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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난하이(중남해)

중난하이(中南海zhōng nán hǎi)는 베이징시 시청구(西城区)에 있는 옛 황실 원림이다.

개요[편집]

  • 중난하이는 자금성의 서쪽 바로 옆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청 등의 집무실 소재지이다. 현직 지도부는 물론 전직 지도부의 거주지 역할 또한 한다. 상당수의 전직 지도부와 그 가족들이 퇴임 이후에도 오랫동안 거주하기도 한다. 금·원·명·청대에는 황실 정원이었으며, 중화민국이 들어서고 북양정부의 총통부 청사 역할을 하였고, 1949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중심지가 되었다. 2006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베이징 지하철 베이징 지하철 1호선 톈안먼시역이 이곳 바로 옆에 있다. 그러나 당연히 겉모습만 볼 수 있고 내부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당·정·군의 전현직 최고위 지도자들의 집무실과 등이 있어 예나 지금이나 일반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 [1]
  • 중난하이는 베이징 시의 중심부인 시청 구에 있는 옛 황실 정원으로, 자금성과 바로 근처에 있다. 현재는 중국공산당의 최고 집무실이자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등이 입주하여 있다. 중난하이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국가주석과 총리의 집무실이 있는, 중국에서 가장 경호가 삼엄한 공간들 중 하나이며, 워낙 유명하여 '중난하이'라는 단어 자체가 중국 정부 수반들을 가리키는 고유명사화되기도 했다. 현 최고지도자인 시진핑을 포함한 국가 최고위직 공무원들은 이곳에 개인 집무실들을 가지고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거나 사무를 보는 등 매일 업무를 보며, 중국 관영매체인 CCTV가 이 모습을 찍어 방송하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거의 대부분의 내부 공간들을 절대로 함부로 다 보여주지 않는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전에 이곳의 건물 배치를 그려놓은 도면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후 1970년대에 급격한 개축 과정을 거치면서 내부 모습이 엄청나게 바뀌었기에 이를 가지고 현재 중난하이의 모습을 유추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현재 중난하이의 건물들은 청나라 시절의 이름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나, 외양이나 인테리어, 목적은 거의 완전히 바뀌었다고 보아도 될 정도이다. 중난하이의 북부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등 당 핵심 기구들의 사무실들이 들어와있다.[2]

중난하이 역사[편집]

  • 베이징이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中都)였을 때 현재의 북해와 중해는 태액지(太液池)라는 호수였고 그 인근에는 황제의 여름 별궁인 대녕궁(大寧宮)이 있었다. 이곳의 경치는 이미 이때부터 절경으로 이름 높아 황제들이 자주 머물렀다. 이후 원나라가 금을 멸망시킨 뒤 쿠빌라이 칸이 금의 중도를 폐기하고 새로운 수도인 대도(大都)를 건설하면서 태액지를 황궁에 포함시켜 그 주변에 대내(大內)·융복궁(隆福宮)·흥성궁(興聖宮)의 세 궁전을 지었다.
  • 명나라 때인 1406년(영락 4년) 영락제가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자 이곳은 다시금 황궁의 후원으로 편입되었다. 영락제가 자금성의 위치를 원나라의 황궁보다 약간 남쪽으로 앞당기면서 태액지 남쪽에 난하이를 조성하였으며, 여기에서 나온 흙과 자금성 주위를 두르는 퉁즈허(筒子河)를 파면서 나온 흙을 모아 황성 북쪽에 만수산(萬壽山)을 쌓았다. 1459년(천순 3)에는 이곳에 광대한 규모의 서원(西苑)을 건설했다. 가정제가 자금성 건청궁에서 벌어진 임인궁변(壬寅宮變)으로 죽을 뻔하자 서원으로 거처를 옮겨 20년간 지내다가 죽기 전날에야 환궁하기도 했다.
  • 청나라가 베이징으로 천도한 후에는 베이중난하이의 3해(三海) 주변에 붉은색 담을 둘러 원림의 면적이 호수 주변에 거의 맞닿을 만큼 축소되었다. 청나라 역대 황제들은 이곳을 여름 피서지로 사용하며 정무를 돌봤고, 사람 살기에는 살풍경한 자금성보다 이곳을 선호했다. 사실 대부분의 황제들이 국가적인 주요 의식이 몰려 있는 12월에서 1월까지의 연말연시에만 자금성에 머물고, 그 이외의 기간에는 중난하이나 원명원, 청더 피서산장 등의 별궁에서 기거하였다. 이는 동치제와 광서제 때 권력을 잡고 중국을 통치한 서태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무술정변 이후 광서제가 죽을 때까지 유폐된 영대(瀛台)가 바로 이곳의 난하이에 있었다. 1900년(광서 26) 의화단 운동 때는 8개국 연합군의 약탈을 당하기도 했고 선통제가 즉위하면서는 생부인 순친왕이 머무는 섭정왕부가 지어지기도 했다.
  • 1911년(선통 4년)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멸망하면서 위안스카이의 북양정부 총통부가 이곳에 설치되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중난하이를 신화궁(新華宮)으로 개칭하기도 했지만 한바탕 칭제 소동의 와중에도 계속해서 북양정부의 요인이 집무하는 관저 역할을 수행했다. 1927년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로 취임한 장쭤린이 집무실로 사용한 것이 마지막이다. 1928년 6월에 베이징이 국민정부에 함락되고 국민정부가 그간 수도로 삼아온 난징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더 이상 관저로 쓰이지 않고 일반인들에게 공원으로 개방되었다.

