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김정일(金正日)은 북한의 제2대 최고지도자이자 독재자이다.
개요
- 김정일(金正日, 1941년 2월 16일 ~ 2011년 12월 17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였다. 또한 김정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이었으며, 아버지 김일성과, 어머니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다. 김정일은 어린 시절 한국 전쟁 당시 평양시를 떠나 간도 지역으로 은신하였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면서 귀환했다. 또한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61년 7월 22일에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이후부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비서 등에 임명되었다. 또한 1974년부터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되었으며, 1980년 제6차 당 대회를 통해서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 또한 1994년 김일성 국가 주석의 사망 이후에 권력을 세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실권을 잡아 통치자가 되었고 경제적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던 1993년부터 6년 동안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재정낭비 등으로 무능력한 지도자로 비판받았다. 2011년 12월 17일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하면서 김정일의 후계 자리는 그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에게 승계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로 불린다.[1]
- 김정일은 북한의 정치가이다. 김일성의 장남으로 태어나 1974년 후계자로 확정되었고,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뒤 권력을 승계하였다. 이후 17년 동안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노동당 총비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정치국 상무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0기 대의원 등의 공식 직함을 가진 북한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다가 2011년 12월 17일 사망하였다. 1942년 2월 16일 김일성(金日成)과 김정숙(金貞淑)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지에 대해서 북한은 백두산 밀영지의 귀틀집에서 태어났다고 공식 발표하고 있으나, 구 소련의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 Khabarovsk)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통설이다. 러시아식 이름은 유리 이르세노비치 김이었으며, '정일'의 한자는 원래 '正一'이었으나 아버지 이름의 한자를 따서 '正日'로 고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한 뒤에는 바로 그 권력을 승계하지 않고, 유훈에 따라 3년 뒤인 1997년 10월 조선노동당 총비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제를 폐지하고 권한이 더욱 강화된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되었다. 이어 2003년과 2009년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되었고,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당 총비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정치국 위원, 당 중앙군사위 위원장, 당 중앙위 위원 등에 선임되었다. 2008년 뇌졸중이 발병한 뒤 2009년 고영희와 사이에서 낳은 김정은(金正恩)을 후계자로 내정하였고, 2010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되게 함으로써 후계 구도를 확정하였다. 건강이상설이 끊임없이 나도는 가운데 2011년 12월 17일 현지 지도 방문차 탑승한 열차에서 사망하였고, 이틀 뒤인 12월 19일 조선중앙방송에서 과로로 인한 중증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되었다. 시신은 아버지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에 함께 안치되었다.[2]
김정일의 생애
- 김정일은 1941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김정일이 1942년에 백두산 근처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출생년도를 1942년으로 조작한 것은 김일성의 출생년도 1912년과 30년 주기로 맞추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흔히들 김정일이 소비에트 연방(현재의 러시아) 하바롭스크 인근 뱌츠코예에서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러시아어: 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 Yuri Irsenovich Kim)이라는 이름으로 출생했다고, 하지만 이도 정확하지 않다. 김일성 일가가 뱌츠코예에 88여단이 창설되면서 거기로 이주한 것은 1942년 7월 중순이므로, 뱌츠코예는 김정일의 출생지가 아니라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또 소련군 시절 김일성의 이름은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 아닌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이었으며, 소련군 문서에는 해방 후 평양직할시에 온 뒤인 1945년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
- 만주서 일본군의 토벌에 쫓기던 김일성은 김정숙과 함께 부하 몇 명을 데리고 1940년 10월 23일 소만국경을 불법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한다. 소련으로 망명해온 항일연군들은 보로실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 B야영)과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A야영) 두 곳에 분산 수용되는데 김일성은 남야영에 들어간다. 김정일은 거기서 1941년 2월 16일 태어났다. 남야영은 보로실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 마을이다. 김정일이 태어난 집은 라즈돌노예 마을길 (Lazo St.) 88번지(2층 빨간벽돌집)로 기차역 부근이며, 지금도 남아있어 연해주 관광객들의 관광 코스로 되어 있다.
- 2011년 12월 17일 8시 30분에 희천발전소 현지 지도 방문을 위해 탑승한 열차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인해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망 사실은 2일 동안 극비에 부쳐졌으며, 12월 19일 정오에 조선중앙방송 리춘히 아나운서를 통하여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되었고, 시신은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되었다. 김정일의 영결식은 12월 28일 평양시에서 거행되었고, 다음 날인 29일에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추모 대회가 열렸고 추모곡이 작곡되었다. 일각에서는 김정일이 열차가 아닌 평양 교외 별장에서 사망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2012년 2월 16일 71회 생일을 기념하여 조선인민군 대원수에 추서되었다.
