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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보전·무량수전·무량전·보광명전(보광명전)·아미타전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극락정토 신앙이 강하여 내부 구조는 대웅전만큼이나 화려하다.
 
극락보전·무량수전·무량전·보광명전(보광명전)·아미타전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극락정토 신앙이 강하여 내부 구조는 대웅전만큼이나 화려하다.
  
== 관음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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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음전 ===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법당으로, 사찰의 주불전(主佛殿)인 경우에는 원통전(圓通殿)이라고 한다. 원통전이란 명칭은 관세음보살이 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圓融通)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소멸해 주기 때문에 그 권능과 구제의 측면을 강조하여 원통전이라 한 것이다. 반면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부불전의 성격을 띨 경우에는 관음전이라 한다.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법당으로, 사찰의 주불전(主佛殿)인 경우에는 원통전(圓通殿)이라고 한다. 원통전이란 명칭은 관세음보살이 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圓融通)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소멸해 주기 때문에 그 권능과 구제의 측면을 강조하여 원통전이라 한 것이다. 반면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부불전의 성격을 띨 경우에는 관음전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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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에서 유래한 칠성신을 모신다. 칠성신은 옛날부터 우리나라 민간에서 재물과 재능을 주고 아이들의 수명을 늘려주며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는 신으로 믿어왔다. 이 칠성신이 불교에 흡수되면서 처음에는 사찰의 수호신으로 자리 잡았다가 점차 본래의 기능을 되찾아 별도의 전각인 칠성각에 모셔지게 되었다. 정면 1~2칸, 측면 1칸으로 대부분 규모가 작지만, 삼성각이라고 해서 칠성신을 산신·독성과 함께 모실 때는 칠성만을 모시는 전각보다 크게 짓기도 한다.
 
도교에서 유래한 칠성신을 모신다. 칠성신은 옛날부터 우리나라 민간에서 재물과 재능을 주고 아이들의 수명을 늘려주며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는 신으로 믿어왔다. 이 칠성신이 불교에 흡수되면서 처음에는 사찰의 수호신으로 자리 잡았다가 점차 본래의 기능을 되찾아 별도의 전각인 칠성각에 모셔지게 되었다. 정면 1~2칸, 측면 1칸으로 대부분 규모가 작지만, 삼성각이라고 해서 칠성신을 산신·독성과 함께 모실 때는 칠성만을 모시는 전각보다 크게 짓기도 한다.
 
남극노인성 등 하늘의 천체와 관련있는 신들이 나오는 경우가 흔하다. 전각의 명칭칠성(칠성)은 구체적으로는 탐랑·거문·녹존·문곡·염정·무곡·파군의 일곱 별로, 각각 부처로 바뀌어 칠 여래가 되는데. 예를 들면 제칠파군성군약사유리광여래는 칠성 중 파군이 여래로 바뀐 것이다.
 
남극노인성 등 하늘의 천체와 관련있는 신들이 나오는 경우가 흔하다. 전각의 명칭칠성(칠성)은 구체적으로는 탐랑·거문·녹존·문곡·염정·무곡·파군의 일곱 별로, 각각 부처로 바뀌어 칠 여래가 되는데. 예를 들면 제칠파군성군약사유리광여래는 칠성 중 파군이 여래로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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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 ==
 
== 문화재 ==
 
대한민국의 보물 4점과 전라남도도 지정 유형 문화재 5점, 불교회화, 조각, 공예품 등 약 1천 8백여점의 문화재를 보유한 성보박물관이 2001년에 개관되었다.[2] 보물 제395호로 지정된 선암사 3층석탑과, 보물 400호로 지정된 절 입구의 무지개다리 승선교(昇仙橋)와 강선루(降仙樓), 불교 사상을 구현한 독특한 양식의 연못인 삼인당(三印塘)도 유명하다. 그 외 선암사 금동향로(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호) 등이 있다.
 
대한민국의 보물 4점과 전라남도도 지정 유형 문화재 5점, 불교회화, 조각, 공예품 등 약 1천 8백여점의 문화재를 보유한 성보박물관이 2001년에 개관되었다.[2] 보물 제395호로 지정된 선암사 3층석탑과, 보물 400호로 지정된 절 입구의 무지개다리 승선교(昇仙橋)와 강선루(降仙樓), 불교 사상을 구현한 독특한 양식의 연못인 삼인당(三印塘)도 유명하다. 그 외 선암사 금동향로(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호) 등이 있다.

