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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주사'''(法住寺)는 대한민국의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의신이 창건한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다. 사실상 근대 이전에 만들어진 목탑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팔상전으로 유명한 절이다. 이 외에도 커다란 금동미륵불상이나 각종 국보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중요한 절로, 신앙유적으로서의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인정 받아 2009년 사적 제503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 | '''법주사'''(法住寺)는 대한민국의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의신이 창건한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다. 사실상 근대 이전에 만들어진 목탑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팔상전으로 유명한 절이다. 이 외에도 커다란 금동미륵불상이나 각종 국보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중요한 절로, 신앙유적으로서의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인정 받아 2009년 사적 제503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 개요 == | == 개요 == |
2022년 11월 2일 (수) 14:24 기준 최신판
법주사(法住寺)는 대한민국의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의신이 창건한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다. 사실상 근대 이전에 만들어진 목탑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팔상전으로 유명한 절이다. 이 외에도 커다란 금동미륵불상이나 각종 국보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중요한 절로, 신앙유적으로서의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인정 받아 2009년 사적 제503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목차
개요[편집]
속리산 법주사 일원은 법주사를 중심으로 속리산의 천왕봉과 관음봉을 연결하는 일대 18,590,000m를 말한다.
속리산은 해발 1,507m의 천왕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어서 구봉산이라고 불렸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속리산 일원은 대한 8경 중의 하나로 제2금강 또는 소금강으로도 불리는데, 계절의 변화에 따른 경치가 뛰어나며 기암, 기석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속리산의 대표 사찰인 법주사는 533년 의신조사가 서역에서 불경을 가져와 절을 지을 곳을 알아보던 중에 산세의 험준함을 보고 이곳에 세운 절이라고 전한다. 혜공왕 12년에 진표율사가 대규모로 중창하였으며, 고려시대를 거치며 현재의 규모를 가추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전소되었다. 이후 인조 2년에 사명대사 및 벽암대사가 중건하고 증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화유산은 국내 유일의 목탑인 보은 법주사 팔상전을 비롯하여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보물 법주사 석련지,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등 국보 3점, 보물 13점, 천연기념물 1점, 도지정문화재 24점이 있다.
속리산 법주사 이루언은 1966년 사적 및 명승 제4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명승으로 변경 지정되었다. 또한 법주사는 2018년 7월 3일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 공주 마곡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속리산에는 법주사를 포함하여 복천암, 탈골암 등 10개의 전통 사찰이 있다.
역사[편집]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의신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의신이 돌아오면서 백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절에 있었기 때문에 법주사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법주사는 31본산(本山)의 하나로 고려 숙종이 그 아우 의천을 위하여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가 3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1년(1341년)에는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를 세웠다.
조선 고종 9년(1872년)에는 경복궁 재건에 사용할 당백전을 주조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사찰 내의 커다란 미륵장륙상과 철당간이 수거되기도 했다. 현재는 오랜 노력 끝에 대형 금동미륵불상이 자리잡게 되었으며, 철당간은 복구를 해 놓았다. 보통 철당간을 고정하는 돌로 된 당간지주만 존재하는 절이 많은데 철당간까지 복원된 드문 사례다. 법주사의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의 것이다.
1974년쯤에 금강역사 한 쌍•보현보살•문수보살 등이 만들어져서 금강문 안에 안치되었다.
가람[편집]
경내에는 커다란 중층 건물인 대웅보전, 특이한 양식의 원통보전, 쌍사자 석등(국보 5호), 철 당간(幢竿), 부도들 등 상당히 귀중한 문화재가 많지만, 현존 유일 목탑인 팔상전과 높이 33m의 거대한 불상 때문에 가볍게 지나치기 쉽다. 그중 최고는 나름 국보인데도 가장 지명도 빠지는 석연지가 아닐까.
팔상전[편집]
- 보은 법주사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5층 목조탑이다. 법주사를 처음 만들 때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라진 것을 선조 38년부터 인조 4년에 걸쳐 벽암대사가 주관하여 다시 세웠다.
