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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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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라하라대학교
과달라하라 위치

과달라하라(스페인어: Guadalajara)는 멕시코 중서부 할리스코주에 있는 도시이며 할리스코주의 주도로 인구는 약 139만 명이고 대도시권 인구는 526만 명 이상으로 멕시코시티에 다음가는 인구 밀집지역으로 멕시코 제2의 도시이다. 과달라하라는 멕시코 문화의 중심지로, 2005년에는 ‘아메리카 문화의 수도’로 선정되기도 하였다.[1]

개요[편집]

과달라하라는 멕시코 중서부 태평양에 면해 있는 할리스코주의 중앙에 있다. 과달라하라는 높은 산맥에 둘러싸여 있으며, 해발 1,567m의 고원에 위치하며 기후가 쾌적하다. 1531년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가 건설하였으며, 1542년 당시 스페인 황제를 겸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의 인가를 받아 정식으로 도시로 건설되었다. 식민지 시절 중심지로 발전하였고, 멕시코 독립 운동의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멕시코 독립 전쟁 당시 격전지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공업 중심지로 크게 성장하였다. 과달라하라의 시가지는 계층에 따라 크게 네 구역으로 구분된다. 부유한 계층은 시가지의 북서쪽인 이달고와 남서쪽의 후아레스 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빈곤한 계층은 도시 중심부와 북동쪽의 리베르타드(Libertad) 지역, 남동쪽의 레포르마(Reforma) 지역에 거주한다. 도시 외곽의 저소득 계층 주거지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으며, 중산층과 부유층 또한 외곽의 사포판(Zapopan) 지역으로 이주하고 있다. 과달라하라는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기에 멕시코 서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중심지로 발전한 도시이다. 전통적으로 제화, 섬유, 식품 가공업이 발달하였고, 현재는 정보 기술 및 전자 산업의 발달로 ‘멕시코의 실리콘밸리’라고 불린다. 다수의 다국적 기업이 이곳 광역 도시권 내에 생산 설비를 갖추고 가동되고 있다. 과달라하라에는 멕시코에서 가장 높은 순위에 있는 두 대학인 과달라하라 대학교(Universidad de Guadalajara)와 과달라하라 자치 대학교(Universidad Autónoma de Guadalajara)를 포함한 수많은 대학과 연구 기관이 있다. 과달라하라는 아름다운 도시 경관으로도 유명하며, 멕시코의 민속적 앙상블인 마리아치가 탄생한 곳이다. 관광업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데, 식민지 시대의 대성당과 총독 관저 등의 옛 건물이 인기가 있으며, 기후가 좋아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1530년경부터 식민이 시작된 곳으로, 그 시대의 경관(景觀)이 남아 있어 ‘서부의 진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에스파냐풍의 시가지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성당과 과달라하라대학이 있으며, 광장 근처의 정부청사에는 이 고장 출신의 화가 오로스코의 벽화가 걸려 있어 유명하다.[2]

지리 및 기후[편집]

과달라하라는 멕시코 중서부에 위치하며 태평양에 연해 있는 할리스코주의 중앙에 있다. 과달라하라는 아테마학 계곡에 자리 잡고 있으며, 멕시코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화산대인 횡화산대 가까이에 있다. 평균 고도는 1,567m에 이르나 전체적으로 평탄한 지형을 이루며, 산후안데디오스강이 흐른다. 프리마베라 산맥에 속하는 활화산인 프리마베라 화산(3,030m)이 프리마베라 숲에 위치해 있다. 프리마베라 화산은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않지만 지속적으로 연기와 뜨거운 물을 내뿜어, 그 뜨거운 물이 프리마베라 숲 곳곳과 과달라하라 광역 도시권의 사포판에까지 다다른다. 프리마베라 화산의 영향으로 과달라하라 지역은 토양이 매우 비옥하여 농업 발달에 유리하였다.

기후는 아열대 습윤 기후에 속한다. 북회귀선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나, 도시의 해발 고도가 높아서 동위도상의 다른 지역보다 기온이 낮고 강수량도 적은 편이다. 연중 기온은 17~25℃로 온난한데, 겨울인 12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의 기온은 17~19℃이며, 여름인 4~7월에는 21~25℃이다. 연 강수량은 약 1,000㎜로, 강수량의 계절별 편차가 커서 6~9월에는 월평균 150~300㎜의 비가 내리고, 나머지 달은 10㎜ 안팎에 그친다. 우기가 시작되기 전인 5월의 기온이 가장 높고, 3월이 가장 건조하다. 눈이 내리는 일은 매우 드물다.[3]

역사[편집]

