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낙산사(洛山寺)는 강원도 양양군 오봉산에 있는 사찰로 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의 말사이다. 강원도 영동 지방의 빼어난 절경을 뜻하는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이다. 671년에 창건된 이후 여러 차례 중건, 복원과 화재를 반복하였다. 2005년 산불의 피해를 입어 여러 문화재가 훼손되기도 하였다. 사내에 칠층석탑(보물 499호),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1362호), 해수관음공중사리탑 및 사라장엄구 일괄(보물 1723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2005년 화재로 보물 479호였던 낙산사 동종이 융해, 소실되어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다. 화재 이후 낙산사는 몇 년에 걸쳐 복원 공사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양양군의 대표적 관광 명소 이기도 하며, 지역 사회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기도 하다.
목차
개요
낙산사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에 있는 절이다. 관세음보살이 머무른다는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 즉 낙산(오봉산)에 있는 사찰로, 신라 문무왕 11년(671년)에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전설에 따르면, 의상이 관세음보살을 만나고자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다. 이때 바닷가 굴 속에서 희미하게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건네주며 "내 전신(前身)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대나무 2그루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그곳이 바로 원통보전(圓通寶殿)[1] 터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오봉산을 관세음보살이 있는 낙산(보타락가산)이라 여겨 '낙산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외에 부속건물로 의상대(義湘臺), 홍련암(紅蓮庵) 등이 있으며 일대가 사적 제495호로 지정되었다.
3대 관음기도도량으로도 손꼽히고 관동팔경의 하나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조선 세조 때 다시 세운 7층석탑을 비롯하여 원통보전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담장 및 홍예문 등이 있다.
역사
- "昔 義湘法師始自唐来還 聞大悲真身住
- 此海邊崛内 故因名洛山 盖西域寳陁洛伽山
- 옛날에 의상법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대비(관음보살)의 진신(사리)이 이 해변의 굴 속에 있다고 들었기에 이름을 낙산이라고 지었다. 이는 서역에 보타락가산이 있기 때문이다."
- — 《삼국유사》, 권 제3, 제4 탑상,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
671년(신라 문무왕 11년) 의상이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굴 안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굴 속에 들어가 예불하던 중 관음보살이 수정으로 만든 염주를 주면서 절을 지을 곳을 알려 주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고 '낙산사'라 하였다 한다. 858년 신라 헌안왕 2년 범일대사가 중창하였으나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1467년 조선 세조는 금강산을 둘러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낙산사가 몽골 전란으로 쇠락한 채 방치된 것을 보고 중창을 명령하였다. 중창은 학열(學悅)이 책임지었고, 칠층석탑이 이 때 지어졌다. 1469년(예종 1년) 정희왕후가 세조를 위해 발원하여 범종을 만들었다. 건칠관음보살상도 이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성종 대에 이르러 학열이 노쇠하게 되자 절의 운영권을 두고 다툼이 있었다. 1477년 강릉대도호부사는 성종의 윤허를 받고 쟁송에 대해 입안을 내려 수도하는 수행승이 절의 운영권을 갖도록하였다. 1489년 3월(음)산불로 불에 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화재를 겪었다. 다시 1624년 인조 원년, 9년(1631)과 21년(1643) 재차 중건이 있었으나 1777년 정조 원년 화재를 당하여 다음해 다시 중건하였다.
한국 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53년에 다시 지었지만, 2005년 4월 5일 23시 53분 경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화일리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4월 5일 아침 산림청과 대한민국 국군은 헬기 10여 대를 긴급 투입해 진화 작업에 나섰다. 산불은 아침 7시 경 바람을 타고 낙산해수욕장까지 번졌고 오전 11시 20분경 큰 불이 거의 잡힌 듯 보여 주민들은 속속 집으로 돌아와 가재 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진화 작업을 위해 투입됐던 헬기는 고성 산불 진화를 위해 기수를 돌린다. 하지만 잦아지던 불길은 오후 1시경 강풍을 타고 되살아났으며 헬기도 양양으로 방향을 돌린다. 오후 2시 30분 양양군은 재난 경보를 발령했지만 15시 30분 낙산사에 산불이 확산되어 방화선이 무너졌고 산불이 일어난지 불과 1시간 만에 낙산사 대부분의 전각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4월 7일 양양군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다. 이 화재로 21채의 건물이 불타고 보물 479호로 지정되어 있던 낙산사 동종이 소실되면서 보물에서 지정 해제되었다. 산불 이후 동종은 복원되었지만 다시 보물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보물 제479호는 결번으로 남아 있다. 낙산사 동종은 2006년 9월 29일 새로 주조되어 10월 13일 충북 진천에서 시험 타종을 거친 후, 10월 16일 낙산사에 안치되었다.
