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개요) |
(→역사) |
||
17번째 줄: | 17번째 줄: | ||
== 역사 == | == 역사 == | ||
[[파일:월미도 관광지도.png|썸네일|300픽셀|월미도 관광지도. 각 시설의 이름을 임의로 표기하였다. 요시다 요츠사부 作.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소장.]] | [[파일:월미도 관광지도.png|썸네일|300픽셀|월미도 관광지도. 각 시설의 이름을 임의로 표기하였다. 요시다 요츠사부 作.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소장.]] | ||
− | 역사에 처음 등장한 때는 1695년 숙종 비변사등록에 처음 나왔다. | + | 역사에 처음 등장한 때는 1695년 숙종 비변사등록에 처음 나왔다. 당시엔 '''어을미도'''라고 불렸다. 지금의 월미도의 뜻과는 상관 없지만 더 좋은 뜻으로 바뀌기 위해 월미도라고 바꾸었다. 이왕이면 더 좋은 뜻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비변사 등록에 나와있는 내용을 간추리자면, 1656년에 어을미도에 행궁을 지었는데 공사를 해야 해서 돈이 더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
공식적으로 처음 나온 것은 1708년에 상소문 중 적이 와서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혔을 때를 대비해 월미도까지 행궁을 만들고 피란로를 만들자고 하였다. 그리고 월미도와 인천은 해상군사요충지라는 이유를 들었다. 여기서 조선 중기부터 이미 월미도가 군사 요충지로 알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때쯤부터 어을미도에서 월미도라고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 공식적으로 처음 나온 것은 1708년에 상소문 중 적이 와서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혔을 때를 대비해 월미도까지 행궁을 만들고 피란로를 만들자고 하였다. 그리고 월미도와 인천은 해상군사요충지라는 이유를 들었다. 여기서 조선 중기부터 이미 월미도가 군사 요충지로 알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때쯤부터 어을미도에서 월미도라고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 ||
23번째 줄: | 23번째 줄: | ||
개화기 때에는 러시아 해군의 석탄 창고와 일본 해군기지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열강들이 이곳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별였다. 대표적인 예로 병인양요 때 이 섬을 점령한 프랑스 해군은 지휘관 로즈 제독의 이름을 따 로즈 섬(Roze Island)이라고 했다. | 개화기 때에는 러시아 해군의 석탄 창고와 일본 해군기지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열강들이 이곳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별였다. 대표적인 예로 병인양요 때 이 섬을 점령한 프랑스 해군은 지휘관 로즈 제독의 이름을 따 로즈 섬(Roze Island)이라고 했다. | ||
− | 1900년 월미도의 개간권을 허가받은 송정섭은 일본인 요시가와에게 개간권을 팔아 넘겼고, 요시가와는 월미도 주민을 내쫓았다. 조선 정부는 송정섭을 체포하고 매각 대금을 일본 공사관에 전달하고 개간권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요시가와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1904년 8월에 일본군이 작전상 필요하다며 포대를 쌓았으며, 1905년 | + | 1900년 월미도의 개간권을 허가받은 송정섭은 일본인 요시가와에게 개간권을 팔아 넘겼고, 요시가와는 월미도 주민을 내쫓았다. 조선 정부는 송정섭을 체포하고 매각 대금을 일본 공사관에 전달하고 개간권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요시가와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1904년 8월에 일본군이 작전상 필요하다며 포대를 쌓았으며, 1905년 5월은 민가 80여 호를 철거하고 섬 전체를 점거하였다. 1923년 1km의 제방을 쌓아 육지와 연결한 후 [[유원지]]로 개발되었는데, 주로 일본인들을 위한 조탕, 별장, 요정, 해수풀장 등이 들어섰다. |
