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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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스페인어: España 에스파냐) 또는 스페인 왕국(스페인어: Reino de España 레이노 데 에스파냐)은 유럽의 남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국가이다. 수도는 마드리드(Madrid)이다.
스페인의 영토는 이베리아 반도에 걸쳐져 있으며, 대서양에 위치한 카나리아 제도와 지중해에 위치한 발레아레스 제도 역시 스페인 영토이다. 스페인은 세우타, 멜리야, 페뇽데벨레스데라고메라와 같이 아프리카에 영토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스페인은 유럽 국가 중 아프리카 국가와 유일하게 육지상 국경이 있는 나라이다. 알보란해에 있는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 역시 스페인 영토이다. 스페인 본토는 동쪽과 남쪽이 지중해에 접하고 있으며, 유일하게 영국의 지브롤터만이 육지 국경이다. 북쪽의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안도라와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북쪽 바다는 비스케이만을 접한다. 서쪽으로는 포르투갈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서쪽 바다는 대서양이다.
많은 소왕국들이 8세기 초부터 이슬람 세력에 지배당하다가 이슬람으로부터 실지회복(失地回復)을 꾀하는 국토회복운동이 1492년 성공함으로써 통일이 이루어졌다.
개요
스페인은 남유럽의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로 전성기 시절에는 무적함대로 대표되는 강력한 해양 국가이자 대영제국 이전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까지 여겨졌던 세계적인 열강이었다. 북쪽으로는 프랑스와 안도라, 서쪽으로는 포르투갈, 남쪽으로는 모로코와 지브롤터와 인접하고 있다. 국토 면적은 505,990㎢으로, 서유럽과 유럽 연합에서는 영토가 두 번째로 넓으며, 유럽 국가 전체에서는 4번째로 영토가 넓다. 인구는 유럽 전체에서 9번째로 많으며, 유럽 연합에서는 4번째로 많다.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이다. 마드리드의 인구는 2021년 기준으로 6,661,949명이다. 다른 주요 도시에는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세비야, 빌바오, 말라가 등이 있다.
스페인의 역사는 35,000년 전 이베리아 반도에 호모 사피엔스가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페니키아, 고대 그리스, 켈트, 카르타고 문화와 이베리아 고유의 문화가 발달하였고, 기원전 200년 로마가 이 지역을 정복하면서 히스파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독일 부족이 중앙 유럽으로 유입되었고, 서고트족이 이 지역을 정복하여 서고트 왕국을 세웠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이베리아 반도 남부를 정복해 스파니아라는 관구를 설치했으나 곧 서고트 왕국이 다시 이 지역을 정복했다. 이후 8세기 초, 서고트 왕국은 우마이야 왕조의 무어인들의 공격으로 726년 멸망했고,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의 영향권이 되었다. 이후 약 7세기 동안 레콩키스타가 일어나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나바르 왕국과 같은 크리스트교 국가들이 등장했으며, 1492년 이 국가들의 대부분은 가톨릭 군주라는 이름 하에 스페인으로 통합되었다.
근대 시기에 스페인은 세계 최초의 제국이 되었고, 많은 문화적, 언어적 유산을 남겼다. 오늘날 스페인어 사용자는 약 5억 7,000만 명에 달하며, 스페인어는 중국어 다음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모국어가 되었다. 스페인 문화의 황금 시기에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등장했고, 이 시기에 돈키호테가 출판되었다. 오늘날 스페인은 세계에서 11번째로 많은 세계 문화 유산을 보유한 국가이다.
스페인은 세속 국가이자 민주주의를 도입한 국가로, 펠리페 6세를 국가원수로 하는 입헌군주국이기도 하다. 스페인은 선진국에 속하며 고소득 국가이며 14번째로 경제 규모가 크다. 스페인은 유엔, 유럽 연합, 유럽 평의회, 이베로아메리카 국가 기구, 지중해 연합, 북대서양 조약 기구, 세계무역기구, 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 유럽 안보 협력 기구, 솅겐 지역을 비롯한 여러 국제 기구의 회원국이다. 또한 G20의 공식적인 회원국은 아니지만, 스페인은 G20 회담에서 영구 초청국의 지위를 확보해 사실상 G20 회원국으로 보기도 한다.
국가 상징
국호
스페인 헌법에서는 국명을 에스파냐(España)로 표기하고 있으며 외교 관계 등에서 사용하는 정식 국명은 에스파냐 왕국(스페인어: Reino de España)이다. 현재 대한민국 및 일본에서 통용되고 있는 스페인(Spain)은 영어식 국명이다. 자국어 표기 및 원어 발음과 차이가 있어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에스파냐"로 표기하였으나 정착되지 못했고, 현재는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에서도 스스로를 "주한 스페인 대사관"으로 호칭하고 있다. 과거에는 한자 음역인 서반아(西班牙)로도 불렸으나 21세기 들어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España라는 국호의 이름과 영어의 동의어 "Spain"이나 "Spanish"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Hispania라는 단어는 고대 로마 시대에 이베리아 반도를 지칭했던 Hesperia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며, 이는 시적 용어였다. 고대 그리스인의 개념에서 이탈리아는 "서쪽의 땅"이거나 "해가 지는 곳"을 의미했으며, 이를 두고 그리스어로 Hesperia 혹은 Εσπερία로 썼다. 스페인은 그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이탈리아보다 더 서쪽이므로 Hesperia ultima로 일컬어졌다.
카르타고인의 관념에서 스페인은 Ispanihad으로 불렸으며 "토끼의 땅", "가장자리"를 뜻했다. 이는 지중해의 끝에 해당함을 가리킨다. 본디 히스파니아에서 태어난 하드리아누스의 통치 기간 중 동전에 새겨진 로마제국의 영토에서 스페인 위에는 여성의 모습과 함께 발 쪽에 토끼가 새겨져 있다.
한편, 바스크어의 단어 Ezpanna에서 에스파냐가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그 뜻은 가장자리를 의미하며, 유럽 대륙의 남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하는 스페인의 위치와도 관련돼 있다.
인문학자 안토니오 데 네브리하(Antonio de Nebrija)는 단어 Hispania가 이베리아로망스어에서 볼 수 있는 단어 Hispalis에서 의미했다고 보기도 하며, 그 뜻은 "서쪽 세상의 도시"이다. 헤수스 루이스 쿤치요스(Jesús Luis Cunchillos)가 2000년에 출판한 Gramática fenicia elemental (기초 페니키아어 문법)에는 단어의 뿌리를 span으로 보았다. 이를 다시 쪼개면 spy, 즉 "쇠를 벼리다", "날이 무뎌진 연장이나 금속 따위를 날카롭게 만들다"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Hispania를 더 작은 단위로 나눠 보면, i-spn-ya가 되며 의미는 "금속 따위를 벼르는 땅(대지)"이 된다.
국기
본래는 군함 깃발이었다가 국기로 1승격되어 사용된다. 위아래에 빨강, 중앙에 노랑을 배치했고 좌측에 스페인 국가 문장을 새겼다. 빨강은 국가를 사수하는 혈맹 정신과 스페인의 정열을, 노랑은 스페인의 영토를 나타낸다. 민간에서는 문장 없는 삼색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초기 국기. 제1공화국 때는 문장 위의 왕관을 제거했다가 왕정 복고이후 다시 왕관이 복구됐고, 제2공화국 설립 이전까지 사용했다.
스페인 제2공화국은 아래에 카스티야를 상징하는 보라색을 넣은 삼색기를 사용했다. 원래 카스티야를 상징하는 깃발과 색은 빨간 바탕 위에 국가 이름 그대로 성이 그려져 있는 문장이지만 19세기 역사학자들이 낭만주의적인 지방 민족주의의 흔적을 재발굴하는 과정에서 하도 오래되어서 색이 빨간색에서 보라색으로 바랜 깃발을 보고 카스티야의 전통 색은 보라색이라 생각했고 훗날 탈색으로 인해 생긴 착각으로 밝혀졌지만 이미 카스티야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보라색 깃발이 받아들여진 지 오래라 지금도 공화파나 카스티야 좌파 민족주의 계열은 보라색을 유지하고 있다.[7] 현재 공식 국기는 아니지만 반 왕정 시위 때 종종 사용하고 베리에이션 중에서 붉은 별이 박혀 있는 깃발도 볼 수 있다.
프랑코 정권에서는 요한의 복음서(복음사가 요한)의 독수리가 들어간 국기를 사용했는데 프랑코가 사망하고 왕정 복고가 이뤄진 이후에도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1981년까지 사용되다가 현 스페인 국기로 바뀌었다. 현재는 스페인 극우파에서만 사용될 뿐이다. 현지에서 이 깃발을 펄럭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네오나치나 팔랑헤 같은 극우파 집회가 열렸을 가능성이 높다.
국장
문장은 스페인 왕가의 문장으로 양측에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형상화되어 있다. 각 기둥을 감싸는 띠에 쓰인 PLVS VLTRA는 카를로스 1세(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는 카를 5세)가 남긴 말로 '더욱 더 멀리(Más allá 마스 아야)'라는 의미를 지닌다. 당시 스페인의 국가적 정신을 요약한 표어로 카를로스 1세 때부터 줄곧 사용되어 왔다. 방패의 문장들은 스페인 왕국을 구성하는 옛 왕국들의 것으로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카스티야(성채), 레온(사자), 나바라(사슬), 그라나다(석류 꽃), 아라곤(적황색 줄무늬)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운데에 박힌 백합은 보르본 왕조의 상징이다. 레알 마드리드 CF의 엠블럼 위 왕관이 스페인 국장의 왕관에서 따온 것이다.
국가
국가는 '국왕 행진곡(Marcha Real, 마르차 레알)'으로 원래 스페인군 척탄병 행군가였는데 이후 왕가의 승인을 받아 국가로 승격되었고 작곡자나 처음 불렀던 이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공식적으로 가사가 없는 멜로디풍의 국가다. 2019년 기준으로 국가에 가사가 없는 국가가 네 국가인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산마리노, 코소보가 나머지 세 국가다. 국가 자체는 무려 250년이나 된 전통있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가사가 없어서 일반적으로 가사 없는 국가 하면 대표적으로 꼽히기도 한다. 국제대회 같은 곳에서 선수들이 국가가 나올 때 멀뚱히 서 있는 것이 정신이 썩었다거나 귀찮아서 안 부르는 게 아니라 원래 가사가 없다.
예전부터 가사가 없는 국가는 아니었다. 가사가 있는 버전으로는 알폰소 13세 버전과 프랑코 버전이 있는데 각기 1879년~1946년, 1897년~1981년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2008년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가 가사를 공모해서 공식화하려 했으나 5일 만에 짤렸다.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이라며 가루가 되도록 까여서 그런 듯하다. 문제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 ¡Viva España! (에스파냐 만세!)
- Cantemos todos juntos (함께 노래부르자)
- con distinta voz (서로 다른 목소리로)
- y un solo corazón (그리고 하나된 심장으로)
- ¡Viva España! (에스파냐 만세!)
- desde los verdes valles (초록빛 계곡으로부터)
- al inmenso mar, (광대한 바다까지)
- un himno de hermandad (형제애의 찬가를)
- Ama a la patria (조국을 사랑하라!)
- pues sabe abrazar, (조국은 포옹한다,)
- bajo su cielo azul, (그 푸른 하늘 아래에서,)
- pueblos en libertad (우리 자유로운 국민들을)
- Gloria a los hijos (자손들에게 영광 있으라!)
- que a la Historia dan (그들은 역사를 장식할 것이다)
- justicia y grandeza (정의와 장엄함으로,)
- democracia y paz. (민주주의와 평화로!)
사실 여느 국가 가사들과 비교해 봐도 전혀 무리는 없다. 저 정도의 민족주의를 강조하지 않는 국가는 거의 없고 타 국가와의 분쟁이 될 만한 가사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카탈루냐인들에게는 작사자가 카스티야인이라는 이유로 까였고 프랑코 독재 정권의 기억 때문에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라는 것 자체에 대해 큰 환멸을 가지고 있는 탓도 커서 채택되지는 않았다. 또 프랑코 시절에는 3개의 찬가(Triple Himno)라는 것도 있었는데 스페인군 행진곡인 오리아멘디, 팔랑헤당 당가인 태양을 마주하며, 국가인 왕의 행진을 3등분해서 만든 것으로 1936년부터 1975년까지 쓰였다. 현재는 RNE에서 녹음한 녹음본밖에 없다. 스페인 제2공화국 시절에는 리에고 찬가가 국가로 사용되었다.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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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51번째로 큰 영토를 가지고 있으며, 면적은 50만 4,782km²이다. 본토는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하는데, 그밖에 지중해와 대서양의 제도, 두 개의 자치시인 세우타와 멜리야가 있다. 본토의 1/3 정도가 산지이며, 평균 해발 고도 660미터로 유럽을 통틀어 스위스 다음가는 고산 국가이기도 하다. 북부에는 피레네 산맥, 대서양 연안 지방에는 칸타브리아 산맥, 남부에는 시에라네바다 산맥, 중앙부에는 메세타 고원(이베리아 고원)이 있다. 과달키비르 강, 과디아나 강을 비롯해 에브로 강, 두에로 강 등이 스페인의 주요 강이다.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은 토지가 비옥해 예로부터 포도 및 오렌지, 올리브 재배가 이루어졌으며, 이슬람의 지배를 오래 받아 아직도 아랍 문화의 색채가 강하게 남아 있다. 스페인 본토의 동쪽을 보면 큰 섬이 몇 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요르카섬을 비롯한 발레아레스 제도라 불리는 이곳은 지중해에서 가장 각광받는 휴양지 중 하나이며, 1950년대 스페인 정부의 관광 개발 정책에 힘입어 관광업이 계속적으로 발전하면서 성장했다. 세우타와 멜리야는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스페인령으로 모로코와 인접하는 한편 지브롤터 해협의 중요 항구인 지브롤터는 영국령이다. 비다소아 강의 작은 섬인 피센 섬은 프랑스와 공동 관리한다.
서쪽으로는 포르투갈과 접하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프랑스 및 안도라 공국과 접하고 있다. 또한 피레네 근처에 있는 인구 약 1200명 규모의 리비아(Llívia)라는 마을은 프랑스 영토에 둘러싸여 있기도 하다.
섬
스페인의 영토에는 발레아레스 제도와 카나리아 제도 그리고 지중해 및 지브롤터 해협 근처에 접하는 여러 무인도가 포함된다. 지중해의 도서 영토를 두고 Plazas de soberanía로 칭하며 차파리나스 제도, 알보란 섬, 페레힐 섬 등을 포함한다. 비다소아 강에 있는 피전트 섬은 스페인과 프랑스가 공통으로 점유하고 있다.
- 1. 테네리페 899,833
- 2. 마요르카 862,397
- 3. 그란 카나리아 838,397
- 4. 란사로테 141,938
- 5. 이비사 125,053
- 6. 푸에르테벤투라 103,107
- 7. 메노르카 92,434
- 8. 라 팔마 85,933
- 9. 라 고메라 22,259
- 10. 엘 이에로 10,558
- 11. 포르멘테라 7,957
- 12. 아로사 섬 4,889
- 13. 라 그라시오사 658
- 14. 타바르카 105
- 15. 온스 61
산과 강
이베리아 반도에 속한 스페인 본토는 산악 지형이 두드러 지며 산악 지형을 중심으로 고지대 평원이 분포한다. 피레네 산맥을 잇는 산지로는 칸타브리아 산맥, 시스테마 이베리코, 시스테마 센트랄, 톨레도 산맥, 시에라 모레나 등이 있으며 최고봉 3,478m인 물아센(Mulhacén)이 있는 시스테마 페니베티고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에 위치하고 있다. 이 봉우리는 스페인 본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서 스페인 전 영토를 포함하여 최고봉은 카나리아 제도의 화산인 테이데이다. 메세타 고원은 스페인 중앙부에 위치한 고지대 평원이다.
주요 강으로는 에브로 강, 두에로 강, 타구스 강을 비롯해 과디아나 강, 과달키비르 강이 있다. 충적 평야는 대부분 해안가에 분포하며 과달키비르 강에 위치한 안달루시아 지방의 충적평야가 가장 넓고 비옥하다.
