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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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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말기에 건립된 덕수궁 석조전

석조건물(石造建物)은 돌을 재료로 하여 지어진 건물을 말한다.

석조건물 종류

건물

석조전

석조전(石造殿)은 덕수궁의 전각으로, 대한제국 말기에 건립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궁전이다. 즉,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덕수궁(사적 제124호) 내에 위치한 근대식 석조건물이다. 중화전의 서북쪽, 준명당의 서쪽에 위치한다. 황실의 처소 등으로 이용되다가 이후 여러 용도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됐다. 이에 문화재청은 석조전의 원형 복원 공사를 2009년 10월부터 시작했으며, 2014년 10월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한제국 광무황제(고종, 1852~1919)의 숙소와 사무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1898년 영국인 건축가 하딩(J. R. Harding)에 의해 설계된 3층 구조의 석조건물이다. 1900년(광무4년) 착공돼 1910년(융희3년)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대한제국의 주도로 지어진 건물이다. 석조전은 조선의 궁궐이 침전(왕의 침소)과 정전(업무공간)으로 분리되어 있던 것과 달리 두 가지 기능이 모두 통합된 건물이었다. 지층은 상궁처소·주방과 같은 시종들의 준비공간이었으며, 1층은 접견실·귀빈실·홀 등 업무용 공간, 2층은 침실·욕실 등 황제의 사적 공간이었다.

본래 고종의 처소와 사무공간으로 건립했지만 주로 고종의 일곱째 아들 영친왕이 기거했으며 고종은 1919년 1월 승하할 때까지 집무실과 알현실로만 사용했다. 석조전 완공 이후인 1911~22년까지 영친왕(고종의 일곱째 아들) 방문 시 임시숙소로 사용됐으며, 1933~45년까지는 덕수궁 미술관과 이왕가미술관으로 사용됐다. 해방 직후인 1946~47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이 설치됐다. 한국전쟁 이후인 1955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 1973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1987년∼2005년까지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됐다. 이처럼 덕수궁 석조전은 일제강점기 미술관으로 전용되면서 주요 내부 장식이 훼손됐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구조체가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이에 문화재청은 1930년대 이후에 여러 용도의 건물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된 석조전의 원형 복원 공사를 2009년 10월부터 시작했으며, 2014년 10월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은 '지층-1층-2층'의 총 3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층은 대한 제국의 근대 개혁과 신물문의 도입, 석조전 복원 기록을 담은 전시실이 위치하고 있다. 1층은 대한 제국의 정치·외교 의례 등에 관한 전시실, 2층은 황실 소개와 함께 대한 제국 황실의 사적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1]

석교

강경미내다리

강경미내다리(江景미내다리)는 충청남도 논산시 채운면, 강경천에 있는 석교이다. 미내교(渼奈橋)라고도 한다.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강경천의 채운교가 있는 강둑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시멘트로 만들어진 다리가 놓여 있고, 그 옆으로 작은 미내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전국 교역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는 강경포구가 있던 곳으로, 이 강을 '미내(渼奈)'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하여 '미내다리'라고 부른다. 긴돌을 가지런히 쌓아 3칸의 무지개모양을 만들고, 그 사이마다 정교하게 다듬은 돌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다. 다리의 강둑쪽 중간쯤에는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동물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데, 눈은 마치 장승의 눈과 같고, 코는 뭉툭하며, 얼굴 양옆으로 귀모양과 갈기가 있다. 다리 옆에 놓여 있던 '은진미교비'는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 중인데, 비문에 의하면, 조선 영조 7년(1731) 주민의 필요에 따라 강경촌 사람인 송만운이 주도하여 이 다리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수로정비에 따라 물길이 바뀌어 현재는 제방 제내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8년 완전해체하여 2003년 보수정비하였다.[2]

강진 병영성 홍교

강진 병영성 홍교(康津 兵營城 虹橋)는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에 있는 홍예교이다. 1984년 2월 9일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74호로 지정되었다가, 1986년 2월 7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재지정되었다. 이 부근은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머물던 곳으로 태종 17년(1417)에 설치한 군사 요충지였다. 병영과 통행하는 다리를 까치내에 만들면서 다리의 모양을 무지개 모양처럼 반달로 했기 때문에 홍교라 하였다. 병영성 홍교에는 노비와 양반집 딸 사이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과 그들의 아들이 높은 벼슬을 받고 돌아오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양한조라는 사람이 감독하여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은 홍예 부분만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조선 후기 지방 건축의 발전된 양상을 보여주는 우수한 유적이다.[3]

