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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위치

칸타해메주(핀란드어: Kanta-Häme)는 핀란드에 위치해 있는 주이다. [1][2]

개요[편집]

칸타해메주의 면적은 5,203㎢이며 인구는 170,000명(2022년)이며 주도는 헤멘린나이다. 남서수오미주, 피르칸마주, 패이얘트해메주, 우시마주와 접하며 11개 지방 자치체를 관할한다.

역사적으로는 핀란드인과 같은 핀우그르계의 해메인이 살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핀란드인에 동화되었다. 스웨덴핀란드 십자군을 일으키면서 처음 당도한 지역 중 하나로, 1260년대에 해메 성이 세워지면서 스웨덴인이 정착했다.

역사적으로 핀란드의 옛 수도 투르쿠와 동쪽 카렐리아의 요충지 비푸리를 이어주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크리스티나 여왕 대인 1634년에 우시마해메 주(Uudenmaan ja Hämeen lääni)가 만들어졌으며, 러시아 제국 치하 핀란드 대공국 시대인 1831년 우시마주(Uudenmaan lääni)와 해메주(Hämeen lääni)로 분리되었다.

주요도시[편집]

헤멘린나[편집]

헤멘린나는 핀란드 남부에 위치한 칸타헤메주의 중심 도시로 헬싱키에서 98km, 탐페레에서 73km, 라흐티에서 72km 정도 각각 떨어져 있다. 13세기 말 스웨덴인들이 헤메(Häme)성을 건설하면서 마을이 형성됐으며 1639년 시로 승격됐다.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바나야베시 호수 근처엔 바나하라는 정착촌이 있었는데, 여기가 바이킹 시대 이후 헤멘린나라는 도시가 생겨난 곳이다. 13세기에 중부 핀란드의 스웨덴 식민 정부를 지키기 위한 성이 건설됐다. 이 성 근처엔 성 주민들에게 물품과 서비스를 공급하는 마을이 형성됐다.

스웨덴 왕은 1639년 이 마을을 도시로 인가했고 얼마 후 도시를 남쪽으로 1km 떨어진 언덕으로 옮겼다. 바로 지금의 헤멘린나가 있는 곳이다. 1831년 9월 14일 주 정부와 학교 건물을 포함해 헤멘린나의 4분의 3 정도가 대규모 화재로 파괴됐다. 헤멘린나는 새로운 도시계획에 따라 재건됐다. 새 도시는 행정, 군사, 학교 기능이 강조됐다.

1862년 1월 31일 헤멘린나와 헬싱키 사이에 핀란드 최초의 철도가 놓이면서 도시 발전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1876년엔 바나야페시 호수를 따라 탐페레로 가는 철도가 개설됐다. 1879년 핀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핀란드어 신문인 헤멘사노마트가 설립됐다. 교육 기관들도 문을 열어 많은 유명 인사를 배출했다.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가 여기서 태어났고 1885년 헤멘린나 뤼세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전 대통령도 이 학교 출신이다.

헤멘린나엔 모두 339개의 호수가 있다. 바나야베시 호수는 가장 큰 호수 중 하나로 꼽힌다. 도심은 바나야베시 호숫가의 언덕 상단에 위치한다. 시는 시청과 헤멘린나 교회가 있는 시장광장을 중심으로 린난니에미, 노스이스턴 코너, 헤멘사리, 사리스텐메키 등 4개구역으로 나뉜다. 라티후오넨카투는 가장 번화한 쇼핑 거리다. 헤멘린나에는 여러 자연보호구역이 있다. 2001년 핀란드 최초로 국립 도시공원이 지정됐다.

