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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 | === 조선 전기 === | ||
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즉위 3년 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년(태조 3년)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 및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 처음 새 궁궐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남경 이궁(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협소하여,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웠다. 새 궁궐 경복궁은 태조 4년(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 29일에 1차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 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즉위 3년 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년(태조 3년)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 및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 처음 새 궁궐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남경 이궁(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협소하여,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웠다. 새 궁궐 경복궁은 태조 4년(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 29일에 1차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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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중종 때 화재로 동궁전이 불타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전 경복궁에 일어난 가장 큰 화재는 명종 때 발생했다. 명종 8년(1553년) 9월에는 강녕전에 큰 불이 나서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을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역대로 내려오던 진귀한 보배와 서적, 왕과 왕비의 고명, 의복, 거마 등이 불타버렸다. 불이 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1554년 봄에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9월에 낙성하였다. 이때 동원한 인력은 부역 2,200명, 품팔이꾼 1,500명이었다고 한다. 명종 15년 때 건립한 경복궁을 그린 ‘한양 궁궐도’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 | 이후 중종 때 화재로 동궁전이 불타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전 경복궁에 일어난 가장 큰 화재는 명종 때 발생했다. 명종 8년(1553년) 9월에는 강녕전에 큰 불이 나서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을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역대로 내려오던 진귀한 보배와 서적, 왕과 왕비의 고명, 의복, 거마 등이 불타버렸다. 불이 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1554년 봄에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9월에 낙성하였다. 이때 동원한 인력은 부역 2,200명, 품팔이꾼 1,500명이었다고 한다. 명종 15년 때 건립한 경복궁을 그린 ‘한양 궁궐도’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 | ||
− | === | + | === 임진왜란과 조선 후기 === |
+ | ;임진왜란 | ||
+ | 명종 때 중건된 지 38년 만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선조가 파천을 떠나자 도성이 아노미가 되면서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들은 일본군이 입성하기도 전에 백성들의 손에 이미 모조리 불에 타 소실되고 말았다. 선조실록에서는 선조수정실록처럼 왜 궁궐에서 불이 났는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 같지는 않다. | ||
+ | {{인용문| | ||
+ | : 거가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보물(寶物)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노비의 문적(文籍)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景福宮)·창덕궁(昌德宮)·창경궁(昌慶宮)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 창경궁은 바로 순회세자빈(順懷世子嬪)의 찬궁(欑宮)이 있는 곳이었다. | ||
+ | |||
+ | :- 선조수정실록 26권 28번째 기사 | ||
+ | }} | ||
+ | |||
+ | 왜란기의 경복궁은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대로 선조가 파천하자마자 성난 군중들이 궁성과 형조, 장례원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있다. | ||
+ | |||
+ | 그러나 방화 주체가 조선 백성들이 아닌 '''일본군'''이라는 설도 제기되기도 한다. 일단 인조대에 쓰인 선조수정실록은 《징비록》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적었는데, 당시 파천에 함께했던 류성룡도 직접 보고 쓴 기록이 아니라는 한계를 가지는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파천 당일 폭우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궁궐에 화재가 날 수 없다는 점을 내세운다. | ||
+ | |||
+ | 한성 함락 당시 경복궁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일본 측의 기록이 나오면서 일본군이 방화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도 있지만, 해당 기록의 출처인 《조선정벌기》는 정작 임진왜란 때 참전도 하지 않은 저자 오제키가 후대에 상상력을 가미해 쓴 군담소설에 가깝기 때문에 경복궁을 보았다는 진술은 신뢰하기 어렵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본 것은 4대문과 종묘 정도였다. | ||
+ | |||