- 팔상전은 두 단의 석조 기단 위에 세워져 있고 기단 네 면의 중앙에는 돌계단이 있다. 이 기단과 계단은 통일 신라 때의 것이다. 각 층의 밑면은 정사각형이며, 1층과 2층은 다섯 칸, 3층과 4층은 세 칸, 5층은 두 칸으로 올라갈수록 너비가 줄어들어 안정감을 준다.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는 공포는 1층부터 4층까지는 주심포식 이고 5층은 다포식 이다. 지붕은 꼭대기를 중심으로 네 개의 지붕면이 뻗어 있는 사모지붕이며 지붕 위 꼭대기 부분은 조선 시대의 것으로 지금까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필상전 내부 한 가운데에는 5층 전체를 통과하는 기둥이 있다. 이 기둥의 네 면에는 팔상도가 두 폭씩 있고 그 앞에는 열반상과 삼존 불상이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목조탑으로 건축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 법주사 설명판
국보 제55호 법주사 팔상전(法住寺 捌相殿). 이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탑 중 유일하게 근대 이전에 지어진 5층 목탑이다. 임진왜란 때 한 번 불탔으나 인조 2년(1624)에 승려 벽암이 주도하여 다시 지었다. '팔상전'이라는 이름 때문에 8층 목탑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5층이다. 벽면에 석가모니 부처의 일생에서 중요한 8가지를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있어서 '팔상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목탑의 전성기였던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이후의 목탑이라 그런지 전형적인 고대식 목탑과는 달리 외형이나 구조가 상당히 특이한 편이다. 거대한 중심 기둥인 심주를 중심으로 한 연속구조인데, 내부는 통층이므로 사람이 걸어 올라갈 수는 없다. 높이는 22.7m, 평면은 5칸으로 정방형이다.
임진왜란 이전 팔상전은 1층의 평면 역시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보다 날렵한 일반적인 목탑의 형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재건되면서 1층 면적이 늘어나 지금의 모습이 된 것. 이에 대해서 목탑 구조가 발전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연구자도 있고, 기술이 퇴보해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지었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대웅보전[편집]
보물 제 915호, 얕은 기단 위에 서 있는 중층인 이 건물은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의신조사가 창건하고, 인조 2년(1624년)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총 120간, 건평 170평, 높이 약 20m에 이르는 대규모의 건축물이다.
내부에는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3신불이 안치되어 있다. 중앙에 봉안한 불상은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다는 진여의 몸인 법신 비로자나불상이고, 좌측에 안치한 불상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한 과보로 나타날 보신의 노사나불(아미타불)상이며, 우측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화신으로 나투신 석가모니불상이다.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은 실내 안존불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이다. 세 분 부처님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우리 사람에게는 정신 즉 마음이 있고, 공부를 하면 지식이 있게 되는 즉 덕이 있고, 사람마다 제각기 육체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이 셋을 포용하고 있다. 법당의 가운데 부처님은 마음을, 왼쪽 부처님은 덕을, 그리고 오른쪽 부처님은 육신을 뜻한 것이다. 이렇듯 부처님은 원래 한 분이지만 우리 중생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세 몸으로 모셔 놓은 것이다.
원통보전[편집]
보물 제916호(1987년 3월 9일 지정).
정사각형에 사모지붕을 얹은 특이한 형태의 건물.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지만,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양식으로 남아있는 건물이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법주사가 불에 탈 때 같이 소실되었으나 인조 25년(1647)에 새로 지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또한 원통보전 안에는 보물 제 1361호 목조관음보살 좌상을 모셨다. 복장 안에서 나온 불상 조성기에는 효종 6년(1655)에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용화보전[편집]
원래 미륵불을 주불로 모시는 용화보전이라는 전각이 있었다. 35칸에 2층으로, 중심 법당의 역할을 맡았으며 내부에 미륵장륙상을 모셨다. 이 용화보전은 매우 화려했다고 하는데 법주사의 중심 전각이었다. 하지만 고종 9년(1872) 당백전 주조를 이유로 장륙상이 압수되면서 건물도 헐렸다. 이후 그 자리 아래에 현재 볼 수 있는 거대한 금동미륵입상을 세웠다.