헤멘린나에는 다양한 산업이 있다. 민간보다 공공부문이 고용을 많이 해 도시 인구의 3분의 1에게 취업 기회를 제공한다. 헤멘린나의 경제력은 전국 평균에 가깝다. 2015년 2만 8270개의 일자리가 있었다. 이중 75%가 3차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고, 1차 산업 3%, 2차 산업은 21% 비중이었다. 2016년 법인세를 많이 낸 회사는 보험회사인 포흐얀에흐티, 건설기계 회사인 모박스, 중고차 판매회사인 카묵스 등이다. SSAB 유럽철강공장은 900명의 직원을 둬 가장 큰 민간 고용주다.

헤멘린나에서 유명한 관광명소로는 헤메성, 죄수박물관, 군사박물관, 헤멘린나 예술박물관, 시벨리우스 탄생지, 헤멘린나 교회, 바나야 교회, 카티스테 영지 등이 있다. 자연명소엔 아흐베니스토 올림픽 공원, 아우란코 숲공원, 시립 공원, 린난푸이스토 공원, 에보 하이킹코스 등이 포함된다. 기차역 근처의 복합문화센터 베르카테흐다스(Verkatehdas)에는 703석 규모의 음악공연장, 컨퍼런스 센터, 영화관, 레스토랑 등이 있다. 헤멘린나에는 핀란드에서 두 번째로 많은 7,600개의 여름 별장이 있다.[3]

야나칼라[편집]

야나칼라는 핀란드 남서부 칸타헤메주에 있는 지자체다. 야나칼라의 행정중심지는 투렝키인데, 지도상에는 종종 야나칼라로 잘못 표기되고 있다. 남쪽으론 리히메키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북쪽으론 헤멘린나와 이웃하고 있다.

야나칼라의 관광명소는 하코이넨 산성과 장원 저택들, 석조 건물인 성라우리 중세 교회, 토르파리무세오 마을, 청동기 시대 유물들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배우 이다 알베르그의 출생지가 레페코스키에 있다.

야나칼라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해왔다. 최근까지 수많은 유물과 유적이 발굴됐다. 2013년 봄엔 휘비켈레에서 검객인 것으로 추정되는 해골과 두 자루의 칼이 다른 유물과 함께 발견됐다. 산성도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하코이넨산성이다. 항가스텐메키성 언덕도 여행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유적이다.

중세 이후에는 장원이 도시의 경관과 경제에 중요한 요소가 됐다. 야나칼라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1882년 개통된 핀란드 최초의 철도였다. 1818년에 설립된 제재소 중심으로 테르바코스키 마을이 형성됐고, 벽돌 공장은 레페코스키 마을을 성장시켜 주었다. 설탕 · 아이스크림 공장은 투렝키 마을의 발전을 가져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으로 넘어갔던 칼레리아 지방 안트레아의 실향민들이 사탕무를 재배하는 기술과 설탕 생산 노하우를 가지고 투렝키 마을로 이주해왔다. 설탕 공장이 1948년 기계를 돌리기 시작함에 따라 투렝키는 핀란드에서 가장 산업화한 마을로 변신했다. 공장 주변에 주택들이 건설되고 인구도 크게 늘었다. 1960년대엔 아이스크림 공장이 생기면서 설탕 공장은 가동을 중단했다. 설탕 공장의 부속 건물들은 아직도 산업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레페코스키의 점토질 흙과 헬싱키와 헤멘린나 사이의 철도는 페코스키의 벽돌 산업을 부흥시켰다. 산업 초창기에는 삽으로 퍼올려진 진흙이 마차로 공장까지 운반됐다, 벽돌은 수작업으로 만들어졌으나 나중엔 기계로 대체됐다. 이 마을에 솟아오른 벽돌 공장의 굴뚝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시멘트가 생산되면서 벽돌 산업은 침체에 빠졌다. 마지막 벽돌이 나온 것은 1987년이었다.[4]

리히메키[편집]

리히메키는 핀란드 남부 칸타헤메주의 있는 도시로 헬싱키에서 북쪽으로 약 70km, 탐페레에서 남동쪽으로 109km 떨어져 있다. 헬싱키와 탐페레, 라흐티로 가는 철도가 갈라지는 분기점인 리히메키는 칸타 헤메주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1960년 도시 지위를 획득한 리히메키는 휘빙케, 로피 등과 이웃하고 있다.