기후
지중해 연안 국가들이 그렇듯이 1년 내내 햇볕이 따사롭고 놀기 좋은 해변을 많이 갖고 있다. 덕분에 관광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2018년 기준으로 스페인을 찾은 해외 관광객은 8,300만 명으로 세계 2위, 관광 수입은 80조원으로 세계 2위다. 독일 등 북유럽 노인들이 은퇴 후 살고 싶은 나라 1순위다. 실제로 말라가나 마요르카 섬 등 경치좋고 살기 좋은 동네에서는 독일, 영국 등에서 은퇴 후 이민으로 정착한 노인들을 흔히 만나볼 수 있다. 심지어 식당 메뉴에도 독일어가 병기되어 있을 정도. 그래서 각종 편견에서 마요르카는 반쯤 독일 땅 취급당하고 있다.
지중해에 면한 남유럽 국가라는 이유 때문에 일년 내내 따스하고 햇볕 강한 기후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스페인은 넓은 국가라 기후가 꽤 다양한 편이다. 북부는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습하면서 서늘하고 남부와 내륙 지방은 중동과 북아프리카가 연상될만큼 덥고 건조하다.
특히 무르시아와 안달루시아 지역은 특히 여름이 매우 건조하며 덥다. 안달루시아의 주도인 그라나다의 1년 평균 강수량은 353mm, 무르시아는 297mm, 지중해 해안 도시인 알메리아는 고작 200mm에 불과해 사막성 기후를 띤다. 알메리아를 중심으로 그라나다에서 무르시아까지 지중해 해안을 따라 사막이 분포하는데 이 사막의 이름을 타베르나스 사막(Tabernas Desert)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유럽에서 유일한 사막으로 알려져 있어 유럽 전역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관개 시설로도 농사가 불가능한 지역이어서 비닐하우스를 통한 온실 농업이 행해진다.
마드리드, 톨레도, 사라고사, 바야돌리드 등의 내륙 지역 역시 지중해성과 스텝 기후를 오갈 만큼 건조하다. 특히 여름에는 남동부만큼 강렬하게 뜨겁기까지 해서 사막 수준의 기후도를 보인다. 하지만 고지대가 많아 기온 자체는 남동부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은데, 그래도 40도까지 올라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해발고도 600m가 넘는 마드리드의 역대 최고 기온이 44.3도일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곳이다. 겨울에는 평균 기온 5도 내외로 비교적 서늘하지만 해발고도 500m~1,000m의 고지대임을 감안하면 그렇게 기온이 낮은 편은 아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 지역도 남동부처럼 매우 건조해서 위의 주요 네 도시 중 1년 강수량 500mm를 넘는 곳이 없다. 특히 사라고사의 경우 1년 강수량이 300mm 초반에 불과해 관개를 하지 않으면 농사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건조하다. 스페인 내륙 역시 남동부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사막화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드는 지역이다.
실제로 말라가 - 하엔 - 시우다드레알 - 톨레도 - 살라망카 - 레온 - 부르고스 - 로그로뇨 - 사라고사 - 발렌시아를 잇는 선 안의 지역은 연평균 500mm 미만인 건조지대로 스페인 전체 면적의 1/3 이상을 차지한다. 동남부와 중부 고원 지대에서는 주변의 강물과 지하수를 끌어다 쓰는 관개 농업이 이루어지고 관개 시설이 없으면 농사가 불가능할 만큼 건조도가 심하다. 그나마 중부 고원의 산지는 고도가 높아서 증발량이 낮아 숲이 형성되어 있어 이곳에서 주로 강물이 공급되지만 동남부 해안가는 나무가 자라지 않는 황량한 민둥산과 와디가 펼쳐져 있다. 여름날 스페인 거리를 걸으면 왜 시에스타가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안달루시아나 무르시아 같은 남부의 내륙 지역은 여름엔 정말 바싹 타버릴 정도로 덥다. 섭씨 39도~40도는 예사로울 정도다. 이 지역은 사막 또는 스텝 기후를 띄는 곳이 많아 키낮은 초목이 듬성듬성 있는 민둥산과 황무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예전에는 이곳에서도 농사를 지었으나 사하라발 사막화가 지중해를 넘어 이곳까지 침투하는 바람에 농사를 포기하고 텅텅 비어버린 땅이 많다고 한다.
유일하게 스페인하면 떠오르는 기후와 다른 양상을 보이는 곳은 비스케이 만 부근, 갈리시아, 바스크 지방으로 대표되는 북부 해안 지대다. 이곳은 북대서양 난류(멕시코 만류)가 직접 통과하는 곳이라 온난 습윤 기후나 서안 해양성 기후를 띤다. 갈리시아의 간판급 도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의 경우 하도 비가 자주 내려서 "비가 막 그친 거리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 비고(Vigo)같은 해안가 도시들은 더 극단적이라 1년 강수량이 1,791mm에 달하며 푸른 녹음이 우거진 풍경을 보여준다. 오히려 강수량이 집중되는 겨울엔 음침하고 우울한 느낌까지 받을 수 있고 스페인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서늘하다. 히혼은 2월 평균 기온 10.3도, 8월 평균 기온 20.4도로 연간 차이가 고작 10도에 불과하고 빌바오 역시 1월 9.3도, 8월 20.9도로 큰 차이가 없다. 심지어 비고의 여름 평균 기온은 20도를 채 넘지 않는다. 시에스타가 존재할 정도로 뜨겁고 건조한 타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기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가 지나가는 북부 내륙은 4월까지도 비가 잦고 꽤나 서늘한 편이기 때문에 햇살 좋은 스페인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가벼운 옷차림으로만 왔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이 지역도 이상 기후의 영향에서는 자유롭지 못한지 2020년 7월 바스크 기푸스코아의 산 세바스티안에서 기온이 무려 42°C를 기록하기도 했다. 북동부 피레네 산맥과 안도라 공국 지역, 안달루시아 남부의 시에라네바다 산맥 지역은 겨울에 눈이 내리는 지역으로 이 지역 스키 리조트가 유럽권에서 유명하다. 여름도 타 지방보다 선선한 편이다. 최근 이상 기후로 4~5월까지도 폭설이 내려 애먹는 일도 많아지고 있다. 2021년 1월에 아라곤에서 -34.1°C까지 내려갔다. 1956년 예이다 지방에서 기록된 영하 32도보다 낮다.
역사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스페인의 로마 시대 옛 이름인 히스파니아는 로마 제국의 일부였는데, 곧 히스파니아는 제국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성장하였다. 중세 초반에는 게르만 족의 지배를 받았고, 그 시기 이후에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오랜 투쟁과 전쟁 끝에 1492년 기독교도들의 왕국이 다시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였다. 같은 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절대 왕정과 식민지 개척을 추진하여 스페인은 가장 강대한 제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후 전쟁과 내분 끝에 이러한 전성기는 영원하지 못했으며, 스페인은 20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 정권 아래에서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5년에 독재 정권이 막을 내린 이후 스페인은 고도의 경제 발전과 사회적 안정을 이루었으며, 1986년에는 유럽 연합에 가입했다.
선사 시대의 이베리아 반도
약 3만 5천 년 전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현재의 이베리아 반도로 크로마뇽인과 유사한 현대적 인류가 진출하여 거주하기 시작했다. 북부 지방의 알타미라 동굴에는 이러한 선사 시대의 유적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약 기원전 15,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벽화가 남아 있다. 아타푸에르카 지방에서 발견된 새로운 유적에서는 이미 백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지역에 살았던 고대의 두 민족은 이베리아족과 켈트족이다 이들은 지중해 쪽과 북동쪽에서 남서쪽에 모여 살았으며, 이후에는 대서양 방면에도 거주하기 시작했다. 코임브라 및 브라카와 세고비아에는 켈트족의 고대 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편 이베리아 족은 그들의 언어를 이베리아 반도의 두번째로 긴 강 이름인 에브로에 남겼다. 이베리아 족의 후예 중 한 갈래인 바스크족은 피레네 지방의 서부를 점령했다. 기원전 500년에서 300년 사이에는 페니키아인이 들어와 살았으며, 그리스인도 지중해 연안에 그들의 교역 중심지인 식민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중 현대에도 남아 있는 도시가 엠푸리아 및 마라가, 아리칸테가 있다. 페니키아인이 세운 도시로는 카르테지가 있다. 페니키아인은 그 뒤 로마 제국에게 정복당한다. 로마와 대적하여 유명한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 바르카가 세운 카르타헤나가 현재까지 도시로 남아 있다. 그의 이름은 또한 당시 도시 중 하나인 바르키노에 남았는데, 이 이름에서 바르셀로나가 유래했다고 한다.
로마와 게르만 족의 침략
2차 포에니 전쟁 후 로마 제국이 영토를 넓혀가면서 지중해를 따라 국력을 계속 확장하였다. 대략 이 시기는 기원전 210년에서 205년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때부터 이베리아 반도는 500년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인들은 이때부터 스페인을 “히스파니아”(Hispania)로 부르면서 자연스레 법률을 비롯하여 언어, 로마의 도로 등의 제도를 정착시켜 나갔다. 로마의 영향을 받으면서 인구분포도 달라지게 됐으며, 그 지배 계급은 로마 전체에서도 귀족 계급과 유사한 대우를 받게 된다.
로마인은 타라고나나 사라고사, 발렌시아, 레온 등 훌륭한 도시를 많이 건설했다. 곡창 지대이자 지중해를 바로 보고 있어 당시 스페인은 올리브기름이나 양모, 금, 포도주, 석탄를 수입하는 무역 지대로 각광받았다. 관개 시설도 발달되면서 농업 생산물은 로마 전역에 공급되었다.
트라야누스, 테오도시우스 1세 등은 이곳 출신이었다. 기독교는 1세기에 도입됐으며, 2세기가 되면서 대부분의 도시에서 널리 수용됐다. 거의 대부분의 스페인어와 종교, 법률 등은 대부분 이 시기에 비롯하였다.
최초의 게르만 족은 로마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듦에 따라 5세기쯤에 이르러서 들어왔다. 서고트족과 수에비 족, 반달 족 등의 다른 부족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왔다. 415년경의 일이었다.
서고트 족이 세운 왕국은 점차 세력을 뻗쳐 이베리아 반도 거의 대부분의 영토에 이르렀다. 그들은 유사한 시기에 이주한 수에비 족과 비잔티움 제국이 관리하던 남동부의 영토를 복속시켰다.
로마인은 타라고나나 사라고사, 발렌시아, 레온 등 훌륭한 도시를 많이 건설했다. 곡창 지대이자 지중해를 바로 보고 있어 당시 스페인은 올리브기름이나 양모, 금, 포도주, 석탄를 수입하는 무역 지대로 각광받았다. 관개 시설도 발달되면서 농업 생산물은 로마 전역에 공급되었다.
트라야누스, 테오도시우스 1세 등은 이곳 출신이었다. 기독교는 1세기에 도입됐으며, 2세기가 되면서 대부분의 도시에서 널리 수용됐다. 거의 대부분의 스페인어와 종교, 법률 등은 대부분 이 시기에 비롯하였다.
최초의 게르만 족은 로마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듦에 따라 5세기쯤에 이르러서 들어왔다. 서고트족과 수에비 족, 반달 족 등의 다른 부족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왔다. 415년경의 일이었다.
서고트 족이 세운 왕국은 점차 세력을 뻗쳐 이베리아 반도 거의 대부분의 영토에 이르렀다. 그들은 유사한 시기에 이주한 수에비 족과 비잔티움 제국이 관리하던 남동부의 영토를 복속시켰다.
이슬람 통치기
711년 우마이야 왕조의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이 이끄는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연합군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피레네 이남의 안달루시아(포르투갈, 스페인)를 정복했다. 이때부터 781년 동안 스페인 지역에서 이슬람 왕국이 존재하였다. 751년 호라산 지방에서 봉기한 새로운 이슬람 왕조인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대체하자 우마이야 가문의 압둘 라흐만 1세가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가 분열된 이슬람 왕국들을 통일하고 후 우마이야 시대를 열었고, 8대 원수 압둘 라흐만 3세 때 이르러 대외적으로 칼리프국임을 선언하였다.
8세기 초 북아프리카로부터 건너온 무어인(베르베르 무슬림)은 이베리아 반도 거의 대부분을 정복했다(711년~718년). 이 정복은 무슬림의 우마이야 제국의 확장 활동의 일환이었다. 아스투리아스와 나바라, 아라곤의 세 개의 작은 북쪽 산간 지방만이 겨우 남아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무슬림 지배 아래에서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자신들의 종교를 지킬 자유가 주어졌다. 차츰 이슬람 문화의 영향이 커졌으며 귀족 계급부터 신분의 제한과 모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10세기와 11세기에 많은 이들이 개종을 하게 되면서 알안달루스(안달루시아) 주민의 다수가 이슬람을 믿게 되었다.
남부 지방에 있는 안달루시아의 코르도바는 무슬림 스페인의 수도로 중세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하며 발달된 도시였다. 지중해 무역과 문화 간 교류가 꽃을 피웠다. 아랍과 북아프리카의 풍부한 지적 유산이 유럽으로 전해져 왔다. 무슬림과 유대인 학자들은 서유럽의 고전 그리스 문화를 되살리고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하였으며, 이런 활동을 통해 스페인의 로마화된 문화가 아랍 문화와 유대 문화와 섞여 스페인의 독창적인 문화가 형성되었다. 한편 다른 유럽 지방은 중세의 암흑기로 종교적으로나 문화적, 과학적으로 많이 뒤처져 있었다.
압둘 라흐만 3세의 손자인 히샴 2세 시기에 이르러 여러 작은 도시 국가들로 분열된 안달루시아는 1031년부터 1085년까지 분쟁과 협력을 계속하다가, 북부 기독교 세력의 잦은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 무슬림들은 북부 기독교 왕국에 파리아스(Parias)라고 불리는 보호비 명분의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1085년, 북부 국경 지대의 톨레도 왕국이 기독교권에 넘어가자 여러 군소 이슬람 왕국들은 당시 모로코 지방의 강력한 이슬람 왕조였던 모라비드 왕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모라비드 왕국은 이를 계기로 안달루시아로 진격해 들어가 이슬람 왕국들을 통합하고 기독교 세력을 재차 몰아내었다. 그 후 모하드 왕국 시대에 이르러 기독교 6왕국 연합군이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1212)에서 모하드 왕조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켰고 이로 인해 무슬림들은 남쪽의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한 안달루시아 남부 지방만을 지배하다가 1492년 최종적으로 후퇴하였다.
스페인 통일
12세기에 이르러서는 종교적 관용 정책이 약화되어 종교적 탄압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북쪽의 기독교 세력들은 13세기 초부터 남진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레콘키스타(재정복; 국토 회복 운동)라고 한다. 그 시작은 722년의 코바돈가 전투이다. 기독교 군대의 승리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만들기에 이른다. 이슬람 군대들은 피레네 북쪽으로 옮겨가면서 세력을 확장했지만, 지금의 프랑스 투르 근처에서 전투로 패하면서 두에로 강과 에브로 강과 함께 피레네 산지를 낀 남쪽 지방(현재의 스페인)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 전투를 투르 전투 혹은 투르 푸아티에 전투라고 부른다. 이슬람 군대는 당시 유럽을 통틀어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던 갈리시아를 수호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739명의 군대가 강제로 쫓겨났다. 나중에 프랑크족 세력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그들 세력이 나뉘어 성장하게 된다. 카스티야 왕국을 비롯한 아라곤 왕국, 그라나다 왕국, 나바라 왕국 등 네 개의 왕국이 이들에 해당한다.
한편 8세기부터 스페인을 다스린 무어인의 알 안달루스는 주변의 토후국들과 경쟁하느라 결국에 기독교 세력의 팽창을 도와주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다만 1085년 톨레도를 점령하면서 북쪽 지역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계속해서 국토 회복 운동이 남쪽 방향으로 향한다. 종교적으로 이때까지는 극심한 탄압이 이뤄지지 않아서 몇 안 되는 모스크나 이슬람 사원만이 교회로 바뀌었다. 이미 무어인이 스페인 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무어인의 예술과 건축, 음식 등 고유의 문화는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18] 막대한 위력을 떨치던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 세력에게 코르도바 지역을 시작으로 1236년 지금의 세비야까지 내주고 만다. 잠시 동안 여러 상황을 겪은 스페인은 유럽 전체를 집어 삼킨 흑사병으로 1348년 무렵에는 극도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슬람 세력을 지원하던 마리니드 왕조는 13~14세기에 다발적으로 무슬림의 규약을 부활시키기 위해 재침공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마리니드 왕조는 13세기 중엽부터 15세기까지 스페인 남부와 지금의 모로코를 통치하였다.