북한에서는 월미도를 '영웅의 섬'이라고 부르며 '월미도 정신'이라는 구호까지 만들어 월미도를 각별하게 생각하는데, 북한정권의 선동자료에 의하면, 6.25 당시 전황이 불리하여 후퇴를 할 상황에 놓이자 최고사령부는 시간을 벌기 위해 요충지인 월미도에 사수를 명령한다. 월미도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인민군 해군 해안포중대는 최고사령부의 지시를 목숨처럼 여기며 3일동안 결사항전을 하였고 전원 사망으로 당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벌어준 3일 덕에 북한군은 전력을 재정비하여 전승에 기여했다 이런 이야기다. 그러나 실상은 UN군은 단 수십분만에 월미도를 접수했고 북한 해군육전대는 120명 전사에 190명 투항의 피해를 입은 반면, 연합군은 1명 전사 22명 부상에 그쳤을 정도로 연합군이 일방적으로 줘팬 전투였다. 영웅적 설화는 당연히 거짓으로, 당시 자료 화면을 보면 알몸차림으로 손을 들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하는 북한군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 북한에서는 월미도를 '영웅의 섬'이라고 부르며 '월미도 정신'이라는 구호까지 만들어 월미도를 각별하게 생각하는데, 북한정권의 선동자료에 의하면, 6.25 당시 전황이 불리하여 후퇴를 할 상황에 놓이자 최고사령부는 시간을 벌기 위해 요충지인 월미도에 사수를 명령한다. 월미도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인민군 해군 해안포중대는 최고사령부의 지시를 목숨처럼 여기며 3일동안 결사항전을 하였고 전원 사망으로 당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벌어준 3일 덕에 북한군은 전력을 재정비하여 전승에 기여했다 이런 이야기다. 그러나 실상은 UN군은 단 수십분만에 월미도를 접수했고 북한 해군육전대는 120명 전사에 190명 투항의 피해를 입은 반면, 연합군은 1명 전사 22명 부상에 그쳤을 정도로 연합군이 일방적으로 줘팬 전투였다. 영웅적 설화는 당연히 거짓으로, 당시 자료 화면을 보면 알몸차림으로 손을 들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하는 북한군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 ||
− | 해방 후 이 섬에는 대한민국 해군 제2함대가 들어서게 되었고 1999년까지 사령부가 월미도에 | + | 해방 후 이 섬에는 대한민국 해군 제2함대가 들어서게 되었고 1999년까지 사령부가 월미도에 있다. 이 중 월미산 일대 해군 주둔지는 평택시로 이전하며 인천시에 부지를 반환했고 인천시는 부대 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하는데 이 공원이 현재의 월미공원이다. 공원 내 2함대 주둔지였음을 뜻하는 기념구조물이 있다. |
휴전 이후에 1960년대까지도 월미도는 육지와 제방으로만 이어진 섬이었으나 1970년대 들어서 제방 주변의 바다를 땅으로 메우고 이 자리에 공장과 [[항만시설]]을 지으면서 육지와 연결된 섬이 됐다. 1980년대 들어서 월미도 해안 주변에 놀이동산이 들어서면서 수도권의 대표적인 해양 관광지로 인기를 끌게 된다. 특히 1990년대 들어서 월미도 놀이동산의 바이킹과 디스코 팡팡이 주목을 받으면서 월미도의 인기가 수직상승하기도 했다. | 휴전 이후에 1960년대까지도 월미도는 육지와 제방으로만 이어진 섬이었으나 1970년대 들어서 제방 주변의 바다를 땅으로 메우고 이 자리에 공장과 [[항만시설]]을 지으면서 육지와 연결된 섬이 됐다. 1980년대 들어서 월미도 해안 주변에 놀이동산이 들어서면서 수도권의 대표적인 해양 관광지로 인기를 끌게 된다. 특히 1990년대 들어서 월미도 놀이동산의 바이킹과 디스코 팡팡이 주목을 받으면서 월미도의 인기가 수직상승하기도 했다. |
2023년 10월 20일 (금) 18:07 판
월미도(月尾島, Wolmido, Wolmi Island, Wolmido Island, Roze Island)는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에 속해 있는 섬이었다. 현재는 섬과 육지 사이가 메워졌다. 섬의 생김새가 반달 꼬리 모양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가장 높은 곳은 월미산으로, 해발 고도는 108m에 불과하다. 월미도 밑에는 그보다 작은 소월미도가 있다. 인천시민들과 그 주변 도시 주민들이 많이 찾는 명소이기도 하다.
목차
개요
월미도는 월미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긴 삼각형 모양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간척되어 육지가 된 인천 앞바다의 육계도이다.
월미도는 면적이 0.7 km²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었지만 제물포(지금의 인천항)가 항구 역할을 제대로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월미도가 제물포 앞에 딱 버티고 서서, 파도와 바람으로부터 제물포에 정박한 배들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때 여진 기마병이 바람처럼 달려와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막아버려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야만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이 1656년(효종 7)에 제 2의 피난길을 개척할 때 기착지로서 월미도에 월미행궁이 지어지기도 했다.