에스파냐 인들의 통치가 시작되기 이전에 과달라하라 지역은 멕시코 중앙의 고도로 발달한 문명 지역 북쪽 변경에 속하였다. 과달라하라 지역은 나와(Nahua)족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으며, 타라스칸(Tarascan)과 톨테카(Tolteca), 아스테카(Azteca)의 중간에 위치하여 정치적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과달라하라는 1532년에 처음 세워졌으나, 현재 위치에 시가지가 형성되기 이전에 세 곳에서 세워졌다가 옮기기를 반복하였다.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던 원주민이 호전적이어서 에스파냐 인들의 정착지 건설에 어려움이 많았고, 정착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식수원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1533년 부왕령 누에바에스파냐(Nueva España)의 하부 지역인 누에바갈리시아(Nueva Galicia)의 통치자로 임명된 누뇨 데 구스만(Nuño de Guzmán)이 원주민을 노예로 삼고 학정을 펼치자, 1541년 이 지역에 거주하던 칵스칸(Caxcan), 포르테쿠엑스(Portecuex), 사카테코(Zacateco) 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누에바에스파냐의 부왕이었던 안토니오 데 멘도사(Antonio de Mendoza)까지 나서서 노예로 잡힌 원주민들을 풀어 주고 사면령을 내렸다. 이후 다시 자리를 옮겨, 1542년에 현재의 자리인 아테마학 계곡(Valle de Atemajac)에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 후 과달라하라는 지속적으로 멕시코 서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 기간에 멕시코 서부의 문화, 경제, 정치, 행정 면에서 가장 주요한 도시였다.

식민 시기에 과달라하라의 행정력이 미친 범위는 멕시코 서부 대부분으로, 서쪽으로는 태평양 해안, 북쪽으로는 캘리포니아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이 시기 과달라하라의 행정 구역에 속한 인구는 약 60만 명으로, 멕시코시티와 푸에블라 다음으로 많았다. 1560년에 누에바갈리시아의 행정 중심지를 콤포스텔라(Compostela)에서 과달라하라로 이전하여 1810년 멕시코 독립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였다. 주교의 관할권도 과달라하라로 이전되어 1561년에 대성당 공사가 시작되었다. 1670년에 아우구스티누스회와 도미니크 수도회가 도착하였고, 이후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18세기 과달라하라는 경제적 번영을 이루며 도시로서의 기능을 갖추었다. 당시의 경제는 농업에 기반을 두고 섬유와 제화, 식료품 생산업 등이 산업의 중심을 이루었다.

19세기 과달라하라는 멕시코를 휩쓴 전쟁과 혁명의 영향을 피해 가지 못했다. 1810년 멕시코의 독립 전쟁 당시 멕시코 독립의 영웅인 미겔 이달고(Miguel Hidalgo) 신부는 멕시코시티를 공격하는 대신에 과달라하라로 퇴각하였다. 1811년 정부군과의 교전에서 8만여 명의 군대와 95기의 대포를 갖춘 이달고의 군대는 6,000여 명의 정부군에 패하였고, 이달고는 아과스칼리엔테스(Aguascalientes)로 도주하였다. 멕시코의 독립 이후인 1823년에 할리스코(Jalisco) 주가 세워졌으며, 과달라하라는 주도가 되었다. 개혁 전쟁(Guerra de Reforma)이라고도 불리는 내전 중에는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Juárez) 대통령이 1856년에 정부를 과달라하라에 잠시 두기도 하였다. 1864년 프랑스가 멕시코를 침략하였을 때 과달라하라는 프랑스군이 점령하였고 1866년에야 멕시코군이 다시 탈환하였다.

19세기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과달라하라는 경제, 기술, 사회적 발전을 이루었다. 독립 이후에는 유럽 이민자들이 소유한 소규모 제조업체들이 발달하였으며, 철로가 건설되어 태평양 및 미국과 연결되었다. 이에 따라 무역이 성하였으며, 할리스코주의 농촌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과달라하라를 거쳐 미국을 비롯한 해외로 수송되었다. 이때부터 농장 문화는 할리스코주와 과달라하라시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1884〜1890년까지 전기 및 철도 교통의 발달이 이루어졌으며, 천문대가 건설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이후 급속히 발전하여, 1947년에는 첫 번째 공업 단지가 세워졌다. 1964년에 도시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서면서 멕시코 제2의 도시가 되었다.[4][5]

교통[편집]

돈미겔이달고이코스티야 국제공항(Aeropuerto Internacional de Don Miguel Hidalgo y Costilla) 은 1966년 과달라하라 도심에서 약 15㎞ 떨어진 틀라호물코데수니가(Tlajomullco de Zúñiga)에 건설되었으며, ‘과달라하라 국제공항’이라고도 한다. 과달라하라 국제공항은 멕시코시티 공항과 함께 북아메리카와 중앙 및 남아메리카의 주요 공항을 연결한다. 특히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과달라하라 간 노선은 라틴 아메리카 항공 정기 노선 중 멕시코시티-로스앤젤레스 노선과 함께 매우 중요한 노선이다.