2023년 1월 3일 (화) 17:45 판

선암사(仙巖寺) 전경
선암사-일주문
선암사-승선교
선암사 - 대웅전
뒤깐
삼인당
원통각
각향전
선암사-동·서삼층석탑
범종각
강선루
응진당
팔상전
설명
부도탑

선암사(仙巖寺)는 전라남도 순천시조계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한국불교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개요

선암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曹溪山) 동쪽 기슭에 있는 절이다. 현재 한국불교태고종의 유일한 수행 총림이다. 진입로는 경사도 완만하고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아름다운 운치있어서 사찰보다 진입로를 더 좋아하는 방문객들도 있다. 그리고 다른 산 속의 절들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오히려 선암사의 진입로는 다른 절에 비하면 적당한 편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2018년 6월 30일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이 신청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우리나라가 등재 신청한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이다

문화재 설명

선암사는 신라시대 아도화상의 '비로암' 창건설과, 도선국사 창건설을 가진 사찰로서,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중창되면서 천태종 전파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경내에는 대각국사의 부도로 추정되는 보물 '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 등 보물 14점을 비롯하여 다수의 중요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역사적·학술적으로 가치가 크다.

또한 한국의 다양한 불교신앙이 산사의 경내에 수용되었으며, 이는 역사적인 구조물과 전각, 유물, 문서 등에 잘 남아있다. 사찰 운영에서 나타나는 자립성과 승려교육, 한국 선불교의 특징인 영적 수행과 교리 학습의 공존 등의 지속적인 전통에서 한국 불교의 무형적, 역사적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조선시대 억압과 전란으로 인한 손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신앙과 일상적인 종교적 실천의 살아있는 중심으로 남아있는 신성한 장소임을 인정받아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대흥사와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2018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역사

백제 성왕 5년(527) 현재의 비로암지에 초창주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처음 사찰을 창건하였고, 산 이름은 청량산(淸凉山), 사찰 이름은 해천사(海川寺)라 하였다.

신라 말 이창주인 도선국사가 현 가람 위치에 절을 중창하고 지금까지 쓰이는 이름 선암사로 지었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으며, 지금도 이들 중 1철불 2보탑 3부도가 전한다.

고려 중기 삼창주인 대각국사 의천이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다. 대각국사는 천태종을 널리 전파하였고 선암사는 호남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에 의하면 당시의 중창은 법당 13, 전각 12, 요사 26, 산암 19개 소등의 방대한 규모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김극기(1171-1197)는 시에서 "적막하고 고요한 수행의 사찰"이라고 묘사했다.

조선 전기 선암사가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중종 35년(1540) 일주문을 중수했다는 기록만 남았을 뿐이다. 선암사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1597년 정유재란 때 큰 피해를 입었는데 모든 전각이 불에 타고 철불, 보탁, 부도, 문수전, 조계문, 청측만이 남았다고 전한다. 현종 1년(1660) 경준(敬浚), 경잠(敬岑), 문정(文正) 등 세 승려가 대웅전을 세우는 등 8년간 크게 중창했지만 전쟁 이전의 사세를 복구하기에는 무리였다.

선암사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한 이는 호암약휴(護巖若休) 스님이었다. 호암은 승선교를 비롯하여 워통전 불조전 등을 만들었다. 중창 이후 법당 8채, 전사(殿舍) 12차, 중료(中寮) 16채, 산암 13채를 갖추고 선적암(善積菴), 도선암(道詵菴) 등을 부속암자로 두었다. 그러나 영조 35년(1759) 봄에 선암사는 또다시 화재를 만나 큰 피해를 입었다. 상월새봉(霜月璽封) 스님과 서악(西岳) 스님이 이듬해(1760) 재건불사를 시작하였다. 이는 아도화상 이래 도선-의천-경잠-경준-문정-호암의 뒤를 이은 오창(五創)이라 할 수 있다.

상월새봉 스님은 중창불사뿐만 아니라 1734~35년에 두 차례 화엄대법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참가한 1287명의 명단이 선암사 해주록(海珠錄)에 전한다. 그리고 상월스님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1761년 산 이름을 청량산, 사찰명을 해천사로 개칭하였다.

