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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대학교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는 반구대 암각화의 연구와 보존을 위해 2011년 10월 설립되었다. 반구대 암각화와 관련한 연구와 함께, 대한민국 내외의 관련 분야 연구기관과 협력하고 있다. '한국암각화학회'와 공동으로 암각화 학술대회를 꾸준히 열어오고 있다. 연구 성과는 연구서, 조사보고서의 형태로 매년 발간해 대한민국 내외의 연구기관 및 연구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또한 5번의 학술연구총서와 2번의 영문 학술총서를 발간한 바 있다.
 
'울산대학교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는 반구대 암각화의 연구와 보존을 위해 2011년 10월 설립되었다. 반구대 암각화와 관련한 연구와 함께, 대한민국 내외의 관련 분야 연구기관과 협력하고 있다. '한국암각화학회'와 공동으로 암각화 학술대회를 꾸준히 열어오고 있다. 연구 성과는 연구서, 조사보고서의 형태로 매년 발간해 대한민국 내외의 연구기관 및 연구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또한 5번의 학술연구총서와 2번의 영문 학술총서를 발간한 바 있다.
  
== 관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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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람 및 교통 ==
 
울산광역시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348번 버스를 이용하면 갈 수 있는데 하루에 몇 번 안 다니기 때문에 시간표를 맞춰야 하며, 울산역이나 언양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면 환승도 해야 한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린 뒤에도 계곡 안쪽에 있어 자가용을 이용하든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어느 정도는 걸어야 한다.
 
울산광역시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348번 버스를 이용하면 갈 수 있는데 하루에 몇 번 안 다니기 때문에 시간표를 맞춰야 하며, 울산역이나 언양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면 환승도 해야 한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린 뒤에도 계곡 안쪽에 있어 자가용을 이용하든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어느 정도는 걸어야 한다.
  

2023년 1월 4일 (수) 17:50 기준 최신판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蔚州大谷里盤龜臺岩刻畫)
암각화가 새겨진 절벽의 근접 모습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된 복제본.
울산암각화박물관

반구대 암각화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고래사냥 관련 바위그림을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암각화로, 태화강 상류의 지류 하천인 대곡천의 중류부 절벽에 위치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문화재로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어있으며, 대한민국 문화재청이 선정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후보목록인 '우선등재목록'에 '대곡천 암각화군'으로 묶여 올라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침수와 노출의 반복으로 풍화가 가속되어 사라져가고 있다. 관련 단체들은 보존 방안을 두고 실험 실패와 갈등을 지속하고 있어, 보존을 위해 행해지는 것은 없는 상황이다.

개요[편집]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蔚州大谷里盤龜臺岩刻畫), 반구대 암각화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을 지나는 태화강의 지류 대곡천의 암벽에 새겨진 암각화이다. 제작 시기는 신석기시대 후기에서 청동기시대 초기로 추정되고 있다. 이름인 '반구대'는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암각화가 발견되기 전부터 이미 붙여져 있었던 이름인데, 흔히 암각화가 세워진 바위의 이름으로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반구대 암각화의 주요 내용이 고래이고, 울산시는 고래고기로 꽤 유명한 동네이기 때문에 울산시는 암각화의 디자인을 여러 곳에 사용하고 있다. 장생포의 고래박물관이나 울산역의 모조 암각화 등이 그것. 실제로 반구대 암각화의 발견으로 인해 세계 최초의 포경 연도가 확 올라갔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기원전 6천년의 반구대 암각화를 근거로 해당 시기부터 포경이 행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는 고래잡이 산업으로써의 포경과는 별개의 이야기. 역사시대 동안 아시아에서 일본 이외에는 고래잡이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암각화에는 고래 말고도 야생동물 수렵을 포함해 의미를 알기 힘든 문양과 기호 등도 많이 그려져 있는데, 훼손 정도가 덜했던 발견 초기에는 약 300개가 넘는 그림이 확인되었는데 이후 50년동안 침수에 의한 훼손이 발생한 끝에 현재는 육안으로 식별가능한 그림들이 많이 줄어들어 버렸다.