문화재
원통보전
다른 절들의 대웅전 위치에 있는 건물. 낙산사의 중심법당으로서 낙산사가 관음성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석가모니불 대신 관세음보살을 모신다. 2005년 화재로 모조리 불탔지만 안에 있던 관음불상은 미리 옮겨놨기에 화를 면했다. 이후 복원하면서 예전엔 청기와 건물이었던 것을 일반적인 기와를 올린 건물로 바꿨다.
삼국유사 탑상편에 기록된 조신의 꿈 이야기가 낙산사 원통보전에서 기도하다 일어난 일이다. 현재의 원통보전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은 삼국시대가 아니라 조선시대에 만든 것이지만... 조신의 꿈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원통보전을 더 눈여겨 보게 될 것이다.
원통보전 안에는 건칠관세음보살상을 독존으로 봉안하였고. 2003년 2월 3일 보물 제1362호로 지정되었다.
보타전
원통보전에서 해수관음상 쪽으로 가다 보면 아래쪽에 보이는 눈에 띄게 거대한 건물. 원래 있던 건물은 아니고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낙산사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음성지임을 상징하는 건물로, 건물 안에는 관음상 1,500좌를 봉안하였다. 천수천안 관음상을 비롯하여 얼굴과 팔이 여럿인 불상이 다수 있어서 꽤나 이국적으로 보인다. 한국 불교에 힌두교가 살짝 가미된 느낌. 앞쪽에는 낙산사 7층 석탑을 본따 새로 지은 탑과 보타락이라는 이름의 2층 누각, 연꽃이 가득 있는 연못이 있다.
해수관음상
홍련암, 의상대와 더불어 낙산사의 랜드마크. 절 끝자락에 위치한 거대한 관음불상. 1972년 처음 착공되어 5년만인 1977년 11월 6일 점안했다. 1977년까지만 해도 동양 최대의 불상이었다. 크기는 높이 16m, 둘레 3.3m, 최대 너비 6m이며 대좌의 앞 부분은 쌍룡상, 양옆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했다. 관음상은 대좌 위의 활짝 핀 연꽃 위에서 있는데, 왼손으로 감로수병을 받쳐들고 오른손은 가슴께에서 들어 수인을 짓고 있다. 근처에는 종각이 있어 누구든지 한번씩 종을 쳐볼 수 있다. 비용은 불전함에 내는데, 액수는 자율적이다. 양심껏 내자. 아래쪽으로 약간 내려가면 관음전이 있다. 관음전 내부에는 불상이 따로 없고, 대신 불상이 있음직한 자리에 통창이 나 있다. 통창으로 외부의 해수관음이 정면으로 보이는 구조. 외부의 해수관음을 향해 실내에서 기도를 할 수 있는 건물이다. 한켠에 넓다란 바위가 있는데, 그곳에 올라가면 울산바위를 조망할 수 있다.
강화 석모도 보문사, 남해 보리암과 함께 3대 해수 관음기도 도량으로 꼽힌다.
보타전내관음상
보타전 내부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수관음∙성관음∙십일면관음∙여의륜관음∙마두관음∙준제관음∙불공견색관음 등 7관음상과 32응신상 천오백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
칠층석탑
보물 제499호. 이 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이르러 현재의 7층으로 조성한 탑이다. 이때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와 여의주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한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음으로써 천여년간 국교로 자리잡고 있었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와 함께 불교와 관련된 조형 미술의 분야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나마 조선 전기에는 불교미술 분야에서 조성 양식이나 수법이 고려적인 작품이 다소 조성되었다. 낙산사7층석탑도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는 석탑 중 하나이다.
탑의 받침이 되는 기단부(基壇部)는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밑돌을 놓았는데 윗면에 24잎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부(塔身部)는 지붕돌과 몸돌을 1층으로 하여 7층을 이루고 있다. 각 층의 몸돌 아래로는 몸돌보다 넓고 두꺼운 괴임이 1단씩 있어 특징적이다. 지붕돌은 경사면이 평탄하며 네 귀퉁이의 들림이 잘 어우러져 전체적인 모양이 경쾌하다.
탑의 머리장식부에는 찰주를 중심으로 원나라의 라마탑(喇嘛塔)을 닮은 여러 장식들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어 또 다른 특징이 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양식을 이어 받고 있으나 전체의 조형이 더욱 간략화되었다.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등의 탑신부와 비교해 볼 수 있다.
