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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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턴(Trenton)은 미국 뉴저지주의 주도이며 머서 카운티(Mercer County)의 군청소재지이다. 인구는 약 9만 명이며 주에서 10번째로 인구가 많은 지방자치단체이다. 트렌턴은 1784년 11월 1일부터 12월 24일까지 미국의 수도였다.[1]
개요[편집]
트렌턴은 뉴저지주 중서부, 펜실베니아주의 필라델피아 북동쪽 45km 지점에 위치한 델라웨어강 연안의 하항이다. 북동쪽으로 약 95km 거리에 뉴저지주 최대의 도시인 뉴어크(Newark), 약 106km 떨어진 곳에 미국 최대의 항구도시인 뉴욕(New York)이 있다. 1679년 영국인 메일런 스테이시(Mahlon Stacy)와 퀘이커교도가 처음으로 정착했으며, 1719년 필라델피아의 상인 윌리엄 트렌트(William Trent)가 스테이시의 아들로부터 토지를 매입하여 마을을 세웠다. 처음에는 폴스라고 불리다가 그후 스테이시스밀스로, 1721년에는 트렌트를 기념하여 현재의 지명으로 개칭하였다. 1776년 12월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군대를 이끌고 얼어붙은 델라웨어강을 건너 다음날 아침 독일 용병과 영국 연합군의 군대를 기습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트렌턴은 1784년과 1799년 임시 연방 수도가 되었고, 1790년 뉴저지주의 주도가 되었다. 미국독립혁명을 기념하여 꼭대기에 워싱턴 조상(彫像)이 있는 47m의 화강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830년대 델라웨어-래리턴 운하와 캠던-앰보이 철도가 완공되면서 공업이 발달했다. 요업은 식민지 시대부터 성하였으며 현재는 와이어로프, 식품가공, 인쇄, 고무, 플라스틱, 금속세공, 전기, 약품, 섬유 산업 등이 성하다. 1번과 206번 U.S.고속 도로, 31번, 29번, 32번, 33번 주립 고속도로 등이 지나며, 295번 주간 고속도로가 지난다. 북서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곳에 트렌턴 머서 공항(Trenton-Mercer Airport)이 있다. 트렌턴 근처에는 맥가이어 공군 기지와 미국 육군 시설인 포트 딕스가 자리잡고 있다. 가볼 만한 명소로는 금도금 돔으로 된 주의회 의사당(1792), 1758~1759년에 일어난 프렌치-인디언전쟁 때 세워졌던 올드배럭스박물관, 조지 워싱턴이 1777년 프린스턴 진격을 계획했던 더글러스하우스(1766), 윌리엄 트렌트의 저택인 트렌트하우스(1719), 뉴저지 주립박물관(1895)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트렌턴주립대학(1855), 라이더지역사회대학(1865), 토머스 에디슨 주립대학(1972) 등이 이곳에 있다.[2]
역사[편집]
오늘날 트렌턴 지역의 가장 초기에 알려진 거주자들은 레나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다. 트렌턴이 된 최초의 유럽인 정착지는 1679년 퀘이커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당시 영국 셰필드주 핸즈워스 출신의 말론 스테이시가 이끄는 델라웨어 폭포라고 불리는 지역에 세워졌다. 이 시기 영국에서는 퀘이커교도들이 박해를 받고 있었고 북미는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식민지 시절에는 뉴욕과 필라델피아 사이의 여정을 잇는 거점이었다.
1719년, 그 마을은 스테이시의 가족으로부터 주변 토지의 대부분을 구입한 주요 지주 중 한 명인 윌리엄 트렌트(William Trent)의 이름을 따서 트렌트 타운(Trent-towne)이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이 이름은 나중에 트렌턴(Trenton)으로 짧아졌다.
1764년 1월 19일, 식민지의 우체국장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뉴저지 헌터던 카운티 민병대의 중령이자 트렌턴의 유명한 상인인 에이브러햄 헌트(Abraham Hunt)를 도시의 첫 우체국장으로 임명했다. 헌트는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775년 10월 13일 다시 트렌턴의 우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 동안 트렌턴은 트렌턴 전투의 장소였다. 1776년 12월, 조지 워싱턴이 트렌턴 근처의 델라웨어강을 건넜으며, 그 후에 일어난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고용된 독일의 직업 군대 헤센군을 물리쳤다. 두 번째 트렌턴 전투인 아순핑크 크릭 전투(Battle of the Assunpink Creek )가 1777년 1월 2일 이곳에서 벌어졌다. 꼭대기에 조지 워싱턴 동상이 있는 46m 높이의 화강암 기둥인 트렌턴 전투 기념비(Trenton Battle Monument) 는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893년에 세워졌다.
1784년 11월부터 12월까지 미국의 수도였다. 1790년에 뉴저지주의 주도가 되었고, 1792년 도시로 번영하였다. 1800년대에 와서 트렌턴은 무역과 산업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철도가 함께 놓이면서, 강 교통이 발달하여 도시의 산업을 빠르게 번창시켰다. 수천명의 공장 근로자들이 트렌턴으로 이주하면서, 1880년부터 1920년까지 인구가 약 90,000명으로 늘어났다. 1920년에 와서 도예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그 후에는 많은 주민들과 큰 기업들이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다가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는데, 1970년대와 1980년대 사이에 주정부가 트렌텐에 수많은 건물들을 세웠다.