고성 건봉사 능파교

고성 건봉사 능파교(高城 乾鳳寺 凌波橋)는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이다. 2002년 2월 6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336호로 지정되었다. 이 다리는 건봉사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홍예교로서 규모도 비교적 크고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시대 숙종 30년(1704년)부터 숙종 33년(1707년) 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는 것을 경내 불이문 옆에 있는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 숙종 34년(1708년) 건립)를 통해 알 수 있다. 그후 영조 21년(1745년)에 대홍수로 붕괴되어, 영조 25년(1749년)에 중수하였고, 고종 17년(1880년)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석계(石階)와 산영루(山映樓) 수축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다리 규모는 폭 3m, 길이 14.3m, 다리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며, 다리의 중앙부분에 큰 아치(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축조하여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基石)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조금 더 높다. 홍예의 축조는 양쪽 다리의 바닥부분에 두툼한 2단의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29개의 홍예석을 올려 놓았는데 상부 중심의 홍예 종석(宗石)을 제외하면 좌우로 각기 14개의 홍예돌을 배열하였으며, 밑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돌의 규격이 작다. 홍예돌은 통돌(單一材)로 하지 않고, 길이 3m에 2개의 석재를 이어서 사용하였는데, 일부 석재는 2.65m의 긴 석재(長材)도 있다. 홍예 좌우 교각의 면석(面石)은 정교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10〜11층으로 쌓아 마감하였으며, 홍예석 외면과는 홍예의 원호(圓弧)에 맞추어 끼웠다.

다리의 상부는 홍예 중앙의 종석 위에 덧댄 장대석없이 바로 상부바닥 구조인 경계석(난간석)이 올려졌다. 다리 상부의 경계석은 면석보다 10cm가량 내밀어 설치되어, 홍예의 폭(3m) 보다 20cm가 더 크다. 경계석에 사용된 석재는 폭 40cm, 높이 21cm이며, 길이는 100〜320cm로 일정하지 않다. 능파교의 날개벽은 남쪽(극락전쪽)이 장대석으로 견고하게 축조되어 있고, 북쪽은 호형(弧形)을 이루고 있다. 암석종류는 남쪽 하단에서부터 8개, 북측 하단 에서부터 8개가 조립질 석영섬록암이고, 나머지 홍예석 전체는 우백질 흑운모화강암(조립질)이다.[4]

고성 육송정 홍교

고성 육송정 홍교(高城 六松亭 虹橋)는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해상리와 탑현리의 경계에 있는 다리이다. 2002년 2월 6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337호로 지정되었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능파교와 함께 을축년(1745년)의 대홍수로 붕괴되었던 점을 고려할 때 능파교(1704년)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748년에 편찬된 《杆城郡邑誌》에 육송정홍교가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어 능파교보다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간성읍 해상리와 탑현리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하천의 폭이 12.3m 정도 되는 곳에 석축을 쌓고, 길이 10.6m의 다리를 놓았다.

현재는 상면에 목교(木橋, 폭3m)가 가설되어 있다. 홍예의 기초는 자연지형을 잘 활용하여 동쪽은 암반(높이 1.7m)을 그대로 이용하여 그 위에 홍예돌과 비슷한 크기의 장대석으로 1단의 지대석(높이 30cm)을 두었다. 서쪽에서는 3단의 지대석을 쌓은 후 그 위에 홍예를 올렸는데, 1 단에 2개씩의 장대석을 이어서 만들었다. 서쪽 지대석의 높이는 1단이 묻혀 있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단이 70cm, 3단이 60cm로 매우 거대하다.

홍예는 21단으로 홍예의 지름은 720cm이다. 폭 290cm인 각 단은 2개씩의 장대석(일부는 3개)을 이어서 축조하였다. 홍예돌로 사용된 장대석의 크기는 긴 것은 240x40x54cm이고, 작은 것은 33x40x54cm, 대부분은 134x40x54cm 정도였다. 홍예와 날개벽 사이의 교각 면석은 장대석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석인 냇돌(川石)을 사용하였는데 아래쪽에는 큰 것을, 위쪽에는 작은 돌을 사용하였다. 암석종류는 동쪽 4번째의 홍예석은 중립질 석영섬록암이고, 나머지 홍예석 전체는 조립질 석영섬록암이다.