중난하이 명칭 관련[편집]

  • 중난하이는 자금성 서쪽에 있는 정원으로, 2개의 호수인 '중해'와 '남해'를 통칭하여 '중남해(중난하이)'라고 부른다. 가끔씩은 '바다 궁전'으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자금성 북쪽에는 북해공원이 이 중난하이와 비슷하게 지어져 있는데, 북해공원은 중난하이와 달리 공공에게 개방되어 있다. 중국인들은 북해, 중해, 남해를 합쳐 '태액지'(太液池)라고 부르기도 한다. 태액지는 본디 서쪽 정원이라는 뜻의 '서원(西苑)'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베이징 황성의 붉은색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곳에는 황성의 다른 부분과는 달리 그나마 옛 건물들이 본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북해 공원에는 주로 종교적인 건물들이 몰려 있다면, 중해와 남해에는 상대적으로 궁전 건물들이 집중되어 있었다고 한다.
  • 현 중난하이의 기본 골조는 1421년에 명나라 시대에 2개의 거대한 호수가 만들어지며 모습이 잡혔고, 청나라 후반에는 거의 사실상의 정부 사무처의 역할을 하였으며 서태후나 순친왕 재풍 등이 자금성이 아닌 이곳에 침소를 짓고 정무를 보았다. 중화민국이 건국된 이후, 위안스카이 총통은 중난하이를 북양정부의 집무실로 개조하였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에는 마오쩌둥이 이곳에서 집무를 보기 시작하였으며, 니키타 흐루쇼프, 리처드 닉슨, 조르주 퐁피두, 다나카 가쿠에이, 줄피카르 알리 부토 등의 해외 정치인들을 중난하이에서 맞이하였다. 마오쩌둥이 중난하이에서 가장 좋아하던 곳은 그의 개인 집무실과 서재인 국향서옥(菊香書屋)이 있던 풍택원(丰泽园)과 수영장인 유영지(游泳池)였는데, 그는 이곳에서 수영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각료들의 보고를 들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마오쩌둥이 죽은 후에는 풍택원은 마오쩌둥의 유품들이 그대로 남겨진 채로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다만 현재까지도 일반인은 이곳을 관람할 수 없다.

중난하이의 건축들[편집]