반구대 암각화가 발견된 대곡천 자락에는 이외에도 암각화가 여럿 발굴되었는데, 인근에 위치한 울주 천전리 각석도 그 중 하나로, 천전리 각석에서는 선사시대의 그림과 함께 약 1500년 전 역사시대 인물[2]의 기록도 발견되어 주목을 끈다. 현재 학계에서는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를 한대 묶어 울주 대곡천 암각화군(Petroglyphs of Bangudae Terrace in Daegok-ri, Ulju)이라는 이름으로 취급하고 있다. 사연댐 건립 과정에서 해당 지역에 대한 매장문화재 전수조사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만약 사연댐이 철거되어 수몰지역에 대한 전수 발굴조사가 이뤄진다면 이외에도 다른 암각화들이 많이 발견될지도 모른다.

문화재 설명
높이 4m, 너비 10m의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암반에 여러 가지 모양을 새긴 바위그림이다. 바위에는 육지동물과 바다고기, 사냥하는 장면 등 총 200여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육지동물은 호랑이, 멧돼지, 사슴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호랑이는 함정에 빠진 모습과 새끼를 밴 호랑이의 모습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멧돼지는 교미하는 모습을 묘사하였고, 사슴은 새끼를 거느리거나 밴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바다고기는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사냥하는 장면은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을 묘사하였으며, 그물이나 배의 모습도 표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선사인들의 사냥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사냥감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것이다.
조각기로 쪼아 윤곽선을 만들거나 전체를 떼어낸 기법, 쪼아낸 윤곽선을 갈아내는 기법의 사용으로 보아 신석기말에서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과 점을 이용하여 동물과 사냥장면을 생명력있게 표현하고 사물의 특징을 실감나게 묘사한 미술작품으로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서 선사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내용[편집]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png

수렵 생활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소나 호랑이, 표범, 사슴 등 육지 생물들의 모습도 보이지만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해양 생물, 특히 고래다. 원시적 벽화임에도 고래에 대한 묘사가 매우 세밀한 편인데, 종류별로 새끼를 등에 올려놓은 고래(귀신고래), 앞뒤의 색이 다른 고래(범고래), 수많은 세로줄 무늬가 있는 유별나게 큰 고래(흰긴수염고래) 등이 그려져 있다. 또, 고래 사냥에 대한 내용으로 미끼, 그물, 작살을 맞은 고래, 그 고래를 잡기위해 해양으로 나가는 배 등이 그려져 있는데, 10명 이상이 긴 나무배에 타 고래에게 작살을 던지고 잡은 고래를 끌고 가서 살을 발라내는 일을 하는 내용이 아주 자세히 묘사되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 암각화가 문자가 없었던 석기~청동기시대에 포경 교육을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림들을 잘 살펴보면 선만 새긴 것과 면을 채워 새긴 것들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둘이 겹쳐진 부분에서 면을 채운 것이 더 깊게 파였기 때문에 이것들이 더 먼저 그려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면을 채운 것들은 대부분 고래 잡는 내용이고 선만 새긴 것들은 육지동물과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인데, 이를 통해 학자들은 이 지역이 예전에는 고래가 진입할 수 있는 해안 지대였으나 훗날 지형이 바뀌어 내륙 지대가 되었고 여태껏 고래를 잡던 사람들은 가축을 기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반구대 암각화가 있던 곳까지가 바다였다고 하기에는 좀 어려운 것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한반도 내륙 깊숙한 곳곳에서 당대 바다의 흔적이 발견되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때 이 지역이 바다였다면 태화강 상류를 따라 선을 긋고 낙동강 하류에서 북동쪽 양산단층을 따라 선을 그었을 때 두 선이 만나며 가르는 한반도 남동쪽 지형이 섬이었다는 말이 된다.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곳의 해발고도가 그 서쪽의 양산단층 평지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기후변화 등으로 고래가 잘 안 잡히자 육상생물 사냥으로 생계방향을 틀어다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이 암각화에는 사람도 그려져 있는데, 깃털 등을 온몸에 장식하고 굿을 하는 사람, 그 곁에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 여기 그려진 남자들은 성기가 크게 묘사돼 있는데 자손 번성을 기원하기 위해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발견[편집]

1971년 12월 25일, 동국대학교 문명대 교수, 고려대학교 김정배 교수, 충북대학교 이융조 교수는 1년전 발견한 울주 천전리 각석을 재조사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으로부터 천전리 각석에서 대곡천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 곳의 절벽에 호랑이 그림이 새겨진 것을 보았다는 제보를 받은 것이다. 그들은 확인을 위해 개천에 배를 띄워 타고 내려갔다. 그러던 중 인근 암면들과는 확연히 다른 인위적으로 갈은 듯한 암면을 발견하였고, 거기서 암각화를 발견하게 된다.