금동미륵입상[편집]
- 신라 혜공왕 12년 (서기 776년)에 진표율사가 7년간의 노력 끝에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해 모셨다.
- 그때부터 모신 미륵부처님을 조선조 고종 9년 (서기 1872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축조함에 소요되는 자금마련이라는 구실로 당백전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불산을 몰수해 갔다.
- 일제치하인 1939년에 장석상 당시 주지스님이 대시주 김수곤의 후원 하에 김복진 조각가에게 의뢰하여 시멘트 부처님을 조성 하던 중 약 80%의 공정상태에서 6.25전쟁으로 중단되었다.
- 1963년 박추남 주지스님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과 이방자 여사의 시주로 복원불사가 재개되어 1964년 5월에 시멘트미륵부처님이 완성, 회향되었다.
- 1986년 류원탄 주지스님 당시, 붕괴직전의 시멘트미륵부처님을 다시 조성해 모셨다. 기존조성 시멘트불상의 크기와 형상을 그대로 복사해서 청동불로 바꾼 것이다.
- 2000년에 들어서, 석지명 주지스님이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해서 국난극복과 민족화합, 2002 한,일 월드컵행사의 성공 개최 및 세계평화를 발원하며 검푸른 청동녹을 벗겨내고 개금불사를 시작했다. 2년여의 오력으로 2002년 6월 7일 금동미륵대불 회향대법회를 갖게 되었는데 본래의 금동미륵부처님을 복원한 셈이다.
- 개금방법은 건식전기도금공법으로 순금 3미크론 두께로 연도금면적 900m^2에 황금 20Kg이 소요되었고, 재원은 신심어린 3만여 불자의 시주금으로 충당되었으며, 공사 연 동원인력은 4,500여명이었다.
- 높이 33 m, 무게 160톤. 거대한 미륵상은 청동불상 중에서는 세계 최대의 높이였다고 한다. 이 기록은 1993년에 홍콩의 포린 사원에 세워진 34 m짜리 천단대불 좌상이 깨트렸다.
- 미륵입상 설명판
금동미륵대불은 용화정토에 이르러 깨달음의 법을 설하시는 미래의 미륵부처님의 현존을 의미한다. 화강석으로 만든 높이 약 8m에 이르는 기단 위에 높이 약 25m의 거대한 이 청동대불은 국내에서 최대의 규모이며, 소요된 청동은 약 160톤에 이른다.
조성 당시, 불신을 13등분하고 다시 각 등분한 것을 4조각으로 나누어 총 52조각을 용접하고 이어 붙여 올라가는 어려운 공법으로 조성된 미륵불이다. 불기 2534년 4월 11일, 6년간의 발원으로 조성공사 후 점안의식 과정에서 세 차례에 걸쳐 하늘이 환하게 열리며 5색 서광이 하늘을 수놓고, 흰 광선이 미륵불로부터 치솟았다고 이 자리에 참석했던 불제자들은 전하고 있다.
금동미륵대불 기단부 안에는 미륵보살께서 머물고 계신 도솔천의 모습을 형상화시킨 용화전이 있으며, 용화전 벽면에는 13개의 미륵십선도가 부조되어 있다.
그 후 이 청동미륵대불에 대한 개금불사가 불기 2546년 6월에 회향되었다.