1469년 아라곤의 왕위 후계자 페르난도와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후계자 이사벨의 결혼으로 공동 국왕이 지배하는 왕국이 성립됐다. 두 사람의 공동 왕국 출범 이후, 스페인은 1479년 카나리아 제도를 복속하고 1492년 무슬림의 마지막 보루이던 그라나다를 정복함으로써 781년 간의 스페인 내 무슬림 지배를 종식시키고 통일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 스페인에는 팔렌치아 대학과 살라만카 대학 등이 설립된다. 이들 학교는 유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이른 시기에 설립된 대학이다.
1492년은 스페인에게 있어서 여러 의미를 지니는 한해였다. 이교도 세력을 몰아내고 통일을 이루었을뿐만 아니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스페인 내 유대인 박해가 시작된다. 철저한 로마 가톨릭 국가가 되기 위해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을 색출한다는 명분 하에 무력으로 저항하는 다른 종교 신자들을 화형에 처하고 개종을 거부하는 이슬람교도와 유대교 신자를 죽였다.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르네상스 시대의 신흥 군주로서 지위를 확립하면서 지역 귀족과 합세하여 왕족의 권위를 세운다. 이런 과정에서 España(에스파냐)라는 단어가 출현하게 된다. 에스파냐라는 단어는 고대에 스페인을 지칭하던 히스파니아(라틴어: Hispania)에서 유래했으며,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모두를 통칭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한다. 스페인 전체에 통합과 더불어 안정기가 찾아오면서 종교, 정치, 군사 등 전반에 발전을 거두게 되며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훗날 수많은 식민지를 복속한 국력 신장의 계기는 이때 다져진다.
스페인의 전성기
왕국의 통합은 스페인 제국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16세기와 17세기 대부분에 걸쳐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누렸으며 식민지 무역으로 쌓은 부를 누렸다. 그중에서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 때에 이르러 최고의 영화를 쌓게 된다. 다만 네덜란드 독립 전쟁과 이탈리아 전쟁,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영국과 스페인 간 전쟁(1588년~1604년)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6세기에 카를로스 1세에 의해 시작된 스페인-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는 남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멕시코, 오늘날 미국의 남서부 지방, 필리핀, 마리아나 제도, 포르투갈,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스페인 제국은 이때부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별칭을 얻게 돼 "스페인이 움직이면 전 세계가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바다와 육지를 넘어 바닷길이 열리면서 유럽의 제국주의가 첫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금은이나 향신료, 진귀한 농산물을 약탈하면서 스페인 항해자들은 유럽인에게 신세계를 소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대는 분명 스페인의 개화기로서 지금은 스페인의 황금기로 칭송되고 있다. 그러나 식민지인들에게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제하였으며 식민지 자원 수탈과 흑인 노예무역에 앞장서기도 했다.
한편 스페인은 황금기를 누리면서도 수많은 전쟁에 시달린다. 오스만 제국의 급성장과 더불어 오스만과 손을 잡은 해적들이 지중해 연안 지방에는 약탈을 일삼아 노예 매매와 침략 행위가 끊이지 않게 된다. 이슬람 세력에 의한 약탈도 빈번했으며 유럽의 강대국들은 이탈리아 반도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여러번 전쟁을 치구기도 했다.(이탈리아 대전쟁) 후에는 로마 가톨릭 내 교회 개혁 문제로 스페인 전체가 분열에 휩싸여 스페인은 한동안 종교 문제에 지속적으로 군사 대응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수십 년간의 전쟁과 기근 속에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여러 문제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는 유럽 전역에 퍼져 있던 문제에 개입하며 사태를 악화시켜 국력 약화를 자초했다. 스페인은 가톨릭 국가로서 땅에 떨어진 합스부르크가의 위신을 세우려 노력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와도 함께 연합하여 개신교 세력이 일으킨 변혁을 뒤엎으려 시도하지만, 그러는 와중에 포르투갈이 독립을 쟁취하는 한편 네덜란드도 1648년 완전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결국에는 유럽 전역에 30년 전쟁이 불어 닥치자 신교를 비밀리에 지원하던 프랑스에 패배하였다. 당시 스페인의 영향력은 유럽 전역에 미치고 있었으므로 유럽 전반의 경제 또한 상당한 침체기를 겪었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스페인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광대한 해외 영토를 유지하면서 더욱 그 영향력을 넓혀 식민지 통치를 19세기까지 계속하게 된다.
또 한 번의 쇠퇴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때 일어났다. 카를로스 2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여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단절되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발생한 왕위 계승 전쟁은 귀족 세력뿐만 아니라 시민전쟁으로 번지기도 한다. 왕위 계승 전쟁 동안 유럽 내 스페인의 영향력은 물론 대륙 내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도 사실상 잃게 됐다.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방대한 영토를 내주면서 해상 강국의 지위를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전쟁의 결과,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 5세의 왕위계승이 확정되면서 스페인에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스페인은 막대한 영토와 부를 토대로 다시 회복기를 맞는다. 더불어 유럽 내 스페인의 지위도 조금씩 향상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의 재도약의 시작과 함께 부르봉 왕가는 행정 체계 정비에 박차를 가해 견제하는 한편 상당수의 유럽 군주 또한 스페인의 발전에 귀 기울이게 됐다.
1763년에는 [[프랑스-인디언 에서 승리하여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네바다주, 유타주, 빌링스, 캐스퍼, 시애틀, 애리조나주, 미니애폴리스, 덴버, 캔자스시티, 세인트루이스, 배턴루지, 댈러스 등 미시시피 강 서부에 있는 모든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쇠퇴
1793년 스페인은 프랑스 제1공화국과 전쟁을 겪게 됐다. 프랑스의 공격으로 스페인은 지식인 사이에서는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전장에서 패하면서 1795년에 프랑스와 강화 조약을 체결하게 되며 결과적으로는 종속국이 된다. 스페인 왕실 자체가 멸족하지는 않았으므로 이듬해 스페인은 영국과 포르투갈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나 잇따른 전쟁으로 되레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국력만 허비하게 된다.
대륙봉쇄령을 위반한 포르투갈을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스페인 영내에 진주한 나폴레옹은 1808년 5월에 스페인 전쟁에 개입하여 왕위를 찬탈하였다. 나폴레옹은 형인 조제프를 새로운 스페인 왕으로 책봉하였다. 원래 스페인의 왕은 나폴레옹의 맹장(猛將)인 조아생 뮈라가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조아생 뮈라에 대한 스페인 군중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던 관계로 조아생 뮈라를 나폴리의 왕으로 임명하고 원래 나폴리의 왕이었던 조제프가 스페인의 왕으로 오게 된 것이다. 1808년 5월, 스페인 민중이 봉기하여 프랑스 군대를 물리치기 위한 무장투쟁이 시작되었다.(반도 전쟁)
프랑스 군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스페인 민병대를 격파하는 한편 참전한 영국군을 몰아내었다. 그러나 스페인 군의 게릴라전과 영국-포르투갈 연합군 전략이 성공하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가 겹치면서 프랑스는 1813년 완전히 스페인에서 철수하였다. 이에 따라 폐위당했던 페르난도 7세가 스페인 국왕으로 복위하였다.
남미 식민지 독립
프랑스의 스페인 침공은 1세기가 넘도록 스페인 국내 정치 불안을 야기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스페인은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뺀 모든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게 되면서 이전의 부와 국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다.
스페인-미국 전쟁
스페인이 19세기 내내 식민지 지배권을 잃고 경제 위기를 겪는 동안 필리핀과 쿠바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진다. 식민지 내 독립 전쟁은 결국 미국 지역에서도 일어나 미국의 예견치 못한 공격으로 스페인은 패배하고 만다. 당대의 주역이었던 98세대(1898년 세대)는 전쟁을 뼈저린 "재난"("El Desastre")으로 느꼈다. 그에 따라 국가 안팎에 문제를 야기하였고 특별히 알폰소 12세가 쌓아놓은 치적을 송두리째 잃게 된다.
혼란한 20세기
1900년대부터 1910년대에 이르러서 스페인은 잠시 평화를 누린다. 서사하라와 모로코, 적도 기니를 식민지로 차지했고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대륙 침탈에 동참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로코의 리프 공화국(Rep. of Rif)과 전쟁(1920년)을 겪으면서 시민들의 군주제에 대한 의구심만 커졌다. 한편 스페인 군인으로서 모로코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앞장선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로 군림하나 1931년에 스페인 제2공화국이 들어서며 그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때부터 공화국 정권은 바스크를 비롯한 카탈루냐, 갈리시아에 자치권을 부여하며 여성의 투표권을 허용한다.
좌파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국민전선/우파연합과 제휴한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모로코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인민 전선과 국민전선 간의 스페인 내전이 촉발됐다. 3년 뒤 스페인 내전의 시민 세력이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주도로 승리를 얻게 된다. 상당 부분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다. 소비에트 연방과 멕시코 등은 스페인 내전에 자국의 이익을 위해 비밀리 지원을 하나, 서방 세계는 영국이 주도하던 내정 무간섭주의(Non-Intervention)에 따라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등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이 인민 전선을 지원하여 참전했으나 결국 내전에서의 승리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정권을 잡았다. 민간인 학살 범죄인 게르니카 폭격 사건이 나치 독일 공군에 의해 벌어진 것도 이때였다(1937년). 내전으로 5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오십만 명 정도의 인구가 자신의 모국을 떠나게 됐다. 이들의 후예가 대부분 라틴 아메리카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에만 30만 명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스페인 내전은 2차 세계대전의 최초 시작이자 유럽의 시민 전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한편 스페인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지만 프랑코 정권은 은밀히 추축국에 협조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행적이 국제 사회로의 진출에 대한 미국 등 서방 국가의 반대를 부른 명분이 되기도 한다.
20세기 스페인은 좌파와 우파 간의 대립이 고조되고 있었고 당시 스페인 사회는 청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전 국토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결함을 보일만큼 부가 지주계층, 군벌, 로마 가톨릭 교회에 편중돼 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인민 전선으로 불리는 공산주의 세력이 창궐하였다. 인민전선에서는 교회의 재산을 국유화하려고 하는 등 심각한 빈부의 격차라는 사회문제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프랑코 독재 정권은 유럽의 마지막 군사 정권으로 불리는데, 집권 후 좌파 탄압, 비밀경찰을 통한 통제 등 독재 정치로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프랑코 군부 독재 정권 아래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당은 팔랑헤당(Falange española tradicionalista y de las JONS)뿐이며, 1937년 창립 후 반공주의와 민족주의, 로마 가톨릭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프랑코가 민주주의를 탄압하려는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내비치자 1949년에는 국민 운동당(Movimiento Nacional)으로 개칭하였다. 2차 대전이 종결되자 스페인은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는 등 정치·경제적으로 고립 상태를 겪기도 했다. 1955년이 돼서야 미국이 공산세력의 남하를 우려해 이베리아 반도와 지중해에 군사 주둔을 꾀함에 따라 유엔에 가입하게 된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스페인의 기적을 이루며 급진적인 경제 발전이 이뤄졌으며, 특히 관광 분야의 활성화와 더불어 산업 국가로서의 국가 정체성이 정립되는 한편 학력 수준 향상으로 인력 개발이 진척되기도 했다.
1975년 유럽의 마지막 군사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한 뒤에 스페인 왕정이 복고되었으며, 현 국왕인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영단으로 스페인에서는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시작됐다. 1979년 스페인 국민들은 처음으로 보통 선거에 참여하였는데, 《스페인사》(청아)에 수록된 사진에 의하면 당시 스페인 국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에서 길게 줄을 설 만큼 보통선거 참여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프랑코 정권 때 수감됐던 양심수들이 석방되었다. 또한 언론의 자유·결사·정치의 자유가 허용되었고, 1978년 스페인 헌법이 선포되면서 각 지방을 이루는 지방 정부가 출범한다. 그러나 일부 지방에서는 독립을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급진적인 양상으로 번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스크의 경우이다.
1981년 2월 23일 군사 쿠데타가 날 조짐이 나타나기도 하나 대다수의 군부 세력은 왕실에 충성을 다짐한다. 사실 쿠데타 조짐을 억누르기 위해 카를로스 1세는 국영 방송을 통해 월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쿠데타 세력의 촉발로 국회가 군부에 점령되기도 했으며, 긴급 내각이 설립돼 국내 정치 양상에 격변기를 맞기도 했다.
새로운 법률에 따라 실시된 선거로 1982년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내전 이후 기구 자체가 거의 운용되지 못하다 43년 만에 다시 생겨나면서 정권을 잡기도 했다. 한편 스페인은 1986년 유럽 연합의 전신인 유럽 공동체에 가입한다. 14년이나 스페인의 정권을 독점하던 좌파계열의 사회노동당은 개혁을 요구받으며 결국 1996년 우파에 참패하고 정권이 교체되었다.
스페인 정부는 오랜 기간에 걸쳐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 "Euskadi Ta Askatasuna")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1959년 결성됐으며 그들은 스스로를 게릴라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유럽 연합과 미국은 ETA를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유럽연합과 미국의 주장은 '지금껏 테러 집단의 공격으로 40년간 800명이 넘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바스크 자치 정부는 자유 민족 바스크의 도를 넘은 폭력에 대해 특별한 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라는 것이다.
21세기
2002년 1월 1일 스페인 페세타가 유로화로 대체되면서 15개국과 함께 유로존으로 편입, 새로운 변혁기를 맞게 된다. 유로존으로의 편입은 스페인에 새로운 경제 성장을 가능케 했다. 도입 후 스페인의 경제 성장률은 유럽 연합 평균을 웃돌았지만 지나치게 늘어난 국부 팽창이 미칠 악영향과 최근 대외 적자가 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004년 3월 11일 2004년 마드리드 동시 다발 테러 사건이 일어나 아침 시간에 출근하던 사람들이 희생됐으며 ETA가 저지른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2004년 3월 13일 토요일 정오, 중도 우파인 스페인 국민당(Partido Popular)의 대변인이었던 Eduardo Zaplana는 검찰 수사가 ETA에 집중되어 있다고 발표한다. 이는 스페인 총선거 하루 전날 일이었다. PRISA 그룹에 속한 la SER 에선 정부 대변인 발언을 부인하며 검찰 당국이 이슬람 세력을 수사 중이라고 발언, 총선거 하루 전날 시민들은 SMS와 전화 등을 통해 오후 6시 국민당 본부 앞에 모여 "사실을 원한다.", "거짓말쟁이들", "선거 전에 우린 사실을 알고 싶다.", "Aznar(당시 국민당의 스페인 총리) 너는 알고 있다!" 등의 슬로건을 내달고 시위가 이루어진다. 결국 다음 날 총선거에서 중도좌파인 스페인 사회노동당이 승리하게 된다. 이 총선거에 2500만명이라는 역사상 가장 많은 국민이 선거에 참여했으며 국민당과 사회노동당, 두 정당에 표가 가장 많이 집중된 선거(82%)로 기록되었다.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로 인해 스페인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로써 프란시스코 프랑코 사후 약 40년간 인민당과 사회노동당이 주거니 받거니 이어 오던 양당 체제가 붕괴되고 좌파 신생 정당 포데모스와 중도 우파 신생 정당 시우다다노스(Ciudadanos)가 제 3세력으로 대약진했다.
2009년 11월 부로 스페인 정부는 양성 평등 비율이 거의 평균으로 동등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공표했다. 18명의 정부 각료 중 9명은 여성이며 현재 호세 로드리게스 총리 하의 내각에서 스페인은 양성 평등에 관해서만큼은 상당히 안정된 평가를 받고 있으며 "스칸디나비아 지역 이외의 유럽 국가에서는 성평등 문제를 의식적으로 정부 내 문제로 각인하고 있는 정부가 스페인 이외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7년 입법 절차를 거쳐 성별에 관련한 정치, 경제에 대한 평등 문제를 용인하기 위한 절차에 돌입했다.(Gender Equality Act). 현재 입법부에서 350명 의석 중 128명은 여성으로 36.3%이다. 현재 하원의 경우 여성 의원이 더 많은 13번째 국가가 됐으며 상원의 경우에는 263석 중 79명이 여성으로 30%에 머물고 있다.