+ | 그러나 조선정벌기 뿐만 아니라 문화재청에서 간행한 《경복궁 변천사》에서 당시 일본군에 종군한 승려인 제다쿠가 쓴 《조선일기》라는 책에 한성에 입성하고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기록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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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도 후에는 월산대군의 옛 집(광해군 3년 이후로 경운궁, 지금 덕수궁 일부)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이후의 왕들은 대부분 창덕궁에서 정무를 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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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서울에서 퇴각하면서 대량 학살과 방화를 한 기록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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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용문| | ||
+ | :왜적이 경성 백성을 대량 학살하였다. 행장(行長) 등이 평양의 패전을 분하게 여긴 데다가 우리나라 사람이 밖에 있는 명나라 군사와 몰래 통하는가 의심하여 도성 안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였다. 오직 여인들만이 죽음을 면하였으므로 남자들 중에는 혹 여자 옷으로 변장하고 죽음을 면한 자도 있었다. '''공공기관의 건물이나 개인의 가옥도 거의 불태워버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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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월 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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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다쿠가 입성해 경복궁 답사기를 썼을 때만 해도 궁궐의 화재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으나, 고니시가 서울에서 퇴각할 때는 대대적인 방화가 일어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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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후 [[한양]]으로 환도한 [[선조]]는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의 사저(私邸)를 개수하여 임시 궁궐로 사용했고 그곳을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 선조는 경복궁 대신 창덕궁부터 우선 중건하도록 결정하여 1605년부터 창덕궁 중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사실 선조는 경복궁 먼저 중건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착공에 들어갔지만, 경복궁 터가 너무나 황폐화되어 복구하는 데 엄청난 물자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되자 결국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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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해군]]은 즉위 후 중건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창경궁]]]을 재건하였고, 새로 [[경희궁]]과 인경궁을 짓는 등 궁궐병이라 불릴 정도로 여러 궁궐을 동시 다발적으로 지었지만, 경복궁은 끝내 중건하지 않았다.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경복궁 중건을 일부러 피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경복궁은 조선 후기 내내 중건되지 못했고 궁궐 터는 일반인 출입금지 지역으로 묶인 채 270여 년간 벌판으로 방치되고 있었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의령남씨가전화첩의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를 보면 영조가 근정전이 불타고 남은 축대 위에서 신하들에게 하례를 받는 모습이 있어, 그냥 아무 관리 없이 방치된 것은 아니고 나라에서 관리는 지속해온 것으로 보인다.경복궁은 울창한 산림에 둘러싸인 주변 환경에 힘입어 조선 시대에 이어 구한말까지 범의 주요 출몰지역 중 하나였다. 또 조선시대에 호랑이라 기록되던 '범' 중 일부는 표범이었는데, 조선시대 한양에서 서식했던 '도시표범'에 대한 연구를 이어오던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과 런던동물원은 한양에 출몰하였던 이러한 '도시표범'들이 300년의 세월 가까이 비어있던 경복궁을 은거지로 삼아 숨어있다가 어두워지면 한양 도심으로 나와 사냥에 나섰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버려진 경복궁은 맹수들에게 있어 이상적인 서식지였는데, 주요 사냥터인 도심지는 물론 주변의 산과도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즉 낮에는 경복궁의 폐허나 인왕산, 북악산 등에 은거하다가 밤이 되면 도시로 기어나왔다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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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선대원군 중건 | ||
+ | 그 후로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다가 1864년 고종의 섭정 자격으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집권 이듬해인 1865년,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경복궁 중건에 착수했다. 2년 후인 1867년에 마침내 경복궁이 중건이 완료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은 7,225칸 규모였다. 경복궁 중건에 소요되는 재원은 당시 조선 1년 예산의 10배 가량 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이를 조달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원납전]]을 걷고 [[당백전]]까지 발행하는 등 무리한 정책을 펼쳤는데, 당백전은 [[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조선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고 이는 결국 그의 실각 원인이 되었다. | ||
+ | |||