정조 13년(1789)에 임금이 후사가 없자 눌암스님이 선암사 원통전에서 해붕 스님이 대각암에서 백일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 임금이 태어났다. 이후 왕위에 오른 순조 임금은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이라고 쓴 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선암사에 하사하였다.

순조 22년(1798)에는 승중문음(僧中文音)으로 유명한 해붕전령(海鵬展翎)이 칠전(七殿)을 중창하였다. 순조 23년(1823) 3월 30일 실화로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동의 건물이 불에 타자 다음해부터 해붕(海鵬), 눌암(訥庵), 익종(益宗) 스님 등이 6번째 중창불사를 하여 현재의 가람 구조를 갖추었다. 그리고 산명과 사명을 다시 복칭(複稱)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함명태선(涵溟太先)-경붕익운(景鵬益運)-경운원기(景雲元奇)-금봉기림(錦峯基林) 등 4대 명강백을 배출하였다.

1919년 조선총독부가 본발사법으로 전국의 사찰을 30본산으로 지정했을 때 선암사는 전남의 4본산 중 하나로 지정되어 순천, 여수, 광주 지역의 사찰을 관장하였다.

전성기 시절에는 건물 100여 동이 있었으나 여순사건 당시 40여 동이 소실되었고, 남은 건물들도 이후 6.25 전쟁으로 꽤 많이 소실되어 지금은 20여 동만 남았다. 게대가 후술되는 조계종과 태고종과의 갈등으로 지금까지 몸살을 앓고 있지만, 그 갈등 때문에 예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선암사 일원은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7호로 지정되었고, 2018년 6월 30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전각

대웅전

대웅전은 거룩한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법당이란 뜻이다. 자연히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불상이 봉안의 주 대상이 된다. 한편으로는 사바세계의 교주이신 석가모니 부처님 외에 여러 불보살들이 함께 모셔지기도 하는데 그 모시는 상징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석가모니불의 좌우에 염화시중의 미소로 대변되는 가섭과 다문제일의 제자인 아난이 각각 선법과 교법을 상징하며 봉안된다.

둘째, 부처님의 반야지(般若智)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왼쪽에서, 수행과 행원이 원대함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오른쪽에서 모시고 모든 구도자들이 지혜와 행원에 의지하여 해탈의 길로 나가야함을 보여준다.

셋째, 과거의 연등불인 제화갈라보살, 현세의 석가모니부처님, 미래의 미륵보살이 봉안되어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를 통하여 시간을 달리하면서 교화함을 나타낸다.

넷째, 석가모니부처님의 좌우에 조상의 극락왕생과 내생의 행복이 직결되는 아미타불과 고통받는 병자나 가난한 사람을구원하는 자비의 약사여래를 모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대웅전의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 부른다. 이외에도 문수보살 대신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또는 대세지보살의 협시보살로 봉안하는 경우도 있다.

명부전

명부전안에는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며, 지옥계의 심판관인 시왕(市王)을 봉안하기때문에 시왕전(市王殿)이라고도 한다. 시왕은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정하는 10위의 왕으로 진광왕, 초강왕, 송제왕,오관왕, 염라왕, 변성왕, 태산왕, 평등왕, 도시왕, 오도전륜왕을 말한다. 왼쪽에는 오명존자가, 오른쪽에는 무독귀왕이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극락전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다.

아미타불은 한 나라의 임금의 지위와 부귀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비구로서, 여래의 덕을 칭송하고 보살이 닦는 온갖 행을 닦아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을 세웠으며 마침내 아미타불이 되었다. 아미타불은 그 광명이 끝이 없어 백 천억 국토를 비추고,그 수명이 한량이 없어 백 천 억겁으로 셀 수 없다하여 극락전을 무량수전(무량수전)이라고 하며, 주불의 이름을 따라 미타전(미타전)이라고도 한다.

극락보전·무량수전·무량전·보광명전(보광명전)·아미타전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극락정토 신앙이 강하여 내부 구조는 대웅전만큼이나 화려하다.

관음전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법당으로, 사찰의 주불전(主佛殿)인 경우에는 원통전(圓通殿)이라고 한다. 원통전이란 명칭은 관세음보살이 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圓融通)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소멸해 주기 때문에 그 권능과 구제의 측면을 강조하여 원통전이라 한 것이다. 반면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부불전의 성격을 띨 경우에는 관음전이라 한다.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즉 중앙의 아미타불과 좌우의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을 모신다. 관음전 안에는 관음상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양류(煬柳)관음·십일면(十一面)관음·해수(海水)관음·백의(白衣)관음 등을 모신 곳도 있다. 그리고 후불탱화(後佛탱畵)로는 주로 아미타불화로 모신다. 중국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강조하여 대비전(大悲殿)이라는 현판을 걸기도 한다.