바위와 암각화 표면[편집]

암각화는 대곡천 계곡에 병풍처럼 늘어선 바위에 새겨져있다. 특히 위가 지붕처럼 튀어나온 바위의 그늘 아래 널따란 바위표면에 존재한다. 주로 새겨진 바위는 너비 약 8m, 높이 약 5m의 넓이이며, 주변 10여개의 바위에도 암각화가 일부 확인 된다.

암각화가 위치한 대곡천 중류부의 기반암은 한국의 지질 중에 중생대 백악기의 경상계지층 중 신라통에 속한다. 바위의 성질은 진흙이 퇴적되어 형성된 퇴적암이다. 퇴적암 중에는 암갈색 셰일과 이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주변 암반에서는 변성암인 담녹색의 혼펠스 재질도 존재한다. 특히 암각화가 그려진 표면은 방해석인데, 이 광물은 약한 산성을 띄어 물과 쉽게 반응해 용해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림[편집]

바위에 새겨진 그림의 수는 조사방법이나 표현물의 인식 차이에 따라 다르다. 전문가들은 형상을 알아 볼 수 없는 것까지 포함해 약 300여점의 표현물이 그려져 있다고 본다. 이 중 형상을 알아 볼 수 있는 그림은 237점이다. 종류로는 육지동물 97점, 해양동물 92점, 사람 17점, 배 6점, 그물·작살 등의 연장류 6점이 있다. 그 중 고래 그림만 62점으로 전체의 26%, 해양동물의 75%에 해당해 제일 많다.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개체는 36점인 사슴류와 22점인 호랑이이다.

그림은 단단한 석기로 새겼으며, 새긴 방법은 2가지로 구분된다. 그림의 윤곽을 새긴 후 내부를 고르게 쪼거나 긁어낸 면새김 방법이 있고, 윤곽이나 동물의 특징적 요소를 선이나 점으로 새긴 선새김 방법이 있다. 면새김 방법은 신석기 시대의 방법이며, 선새김 방법은 청동기 시대의 방법으로 추정한다. 면새김 위에 선새김이 덧새겨졌기에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에 걸쳐서 그려졌다고 추정한다. 고래 중심의 해양동물 부분과 사슴, 호랑이 중심의 육지동물 부분은 해양동물과 육지동물의 종류와 생태, 사냥방법 등을 표현하였다. 그림은 고래의 세부 종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다. 그림의 목적은 집단의 사람들이 오랜 세월 세대를 거듭하며 이들의 종류와 사냥방법에 관한 지식을 새겨넣고 가르쳤던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풍요를 기원하는 문화적 맥락의 산물로도 추정하고 있다.

연대추정[편집]

반구대 암각화가 언제 그려졌는지 그 정확한 연대를 비정하는 것은 아직 논란이 있다. 암각화의 최초 발견자인 문명대 교수를 포함해 신석기시대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많지만, 김원룡을 포함해 청동기시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국사교과서에도 청동기시대로 비정되어 있다. 다만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이 2019년 발간하여 가장 최근 연구들이 수록된 대곡천 암각화군 종합 연구보고서에서는, 경주대 강봉원 교수와 하인수 전 임시수도기념관장이 신석기시대론을, 계명대 김권구 교수가 청동기시대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종합적으로 볼 때 신석기 시대 말기 쪽으로 비정하는 논지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리는 것은 사실이다.

