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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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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申潤福)은 조선 영조, 정조 시기의 화가이며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 3대 풍속화가'로 불린다.

개요[편집]

  • 신윤복은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이다. 양반층의 풍류와 남녀 간의 연애, 기녀와 기방의 세계를 도시적 감각과 해학으로 펼쳐 보였다. 가늘고 유연한 선과 원색의 산뜻하고 또렷한 색채사용, 현대적인 구도와 독특한 상황 설정으로 조선시대 풍속화의 영역을 보다 다채롭게 넓혀 주었다. 신윤복은 1758년(영조 34)에 태어났다. 부친 신한평(申漢枰)과 조부 역시 도화서 화원으로, 특히 신한평은 영조와 정조의 어진 제작에 참여했으며 초상화뿐 아니라 산수화와 화조화에 뛰어났다. 신윤복은 집안의 대를 이어 어려서 그림에 입문해 화원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극히 일부만 전해질 뿐 거의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남녀 간의 춘정을 즐겨 그린다는 이유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고 전한다. 신윤복은 김홍도(金弘道), 김득신(金得臣)과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풍속화가로 지칭된다. 그는 풍속화 외에도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산수(山水)와 영모(翎毛) 등에 재능을 보였다. 일찍이 아버지의 화법을 익혔고, 선배 화원이자 당시 천재성을 인정받았던 김홍도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의 그림과 글씨를 보면 서체나 수파묘(水波描), 하엽준법(荷葉皴法) 등에서 김홍도의 화풍이 변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 아래에서도 신윤복은 자신의 화풍을 개척하여 김홍도와 쌍벽을 이루는 독특한 풍속화를 발전시켰다.[1]
  • 신윤복은 조선 후기 풍속 화가로 자는 입부(笠父), 호는 혜원(蕙園),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중인(中人)출신의 화가 집안으로 부친은 신한평 (申漢枰) 모친은 홍천피씨(洪川皮氏)이다. 신윤복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몹시 희귀하여 관찬문서나 개인 문집류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우나 그에 관한 기록과 연구를 종합하면 신윤복 부자(父子) 모두 회화를 관장하는 국가기관인 예조 산하의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이라는 것과 첨사(僉使)벼슬을 한 혜원은 너무 비속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난 후 직업화가로서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등의 내용이며 부인이나 후손 등에 관한 것은 전혀 알 수 없다. 혜원의 아버지 신한평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바, 임금의 초상인 어진제작과 기년(1774)이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광사(李匡師) 70세 초상』과 같은 명품과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화조도』와 간송 미술관에 소장된 『자모육아(慈母育兒)』와 같은 풍속화가 있어 혜원을 연구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림에는 젊음이 있고 은은한 남녀의 정이 깔려 있다. 그림의 주제가 선명하여 보는 이에게 내용 전달이 직선적이다. 오늘날에 보기에도 낯 붉어질 내용들도 없지 않으나, 화가는 천재성을 발휘하여 승화된 아름다움으로 이를 고양시키고 있다. 농염한 중에도 절제가 있고 과감한 노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자연스레 보이게 하는 구도의 묘가 있다. 그는 산수·인물·동물 등 여러 분야에 두루 능한 직업 화가이로되 시문에도 조예가 있고 서예에도 뛰어 났으며 그가 추구한 그림세계는 이른바 동시대 여항문학인들의 사장(詞章)에 필적하는 어엿한 세계임을 엿보게 하며 진경시대 문화의 낭만상을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전해준다.
  • 신윤복은 조선 후기의 관료이자 화가로서, 산수화와 풍속화를 잘 그렸다. 또한 양반 관료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풍자한 그림, 여성들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출생지는 미상이다. 화공 가문 출신으로 화원 신한평의 아들이며, 그 역시 도화서 화원으로 종삼품 서반 무관(武官)인 첨절제사를 지냈다. 본관은 고령, 자는 입부(笠父), 덕여(德如)이고, 아명(兒名)은 신가권(申可權), 호는 혜원(蕙園)이다. 대표작은 미인도(美人圖)·단오도(端午圖) 등이 있다. 그는 조선 전기 시대의 문신 겸 학자였던 신말주의 후손이고, 일제강점기의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의 8대 방조가 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미인도(美人圖)》 등이 있다. 주로 남녀 간의 사랑이나 여성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그림을 많이 그렸다. 화려한 색을 사용하여 기생이나 무당의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시골 주막의 서민적인 풍속 또한 날카로운 화필로 잘 그려냈다. 이러한 그림들은 양반 사회에 대한 풍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에는 〈단오도(端午圖)〉, 〈연당(蓮塘)의 여인(女人)〉, 〈무무도(巫舞圖)〉, 〈산궁수진(山窮水盡)〉, 〈선유도(船遊圖)〉 등이 있고, 《미인도》와 《풍속화첩》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유교적 도덕관념이 강했던 시기에 양반들을 풍자하였으면서도 자신의 실명과 낙관을 밝히는 파격적이고 대담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처벌받지 않았고, 그는 자유분방한 예술세계를 구사할 수 있었다.[2]
  • 신윤복은 조선 후기 「미인도」, 「단오도」, 「선유도」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이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입보(笠父), 호는 혜원(蕙園). 화원(畵員)이었던 한평(漢枰)의 아들이다.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으로 벼슬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풍속화를 비롯하여 산수화와 영모화에도 능했다. 산수화에서 김홍도(金弘道)의 영향을 토대로 참신한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 간의 낭만이나 애정을 다룬 풍속화에서 특히 이름을 날렸다. 그의 풍속화 등은 소재의 선정이나 포착, 구성 방법, 인물들의 표현 방법과 설채법(設彩法) 등에서 김홍도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는 남녀 간의 정취와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래서 그의 풍속화들은 매우 세련된 감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또한 그의 풍속화들은 배경을 통해서 당시의 살림과 복식 등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등,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전하여 준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에는 짤막한 찬문(贊文)과 함께 자신의 관지(款識)와 도인(圖印)이 곁들여 있다. 하지만 한결같이 연기(年記)를 밝히고 있지 않아 그의 화풍의 변천 과정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개척하였던 대표적 화가로서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작가 미상의 풍속화와 민화 등에는 그의 화풍을 따른 작품들이 많다. 대표작으로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와 『풍속화첩』이 있다. 『풍속화첩』에 수록된 주요 작품으로 「단오도(端午圖)」·「연당(蓮塘)의 여인(女人)」·「무무도(巫舞圖)」·「산궁수진(山窮水盡)」·「선유도(船遊圖)」 등이 있다.[3]