월미도를 지나지 않고서는 인천항을 통해 서울로 갈 수 없기 때문에 월미도는 개화기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외국 군대에게 점령되어 군사 요충지로 쓰인 운명을 맞아야만 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때는 한양으로 들어가는 뱃길을 찾으러 인천에 접근한 이양선들이 입항 전 한 차례 머무른 섬이었으며, 일·청·러가 조차 경쟁을 벌일 때는 조정의 허락도 없이 일제 해군의 석탄 창고가 설치된 수모를 겪었다. 러일 전쟁의 첫 포성이 울린 제물포 해전은 월미도 앞바다(월미해협)에서 벌어졌고, 일제가 승리하고 나서는 병참기지화되었다.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일제 강점기엔 일제가 소위 '조선 제일의 유원지'라는 명목으로 월미조탕을 비롯한 유원지, 숙박시설을 지어 부유한 자들에게만 호화로운 인공낙원을 제공하였다.
한국전쟁의 판도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 당시엔 미군에게서 네이팜탄 폭격을 당하고 인천으로 가는 길을 터 주게 되었다. 이 폭격으로 약 120가구 600여 명이 살던 마을이 불바다가 되고 월미도민 100여 명과 월미도에 파견된 육지의 노무자 상당수가 죽었다. 전쟁이 끝나고 피란에서 돌아온 월미도민들은 월미도로 귀향하여 사라진 마을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휴전 후에 미군부대가 계속 주둔해서, 미군 부대가 물러가자마자 바로 한국군이 들어와 해군 기지를 세워서, 국방부와 인천시가 도민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월미도를 사고팔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도민들은 '귀향대책위원회'를 꾸려 배상과 귀향을 요구하였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국가가 월미도민들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1989년 7월 문화의 거리가 조성된 이래 인천 바닷가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로 떠올랐다. 썰물 때도 갯벌이 드러나지 않아 언제나 바닷물을 볼 수 있다. 월미산에 둘레길이 조성되고, 한국전통정원, 전통문화체험관,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이 설립된 데다가, 다양한 놀이동산까지 들어서면서, 월미도는 인천 명소의 위상을 되찾고 있다.
역사
역사에 처음 등장한 때는 1695년 숙종 비변사등록에 처음 나왔다. 당시엔 어을미도라고 불렸다. 지금의 월미도의 뜻과는 상관 없지만 더 좋은 뜻으로 바뀌기 위해 월미도라고 바꾸었다. 이왕이면 더 좋은 뜻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비변사 등록에 나와있는 내용을 간추리자면, 1656년에 어을미도에 행궁을 지었는데 공사를 해야 해서 돈이 더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공식적으로 처음 나온 것은 1708년에 상소문 중 적이 와서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혔을 때를 대비해 월미도까지 행궁을 만들고 피란로를 만들자고 하였다. 그리고 월미도와 인천은 해상군사요충지라는 이유를 들었다. 여기서 조선 중기부터 이미 월미도가 군사 요충지로 알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때쯤부터 어을미도에서 월미도라고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개화기 때에는 러시아 해군의 석탄 창고와 일본 해군기지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열강들이 이곳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별였다. 대표적인 예로 병인양요 때 이 섬을 점령한 프랑스 해군은 지휘관 로즈 제독의 이름을 따 로즈 섬(Roze Island)이라고 했다.
1900년 월미도의 개간권을 허가받은 송정섭은 일본인 요시가와에게 개간권을 팔아 넘겼고, 요시가와는 월미도 주민을 내쫓았다. 조선 정부는 송정섭을 체포하고 매각 대금을 일본 공사관에 전달하고 개간권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요시가와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1904년 8월에 일본군이 작전상 필요하다며 포대를 쌓았으며, 1905년 5월은 민가 80여 호를 철거하고 섬 전체를 점거하였다. 1923년 1km의 제방을 쌓아 육지와 연결한 후 유원지로 개발되었는데, 주로 일본인들을 위한 조탕, 별장, 요정, 해수풀장 등이 들어섰다.