해수관음공중사리탑, 비 및 사라장엄구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 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 이 공중사리탑은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으로서 현재 보물 제 1723호로 지정되어 있다. 2005년 대형산불로 낙산사가 소실될 때 공중사리탑도 손상을 입어 2006년 해체 보수하던 중 부처님 진신사리를 비롯한 사리장엄구가 출현하였다. 조선시대 중기인 1692년(숙종 18)에 석겸스님 등이 대원을 발하여 세웠다고 전한다.
양양 낙산사 공중사리탑은 예술적인 측면으로만 보자면 일급의 석조물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첫째, 건립의 절대연대가 1692년으로 밝혀져 비슷한 시기의 승탑을 비롯한 관련 석조물의 편년에 소중한 준거가 된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둘째, 매우 드물게 현존하는 이른바 승탑형 불사리탑의 새로운 예가 추가되었다는 점도 평가할 만하다.
셋째, 양식적으로나 세부에 있어서나 조선시대 왕릉의 장명등과 유사성이 다분하여 양자 사이의 교류 관계, 나아가 절집 석조물과 그 밖의 석조물의 양식적인 영향 관계를 살필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
양양 낙산사 공중사리비는 그 자체만으로는 조선후기 석비의 일반적인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공중사리탑과 그 안에서 수습된 사리장엄구와 아울러 생각한다면 이 비의 가치는 배가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불사리를 모시려는 목적 아래 만들어진 일관 유물일 뿐만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기능과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비문의 내용이 사리장엄구의 일부를 이루는 문서 내용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공중사리탑, 공중사리비, 사리장엄구가 이런 관계 속에 존재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공중사리탑에서 수습된 사리장엄구 일괄은 인위적인 손상 없이 처음 매납된 상태 그대로 수습되어 학술적인 가치가 높다. 그리하여 조선후기에 접어들 무렵까지도 사리병―금합―은합―동합의 순으로 매납용 사리기를 제작하여 그 안에 사리를 안치하는 전통적인 사리 장엄 방식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로써 주목에 값한다. 또한 사리장엄구의 일부로 수습된 비단 보자기 11점은 그 양호한 상태, 색채의 선명성, 무늬의 다양성 등을 통해 우리나라 직물사 연구에 커다란 기여를 할 수 있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이들 세 가지 유물, 즉 공중사리탑과 공중사리비와 사리장엄구 일괄은 관련 유물 가운데 어느 하나 결실되지 않고 고스란히 온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렇게 관련 유물이 갖추어진 형태로 전해지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그러하다. 따라서 이들은 낱낱의 유물이 지니는 가치도 적지 않지만 함께 보존되고 관리될 때 그 의미가 한층 강화될 것이다.
동종
낙산사 동종(洛山寺 銅鐘)은 조선 예종이 1469년(예종 1년) 그의 아버지 세조를 위해 낙산사에 보시한 종이었다. 조선 초기의 종을 대표하는 작품이었다. 2005년 4월 5일에 낙산사 화재 사고로 녹아내려 보물 지정이 해제되었고, 문화재청에 의해 복원되었다.
고향당 옆 종각에 보존되어있던 조선시대 종(보물 제479호)으로 2005년 산불로 소실되었으나 2006년 10월 16일 현대의 과학 기술로 완벽히 복원되어 현 범종각에 봉안되어 있다.
동종의 정상에는 반룡 두 마리가 서로 얼크러져 용뉴를 이루고 있어 매우 사실적인 표현법으로 장식되어 있다. 중앙의 옆띠와 물결무늬 옆띠 사이에 장문의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명문은 김수온이 짓고 정난종이 글씨를 썼는데, 그 내용으로 이 동종은 조선 세조 임금을 위하여 그의 아들 예종이 만들게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낙산사 동종은 조선시대 범종 가운데 16세기 이전에 조성된 드문 예 가운데 하나로서, 당대의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크기는 전체 높이 158cm, 입지름 98cm이다.
낙산사담장
낙산사 법당인 원통보전의 둘레를 사각으로 에워싸고 있는 담장이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의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세조(재위 1455∼1468)가 낙산사를 고쳐 지을 때, 처음 이 담장을 지었는데 대부분 터만 남아 있어 최근에 연결·보수하였다.
안쪽의 담벽을 기와로 쌓고, 바깥쪽은 막돌로 쌓은 이 담벽은 높이 3.7m·길이 220m이다. 암키와와 흙을 차례로 다져 쌓으면서 위·아래로 줄을 맞추고,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화강석을 배치하여 단조로운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법당을 향하고 있는 담장 안쪽에는 밑부분에 2층의 길게 다듬은 돌기단을 깔고, 그 위에 다시 한층의 긴 받침돌을 놓았다. 담장 위에는 기와로 지붕을 이어 담벽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돌기와와 흙으로 높고 정연한 담장을 쌓고 넓은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한 이 담장은, 법당을 둘러싸 신성한 지역을 구분하면서 공간 조형물로서의 효과도 함께 나타내고 있다.