+ | 흥선대원군이 국력을 크게 소모해 가면서까지 중건한 경복궁이지만, 정작 실거주자인 [[고종]]은 신축된 경복궁을 좋아하지 않았다. 경복궁에 입주한 지 5년만인 1873년에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 몰래 경복궁 북쪽 구석에 민가 형태의 '''건청궁'''을 지은 후 아관파천 때까지 거의 줄곧 그곳에 거처했다. [[을미사변]]이 벌어진 장소도 건청궁 안 곤녕합이다. 개항 후에는 [[전등]]을 설치하고, [[러시아]]인 건축가인 사바틴을 초빙해 건청궁 내에 있던 관문각을 2층 크기의 양관으로 바꾸는 등의 현대화 작업도 진행되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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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국 을미사변 후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을 단행했다. [[아관파천]] 후 1897년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했고, 그해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환궁 당시 경운궁은 민가를 개조한 전각 두 채만 달랑 남아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고종은 1896년부터 1902년에 걸쳐 6년간 대대적으로 경운궁을 궁궐화하는 공사를 벌였다. 확장 공사라기보다도 그냥 궁궐을 새로 짓는 수준이었다. 공사 당시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다가 경운궁 전각을 세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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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복궁과 다르게 창덕궁 전각은 전혀 헐리지 않았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경운궁 전체가 홀라당 타버렸을 때 고종과 조정은 창덕궁으로 이어할지, 경운궁을 재건할지 두 가지를 놓고 고민했지만, 경복궁을 사용하는 방법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쯤 되면 경복궁에 대한 고종의 태도는 거의 혐오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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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합방조약]] 직후 일장기가 근정전에 걸린 것으로 알려진 바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는 사실이 아니다. | ||
+ | |||
+ | === 일제강점기 === | ||
== 동영상 == | == 동영상 == |
2022년 8월 10일 (수) 11:26 판
경복궁(景福宮, Gyeongbokgung Palace)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청와대로에 있는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 정궁)이다. 1395년(태조 4년)에 창건하였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 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이후 그 임무를 창덕궁에 넘겨주었다가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는 등 많은 전각들이 훼손되었으나, 1990년대부터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등 복원사업을 벌인 덕분에 복원 작업은 현재 거의 완료된 상태이다.
경복궁은 《주례》 〈고공기〉에 입각하여 건축되었다. 3문 3조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외조, 내조, 연조이다. 내조는 근정전을 중심으로 하는데, 궁 밖에서 근정전까지 바깥부터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이다.
경복궁은 조선이 건국된 지 3년여가 지난 1394년 12월에 착공되어 1395년 9월 말에 1차 완공되었다. 흔히 비교되는 명나라의 자금성보다 먼저 지어진 궁전이다. 자금성은 1406년에 착공되어 1420년에 완공되었다.
-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景福)을 모시리라.'라는 시(詩)를 외우고,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고 이름 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구조 및 지리
원래는 신진사대부가 계획한 궁궐이기 때문에 '검이불루 화이불치'(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유교 이념을 반영하여 이전 왕조들의 궁궐에 비해 화려한 장식 없이 수수하고 검소한 형태로 지어졌었다. 배치는 유교적인 관점에 따라 삼문삼조의 형태로 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전 조선 전기 동안 조선 왕조의 법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경복궁은 법궁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엄정한 기하학적 공간 분할, 반듯한 축선 상의 건물 배치, 정연한 대칭 구조로 설계되었다. 이궁인 창덕궁(+창경궁)과 양궐 체제를 갖췄는데, 임금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두 궁궐을 번갈아 가며 사용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그 자리만 출입이 금지된 채 200여년 동안 재건되지 못하다가 흥선대원군이 재건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참고로 흥선대원군이 지은 경복궁과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경복궁의 모습은 다소 차이가 있다. 세종이 왕자 시절 2층에서 자다가 병이 났다는 등 다층 건물에 대한 기록이 눈에 띈다. 또한, 근정전에 청기와를 얹었다는 언급 등 차이점이 보이며,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 왕실에서 제작했다는 석가탄생도 등에서 묘사된 건축 양식을 통해 그 당시의 경복궁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최대 규모 5,000칸까지 서서히 확장되었던 이전 건물과 다르게 흥선대원군은 단숨에 7,400칸짜리로 중건했다. 단숨에 1.5배 크기가 된 것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해 있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경복궁역이며, 5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안국역이나 광화문역에서도 걸어갈 수 있다. 경복궁 앞길에는 각종 관청이 있어 육조 거리라고 불렸으며, 이 길이 오늘날의 세종대로다. 당대에도 국가의 중심 거리였기 때문에 육조 거리는 지금의 세종대로의 폭과 거의 같은 폭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현재 세종대로 중앙에는 광화문광장이 있다. 주변에는 청와대, 헌법재판소, 정부서울청사, 주한미국대사관, 세종문화회관 등이 있으며, 인사동거리도 경복궁에서 꽤 가깝다.
