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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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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瞻星臺)
멀리서 본 첨성대 모습
서쪽에서 본 모습
첨성대 우경
첨성대 야경
일제강점기 휘문고 수학여행 온 학생들 기념사잔- 이때는 이렇게 첨성대에 자유롭게 올라갔다.

첨성대(瞻星臺)는 경상북도 경주시 반월성 동북쪽에 위치한 신라 중기의 석조 건축물로, 선덕여왕 때에 세워진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 중 하나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상세

別記云是王代鍊石築瞻星臺
별기에 따르면 이 왕(선덕여왕)의 치세에 석축을 쌓아 첨성대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中

삼국유사에는 7세기 중엽 신라선덕여왕 시대에 백제인 아비지에 의해 건립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참고로 아비지는 황룡사 9층 석탑을 만든 이로 선덕 여왕이 백제에 전문가 파견을 요청하여 신라로 초빙된 인물이다. 세종실록에서는 633년(선덕여왕 2)에 건립했다고 서술했다.

높이 9.17 m, 밑지름 4.93 m, 윗지름 2.85 m로 중간에 남쪽 방향으로 정사각형의 문이 있으며 상방하원(上方下圓)의 형상을 갖춘 돌탑 형식으로 축조되었다. 위쪽 방형의 각 면은 동서남북을 가리키는데, 어떤 주술적 또는 학술적 메시지를 담았다는 주장이 있다. 당대의 우주관은 천원지방, 즉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나 있다고 믿는 것이었는데 첨성대는 반대 형상이기 때문이다. 불교계 일각에서는 불교 우주론 속 수미산의 형상을 반영했다고 주장한다. 불경에 따르면 수미산의 정상 도리천은 사각형이기 때문이다.

화강암 벽돌 362개을 이용해 석축 27단을 쌓았음 역시 '1년'의 시간과 28수 별자리, 혹은 27대 국왕인 선덕여왕을 상징하는 의미로 보기도 한다.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으로 채웠고 맨 위에 우물 정(井)자 장대석이 있다. 과거에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다고 추정된다. 춘분과 추분 때는 태양광이 창문을 통해 첨성대 밑바닥을 완전히 비추고, 하지와 동지 때는 완전히 사라지게끔 만들었다고 한다.

첨성대가 위치한 공원의 입장료는 무료이다. 과거에는 입장료 500원을 받았는데, 첨성대 부지의 울타리가 매우 낮아 바깥에서도 잘 보였기 때문에 입장하지 않고 관람이 가능했다. 경주시는 2014년 1월 1일부터 시민과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첨성대 관람을 무료화했다.

보존상태

2005년 언론 등의 보도에 따르면 북쪽으로 7.2센티미터, 동쪽으로 2.4센티미터 정도 기울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가에 따르면 원인은 북동쪽 지반이 무르고 수분이 많은 탓으로 보고 있으며, 지역 주민들은 한국 전쟁 이후 기울어짐이 심해졌으며 당시 북쪽의 도로를 지나던 탱크 등에 의해 지반이 약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문화재청은 이에 대해 우려할 수준은 아니며, 국내외 연구진에 의한 연구 결과 또한 구조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라고 밝히고 있다.

2016년 9월 경주에 발생한 지진의 여파로 석축이 지진 발생 전에 비해 약 1.2 cm 정도 벌어졌지만 균열은 없었다고 한다.

