실을 몇 번 꺽어 돌면, 석실 중앙에 두 개의 나무 관이 놓여져 있다. 여기에는 당시 발굴된 단군과 그 아내의 유골이 아르곤 가스가 채워진 밀폐 유리관 속에 보존되어 있다. 빛과 습기로 인한 손상을 막기 위해 나무관을 덧씌웠다.

단군릉에 오르기 위해서는 총 289개의 계단을 올라야 하고, 계단 양쪽에는 선돌을 연상시키는 돌기둥이 좌우 5개씩 세워져 있다. 8명의 신하와 단군의 네 아들을 상징하는 상이 좌우 능을 지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상돌, 분향료가 있고, 릉 네모서리에는 네 마리의 석범(돌 호랑이), 4개의 청동, 검탑과 두 개의 망두석, 석등이 있다.

유래[편집]

《고려사》 지리지에는 강동현 '박달곶촌'이라는 마을에 단군릉으로 보이는 무덤이 있다는 기록이 나오고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강동군에 2기의 큰 무덤이 있는데 서쪽에 있는 둘레가 410자 되는 묘가 단군릉이라고 쓰고 있고 《숙종실록》에서도 숙종왕이 단군묘와 동명왕의 묘를 해마다 손질할 곳에 대한 건의서를 승인한 것이 밝혀져 있다. 또한 《영조실록》, 《정조실록》들에도 왕들이 평양감사에게 명하여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는것을 관습화한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37권에도 단오, 추석에 단군을 시조로 제를 지냈다는 것을 밝혀 놓았다.

한편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단군세기(檀君世紀)의 오세단군 구을 재위십육년(五世檀君 丘乙 在位十六年..)이라는 기록을 들어 "재위 16년에 친히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하여 삼신단(三神壇)을 쌓고 환화(桓花, 무궁화)를 많이 심었고 그해 7월에 임금이 남쪽으로 순행하여 풍류강(風流江, 대동강줄기 비류강)을 거쳐 송양(松壤, 평양)에 이르러 병을 얻으니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는 것이고 대박산(大博山)에 장사 지내고 우가(牛加)의 달문(達門)이 뽑혀서 대통을 이었다는 내용으로 단군릉의 주인공은 47명의 단군중 오세단군 구을(丘乙)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세종실록》 지리지 강동현 조에는 단군릉에 대한 설명이 없다가 동국여지승람에 "...대총(大塚) 중... 하나는 현의 서쪽으로 3리에 있으며 둘레 4백 10척으로 속담에 단군묘(檀君墓)라 전한다." 라 하며 난데없이 등장한다. 또한 같은 책에서 동명왕이 평양에 도읍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의 구제궁(九梯宮), 기린굴(麒麟窟)을 민간에서 말하는 동명왕의 고적이라 설명하는 것을 볼 때, 단군묘를 비롯한 민간 전설들은 쉽게 믿기 어렵다.

다만 36세 성종 20년(1489년, 기유년)에 관서지방을 여행하며 평양에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추강 남효온(1454~1492)의〈단군묘 알현〉이라는 시이다.

단군이 우리를 낳으시니 우리 강산에 사람이 많지 않나(檀君生我靑丘衆) / 패수에서 윤리도덕을 가르치시고(敎我彛倫浿水邊) / 약초를 찾고 형벌을 내린 지 만세가 되어도(採藥呵斯今萬世) / 지금까지 사람들은 무진년을 기억한다네(至今人記戊辰年).

무진년(戊辰年)은 바로 단군이 나라를 세웠던 기원전 2333년이다. 이 시는 단군에 대한 찬미와 함께 남효온은 관서지방의 고조선, 고구려, 고려 등의 유적지를 두루 찾아다니며 민족의 자부심과 긍지를 나타낸 것이 특별하다. 남효온은 생육신중의 한사람으로 홍유손, 정희량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이며 동시에 청한자 김시습의 제자였다.