역사
조선 전기
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즉위 3년 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년(태조 3년)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 및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 처음 새 궁궐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남경 이궁(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협소하여,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웠다. 새 궁궐 경복궁은 태조 4년(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 29일에 1차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해인 1395년 음력 10월 태조는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이 지어졌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 높이 20자 1치, 둘레 1813보(步: 6尺)의 담을 쌓고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을 두었다. 조하를 받는 정전인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을 비롯한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은 편전이며,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에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실록 내용을 통해 창건 당시 경복궁의 기본 배치를 짐작하자면, 경복궁은 남북축 선상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문, 정전, 보평청, 연침의 순서로 남북 직선축을 따라 중심 전각이 나란히 놓이고, 중심 전각 주변에는 행각이 좌우 대칭으로 네모반듯하게 감쌌으리라 추정된다. 그리고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보는 외전은 궁궐 앞쪽에, 내전은 뒤쪽에 배치하는데, 내전의 각 전각과 정전은 천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의 외곽 울타리인 궁성을 건설한 것은 궁궐을 완성한 지 3년 뒤인 태조 7년(1398년)의 일이었는데, 이 해 1월에 민정을 징발하여 궁성 공사에 들어갔다. 공사는 겨울 동안에 대체적인 궁성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그 해 7월이 경기 좌도와 충청도 군사 3,700명을 동원하여 궁성을 수축하였다. 궁성에는 정문인 남문 외에 동문과 서문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북쪽은 궁성과 문을 갖추지 못하고 목책으로 둘러쳐 있다가 세종대에 와서야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궁궐이 창건되었을 때 실록 기록 말미에 "(뒤에)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고 나와있어서, 궁성 문 남쪽에 의정부나 육조 등 여러 관청이 좌우로 조성된 것은 궁성과 궁문이 조성된 태조 7년 때로 추정된다.