홍예교는 조형미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도 안정된 형식의 다리이다. 고성 건봉사 능파교와 고성 육송정 홍교는 모두 단칸 홍예교로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특히 능파교는 축조연대와 건립자 등을 알려주는 비석을 구비하고 있어 홍예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건봉사 능파교와 육송정 홍교는 보존상태도 양호하고 우리나라 석교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다.[5]

고흥 옥하리 홍교

고흥 옥하리 홍교(高興 玉下里 虹橋)는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에 있는 홍예교이다. 1978년 9월 22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되었다. 고흥읍 옥하리와 서문리 마을에 흐르는 고흥천에는 약 150m 간격을 두고 2기의 다리가 놓여 있는데, 모두 무지개다리(홍예교)의 양식으로 건립된 돌다리이다. 위쪽에 있는 다리는 맨 밑바닥에 다듬은 돌을 놓고, 그 위로 27개의 직사각형돌을 무지개 모양으로 쌓았으며, 그 양 옆으로는 다듬은 돌과 막돌을 섞어 쌓아 올렸다. 맨 위에는 다시 직사각형돌을 덮어 통행의 무게를 견디도록 하였다. 무지개 모양의 앞면에는 용머리를, 반대쪽에는 용꼬리를 새겨 놓았다. 아래쪽 다리는 옥하리쪽에 있으며 위쪽 다리보다 규모가 크다. 다리를 쌓는 수법과 형태는 비슷하나 용머리가 다리의 아랫면 천장에 달려있다. 이 다리에는 만든 시기가 적혀있어 고종 8년(1871)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다리 모두 조선 후기에 만든 것으로, 규모가 크고 장엄하다. 현재 두 다리의 정상이 지면보다 휠씬 높은데, 이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지형이 바뀐 탓으로 보인다.[6]

보성 벌교 홍교

보성 벌교 홍교(寶城 筏橋 虹橋)는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조선 시대의 아치교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홍교는 벌교천 위에 걸쳐진 돌로 만든 무지개 다리로 전체길이 27m, 높이는 약 3m, 폭 4.5m 내외이다. 이 다리는 조선 영조 5년(1729년)에 순천 선암사의 승려인 초안과 습성 두 선사가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다리를 놓아 사람이 편하게 다닐 수 있게 하는 월천공덕을 중요한 보시로 꼽고 있다. 이 홍교는 영조 13년(1737년)과, 다시 헌종 10년(1844년)에 고친 바 있다. 지금의 모습은 1981-1984년까지의 4년에 걸쳐 보수하여 원형을 찾은 것이다. 한국에 남아있는 홍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대표적인 돌다리이다. 홍교가 놓이기 이전에는 뗏목다리를 놓아 건너 다녔다고 하는데 벌교하는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7]

여수 흥국사 홍교

여수 흥국사 홍교(麗水 興國寺 虹橋)는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다리이다. 1972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563호로 지정되었다. 흥국사 입구에 있는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이다. 개울 양 기슭의 바위에 기대어 쌓았는데, 부채꼴 모양의 돌을 서로 맞추어 틀어 올린 다리밑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이루고 있다. 양옆으로는 둥글둥글한 돌로 쌓아올린 벽이 학이 날개를 펼친 듯 길게 뻗쳐 조화를 이룬다. 홍예의 한복판에는 양쪽으로 마룻돌이 튀어 나와, 그 끝에 용머리를 장식하여 마치 용이 다리밑을 굽어보고 있는 듯하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다리로, 지금까지 알려진 무지개형 돌다리로서는 가장 높고 길며, 주변 경치와도 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다리이다.[8]