신윤복의 생애[편집]

  • 신윤복은 영조 34년(1758년)에 아버지 신한평과 어머니 홍천 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정확한 생일은 전하지 않는다. 어렸을 적의 이름은 가권(可權)이며 뒤에 윤복으로 개명하였는데, 그의 본명이 가권(可權)으로 밝혀진 것은 그가 그린 유명한 미인도(간송미술관 소장)에서 신가권이라는 도서가 찍힌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아래로 남동생 신윤도(윤수)와 여동생이 1명 더 태어났다.
  • 신윤복은 신숙주의 방계 후손으로, 암헌공 신장(申檣)의 다섯째 귀래정 신말주의 손자였던 신공섭의 다섯째 아들인 신수진의 7세손이었다. 그러나 신수진이 서자였기에, 그의 후손들은 중인(中人)의 신분으로 낮아져 수십 명의 역관과 율관, 운관으로 활동했고, 신세담ㆍ신일흥ㆍ아버지 신한평 같은 화원들이 나왔다. 그의 가계도 20세기 이후에야 몇몇 문헌을 통해 알려졌는데, 이는 그가 서자의 후손이라서 족보에서 생략되어왔기 때문이다. 그의 종조부 신일흥과 종증조부 신세담은 도화서의 화원이었으며, 아버지 신한평도 도화서의 화원으로 영조의 어진을 두 번이나 그릴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정조 초기에 와서 그가 그린 그림 중 한 그림이 알아볼 수 없다 하여 관료들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기도 했으며, 관직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고, 산수·인물·초상·화훼를 잘 그렸다.
  • 신윤복은 아버지 신한평의 영향을 받은 신윤복도 도화서의 관원이 되는데 관직은 첨정과 첨절제사에 이르렀다. 인물화와 풍경화 외에도 많은 양의 풍속화를 남겼는데, 그중에는 양반의 위선적인 태도와 이중 잣대를 풍자하고 부녀자들의 자유연애와 애환을 묘사했으며 해학이 담긴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1800년 정조 사후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사라지면서 그의 작품활동도 쇠퇴기에 접어든다. 그가 남긴 작품은 1813년의 작품까지 전해지는데, 대략 1813년 이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정확한 사망일과 사망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신윤복의 풍속화 기법[편집]