2014년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이 펠리페 6세 국왕에게 양위했다. 즉위식 때 반대파도 있었지만 환영 인파가 훨씬 많았고 국민들은 새로운 이미지를 바라고 있다. 아직까지는 상당수의 스페인 국민들에게 왕실은 옛 영광을 상기시키고 재현할 수 있는 상징물로 여겨지고 있다. 2018년 6월 1일에는 집권 인민당의 불법 정치 자금 모금 혐의의 책임을 지고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가 물러나고 사회당의 페드로 산체스 당수가 신임 총리가 되었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으로 일어난 대봉쇄로 인해 경제 성장률이 -15%까지 내려가면서 스페인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2021년 6월 기준으로 80,0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여 기대 수명이 1년 이상 단축되었다.
2021년 3월 스페인은 적극적 안락사를 합법화한 세계 6번째 국가가 되었다.
2021년 5월 4일에 마드리드 주지사 선거에서 보수당 소속의 후보가 당선됐다.
정치
스페인은 입헌 군주제 국가이다. 양원제 국회를 갖추고 있으며, 입법부가 있어 분권 체제를 갖추고 있다. 국가 원수는 국왕이며, 상하원은 직접·간접 투표로써 선출된다. 임기는 4년이다. 행정부의 수반은 총리이며, 부총리가 보좌한다. 스페인 내각(Consejo de Ministros)의 수반인 장관은 총리가 지명한다.
헌법과 정치
스페인 정치체제는 1978년 12월 29일 공포된 스페인 헌법에 기초한다. 스페인 헌법의 특징은 과거 프랑코 체제의 헌법은 폐기했지만 그 법적-제도적 구조를 민주주의 체제 속으로 통합시켰다는데 있다.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주도 아래 제헌의회에서 작성된 스페인 헌법은 전문에서 민족과 지역들(Nationalities and Region)의 자치권을 보장하면서도 모든 스페인인들의 조국인 스페인 국가의 해체 불가능한 통일성에 토대를 둔다고 명기하고 있다. 이는 정부 형태에 대한 정의로서 스페인이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단일국가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헌법 정신은 최근 카탈루냐에서 일어난 독립 선언을 무효화시킨 스페인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나타났다.
스페인 헌법의 또 다른 특징은 스페인의 정치사회적 정체성을 '사회적이고 민주적인 국가(social and democratic State)'로 정의하여 스페인이 사회민주주의 국가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스페인의 소득 분배와 사회복지 등 다양한 사회적 권리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국가 형태로서 스페인은 전형적인 의회민주주의 입헌군주국이다. 1978년 헌법은 스페인을 의회군주국(Parliamentary Monarchy)으로 명명하고있다. 입헌군주국의 국왕의 권한이 헌법에 의해 제한되어 거의 권한이 없어 국왕은 상징적인 존재인 반면, 의회군주국에서 국왕은 의회와 권한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의회군주국인 스페인 국왕의 권한은 다른 입헌군주국 국왕의 권한에 비해서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의 국왕은 헌법 아래 존재하고, 정부는 의회에 의해 통제되는 헌정질서를 가진다. 스페인 정치는 민주주의의 토대인 권력분립 원칙에 따라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로 권력이 분산되어 있다. 스페인 전체의 통일성을 상징하는 인물인 국왕은 독립된 헌법기관으로서 이렇게 분립된 권력을 연결하고 중재하는 기능을 가진다. 국왕은 국가수반으로서 국군통수권, 선전포고 및 강화권, 외교사절 파견 및 접수권을 가지기도 하지만 행정부와 의회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국왕은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총선을 통해 새로운 의회를 구성할 권한을 가진다. 이 외에 국왕은 법률의 폐지 및 공포권을 가지기도 한다.
의회와 정당
스페인 의회(Cortes Generales)는 양원제로 임기 4년의 하원과 상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원은 상원의 입법행위를 무효로 할 수 있고, 하원만이 총리를 신임할 수 있다. 상원과 하원이 각각 법안을 제출할 수 있지만 상원은 이를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상원에서 거부된 법안은 하원에서 절대다수에 의해 다시 통과될 수 있다. 따라서 하원이 상원에 비해 보다 우월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총 350명으로 구성된 스페인 하원의원은 비례대표를 통해 선출되고 선거를 통해서 다수당 혹은 다수연정을 획득한 정당이 정부를 구성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연정을 통해서 정부를 구성한 경우는 없으며, 통상적으로 다수당이 없을 경우 소수정부가 구성된다.
4년 임기의 하원의원 선거 지역구는 50개의 도와 2개의 자치시로 구성되어 있다. 스페인 선거법에 따르면 50개의 도 선거구에는 최소한 2명의 하원의원이 할당되고 자치시에는 각각 1명씩 할당된다. 나머지는 248개 의석은 각 도의 인구비례에 따라서 할당된다. 이러한 할당 방식은 소규모 도가 과대 대표된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선거에 참여하는 각 정당들은 할당된 인원만큼의 후보자 리스트를 제출하고, 선거인들은 투표소에서 후보자 개인이 아니라 정당에 투표하게 된다. 투표가 종료된 후 각 선거구에서 각 정당이 얻은 득표수에 따라서 동트방식에 따라 각 정당에 의석을 배정한다. 정당이 의석을 배정받기 위해서는 선거구에서 최소 3%의 득표율을 기록해야 한다. 따라서 하원의원 선출은 정당명부 권역별 비례대표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원의원 선출방식은 거대정당에 유리한 방식으로 스페인을 양당제 정치 체제로 만들고 있다.
상원의 경우 헌법에 정해진 정원은 없지만 본토의 경우 각 도에서 인구에 관계없이 각각 4명씩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다. 따라서 인구 650만 명의 마드리드나 9만 명의 소리아 도(province)가 동일한 상원의원을 선출하는 것이다. 상원의원 선출을 위해 각 정당은 선거구마다 3명의 후보자를 내세우고 이들 중 가장 많은 표를 얻은 4인이 선출된다. 또한 도서지방 도의 경우 큰 섬은 3명, 작은 섬은 각각 1명의 상원의원을 선출한다. 아프리카에 위치한 체우타(Ceuta)와 멜릴라(Melilla) 자치도시는 2명씩의 의원을 선출한다. 이렇게 해서 선출직 상원의원은 총 208명으로 구성된다. 여기에 17개의 자치주와 2개의 자치시 의회가 각각 1명씩 선출하고 여기에 인구 백만 명 당 1명씩 추가해서 임명해 총 58명의 상원의원이 자치주를 대표한다.
스페인은 1937년 제정된 정치단체 통합법에 따라 국민운동(Moviendo Nacional)이라는 단일정당 의회를 가졌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자유화 정책에 따른 정치결사법이 통과되면서 정당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정당법에 따라 정치단체는 등록제로 운영되고 있고 자유로운 정당 활동이 보장된다. 현재 스페인에는 지역정당 등을 포함해 약 70여 개의 정당들이 활동하고 있다.
스페인은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스페인사회노동자당(PSOE)과 인민당(PP) 등 두 정당이 스페인 정치를 주도하고 있다. 사회노동자당은 중도좌파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시민자유나 사회적 소외계층의 권익 보호 등을 대변하고 있다. 경제정책으로는 기업의 자율적 사회화라는 시장경제를 인정하면서 공공성 측면을 보완하고 있다. 외교정책은 기본적으로 유럽통합에 호의적이면서도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관계 정립이라는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반면 중도우파인 인민당은 군주제와 정치적 안정이라는 보수주의 노선을 취한다. 경제적으로는 기업의 자유를 옹호한다. 하지만 고용 창출이나 사회보장제 확립 등과 같은 공공성 노선을 취하기도 한다. 외교적으로 유럽연합에 호의적이면서도 중남미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외 주요 정당으로는 카탈루냐 지역의 지역정당으로 출발하여 전국정당이 된 중도노선의 사민당(Ciudadanos)은 원래 , 바스크 지역의 바스크민족당(PNV)과 카탈루냐 지역의 카탈루냐공화당(ERC)과 카탈루냐유럽민주당(PDeCAT)등이 있다.
왕가
스페인 왕가는 헌법기관으로 국왕은 국가수반으로서 스페인의 통일성과 영속성을 상징한다. 16세기 이후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오늘날의 스페인 왕가는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부르봉 왕가 후손이다. 2014년 왕위를 계승한 필리페 6세는 스페인에서 부르봉왕가의 시작을 알린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 필리페 5세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필리페 5세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이후 스페인 왕으로 임명되어 스페인에서 첫 부르봉 왕가를 시작했다.
스페인 군주제는 두 차례의 단절의 시기를 거쳤다. 첫 번째 단절은 1873년 2월부터 약 1년 10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1974년 12월 왕정복고에 의해 스페인으로 돌아온 부르봉 왕가는 1831년 지방의회 선거에서 공화파들이 승리하자 알폰소 13세가 프랑스로 망명함으로써 다시 단절되었다. 하지만 193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프랑코는 망명 중인 1947년 알폰소 13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를 국내로 불러들여 스페인이 왕국임을 선포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국가수반으로서 통치함으로써 국왕이 없는 왕국이 유지되었다. 프랑코의 유언에 따라 1975년 프랑코 사후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함으로써 스페인은 다시 군주제 국가가 되었다.
20세기 이후 유럽의 군주제 국가들에서 국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했다. 하지만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을 프랑코 독재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변화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기존의 보수주의를 버리고 자유주의적 개혁을 통해서 스페인을 의회민주주의 체제로 변화시키는데 기여했다는 평을 받고있다.
사법체계
스페인 사법체계의 최고 의결기관은 사법부 총평의회이다. 법관의 선발, 교육, 배치, 승진 및 징계 등 예산을 제외한 사법부 운영에 관한 전권을 행사한다. 사법부 총평의회 의장은 대법원장이 겸임하는데 국왕이 임명한다. 임기 5년의 20명으로 구성된 위원은 법관들 중 상하원이 6명씩 추천한 후보자를 국왕이 임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나머지 8명은 시민사회에서 상하원이 각각 4명씩 추천한 사람으로 국왕이 임명한다.
법무부는 예산 할당 등 사법부를 운영하는 행정적 지원에 그치고 있다. 우리나라와 달리 판사와 검사는 법무부 소속이 아니라 사법부 소속으로 사법부 총평의회의 관리감독을 받는다.
스페인은 독립된 헌법기관으로서 헌법재판소를 가진다. 헌법재판소는 1978년 헌법에 의해 탄생한 기관으로 위헌심판, 헌법소원, 사전적, 예방적 규범 통제 등을 담당한다. 또한 중앙정부와 자치주정부 사이, 자치주 정부 사이에 발생하는 권한 문제에 대해 심판하기도 한다. 9년 임기의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12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는데, 상원과 하원이 각각 4명씩 추천해 국왕이 임명한다. 또한 행정부와 사법부가 각각 2명씩 추천해 국왕이 임명한다.
고도의 지방자치 국가로서 스페인의 법원은 전국적 관할 영역을 가지는 법원과 자치정부 법원이 존재한다. 전국적 관할 영역을 담당하는 법원은 대법원(Tribunal Supremo)과 우리나라의 고등법원에 해당하는 국가법원(Audiencia Nacional)이 있다. 반면, 자치정부 법원으로는 17개의 자치주 최고법원(Tribunal Superior de Justicia)과 50개 자치도에 위치한 지방법원(Audiencia Provincial)이 있다. 이들 법원들은 3~4인의 판사가 합의체를 구성해 재판을 담당하는 합의법원이다.
대법원은 사법부의 최고 상급 법원으로 하급 법원의 상고 사건을 담당한다. 또한 정당의 불법성이나 총리, 각료, 의원 등을 포함한 정부 및 자치주의 고위관료를 상대로 한 민형사 사건을 단심으로 담당한다. 기본권 침해 문제를 제외하고 고등법원의 판결에 대해서는 항소 및 상고할 수 없다. 대법원은 각각 10~12인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민사, 형사, 행정, 노동, 군사 등 5개의 재판부로 구성된다. 특수법원 형태인 국가법원은 수도인 마드리드에 위치해 있으며 형사부, 행정소송부, 노동부로 구성된 재판부를 가진다. 형사부의 경우 테러, 마약, 조직범죄, 위조화폐 등 특수범죄를 담당한다. 자치주 최고법원은 각 자치주에 소재하며 민사, 형사, 행정, 노동재판을 담당한다. 지방법원의 1심사건에 대한 항소를 담당한다. 한편 지방법원은 민사 및 형사 사건만을 담당하며 민사사건의 경우 하급법원의 사건에 대한 상고를 담당하고, 형사사건의 경우에는 1심을 담당한다.
하급법원은 모두 재판관 1인에 의해 단독으로 판결하는 법원으로 담당 분야에 따라 세분화 되어 있다.
행정구역
스페인은 17개의 광역자치주(comunidad autónoma)로 구성되며, 2개의 자치시(ciudad autónoma)인 세우타(Ceuta)와 멜리야(Melilla)가 있다. 모두 스페인 최고 일선 행정구역이다. 17개의 광역자치주는 50개의 도(provincia)로 다시 나뉜다. 각 도는 다시 시(municipalidad)로 나뉜다. 단 카탈루냐주(Cataluña)는 꼬마르까(comarca)와 베게리아(veguería)라는 행정구역이 더 있다. 시(municipalidad)가 모여 꼬마르까를 이루고, 꼬마르까가 모여 베게리아를 이룬다. 다른 지방에도 꼬마르까는 존재하지만, 카탈루냐와는 달리 역사적 혹은 지리적인 구역에 불과할 뿐, 행정상의 구획은 아니다.
- 광역자치주
광역자치주는 스페인 최고 행정구역 단위이다. 1978년, 스페인 내 민족과 지방의 자치 권한을 승인한 헌법이 공포된 이후, 광역자치주가 생겼다.[58] 광역자치주는 공동의 역사, 문화, 경제를 공유하는 인접해 있는 여러 도(provincia)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권한 이양(devolución)에 기반한 영토조직을 자치주라고 인식한다.
각 광역자치주의 기본 조직법은 자치법(Estatuto de autonomía)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역사에 바탕한 정체성, 영토 경계, 정부 조직 및 구성, 헌법에 근거한 권한에 따라 자치법은 광역자치주라는 명칭을 수립한다.
모든 광역자치주 정부는 삼권분립 형태에 기반한다. 각 권한은 다음과 같다.
- 입법의회(parlamento) : 의원들은 비례대표제에 따라 보통선거권에 의해 선발되며, 영토를 아우르는 모든 영역을 대표한다.
- 행정의회(consejo de ministro) : 입법의회가 선발하고 스페인 국왕이 지명하는 대통령(presiedente)이 수반이다. 집행 및 행정 기능을 가지고 있다.
- 최고재판소(tribunal supremo) : 스페인 최고재판소(El Tribunal Supremo) 휘하, 광역자치주 내 판사(judicatura)가 우두머리이다.
카탈루냐, 갈리시아(Galicia), 바스코(el País Vasco) 지방은 독립된 민족성을 가지고 있어 신속한 과정을 거쳐 자치정부를 구성하였다. 안달루시아(Andalusia)도 자치법령을 통해 최초로 자치주 이름을 취득하였지만, 장기적인 과정을 통해 다른 자치주들보다 늦게 헌법에 명기되었다. 이후 다른 지방들도 조금씩 자치법령 수정을 통하여 자치주가 되었다. 발렌시아(Valencia),[60] 카나리아 제도(Islas Canarias), 발레아레스 제도(Islas Baleares), 아라곤(Aragon) 등이 자치주가 되었다.
광역자치주는 광범위한 입법 및 행정 자치 권한이 있고, 의회와 지방정부를 가지고 있다. 권력이양이 비대칭적으로 이뤄졌기에, 각 광역자치주마다 권력 분산은 제각각 다르다. 바스코와 나바라(Navarra)만이 완벽한 재정 자립을 이루고 있다. 안달루시아, 바스코, 카탈루냐, 갈리시아는 별개의 민족성을 주장하고 다른 자치주들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이양받았다. 이들 지방 대통령은 의회 해산 및 재선거 요구 권한이 있다. 게다가 바스코, 카탈루냐, 나바라는 각각 에르차인차(Ertzaintza), 모소스 데스콰르다(Mossos d'Esquadra), 폴리시아 포랄(Policía Foral)이라는 자치 경찰이 있다. 다른 자치주들은 경찰력이 제한되어 있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안달루시아의 경우 안달루시아 자치 경찰(Policía Autónoma Andaluza)이 있으며 마드리드에는 BESCAM이라는 경찰이 있다.
그러나 최근 시행된 자치법 개정 혹은 신자치법 공포를 통해 별개의 민족성을 가진 지방과 기타 지방 갖의 비대칭을 완화시켰다.