영광 도동리 홍교

영광 도동리 홍교(靈光 道東里 虹橋)는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도동리에 있는 홍예교이다. 1992년 11월 30일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성종 때 불교를 배척하였던 정극인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다리라고 전한다. 실제 다리는 옛 성이 있었을 당시 나주와 함평 등지에서 영광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었으나, 현재는 본래 모습이 훼손된 채 논밭으로 가는 샛길과 하천 옆길을 잇는 다리로 쓰이고 있다. 다리는 양끝이 처지고 가운데는 무지개처럼 둥글게 굽은 구조로 되어 있다. 13개의 넓적한 돌을 이용하여 단순한 형태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모습이나, 9개의 부재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인위적이고 세련되던 다른 홍교와는 달리, 꾸미지 않은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멋이 나는 다리이다. 만든 시기는 정극인이 생을 마친지 16년 후인 연산군 3년(1497)이며, 영조 4년(1728)과 1994년에 다리를 보수한 바 있다.[9]

유가만세교

유가만세교(瑜伽萬歲橋)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양리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건축물이다. 2006년 4월 20일 대구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42호로 지정되었다. 유가면 양동 유가사 아래쪽 500여m 되는 위치에 흐르는 계천에 가설한 석교이다. 일반적으로 홍예형 석교는 육중하고 견고한 구조감을 주는데 이 석교는 소박하고 경쾌한 구조감을 준다. 이 다리는 원래 척진교로서 척진교비에 따르면 홍예형의 목교로 정묘년(1747)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옆에 세워진 만세교비에 따르면 병진년(1916)에 일인 석공 남목(kusunoki)가 지방인 석공과 합세해서 목교를 석교로 교체하였고 "만세교"라 명명했다.[10]

순천 선암사 승선교

순천 선암사 승선교(順天 仙岩寺 昇仙橋)는 전라남도 순천시 선암사)에 있는 조선 시대의 아치교이다. 1963년 9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00호로 지정되었다. 길이 14m, 높이 4.7m, 폭 4m로 조선 숙종 39년(1713년) 호암화상이 6년 만에 완공한 다리이다. 기저부(基底部)에 별다른 가설이 없고 홍예(虹預)는 하단부부터 곡선을 그려 전체의 문양은 반원형을 이루고 한 개의 아치로 이루어졌다. 다리 중심석 아래의 조그맣게 돌출시킨 석재는 용의 머리 같기도 하다. 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는 중생들을 보호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11]

순천 송광사 삼청교 및 우화각

순천 송광사 삼청교 및 우화각(順天 松廣寺 三淸橋 및 羽化閣)은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송광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다리(삼청교)와 그 위에 지은 건물(우화각)이다.1976년 9월 30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다. 송광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다리(삼청교)와 그 위에 지은 건물(우화각)이다. 삼청교는 일명 '능허교'라고도 한다. 19개의 네모난 돌로 무지개 모양을 만든 후, 양 옆에 다듬은 돌을 쌓아 올려 무게를 지탱하도록 하였다. 무지개 모양의 중심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돌이 나와 있다.조선 숙종 33년(1707) 다리를 만들었고, 그 뒤 60여년이 지난 영조 50년(1774)에 보수를 거쳤다. 삼청교 위에 지어놓은 우화각은 사람들의 통행을 돕고자 만든 것이다. 들어가는 입구는 옆면에서 볼때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와 비슷한 팔작지붕을 올렸고, 나가는 쪽의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을 올렸다. 이처럼 서로 다른 모양의 지붕을 하고 있는 것은 나가는 쪽의 지붕이 옆 건물과 가까이 닿아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본다. 비록 웅장한 모습은 아니나, 두 유물이 다리역할도 하면서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통로 역할도 하는 2중효과를 보이고 있다.[12]

창녕 영산 만년교

창녕 영산 만년교(昌寧 靈山 萬年橋)는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 있는, 조선 시대의 아치교이다. 1972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564호로 지정되었다. 마을 실개천 위에 무지개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돌다리로, 실개천이 남산에서 흘러내린다 하여 '남천교(南川橋)'라고도 불린다. 개천 양쪽의 자연 암반을 바닥돌로 삼고 그 위에 잘 다듬어진 화강암 석재를 층층이 쌓아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이루고 있다. 그 위로는 둥글둥글한 자연석을 쌓아 올리고 맨 위에 얇게 흙을 깔아 다리 위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았다. 노면은 곡선을 그리며 양 끝을 길게 늘이고 있어 다리의 분위기를 한결 아늑하게 해준다. 조선 정조 4년(1780)에 처음 쌓은 것을 고종 29년(1892)에 다시 쌓아 놓은 것으로,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통행할 만큼 튼튼하여 홍수 등에도 전혀 피해가 없다고 한다.[13]

