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카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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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카시주(우크라이나어: Черкаська область)는 우크라이나 중부에 위치한 주이다.[1][2]
개요
체르카시주의 면적은 20,900㎢이며 인구는 1,178,266명(2022년)이다. 주도는 체르카시이다. 서쪽으로는 빈니차주, 북쪽으로는 키예프주, 북동쪽으로는 폴타바주, 남쪽으로는 키로보흐라드주와 접한다. 체르카시 주는 1954년 1월 7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주로 신설되었다.
우크라이나인이 이 주의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93.6%). 소수 민족인 러시아인은 두 번째로 많고(5.4%), 체르카시에 대부분이 거주한다.
자연환경
드니프로강 동안의 저지대와, 서안의 드니프로 고지(해발고도 250m)로 구분된다. 동부를 흐르는 드니프로강이 이 주에서는 크레멘추크호(湖:면적 2,252㎢)를 이루었다가 남동쪽으로 흘러 나간다. [3]
산업
농촌 지역에서는 사탕무를 비롯하여 밀·보리·해바라기·옥수수 등을 재배하며 소·양·돼지 등의 가축사육이 성하다. 늦봄에 수확하는 추파소맥과 사탕무 재배가 주된 생산 품목이다.
공업으로는 제당업이 활발하며 식품가공·섬유·기계 공업 및 갈탄(褐炭) 채굴이 이루어진다.
주도인 체르카시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산업발전이 이뤄졌으며, 화학공업 산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 당시 세워진 우크라이나 최대의 화학 비료 업체 아조트의 본사가 체르카시에 위치해있다. 이 외에도 기계공업, 가구 제작, 식품 가공 등의 산업이 있다.
주요도시
체르카시
체르카시는 우크라이나 중부에 있는 체르카시주의 주도(州都)이다. 드니프로강의 저수지 가운데 가장 큰 크레멘추크 저수지의 오른쪽 강둑을 따라 길게 뻗은 모양을 하고 있다. 도시의 북서쪽은 우크라이나 최대 규모의 천연 소나무 숲이 둘러싸고 있다. 17세기에는 카자크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우크라이나 최대의 질소 비료 공장인 아조트의 본거지로 화학 산업이 발달했다.
체르카시는 2011년 6월 도시 건립 725주년을 기념했다. 우크라이나 카자크의 중심지였으며, 체르카시의 주민 상당수는 흐멜니츠키(Khmelnytsky) 봉기 등 카자크와 농민들이 일으킨 봉기에 참가하거나 적극 도왔다. 체르카시는 현대적이고 잘 계획된 도시이기도 하다. 체르카시 북서쪽은 우크라이나 최대 규모의 천연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숲은 결핵 환자들을 위한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체르카시는 드니프로(Dnipro)강 하안(河岸)에 있는 저수지 가운데 가장 큰 크레멘추크 저수지의 우안에 자리하고 있다. 도시 면적은 우리나라의 분당과 비슷한 69㎢로,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크레멘추크 저수지를 따라 17km가량 길게 뻗은 모양을 하고 있으며, 도시의 폭은 가장 넓은 지점도 8km에 불과하다.
체르카시 북서쪽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체르카스키 비르(Черкаський бір)로 알려진 이곳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큰 천연 소나무 숲으로, 면적이 285㎢에 이른다.
체르카시는 겨울이 비교적 온난한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겨울인 1월의 평균 기온은 -5.9℃이다. 여름은 건조하고 따뜻한 편이다. 7월 평균 기온은 19.8℃이지만, 최고 기온이 35℃에 이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체르카시의 초기 역사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13세기에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상 1303년 당시 키이브 공국(Kyiv principality)의 영토에 있던 요새화된 도시로 언급돼 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는 1286년을 도시가 건립된 해로 간주하고 있다.
1360년대에 체르카시는 리투아니아 대공국(Grand Duchy of Lithuania)에 병합되었다. 이후 체르카시는 크림 타타르족의 침략을 막는 남방 수비선의 주요 도시로 성장했다. 1569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폴란드와 연방을 구성하면서 체르카시는 폴란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25년에 창설된 체르카시 연대(聯隊)는 도시 역사에 큰 역할을 했다.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가 폴란드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키자 체르카시 연대는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카자크군의 가장 강력한 지원 부대가 됐다. 체르카시는 1686년까지 헤트만(Hetman)이라고 불리는 수장이 이끄는 카자크의 반(半)자치적 군사 · 정치 공동체인 수장국(Cossack Hetmanate)의 거점 도시 중 하나였다.