세우타와 멜리야는 북아프리카 연안에 있는 고립영토이다.
- 시도
광역자치주는 도(provincia)로 나뉜다. 이는 자치주의 영토의 구성요소이다. 도는 시(municipalidad)로 나뉜다. 두 행정단위는 헌법에 의해 보장된다. 시는 새 업무 경영에 관한 자치 권한이 있다. 도는 미국의 주와 같은 활동을 수행하기 위하여 구획되었다.
현재 도 구획은 1833년 스페인 영토 분할에 기반한 것이다. 스페인 영토 전체는 50개의 도로 나뉜다. 또한 아스투리아스주(Asturias), 발레아레스 제도(Islas Baleares), 칸타브리아주(Cantabria), 라리오하주(La Rioja), 마드리드주(Madrid), 무르시아주(Murcia), 나바라주(Navarra)는 그 자체가 도이자 광역자치주이다. 이 경우, 도의 행정 기관은 광역자치주 정부 기관으로 대체된다.
- 주요도시
국방
스페인은 약 12만 명의 병력을 가진 세계 20위의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이다. 스페인은 15세기~16세기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바탕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화하기도 했지만 30년 전쟁 이후 점차 약화되었다. 2006년 징병제를 폐지할 때까지 거대한 병력을 바탕으로 한동안 세계 10위권 이내의 군사력을 가졌으나 이후 점차 약화되었다. 2017년 기준 육군 약 77,000명, 해군 약 20,000명, 공군 20,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 외에 4,700명 가량의 예비군과 77,000명 가량의 시민군이 있다. 국방비는 약 72억 달러로 프랑스의 1/9도 안 되는 예산을 사용하고 있다.
국방비나 병력 수준을 볼 때 스페인의 군사력은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장비의 현대화 등을 통해 안정적 전력을 유지하고 있다. 스페인은 1953년 미국과의 방위협정에 따라 미군의 주둔을 허용하고 있다. 스페인 국방정책의 핵심은 유럽연합과 나토와의 협력이다. 특히 미국과의 관계가 국방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안보정책은 나토와 유럽연합 외교안보정책 이라는 틀 속에서 유지된다. 한편 EU 외교안보정책을 위해서 Battle Group과 신속대응군 형성에 참여하고 있다. 스페인은 현재 약 3,000여 명의 병력을 나토 혹은 유럽연합의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 파병하여 평화유지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스페인 군대의 지휘권은 최종적으로 국왕에게 있다.
외교
스페인은 40여 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었던 프랑코의 독재체제 때문에 오랜 기간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로 남아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독재체제라는 이유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고 UN에도 가입하지 못했다. 이 때 아르헨티나를 제외한 국가들은 스페인과 외교관계를 단절하기도 했다. 1953년 냉전 기간 동안 전략적 요충지를 선점하려는 미국의 필요 때문에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미군이 주둔하면서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1955년 유엔 가입이 승인되고 1959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 가입할 수 있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긴장완화 분위기 속에서 동유럽 국가들과도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1982년에는 나토에 가입하고 1986년에는 유럽연합에도 가입함으로써 완전한 서방세계의 일원이 되었다.
스페인 외교정책이 중심을 두고 있는 지향점은 미국과 유럽, 중남미, 지중해 및 북아프리카이다. 먼저 나토와 미군의 주둔은 스페인의 외교안보정책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으로 스페인은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 속에서 관계 강화를 추구하고 있다. 스페인은 1980년대 이래 지속적으로 영토 내에 주둔중인 미군의 감축을 목표로 삼아 왔다. 하지만 나토의 일원으로서 6개 지역에 병력을 파견할 만큼 나토와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다. 나토는 유럽뿐만 아니라 스페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중해에서의 안보에 필수적인 부분이다.
다음으로 유럽연합은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스페인 외교정책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스페인은 1986년에야 유럽연합에 가입할 만큼 비교적 늦은 시기에 유럽연합에 가입했다. 유럽연합에 가입한 이후 스페인 경제가 괄목할 성장을 기록했고, 수출과 수입에서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중남미 지역 또한 스페인 외교정책의 가장 중요한 지역 중 하나이다. 이는 중남미에서 브라질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관계로 스페인어 문화권이라는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을 공유한 중남미 국가들과의 긴밀한 우호 관계는 국제무대에서 스페인의 지위를 결정짓는데 중요하게 작용한다. 스페인이 히스패닉-아메리카니즘(Hispano-Americanismo)라는 개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Columbus의 미대륙발견 500주년 기념행사'를 스페인 주도로 1992년 대규모로 치루었던 사실이 상징하듯이 중남미 국가와의 관계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지중해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 또한 스페인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중요한 외교정책 목표 지역이다. 스페인은 특히 사하라 이남 지역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는 과거 식민지 국가들뿐만 아니라 카나리 제도로의 불법이민을 통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또한 석유와 가스 수입원인 지중해 인근의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스페인은 종종 아랍 국가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스페인은 서구-이슬람권간의 상호 이해증진과 협력을 위해 '문명간동맹', '지중해연안국 고위급 회의(Barcelona Process)'를 주도한다.
이러한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여전히 주변국들과 영토 문제로 분쟁을 겪고 있다. 특히 스페인 최남단에 위치한 지브롤터를 두고 영국과 영토분쟁을 겪고 있다. 지브롤터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기간 동안인 1704년 영국이 점령한 이후 전쟁에서 패배한 스페인이 1713년 유트레히트 조약에 따라 영국에게 소유권을 넘겨준 영토이다. 하지만 스페인은 곧 지브롤터 반환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코 총통은 지브롤터 반환에 확고한 입장이었다. 스페인은 영토보전(territorial integrity) 차원에서 지브롤터가 스페인 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국에게 지브롤터는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지브롤터 해협을 관리하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만약 스페인의 영토보전이라는 논리를 적용하려면 스페인이 모로코 영토에 가지고 있으면서 모로코 정부와 영토분쟁을 겪고 있는 세우타를 모로코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반대논리를 펼쳤다.
지브롤터 관리에 어려움을 겪은 영국은 결국 1969년 지브롤터인들에게 아예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로써 지브롤터 문제는 영국과 스페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스페인과 지브롤터인들간의 문제가 되었다. 지브롤터인들은 자기결정권(self determination) 이라는 논리로 스페인 복속을 반대하고 있다. 이밖에 스페인은 이웃나라인 포르투갈과도 Olivenza(포르투갈어로는 Olivença)를 두고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다. 1297년 이후 포르투갈 영토였으나 1801년 스페인이 정복해 현재 스페인 영토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 지역에는 인구의 80%가 포르투갈인이고 30%가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포르투갈적 정체성을 가진다.
- 대한관계
스페인과 대한민국은 프랑코 독재 시대인 1950년 3월 17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70년 스페인에 상주대사관이 개설되어 최완복 대사가 취임한 이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에 사회노당자당이 집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과의 단독수교 원칙을 고수하면서 남북한 동시 UN 가입 등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해 주었다. 1990년대 후반 한국의 대북포용정책에 따라 스페인은 2001년 2월 북한과 수교했지만 국제무대에서 여전히 한국을 지지하였다. 한국과 스페인은 1974년 사증면제협정 체결을 시작으로 1994년 범죄인인도조약, 이중과세방지협정, 투자보장협정, 경제협력협정, 문화협력협정, 2001년 운전면허 상호인정협정을 체결했다.
한국의 스페인 수출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72년 초 마드리드에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무역관이 개설되면서부터이다. 1973년 2월에는 한국-스페인 경제협력위원회가 발족되었다. 2017년 기준 양국의 총 무역규모는 약 47억 달러에 이른다. 스페인은 우리나라를 아시아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생각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스페인을 유럽연합뿐만 아니라 중남미 및 아프리카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생각하고 있다.
한국은 스페인에 약 28억 달러 수출을 기록했고, 수입은 19억 달러를 기록해 양국 무역수지에서 한국은 약 9억 달러의 흑자를 보였다. 그러나 이는 자동차, 전자제품 등 해외시장에서 스페인으로 직접 수출하는 제품들을 제외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 제품의 스페인 수출은 28억 달러보다 훨씬 크다. 스페인과의 무역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1번째에 국가에 해당하며 EU 내에서는 9번째로 큰 규모는 아니다. 스페인에 대한 한국의 주요 수출품목은 자동차, 전자기기, 석유화학, 철강금속, 기계류 등이며, 수입품목은 광물, 식품, 정밀화학, 자동차부품 등이다. 양국간 투자는 2010~2017년 한국이 스페인에 누적투자액 7억 4천만 달러를 기록했고, 스페인은 한국에 같은 기간 5억 9천만 달러를 투자했다.
스페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은 총 4500명 정도로 스페인 본토에 3,800명, 라스팔마스 제도에 약 71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주 스페인 대한민국 대사관은 수도인 마드리드에 위치하고, 바르셀로나에는 총영사관이 있다. 한편 마드리드에는 한국문화원과 KOTRA 무역관이 설치되어 있다. 세비야의 안달루시아, 발렌시아, 빌바오에도 명예영사관이 있다.
경제
스페인은 제조업, 에너지 산업, 농업, 관광산업, 건설업 등이 발달한 국가로, 유럽연합 내 네번째 규모의 경제시장을 가지고 있어 소위 Big4라 불리고 있다.
주요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고루 발달한 선진국형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언어적, 문화적 연고를 무기로 중남미 지역의 통신, 건축, 정유 인프라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유럽연합 최대의 은행 중 하나인 산탄데르 은행과 BBVA가 있으며 수주량 세계1위의 건설업체 ACS와 석유기업 렙솔(Repsol), 세계 4위 통신사 텔레포니카, 전력기업 이베르드 롤라(Iberdrola), 철도 차량 제조 기업 CAF와 탈고(Talgo), 세계 최대 여행, 항공 발권 시스템 제작 업체 아마데우스, 소비재로는 ZARA를 소유한 세계 3위 패션그룹 인디텍스가 잘 알려져있다. 관광 또한 스페인의 주력 산업 중 하나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근세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국가로 한 해 8천만이 넘는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최근에는 스페인정부 차원에서 MICE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 중이다.
역사적으로 스페인 제국 시절부터 많은 식민지를 거느렸던 만큼 이들 지역에서 스페인어가 많이 사용되고 문화적으로 밀접한 이점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스페인 전체 무역량과 총생산에서 구 식민지 국가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같은 식민제국이던 프랑스의 두 배에 이른다.
이들 지역과는 이베로-아메리카 공동체를 통해 교류하고 있다.
- 현황
1998년경 부동산 규제를 완화하고, 1999년 유로화 도입 이후 저금리 기조를 이어가면서 전국적으로 부동산 열풍이 불었고 가계부채가 급증했다. 1997년 기준을 해서 2007년까지 10년만에 무려 3.1배 상승할 정도. 하지만 2007년 정점을 찍은 뒤 급락하면서 빚을 갚지 못한 사람들이 늘어나자 은행권의 부실이 심각해졌다.
이에 따라 스페인 정부에서 이들 은행의 부실을 메꿨지만 부실규모가 너무 커서 국가재정이 완전히 망가졌다. 2007년 거품붕괴 이전엔 GDP 대비 공공채무비율이 70%로 유럽에서 독일과 더불어 가장 낮았으나 현재 97% 수준까지 폭증했다. 버티지 못한 스페인 정부에서 결국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말았다.
최근에는 상황이 많이 나아져 무디스에서 신용등급을 한 단계 올려주었지만 시민들의 체감 경제가 다시 원상태로 복귀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말이 많고 여전히 25%에 육박하는 높은 실업률로 서민들은 고통받고 있다. 정부에서는 취업률 증가로 선전하지만 그 실체는 계약직 파트타임 등의 질낮은 일자리가 대다수이다. 비정규직 비율이 40%를 육박하여 이미 [[이탈리아], 독일을 추월하였으며, 신규 일자리 고용유지기간이 1주일도 안 되는 경우는 2015년 기준 26%에 이른다. 한 해 10만 명이 넘는 스페인 청년층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독일이나 멕시코 아르헨티나와 같은 구 식민지 국가로 떠나고 있으며 서구 언론에서 자주 언급하는 1000유로 세대 라는 단어도 유행하고 있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같은 대도시에서는 격일로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2015년 총선에서 카탈루냐 독립당이 패배하고 좌파정권이 승리하는 등 경제상황이 국민 체감상 호전되지 않는 극한상황인 듯하다.
결국 프란시스코 프랑코 사후 약 40년간 인민당과 사회노동당이 주거니 받거니 이어오던 양당체제가 붕괴되고, 좌파 신생정당 포데모스와 중도우파 신생정당 시우다다노스(Ciudadanos, 시민당)가 제3세력으로 대약진하여 정권교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이런 정국 혼란이 스페인의 경제에 미칠 영향에 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정치적 변동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는 쪽은 스페인의 전망을 어둡게 보고 있으며, 반대로 정치적 변동과 경제적 변화 간의 영향을 부정하는 쪽은 스페인의 전망을 좋게 예단하고 있다. 일단 선거가 끝나고 정국이 진정되어 봐야 정확한 상황 판단이 가능할 듯 보인다.
일단 객관적인 스페인 경제는 위기를 털고 회복세로 들어섰다는 평가다. 유로존 국가들이 다 같이 죽 쑤고 있는 가운데 스페인이 유럽의 성장을 견인할 것으로 기대 된다는 외신의 평가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흥 시장의 불황과 라틴아메리카(특히 브라질)의 장기적 경제 침체에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는 만큼, 스페인이 고성장을 하기 어렵다는 예측도 나타난다.
1인당 GDP에서 스페인은 유럽 경제위기의 영향을 직격으로 받은 결과 2015년에 25,718$(스페인) vs 27,105$(대한민국)로 역전당했다. 2015년에 한국에 추월당한 이후 스페인은 2021년 현재까지 재역전을 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포브스는 2016년 3분기 스페인의 실업률이 18.9%를 기록하여 6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여전히 높은 수치이지만 과거에 비해 실업률이 다소 호전되어 가고 있다는 것. 또한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역시 3.2%를 기록하여 유로존 평균치(1.7%)에 두 배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는 유로존 최대 경제대국인 독일이 1.9%, 프랑스가 1.4% 성장한 것을 감안할 때 큰 선방이다.
스페인이 2015년 말부터 2차례 총선을 치르고도 정부가 구성되지 못해 약 10개월간 '무정부' 상태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것에 '무정부의 역설'이라고 부르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국민들에게 '주요 걱정거리'를 묻는 조사에서도 무정부 상태는 상대적으로 낮은 5위를 기록했으며, 뉴욕타임스는 정부에 대한 스페인 국민들의 실망감이 크며, 일부 국민들은 무정부 상태를 환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다만 호세 라몬 핀 IESE경영대학원 교수가 "국가가 정부 없이 운영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래 지속되면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했고 BBVA은행은 내년 경제성장률을 2.3%로 둔화될 것이라고 보도하며 무정부 상태의 호황이 신기루일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스페인 자동차제조협회 ANFAC은 지난해 자국자동차 생산량이 289만대로 전년보다 5.6% 증가했다고 밝히면서 스페인은 관광업과 자동차제조업이 호황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7개월 만에 스페인 정치 전망이 다시 불확실해지면서 스페인 경제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현재 스페인의 PPP는 이탈리아를 근소하게 추월했으며, 고용 지표에서 좋은 성장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스페인의 부활 요인으로 유럽과 신흥국의 경기 회복에 따른 수출·관광업 호황과 노동생산성 제고를 꼽는다. 스페인 교통부는 2019년 8월까지 등록된 LPG자동차 시장이 3년새 2배이상 늘었다고 밝혔다.
2015년 이후 경기가 회복세를 달리고 있어 그리스나 이탈리아보다는 상황이 훨씬 낫다. 링크 애초에 두 나라의 공통점은 남유럽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묶인다는 점 밖에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나름대로 부채도 적으며 건실한 제조업을 유지하고 있는 스페인과, 산업이며 경제 구조 자체가 총체적 난국이라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알 수 없는 그리스를 비교하면 결과는 명백하다.
2020년 10월 27일에 스페인 정부는 대기업과 초고소득자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스페인의 다국적 전력회사인 이베르드롤라가 향후 5년간 재생에너지에 750억유로(약 100조 7,198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스페인 정부가 전기차 산업에 43억유로(약 5조 8,430억원)를 투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제성장률이 2021년에는 잠정치가 프랑스 7%, 스페인이 5%를 나타냈다.
