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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쿤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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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위치

사타쿤타주(핀란드어: Satakunta)는 핀란드에 위치해 있는 주이다. [1][2]

개요[편집]

사타쿤타주의 면적은 8,412㎢이며 인구는 213,592명(2022년)이며 주도는 포리이다. 남서수오미주, 칸타헤메주, 피르칸마주, 남포흐얀마주, 포흐얀마주와 접하며 21개 지방 자치체를 관할한다.

역사적인 사타쿤타 지역은 피르칸마 지역까지 포함한다. 스웨덴핀란드 십자군을 일으켜 핀란드에 도달한 이래 많은 스웨덴인이 정착했으며 15세기에는 라우마가, 1558년에는 장차 스웨덴 국왕 요한 3세가 되는 핀란드 공작 요한에 의해 포리가 세워졌다.

주요도시[편집]

포리[편집]

핀란드 서부 해안에 있는 도시로 보트니아(Bothnia)만에서 10km 떨어진 코케메엔요키(Kokemäenjoki) 강 어귀에 있다. 인구는 핀란드에서 9번째로 큰 도시이지만 광역도시권까지 포함하면 7번째다. 1966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는 재즈 페스티벌로 유명하며, 인근 해변 일부는 유니섹스 나체주의자들에게 개방돼 있다.

1558년 핀란드의 공작 유하나(Juhana) 3세에 의해 건설된 포리(Pori)의 전신은 중세 마을 텔예(Teljä)와 울빌라(Ulvila)이다. 후빙기 융기현상 때문에 코케메키(Kokemäki)강은 14세기 이래로 항해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텔예와 울빌라 마을은 선박이 강을 더 이상 운항하기 어려워지면서 그 중요성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16세기 들어 상황은 더욱 나빠져 결국 유하나 공작은 바다 가까이에 새로운 항구와 시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울빌라의 부자들은 새 도시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유하나 3세는 1558년 3월 8일 그들에게 "우리는 바다 근처에 강한 시장 도시를 건설하는 게 최선이고 울빌라 내에서 요새화할 만한 곳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포리에서 적당한 장소를 선택하게 됐다"라고 쓴 문서를 전달했다.

처음에는 약 300명의 비자발적 거주자가 있었다. 그들은 곧 새 도시가 수지맞는 무역 기회를 제공하는 등 이점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포리 역사가 시작된 이래 조선은 중요한 산업이었다. 조선소가 1572년 강 근처에 세워져 20세기 초까지 운영됐다. 포리에서 건설된 가장 큰 배는 1583년에 완성된'포린 크라벨(Porin Kravel)'이었다.

대북방전쟁(1700~1721년 러시아와 스웨덴이 발트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벌인 전쟁)동안 포리는 러시아 군대에 점령당했다. 1713년 9월부터 1714년 1월까지 8개 러시아 연대가 약탈과 파괴를 일삼으며 4개월을 보냈다. 일부 부자가 사라졌는데, 아마 투옥됐다가 러시아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방앗간과 창고들이 불에 탔다. 대부분의 소와 말, 400여 개의 배가 분실됐다.

러시아핀란드 침공은 그 후에도 7년 동안 계속됐다. 포리는 상당한 재정적 타격을 받았고 외국과의 무역도 완전히 중단됐다. 대북방 전쟁으로 포리는 주요 권리를 잃고 깊은 침체에 빠졌다. 포리의 '황금시대'는 1765년 대외무역의 주요 권리를 되찾았을 때 시작됐다.

1853년 크림전쟁이 발발한 뒤 포리는 1855년 프랑스와 영국 해군의 공격을 받았다. 프랑스 프리깃함은 7월 첫 번째 공격을 시도해 이소카리(Isokari) 섬 근처에서 배 한 척을 나포하고 더 북쪽으로 올라갔다. 8월 9일엔 영국 함대의 공격을 받았다. 시장은 도시를 구하기 위해 적들과 협상을 벌였다. 2개의 범선과 17개의 배, 그리고 다른 재산들이 영국에 넘어갔다.