국제법상으로 체르카시는 1667년 다시 폴란드 통치하에 들어갔다가 1793년 러시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797년에는 키이브현(縣)의 군(郡) 단위 소재지가 됐다.
19세기 초부터 체르카시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유명한 러시아인 건축가 윌리엄 헤스테(William Heste)에 의해 시가지가 설계되었다. 헤스테는 일자로 뻗은 거리에 의해 각 구획이 네모반듯하게 나뉘도록 하는 등 도시 종합 개발 계획을 세웠다.
19세기 후반 체르카시는 경제적으로 급성장했다. 특히, 철도와 설탕공장(1854년), 담배공장(1878년)이 건설된 후 공업 발달은 가속화됐다. 체르카시의 인구는 1897년 2만 9,600명에서 1910년 3만 9,600명으로 늘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체르카시는 볼셰비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의 내전을 거치며 체르카시는 최소한 18번 이상 주인이 바뀌었다.
1920년 1월 1일 체르카시는 결국 소련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체르카시도 1932~1933년의 대기근(Holodomor)과 스탈린(Stalin)의 대숙청으로 인해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체르카시는 물리적으로도 큰 피해를 겪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 폭격기들이 체르카시를 공격했다. 두 달 동안의 방어전에도 불구하고 체르카시는 8월 22일 독일군에 점령됐다. 1943년 12월 14일에야 체르카시는 독일 나치로부터 해방되었다. 거의 파괴되었던 도시는 전후 빠르게 재건됐다.
5개년 계획에 따라 체르카시 당국은 경제, 사회기반시설, 사회문화 영역을 재개발하기 시작했다. 1954년 체르카시는 신생 체르카시주(州)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식품업과 경공업은 제1차 5개년 계획과 함께 확대되었다. 화학 산업은 1950년대 말에 도입되었다. 특히, 1960년대에 우크라이나 최대의 질소 비료 생산공장인 아조트(Azot)와 인조섬유공장, 군사용 화학약품 공장 등이 건설되며 체르카시는 거대한 화학 산업 단지가 되었다.
1961년 크레멘추크(Kremenchuk) 수력발전소의 건설로 크레멘추크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긴 제방(堤防)인 이 저수지의 제방은 15km에 달한다. 크레멘추크 저수지 우안에 위치한 체르카시는 이 제방을 따라 놓인 철도와 도로 덕분에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우크라이나의 독립 후 체르카시의 인구는 다소 줄었고 생활수준과 산업도 쇠퇴했다. 민영화된 많은 대형 산업체들이 시장의 경쟁에서 밀려났다. 아조트 등 일부만이 성공적으로 살아남았다.
2008년 11월 28일, 체르카시의 중앙광장에 있던 레닌 기념비가 철거되었다. 광장의 이름도 레닌 광장에서 소보르나(‘대성당’이라는 뜻) 광장으로 바뀌었다. 2009년 체르카시 공항은 국제공항으로 승격됐다.[4]
스밀라
스밀라는 우크라이나 중부의 체르카시주(州)에 있는 도시다. 스밀라군(郡)의 행정 중심지이지만, 시정은 별도의 시의회를 통해 운영되는 체르카시주 직할도시다. 스밀라는 드니프로강(Dnipro River)의 오른쪽 지류인 티아스민강(Tyasmin River) 유역의 드니프로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주도(州都)인 체르카시로부터 남서쪽으로 2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스밀라의 기후는 온건한 대륙성이다. 겨울에도 온화한 편이며, 여름은 덥고 건조하다. 연간 160~170일은 평균 기온이 10℃ 이상이다. 스밀라와 인근 지역에서는 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정착지와 무덤들이 발굴됐다.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12~13세기 키이브 루스 시대에도 정착지가 있었다고 추정되지만, 몽골의 침공으로 옛 정착지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이후 이곳에서 발굴된 동전 등을 근거로 14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 시대에 정착지가 다시 세워졌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스밀라에 영구 정착지가 세워진 것은 1397년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2019년 9월 스밀라시는 건도 622주년을 기념했다. 이전까지 스밀라의 공식 건도(建都) 시기는 1542년으로 추정됐었다. 1533~1544년의 역사에 관한 사료에 ‘야츠코보-티아스미노(Yatskovo-Tyasmino)’라는 이름의 티아스민강 유역 정착지에 대한 기록이 있다.