  • 자광각(紫光阁) : 중하이 서북쪽에 있는 정면 7칸의 2층 전각이다. 원래 명나라 정덕제 때는 평대(平臺)위에 황색 유리기와를 올린 작은 전각이 있었으나 가정제 때 이를 밀고 자광각을 지었다. 청나라 강희제 때 중수했고 이후 1760년(건륭 25년)과 1775년(건륭 40년) 두 차례에 걸쳐 증축했다. 자광각 뒤쪽에는 정면 5칸의 무성전(武成殿)이 있다.
  • 만선전(万善殿) : 중하이 동쪽에 있으며 원래의 이름은 숭지전(崇智殿)이었으나 순치제 때 만선전으로 개칭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약사불·아미타불의 삼세불상(三世佛像)이 모셔져 있다. 만선전 뒤쪽에는 천성전(千圣殿)이 있으며 내부에는 7층으로 된 천불탑이 봉안되어 있다.
  • 수운사(水云榭) : 중하이 동쪽 물가에 자리한 정자로, 베이징의 여덟 가지 경치를 가리키는 연경8경(燕京八景) 중 '태액추풍(太液秋风)'에 해당하는 곳이다.
  • 섭정왕부(摄政王府) : 중하이의 서북쪽에 위치한 건물군이다. 섭정왕부가 있는 땅은 원래 서원(西苑) 바깥에 있었지만 1881년(광서 11) 서원을 확장하면서 새로 포함된 것이다. 서태후는 이곳에 집영유(集灵囿)라는 새로운 원림을 지으려 했으나 무위에 그쳤고 1909년(선통 원년) 선통제의 생부인 순친왕 재풍이 섭정왕부를 건축했는데 은자 206만 냥이 들어갔다. 하지만 1911년(선통 4년)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중화민국 국무원의 소유가 되어 총리 관저 및 집무실로 사용되었으나 1918년에는 당시 대총통인 쉬스창이 거주하는 관저로 이용되었다가 1923년에 차오쿤이 회인당으로 관저를 옮기고 나서는 육군부, 해군부, 북평[6]시정부가 사용했다. 왼쪽에 있는 사진은 저우언라이 총리가 머물던 서화청(西花厅)으로, 섭정왕부 내 서화원(西花园)에 보존되어 있다.
  • 신화문(新华门) : 중난하이의 정문으로 정면 7칸의 2층 건물이며 1층의 중앙 3칸이 출입문으로 되어 있다. 건륭제 때 보월루(宝月楼)로 지어졌으나 신해혁명 후 위안스카이가 누를 문으로 바꾸고 '신중화민국(新中華民國)'에서 이름을 따 신화문으로 개칭했다.
  • 영대(瀛台) : 명나라 때는 남대(南台)로 불리었으며 청나라 순치제와 강희제 때 대규모로 전각을 세운 뒤 영대로 개칭했다. 영대 내에는 인요문(仁曜门), 상란각(翔鸾阁), 함원문(涵元门), 함원전(涵元殿), 봉래각(蓬莱阁), 경운전(庆云殿), 경성전(景星殿), 조운루(藻韵楼), 기사루(綺思楼), 보동서옥(补桐书屋), 수안실(随安室), 대월헌(待月轩), 경광정(镜光亭), 장춘서옥(长春书屋), 수방윤(潄芳润) 등이 있다. 1898년 (광서 24년)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서태후에 의해 이곳에 감금된 광서제가 10년 동안 유폐 생활을 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은 곳이기도 하다.
  • 풍택원(豊泽园) : 영대의 북쪽에 있으며 강희제 때 지어졌다. 풍택원의 중심 건축인 돈서전(惇敍殿)은 광서제 때 이년전(颐年殿), 중화민국 때 이년당(颐年堂)으로 개칭되기도 했다. 이년당 동쪽의 국향서옥(菊香书屋)은 마오쩌둥 주석이 1949년부터 1966년까지 거주하던 곳이었다. 풍택원 내에는 하풍혜로정(荷风蕙露亭), 숭아전(崇雅殿), 정게헌(静憇轩), 회원재(怀远斋), 순일재(纯一斋), 정곡(静谷), 춘우재(春耦斋) 등이 있다.
  • 근정전(勤政殿) : 조선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 한자까지 똑같다. 중하이와 난하이 사이에 있어서 근정전의 정문인 덕창문(德昌门)은 난하이의 북문이 된다. 시진핑의 집무실이 여기에 있다.
  • 회인당(怀仁堂) : 원래 위치는 춘우재 북쪽에 있었으며 광서제 때 중건하면서 의란전(仪鸾殿)이라 이름 짓고 서태후가 거주했으나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한 후 훼손되자 중하이 서쪽에 새로 의란전을 세웠다. 새로 지어진 의란전은 뒷날 불조루(佛照楼)로 바뀌었고, 위안스카이가 칭제하면서 옛 의란전을 회인당으로 개칭했다. 1923년에 대총통으로 당선된 차오쿤이 섭정왕부에서 이곳으로 총통 관저를 옮겨 국민정부의 수립 때까지 총통 관저로 사용되었다. 신중국 설립 며칠 전인 1949년 09월 말 이곳에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가 개최되었다.
  • 숙청원(淑清院) : 남해의 동북쪽에 있으며 건륭제 때 세워진 소규모 원림이다. 숙청원 내에는 보광실(葆光室), 봉영재망전(蓬瀛在望殿), 운회루(云绘楼), 청음각(清音阁), 일지각(日知阁), 만자랑(万字廊), 쌍환만수정(双环万寿亭) 등이 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중난하이〉, 《나무위키》
  2. 중난하이〉,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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