경복궁과 광화문의 축을 북한산과 관악산을 연결하는 축선과 일치하도록 서쪽으로 틀어지게 지었는데, 무학대사가 '관악산은 불(火)의 산이기 때문에 관악산과 북한산을 축으로 하면 도시가 화를 당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광화문 앞길 130m 구간만 경복궁과 같은 축선으로 배치하고, 그 다음부터 종로 입구까지는 도로의 중심이 동쪽으로 최대 39m 가량 틀어진 구조로 조성하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1399년 정종이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4년 만에 경복궁은 빈 궁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후 1405년 태종이 한양 재천도를 단행했는데, 태종은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창덕궁을 새로 건설하여 이곳으로 들어왔다. 태종은 경복궁을 매우 꺼려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했다. 태종이 1405년 한양으로 재천도를 명하고 개성을 떠나 한양에 도착했을 때 아직 창덕궁이 완공되지 않아 입궐이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이때 태종은 경복궁에 들어가지 않고 민가에서 일주일 정도 숙박한 후에 창덕궁에 입궐했다. 태종이 경복궁을 얼마나 꺼렸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당시 창덕궁은 꽤나 짧한 일정 속에 지어졌는데, 경복궁에 비해 매우 작은 규모였고 정전(正殿)인 인정전은 3칸 규모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1411년 태조가 승하한지 3년이 지나자 사간원에서 ‘태조께서 지으신 경복궁을 비워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요지의 상소를 올려 태종에게 경복궁에 다시 거처하라고 주청한 일이 있다. 그러나 태종은 꽤 솔직하게 ‘내가 무인년에 말하기 부끄러운 일을 했는데 어찌 차마 경복궁에 거처할 수 있겠느냐’며 거부하였다. 관련 실록 기사 그러나 태종은 사신 맞는 등 큰 의례나 행사가 있을 때 경복궁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태종 본인도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라 여겼고, 본인이 계속 창덕궁에 거처한다면 후세 왕들도 경복궁에 거처하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결국 태종은 경복궁으로 이어할 뜻을 밝히고 박자청에게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추가적인 중수 공사를 명하였다. 1412년에는 연못에다가 어찌 건물을 올릴 수 있느냐는 신하들의 우려도 불구하고 경회루 건설을 지시했고, 박자청은 이를 실현시켰다. 왕세자 양녕대군이 친필로 직접 경회루의 현판을 써서 태종을 기쁘게 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다만 태종대에 건설된 누각은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현재의 것보다는 작은 규모였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경회루 하단의 석조 기둥들은 태종대에 만들어진 것이 임진왜란 때 불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경복궁 터를 묘사한 그림을 보면 황폐한 가운데 경회루의 석조 기둥들은 남아있는 것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태종은 핑계를 대며 미루다가 1413년 5월말 드디어 경복궁으로 이어했다. 그러나 불과 두달 만에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창덕궁으로 돌아와서는 멋쩍었는지 신하들에게 "더위를 피해 경복궁에 머물렀느니라"라고 말했다. 이후에도 가끔 경복궁으로 이어했지만 주로 창덕궁에 머물렀던 곳으로 보인다. 그래서 태종 실록에만 경복궁으로 이어, 창덕궁으로 환어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후 세종실록부터 임진왜란 때까지는 경복궁으로 환어했다는 표현이 실록에 지속되므로 경복궁이 계속 왕들의 거처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세종대부터는 경복궁은 다시 왕이 실제 거처하는 정궁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세종은 상왕 태종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주로 창덕궁에 거처했지만, 태종이 승하한 후 세종은 경복궁 공사를 명하였고, 집권 중기 이후부터는 거의 경복궁에 머물면서 정사를 돌봤다. 특히 비만 및 눈병으로 고생하던 후기에는 거의 경복궁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경복궁에서 세종의 왕도정치의 흔적이 녹아 있는 상징적인 건물 중 하나가 집현전 전각인데, 왕이나 왕족이 사용하지 않는 궐내각사에 불과한 건물임에도 불과하고 집현전은 경복궁에서도 근정전과 경회루 다음 가는 규모의 크고 아름다운 건물로 건설되었다. 세종대에 여러 전각이 새로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초기에 다소 작게 건설된 사정전 등의 기존 건물들을 중수하기도 했다. 1431년에는 광화문이 세워졌다.
이처럼 경복궁은 세종대를 거치면서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 전기 경복궁의 기본적인 형태는 세종 때 완성되었다. 이후 경복궁은 조선 전기 내내 조선의 정궁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세종대 이후에도 경복궁은 여러 왕을 거치면서 지속적인 증·개축을 거쳤다. 근정전과 광화문에는 청기와가 올라가기도 했다.