1968년 폭동[편집]
1968년의 트렌턴 폭동(Trenton Riots of 1968)은 4월 4일 멤피스에서 시민권 지도자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가 암살된 후 일주일 동안 일어난 주요한 시민 소동이었다. 시민권 운동가가 살해된 후 미국에서 전국적으로 인종 폭동이 일어났다. 대부분 다운타운에 있는 200개 이상의 트렌턴 사업장들이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 대부분 젊은 흑인 남성인 300명 이상이 폭행, 방화, 약탈, 시장의 긴급 통금 시간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부상당한 경찰 16명 외에도 소방관 15명이 거센 불길을 진압하거나 폭도들에 의해 부상을 입어 시립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지역 주민들은 거짓 경보기를 꺼내 경보기에 반응하는 소방관들에게 벽돌을 던졌다. 이 경험은 다른 주요 도시에서의 유사한 경험과 함께 오픈캡 소방차의 사용을 효과적으로 종식시켰다. 임시 조치로, 트렌턴 소방서는 새로운 장비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 강철 데크 도금으로 임시 캡 인클로저를 제작했다. 시내 기업들이 입은 손실은 당초 시가 7백만 달러로 추산했지만, 보험금 청구와 합의금 총액은 250만 달러에 달했다.
트렌턴의 배틀 모뉴먼트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1950년대 이후 노스 트렌턴은 중산층 주민들이 꾸준히 탈출하는 것을 목격했고, 폭동으로 인해 노스 트렌턴은 종말을 고했다. 1970년대까지 이 지역은 도시에서 가장 황폐하고 범죄에 시달리는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3]
트렌턴 전투[편집]
트렌턴 전투(Battle of Trenton)는 미국 독립전쟁 중 1776년 12월 26일에 뉴저지주 트렌턴에서 벌어진 미국 대륙군과 독일 용병 부대로 구성된 영국군의 전투이다. 델라웨어강 건너편으로 철수했던 조지 워싱턴 장군이 이끄는 대륙군이 악천후 속에서 위험한 도하를 하여 트렌턴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 용병 부대의 주력을 타격을 했다. 전투 자체는 단시간에 끝났으며, 대륙군은 손실을 대부분 입지 않은 반면, 독일 용병 부대의 거의 모든 병력이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의 결과, 위축된 대륙군의 사기는 올라갔으며, 다시 징병도 쉬워졌다.
전투 전까지 미합중국의 사기는 매우 낮았다. 대륙군은 영국군과 독일 용병 연합 부대에 쫓겨 뉴욕에서 뉴저지를 넘어 철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롱아일랜드 전투 시에 있던 대륙군 병사의 90%가 이탈한 상태였다. 독립의 대의를 잃어버린 이들은 탈주를 했다. 대륙군 총사령관의 워싱턴조차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워싱턴은 버지니아의 사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냥감은 바로 근처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편지를 보냈다. 뉴저지 서쪽 당시 작은 마을이었던 트렌턴은 요한 랠 대령이 이끄는 독일 용병 부대 3개 연대, 1,400여명으로 점거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워싱턴 군은 2,400명이었다.
대륙군은 그때까지 뉴욕에서 몇번이고 패배를 했으며, 뉴저지를 빠져나와 펜실베이니아까지의 철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군대의 사기는 떨어졌으며,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작전을 벌일 필요성을 절감했던 총사령관 워싱턴은 크리스마스 밤에 델라웨어강을 건너 독일 용병 부대를 포위하는 전략을 고안했다.
강은 에일 듯 차가웠으며, 도하도 위험한 상태였다. 세 개로 나눈 부대 중 2개는 도하를 하지 못했고, 워싱턴은 2,400명의 부대만으로 공격에 나섰다. 대륙군은 도하 지점에서 14km 남쪽으로 행군하여 트렌턴으로 향했다. 여기서 독일 용병부대는 방심하다가 패했다고 잘못 알려져있지만 사실은 며칠전부터 공격을 예상했다. 또한 워싱턴의 부대가 도하하는 것을 보고 준비를 하고 맞섰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했다. 훗날 독일군은 군법으로 장교들을 처벌하지만 처벌한 이유는 "싸우지 못해서"가 아니라 왜 뻔히 패배할수 밖에 없는 상황에 후퇴를 하지 않았냐는 이유였다.
이 전투 자체는 소규모였지만 식민지 땅에서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불과 일주일 전에는 혁명 자체가 의심되었으며, 군대는 붕괴 직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병사들은 군대에 머물게 되었으며, 신병도 모집되고 있었다.[4]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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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트렌턴 (뉴저지주)〉, 《위키백과》
- 〈트렌턴 전투〉, 《위키백과》
- 〈트렌턴〉, 《요다위키》
- 〈트렌턴(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