고양 강매동 석교

고양 강매동 석교(高陽 江梅洞 石橋)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강매동에 있는 돌다리이다. 1999년 2월 1일 고양시의 향토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2020년 9월 1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62호로 지정되었다. 강매동 석교는 강매동 강고산 마을 창릉천 위에 있다. 본래 이 석교는 고양의 일산, 지도, 송포 지역 등 한강연안의 서부 지역 사람들이 서울을 오가던 교통로로 이용된 곳이다. 이 다리를 이용해 각종 농산물 땔감 등을 현천동, 수색 모래내를 거쳐 서울로 내다 팔았던 것이다. 현재 다리의 구조는 네모진 돌기둥 24개로 교각을 만들고 그 위에 교판석을 깐 모양이다. 또 교각과 교각사이에는 약 6개의 교판석이 2열로 놓여져 있다. 다리의 전체적인 모양은 길게 북-남쪽으로 이어져 약간의 곡선을 이루며 매우 견고하고 세밀하게 구축되어 있다. 또 각 부재에 사용된 석재는 크고 장대하며 여러 각도를 이용하여 매우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다리의 규모는 총길이 18m, 넓이 3.6m, 높이 2.7m이다.[14]

담양 용대리 석교

담양 용대리 석교(潭陽 龍坮里 石橋)는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용대리에 있는 석교이다. 2003년 6월 30일 담양군의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되었다. 담양군 용대리 석교는 담양지방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조선시대에 세운 판석형 석교이다. 대덕면 관내 군도 12호선과 평행선으로 놓인 용대리 석교는 군도에 놓인 콘크리트로 만든 다리와 약 5.3m 거리에 있다. 다리가 놓인 계천의 너비는 8.7m로 호안축대가 양켠에 쌓여 있다. 계천 바닥에서 다리 판석과의 높이는 2.16m~2.34m로 상판 3개를 두 개의 교각이 떠받치고 있다. 두 개의 교각은 각각 5개와 6개의 자연판석으로 쌓아 올렸는데 시멘트로 바른 흔적이 있다.[15]

대천 한내돌다리

대천 한내돌다리(大川 한내돌다리)는 충청남도 보령시 대천천 하류에 있었던 다리이다. 1992년 8월 17일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대천천 하류에 있었던 다리로, 예전에는 남포와 보령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였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물살에 쓸려 떠내려 가거나, 하천 제방공사를 하면서 파손되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1978년 수습하여 옮겨 두었다가, 1992년에 대천천 강변에 옮겨 일부만 복원해 놓았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근처에 있는 왕대산의 돌을 깎아내어 뗏목으로 운반해온 것으로 보인다. 다리의 몸체를 받치는 기둥은 거칠게 손질한 2∼3개의 돌을 쌓아 이루게 하여, 모두 6개의 기둥이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 위로 넓적한 판돌을 걸쳐서 다리를 완성하였는데, 원래는 12칸 돌다리라 하나 적어도 22칸은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리의 높이는 낮은 편이어서 바닷물이 밀려오거나 홍수가 질 때면 물에 잠기고, 보통 때에도 가끔 잠기었다 한다.[16]

벌교 도마교 및 석비

벌교 도마교 및 석비(筏橋 逃馬橋 및 石碑)는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전동리, 전동제 저수지의 물길 위에 가로 놓여진 다리와 그 주변에 서 있는 2기의 비이다. 1990년 12월 5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73호로 지정되었다. 전동제 저수지의 물길 위에 가로 놓여진 다리와 그 주변에 서 있는 2기의 비이다. 다리는 '도매다리'라고도 불리며, 가까이 있는 부용산이 '약마부정(躍馬浮定:도약하려는 말의 자세)'의 형태를 하고 있어 이 다리를 '도마교'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다리에 사용된 돌은 화강암으로, 이를 각이지게 다듬어 아래에 기둥을 세우고, 각 기둥 위로 넓적한 돌을 가로로 걸쳐 다리를 완성하였다. 본래는 지금의 길이보다 훨씬 더 길었다 하나, 1989년 여름 홍수 때 일부가 떠내려가 그 절반만이 남아있다.