북한에서는 월미도를 '영웅의 섬'이라고 부르며 '월미도 정신'이라는 구호까지 만들어 월미도를 각별하게 생각하는데, 북한정권의 선동자료에 의하면, 6.25 당시 전황이 불리하여 후퇴를 할 상황에 놓이자 최고사령부는 시간을 벌기 위해 요충지인 월미도에 사수를 명령한다. 월미도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인민군 해군 해안포중대는 최고사령부의 지시를 목숨처럼 여기며 3일동안 결사항전을 하였고 전원 사망으로 당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벌어준 3일 덕에 북한군은 전력을 재정비하여 전승에 기여했다 이런 이야기다. 그러나 실상은 UN군은 단 수십분만에 월미도를 접수했고 북한 해군육전대는 120명 전사에 190명 투항의 피해를 입은 반면, 연합군은 1명 전사 22명 부상에 그쳤을 정도로 연합군이 일방적으로 줘팬 전투였다. 영웅적 설화는 당연히 거짓으로, 당시 자료 화면을 보면 알몸차림으로 손을 들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하는 북한군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해방 후 이 섬에는 대한민국 해군 제2함대가 들어서게 되었고 1999년까지 사령부가 월미도에 있다. 이 중 월미산 일대 해군 주둔지는 평택시로 이전하며 인천시에 부지를 반환했고 인천시는 부대 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하는데 이 공원이 현재의 월미공원이다. 공원 내 2함대 주둔지였음을 뜻하는 기념구조물이 있다.
휴전 이후에 1960년대까지도 월미도는 육지와 제방으로만 이어진 섬이었으나 1970년대 들어서 제방 주변의 바다를 땅으로 메우고 이 자리에 공장과 항만시설을 지으면서 육지와 연결된 섬이 됐다. 1980년대 들어서 월미도 해안 주변에 놀이동산이 들어서면서 수도권의 대표적인 해양 관광지로 인기를 끌게 된다. 특히 1990년대 들어서 월미도 놀이동산의 바이킹과 디스코 팡팡이 주목을 받으면서 월미도의 인기가 수직상승하기도 했다.
관광
놀이동산
월미도 내에 위치한 놀이동산들이 유명하다. 마이랜드, 월미테마파크, 비취랜드, 월미랜드, 바이킹 놀이동산, 슬링샷이 있는데 각 놀이동산이 보유하고 있는 놀이시설도 비슷하고 서로 거리도 가까워서 사람들이 다른 운영사인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시설 중에는 바이킹, 타가다 디스코(디스코 팡팡)와 월미테마파크에 위치해있는 문 아이가 유명하다. 하지만 마이랜드, 월미테마파크, 비취랜드의 경우 안전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어 안전문제에 대해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으므로 타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히 생각해 볼 것. 사고가 났었던 놀이기구는 마이랜드의 바이킹, 비취랜드의 썬드롭, 월미테마파크의 회전그네와 크레이지 크라운, 슈퍼점프이다. 사망사고가 날 정도로 안전과는 담을 쌓은 동네이니 잘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갯벌
놀이동산 거리 바로 옆에 갯벌이 있다. 밀물 때는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볼 수 있지만 썰물 때에는 갯벌이 훤히 드러난다. 하지만 갯벌에는 절대 들어가면 안된다. 갯벌의 폭이 넓지 않아 금방 순식간에 물이 차오르고 절벽이 가로막고 있어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힘들어 굉장히 위험하다. 당연히 조개나 게, 생선같은 해산물 채취도 금지. 갯벌에 가고 싶다면 갯벌체험 장소로 가서 한다.
월미공원
월미도 초입부에는 월미산을 중심으로 조성된 총 면적은 588,099.3㎡의 월미공원이 있다. 주민들에게 녹음이 있는 휴식공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설을 운영하고 체험행사를 진행하여 공원을 이용하는 이용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한다. 공원 내 주요시설로는 월미도 일대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월미전망대와 한국의 대표적인 정원들을 재현해 놓은 한국전통정원, 한국의 전통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는 월미문화관 등이 있다. 월미바다열차의 월미공원역이 월미공원의 정문 바로 앞에 위치한다.
월미공원 안내소에서 월미전망대가 있는 정상광장까지 전기셔틀자동차인 물범카를 운행한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매주 월요일은 정기 휴무한다. 요금은 성인 왕복 1500원, 성인 편도 1000원, 어린이 왕복 800원, 어린이 편도 500원 이다.
이 열차는 차량 2량을 1편성으로 해 4편이 8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한바퀴 순환하는데 35분 소요되며 1량 승객 정원은 23명(두량 46명)이다. 성수기인 4~10월과 주말(금, 토, 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저녁 9시까지, 나머지 기간에는 저녁 6시까지 운행한다. 열차 안에서는 영어와 중국어로 안내방송을 하기 때문에 외국인들도 주변 관광지 설명을 청취하면서 관람할 수 있다.