누가 그렸는가?[편집]

대곡천 암각화군 종합연구보고서에 수록된 울산박물관 학술팀장 김성욱 박사의 '반구대 암각화의 고고학적 검토' 논문은,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를 놓고 시대별로 비교하면서 양측의 차이를 비교하였다. 논문의 상세 내용은 생략하고, 박사는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를 제작기법과 표현방식에 따라 각각 4유형과 3유형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반구대 암각화 유형.png

대곡리 암각화의 경우 시간에 따라 유형1 ➞ 유형2 ➞ 유형 3, 4로 변하는 과정에서 앞선 그림과 최대한 중복해서 겹치지 않도록 노력한 듯하고, 묘사에 사실적 도상 표현이 있다. 반면 천전리 암각화은 유형 2이 유형 1을 집요하게 갈아내 지우거나 또는 그 위에 덮어씌워 겹쳐 그리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유형 2에서 그려지는 지그재그,동심원, 마름모 등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알기 어려운 추상적인 표현으로 가득하다. 이는 한문을 판독할 수 있는 유형 3과의 사이에도 차이가 분명하다.

즉, 이를 통해 그는 대곡리 암각화 1, 2, 3, 4유형과 천전리 암각화 1유형이 연속적으로 그려졌고, 다시 말해 같은 암면에 그려졌다는 공간적 차원에서의 연속성이 인정되지만, 천전리 암각화 유형 1과 2, 유형 2와 3 사이에는 각기 문화의 단절 또는 관념의 단절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천전리 암각화 2유형에 나오는 그림들을 다른 청동기 시대(주로 청동기 후기~말기)의 국내 암각화들에서 나타나는 문양 또는 검형들과 비교하여 유형 2의 제작 연대를 청동기 시대라 비정하였다.

김선옥의 논문에서는 위와 같은 결론으로 끝을 지었는데, 다시 말해 신석기 시대 어느 순간까지 존재하며 대곡리 유형 1~4와 천전리 유형 1을 그린 집단이 기원전 15세기를 전후로 하여 사라지고, 유형 2를 그린 집단이 기원전 10세기~4세기 사이의 어떠한 시기에 같은 공간에 나타났으며, 철기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에 유형 3이 그려졌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최대 두 번, 최소 한 번의 단절이 천전리 각석이라는 공간 속에 등장했는데, 그 단절이 일어난 시기는 바로 기원전 15세기 전후로부터 기원전 10세기 사이 어느 때라는 것이다.

특히 김장석(2011)이 밝힌 바와 같이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의 전환 과정에 있어 확실한 것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시작이 외부로부터의 자극 또는 기술 또는 주민의 유입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합의가 있는데, 원주민이었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터전에 청동기시대 문화의 유입과 함께 정주성이 더욱 강한 농경문화를 가진 주민들이 유입되어 일정 기간 공존하다가 환경의 변화 및 정주성이 강한 청동기시대 사람들 때문에 주요 생업 영역을 잃게 된 신석기인들의 문화가 소멸하게 되는 형태를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대곡리 암각화 1, 2유형을 그린 이전 시대의 선주민들, 고래를 잡고, 바다를 항해하며 해양생물을 잡던 사람들이, 점차 육상동물을 사냥하는 수렵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BP 3000년경(기원전 1050년) 전후로 하여 청동기 시대로 바뀌면 농사를 짓는 정주민족의 문화가 더 강하게 보이고 이 시기 주로 보이는 것이 송국리식 토기나 검단리식 토기와 같은 토기들이다.