조사전

선종 사찰에서 그 종파를 연 조사(祖師)를 봉안한 곳이다. 조사당이라고도 한다. 조사전이 없는 절에서는 영각(影閣)을 짓고, 국사를 배출한 절에서는 대신 국사전(國師殿)을 짓기도 한다. 고려시대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가 국사전을 짓고 16국사의 영정을 모시는 것이 그 예이다. 영각을 지은 사찰은 그곳에 이름 있는 선사의 영정을 모시고 제의를 받는다. 교종이 소의경전에 근거를 두고 있는 데 반하여 선종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심법에 의지하는 바 크다. 때문에 법을 전하는 스승이나 전해 받는 제자나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서로 마음으로 깨달음의 정도와 경계를 증명하고 인증 받아 법을 전한다. 이른 인가(印可)라 한다.

후일에 의발(衣鉢)을 전하는 제도나 인가의 제한이 사라졌지만, 처음에는 한 제자에게만 인가를 하고 그 징표로서 의발을 전하였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생긴 것이 일종일파(一宗一派) 사자상전(師資相殿)의 기풍이며, 이 때문에 문종 스승에 대한 공덕이 깍듯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조사에 대한 존숭을 더하여 부도(浮屠)를 세우고 탑비를 건립하는 외에 사찰 경내에 따로 전각을 지어 영정을 봉안하고 제의를 받들었다. 이렇게 조사를 존숭하기 위한 전각이 바로 조사전이다.

조사전은 사찰 내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살림집에서의 가묘(家廟)나 유교 서원의 후묘선학(後廟先學) 배치법을 따른 것이다. 이는 조령(祖靈)과 생령(生靈)이 한자리에 모여 살고 있음을 표방한 것이며, 후인들이 선인이 가던 길을 따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건축 구조상으로는 한국 사찰에서 보이는 층단식 가람배치에서 가장 깊은 곳은 가장 높은 곳이며, 아래로부터 올라오던 동선이 우주공간으로 승화하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용왕당

사찰에서 용왕 또는 용신을 모셔 둔 사당을 말한다. 사찰에서 용은 주로 법당 안팎에 조각이나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데, 더러는 별도로 단을 두고 상(像)을 만들어 모시기도 한다. 해안이나 섬에 있는 사찰에는 그러한 예가 흔하다. 용은 고대 인도의 사신(蛇神) 신앙에서 발생한 것으로, 불교에 수용된 뒤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으로 자리 잡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불법이 가 나라로 전파되면서 점차 형상이 바뀐 점이다. 특히 발톱의 수가 그렇다. 인도의 용은 발톱이 6개, 중국은 5개, 우리나라는 4개, 일본은 3개이다.

용은 불교 이외에 민간신앙에도 자리 잡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 때 용왕에게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며, 이때 용왕단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나라에서 용왕도량을 열기도 한 고려시대에는 용왕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용왕도량은 3~7일 동안 열리는데, 궁전이나 사찰 또는 선상에서 《운우경(雲雨經)》을 독송하였다고 한다.

사찰에서 불경을 보관하는 건물을 해장각(海藏閣) 또는 해장보각(海藏寶閣)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용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사람들이 불법을 믿지 않을 때가 오면 용왕이 세상의 모든 불경을 용궁에 모아 놓고 지킨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

산신각

산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사찰에 따라서는 산령각(山靈閣)이라고도 부른다. 또 삼성각(三聖閣)을 두어 칠성신·독성(獨星)과 함께 모시는 경우도 흔하다. 본래 산신은 도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많이 듣던 토착신이다. 특히 산지가 70%나 되는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산신신앙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 산신이 불교에 수용되면서 호법신중(護法神衆)의 세계로 들어와 신중탱화의 중단 내지 하단에 자리 잡다가 나중에는 그 기능이 강화되어 단독으로 모셔진다. 그 중에서 산신은 한국 민족 신앙의 주요 대상으로서 우리의 생활공간으로 바짝 다가왔던 토속 신앙이다.