월미바다열차
월미바다열차는 월미도 관광지 주변을 지상에서 7~18m 가량의 높이에서 한바퀴 순환하는 관광열차이다. 바다열차는 월미도 앞바다, 인천내항, 한국이민사박물관, 월미공원, 곡물저장창고 사일로(Silo), 월미문화의 거리 놀이시설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월미바다열차는 월미산 주변 6.1㎞ 순환구간을 평균시속 10.5㎞로 운행하며 운행 구간에 4개의 정거장(월미바다역~월미공원역~월미문화의 거리역~박물관역)이 있으며, 1회에 한해 하차 했다가 다시 승차할 수 있다. 월미바다역은 경인1호선인 인천역 옆에 있다. 요금은 성인 8000원이다.
월미유람선
유람선을 운행 중이다. 월미도 공원 바로 옆바다가 뱃길이라서 가끔 화물선도 지나가는 걸 볼 수 있다. 월미유람선은 주식회사 월미도해양관광이 운영한다. 배는 2017년 건조된 신규 선박 뉴코스모스호로, 규모는 700톤, 전장은 401m, 선폭은 11m, 승선정원은 670명인 3층짜리 크루즈이다. 3층 전망대에서 날아드는 갈매기 떼를 볼 수 있다. 공연크루즈(A코스)는 월미도-영종대교-아라뱃길 서해갑문 앞-월미도를 돌고, 불꽃크루즈(B코스)는 월미도-영종도 앞바다-인천대교-월미도를 돈다.
월미문화관
월미문화관의 1층은 전통문화전시관으로 생활문화전시실, 궁중문화전시실, 기획전시실로 꾸며졌다. 관혼상제, 서당과 향교 같은 교육과정, 종묘 제례악 등 궁중음악과 궁중음식, 왕의 경연과 일과 등을 볼 수 있다. 한복 입어보기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전통혼례복과 왕가의 궁중복식, 신발과 가채 등이 준비되어 있다.
지하층 한식체험관에서는 한식체험활동을 할 수 있다. 전통떡, 김치, 궁중삼계탕, 궁중떡볶이, 불고기 등의 다양한 음식 만들기와 맛보기 체험이 준비되어 있다. 사전 예약 후 체험할 수 있다.
문화관 입구에서는 소망엽서함과 느린우체통을 운영하고 있다. 소망엽서를 친구나 가족에게 작성하여 느린우체통에 넣으면 1년 후에 발송한다. 1년 후에 엽서를 받고 깜짝 놀랄 표정을 생각하며 편지를 써보면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고 한다.
월미 문화의거리
월미 문화의거리는 횟집과 카페가 즐비했던 월미도의 해안인접도로를 차없는 도로로 바꾸고 새단장하여 1989년 7월 2일 개장하였다. 별빛·수경·이벤트 광장과 전망대, 휴식·테마 공간 등 직접 해양을 접할 수 있다. 문화거리를 걷다 보면 다양한 볼거리, 먹을거리들이 길을 따라 이어진다. 엠넷의 디지털 채널 M2의 노래방 오디션 프로그램 《불토엔 혼코노》 4차 예선을 위한 코인노래방 상자가 문화의 거리에 설치되기도 했다.
중앙에는 공유수면 5,667km²를 매립하여 조성한 '친수공간'이 있다. 친수공간은 인천대교와 서해바다의 경관을 활용한 휴게 및 문화 이벤트 공간이다. 친수공간에는 '월미달빛 음악분수', 낙조전망대, 구름언덕, 조석체험시설 등이 있고, 친수계단으로 내려가면 출렁이는 바닷물을 직접 만질 수 있다.
문화의 거리를 깊숙이 들어가면 종이학 모양 야외무대가 바다를 등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구나 대관 신청만 하면 야외무대에서 공연을 할 수 있다.
월미전망대
월미산 정상에 서면 인천항은 물론 맑은 날에는 영종도와 용유도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월미산정상광장, 예포광장, 월미전망대의 경치가 빼어나다. 근래에 높은 건물들이 많아져서 인천항을 바라보기에 적합한 장소가 거의 없는데 이곳에 오르면 인천항의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정상에 있는 월미전망대에서는 인천항과 서해의 아름다운 낙조를 조망할 수 있다. 월미전망대의 원형계단을 올라가 전망대 꼭대기에 서면 밑으로는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서해바다와 인천항, 인천대교 연안 여객선터미널이 보이고, 고개를 들면 인천 시내와 자유공원이 보인다. 전망대에는 달빛마루 카페가 있으며,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23m 3층 높이 유리전망대는 야간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여 데이트 장소로 각광 받고 있다. 월미산의 정상까지는 도보로 약 30분, 셔틀버스인 물범카로 오르면 15분이 소요된다.