주위에 남아 있는 '도마교비'와 '중수비'의 내용으로 보아, 조선 인조 25년(1645)에 처음 설치되었고, 숙종 8년(1682)에 새로이 보수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의 사정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다. 20여년전 까지만 해도 농사일은 물론이고 마을 제사를 치르는 대상의 한 일부를 차지하였으나, 마을의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그러한 의식들이 사라져 그저 농사일을 돕는 존재로만 남아있다. 비록 일부가 없어져 본래의 규모는 아니나, 처음 지어진 시기와 보수된 연대를 알수가 있어 다리를 연구하는데에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되고 있다.[17]

살곶이다리

살곶이다리는 조선의 수도인 한성부와 한반도 남동부를 잇는 주요 교통로에 세워진 다리로 강릉·충주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였다. 전곶교(箭串橋)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돌다리 중 가장 길다. 살곶이다리는 1420년(세종 2년)에 다리를 짓기 시작해 1483년(성종 14년)에 완공했다. 명칭에 대해서는 '제반교(濟磐橋)', '전곶교', '전관교(箭串橋)' 등 다양한 이름이 있지만 '살곶이다리'나 '전곶교'가 맞고 한자 이름 '箭串橋'는 '전관교'가 아니라 '전곶교'로 읽는 게 옳다고 한다. 1967년 12월 15일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나, 2011년 12월 23일 이를 해제하고 보물 제1738호로 지정하였다. 대다수의 석교 문화재가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사적 지정요건인 인물, 역사, 사건 등을 고려해볼 때 유형문화재로서의 성격이 강하므로 사적을 해제하고 보물로 변경 지정하였다.[18]

수표교

수표교(水標橋)는 수표가 새겨져 있는 청계천의 다리이다. 조선세종(世宗) 2년에 처음 놓였으며,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동에 있었으나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 2005년 청계천 복원 당시 원래 자리에 다시 놓으려고 했으나, 복원된 청계천의 폭과 수표교의 길이가 맞지 않아 옮겨지지는 못했고, 대신 그 자리에는 임시 다리가 놓여 있다. 수표교는 만들어질 당시는 그 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라 불리었다. 세종 23년(1441년) 다리 앞에 개천(開川, 청계천)에 흐르는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水標, 보물 제838호)를 세웠다.[19]

진천 농다리

진천 농다리(鎭川 籠橋)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산동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여 있는 다리이다.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8호 진천농교(鎭川籠橋)로 지정되었으나, 2013년 1월 18일 현재의 문화재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농다리는 문헌에 따르면 "고려 초 임장군이 세웠으며, 붉은 돌로써 음양을 배치하여 28수에 따라 28칸으로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28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28칸의 교각으로 되어 있었으나 세월이 지나며 교각이 유실 돼 24칸이 남아있던 것을 2008년 28칸으로 복원하는 사업이 진행되어 2018년 현재 28칸으로 보존되고 있다. 건설교통부의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뽑혔으며, 행정자치부와 국가 균형발전위원회가 주최한 제 1회 살기 좋은 지역만들기 지역자원 경연대회에서 우수 지역자원 100선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그 외에도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모래시계》 등의 드라마 촬영지로도 쓰였다. 2017년 7월 16일 충북지역 기습 폭우로 일부가 유실 및 손실되었다.[20]

창원 주남돌다리

창원 주남돌다리(昌原 注南돌다리)는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에 있는, 동읍과 대산면의 경계를 이루는 주천강에 놓인 다리이다. 1996년 3월 11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창원의 동읍과 대산면의 경계를 이루는 주천강에 놓인 돌다리이다. 주남새다리'라고도 불리는데, 동읍 판신 마을과 대산면 고등포 마을을 이어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다리는 간격을 두어 양쪽에 돌을 쌓아올린 뒤, 그 위로 여러 장의 평평한 돌을 걸쳐놓은 모습이다. 800여년전 강 양쪽의 주민들이 정병산 봉우리에서 길이 4m가 넘는 돌을 옮겨와 다리를 놓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69년 집중호우로 대부분이 붕괴된 것을 1996년 복원한 것으로 다리를 세운 정확한 시기나 경위 등은 알려진 것이 없다.[21]

