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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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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s1208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2월 27일 (화) 17:4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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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龍珠寺)는 경기도 화성시 화산(花山)에 있는 조선후기 현륭원의 능사로 창건된 사찰이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묻힌 융건릉 근처에 있다. 이 절은 신라 말기인 854년에 廉巨和尙(염거화상)이 지었고, 원래 이름은 갈양사(葛陽寺)였다. 고려 때인 10세기에 확장되었다. 조선 정조때에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서 정조의 명으로 18세기에 다시 지어졌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이다.

역사

본래 이곳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할 때 무덤을 돌보는 '능침사찰'로 용주사를 같이 창건하였다. 용주사에서는 사격(寺格)을 높이기 위해 근처에 있던 갈양사(葛陽寺)라는 절을 이었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인 창건은 정조 임금이 하였다. 조선 전기의 세조랑 비슷한 이미지.

갈양사는 '갈양사사적기'란 기록으로 보건데 고려시대(10세기)에 확장된 듯하다. 문제는 이 기록이 이능화의 조선사찰전서에 남은 기록이라 원본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고승들이 지방의 사찰을 '산소(山所)'로 정하고 거기에서 말년을 보낸 전통이 여럿 있었으므로, 갈양사도 그러한 절이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고려의 고승인 혜소가 갈양사를 자신이 거처할 장소로 삼아 후대로 내려왔으나 언제인가 망해서 폐사지가 되었다.

그러던 중 18세기 조선 시대에 뒤주에서 죽은 비운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정조가 명을 내려 용주사가 창건되었다. 1779년에 정조가 옛날 수원부 읍치(현재 화성태안3지구)를 현재의 수원 화성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사도세자의 묘를 새로 조성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 붙였다. 이름해인 1780년에는 현륭원에서 가까운 갈양사의 옛 터에 새로이 절을 지었다. 특기할 점은 용주사 창건이 정조가 직접 명하여 국가공사로 이루어졌으며, 비용도 각 궁가와 중앙 및 지방의 관가로부터 충당하였다는 것이다. 숭유억불이 기본인 조선시대에는 상당히 이례적인 사례이다.

정조는 1795년 윤 2월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행궁으로 행차하여 아버지가 묻힌 현륭원(현재 융건릉)에 참배하였다. 이튿날에는 화성행궁에서 어머니를 위하여 회갑연을 크게 지냈다.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는 동갑이었으므로, 먼저 아버지 무덤에 참배한 뒤 다음 날 어머니의 육순잔치를 한 것이다.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경기도유형문화재 제16호)[1]에는 '자궁저하 수만세(慈宮邸下 壽萬歲)'라는 글귀가 있는데, 여기서 자궁(慈宮)이란 임금의 어머니를 뜻한다. 따라서 '자궁저하 수만세'는 "임금님의 어머니께선 만수무강하십시오." 라는 뜻이다. 정조는 용주사를 통하여 죽은 아버지의 명복과 살아계신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동시에 빈 것이다.

일반적으로 절을 창건할 때에는 승려들이 시주받아 승려장인들이 설계와 시공을 전적으로 담당하였지만, 용주사를 창건할 때에는 관아 주도로 비용을 전국에서 모았을 뿐만 아니라 관청에 속한 장인과 승려장인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2006년쯤에 일주문(인왕(불교) 벽화가 그려져 있었던 이 문)이 천왕문으로 개조되었고, 사천왕이 만들어졌다. 2020년 8월 20일 호성전에서 화재가 발생해서 전소했다. 이 호성전은 사도세자, 정조, 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의 위패를 봉안하던 곳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인명피해는 없었으며, 위패들도 진품들은 용주사 내 효행박물관에 따로 보관하고 있었고, 특히 정조의 위패는 전시를 위해서 불교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하고 있었다. 호성전에는 리플리카(복제품)를 전시했다. 그래서 진품 위패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조포사

조포사(造泡寺)란 말은 두부를 만드는 절이란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두부를 포(泡)라고 하였으며, 왕릉이나 원에 딸려 제사에 쓰는 두부를 만드는 절을 조포사라고 불렀다. 즉, 능침사찰을 조포사라고 한다.