상권
놀이동산 주변 해안 산책로를 끼고 음식점, 카페, 오락실 등이 밀집된 상권이 있다. 다만 호객행위를 조심할 것.
차이나타운
버스로 몇 분 거리에 차이나타운이 있어 월미도랑 함께 두 곳을 관광코스로 이용하는 편이다. 두 곳을 모두 가보고 싶다면 월미도로 가는 입구인 대한제분 입구의 인천항 내항 8부두 주차장에 주차를 한 뒤 차이나타운과 월미도를 관광하면 된다. 다만 8부두 주차장에서 놀이동산 등이 있는 월미도 번화가까지는 도보로 이동하기 다소 버거울 수도 있다. 이 경우 주차장 건너편 동일아파트 앞에서 아무 버스나 타면 된다. 이 정류장을 거치는 버스는 모두 종점이 월미도다.(추가 - 북성동 1가 98-39도 무료 공영 주차장이다) 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을 권한다. 주차장이 꽉 찰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영종 씨사이드파크
월미도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영종도에 영종 씨사이드파크가 위치한다, 바다 양쪽 사이드로 공원이 마주보는 특이한 사례. 월미도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영종도 구읍뱃터로 이동할 수 있다. 매일 1시간에 1척 운행하며, 운임은 성인 기준 3500원이고 차량의 경우 일반 승용차 1대당 7500원이다. 제3연륙교가 개통하기 전에는 도보나 이륜차로 영종도를 오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가로수길
월미도 놀이동산 주변 길 가로수가 벚나무이다. 봄철에 벚꽃이 매우 예쁘다. 놀이공원도 갈 겸, 연인들 데이트 코스로 추천.
자전거도로
주변에 해변 따라 자전거 도로가 있다. 길이는 짧은 편이지만, 바다를 끼고 있어 그런대로 풍광이 좋다.
한국이민사박물관
한국이민사박물관은 한국의 이민사를 살펴보고, 선조들의 해외 활약상과 개척자적 삶을 기리고 후손에게 전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2008년도에 개관하였다. 박물관에는 해외 한인들로부터 기증받거나 구입한 유물 4,4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 전시실에는 당시 하와이로 떠났던 갤릭호 모형을 비롯해 선조들의 고달팠던, 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냈던 지난날의 모습을 둘러볼 수 있다. 하와이로 떠난 이민자들의 길고 험난했던 여정, 사탕수수농장의 고된 노동과 하와이에 정착하는 과정, 광복을 위해 몸 바쳤던 선열들의 활약상, 해외동포들의 근황과 염원을 4개의 전시실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대중교통
수도권 사람들이 전철1호선을 타고 월미도로 여행을 갈 경우에는 1호선 동인천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월미도로 가는것을 추천한다. 지리적으로는 인천역이 월미도와 가장 가깝지만 걸어서 가기에는 다소 멀어 어차피 또 버스를 타야하기 때문이다. 동인천역에 내려서 2번, 10번, 45번 시내버스중 한대를 타고 버스15분 정도 거리의 월미도로 가면 인천광역시와 월미부둣가, 항구의 멋진 모습을 보면서 갈수 있어 여행의 만족도가 높다. 그 외에 월미바다열차가 인천역에서 월미도로 들어가지만 코로나사태로 인해 잠시 운행이 중단되었다가, 2021년 11월에 월미바다열차 운행이 재개되어 인천역에서 월미도까지 월미바다열차를 타고 갈 수 있게 됐다.
동영상
지도
참고자료
- 〈월미도〉, 《나무위키》
- 〈월미도〉, 《위키백과》
- Go Guides, 〈인천 월미도 - 하루종일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힐링 명소〉, 《호텔스닷컴》
- 강준완 기자, 〈"눈 앞에 펼쳐지는 인천앞바다"...궤도차량 '월미바다열차' 곧 개통〉, 《한경닷컴》, 2019-07-18
- 〈스릴있다는 이유로 유명해진 ‘전설의 월미도 바이킹’, 지금은?〉, 《트래블뷰》, 2020-12-30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