용도

첨성대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전통적으로 별을 관찰하는 천문대의 기능을 했으리라 여겨져왔다. 1960년대 이전에는 별 이견이 없이 1904년 세키노 타다시와 와다 유지, 1917년 루퍼스(Rufus,W.C.)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그 위에 목조 구조물이 세워져 혼천의(渾天儀)가 설치되었으리라는 생각과, 개방식 ‘돔’으로서의 관측대라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첨성대는 창문을 제외하면 어느 방향에서나 같은 모양이며, 계절과 태양의 위치에 관계없이 일구(日晷)를 측정하여 시간을 헤아릴 수 있으므로 4계절과 24절기를 확실히 정할 수 있다. 정남(正南)으로 열린 창문은 사람이 사다리를 걸쳐 놓고 오르내리는 데도 쓰였지만, 춘·추분(春·秋分)에 태양이 남중(南中)할 때 이 창문을 통하여 태양광선이 바로 대(臺) 안의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출 수 있는 위치에 열려 있다. 그러므로 동·하지(冬·夏至)에는 창문 아래 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므로 분점(分點)과 지점(至點) 측정의 보조역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절기의 정확한 측정에 의하여 역법(曆法)을 바로 잡기 위한 측경(測景)을 목적으로 설립된 규표(圭表), 즉 측경대로서 일구를 측정하는 천문대일 뿐 아니라, 신라 천문 관측의 중심지로서, 신라 천문 관측에서 자오선과 동서남북 4방위의 표준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첨성대는 그 구조가 상징하는 바 하늘에 대한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의거하여 축조되었으리라고 해석되고 있으며, 27단으로 이루어진 것은 선덕여왕이 27대 왕임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천상(天象)의 이변(異變)이 있을 때 외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한 상설 천문대로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첨성대라 명명한 것은 첨성대가 세워진 이후 신라의 천체 관측 기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4년에는 해시계의 규표일 가설이 제시된 후 일종의 제단이었다는 가설, 정치적 조영물이라는 가설, 다른 세계로 이동하기 위한 우물이라는 가설 등 여러 가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첨성대 건설 이후 기록된 유성의 떨어진 위치들이 모두 첨성대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 첨성대가 완성된 후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의 수가 이전보다 10배 이상 증가했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 정밀해졌다는 점 등을 근거로 천문대의 기능을 했으리라는 주장도 계속 이어진다.

이러한 제언들로 인해 현대에는 현대적 천문대로서의 기능을 했을 것이라기보다도, 점성술 및 제의까지도 행해진 고대인들의 천문대로서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수행했으리라 여겨진다. 이 경우 《삼국유사》에 기록된 점성대가 첨성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연구

한국천문연구원의 김봉규 박사는 신라 시대의 고천문학 자료들을 종합연구하여, 첨성대가 만들어진 뒤 신라 천문 관측 기록의 양이 대폭 증가하고, 기록 또한 자세해졌으며, 당시 관측된 유성의 낙하 지점들이 모두 첨성대 주변이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는 첨성대가 천문대로서의 실제적 기능을 수행했음을 알려주는 정황상의 증거이다.

첨성대의 위치나 높이에 관한 경우에도 다음과 같은 해명이 가능하다. 고대의 천문 관측은 현대의 천문학과는 성격이 매우 달라서, 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대개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시설은 당연히 왕궁에 가까워야 했다. 즉, 부지선정에서의 고려대상은 천체 관측의 용이성이 아닌 교통 접근성이었다는 것이다.

또 고대국가에서 천문을 관측하고 앞으로의 일을 점치는 것은 왕의 권한이자 왕권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관측시설이 왕궁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도시의 빛 공해가 거의 없고 광학망원경은 더더욱 없으므로 천문대의 높이는 그저 주변 건물 높이 이상의 하늘을 넓게 관측하는데 방해받지 않는 수준이면 됐다. 고려시대 첨성대나 조선시대 첨성대도 왕궁에 입지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 지금의 첨성대의 위치와 높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것은 어느정도 근거가 있는 말인데, 삼국유사 1권 왕력(王曆)편 내물 마립간 조의 말미에는 내물왕의 왕릉 위치를 이야기하면서 '능이 점성대 서남쪽에 있다(陵在占星臺西南)'고 서술했다. 실제로 내물왕릉과 첨성대의 위치를 비교해 보면 삼국유사에 언급된 '점성대'는 이 첨성대가 맞으며, '점'은 '점칠 점(占)'이므로 이것을 점성술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또 산에 가야 밤하늘이 잘 보인다는 것 자체가 도시에 전등빛이 넘쳐나고 곳곳에 고층빌딩 투성이인 요즈음 사람들의 편견이고, 전근대 사회에서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중세 시절까지도 천문관측은 세계 어디 가든 대부분 도시 한 가운데에서 했다. 어차피 토함산쯤 올라간다고 구름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 넓은 평지에 첨성대 정도 높이면 주변 건물에 가릴 것 없이 사방 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깡촌에서 밤하늘을 보면 별빛이 넘쳐흐른다. 그리고, 우리가 관측하는 천체들과 지구의 거리는 어마어마한데, 고작 몇백 m 더 가까운 곳에서 본다고 잘 보이지는 않는다.