이후 중종 때 화재로 동궁전이 불타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전 경복궁에 일어난 가장 큰 화재는 명종 때 발생했다. 명종 8년(1553년) 9월에는 강녕전에 큰 불이 나서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을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역대로 내려오던 진귀한 보배와 서적, 왕과 왕비의 고명, 의복, 거마 등이 불타버렸다. 불이 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1554년 봄에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9월에 낙성하였다. 이때 동원한 인력은 부역 2,200명, 품팔이꾼 1,500명이었다고 한다. 명종 15년 때 건립한 경복궁을 그린 ‘한양 궁궐도’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
임진왜란과 조선 후기
- 임진왜란
명종 때 중건된 지 38년 만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선조가 파천을 떠나자 도성이 아노미가 되면서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들은 일본군이 입성하기도 전에 백성들의 손에 이미 모조리 불에 타 소실되고 말았다. 선조실록에서는 선조수정실록처럼 왜 궁궐에서 불이 났는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 같지는 않다.
- 거가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보물(寶物)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노비의 문적(文籍)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景福宮)·창덕궁(昌德宮)·창경궁(昌慶宮)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 창경궁은 바로 순회세자빈(順懷世子嬪)의 찬궁(欑宮)이 있는 곳이었다.
- - 선조수정실록 26권 28번째 기사
왜란기의 경복궁은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대로 선조가 파천하자마자 성난 군중들이 궁성과 형조, 장례원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방화 주체가 조선 백성들이 아닌 일본군이라는 설도 제기되기도 한다. 일단 인조대에 쓰인 선조수정실록은 《징비록》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적었는데, 당시 파천에 함께했던 류성룡도 직접 보고 쓴 기록이 아니라는 한계를 가지는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파천 당일 폭우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궁궐에 화재가 날 수 없다는 점을 내세운다.
한성 함락 당시 경복궁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일본 측의 기록이 나오면서 일본군이 방화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도 있지만, 해당 기록의 출처인 《조선정벌기》는 정작 임진왜란 때 참전도 하지 않은 저자 오제키가 후대에 상상력을 가미해 쓴 군담소설에 가깝기 때문에 경복궁을 보았다는 진술은 신뢰하기 어렵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본 것은 4대문과 종묘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정벌기 뿐만 아니라 문화재청에서 간행한 《경복궁 변천사》에서 당시 일본군에 종군한 승려인 제다쿠가 쓴 《조선일기》라는 책에 한성에 입성하고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기록도 있다.
환도 후에는 월산대군의 옛 집(광해군 3년 이후로 경운궁, 지금 덕수궁 일부)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이후의 왕들은 대부분 창덕궁에서 정무를 본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서울에서 퇴각하면서 대량 학살과 방화를 한 기록이 있다.
- 왜적이 경성 백성을 대량 학살하였다. 행장(行長) 등이 평양의 패전을 분하게 여긴 데다가 우리나라 사람이 밖에 있는 명나라 군사와 몰래 통하는가 의심하여 도성 안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였다. 오직 여인들만이 죽음을 면하였으므로 남자들 중에는 혹 여자 옷으로 변장하고 죽음을 면한 자도 있었다. 공공기관의 건물이나 개인의 가옥도 거의 불태워버렸다.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월 1일
지다쿠가 입성해 경복궁 답사기를 썼을 때만 해도 궁궐의 화재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으나, 고니시가 서울에서 퇴각할 때는 대대적인 방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후 한양으로 환도한 선조는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의 사저(私邸)를 개수하여 임시 궁궐로 사용했고 그곳을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 선조는 경복궁 대신 창덕궁부터 우선 중건하도록 결정하여 1605년부터 창덕궁 중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사실 선조는 경복궁 먼저 중건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착공에 들어갔지만, 경복궁 터가 너무나 황폐화되어 복구하는 데 엄청난 물자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되자 결국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광해군은 즉위 후 중건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창경궁]을 재건하였고, 새로 경희궁과 인경궁을 짓는 등 궁궐병이라 불릴 정도로 여러 궁궐을 동시 다발적으로 지었지만, 경복궁은 끝내 중건하지 않았다.