2022년 4월 4일에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반도체 산업에 110억유로(약 15조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농업
스페인은 농지면적이 국토의 1/3에 불과하여 곡물생산은 국내 수요를 채우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주요 농산물은 밀·보리·귀리·호밀·쌀·옥수수 등이며, 상품작물·수출작물로는 올리브·오렌지·포도 등이 있다. 전반적으로 건조한 기후이기 때문에 관개가 농업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 ‘세카노’라 불리는 비(非)관개경지에서는 조방적인 밀농사와 방목이 이루어지는데 여기서는 부재(不在)지주에 의한 대토지 소유제가 대부분이다.
해안지대와 에브로(Ebro)강과 과달키비르강(Guadalquivir R.) 등의 유역의 내륙지대에는 우에르타(Huerta)라 불리는 관개경지가 있다. 로마시대부터 이베리아반도에서 관개농업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의 관개농업이 보급된 것은 이슬람교도에 의한 것으로, 관개경지에서는 올리브·포도·감귤류 등의 과수가 주로 재배된다. 올리브는 재배면적 234만ha, 연간 생산량 약 45만t으로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생산지이며 안달루시아의 관개경지에 집중되어 있다.
포도는 스페인 각지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는데 특히 라만차 지방, 발렌시아, 안달루시아의 말라가(Malaga) 부근 등 관개경지에서 대규모로 재배된다. 감귤류는 특히 발렌시아와 무르시아에서 재배되는데, 최근에는 해외 시장수요가 확대됨에 따라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감귤류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렌지이다. 스페인은 전통적인 목양의 나라로 지금도 카스티야(Castilla)와 에스트레마두라(Extremadura)에서는 메리노종(種)의 양이 집중적으로 사육되며, 북서부를 중심으로 젖소도 사육된다.
농업은 전체 GDP에서 농업, 임업, 수산업의 비중이 4.1%에 불과하며 이들 산업은 점차 비중이 축소되고 있다. 이러한 낮은 비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럽여타 국에 대한 지중해성 과일 및 채소류 등 농산물의 수출국으로서 특히, 올리브, 와인, 오렌지, 채소생산이 활발하고, 특히 남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비닐하우스 채소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포르투갈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생선을 잘 먹는 국민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어업이 활발하여 정어리·참치·대구 등을 어획하고 통조림 가공도 한다.
광공업
광물자원이 풍부하여 구리 5억t, 수은 70만t, 철 19억t, 납 120만t, 석탄 88억t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나 개발은 지연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리오틴토의 동광산과 비스카야 지방의 철광산 등도 있는데, 광물자원의 개발에는 영국·프랑스·독일 등의 외국자본이 많이 투입되었다. 스페인은 EU국가 중에서 5번째로 큰 전력시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마다 전력 소비량이 평균 4~5%씩 늘어나고 있다. 발전량의 화력발전(52.3%), 수력발전(25.2%), 원자력(14.9%), 그리고 나머지는 신재생 에너지(7.6%)로 구성되어 있다. (2003년)
공업은 카탈루냐를 중심으로 면포 및 모직물 공업과 시멘트·제지·유리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다. 비스케이만(灣) 연안 오비에도와 산세바스티안을 중심으로 한 지방에서는 중화학공업도 발전하였다. 근대공업은 유럽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력·제철·시멘트·비료 등의 기초산업이 확립되기 시작하였으나 1930년대의 세계적 불황과 내란의 진통으로 크게 후퇴하였으며 실질적으로 공업화가 시작된 것은 1940년대부터였다.
스페인의 공업화는 1941년 국가자본에 의하여 설립된 지주회사(持株會社)인 'INI(Instituto Nacional de Industria:산업공사)'가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 산하에 석유·비료·조선·제철·섬유·차량·항공·전화·전력·어업 등 여러 산업분야를 두고 이른바 혼합경제 체제를 운용하고 있다. 이와 함께 스페인 경제의 큰 특색은 외국 자본이 차지하는 높은 비중이다. 외국자본의 절반 이상이 미국 자본으로 전기공업과 군수공업에 집중되어 있다. 영국 자본은 채광·조선·야금 공업에, 독일 자본은 채광·기계 공업에 투자되고 있다.
항공우주산업
항공산업 역시 앞서있는 기술 선진국 중 하나이다. 스페인은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유럽 항공우주산업 5대 강국을 형성하고 있으며 스페인 항공우주산업은 전세계에서 몇 안되는 설계부터 부품, 최종 제조까지 다양한 기업들로 구성된 자체적인 생태계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 유럽 항공우주산업 품질 및 위험관리 표준인 EN9100을 획득한 제조사는 약 436개사가 있으며, 이들 기업이 스페인 내에 보유한 공장은 약 670개에 달해 스페인의 항공우주산업은 앞으로도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스페인은 1919년에 처음 항공기를 제작했으며 1920년대부터 CASA를 필두로 자체 기술로 군용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항공기 제작 라이센스를 획득하여 생산하기도 했는데 다수 기종은 상당 부분, 혹은 모든 부분을 자국제 기술과 부품으로 대체해 제조한 경험도 있다.
1955년 HA-200을 시작으로 제트기 제작 경험도 가지고 있으며 군용 터보프롭 분야에서는 C-295가 알려져 있다. 항공기 엔진 분야에서도 이스파노-수이자와 ENMASA를 필두로 당대 민간, 군용기 엔진의 몇몇 히트작도 만들어냈고, 한때 프랑스 군용기 엔진으로 많이 탑재되기도 했다.
그 결과 오늘날 스페인은 유로파이터 주요 생산국 및 기술지원 국가이기도 하고 민간항공 분야에서 나름 여러 가지 기체를 생산하며 자력발전하고 있다. EADS에 편입된 CASA가 일찍이 설립되어 카탈루냐와 안달루시아 지방을 중심으로 항공 산업이 크게 발전하는 등 유럽에서 항공 산업 BIG 5 중 하나다.
마드리드의 경우 항공우주산업이 고용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게 마드리드에는 A380 조립 라인이 있는 에어버스의 3대 사업장이 있는 곳이고 에어버스 밀리터리의 본사도 있는 곳이니까. 윗 사진이 에어버스 밀리터리의 마드리드 본사. 마드리드 지방에는 에어버스 스페이스, 바스크 지방에는 Hegan 클러스터, 안달루시아에는 Andalusia Aero Space와 Helice 클러스터가 있다.
참고로 스페인 항공 산업의 진가는 항공기 제작 분야보다는 항공교통관제시스템 개발에서 더 두각을 드러내는데 스페인의 인드라 시스테마(Indra Sistemas, S.A.)가 개발한 항공관제시스템은 세계 시장의 30% 이상을 점유하고 있으며 이는 이 분야에서 세계 1위다. 전 세계 주요 공항에서 인드라의 항공관제, 공항제어 시스템을 많이 이용하는데 인천국제공항의 관제시스템도 (기존의 프랑스 탈레스 시스템에서 2017년부터) 인드라의 시스템을 사용한다. 대한민국 해군의 차기 잠수함 KSS-3에도 인드라의 전자전 시스템 PEGASO ESM이 선정됐다.
우주산업은 (현재 ESA가 유럽 우주 개발 전반을 맡고 있지만) 90년대에 독자적으로 카프리코르니오라는 소형 로켓을 개발 완료했던 전력이 있고 미국 내 우주 기술 관련 특허 수의 경우 이스라엘보다 더 높으며 화성 탐사선 큐리오시티 프로젝트와 ISS 프로젝트의 16개 참여국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자동차 산업
세아트라는 자체적인 자동차 메이커도 있고, 이리사르 같은 버스 메이커도 있다. 이 외에는 GTA 모터스 같은 소규모 스포츠카 브랜드가 있다. 스페인 내에는 자국 메이커 이외에도 여러 자동차 회사들의 공장이 있어서 연 생산량은 300만대 수준으로 2014년 기준, 독일에 이어 유럽 2위, 세계 9위권의 자동차 제조국이다. 스페인의 임금이 프랑스 등에 비해 저렴하고 기술 수준이 높기에 프랑스나 벨기에 등지의 공장을 폐쇄하고 스페인으로 옮겨온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장비·공구
세계적인 철도 차량 제작강국이기도 하다. 한국보다 먼저, 세계에서 4번째로 고속열차인 AVE를 개통하고 자체적으로 고속철 차량 국산화에 성공한 나라이다. 스페인의 고속철 총연장은 중국에 이어 세계 제2위로 독일이나 일본보다 더 길다. 철도 차량 제작 기술 수준도 수준급이기 때문에 터키의 YHT와 우즈베키스탄의 아프로시욥도 스페인산 고속열차를 도입했으며 2018년 개통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하라마인 고속철도 스페인 열차를 채택하는 등 수출도 많이 하는 편. CAF와 탈고가 스페인 기업. 특히 언어, 문화, 역사적 동질성을 십분 활용해 중남미 시장에서 스페인 기업들의 영향력이 결코 만만치 않은 편.
서로다른 철도 궤간을 주행할 수 있도록 철도차량 바퀴의 위치를 궤간에 맞추어 변경할 수 있는 자동 궤간가변도 스페인에서 최초로 실용화되었다.
금융·은행업
금융업도 발전했다. 콩키스타도르 시절 남미의 금을 대량으로 약탈하여 스페인에 가져오면서 어쩔 수 없이 은행 문화도 발달하며, 금융 전통을 꽤 길게 가져온 국가이기 때문. 산탄데르 은행은 유럽 최대 은행중 하나이며 유럽 많은 지역에 진출해있다. 총 자산규모는 2019년 기준 유럽 4위로, 도이체 방크를 넘어서고 시가총액 기준으로는 영국의 HSBC에 이어 유럽 2위로 이 역시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진출해있다. 산탄데르 은행에 이어 2위 규모의 BBVA도 있다. 이 은행들은 유로존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가는 거대 규모의 은행들이다. 이 두 은행이 최근 뻘짓으로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정부에 SOS를 요청했으나 다시 안정권을 되찾았다.
관광·행사
스페인 하면 관광산업도 빼놓을 수 없다. 유럽여행 하면 보통 먼저 잘 알려진 서유럽 위주인 한국인들은 잘 인지하지 못하지만, 스페인의 관광업은 같은 관광대국인 미국, 서유럽인들조차 최고의 관광국가로 알아줄 정도로 굉장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관광으로 인한 직접적인 수입은 한화 56조로 관광수입이 무려 미국 바로 다음가는 수준이다. 한국에서 유럽권 관광지로 익히 잘 알려진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관광수익과 규모로 능가할 정도이며 이로 인한 고용창출 효과도 매우 높은 편이다. 관광산업은 2019년 기준으로 스페인 경제의 11%를 차지하고 있다.
스페인의 여행, 숙박업은 나름 유구한 전통이 있는데 산티아고 순례길 시절부터 순례객들을 끌어들였으며, 산업혁명 이후 일부 계층에만 향유하던 중산층 여행의 잠재성을 일찍부터 주목하여 대도시 철도가 연결되던 1860~70년대부터 본격적인 성장을 시작했다. 이미 1900~30년대 즈음 유럽 각국의 여행책자에 스페인이 주요국으로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으며, 1920년대 Parador라는 이름으로 각 지방에 흩어진 고성, 고 건축물들을 숙박업소로 개조하여 국가에서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후 프랑코 정권이 국제고립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1950년대년대 스페인 국경을 개방하고 북유럽에 대비되는 따뜻한 피한지로서의 매력을 홍보하여 카나리아 제도와 마요르카, 안달루시아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 중반에는 이미 한 해 2,000만의 여행객이 방문하게 되었다.
2019년 기준 스페인은 8,300만명이 방문하여 여행방문객 수로는 프랑스에 이어 전 세계 2위, 관광 수익으로는 미국에 이어 전 세계 2위를 기록하여 굴지의 관광대국 위치를 확고히 했다.세계 관광 기구(UNWTO) 여행 총람 덕분에 유로화 사태로 몰아친 스페인 경제위기를 버틸 수 있었던 요인으로 여행,숙박업이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음이 증명되었다.
2020년 기준 사상 최악의 전염병 중 하나인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이탈리아와 더불어 많은 피해를 입은 나라 중 하나인데 이 전염병으로 인해 관광산업등이 문을 닫는 바람에 다시 위기가 도래하고 있다.
현재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도 국제적으로 끝나가는 것이 확실시 되면서 재차 관광산업의 활황이 시작되는 추세이다.
교통
스페인의 교통 체계는 중앙집권화되어 있어 6개의 고속도로가 수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바스크, 카탈루냐, 발렌시아, 안달루시아, 에스트레마두라, 갈리시아로 퍼져있다. 대서양을 따라서도 페롤-비고, 칸타브리아 지방에서 지중해 지역(히로나~카디스)을 잇는 고속도로가 있다.
고속철도 체계로서는 유럽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면서 중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규모이다. 2010년 10월 부로 말라가, 세비야,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바야도리드를 잇는 총 연장규모 3500km의 철도가 개통했으며 평균 속도 300 km (대한민국의 KTX와 동일)로 운행한다. 보통 일본의 신칸센, 프랑스 TGV 다음으로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한다.[90] 정시를 지키느냐에 관해서 98.54%의 비율로 99%에 달하는 신칸센 다음으로 가장 높은 정시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현재 스페인 정부의 고속철도 계획은 2020년까지의 계획은 주요 도시를 모두 마드리드와 3시간 안에 연결하는 것이며 총 연장 길이는 7000km에 이르게 된다.
공항의 수로는 47곳이 있으며 가장 붐비는 공항은 마드리드 공항(Barajas)으로 세계에서 11번째로 붐비는 공항으로 유럽 연합에서는 4번째로 가장 붐비는 공항이다. 바르셀로나 공항(El Prat)도 중추 공항으로서 2008년 기준 3천만 명의 여행객이 다녀갔다. 주요 공항으로는 그란 카나리아 공항, 말라가 공항, 발렌시아 공항, 세비야 공항, 팔마 데 마요르카 공항(마요르카 섬), 알리칸테 공항, 빌바오 공항 등이 있다.
스페인 정부는 전기 자동차를 2014년까지 100만 대로 늘리는 계획을 시작했으며 이는 국가 에너지 절약과 효율성 제고를 목표로 하고 있다. 스페인 산업부는 "전기자동차가 미래 산업 혁명의 핵심 요소가 될 것"으로 보고 이에 나서고 있다.
무역
2017년 기준으로 스페인의 주요 수출 상대국은 프랑스(14.69%), 독일(10.92%), 이탈리아(7.85%), 포르투갈(7.0%), 영국(6.69%)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독일(12.51%), 프랑스(10.72%), 중국(8.25%), 이탈리아(6.49%), 미국(4.45%)이다. 2017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319,622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350,922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석유 제품(12,695,448.천 달러), 자동차(12,278,433.천 달러), 자동차 부품(9,781,263천 달러), 의약품(6,525,979천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석유 및 오일(25,680,385천 달러), 자동차 부품(8,738,733천 달러), 의약품(8,209,110천 달러), 자동차(8,159,782천 달러)이다.
인문사회
인구
스페인의 인구는 2019년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 4,700만 명을 넘어섰으며, 2020년 1월 기준으로 스페인에는 이미 47,431,25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2019년 이후 0.9% 증가한 수치다. 인구 밀도는 1제곱킬로미터당 91.4명(237/sq mi)으로, 다른 서유럽 국가들보다 낮은 편이지만,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거주 지역을 기준으로 하면, 실질적 밀도는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유럽에서 가장 높다. 수도 마드리드 외에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은 해안 주변이다. 스페인의 인구는 20세기 동안 두 배로 증가했지만, 농촌 내륙에서 산업 도시로 떠난 사람들이 많아 지역간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스페인의 50개 도 중에 11개 도가 100년 동안 인구가 감소했다.
스페인은 독일,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저출산과 고령화가 많이 진행된 국가로, 유엔에 따르면 2019년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19.7%를 차지해 거의 초고령 사회(20% 이상)에 다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출산율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구유지가 가능한 대체출산율 2.1을 밑돌아 현재까지 저출산 국가로 분류된다.