쌍사자석등[편집]
국보 제5호인 쌍사자석등은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10척에 이르는 8각석등으로 두 마리의 사자가 마주 서서 뒷발로 복련석을 디딤하여 앞발로 양련석을 받들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자가 디딤한 복련석은 8각 지대석 위에 놓여 있으며, 양련석 주위에는 이중으로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신라시대 석조예술품 중 뛰어난 걸작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철확[편집]
신라 성덕왕 때 주조되었다고 전해오며 높이 1.2m, 직경 2.87m, 두께 10.8cm의 거대한 이 쇠솥은 신도 3만 명이 먹을 장국을 끓이던 솥이라고 하기도 하며,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이 솥을 이용하여 배식하였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금강문[편집]
법주사로 들어오시는 둘째 관문인 금강문에는 금강역사(나라연금강, 밀적금강) 혹은 인왕역사 · 이왕역사라 불리는 호법신장과 사자를 타고 앉은 문수보살상과 코끼리를 타고 앉은 보현보살상이 안치되어 있다.
석연지[편집]
국보 제64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연지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서,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괴임을 만들고 다시 복련을 두른 굄돌을 올렸으며, 그 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연지를 받치고 있다. 원래 이 석연지는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이 있었을 때 그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정토의 연지를 상징하며 화강석으로 조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구품 연화장으로 환희원만 영원무궁 상품상생 광도중생 무량수의 감로천이다. *높이 1.95m, 둘레 6.65m
철당간[편집]
찰주, 찰간이라고도 불리어지기도 하는 것으로 불교 의식 때, 불당을 걸어놓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다. 고려 7대 목종 9년(1006)년에 높이 16m로 주성되었으나 조선 26대 고종 3년(1866년)에 파괴되었으며, 순종 때 높이 22m로 다시 조성된 것이다.
희견보살상[편집]
보물 제 1417호이다. 신라 33대 성덕왕 19년 (720년)경에 조성된 입상으로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으며, 향로 용기의 면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고, 보살상은 앞가슴 부분의 법의가 벌어져 있고, 힘이 들어간 듯한 근육이 조각 자체를 강하게 느껴지게 한다. 구원겁토록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하고 있는 희견보살의 모습을 조성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약 2m, 붉은 화강석 재료의 조각상이다.
관람안내[편집]
속리산 국립공원 입장료는 폐지가 되었지만, 법주사는 문화재 구역으로 관람료가 있다. 법주사 일주문을 통해 문장대를 가시거나 법주사에 가시는 분은 입장료를 내야 한다.
- 어른(19세~70세) : 개인 5,000원. 단체 4,000원
- 청소년/학생(13세~18세) : 개인 2,500원. 단체 2,000원
- 어린이(7세~12세) : 개인 1,000원. 단체 800원
교통안내[편집]
- 서울에서 오시는 길
경부고속도로(105.8km) → 청원JC(청원·상주간 고속도로) →
- 1코스
- 속리산IC(35.5Km) → 직진(402m)후 좌회전 →
- ①구인삼거리(2.1Km)우회전 → 장재삼거리(2.2Km)우회전 → 말티고개 직진 → 속리산법주사