대부분의 집들이 목조로 된 포리시는 쉽게 불에 탔고 9번에 걸쳐 재건됐다. 도시가 처음으로 화재로 파괴된 것은 1571년이었다. 가장 최근의 화재는 1852년에 있었다. 도시의 75% 이상이 불에 타 사라졌고 주민들은 집을 잃었다.

1918년 핀란드 내전 동안 포리는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의 일부였다. 이 도시에선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적 · 백군 양쪽에 의한 테러가 발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포리는 소련 공군에 의해 4번 폭격을 당했다. 최악의 폭격은 21명이 사망한 1940년 2월2일에 있었다. 폭탄의 대부분은 항구 지역을 목표로 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포리 공항은 독일 공군의 보급창으로 사용됐다. 1944년 10월 독일군이 공항서 철수하면서 시설물들을 폭파시켰다. 오늘날에도 독일이 제작한 격납고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독일군에 붙잡혀 강제노역하던 319명의 소련군 포로가 죽어 도시의 동부 베헤라우마(Vähärauma)지역에 묻혔다.

포리는 1966년 시작된 국제재즈음악 축제로 유명하다. 오늘날 이 축제는 유럽에서 가장 큰 재즈 페스티벌 중 하나이며 핀란드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다. 축제는 매년 7월에 9일 동안 열린다. 도시 주변엔 여러 콘서트 공연장이 있다. 키르유린루오토 아레나(Kirjurinluoto Arena)가 그중 하나로 30,000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다.

관광 명소들도 많다. 사타쿤타 (Satakunta) 박물관은 1888년에 설립된 핀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박물관 중 하나다. 이 박물관은 1973년 완성됐다. 포리 현대미술관은 1979년 문을 열었다. 위테리(Yyteri) 해변은 도심에서 17km 떨어져 있다. 6km 길이의 해변은 발트해에서 가장 큰 해변 중 하나다. 일부는 유니섹스 나체주의자 해변으로 지정됐다. 위테리의 관광 시설로는 호텔, 스파, 캠핑, 캐러밴 공원 및 골프 코스가 있다. 이곳은 윈드서퍼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레포사리(Reposaari)섬은 위테리에서 약 10km 떨어져 있다. 레포사리는 목조 건물이 많고 주민은 1,000명 정도다. 이 섬에는 교회, 선착장, 호스텔, 캠핑장, 레스토랑 등이 있다. 키르유린루오토(Kirjurinluoto)는 코케메엔요키 강 삼각주에 있는 섬으로 공원이 있다. 강의 남쪽에는 19세기초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보인다.

1841년에 건축된 시의 구청사는 화재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건물 중 하나다. 성 요한에게 헌정된 그리스 정교회 건물은 가장 주목할 만한 교회다. 울빌라에서 10km 떨어진 곳에는 18세기 레이네페리(Leineperi)제철소가 있다. 노르마르쿠에 있는 빌라 마이레아(Villa Mairea)는 핀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알바르 알토가 디자인한 건물이다. 전세계적으로 현대 건축물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3]

울빌라[편집]

울빌라는 핀란드 서부 사타쿤타주에 있는 소도시로 핀란드의 6대 중세 도시 중 하나다. 1365년 부여된 도시 지위를 1558년 잃었다가 2000년 다시 찾았다. 인근 해안엔 북유럽에서 가장 긴 모래사장이 있다. 6km나 되는 이 모래사장엔 누드촌도 있다. 핀란드 유일의 마우솔레움(거대 기념묘)이 있고, 동쪽 지역에 있는 카스마르쿠는 2005년 사타쿤타주 올해의 마을로 선정됐다.

울빌라의 인근 해안에 있는 위테리는 6km나 뻗어 있는 해변으로 인근 지역뿐 아니라 핀란드에서 여름에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해변 길이는 핀란드뿐만 아니라 북유럽에서 가장 길다. 바람으로 운반된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언덕인 사구 규모는 유럽을 통틀어 가장 크다. 해변 한가운데엔 수 백m에 이르는 누드촌이 있다.

위테리에는 스파, 호텔, 레스토랑 등 위락시설을 비롯해 골프, 서핑, 비치볼, 자전거타기 등 야외활동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30km에 이르는 하이킹 코스도 있다.