그런데, 어떤 민족이 한반도에 정주하다 급작스럽게 축출되거나 동화되어 사라졌다고 하면 반도 일본어설, 즉 한반도 남부에 있던 반도 일본어족 민족집단이 북방에서 남하하는 고대 한국어족 집단에게 밀려 축출되거나 동화되었다는 설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렇게 축출되었다는 야요이인들은 기원전 7~8세기경 부여 송국리 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송국리식 토기이고 한반도의 청동기 후기를 대표하는 토기라는 점이다. 이들이 반도에서 사라지는 시기는 기원전 4세기이고, 이는 만경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점토대토기문화, 즉 준왕과 진한으로 대표되는 고대 한국어족으로 추정되는 북방계 유민들에 의해 사라지거나 동화되는 것이니, 이 사건으로는 기원전 15~10세기 존재하는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문명 사이의 문화적 단절을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송국리식 토기를 사용하는 이들 또는 북방에서 내려와 검단리식 토기를 사용하는 이들이 기원전 15~10세기 어느 시기에 외부에서 한반도 남부까지 들어와 선주 민족들을 몰아내거나 또는 동화시킴으로써 그 문명의 전승을 끊어 놓은 주체라는 해석이 더욱 신빙성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천전리 암각화 유형 2는 이들은 야요이인 또는 그들과 동시대에 존재한 북방계 출신 유민들에 의해 그려진 것이며, 이들은 이전 시대에 천전리 암각화 유형 1을 그린 자신들이 전혀 모르는 이들의 암각화를 쪼아서 지우거나 그 위에 덧씌워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또, 이 천전리 암각화 유형 1과 대곡리 암각화 유형 1, 2, 3, 4를 그린 이들은 주위의 신석기 유적에서 사용되는 즐문토기, 즉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청동기 시대에 등장하는 무문토기 즉 민무늬 토기와의 단절이 눈에 띈다. 반면 동시대 일본 열도에 존재했던 조몬 토기와는 모양이 아주 비슷하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결국 이들은 조몬인의 동계이거나 그 친척일 수 있다.

의의[편집]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벽화 가운데 상태가 좋은 것으로, 몇 안 되는 한국의 포경 생활사의 시초를 담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사실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한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가끔 고래들이 지나다니는 곳 근처에 있는 나라임에도 포경의 역사가 짧고 기록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선사 시대의 문화와 포경 역사를 모두 담고 있는 반구대 암각화는 꽤 높이 평가받는다.

또한 세계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이 암각화가 원시 포경의 모습이 그려진 최초의 기록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암각화는 세계 학술적으로도 유명한 편이며 영어 위키백과의 포경 항목에도 인류의 포경 역사의 시작 부분에서 맨 처음 언급된다.

반복된 침수와 노출로 인한 훼손[편집]

암각화는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 중 사연댐의 위치에서 상류로 4.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1962년 10월 착공하여 1965년 12월 준공한 사연댐은 울산광역시의 공업용수와 식수 공급을 위해 지어졌다. 이로 인해 1년 중 강수량이 늘어나는 6~8개월에는 사연댐 상류의 수위가 상승한다. 암각화는 댐 건설로부터 6년 후인 1971년 12월에 발견하였고, 암각화가 잠기고 있다는 사실 역시 발견한다. 사연댐의 수위 기준으로 암각화는 52m일 때 침수가 시작되며, 57m가 되면 완전히 잠긴다. 이는 물을 방류하여 수위를 조절할 수 있게 해주는 사연댐의 여수로 높이가 60m로, 암각화의 최하단 보다 8m 더 높아 나타는 현상이다. 암각화에는 물이끼가 들러붙어 있을 때가 많았다. 조사에서 물에 잠기지 않은 반구대의 암석에 비해 물에 잠긴 부분은 10배 가량 빨리 풍화가 사실도 확인되었다. 그나마 이 수몰 기간과 빈도는 2005년 반구대 암각화 상류에 대곡댐이 건설되면서 다소 줄은 것이다. 2013년부터는 암각화 보호를 위해 만수위가 60m인 사연댐 수위를 52m 이하로 낮춰오고 있다.

다만 태풍, 장마, 집중호우와 같이 한꺼번에 많은 비가 내릴 때는 수위 조절이 불가능해 침수되어왔다. 2016년 태풍 '차바', 2018년 10월 태풍 '콩레이', 2019년 7월, 태풍 '다나스'의 경우가 그러했다.

암각화의 훼손에는 암각화에 대한 가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문화재 보존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시간이 길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암각화는 1971년 12월 25일 발견되지만 이후 최소 9년 이상 방치되었다. 울산시에 의해 가치가 평가되어 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1982년 8월 2일의 일이며, 문화재청에 의해 가치가 평가되어 국보로 지정된 것은 1995년 6월 23일의 일이었다.