청석교

청석교(靑石橋)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된 옛 돌다리로, 유형문화재로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다리는 660년 신라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본래는 이 다리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는 지금의 경부선 철도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철도 개설을 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높이는 17.5m, 너비는 22m, 길이는 98.3m인데, 양쪽 개울가를 돌로 쌓고 개울 바닥에 장대석을 놓은 다음 각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넓은 판석을 얹어 놓은 다리이다.[22]

청주 남석교

청주 남석교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에 있다. 2015년 4월 17일 청주시의 향토유적 제47호로 지정되었다. 총길이 80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돌다리로 청주의 도시발달을 증명해 주는 자료이다.[23]

청주 문산리 돌다리

청주 문산리 돌다리(淸州 文山里 石橋)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문의 문화재 단지에 있는 돌다리이다. 2003년 4월 11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22호로 지정되었다. 청원 문산리석교는 원래 대청댐 수몰전에는 문의초등학교 정문에서 남쪽으로 100m 전방에 있던 것인데 1980년 대청댐 건설로 문의면 미천리에 문산관과 함께 이전하였다가 2002년 3월 문의문화재단지로 재이전하였다. 석교에 대한 문헌은 조선 헌종 초기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처음으로 나온다. 축조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데 교각내에 을묘이월(乙卯二月)이라는 각자가 남아 있다. 교각 상판은 2.5m×0.3∼0.9m 규모의 화강석과 청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총 10개이며, 석주는 1.3m의 화강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판의 장대석(長臺石)은 장축을 남북으로 하여 2매씩 연결하여 놓고 동서로 5매씩 연접하여 마루식으로 만들었다. 남북 장축 중간에 동서로 교각이 받치고 있으며, 석재의 크기는 일정치 않다. 또한 석재(石材)는 거친 다듬하였으며, 석주(石柱)를 갖춘 시렁교이다.[24]

함평 고막천 석교

함평 고막천 석교(咸平 古幕川 石橋)는 전라남도 함평군에 있는 고려시대의 교량이다. 2003년 3월 14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372호로 지정되었다. 이 다리의 기록은 많지 않으며 동국여지승람 등의 몇몇 사서(史書)에 고막교의 기록이 보일 뿐 누가 언제 축조한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구전 (口傳)에 의하면 고려 元宗 14年(1273) 무안(務安)의 법천사 도승 고막대사가 도술로 이 다리를 가설하였다고 전한다. 2000년도 이 다리를 완전해체 보수시 교각과 교대 아래 나무말뚝(41개 확인)중 일부를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연대측정을 의뢰한 결과(490±50, 즉 AD1390~1495)로 축조시기를 확인하였다. 한국의 돌다리는 주로 무지개형인 홍교(무교각)와 교각을 가교하여 세운 평면교인 널다리 두 가지 형식이 있다. 특히 고막천 석교는 널다리이면서도 목조가구의 결구수법인 주두의 가구법을 택한 것이 특징이다.[25]

화순 유마사 보안교

화순 유마사 보안교는 전라남도 화순군 사평면 마리, 유마사에 있는 돌다리이다. 2007년 1월 5일 화순군의 향토문화유산 제30호로 지정되었다. 보안교는 절에 들어가는 입구 계곡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는 그 옆에 일주문이 지어져 있다. 다리는 좁지 않은 계곡을 하나의 큰 돌로 가로질러 놓아 계곡의 동서 양편을 연결하고 있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크기는 가로가 가장 좁은 동쪽은 200cm이고 넓은 서쪽은 315cm에 이른다. 세로는 약 310cm이고 두께는 약 35cm로 윗면은 잘 다듬어져 있다. 다리 위에는 두개의 명문이 있는데, 계곡 아래쪽에 '維摩洞天普安橋'가 계곡의 북쪽에 '觀世音普薩 梁蓮浩'라고 쓰여 있다. 글씨의 크기는 17~24cm이다. 관세음보살의 옆에는 한글로 '관세음보살'이라고 쓰여 있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白雲居士書'라고 쓰여 있다.[26]