독일의 다국적 회사 뷔르트는 핀란드 본사와 유통센터를 이곳에 두고 있다. 유명한 사코 소총 생산 공장도 있다. 핀란드에서 가장 높은 깃대도 세워져 있다. 면적은 125.56km2이며 그중 물은 4.54km2에 달한다.

1910년엔 기병대가 주둔했다. 1922년 하우스예르비에서 분리된 리히메키는 독립적인 시장 도시가 됐고, 1960년에는 도시 지위를 얻었다. 1910년부터 1990년까지 핀란드 굴지의 회사 리히메키 유리가 이곳에 본거지를 두었다. 이 회사의 유리공장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리히메키는 철도역을 중심으로 건설됐다. 리히메키역은 1862년 개통된 헬싱키~헤멘린나 사이에 놓인 핀란드 최초의 철도 노선상의 역들 가운데 하나이며 교차역이기도 하다. 1869년에는 리히메키~상트페테르부르크 철도 노선의 리히메키~라흐티 지선이 개통됐다. 리히메키와 로피 간에는 1907년부터 1952년까지 협궤열차가 운행됐다. 그러나 지금 이 구간은 자동차가 훨씬 빠른 운송수단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러시아 치하의 핀란드 사회는 빠른 인구증가, 산업화 속에 노동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핀란드의 정치 및 행정 체계는 민주화와 근대화의 불안정한 단계에 있었던 반면, 국민의 사회경제적 환경과 민족문화적 상태는 점차적으로 개선되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자 좌익 핀란드 노동운동계와 핀란드 보수세력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핀란드는 1917년 12월 6일 독립을 선언했으나 국가의 분열을 막지 못했고 내전으로 치달았다. 이것이 바로 핀란드 역사상 가장 격렬한 전쟁 중의 하나인 핀란드 내전이다. 러시아의 무기 지원을 받은 적군은 1918년 2월 전체적 공세에 나섰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3월 백군의 역공이 시작됐고 4월에는 독일의 육군 병력이 백군에 증원됐다. 독일군은 리히메키에서 적군과 싸워 승리를 거뒀다. 약 8,500명의 적군 포로가 수용소에 수감됐는데, 1918년까지 이중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 수용소는 나중에 핀란드 정부의 감옥으로 바뀌었다.

1915년 봄 리히메키 주민들은 리히메키가 소속돼 있던 하우스예르비 지자체에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정치 및 경제 문제에 자율성을 갖춘 공동체로 전환시키는 조치를 취해줄 것을 청원했다. 도시 계획 초안은 1916년 1월에 완료됐으며 1922년 리히메키는 하우스예르비로부터 독립해 1960년 도시가 됐다.

리히메키는 헬싱키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주요 철도 노선상에 위치한 도시다. 철도 이외에 리히메키는 유리로도 유명하다. 테흐탕카투 23가에 있는 국립 유리 박물관은 4000년이 넘는 유리 역사와 300년의 핀란드 유리 제조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하이킹 애호가들을 위한 국제광야박람회가 2년마다 열린다.

리히메키 시립 박물관은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들어서 있으며 석기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역의 생활 모습을 관람할 수 있다. 리히메키 미술관은 2000개가 넘는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20세기 초 핀란드 미술품이다.

리히메키는 다양한 비즈니스 역사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잘 알려진 기업들로는 발리오, 사코, 뷔르트, 포르툼, 웨이스트 솔루션즈, 쿠메라 등이 있다.[5]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칸타해메 지역〉, 《위키백과》
  2. 해메〉, 《나무위키》
  3. 유럽지명사전 : 핀란드 헤멘린나〉, 《네이버 지식백과》
  4. 유럽지명사전 : 핀란드 야나칼라〉, 《네이버 지식백과》
  5. 유럽지명사전 : 핀란드 리히메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북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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