역사[편집]

북한이 개축하기 이전의 단군릉

본래 평양 근교에 있는 '단군릉'이란 무덤의 명칭은 역사적으로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박은식의 한국통사 등에 등장하며, 단군의 무덤으로 인식한 역사 자체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는 숙종(1697), 영조(1739), 정조(1786), 순종(1909) 시기 강동의 단군묘 수리 및 제사를 지시한 기사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무덤이 실제로 단군의 무덤인지는 과거에도 현재도 확인된 바 없으며, 어디까지나 당대에도 그렇게 전해져 내려올 뿐이었다.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은 이러한 단군릉의 존재에 부정적이었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유물론적 역사관 때문으로, 당시 북한에서는 실재하는 증거가 없고 어디까지나 신화와 종교의 대상에 불과한 단군의 무덤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물론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처럼 단군릉을 파헤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실제 고조선의 왕릉이라는 주장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3년, 북한은 대대적인 발굴 조사를 단행했으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 무덤이 진짜 단군릉이라고 주장하며 그 가치를 드높이기 시작했다. 김일성이 대리석으로 피라미드형 무덤을 조성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따라 자기들의 기호에 맞게 개건확장한 후, 1994년에 위와 같은 모습으로 공개한 것이다. 발굴 조사 당시 무덤에서 인골이 수습되었는데 북한 측에서는 이를 단군의 유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능의 가치와 왜곡 문제[편집]

물론 이 무덤이 정말로 기원전 24세기에 살았던 단군의 무덤이 아니더라도 단군이 묻힌 곳이라고 알려져 고려시대부터 수백 년 넘게 제사를 받았고 관련 기록이 존재하기에 문화재적 가치는 충분하다. 실제로 고조선 시기 무덤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늦어도 삼국 시대 즈음으로 추정되는 오래된 무덤임은 분명하므로 '전(傳) 단군릉'으로서 역사적 가치는 분명히 있었다. 이 무덤이 남한 땅에 있었다면 사적으로 지정되기에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북한 정권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확실하지도 않은 역사를 무비판적으로 예단하고, 소위 '단군릉'을 본래 모습과는 전혀 관련 없이 개조한 데에 있다. 평이한 옛 무덤을 보고 즉흥적으로 '우리나라의 원시조'라 단정한 김일성은 이를 고구려 시조 동명왕릉보다 더 크게 '만들라' 지시했다. 무덤 자체는 장군총의 모습을 본뜨라고 김일성이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과거 남한 언론에서는 단군릉 복원이란 표현을 썼기 때문에 대중들은 그렇게 알지만, 사실 북한에서는 단군릉을 비롯한 유적들을 복원(復原)이 아니라 개건(改建, 고쳐 세우거나 지음)했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개건'된 북한의 다른 유명한 문화유적으로 동명왕릉정릉사가 있다. 그러나 단군릉의 경우에는 이를 참작하더라도 개건이라는 단어가 표현하는 일반적인 수준을 한참 뛰어넘었다. 어디에서도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대리석을 씌우질 않나, 정체불명의 조각상을 세우질 않나, 원래 단군릉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만들어버렸다.

북한이 단군릉을 개축한 이유[편집]

남한이 아닌 북한을 한반도 역사의 정통계승자로 놓기 위한 정치적 계산도 포함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아직까지 왜 이렇게 해놨는지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이와 관련해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는, 조선중앙력사박물관장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의 장정신 관장이 대담 중에 "주체를 올바로 세우는 뜻에서 3대 시조릉에 대한 개건사업을 전개했다."고 한 말의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즉, 고조선의 단군, 고구려의 동명성왕, 고려의 왕건, 그런 식으로...

이렇듯 1993년 발굴과 1994년 개건은 학술적이기보다는 상당히 정치적이다. 지금의 북한 영역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북한으로 이어지는 역사정통론을 내세워서 사실상 '자신들의 역사적인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왜곡행위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972년까지만 해도 북한 헌법에서 서울을 수도로 명시할 정도로 적화통일에 집착하고 있었지만 점차 분단이 고착화되고 단시간내 적화통일의 희망을 잃게 되면서 한반도의 정통적 계승자로서의 북한의 입지를 공고화하기 위해 민족사에서의 평양의 입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편집]