불교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므로 산신도 비교적 일찍 불교에 수용되었을 것을 여겨지나, 산신각이 세워진 것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이다. 대개 전각의 뒤쪽에 세우며, 크기는 정면1칸, 측면 1칸이 보통이다. 산신각 내에는 산신을 그린 탱화를 모시는데 대개 흰 수염, 대머리, 긴 눈썹이 휘날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손에는 하얀 깃털부채나 파초선·불로초 등을 들고 있고 주로 봉래산·영주산·방장산 등의 삼신산을 배경으로 한다.

한라산이나 속리산·계룡산·지리산 등지의 사찰에는 드물게 여자 산신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여자 산신은 트레머리에 댕기를 두르고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다. 호랑이에 걸터앉거나 기대고 있는 모습이며, 손에는 대개 불로초를 들고 있다. 이 밖에 북건(福巾)이나 유건(儒巾)·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지팡이를 든 유교적 산신도 있고, 삭발한 스님이 《묘법연화경》과 같은 불경을 들고 있는 불교식 산신도 흔하다. 이 경우 의상은 가사와 비슷하나 적.녹색이 주류를 이룬다.

칠성각

중앙에 치성광여래(치성광여래)를 두고 좌우에 일광보살(일광보살)과 월광보살(월광보살), 그리고 상단 좌우에 칠 여래, 하단 좌우에 칠원성군이 배치되어 있다. 칠성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제 1성(성)은 자손에게 만덕(만덕)을 주고,
제 2성(성)은 인간의 장애와 재난을 없애주며,
제 3성(성)은 업장을 소멸시켜주고,
제 4성(성)은 구하는 모든 것을 모두 얻게 하며,
제 5성(성)은 일백 가지 장애를 없애주고,
제 6성(성)은 복덕을 두루 갖추게 하며,
제 7성(성)은 수명을 오래도록 연장시켜 준다.

사찰의 전각을 그 중요도에 따라 상단·중단·하단으로 나눌 때 하단에 속하는 전각이다. 도교에서 유래한 칠성신을 모신다. 칠성신은 옛날부터 우리나라 민간에서 재물과 재능을 주고 아이들의 수명을 늘려주며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는 신으로 믿어왔다. 이 칠성신이 불교에 흡수되면서 처음에는 사찰의 수호신으로 자리 잡았다가 점차 본래의 기능을 되찾아 별도의 전각인 칠성각에 모셔지게 되었다. 정면 1~2칸, 측면 1칸으로 대부분 규모가 작지만, 삼성각이라고 해서 칠성신을 산신·독성과 함께 모실 때는 칠성만을 모시는 전각보다 크게 짓기도 한다. 남극노인성 등 하늘의 천체와 관련있는 신들이 나오는 경우가 흔하다. 전각의 명칭칠성(칠성)은 구체적으로는 탐랑·거문·녹존·문곡·염정·무곡·파군의 일곱 별로, 각각 부처로 바뀌어 칠 여래가 되는데. 예를 들면 제칠파군성군약사유리광여래는 칠성 중 파군이 여래로 바뀐 것이다.

문화재

대한민국의 보물 4점과 전라남도도 지정 유형 문화재 5점, 불교회화, 조각, 공예품 등 약 1천 8백여점의 문화재를 보유한 성보박물관이 2001년에 개관되었다.[2] 보물 제395호로 지정된 선암사 3층석탑과, 보물 400호로 지정된 절 입구의 무지개다리 승선교(昇仙橋)와 강선루(降仙樓), 불교 사상을 구현한 독특한 양식의 연못인 삼인당(三印塘)도 유명하다. 그 외 선암사 금동향로(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호) 등이 있다.

순천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

순천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順天 仙巖寺 東·西 三層石塔)은 절 안의 승선교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대웅전 앞에 좌우로 서 있는 2기의 삼층석탑으로 보물 제395호이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규모와 수법이 서로 같아서 같은 사람의 솜씨로 동시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암사 승선교

선암사 승선교(仙岩寺 昇仙橋)는 보물 제400호로, 길이 14m, 높이 4.7m, 폭 4m로 숙종 39년(1713) 호암화상이 6년 만에 완공한 다리이다. 기저부에 별다른 가설이 없고 홍예(虹預) 전체의 문양은 반원형을 이루고 한 개의 아치로 이루어졌다. 다리 중심석 아래에 석재가 조그맣게 돌출되어 있다. 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는 중생들을 보호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선암사 마애여래입상

선암사(仙岩寺)에서 대각암(大覺庵)으로 올라가는 중간의 바위면에 새긴 불상으로, 약 7m 높이의 바위면에 옴폭 들어가게 새겼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솟아 있다. 눈·코·입이 균형 잡힌 얼굴은 원만하며 얼굴에 비해 귀가 크게 새겨져 《법주사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의 귀와 비슷하다.