첨성대에 대한 의문과 논쟁

1960년대까지 첨성대는 천문 관측대로 알려져 왔지만, 이후 하늘을 관측하는 곳으로는 너무 좁거나 불편하고, 당시 경주 시내 중심부에 있었다는 이유로 별자리를 관측하던 곳이 아니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에 전(前) 서울대 물리학과 남천우 교수는 중간부의 창문에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간 다음 내부의 사다리를 한두 번 더 타고 올라가 정자석 위에 넓은 판자 등을 깔고 그 위에 앉거나 누워서 별을 관찰했다고 주장하며, 천문 관측에 크게 불편함은 없었으리라 단정한다.

그러나 문제 제기는 계속되었고, 첨성대의 독특한 모양을 모티브로, 실제 천문 관측을 한 곳이 아니라 상징적 구조물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철저한 수학적 원리에 따라 지어졌다는 주장도 나왔다. 몸통부의 27단은 27대 선덕여왕을 상징하며, 정자석을 포함한 전체 28단은 동양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던 기본 별자리 28수(宿)를 상징하고, 몸통부 돌의 숫자 362개는 1년의 음력 날수를 의미한다는 등의 주장이다.

상징적 구조물이라는 주장 중에는 첨성대가 우물을 상징한다는 견해도 있다. 정상부의 정자석은 우물의 윗모습과 비슷하고, 몸통부는 우물을 땅위에 올려 놓은 듯한 모양인데, 고대사회에서 우물은 풍요, 생산, 생명, 그리고 여성을 상징하니, 선덕여왕과 관련이 있다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연장에서 첨성대는 이 세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우주 우물의 상징인데, 이는 첨성대 자체에 선덕여왕이 하늘과 이 세상을 연결하는 신적 존재라는 상징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있다. 비슷한 의미로 여신의 탄생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 즉 여신=선덕여왕 이라는 것이다.

기능적인 면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춘분, 추분에 햇빛이 창을 통래 바닥에 닿는 모습으로 절기를 관측하는 시설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쯤 되면 차라리 천문대였다 라고 단순하게 아는 게 낫지, 이들의 학설과 주장을 대하면 대할 수록 더욱 복잡해지고 미궁에 빠져버려 뭐가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사실 천문대였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뒤집을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없기에,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도 대체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고 인식하고 있다. 무엇보다 경주시나 문화재 당국, 혹은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봐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임을 굳이 부정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천문대가 아니라면 이 첨성대의 역사적 가치,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순식간에 추락한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이기에 첨성대를 보려고 오는 사람들이 많고, '국보'로서 큰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 천문대가 아닌 그저 상징적 구조물이라면 9m 정도 높이에 불과한 첨성대가 오래됐다는 것 외에 무슨 큰 가치를 갖겠는가. 그러니 천문대가 아니라는 증거가 없다면 굳이 이를 부정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더구나 일본 쪽에서 시비를 걸고 있다면 감정 때문에라도 더더욱 천문대여야 한다는 인식도 생 길 것이다.

관람안내

  • 문의 및 안내 : 054-772-3843홈페이지
  •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첨성로 140-25
  • 이용시간 : 09:00 ~ 22:00 (동절기 21:00까지)
  • 휴일 : 연중무휴
  • 관람료 : 무료

교통안내

교통편이 불편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도보로 이동하는 것이 좋다. 사실 일부러 첨성대'만' 목적지로 잡고 찾아가려고 하면 교통이 불편한 거지, 대릉원, 계림, 동궁과 월지, 국립경주박물관 같은 다른 관광지를 돌다보면 저절로 근처를 지나가게 되는 위치다.

첨성대를 통과하는 경주시 버스 노선은 총 2개 노선이다.

  • 60번 - 약 70분
  • 61번 - 약 70분

이전에는 70번이 첨성대를 경유해서 버스로도 접근이 쉽게 가능했으나 노선 개편으로 인해 배차간격이 매우 긴 60번, 61번이 경유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시내방향만 경유하고 신경주방향은 미경유한다.

지도

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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