  • 신윤복은 소재 선정부터 필법과 구성, 색채 표현에서 김홍도와 큰 차이를 보인다. 김홍도가 소탈함과 익살이 깃든 서민층의 풍속을 다룬 것에 반해, 신윤복은 양반층의 풍류나 남녀 간의 연애, 향락적인 생활을 주로 그렸다. 김홍도는 선이 강하고 빠른 반면 신윤복의 선은 가늘고 유연하다. 김홍도는 주제를 살리기 위해 배경을 생략하는 구성을 즐겼지만, 신윤복은 오히려 치밀한 주변 배경 묘사로 주제를 부각시켰다. 채색도 엷은 갈색으로 되도록 절제한 김홍도에 비해 신윤복은 부드러운 담채 바탕에 빨강, 노랑, 파랑의 산뜻하고 또렷한 원색을 즐겨 사용했다.
  • 신윤복의 풍속화는 무엇보다도 남녀의 애정행각을 다룬 에로틱한 표현의 춘의도가 많다. 이는 조선 시대 성리학 이념의 폐쇄적 굴레에 반하는 획기적인 일로 그는 양반귀족들의 위선과 불륜을 대담하게 파헤치고 풍자하면서 인간의 본질적이고 은폐되었던 면을 화폭에 담아냈다. 또한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존재감을 얻지 못했던 여성들을 작품에 등장시키고, 더욱이 조선시대 가장 천한 신분에 속했던 기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기방(妓房)이나 여속(女俗)에 대한 관심을 고도의 회화성으로 끌어올렸다. 신윤복이 이러한 풍속화를 그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로 이어지는 시대 변화와 다양한 후원자들의 도움이 컸다. 조선 후기 서민 지주들은 초기 상업화 과정에서 경제력을 축적하여 양반 못지않게 생활 저변을 확대시킬 수 있었다. 이들은 전통 사대부와는 다른 취향을 가지고 풍속화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신윤복은 양반 사대부의 고리타분한 체면 문화에서 한 발 물러나 자신이 걷고자 하는 길을 걸었다. 더군다나 제도권에서 쫓겨나면서 더욱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소재에 몰입할 수 있었다.
  • 신윤복은 풍속화를 통해 시대를 고발하거나 비판하기보다 현실을 긍정하고 낭만적인 풍류와 해학을 강조했다. 그는 당시 봉건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남녀 간의 성 풍속을 과감하게 화폭에 보여줌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조선 시대 사회풍속의 숨겨진 이면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풍속을 도회적인 세련된 감각과 섬세한 필치로 형상화하여 조선 시대 풍속화의 영역을 보다 다채롭게 넓혀 주었다. 그의 작품은 미술사 연구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생활사와 복식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국보 제135호로 지정된 『혜원풍속화첩(혜원전신첩)』(18세기 말~19세기 초)이 전해진다. 《단오풍정》, 《월하정인》,《봄나들이》, 《뱃놀이》 등 신윤복의 풍속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들로 모두 30여 점으로 구성된 이 화첩은 간송미술관 소장품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 전시를 통해 외국에도 잘 알려진 그림이다. 이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탄금(彈琴)》 등 6점으로 된 화첩 또한 명품이다. 아울러 초상기법으로 그린 《미인도》(19세기 초)는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 걸작으로 손꼽힌다.

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편집]

  • 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申潤福 筆 風俗圖 畵帖)은 조선 후기 화가 신윤복이 그린 풍속도 화첩이다. 1970년 12월 3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 화가 혜원(蕙園) 신윤복이 그린 풍속도 화첩이다. '혜원풍속도(蕙園風俗圖)', 혹은 '혜원전신첩(惠園傳神帖)'이라 불린다. 이 화첩은 총 30장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기는 가로 35.2㎝, 세로 28.2㎝이며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그림에 대한 짧은 묘사나 낙관이 곁들였다. 작품은 주로 조선 후기 풍속을 그렸는데, 기생이 등장하여 남녀 간의 춘정(春情)을 그린 경우가 많다. 이 밖에 양반의 위선을 꼬집고 조선 사회를 풍자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화첩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필선으로 인물을 그린 후에 옅은 채색이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그림에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의 서울 시정(市井)의 유흥과 향락의 분위기가 짙게 반영되어 있다. 아울러 양반 관료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풍자한 그림, 일반 여성과 기생들의 생활상을 반영한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
  • 신윤복은 조선 후기의 화가로서 산수화와 풍속화를 잘 그렸다. 화원화가였던 신한평의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도화서 화원으로 종삼품 서반 무관(武官)인 첨절제사를 지냈다. 본관은 고령, 자는 입부(笠父), 덕여(德如)이고, 아명(兒名)은 신가권(申可權)이다. 신윤복의 풍속화풍은 조선 말기 활동했던 화원화가인 유운홍(劉運弘)과 유숙(劉淑)에게로 전승되었다. 본 화첩은 한때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을 1930년 전형필이 일본 오사카[大阪]의 고미술상에서 구해서 국내에 들여왔다. 이때 오세창이 표제와 발문을 썼다. 신윤복의 풍속화는 남녀 간의 춘의(春意)와 당대의 풍속을 대담하게 그리되 아름다운 채색과 유려한 선묘로 예술적 승화를 이루었다. 당대의 조류와 사회적 분위기를 잘 재현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 의의가 높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신윤복(申潤福,1758~?)〉, 《두산백과》
  2. 신윤복〉, 《위키백과》
  3. 신윤복 (申潤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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