소유권 분쟁

태고종 본산이지만 조계종에서 재산의 소유권을 가지면서 1960년대 이후 양 측의 갈등이 심해졌다. 심지어 관리 권한은 1970년대부터 순천시에 있는 등 관리 주체가 꼬여 하단의 불상 실종 사태 등 여러 사건 사고들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현재도 사찰의 직접적인 운영은 태고종이, 문화재 구역 입장료 징수는 태고종과 조계종이 공동으로 하는 이원적인 상황이 지속 중이다.

그러다가 결국 순천시가 권리를 반납하면서 태고종과 조계종의 법정 다툼이 벌어졌는데, '태고종 선암사'가 '조계종 선암사'에 재산권을 반환하라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 2011년 2월 “조·태 분규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선암사에 대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불조 혜명을 잇기 위해 분규종식을 선언한다”고 합의하고, 1966년부터 순천시가 가지고 있던 선암사 재산관리권을 인수했다. 양측의 합의로 반세기 넘게 이어져 온 조·태 분규는 사실상 마무리됐으며, 선암사는 조계종과 태고종이 공동 관리하는 형태로 운영되는 듯 했지만, '조계종 선암사'가 순천시를 상대로 실질적 소유자 동의 없이 건립한 '차 체험관'을 철거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양 측의 갈등이 더욱 커졌다.

2014년 1심에서 "태고종의 소유권을 인정한다." 하는 판결이 나왔다. 조계종은 판사가 불교에 대해 이해를 못한다며 반발하여 항소하였다. 이어 2015년 2심에서는 "40년간 태고종이 관리하고, 이후 조계종에 반납한다."라고 화해 권고를 했으나, 양 쪽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라 거절하였다. 결국 해당 소송은 대법원까지 올라갔는데, 2020년 12월 24일 대법원은 '조계종 선암사'의 실체를 사실상 부정하며 파기환송을 시키면서 다시 광주지방법원으로 넘겼다.

이후 2022년 7월 20일 광주지법 대법원 파기환송심 결심 판결에서도 태고종 선암사가 승소했고, 11월 17일 대법원에서 조계종 측 항고를 모두 기각하며 태고종이 최종적으로 승소하였고 선암사에 대한 소유권이 태고종에 있음을 인정하였다.

이와는 별개로 '태고종 선암사'가 '조계종 선암사'를 상대로 낸 '등기말소 소송'에서도 2022년 7월 7일 광주고법은 "토지의 실제 소유주는 태고종 선암사가 맞다" 고 판결했는데, 이로 인해 그동안 갈등을 빚어 온 불교계 두 종단인 태고종과 조계종의 싸움이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템플스테이

  • 휴식형 템플스테이(1박2일) : 바쁜 일상을 내려놓고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며 마음을 쉬어가는 프로그램으로 예불, 공양 시간을 지키며 그 외 경내를 벗아니지 않는 범위에서 기도, 108배, 참선(명상), 갈맷길 걷기, 차담 등의 자율적인 시간을 갖는 것으로 운영된다. 성인 5만원, 중·고등생 4만원, 초등생 3만원, 미취학 무료
  • 당일형 템플스테이 : 내·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 체험 프로그램이다. 3~5시간 동안 진행하며 사찰안내, 발우공양, 다도체험, 숲길걷기, 108배, 연꽃 만들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성인 2만원, 중·고등생 2만원, 초등생 및 미취학 무료

관광팁

한국의 아름다운 사찰을 이야기할 때 순천 선암사를 빼놓을 수 없다. 조계산을 두고 동쪽에 자리한 선암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450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통사찰의 고즈넉함을 간직한 가장 아름다운 사찰 중의 한 곳으로 손꼽힌다. 반대편 서쪽 산 중턱에 자리한 승보사찰 송광사와 쌍벽을 이루는 사찰이다. '뒤'이라고 쓰여진 선암사 해우소(화장실)까지 아름답기로 이름이 높다.