1995년 국보 지정 당시 조사에서는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그림은 300여 개였다. 2009년 문화재청의 조사에서는 암각화의 풍화 단계가 6단계 중 5단계인 '흙 상태 진입 직전'인 것으로 나타났다. 2016년 조사에서는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그림이 20~30점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존 방법 갈등 과정과 합의[편집]

문화재청과 울산시는 암각화와 사연댐 취수원이라는 두 문제를 놓고 갈등을 지속해왔다. 울산시에 물을 공급하는 사연댐을 해체해 수위를 낮추는 방법과 해체 없이 수위를 낮추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해체 없이 수위를 낮추는 방법 중에는 세부적으로 '수문이 없는 사연댐에 수문을 설치해 수위를 조절하는 안', '근본 대책이 나올때까지 암각화 주위에 임시적으로 차수벽(키넥틱댐)을 설치하고 추후 해체하는 안', '근본 대책이 나올때까지 암각화 주변에 흙으로 제방을 쌓고 추후 해체하는 안', '터널을 통해 유로를 변경하는 안' 이 제시되었다.

사연댐 해체 방식[편집]

해체를 주장하는 측은 수위 조절 수문을 설치하지 못함을 가정했을 때 이와같은 주장을 하였다. 이들은 사연댐이 1965년부터 2013년까지 4m의 토사가 댐아래 퇴적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담수 기능이 약화될거란 점을 들었다. 울산시의 용수를 위해 암각화를 포기하면서까지 사연댐을 이대로 유지하는 것은 앞으로의 담수 기능 약화를 생각했을 때 손해라는 것이다.

사연댐 유지 방식[편집]

사연댐 수위 조절 수문 설치안[편집]

사연댐에 직접 수문을 설치해 수위를 낮춰 잠기지 않게하자는 방안을 문화재청이 권고했다. 그러나 울산시청 측은 반대했다. 수위 조절은 울산시 자체 용수 공급량을 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부족한 용수는 타 지자체에서 사와야한다. 태화강 홍수 위험과 사연댐 붕괴 위험이 증가한다는 것도 있었다.

생태 제방안[편집]

울산시는 2009년과 2011년 '임시 제방 설치안'을 문화재청 소속 문화재위원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두 제안은 부결되었다. 공사로 인한 암각화 주변이 훼손되는게 첫째 이유다. 굴착·폭발·진동 등으로 암각화에 직접 훼손 가능성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어렵게 된다는 이유가 둘째다. 훼손 주범인 사연댐 수위를 낮출 것도 주문하였다. 하지만 울산시는 식수 확보 때문에 수위를 놔둔채 생태 제방을 쌓자는 주장을 고수했다.

2017년 울산시는 과거 임시제방 축조안과 닮은 '생태 제방 축조안'을 문화재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암각화에서 30m 떨어진 지점에 357m, 높이 65m 제방을 쌓아 물길이 암각화에 닿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 안도 2017년 7월 20일 부결되었다.

키네틱 댐안[편집]

키네틱댐은 조립식 철골조 사이에 투명한 합성 플라스틱인 폴리카보네이트판 160개를 붙여 물을 막는 가변형 임시 물막이 댐이다. 암각화 전면에 설치될 이 구조물은 수위 변화에 따라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벽이다. 암각화가 침수되기 전에 댐 구조물을 올려 물을 막는다. 평소에는 댐 구조물을 내려놓는 것이 가능하다. 전부 올리더라도 벽이 투명하기에 햇빛이 투과되어 벽화에 이끼가 끼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 방안은 건축가 '함인선'이 정부에 제안한 방안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 방안으로 갈등을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 방안이 문화재 원형보존에 반하는 선택이라며 반대했다. 댐 공사 과정에서 암각화에 부정적 영향이 미친다는 것이다. 또 암각화 앞 댐 가림막이 경관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2013년 6월 국무조정실이 주도한 이 절충안에 10년 동안 평행선을 달리던 문화재청과 울산시가 합의하였다. 지반 조사, 구조안전성 평가, 사전 실험이 진행됐다. 그러나 문화재청이 2015년 12월과 2016년 4월, 5월에 실시한 3차례 모의 실험이 모두 실패로 끝났다. 수압을 견디지 못해 투명판 이음새 부근에서 물이 새는 것이 모의실험에서 밝혀진 것이다. 이로써 3년이 넘는 시간과 실험에 투입된 예산 28억 원만 낭비되었다. 2016년 7월 문화재위원회는 이 댐 계획을 중단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노력[편집]

세계유산 등재 신청은 문화재청이 진행하는 네단계를 거친 뒤 이루어진다. '잠정목록 → 우선등재목록 → 등재신청 후보 → 등재신청 대상'이 그 것이다.