율리세우스 마우솔레움(Mausoleum, 거대 기념묘)은 핀란드 유일의 마우솔레움으로 1903년 완공됐다. 마우솔레움은 생전에 유명했던 사람의 거대한 묘를 가리킨다. 이 명칭은 기원전 4세기경 오늘날 터키의 아나톨리아(소아시아)의 헬리카르나소스에 건조된 카리아의 총독 마우솔러스를 위한 거대 무덤 마우솔레이온에서 유래했다. 마우솔레이온은 거대한 규모와 화려하고 정교한 구조 때문에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힌다. 현존하는 마우솔레움으로 유명한 것이 인도의 타지 마할 묘다.

핀란드에서 관광명소로 손꼽히는 율리세우스 마우솔레움을 지은 사람은 사업가였던 프리츠 율리세우스로, 그의 딸 시그리드가 잠들어 있다. 지하실에 있는 시그리드의 석관은 1층에서 관람할 수 있다. 율리세우스 자신도 묘 안에 묻혔다. 그러나 두 명의 부인 무덤은 묘 바깥에 있다.

울빌라 동부 지역엔 카스마르쿠라는 시골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2005년 사라쿤타주의 올해 마을로 선정됐다. 카스마르쿠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250년이다. 1590년에 작성된 문서에 따르면 카스마르쿠엔 4개의 농장이 있었는데, 이 중 하나가 울빌라 교구 목사가 사는 거처로 사용됐고, 나머지 3개는 나라가 사들여 군인들 막사로 만들었다. 1860년엔 유호 뉘스트룀이란 사업가가 모직 공장을 세워 운영했다. 여기서 만들어진 의류는 1926년까지 러시아 군대에 납품됐다.[4]

캉카안페[편집]

캉카안페는 핀란드 남서부 사타쿤타주에 있는 도시다. 16세기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도시가 된 것은 1972년이다. 1930년대 철도 건설과 군대 배치를 계기로 캉카안페가 지역 중심지로 떠올랐다. 왕의 샘물, 1839년에 완공된 목조교회 등 유적지가 많아 관광산업이 발달했다.

캉카안페에서는 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됐지만 영구 정착지가 생겨난 것은 동쪽 지역에 10개 가옥이 지어진 16세기였다. 17세기엔 인구가 크게 늘지 않았지만 18세기에는 사타쿤타 북부의 다른 곳처럼 급증세를 보였다. 1805년 2,028명이던 캉카안페의 인구는 1850년 2배가 넘는 4,568명에 달했다. 1930년대 철도 부설과 수비대 배치를 계기로 캉카안페는 지역 서비스 중심지로 떠올랐다. 캉카안페는 1972년 도시가 됐다.

헤멘퀴뢰로부터 능선을 지나 카우하요키에 이르는 도로는 이 지방에서 최초로 개설됐다. 17세기에 이 도로는 남부 핀란드와 오스트로보트니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길이었다. 캉카안페를 방문한 스웨덴 국왕은 2명이었다. 구스타프 2세는 1641년 일마요키에서 캉카안페를 거쳐 헤멘린나까지 여행했다. 프레드릭 국왕도 1752년 캉카안페를 지나가다 한 샘물에 들러 말에게 물을 먹이고 식사를 했다. 이 샘물은 그 후 쿠닝카안레흐데, 즉 왕의 샘물로 명명됐다. 현재 샘물 근처엔 야외수영장을 비롯해 여러 오락 시설이 건설돼 있다.

20세기 초 핀란드 내전 중 백군의 포리 연대의 본부가 캉카안페에 있었지만 큰 시가전은 없었다. 한때 캉카안페는 인근의 파르카노, 예미예르비와 합병 논의가 있었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됐다.[5]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사타쿤타 지역〉, 《위키백과》
  2. 사타쿤타〉, 《나무위키》
  3. 유럽지명사전 : 핀란드 포리〉, 《네이버 지식백과》
  4. 유럽지명사전 : 핀란드 울빌라〉, 《네이버 지식백과》
  5. 유럽지명사전 : 핀란드 캉카안페〉,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북유럽 같이 보기[편집]

북유럽 국가
북유럽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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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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