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경복궁 중건을 일부러 피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경복궁은 조선 후기 내내 중건되지 못했고 궁궐 터는 일반인 출입금지 지역으로 묶인 채 270여 년간 벌판으로 방치되고 있었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의령남씨가전화첩의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를 보면 영조가 근정전이 불타고 남은 축대 위에서 신하들에게 하례를 받는 모습이 있어, 그냥 아무 관리 없이 방치된 것은 아니고 나라에서 관리는 지속해온 것으로 보인다.경복궁은 울창한 산림에 둘러싸인 주변 환경에 힘입어 조선 시대에 이어 구한말까지 범의 주요 출몰지역 중 하나였다. 또 조선시대에 호랑이라 기록되던 '범' 중 일부는 표범이었는데, 조선시대 한양에서 서식했던 '도시표범'에 대한 연구를 이어오던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과 런던동물원은 한양에 출몰하였던 이러한 '도시표범'들이 300년의 세월 가까이 비어있던 경복궁을 은거지로 삼아 숨어있다가 어두워지면 한양 도심으로 나와 사냥에 나섰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버려진 경복궁은 맹수들에게 있어 이상적인 서식지였는데, 주요 사냥터인 도심지는 물론 주변의 산과도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즉 낮에는 경복궁의 폐허나 인왕산, 북악산 등에 은거하다가 밤이 되면 도시로 기어나왔다는 것이다.
- 흥선대원군 중건
그 후로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다가 1864년 고종의 섭정 자격으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집권 이듬해인 1865년,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경복궁 중건에 착수했다. 2년 후인 1867년에 마침내 경복궁이 중건이 완료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은 7,225칸 규모였다. 경복궁 중건에 소요되는 재원은 당시 조선 1년 예산의 10배 가량 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이를 조달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원납전을 걷고 당백전까지 발행하는 등 무리한 정책을 펼쳤는데, 당백전은 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조선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고 이는 결국 그의 실각 원인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국력을 크게 소모해 가면서까지 중건한 경복궁이지만, 정작 실거주자인 고종은 신축된 경복궁을 좋아하지 않았다. 경복궁에 입주한 지 5년만인 1873년에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 몰래 경복궁 북쪽 구석에 민가 형태의 건청궁을 지은 후 아관파천 때까지 거의 줄곧 그곳에 거처했다. 을미사변이 벌어진 장소도 건청궁 안 곤녕합이다. 개항 후에는 전등을 설치하고, 러시아인 건축가인 사바틴을 초빙해 건청궁 내에 있던 관문각을 2층 크기의 양관으로 바꾸는 등의 현대화 작업도 진행되기도 했다.
결국 을미사변 후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을 단행했다. 아관파천 후 1897년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했고, 그해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환궁 당시 경운궁은 민가를 개조한 전각 두 채만 달랑 남아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고종은 1896년부터 1902년에 걸쳐 6년간 대대적으로 경운궁을 궁궐화하는 공사를 벌였다. 확장 공사라기보다도 그냥 궁궐을 새로 짓는 수준이었다. 공사 당시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다가 경운궁 전각을 세웠다.
경복궁과 다르게 창덕궁 전각은 전혀 헐리지 않았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경운궁 전체가 홀라당 타버렸을 때 고종과 조정은 창덕궁으로 이어할지, 경운궁을 재건할지 두 가지를 놓고 고민했지만, 경복궁을 사용하는 방법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쯤 되면 경복궁에 대한 고종의 태도는 거의 혐오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보인다.
한일합방조약 직후 일장기가 근정전에 걸린 것으로 알려진 바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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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 홈페이지 - https://www.royalpalace.go.kr/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 https://www.heritage.go.kr/heri/html/HtmlPage.do?pg=/palaces/palacesRoyalInfo.jsp&pageNo=2_1_1_1
- 〈경복궁〉, 《위키백과》
- 〈경복궁〉, 《나무위키》
- 〈경복궁/역사〉, 《나무위키》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