김정일에 대한 평가
- 자신의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대내적으로는 정치범 수용소와 자유와 끔찍한 인권을 탄압을 자행했다. 현대판 봉건주의 나라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의 후계자 김정일이 대리청정체계로 들어서면서 극단적인 테러리즘이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아웅산 폭파 사건과 최은희 등의 납북과 KAL기 폭파사건을 배후 조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이 이런 테러의 배후로 밝혀지면서 우방국들마저 외교관계를 기피하기 시작해 외교무대에서는 입지가 좁아졌다. 이후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으로 정해져 적선국 제재를 받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시간이 흘러 냉전이 종식된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경제질서에서 완전히 소외가 되는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된다. 사회주회 경제체계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던 1980년대 농업생산력 저하로 고생하는 사회주의 나라들이 인센티브제도를 도입해 생상성 향상을 이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체제보장에 해가 될까 두려워 오히려 협동농장을 유지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은 더욱 떨어졌다. 1995년과 1996년 대홍수를 통해 수 많은 아사자가 나왔지만 특별한 자연재해가 없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모자라는 식량은 50만 톤 이상이기 때문에 아사자는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이 됐다.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시절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했다.
- 김정일은 17년 동안 북한의 최고 권력자로 있으면서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에 이어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두 번째 정상회담을 하여 남북 대립의 긴장 상태를 완화시키기도 하였으나,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친 핵 실험 강행과 1999년과 2002년의 1·2차 연평해전, 2010년의 연평도 포격사건 등으로 한반도의 위기 상황을 지속적으로 고조시키기도 하였다. 또 아들을 후계자로 정함으로써 3대 권력 세습 체제를 구축하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상봉을 지키지 않았고, 2002년에 핵 확산 금지 조약의 탈퇴 선언, 중국의 압력에 의한 신의주 경제특구 계획 실패 등이 있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교
- 김정일정치군사대학교(金正日政治軍事大學校)는 평양직할시 용성구역 신미리에 있는 북한의 대남사업 요원 및 공작원 양성기관이다. 1946년 창설된 금강학원의 후신으로, 1992년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북한에서 김정일의 이름을 딴 유일한 교육기관이다. 1946년 설립된 금강학원을 모태로 하며, 이후 정치대학과 금강정치군사대학을 거쳐 1992년 1월 김정일의 50세 생일을 기념하여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교육기간은 5년제이다. 교육과정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혁명역사를 비롯한 사상교양이 40%, 전투원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신체단련과 사격 및 격투술 등이 40%, 사진과 운전 등 기술교육이 20%를 차지한다. 특히 대남공작 요원으로서 극한 상황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과 위급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북한의 일반 군인보다 4~5배 이상 강도 높은 교육과 훈련을 반복한다.
6·15남북공동선언
- 6·15남북공동선언(六一五南北共同宣言)은 2000년 6월 15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하여 발표한 공동선언이다. 2000년 6월 15일 공식 발표되었다. 분단 55년 만에 처음 만난 남·북한의 두 정상이 백화원영빈관에서 6월 14일 오후 3시부터 6시 50분까지 3시간 50분에 걸친 마라톤 정상회담 끝에 합의한 5개 항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첫째,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둘째, 1국가 2체제의 통일방안 협의, 셋째, 이산가족 문제의 조속한 해결, 넷째, 경제협력 등을 비롯한 남북 간 교류의 활성화 등 두 정상 간에 합의된 사항이다. 또,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한 실무회담을 열 것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 등에 관한 합의사항도 포함하고 있다. 6·15남북공동선언으로 경의선 복원, 개성공단 활성화, 이산가족 상봉, 비전향장기수 등의 현안이 진전을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남북정상회담을 위하여 북한에 송금한 돈이 불법적으로 조성되었다는 등의 문제가 제기되어 2003년 관련 특검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6·15남북공동선언은 자주·평화·인도적인 남북분제의 해결과 통일 방안에서 합의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평가된다.
2007남북정상회담
- 2007남북정상회담은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남한과 북한 최고 지도자들의 회담이다. 남한의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회담을 하여 6·15공동선언의 적극 구현, 한반도 핵(核) 문제 해결을 위한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 추진, 남북 경제협력사업의 적극 활성화, 이산가족 상봉 확대 등을 내용으로 하는 2007남북정상선언문을 채택하였다.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첫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회담이므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라고도 한다.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2박3일 동안 대한민국의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의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였다. 원래는 2007년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열기로 하였으나, 북한에서 대규모 수해가 발생하여 한 차례 연기되었다. 또 2000년 열린 6·15남북정상회담에서 다음 정상회담 때는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영상
각주
- ↑ 〈김정일〉, 《위키백과》
- ↑ 〈김정일(金正日,1942.2.16.~2011.12.17)〉, 《두산백과》
참고자료
- 〈김정일〉, 《위키백과》
- 〈김정일〉, 《나무위키》
- 〈백두혈통〉, 《나무위키》
- 〈김정일(金正日,1942.2.16.~2011.12.17)〉, 《두산백과》
- 한광범 기자, 〈北김정은, 독자 우상화 강화 위해 김일성·김정일도 지운다〉, 《이데일리》, 2024-10-29
- 김찬호 기자, 〈김일성·김정일 부정하는 김정은 ‘두 국가론’…북한 헌법 개정 될까〉, 《주간경향》, 2024-10-21
- 이경희 기자, 〈동생은 연못 빠져 죽었다…김정일의 '형제 살인' 트라우마〉, 《중앙일보》, 2024-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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