조선시대 조포사로는 신덕왕후 정릉에 딸린 흥천사와 봉국사, 경국사가 있으며, 성종 선릉에 딸린 봉은사, 세조 광릉의 봉선사, 그리고 용주사 등이 있다. 이러한 절들을 위축전, 자복사라고도 불렀다.

흥선대원군의 삼각산 화계사나 태조의 회암사처럼 조포사는 아니어도 왕실인물이 개인적으로 후원하여 번창한 왕실원찰도 있었다.

가람

숭유억불이 기본정책인 조선시대지만, 왕이 세운 조포사였기 때문에 절의 규모나 문화재 등이 온전하게 남았다. 또한 거의 산으로 들어간 절과 달리 비교적 평지인 곳에 넓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회암사처럼 본격적인 궁궐 형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절과 다르게 궁궐, 관아 건축의 양식이 섞였다.

  • 일주문과 사천왕문 : 여느 절이라면 세속과 절의 경계를 나타내는 일주문이 있어야 하지만, 용주사에는 원래 일주문과 사천왕문이 없었다. 오늘날 용주사에 있는 사천왕문은 현대에 세워진 것이다.
  • 홍살문 : 국가에서 효심이 지극한 인물에게나 내렸던 홍살문이 있다. 다른 절에는 찾기 힘든 요소로, 사도세자와 정조의 위패를 모신 능침사찰이기 때문이다.
  • 삼문과 돌길 : 홍살문을 지나 만나는 삼문 역시 궁궐양식이다. 좌우 행랑 7칸인 문으로, 문이 3개가 있다고 해서 삼문이라 부른다. 돌길 역시 다른 절에서 찾아보기 힘은 것으로, 마치 궁궐에 있는 어도를 연상케 한다.
  • 천보루 : 삼문 안쪽의 5층 석탑을 지나면 누각인 천보루가 보인다. 누각이야 다른 절에도 있지만, 천보루에는 궁궐 형식이 섞여있다. 목조기둥 아래에 높은 돌로 만들어진 석조기둥을 볼 수 있는데, 경회루 등 궁궐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또한 천보루 좌우로 행랑을 만들어 대웅전을 보호하듯이 둘렀는데, 조선시대의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참고로 천보루는 창건 당시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1층 돌기둥 옆의 공간을 막아 방으로 쓰는 것은 현대에 한 개조이다.
  • 대웅보전 : 크기는 그리 크지 않지만 몇 가지 요소에서 격식이 높음을 드러낸다. 자연석이 아니라 다듬어진 장대석을 기둥 밑에 두어 초석으로 삼았는데, 조선시대에는 아무 건물이나 이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 외에도 연화무늬 대신 삼태극 등 무늬를 쓴 모습이나 지붕에 작은 용두를 올린 것 등 여느 절과 다른 점이 좀 있데, 관아 건축을 담당한 인력들과 왕의 후원이 있었으리라 추정되는 점이다. 조선 후기 건축답게 공포가 다포식이며 팔작지붕이다. 편액 좌우로 조각된 용이 인상 깊다.

정조가 아버지를 위해 지은 절답게 장려한 감로탱화가 있다.

소장 문화재

국보

  • 용주사 동종 - 국보 제120호

보물

  •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 - 보물 제1754호
  • 화성 용주사 대웅보전 - 보물 제1942호

경기도 유형문화재

  • 용주사상량문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호
  • 전적수사본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호
  • 용주사병풍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호
  •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호
  • 화성용주사오층석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2호
  • 화성용주사대웅보전목조삼세불좌상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4호
  • 화성 용주사 목조감실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2호
  • 화성 용주사 지장전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일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3호
  • 화성 용주사 삼장보살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5호
  • 화성 용주사 중종 - 경기도 제226호
  • 화성 용주사 남무대성인로왕보살번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7호
  • 화성 용주사 전답양안2건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69호

경기도 문화재자료

  • 용주사천보루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
  • 화성 용주사 목조불패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1호
  • 화성 용주사 목조소대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2호
  • 화성 용주사 청동시루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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