- ②장안삼거리 우회전 → 비룡터널 지나 좌회전 → 갈목고개 직진 → 갈목 삼거리 우회전 → 속리산 법주사
- ③종곡삼거리 우회전 → 동학터널 → 속리산터널 → 중판삼거리 우회전 → 상판삼거리 좌회전 → 속리산법주사
- 2코스
- 보은IC → 보은방면 좌회전 → 이평교에서 속리산방면 우회전 → 종곡삼거리 좌회전 → 동학터널 → 속리산터널 → 중판삼거리 우회전 → 상판삼거리 좌회전 → 속리산법주사
- 강릉에서 오시는 길
영동고속도로(176Km) → 호법분기점(중부고속도로)(77Km) → 남이분기점(경부고속도로)(22Km) → 청원분기점(62.5Km) →
- 1코스
- 속리산IC(35.5Km) → 직진(402m)후 좌회전 →
- ①구인삼거리(2.1Km)우회전 → 장재삼거리(2.2Km)우회전 → 속리산법주사
- ②장안삼거리 우회전 → 비룡터널지나 좌회전 → 갈목고개 직진 → 갈목 삼거리 우회전 → 속리산 법주사
- ③종곡삼거리 우회전 → 동학터널 → 속리산터널 → 중판삼거리 우회전 → 상판삼거리 좌회전 → 속리산법주사
- 2코스
- 보은IC → 보은방면 좌회전 → 이평교에서 속리산방면 우회전 → 종곡삼거리 좌회전 → 동학터널 → 속리산터널 → 중판삼거리 우회전 → 상판삼거리 좌회전 → 속리산법주사
- 부산에서 오시는 길
남해지선 고속도로(19.6Km) → 남해고속도로)(17.1Km) → 창원JC(12.3Km)마산 외곽도로 → 칠원JC(135.4Km)중부내륙고속도로 → 낙동JC(44.3Km)청원상주간 고속도로 →
- 1코스
- 속리산IC(35.5Km) → 직진(402m)후 좌회전 →
- ①구인삼거리(2.1Km)우회전 → 장재삼거리(2.2Km)우회전 → 속리산법주사
- ②장안삼거리 우회전 → 비룡터널지나 좌회전 → 갈목고개 직진 → 갈목 삼거리 우회전 → 속리산 법주사
- ③종곡삼거리 우회전 → 동학터널 → 속리산터널 → 중판삼거리 우회전 → 상판삼거리 좌회전 → 속리산법주사
- 2코스
- 보은IC → 보은방면 좌회전 → 이평교에서 속리산방면 우회전 → 종곡삼거리 좌회전 → 동학터널 → 속리산터널 → 중판삼거리 우회전 → 상판삼거리 좌회전 → 속리산법주사
- 광주에서 오시는 길
동광주IC호남고속도로(104Km) → 논산JC경부고속도로(72.5Km) → 청원JC청원상주간 고속도로
- 1코스
- 속리산IC(35.5Km) → 직진(402m)후 좌회전 →
- ①구인삼거리(2.1Km)우회전 → 장재삼거리(2.2Km)우회전 → 속리산법주사
- ②장안삼거리 우회전 → 비룡터널지나 좌회전 → 갈목고개 직진 → 갈목 삼거리 우회전 → 속리산 법주사
- ③종곡삼거리 우회전 → 동학터널 → 속리산터널 → 중판삼거리 우회전 → 상판삼거리 좌회전 → 속리산법주사
- 2코스
- 보은IC → 보은방면 좌회전 → 이평교에서 속리산방면 우회전 → 종곡삼거리 좌회전 → 동학터널 → 속리산터널 → 중판삼거리 우회전 → 상판삼거리 좌회전 → 속리산법주사
- 버스로 오시는 길
- 서울
- 남부터미널 - 속리산행 버스(3시간 30분 소요) 일일3회
- 동서울터미널 - 속리산행 버스(3시간 30분 소요)일일 13회
- (서울에서 오실 때는 청주까지는 오는 차가 많이 있으니, 청주에 오셔서 환승하시는 것이 편하다. 속리산행 버스도 청주에 정차.)
- 청주 속리산행버스(1시간 30분 소요) 첫차 06:40/막차 20:40/일일26회
- 동대전 속리산행버스(1시간 30분 소요) 첫차 06:30/막차20:40/일일 11회
- 대구, 부산, 광주 대구, 부산, 광주 → 대전 → 속리산행 버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 법주사 홈페이지 - http://beopjusa.org/kor
- 〈법주사〉, 《위키백과》
- 〈법주사〉, 《나무위키》
- 〈법주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younghwan, 〈속리산 법주사, 통일신라 미륵신앙 사찰 모습이 많아 남아 있는 곳〉, 《티스토리》, 2010-09-12
- 권중서 조계종 전문포교사, 〈죽기 전에 꼭 가봐야할 사찰 축생에게도 신심이 있는 것을 알게 해준 보은 법주사]〉, 《불교신문》, 2021-09-20
- 은정진 기자, 〈속리산 법주사, 세월에도 꼿꼿한 목조탑 팔상전〉, 《한경닷컴》, 2018-09-20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