선암사의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첫 상징물은 승선교(昇仙橋)다. 신선이 하늘로 오른다는 다리다. 보물로 지정돼 있는 이 다리는 높이가 7m, 길이가 14m요, 너비가 3.5m다. 길쭉한 화강암을 다듬어 장대석(長臺石)으로 만들어 연결해 반원형의 무지개(虹蜺)다리로 만들었다. 다른 보조장치를 사용하지 않고 아치형으로만 돌을 연결한 정교한 솜씨가 일품이다. 다리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무지개 다리의 부드럽고 둥근 천장모양은 예술작품의 극치를 보여준다. 가히 신선이 다리위로 승천할 것 같은 분위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무지개다리를 중심으로 좌우의 계곡 기슭까지는 둥글둥글한 냇가 돌을 사용해 석벽을 쌓았다. 다리 좌우의 측면석축도 주변의 크고 작은 돌을 올려 짜맞추듯이 쌓아 자연미를 살려 아름다음을 더했다. 무지개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다. 석축에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 돌을 제거하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세운 것으로 알려진 승선교는 1698년(숙종 24) 호암대사(護巖大師)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길 바라며 100일기도를 하며 일어난 설화가 전한다. 호암대사는 자신의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했다. 이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는데 그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圓通殿)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고 선암사 입구에는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승선교를 지나 선암사 입구에는 강선루(降仙樓)가 있다. 신선이 승선교를 통해 승천했다가 강선루에 내리는 형국이다.

6·25 한국전쟁 이전에는 전각 9동을 비롯한 총 65동이나 되는 건물이 있었다. 하지만 전쟁 중에 불타고, 현재는 대웅전, 원통전, 팔상전, 불조전(佛祖殿), 강선루(降仙樓) 등 크고 작은 20여 동의 건물이 남았다. 전쟁의 화마는 선암사를 비켜가지 않았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건물이 있다는 것 만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한다.

보물로 지정돼 있는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팔작(單層八作)지붕으로 조선중기의 건물이다. 지붕면의 정면은 사다리꼴과 직사각형을 합친 모양이고, 옆면은 사다리꼴에 삼각형을 올려놓은 모양으로 전통한옥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대웅전 앞에는 역시 보물로 지정돼 있는 선암사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선암사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또 하나는 고목의 매화들이다. 대웅전 뒤편 고즈넉한 돌담길을 따라 수백 년 된 홍매고목이 이른 봄 꽃망울을 터트리면 선암사를 찾는 상춘객들이 넘쳐난다. 특히 사진작가들에게 선암사 홍매화는 잊을 수 없는 출사지로 손색이 없다.

홍매 뿐만 아니라 선암사 경내 곳곳에는 고령의 동백이 겨울부터 봄까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는데 동백 한 그루에 붉은 동백 뿐만 색깔이 다른 동백이 함께 피고 있어 그 아름다움은 배가된다.

선암사의 야생다원에서 나오는 차의 맛은 차인들에게 익히 알려진 바다. 매년 출시량이 적어 맛을 보기가 힘든 선암사 야생차는 차인들이 그리워하는 차맛이기도 하다. 선암사 선원 안에 자리한 수곽도 차인과 사진작가들에게는 꼭 보고 싶은 모습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이 켜켜이 자리하고 있는 고즈넉한 선암사는 근현대 불교역사에 있어 혼란을 겪고 있지만 정작 선암사의 전각들은 아름다운 자태를 세인들에게 아낌없이 전해주고 있다.

교통안내

자가용의 경우 호남고속도로 승주 나들목에서 빠져나오면 된다.

순천시 시내버스의 경우 순천역 및 순천종합버스터미널을 경유하는 순천 버스 1에 탑승하여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하루에 몇 번 다니지 않아서 시간표 맞추기는 힘들지만, 순천의 다른 관광지인 낙안읍성은 선암사에서 가깝기 때문에 둘 다 볼 관광객이라면 순천 버스 16을 시간표 맞춰서 타면 된다.

송광사와 등산로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자차가 아닌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좀 걸어도 상관없는 사람이라면 송광사로 가서 선암사로 나오거나 그 반대로 가는 일정을 짜는 것도 괜찮다. 등산로라 해도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건 아니고 산중턱을 둘러 가는 길이라 걷기길치고 약간 가파른 정도다.

지도

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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