주민
스페인은 인종적·문화적으로 다양한 요소가 어우러진 복합체이다. 원주민은 지중해 인종에 속하는 이베리아족(族)이지만 기원 전에 남해안과 동해안을 따라 들어온 페니키아인(人)·그리스인에 의하여 식민개척이 이루어졌고, 북부에서는 피레네를 넘어 켈트인이 들어왔다. 이베리아족은 BC 3,000년경부터 아프리카에서 이베리아반도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북부의 갈리시아 지방 등의 켈트적 요소는 지금도 강하다. 그후 로마인에 이어 반달, 서(西)고트 등의 게르만 민족이 들어왔으며, 이슬람 세력이 확대되자 아랍인과 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이 침입하여 복잡한 혼혈이 이루어졌다.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인면에서 스페인이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동양적·아프리카적 색채를 강하게 띠는 것은 800년간에 걸친 이슬람 지배의 영향 때문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키가 작고 눈동자와 머리칼이 검으며 피부는 백인 치고는 어두운 빛깔이다. 그러나 여러 민족의 침입과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레콩키스타) 등 역사적 특성으로 인해 지역차가 크다. 가령 북부와 동해안에서는 켈트계(系)와 북방계의 인종적 특징을 볼 수 있다.
스페인어(語)는 로마 식민지 시대에 들어온 라틴어가 속어화한 것으로, 안달루시아(Andalucia) 지방을 포함한 메세타와 카스티야(Castilla) 지방의 카스티야 방언(方言),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란(Catalan) 방언, 북서부의 갈리시아(Galicia) 방언으로 대별된다. 갈리시아 방언은 포르투갈어에 가깝고 카탈루냐 방언은 프로방스어의 영향이 강하다. 스페인어의 표준어는 정치적 중심인 마드리드의 카스티야 방언이다. 소수민족으로는 피레네 산중의 바스크(Basco)족(族)이 있는데, 바스크어는 이베리아반도 원주민인 이베리아족의 영향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은 열렬한 가톨릭의 나라이다. 전 국민의 99%는 국교인 가톨릭의 유아세례를 받는데, 이렇게 가톨릭교가 스페인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은 국토회복운동이 가톨릭교의 힘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메세타에서 특히 현저하다. 가톨릭교는 정신적인 지배자이며 거대한 부동산 소유자인 동시에 강력한 정치적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 스페인은 이슬람교와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격렬한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페인의 가톨릭교회는 가톨릭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며, 정치적으로는 우익 성향이고 사회적으로는 대토지 소유자나 귀족 등 전근대적인 지배계층과 결합되어 있다.
언어
스페인 영내에서는 카스티야어(스페인어)가 공용어이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스페인어와 함께 그 지방의 언어를 공용어로 삼기도 한다. 비록 공용어의 지위를 갖지는 못하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이베리아로망스어군에 속하는 아스투리아스레온어, 에스트레마두라어, 아라곤어 등 일부 언어가 살아남아 소수의 사람들이 사용한다. 아스투리아스레온어는 공용어가 아니지만, 아스투리아스 지방 정부는 주민들에게 아스투리아스어 사용을 권장하고 있으며, 지역 내에서 공용어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라곤어의 경우에도 같은 경우에 속한다. 공용어가 아닌 언어의 경우에는 오랜 관습에 따라 습득된 언어이기는 하지만 언어 사용자의 의식적인 노력이 갈수록 저하되고 있어 문제가 되기도 한다. 공용어로서의 지위를 갖지 못하면 그만큼 언어 사용의 수요가 감소하기 때문이다. 북아프리카의 멜리야에서는 아라곤어 사용자가 다수 분포한다. 일부 사용자 중에서는 아랍어 사용자도 극소수로 보이는 편이다.
지중해 연안의 관광지에서는 영어와 독일어가 널리 쓰이며 여행객을 위해 관광업계 종사자와 지역 주민은 대개 제2외국어로서 이들 언어를 배운다.
- 갈리시아 : 갈리시아어
- 바스크, 나바라 지방(일부) : 바스크어
- 아라곤 : 아라곤어
- 카탈루냐, 발렌시아, 발레아레스 제도 : 카탈루냐어
- 스페인어 검정 시험
영어에서 TOEIC이나 TOEFL로 개인의 실력을 평가하듯이 스페인어는 DELE(스페인어: Diplomas Espanola como Lengua Extranjera)를 공식 인증 점수로 취한다. 시험에는 초급, 중급, 고급으로 나뉘며 시험 응시자가 처음에 자신의 수준에 맞춰 응시하는 형태를 띤다. 그 주체는 중국의 공자학원에 해당하는 세르반테스 교실에서 가지며 스페인 정부에서 갖는 경우도 있다. 1991년 스페인 정부가 설립한 세르반테스 교실은 전 세계 20개국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 개설됐다.
소수민족
영국인은 2006년 기준 76만 1,000명이 있다.
유대인의 이민은 크게 세 차례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19세기 이후 모로코에서 유대인이 유입되었으나, 나치의 탄압을 피해 대거 이동했으며, 그 후 아르헨티나에서 다시 유대인이 들어왔다. 스페인은 법률상 스파라딤(스페인, 포르투갈계 유대인)의 영주권 획득을 허용하고 있다. 롬인(집시)은 16세기부터 스페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현재 70만 명가량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종교
기독교
- 로마 가톨릭교회
스페인은 예로부터 로마 가톨릭교회 국가를 정체성으로 삼았으므로 단연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가 가장 많다. 전체 인구 중 76%가 가톨릭교도로 본인을 밝히고 있으며, 19%는 특정종교를 믿지 않는다. 2006년 10월 스페인 사회 연구소가 실시한 자료에 따르면, 76%의 가톨릭교도 중 54%는 거의 교회에 가지 않으며, 15%는 1년에 몇 번, 10%는 한 달에 몇 번 교회에 가는 반면 15%만이 매주 미사에 참석한다고 한다. 하지만 라틴 아메리카 출신 이민자들이 대거 입국하면서 스페인 로마 가톨릭교회에 다시금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 성공회
스페인 성공회(스페인어: Iglesia Española Reformada Episcopal., The Reformed Episcopal Church of Spain)는 세계 성공회 공동체에 자치적 관구교회(Province)로 속해있는 스페인의 성공회이며, 관구장은 카를로스 로페스 로사노 주교(Rt Revd Carlos López-Lozano)이다.
- 개신교
스페인 개신교회는 스페인 복음주의자의 60%가 로마인라고 할 정도로, 대부분의 신자가 로마인이다. 스페인 개신교 교파로는 침례교, 복음교회, 필라델피아교회(최대 교단) 등이 있다. 스페인 개신교 예배의 특징은 목사들이 플라멩코 음악을 예전 음악으로 사용하여 하느님을 예배하는 데 있다. 스페인 개신교 신자의 수는 1932년 6천 명에서, 1990년 8만 9천 명으로 증가하였다.
- 스페인 정교회
스페인 정교회는 국내 전 기독교인의 0.01%를 차지하며, 성장률은 3.8%이다.
- 기타
여호와의 증인 신도는 10만 5천 명 정도이며, 약 3만 5천 명이 모르몬교를 믿고 있다.
이슬람교
최근의 이민과 함께 무슬림이 늘고 있어 그 수는 거의 1백만 명에 달하고 있다. 사실 무슬림은 과거 스페인의 지배권을 얻었음에도 기독교 세력의 팽창에 밀려 수세기 동안 스페인에서 거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페인이 북서아프리카로 영향력 확장을 꾀함에 따라 영주권을 얻은 모로코계 주민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현재 이슬람은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신도의 수가 많은 종교이며, 전체 인구의 2.5% 정도를 차지한다.
유대교
유대교는 유대인의 입국이 허용되면서 스페인에 19세기가 돼서야 들어왔으며, 현재까지 유대인을 합친 유대교 신자는 6만2천 명 정도다.
사회특색
원래 스페인은 가톨릭이 국교였던 국가인 만큼 가톨릭의 영향력이 강하다. 도시의 구시가지 중심부에는 어김없이 성당이 자리잡고 있고 관광객들에게도 개방한다. 12사도 중 한 사람인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루살렘, 로마에 이어 가톨릭의 3대 순례 성지 중 하나다.
16세기 개신교에 의한 교회 분열이 확산될 때도 스페인에서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1515~1582)[24]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를,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은 예수회를 창설해 교회에 쇄신과 개혁의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개신교의 확산을 저지했다. 특히 예수회는 현지 문화를 존중하는 선교 방식과 교육으로 전 세계적 가톨릭 선교의 선봉장이 되었다.
그런데 좌파 사회당이 집권하면서 이혼, 낙태, 동성결혼 등에 대한 합법화를 시도하자 가톨릭 교회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스페인 부총리 데 라 베가는 국회에서 "어느 단체든지 집단 의사 표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정된 표현의 자유지만 국회의 절차를 반대하고 국민이 선출한 정부를 존중하지 않은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마드리드 대교구장 안토니오 마리아 추기경과 발렌시아 대교구장 아구스틴 가르시아 대주교는 "이혼, 동성결혼, 낙태에 대한 입법 토론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와 인간의 권리를 후퇴시키는 것이다"라며 정부를 성토했다. 결국 사회당 정부는 당시 유럽에서는 3번째로 동성애자들도 이성애자들처럼 결혼하고 입양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법 시행 7년 만에 18,000쌍의 동성 결혼 커플이 탄생했다. 2006년 스페인 동부 발렌시아를 방문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스페인 정부의 동성결혼 합법화 조치를 비판하면서 "양성결혼을 토대로 한 전통적인 가족 형태가 유지되어야 한다"라고 밝혔다. 2012년 7월 5일 국민당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음에도 스페인 헌재는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법안에 대해 국민당이 제기한 위헌소송을 기각했다. 2020년 12월 17일에는 안락사에 관하여 타 유럽 국가들의 추세를 따라서 비범죄화로 가기로 했다.
스페인에서는 고시원이 불법이다. 스페인의 건축법에 의하면 일정 크기 이하의 넓이로 건물을 짓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다. 그래서 스페인에서 집을 지을 때 방을 좁게 지을 수가 없으며 일정 면적 이상이 되어야만 건축 허가가 난다. 이렇게 좁은 집을 짓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인권유린이기 때문이며 스페인 정부의 표현으로는 사람을 쌓아올리면 안 된다고 한다.
교육
스페인은 6~16세까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재정으로 무상 의무교육 제도를 운영한다. 유아교육은 0세에서 3세까지는 유아원(Guardería), 3세에서 6세까지는 유치원(Colegio)에서 교육받을 수 있다. 유아원은 지역에 따라 무상교육이 아닌 곳이 있지만 유치원에서는 무상교육이 이루어진다. 6세에서 12세까지는 초등교육(Primaria)에 해당하고 12세에서 16세까지는 중등교육(Secundaria)에 해당한다.
의무교육인 중등교육을 마치고 대학에 입학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2년간 예비 대학과정(Bachillerato)을 다니는데 우리나라의 고등학교에 해당한다. 이 과정에서 2학년에 올라가면 이과, 예술/인문학 혹은 사회과학 중 하나를 선택해 과정을 이수한다. 각 과정에서 요구하는 과정에서 한 과목이라도 낙제할 경우 졸업을 할 수 없다. 또한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수학능력시험을 치러서 대학에 입학한다. 스페인의 고등교육 시스템은 대학교 4년(의학계열의 경우 5~6년), 석사과정 1년, 박사과정 3년으로 구성된다.
스페인은 순수 공립학교가 68%, 사립학교이지만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 학교가 26%, 순수 사립학교가 6% 정도 차지한다. 순수 사립학교는 유상교육으로 대부분 종교단체에서 운영한다. 이들 종교단체 사립학교들은 남녀공학을 허용하지 않는다. 학교는 대부분 3학기제로 운영된다. 가을학기에 시작해 크리스마스 방학이 있고, 두 번째 학기를 시작해 부활절 방학이 있다. 부활절 방학 이후 세 번째 학기를 마치면 약 3개월의 여름방학이 있다. 겨울방학은 따로 없다.
문화
스페인은 수많은 국가와 민족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문화유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본질적으로 이베리아 반도 고유의 문화는 이베리아 반도 자체의 인종과 켈트족 및 서고트족의 영향에 더해 로마 가톨릭, 이슬람 문화에 바탕을 두고 발전하였다고 여겨진다.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중앙으로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카스티야와 외부 지방 간의 긴장 내지는 다툼이 스페인 문화의 특성을 발휘하는 요인이 됐다. 최근에 와서는 스페인 문화라는 개념이 더욱 더 대도시의 것으로 굳어지는 양상을 띠고 있다.
자연적으로는 지중해와 대서양에 가까운 자연 자원이 문화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투우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로마인에게서 유래했다는 플라멩코라는 춤과 노래도 유명하다.
이탈리아 다음으로 스페인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많은 나라이며, 총 40개의 세계유산이 있다.
관습
대표적인 것으로는 시에스타(스페인어: La Siesta, 낮잠)가 있다. 시에스타는 낮 동안에 잠시 일터에서 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스페인의 고유 관습이다. 유럽의 관념에서 스페인의 시에스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인식되어 왔다. 많은 상점과 박물관조차 이 시간에는 문을 닫으며 거의 대부분의 사업장이 오후 중 두세 시간 정도 문을 닫으며, 지방 도시의 경우 시내 버스는 30분에서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되기도 한다. 낮 기온이 너무나 높기 때문에(한 예로, 세비야의 7월 한낮의 온도는 섭씨 43도까지 올라간다) 시에스타가 불가피하게 전해 내려왔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최근 스페인 의회에서 시에스타를 관공서에서만큼이라도 금하겠다는 조치를 발표 하여 스페인 전역에서 반발 여론이 급증하고 있다. 최근 들어 시에스타는 "이베리아의 요가"로 불리며 다시금 장려되고 있다. 여러 기업도 시에스타 구역을 마련하고 있다.
또한 소도시에서는 저녁에 한두 시간 정도 산책(스페인어: Paseo)하는 것이 흔하여 대도시에서도 이런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다.
스페인의 저녁 식사 시간은 유럽에서도 제일 늦다. 대개 동부 지방에서는 밤 9시, 서부 지방에서는 밤 10시에 저녁 식사를 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밤 문화가 흔하며 댄스 클럽이 소도시에서도 아주 흔하다. 대개 이런 클럽은 자정에 문을 열고 새벽까지 영업을 한다. 여름의 마드리드에서는 새벽 1시나 2시쯤에 있는 음악 공연을 빼놓을 수 없을 정도다.
문학
스페인 문학은 스페인 내에서 발표된 문학 작품을 총칭하며 뿐만 아니라 스페인계 작가가 발표하는 작품도 포함하곤 한다. 카스티야·갈리시아·카탈루냐 세 곳의 문학이 스페인 문학의 원류이다.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만큼 스페인 문학 작품은 세계적으로도 적잖은 영향을 미쳐왔다.
스페인 문학사의 최고(最古) 걸작은 12세기에 쓰인 〈시드의 노래〉(스페인어: Cantar de Mío Cid)이다.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이 서사시는 국토 회복 운동 당시 국민 영웅으로 칭송 받았던 로드리고 디아스 비바르를 기린 작품이다. 13세기에는 여러 지방에서 서사시의 형태가 출현했다. 스페인 최초의 시인이었던 곤잘로 데 베르세오는 성직자로서 아랍어와 히브리어 작품을 카스티야어로 번역하는 한편 종교적인 시를 썼다.
10세기와 11세기 동안 무어인과 유대인이 남긴 문학 작품의 영향은 상당히 커서 스페인 문학사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으나, 20세기의 스페인 문학 연구는 이들 작품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미술
스페인의 미술은 유럽 전역에서 영향력이 가장 크다. 역사적·지리적 다양성에 기초한 스페인의 미술은 과거 무어인이 이뤄 놓은 수많은 예술 작품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
스페인의 미술사는 구석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알타미라 동굴에서 발견되는 벽화가 그 증거가 되기도 한다. 이슬람교와 가톨릭의 영향으로 예술적 감흥이 큰 영향을 받은 측면도 크지만, 스페인의 미술은 미술가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민속 미술과 공예의 맥을 이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의 영향을 바로크 시대와 신고전주의 시대에 많이 받았다. 16세기에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수많은 미술가가 이탈리아에 방문하여 새로운 미술 양식을 배워 오기도 했다. 가톨릭교회가 미술가의 후원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이런 영향으로 17세기에는 스페인 미술과 문학 등이 전성기를 맞는다. 17세기부터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한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고야, 살바도르 달리 등 수많은 거장이 배출됐다. 피카소는 입체파의 주역으로 새로운 기법을 선보였으며, 달리는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명성을 누렸다. 이들 작품의 상당수는 프라도 미술관과 소피아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스포츠
대체적으로 스페인 하면 투우로 상당히 유명하지만 투우는 최근 동물 보호 논란과 경기 자체의 위험성 등으로 인해 인기가 예전보다 퇴색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유럽연합이 각 국가의 전통적 행위에 대해서는 EU의 규제를 따르지 않아도 좋다는 결정을 내림에 따라 다시 조금씩 부활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단적인 예로 최근 통계 조사에 따르면 스페인 여성의 신랑감 1순위가 의사, 변호사였고 2순위가 투우사였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일반인들에게 투우는 보편적인 스포츠가 아니라서 투우 관람 말고도 여러가지 할 것도 많고 막상 여행을 가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박물관 견학이 아닌 실제 경기 관람은 현지인들이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는다.