석탑

고수동 거욱대

고수동 거욱대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신흥리에 있는 돌탑이다. 2019년 11월 27일 제주특별자치도의 향토유형유산 제28호로 지정되었다. 고수동마을에서 남쪽을 바라봤을 때 남쪽바닷가 방면이 허하다 하여 액운을 몰고 온다는 속설에 따라 지역주민이 모여 설치, 4.3사건 때 훼손되어 방치해두다가 1963년 복원하였으나, 이후 하천공사와 도로포장 등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 현재 상태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계곡에 인접하여 마을 경계에 세워진 고수동 거욱대는 남아있는 사진 자료에 의하면 반타원형의 돌무지 위에 새를 형상화한 십자형태의 나무조형이 세워져있던 원형을 가진 거욱대이다. 그러나 현재는 도로변에 인접한 부분의 돌무지 상단부가 상당부분 허물어져 있으며 돌무지 내부에 넝쿨이 자라고 그 앞쪽으로 커다란 나무가 자라고 있어 그 원형을 온전히 확인할 수 없지만, 계곡 쪽으로 남아있는 면은 상단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온전하게 남아있어 주변의 잡목을 제거하고 뒤편의 잔존부분과 10여 년 전의 사진자료 등을 근거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되어 향토유산적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27]

함안 주리사지 사자석탑

함안 주리사지 사자석탑(咸安 主吏寺址 獅子石塔)은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중학교에 있는, 남북국 시대 신라의 석탑이다. 원래 여항면 주서리 주리사 절터에 있던 것을 일제시대 때 면사무소로 이전하였다가, 광복 후 다시 이 곳 중학교로 옮겨온 것이다. 원래는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탑재로는 신라 하대의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 기단부에 네마리의 사자를 배치한 이형석탑이다.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호 함안주리사지사자석탑으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함성중학교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원래 여항면 주서리 주리사터에 있던 것을 일제시대 때 면사무소로 이전하였다가, 광복 후 다시 이 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기단(基壇)에 네 마리의 사자를 배치한 것이 일반 석탑과는 다른 독특한 모습이어서, 바닥돌 위에 얹힌 지붕모양의 돌 위로 네 마리의 사자를 올리고 그 위로 5층으로 보이는 탑신(塔身)을 쌓았는데, 탑신의 몸돌 하나가 없는 상태이다. 3층 혹은 5층일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의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으나, 구례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회양 금장암지사사자삼층석탑, 제천 빈신사지사사자석탑 등 비슷한 양식의 탑과 비교해 볼때, 네 마리의 사자가 포함된 기단부가 있었을 거라고 추측된다. 사자는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등을 맞댄 채 앞을 보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조각은 단순하나 각 부의 형태가 잘 드러나 있다. 탑신의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이 표현되고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 치켜올림이 있다. 기단부에 사자상을 배치한 경우는 드문 경우로, 원형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남아있는 탑재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28]

동영상

각주

  1. 석조전〉, 《시사상식사전》
  2. 강경미내다리〉, 《위키백과》
  3. 강진 병영성 홍교〉, 《위키백과》
  4. 고성 건봉사 능파교〉, 《위키백과》
  5. 고성 육송정 홍교〉, 《위키백과》
  6. 고흥 옥하리 홍교〉, 《위키백과》
  7. 보성 벌교 홍교〉, 《위키백과》
  8. 여수 흥국사 홍교〉, 《위키백과》
  9. 영광 도동리 홍교〉, 《위키백과》
  10. 유가만세교〉, 《위키백과》
  11. 순천 선암사 승선교〉, 《위키백과》
  12. 순천 송광사 삼청교 및 우화각〉, 《위키백과》
  13. 창녕 영산 만년교〉, 《위키백과》
  14. 고양 강매동 석교〉, 《위키백과》
  15. 담양 용대리 석교〉, 《위키백과》
  16. 대천 한내돌다리〉, 《위키백과》
  17. 벌교 도마교 및 석비〉, 《위키백과》
  18. 살곶이다리〉, 《위키백과》
  19. 수표교〉, 《위키백과》
  20. 진천 농다리〉, 《위키백과》
  21. 창원 주남돌다리〉, 《위키백과》
  22. 청석교〉, 《위키백과》
  23. 청주 남석교〉, 《위키백과》
  24. 청주 문산리 돌다리〉, 《위키백과》
  25. 함평 고막천 석교〉, 《위키백과》
  26. 화순 유마사 보안교〉, 《위키백과》
  27. 고수동 거욱대〉, 《위키백과》
  28. 함안 주리사지 사자석탑〉,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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