과달라하라는 멕시코 중서부 지역의 교통 요지로, 미국-멕시코 간 가장 많은 물류가 통과하는 러레이도(Laredo)-누에보라레도(Nuevo Laredo)와 54번 고속도로 및 95번 고속도로를 통해 연결되고, 테픽(Tepic)을 거쳐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도시인 노갈레스(Nogales)로 연결된다. 또한 1990년대 이후 물동량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콜리마주의 만사니요(Manzanillo), 마사틀란(Mazatlan), 할리스코 주의 푸에르토바야르타(Puerto Vallarta) 등 태평양 연안의 주요 항구와 인접해 있으며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멕시코의 최대 소비 시장인 멕시코시티와는 15번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과달라하라 광역 도시권에는 여러 종류의 공공 교통수단이 운행되고 있다. 1989년부터 경전철(Sistema de Tren Eléctronico Urbano, SITEUR)이 운행되고 있으며, 무니피시오 과달라하라와 이웃한 사포판(Zapopan), 틀라케파케(Tlaquepaque)까지 연결된다. 2009년에는 간선급행버스체계(Bus Rapid Transit, BRT)를 도입하여 전용 버스를 운영하고 있다.[6]

과달라하라대학교[편집]

과달라하라대학교(University of Guadalajara)는 멕시코 할리스코주 과달라하라에 있는 공립 종합대학교이다. 할리스코주 전역에 대학과 대학원, 고등학교가 산재해 있다.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에 이어 멕시코 2위의 대학교다. 17세기에 설립된 곳으로 멕시코에서 두 번째, 북미 지역에서 일곱 번째, 라틴아메리카에서 열 네 번 째로 오래된 곳이다. 1994년부터 15개 대학교 센터와 가상 대학시스템, 고등학교교육시스템이 통합된 대학교네트워크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2023년 QS 세계대학순위에서 851-900위권, 라틴아메리카 대학 중 42위를 기록했다. 2023년 타임스고등교육의 세계대학평가에서는 라틴아메리카 대학 가운데 101-125위권에 들었다. 2023년 유에스뉴스&월드리포트의 글로벌대학순위에서 세계 1361위, 라틴아메리카 66위, 멕시코 대학 중 7위로 평가됐다.

1586년 과달라하라에서 고등교육을 위한 대학이 처음 설립됐다. 과달라하라에 대학교 설립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펠리페 갈린도 이 차베스 수사로 그는 1696년 스페인 카를로스 2세 국왕에게 산호세 왕립신학원을 확장하도록 건의했다. 이것이 과달라하라대학교의 기원이 됐다. 마티아스 앙헬과 데 라 모타 파디야 변호사가 1750년 펠리페 수사의 제안을 과달라하라시 계획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누에바 갈리시아사가 운영하는 산트토마스대학과 산후안바우티스타대학이 과달라하라에 있었기 때문에 이 계획은 제대로 추진되지 않았다. 1771년 누에바 갈리시아의 새 주교인 안토니오 알칼데 이 바리가 수사가 대학교 설립을 지지했다. 1791년 스페인 카를로스 4세 국왕이 과달라하라왕립대학교 설립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1792년에 대학교가 설립되어 예술, 신학, 법학, 의학부가 만들어졌다. 1826년 할리스코 주의회가 과달라하라 대학교에 과학연구소 설립을 주정부에 지시했다. 1847년 주의회가 산후안 바우티스타 대학을 폐교하고 과달라하라대학교에 교육과정을 신설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남녀 고등학교를 각 하나씩 설립하도록 했다. 1925년 할리스코 주지사가 과달라하라대학교를 재설립했다. 1989년 과달라하라대학교 조직법이 마련되면서 대학교의 학문활동과 재정활동의 자율성을 보장했다. 또 대학교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면서 가상 대학교 시스템과 라디오, TV, 영화 대학교 시스템이 창설됐다.

과달라하라대학교는 주제별로 예술, 건축 및 디자인대학교 센터, 생물학 및 농업과학 대학교 센터, 경제학 및 경영과학 대학교센터, 정밀과학 및 공학 대학교센터, 보건과학대학교센터, 사회과학 및 인문학 대학교센터 등 5개로 나뉜다.[7]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과달라하라 (멕시코)〉, 《위키백과》
  2. 과달라하라(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과달라하라의 위치와 지명〉, 《네이버 지식백과》
  4. 과달라하라〉, 《요다위키》
  5. 과달라하라의 역사(세계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6. 과달라하라(멕시코)〉, 《나무위키》
  7. 과달라하라대학교(세계의 대학)〉,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국가
카리브제도 국가
북아메리카 도시 1
북아메리카 도시 2
북아메리카 지리
북아메리카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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