홍예문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의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세조 13년(1467)에 왕이 낙산사에 행차하여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당시 강원도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26개의 화강석으로 홍예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홍예문 위에는 1963년 세운 누각이 있는데, 앞면 3칸·옆면 1칸의 문루이다. 이 문루는 주변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홍예석 주위에 자연석을 쌓고 세워 특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5년 화재 때 문루가 불타 홍예만 남았으며, 문루를 복원할 때 이번에는 산에서 가져온 돌을 사용하여 홍예를 보수했다.
홍련암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해 있는 암자. 절벽 끝에 세워져 있다. 의상대에서 옆으로 빠져서 한참을 가면 도착할 수 있다. 옛날에 의상대사가 참배를 할 때 갑자기 푸른 새가 나타나자 기이하게 여겨 따라가다가 어떤 석굴 속에서 자취를 감추자 그 앞에서 7일 밤낮을 기도하였고, 그러자 앞바다에 연꽃이 나타나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곳에 터를 닦고 암자를 세워 이름을 홍련암이라 지었다.
절벽 아래에 앞서 언급된 자연석굴이 있는데, 용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관음굴이라 불리는데, 암자 바닥에 관음굴을 볼 수 있는 작은 유리창이 뚫려 있다. 이 유리창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 봤을 때 용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나? 실제로 보면 절벽과 석굴에 부서지는 하얀 파도만 보인다. 이러한 전설 덕분에 오세암과 더불어서 흔히들 말하는 기도빨 죽이는 암자로 유명하다. 이로 인해 홍련암을 찾는 불자들이 많은데, 낙산사는 관광지로도 유명하기 때문에 불자들이 기도하고 있으면 얼른 나오라고 보채는 몰상식한 관광객들을 만나기도 한다.
2005년 산불 당시 바로 앞까지 불길이 번졌으나 다행히 소실되는 걸 피했다.
의상대
의상이 좌선수행을 했던 곳이라 전해지는 곳. 원래는 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폐허로 변해버렸고 이후 1925년에 그 자리에 정자를 세우고 의상대라 이름붙였다. 1974년 9월 9일 강원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그 덕인지 양양 8경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2022년 07월22일 까지 보수공사 진행중
건칠관음보살좌상
낙산사 원통보전 안에 봉안된 관음보살 좌상이다. 낙산사가 중건될 당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1362호로 2003년 2월 3일에 지정되었다.
사천왕문
2005년 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은 극소수 건축물이다. 다만 다들 복원하는데 혼자 그냥 두긴 뭐했는지 복원 과정에서 사천왕상을 개금하였다. 사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고 사찰을 지키면서 사부대중을 돕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사천왕을 모신 문이다. 3칸 규모의 내부에는 비파를 연주하는 동방 지국천왕, 장검을 들고 있는 남방 증장천왕, 용을 잡고 있는 서방 광목천왕, 보탑과 창을 들고 있는 북방 다문천왕이 있다. 1914년 문의 중수와 사천왕상의 개금이 이루어졌고 1988년에 보수하였으며 2010년 다시 문의 중수와 사천왕상을 개금하였다. 1950년 6.25전쟁과 2005년 양양 산불의 재난 속에서도 이 문과 사천왕상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빈일루
빈일루는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만해 한용운 스님의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에 의하면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에 두 번에 걸쳐 중수한 기록이 나온다. 이번에 새로 지은 빈일루는 조선 제22대 정조(1776~1800)가 단원 김홍도에게 특명을 내려 제작한 그림첩인 '금강사군첨'에서 나온 낙산사도를 기반으로 낙산사 회주 정념스님께서 지으신 전통건물이다.
교통
- 양양>낙산사
양양터미널에서 속초행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10분정도 후 낙산에 하차
- 속초>낙산사
속초에서 양양행 버스(9, 9-1)를 타고 낙산에서 하차. 속초시내에서 첫차 새벽 7시. 10분간격 배차
- 서울>양양
- 동서울터미널→양양 : 12,900원. 2시간 10분 소요. 첫차 07:00 막차 19:50
- 서울고속버스 터미널 →양양 :14,000원. 2시간 소요. 첫차 06:30 막차 23:30
- 운행간격 : 동서울터미널(40분~120분). 서울고속버스터미널(60분~120분)
- 자가용 이용 시
- 교통문의
- 낙산사 : 033-672-2447~8
- 양양군 교통계 :033-670-2356
- 양양시외버스정류장 : 033-671-4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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