김일성이 1993년 10월 20일 단군릉개건관계부문 일군협의회에서 한 연설 '단군릉 개건 방향에 대하여'에 북의 공식 입장과 김일성이 지시한 복원 방향이 나와 있는데,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지금까지 단군은 신화의 인물로 전해져 왔으나, 이 발굴로 실제 존재하던 인물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증명되었다.
  • 고고학연구소를 비롯한 여러 연구기관에서 검증한 결과, 단군의 키는 170cm가 된다.
  • 단군이 실재한 인물이라는 것이 과학으로 고증된만큼, 곰이 변한 얘기는 허구였음이 밝혀졌다.
  • 단군릉은 조선민족 원시조의 무덤이므로 동명왕릉보다 크고 웅장하게 개건해야 한다. 높이도 더 높게 만들고, 흙이 아닌 돌을 이용해 피라미드식으로 쌓아야 한다.
  • 사람이 들어가 볼 수 있게 무덤칸에 관대를 2개 놓아야 한다.
  • 단군의 유골은 남쪽을 향하여 오른쪽에 놓고, 부인의 유골은 그 왼쪽에 놓아야 한다.
  • 벽화는 이미 훼손되어 알아 볼 수가 없으므로, 굳이 새로 그릴 필요는 없다.
  • 고조선의 건축형식에 맞게 돌로 문을 세워야 한다.
  • 제당을 만들 필요는 없으나 남한 사람들(대종교인 등)이 제사를 지내러 올 경우를 대비해 상돌은 만들어 두어야 한다.
  • 더불어 묘향산과 구월산에 있는 단군 관련 유적도 정비하여야 한다.

논란[편집]

예부터 이곳에는 '단군릉'이라고 불려 온 무덤이 있었다.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기록한 승정원일기에는 이 대박산이 태백산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1530년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410자나 되는 큰 무덤이 있는데 이를 단군묘라고 한다'고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초기에는 단군릉에 대해 전설로 치부했으나 이후 단군릉을 대대적으로 개보수하면서 입장을 변경하였다. "평양에 있다는 소위 '단군릉'은 황당무계한 전설에 불과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학자 전주농(全疇農)은 1963년 이렇게 주장했다. 그는 초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고대사학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사학자로 알려져 있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이같이 명문화(明文化)된 의견은 체제의 공식 견해와 다름 없었다. 그러고 나서 31년 뒤인 1994년 10월 11일, 평양 근교의 강동군 대박산 기슭에서 '단군릉'의 준공식을 개최했다. 22m 높이에 9층 피라미드 형태와 향로, 석등과 신하 8명의 조각상도 세워진 거대한 무덤이었다.

고조선의 성립은 전통적으로 《삼국유사》의 연대에 따라 기원전 2333년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학계는 1993년에 단군 유골의 전자상자성공명법(ESR)의 수치가 5011±267년으로 측정되었다며 고조선의 성립 연대를 기원전 30세기까지 올려잡고 있으나, 대한민국의 사학계는 고고학적으로 당시 한반도에 대규모 건축물을 조성할 수 있을 정도의 문명이 존재했는가를 들어 의문시하고 있다.

일부 재야사학계 또한 《규원사화》를 비롯한 일부 재야사서들은 고조선의 수도로 기록된 "평양"이 현재의 평양직할시가 아니라 다른 장소일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하며 평양직할시의 고조선 수도설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이유는 유골 연대측정에 사용한 방법이 수백만 년 전 유물을 측정하는 데 쓰이는 방법이라는 점, 사료를 근거로 판단할 때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가 된 것은 기원전 7세기 이후로 후기에 속한다는 점 등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학계를 비롯한 외부의 사학계는 대부분 단군릉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단군릉에 대해서는 믿을 만하다는 취신론(取信論)과 불신론이 분명히 존재했고 취신론자들은 복수의 단군묘가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래서 17세기 중엽 학자 허목같은 이는 단군이 역사적 존재임을 확신하고 이를 토대로 '단군세가'까지 저술했고 한말 국사 교과서에서는 '대동역사', '동국사략', '신정동국역사' 등처럼 단군릉을 역사적 사실로 서술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신채호가 단군릉을 이해하는데 근대역사학적 해석을 도입했고, 단지 단군묘의 존재만을 인식했던 박은식과는 달리 정복 군주로서의 측면을 부각시켜 단군이 원정 도중 강동에서 사망한 까닭에 단군릉을 강동에 조성했다고 서술했 듯이 단군묘일 가능성이 높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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