2010년 1월 문화재청은 반구대 암각화를 울주 천전리 각석과 함께 '대곡천 암각화군'으로 묶어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렸다. 이후 2011년과 2015년 울산시청은 문화재청에 두번째 단계인 '우선등재목록'을 신청하지만 보존 방법 이견과 문화재적 가치 정립 미비를 이유로 거절되었다. 결국 2019년 시청이 용수 일부를 포기하는 사연댐 수위 조절 수문 설치안으로 결정했다. 다시 '우선등재목록'을 신청해 두차례 보류와 수정 끝에 2021년 2월 16일 선정되었다.

관련 기관과 단체[편집]

반구대 암각화와 관련한 기관과 단체로는 울산암각화박물관, [[한국암각화학회], 울산대학교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가 대표적이다.

울산암각화박물관[편집]

'울산암각화박물관'은 울산광역시가 운영하는 공립박물관이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에 위치하고 있다. 2008년 5월 30일 암각화 전시관으로 시작하였으며, 2010년 박물관으로 승격하였다. 박물관은 반구대 암각화를 대한민국 내외와 학계에 알리는 활동을 해왔다. 암각화 관련 콘텐츠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암각화 관련 학술 대회를 열어 대한민국 내외로 암각화를 중심으로한 학자들간 교류를 만들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2018년 2번의 국제학술지를 발간한바 있다.

울산대학교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편집]

'울산대학교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는 반구대 암각화의 연구와 보존을 위해 2011년 10월 설립되었다. 반구대 암각화와 관련한 연구와 함께, 대한민국 내외의 관련 분야 연구기관과 협력하고 있다. '한국암각화학회'와 공동으로 암각화 학술대회를 꾸준히 열어오고 있다. 연구 성과는 연구서, 조사보고서의 형태로 매년 발간해 대한민국 내외의 연구기관 및 연구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또한 5번의 학술연구총서와 2번의 영문 학술총서를 발간한 바 있다.

관람 및 교통[편집]

울산광역시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348번 버스를 이용하면 갈 수 있는데 하루에 몇 번 안 다니기 때문에 시간표를 맞춰야 하며, 울산역이나 언양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면 환승도 해야 한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린 뒤에도 계곡 안쪽에 있어 자가용을 이용하든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어느 정도는 걸어야 한다.

근처에 있는 울주 천전리 암각화와 달리 실물 바로 앞에서 볼 수는 없어서 뭐가 새겨져 있는지는 육안으로는 거의 안 보인다. 얼마나 보이는지는 햇빛의 방향이나 관람자의 시력에 따라 다른데 그림을 하나도 못 찾는 사람도 많을 정도다. 위에도 언급했듯 암각화가 아니라도 기본적으로 경치가 좋은 계곡이고 공룡 화석이나 대나무숲, 늪지대도 있고 역사시대 유적지도 많은 곳이니, 암각화를 관찰하는 것 자체에만 큰 기대를 할 필요는 없다. 대신 실물 크기의 모조품이 울산박물관 등에 전시돼 있고, 울산역 내부의 자투리 공간에도 암각화 일부를 부조로 조각해 놓은 곳이 있다.

햇빛이 암각화에 비칠 때 가장 그림이 잘 보이는데 4월부터 9월 중순 사이 맑은 날 오후 4시가 잘 보이는 시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10월 중순부터 2월 말까지는 24시간 내내 암각화에 햇빛이 비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햇빛이 비치지 않는 시간대에 가도 비치된 무료 망원경으로 잘 보면 뚜렷한 그림 몇 개는 보인다.

울주 천전리 각석까지 산책로로 이어져 있다. 여긴 반구대보다 훨씬 바위에서 가까운 위치에서 관람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림이 훨씬 잘 보이므로 선사시대 암각화를 실제로 보는 게 목적이라면 여기로 가는 게 낫다.

근처에 울산암각화박물관이 있다. 반구대 암각화로 오는 버스를 타고 내리는 곳이기도 한데,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를 비롯 국내외의 암각화에 대한 박물관이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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