티아스민으로도 불리던 이곳이 현재의 도시명을 갖게 된 것은 이 지역의 전설과 관련 있다. 한 소녀의 도움과 희생으로 전투에서 승리한 이곳의 전사들이 티아스민 인근에 그녀의 시신을 묻고 스밀라라고 불렀으며, 도시의 이름으로 그녀를 기렸다는 것이다. 불멸의 용기와 자유에 대한 열망, 희생과 애국심의 상징이 된 이 소녀는 스밀라시의 문장(紋章)에도 형상화돼 있다.
1569년 7월 루블린 연합 이후 스밀라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마을이 됐다. 그러나 폴란드인 영주들의 수탈에 맞서 카자크 지도자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가 봉기를 일으키면서 스밀라는 1648년 러시아제국으로부터 준자치권을 인정받은 카자크 수장국(Cossack Hetmanate)의 치히린 연대(카자크 수장국의 행정구역을 겸한 군사 편성 단위)에 편입됐다.
카자크와 러시아제국의 세력하에 있던 스밀라는 1660년 다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권에 들어갔다. 이후 카자크와 폴란드, 타타르, 투르크, 러시아, 스웨덴 등의 영토분쟁 속에 스밀라는 피폐해졌다.
1668년 러시아와 폴란드 간의 영구평화조약에 따라 드니프로강 우안과 티아스민강 좌안 사이의 땅은 비거주지가 됐다. 이 조약은 1709년 파기됐고, 스밀라는 폴란드의 왕족 루보미르스키(Lubomirski) 가문의 소유가 됐다. 루보미르스키는 1742년 도시 전체를 울타리와 방책으로 둘러싼 목조성을 건설했다.
스밀라는 1734, 1750, 1768년에 우크라이나 우안 지역의 카자크와 농민들이 폴란드 영주들의 착취와 종교적 탄압에 항거해 일으킨, 이른바 ‘하이다마키 봉기’의 주요 무대이기도 했다. 하이다마키란 봉기에 참가한 카자크와 농민 무장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이 투쟁은 1768년 봄과 여름에 절정을 이뤘다.
1773년 3월 11일 스밀라는 마그데부르크 도시법에 따른 자치권을 얻었다. 1787년 루보미르스키가는 스밀라와 인근 땅을 러시아의 귀족 그리고리 포툠킨(Grigory Potemkin)에게 팔았다. 포툠킨 사후 스밀라는 포툠킨의 조카 알렉산드르 사모일로프(Alexander Samoylov) 백작의 소유지가 됐다. 1793년 폴란드의 분할 후 스밀라는 행정구역상 러시아제국 키이브주 체르카시군의 마을이 됐다.
스밀라는 사모일로프가(家) 출신의 소피아 보브린스카(Sophia Bobrynska) 백작 부인 소유가 되면서 전기(轉機)를 맞는다. 그녀의 남편 알렉세이 보브린스키(Alexei Bobrynsky) 백작은 우크라이나 남부 최초의 설탕 정제소 중 하나를 이곳에 건설했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졌다. 보브린스키 백작은 1840년 하르키브·오렐·스몰렌스크 지방의 농민들을 스밀라로 이주시켰다.
20세기 초의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은 스밀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혼돈의 시기를 거쳐 1920년 스밀라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러시아 내전의 여파로 파괴된 도시경제는 조금씩 재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1941년 8월부터 1944년 1월까지 스밀라는 나치 독일군에 의해 점령됐다. 나치 점령기 동안 약 2만 5,000명의 주민이 총살되거나 고문당했다. 전후 스밀라는 다시 경제적으로 부흥했다. 1958년 가구공장, 1960년 금속공장, 1964년 구연산공장 등이 새로 문을 열었다. 주택들도 건설됐다. 1990년대 소련 붕괴 후 스밀라의 산업생산량은 급격히 줄었다. 인구도 1989년 1월 7만 9,449명에서 2013년 1월 6만 8,636명으로 줄었다.[5]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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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체르카시주〉, 《위키백과》
- ↑ 〈체르카시주〉, 《나무위키》
- ↑ 〈두산백과 : 체르카시주〉, 《네이버 지식백과》
-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체르카시〉, 《네이버 지식백과》
-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스밀라〉,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 〈체르카시주〉, 《위키백과》
- 〈체르카시주〉, 《나무위키》
- 〈두산백과 : 체르카시주〉, 《네이버 지식백과》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체르카시〉, 《네이버 지식백과》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스밀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동유럽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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