현대 들어와서 투우는 대도시의 젊은 사람들은 오히려 자국의 부끄러운 폐습이라며 진저리치는 반면에 카스티야, 안달루시아 중심의 시골 농촌의 고령층들은 "요새 젊은 도시 놈들이 우리 문화를 억압하려 든다." 라고 절대 사수하려고 드는, 현지인들이 별로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은 민감한 사회문화적 논란거리에 더 가깝다. 다른 국가에서 오는 유럽인들도 이것을 알아서 스페인에서는 따뜻한 날씨와 해변을 생각하고 별로 투우를 보러오지는 않는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카탈루냐 지방 정부 차원에서 투우를 금지해서 해당되지 않는다.
축구의 경우는 자국 리그인 라리가, 특히 엘 클라시코)가 전세계의 축구 리그 중에서도 최상위권을 다툴 정도로 유명한데 이른바 "세계 4대 축구리그" 로 부를 정도로 매우 수준이 높다. 스페인 국대는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강팀이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항상 고배를 마시는 비운의 팀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는 티키타카 전술로 2010년 남아공 월드컵, 2008년과 2012년 유로컵 우승을 연속 차지하며 한때 말이 필요 없는 최강국을 찍기도 했다. 브라질만큼은 아니지만 이 국가도 일반인들이 축구를 즐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편이다.
실내 축구인 풋살도 세계적인 강호로 축구 월드컵보다 먼저 풋살 월드컵을 연이어 우승했을 정도다. 2000, 2004 풋살 월드컵 연속 우승 국가고 6회 2008 풋살 월드컵에서는 개최국 브라질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해 준우승했다. 그래서 피파 풋살 랭킹은 브라질에 이어 세계 2위. 2012년 11월에 태국에서 열린 7회 풋살 월드컵에서도 5승 1무(1무는 이란에게 비긴 1:1) 무패 행진으로 결승에 진출해 또 브라질과 결승에서 격돌하게 되었는데 2-3으로 눈물을 삼키면서 또 준우승했다.
농구도 잘한다. 스페인의 농구 리그인 리가 ACB는 국제농구연맹(FIBA)선정 세계 농구리그 랭킹으로도 몇 해째 줄곧 2위(1위는 알다시피 NBA)다. 2022년에는 드디어 미국을 제치고 1위에 오르게 되었다. 흔히 알고 있는 대개의 프리메라 리가 축구팀은 농구팀도 함께 운영[9]하고 있고 농구 선수들이 등장하는 광고도 거리에서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다.
배구도 축구, 농구에 비해 덜 알려져 있을 뿐 세계무대에서 굵직한 활약을 남긴 바 있다.
야구같은 경우에도 저변도 있어 8개의 클럽팀으로 구성된 디비시온 데 오노르(División de Honor)라는 아마추어 리그를 가지고 있고 유럽 야구 내에서는 유럽야구선수권대회의 성적으로 네덜란드, 이탈리아 뒤를 이을 정도로 야구 강국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세계 대회 성적은 초라해 2013 WBC에 출전한 국대 선수단 중에서 스페인 출신은 1명이고 나머지는 중남미 출신 선수들로 구성되었을 정도로 기반이 약한 편이다.
럭비 유니언도 1티어 급은 아니지만 나름 인기도 있고 저변도 있다. 자국 프로리그 디비시온 데 오노르 데 럭비도 성행 중이며 다국적 클럽 컵 럭비 유럽 슈퍼 컵에도 스페인 팀 카스티야 이 레온 이베리안스가 참여하고 있다.
골프와 테니스는 국민 스포츠 대접. 강수량이 부족한 국가임에도 테니스장과 골프장 잔디를 유지하는데 쓰는 스프링클러를 아깝다 생각하지 않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골프는 호세 마리아 올라사발, 세르히오 가르시아가 유명하고, 테니스로는 '황제' 로저 페더러와 세르비아의 테니스 영웅 노박 조코비치와 왕좌를 놓고 다투는 빅3의 일원 라파엘 나달을 비롯해 총 6명의 세계 랭킹 1위가 배출되었다. 남자부의 카를로스 모야,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 카를로스 알카라스, 여자는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 가르비녜 무구루사가 있다.
그 외의 그랜드슬램 우승자는 세르지 브루게라, 알베르트 코스타, 마누엘 오란테스 등의 선수가 있으며, Top10급 선수들도 알렉스 코레차, 토미 로브레도, 다비드 페레르, 파블로 카레뇨 부스타, 로베르토 바우티스타 아굿 등등 수많은 훌륭한 테니스 선수들이 즐비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스페인만큼은 유독 클레이코트 스페셜리스트가 많다는 것. 위에 언급된 이유로 물 부족에 늘 시달리는 이유도 있다 보니 대부분의 테니스 코트가 클레이코트고 그래서 클레이코트에 강한 선수들이 주로 나온다. 당연히 자국 최대 대회인 마드리드 마스터즈 역시 클레이코트. 윔블던 결승전 같은 큰 경기 때에는 거리에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 밖에도 배구도 상당한 강호다.
도로사이클 강국으로도 유명하다. 3대 그랑뚜르중에 하나인 부엘타 아 에스파냐의 개최 국가고 과거에는 페데리코 바하몬테스, 80년대에는 페드로 델가도, 90년대에는 미겔 인두라인, 0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알베르토 콘타도르라는 사이클계의 거물들을 배출한 국가로 유명하다. 현역 선수로는 알베르토 콘타도르, 사무엘 산체스, 알레한드로 발바르데와 같은 클라이머들로 유명하다.
더불어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없지만 모터스포츠도 강국. F1의 페르난도 알론소나 모토 GP의 호르헤 로렌조, 다니엘 페드로사가 유명하다. F1의 경우 스페인 선수 중 알론소 혼자 독보적으로 잘하는 수준이지만 모토 GP같은 경우 이탈리아, 스페인 선수들이 쌈싸먹는 곳이다. 2013 시즌 최연소 챔피언인 마크 마르케즈가 스페인 선수고 2014 시즌 무려 6연속 폴포지션을 먹은 미친 실력을 보여 준 국가다. WRC의 전설 중 한명인 카를로스 사인츠도 이 국가 사람이다. 그의 아들 카를로스 사인츠 주니어는 F1 드라이버로 활동하고 있고 현재 스쿠데리아 페라리 소속이다.
태권도의 신흥 강국으로도 유명하다.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된 21세기 들어 체육관 수가 늘어났고 국제대회 메달 수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인은 태권도 도장에 들어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반면 피레네 산맥이라는 산지를 끼고 있음에도 동계 스포츠는 매우 약한 편. 1972 삿포로 동계올림픽에서 알파인 스키 금메달,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역시 알파인 스키 동메달을 제외하고는 동계올림픽에서 메달이 전무하다.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는 30년 만에 알파인 스키 3관왕을 배출했으나 그 장본인인 독일에서 귀화한 요한 뮐레크(Johann Mühlegg)는 약물 복용이 적발되면서 메달을 모조리 박탈당했다. 참고로 삿포로 금메달리스트인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즈 오초아(Francisco Fernandez Ochoa)와 알베르빌 동메달리스트인 블랑카 페르난데즈 오초아(Blanca Fernandez Ochoa)는 부녀 지간이다. 그러다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스노보드와 피겨 스케이팅(하비에르 페르난데스)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면서 26년만에 동계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기쁨을 누렸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최국이기도 한데,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1988 서울 올림픽의 바로 다음 하계올림픽이라는 점, 이 대회의 맨 처음과 맨 마지막 금메달을 대한민국이 차지했다는 점, 결정적으로 마라톤의 황영조가 몬주익의 영웅으로 탄생한 대회였다는 점에서 매우 친숙한 대회이다. 개최국 스페인도 남자 축구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는 등 금메달 13개, 은메달 7개, 동메달 2개로 금메달 수 기준 종합 순위 6위에 올랐다.
요리
스페인 요리는 다른 유럽 국가처럼 지리적 특성의 영향을 많이 받아 지역적 차이가 두드러지기도 하다. 스페인 사람들은 주로 하몬이나 초리소(소시지의 일종), 코치니요(새끼돼지구이), 필레테(스테이크), 레차또(새끼양고기), 까요스(곱창 전골), 엠부티도(순대) 등의 육식을 하고 음식들이 대부분 기름져있다. 바다를 끼고 있기에 해산물 요리가 많이 발달했으며 지중해 연안을 통한 활발한 교역을 통해 더욱 독특한 요리가 생겨났다. 스페인은 이탈리아 및 프랑스와 함께 유명한 포도주 산지이며, 라틴 아메리카를 비롯한 여러 스페인어 언어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가장 대표적인 음식을 꼽자면 파에야와 스페인식 햄의 일종인 하몬이 있다.
스페인인은 하루에 식사를 다섯 번 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조식은 간편하게 먹고, 점심과 저녁사이 간편하게 바에 가서 음료와 같이 따라오는 타파스나 샌드위치 등의 메리엔다를 먹는 경우도 있다. 5번의 식사란 다음과 같다.
- 데사유노 : 조식. 일어나자마자 빵과 커피 혹은 우유 등을 먹는다.
- 메리엔다 메디아 마냐나 : 가벼운 아침 식사. 오전 11시 즈음 샌드위치 따위를 먹는다.
- 알무에르소 : 점심. 오후 2시 즈음 정찬으로 먹는다.
- 메리엔다 : 가벼운 저녁 식사. 대개는 오후 6시를 전후로 하여 간식을 먹는다.
- 세나 : 저녁 식사. 오후 9시나 그 이후 시간에 수프나 샐러드 등을 먹는다.
영화
MPAA(미국영화협회)의 집계에 따르면, 2019년 스페인 영화 시장은 북미 영화, 중국 영화, 일본 영화, 한국 영화, 영국 영화, 프랑스 영화, 인도 영화, 독일 영화, 멕시코 영화, 러시아 영화, 호주 영화, 이탈리아 영화 시장에 이어서 세계 13위로 나타났다. 위의 그래픽에서는 북미 영화 시장(114억 달러)이 따로 표시되어있지 않은데, MPAA가 미국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만 표로 따로 나온 것이다.
2016년 기준 6억 미국 달러로 세계 14위의 영화 시장이다. 2016년 영화관 스크린 개수는 3,560개로 세계 3위 영화 시장인 일본 영화 시장 스크린 개수인 3,472개보다 많다. 스페인(6억 달러)과 일본(20억 달러)은 영화 시장 규모가 3.5배 차이가 난다. 영화 시장이 5억 달러를 넘긴 사실상 마지막 마지노선이다. 원래 스페인 영화 스크린은 2007년 4,335개까지 커지기도 했으나 2008년 이후 부동산 거품붕괴가 스페인을 덮치고 경기침체가 장기화 되고있는 탓에 영화관 체인이 도산하면서 스크린이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가 강세를 보이며, 자국 영화가 박스오피스 1위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전반적인 자국영화 점유율은 10%, 높아봐야 20%대인 수준이다. 동아시아 영화는 스페인에 거의 개봉하지 못한다.
저작권법 의식이 희박해서 무판권 블루레이나 DVD가 상당히 많다. 심지어 자국에서도 안 나온 영화의 블루레이를 만들어서 판다. 당연히 품질은 형편없다. 저작권법 의식이 희박하다기보다는, 스페인 경기침체로 인해 스페인 영화 시장에 다양한 작품이 개봉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페인어를 쓰고 있는 나라가운데서 빈부격차가 극악한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보니 해당국가에서 불법복제된 DVD들이 더욱 판치기 좋은 환경이기도 하다.
스페인의 영화 산업은 오랜 독재 기간동안 침체기에 빠져 있었지만, 그 이후 간간히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는 작품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 근래에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스페인 감독으론 '그녀에게', '나쁜 교육', '내가 사는 피부' 같은 작품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들 수 있다. 최근 작품은 다소 서정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같은 초기작품에서는 화려한 색감과 당장이라도 터져나갈 듯 팽팽한 정서적 긴장감 같은 스페인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알모도바르 영화의 국제적 성공을 발판 삼아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대표적인 경우다.
그밖에도 최근 '오퍼니지', 'REC' 같은 호러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사실 스페인 호러 영화의 역사는 이미 70년대로 거슬러 간다. 피가 낭자한 동시대 이탈리아 호러에 비해, 'La Residencia', 'Who can kill a child' 같은 스페인 호러 영화는 인물들의 심리와 분위기를 통한 공포를 조성하는데, 근래의 스페인 호러도 그런 특징을 계승하고 있다. 떼시스, 오픈 유어 아이즈, 디 아더스, 시 인사이드 등으로 유명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2]도 스페인에서 활동하는 감독 중에서는 비교적 알려진 편이다.
전반적으로 프랑코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와 68혁명의 스페인판인 라 모비다 마드릴레냐 때문에 세속적 자유주의/풍자 성향이 강하며, 스페인을 지배한 가톨릭 문화에 반항적인 영화가 많다.
스페인 출신의 배우로는 페넬로페 크루스, 하비에르 바르뎀, 안토니오 반데라스, 엘레나 아나야, 파스 베가, 빅토리아 아브릴 등이 있다.
건축
스페인의 건축 양식은 다채로운 특질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여러 민족과 문화가 융합되어 있다. 따라서 스페인 건축이란 과거 로마 시대와 아랍인의 지배 때부터 내려온 건축의 특색과 현대적인 발상이 조화를 이룬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랍 세력인 우마이야 왕조는 코르도바에 중심 세력을 두고 성장하여 문화 수도의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건축 양식은 기독교 왕조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서 기독교 세력은 로마네스크 건축 및 고딕 건축 양식 등을 수용하여 발전시켰다. 이슬람 세력은 문화적 고립을 겪었지만 모스크와 이슬람 특유의 걸작을 남겼다. 12~17세기까지 두 기독교와 이슬람의 건축 양식은 혼재, 발달 국면에 접어든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안토니오 가우디의 등장과 함께 스페인 건축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된다. 스페인의 현대 건축은 GATEPAC(스페인 현대 건축 미술가 협회, 스페인어: Grupo de Artistas y Técnicos Españoles Para la Arquitectura Contemporánea)에서 주도하고 있다. 현대 건축은 현재 혁명기를 겪고 있으며, 라파엘 모네오를 비롯하여 산티아고 카라트라바, 리카르도 보필 등의 건축가가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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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참고자료
- 〈스페인〉, 《위키백과》
- 〈스페인〉, 《나무위키》
- 〈스페인/정치〉, 《나무위키》
- 〈스페인/역사〉, 《나무위키》
- 〈스페인〉, 《두산백과》
- 〈스페인의 헌법과 정치〉, 《두산백과》
- 〈스페인의 의회와 정당〉, 《두산백과》
- 〈스페인의 왕가〉, 《두산백과》
- 〈스페인의 사법체계〉, 《두산백과》
- 〈스페인의 국방〉, 《두산백과》
- 〈스페인의 외교〉, 《두산백과》
- "Spain", Wikipedia
- 〈스페인의 대한관계〉, 《두산백과》
- 〈스페인/경제〉, 《나무위키》
- 〈스페인의 농업〉, 《두산백과》
- 〈스페인의 광공업〉, 《두산백과》
- 〈스페인/문화〉, 《나무위키》
- 〈스페인 영화〉, 《나무위키》
- 〈스페인의 교육〉, 《두산백과》
같이 보기
- 마드리드
- 바르셀로나
- 이베리아반도
- 포르투갈
- 이슬람
- 북아프리카
- 카나리아 제도
- 지중해
- 발레아레스 제도
- 바로셀로나
- 발렌시아
- 세비야
- 빌바오
- 말라가
- 펠리페 6세
- 페드로 산체스
- 프란시스코 프랑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