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사성
맹사성(孟思誠)은 조선 전기의 재상(1360~1438)이다.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이다.
개요[편집]
- 맹사성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재상이다. 여러 벼슬을 거쳐 세종 때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고 우의정에 올랐다. 《태종실록》을 감수, 좌의정이 되고 《팔도지리지》를 찬진하였다. 조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본관 신창(新昌). 자 자명(自明). 호 고불(古佛) ·동포(東浦). 시호 문정(文貞).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 검열(檢閱)을 거쳐 전의승(典儀丞)·기거사인(起居舍人)·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수원판관(水原判官)·내사사인(內史舍人)·예조정랑(禮曹正郞)·시어사(侍御史)·간의(諫議)를 지내고, 1400년(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 1406년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거쳐 1407년 진전사(進箋使) 시종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한성부윤이 되었다. 1408년 대사헌에 오르자 왕의 허락도 없이 부마 조대림(趙大臨)을 국문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 한주(韓州)로 유배되었으나, 영상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풀려나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판을 거쳐 1416년 판서(判書)로 승진, 호조(戶曹)·공조(工曹)를 거쳐 1419년(세종 1)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1425년 좌군도총제부판사(左軍都摠制府判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문신으로는 최초로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고, 1427년 우의정에 올랐다. 1429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이듬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감수, 1431년 좌의정이 되고 다시 춘추관영사(春秋館領事)를 겸임,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찬진(撰進)하고 1435년 노령으로 사임하였다. 황희(黃喜)와 함께 조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했다. 남루한 행색으로 수령(守令)의 야유를 받았는데, 도망하던 수령이 관인(官印)을 못에 빠뜨려 후에 그 못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음률(音律)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하고 악기도 만들었다. 또 청백리로 기록되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작품에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가 있다.[1]
- 맹사성은 조선 전기에, 예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 · 성지(誠之), 호는 동포(東浦) · 고불(古佛). 온양 출신. 아버지는 고려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 맹희도(孟希道)이며, 최영(崔瑩)의 손서(孫婿)이다. 『태종실록(太宗實錄)』의 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이 한번 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맹사성이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 하고 반대하니 세종이 이에 따랐다. 그러나 나라에 중요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반드시 맹사성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았다.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로 하였다. 출입할 때에는 소(牛) 타기를 좋아하여 보는 이들이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영의정 성석린은 선배로서 맹사성의 집 가까이에 살았는데, 매번 집을 오고 갈 때는 그 집 앞에서 말을 내려 지나갔다. 음악에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며, 조정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할 때에는 신중함이 있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2]
- 맹사성(1360년 8월 28일~1438년 10월 22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정치인, 유학자이다. 고려 전의시승, 조선 판한성부사 등을 지냈다. 본관은 신창이다.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동포(東浦)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고려 수문전제학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이며 고려말의 명장인 최영의 손녀 사위이다. 황희, 윤회, 권진과 함께 세종 대에 재상을 지냈으며 세종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다. 1386년(우왕 12)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검열, 전의시승(典儀寺丞), 기거랑(起居郎), 사인, 우헌납 등을 지냈다. 조선 건국 후에도 벼슬에 나가 예의좌랑에 제수되고, 정종 때 간의, 우산기상시, 태종때 동부대언, 이조참의,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했으며 명나라에 세자의 시종관으로 다녀왔다. 1417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고 세종 때는 공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을 지냈다. 만년에 가서 벼슬을 사양하던 맹사성은 1438년 칩거하고 있던 온양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평소에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기기도 하였다. 사람 됨됨이가 소탈하고 조용하며 사심이 없고,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나 한미한 사람이 방문해도 무시하지 않고,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 밖에까지 나가서 맞이했으며, 손님에게 반드시 상석을 내주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몇 번이나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벼슬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한 번도 그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맹사성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21호)는 경기도 광주 직동에 있다.[3]
- 맹사성은 충청남도 아산 출신이자 청백리의 상징인 조선 전기 때 문신이다. 맹사성은 권근(權近)의 문하에서 수학한 후 1386년(우왕 12) 문과에 장원급제하면서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을 거쳐 내직과 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때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된 이래 정종, 태종, 세종 대까지 4대 왕을 모셨다. 맹사성은 청백리의 상징이자 명재상으로 명성을 떨쳤다. 맹사성은 조선 태조 때 예조의랑이 된 이래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1408년(태종 8)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었을 때, 지평(持平) 박안신(朴安信)과 함께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이 역모를 꾸민다는 소문을 듣고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고문하여 태종의 큰 노여움을 사 처형될 뻔하지만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맹사성은 고향에서 한가롭게 생을 보내며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라는 시를 지었다. 맹사성은 벼슬에 있을 때나 물러났을 때나 항상 청백하여 식량은 늘 녹미(祿米)[녹봉으로 주던 쌀]로 하였고, 출입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태우는 가마도 사용하지 않고 소 타기를 좋아하였다. 79세에 사망하였을 때 세종은 친히 조상(弔喪)하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맹사성의 저서는 주로 관찬(官撰) 사료로 법률 혹은 종실의 『보첩(譜牒)』, 『태종실록』, 『팔도지리지』, 『고려사』 등이 있다. 또한 맹사성이 76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온양으로 낙향하여 지은 「강호사시가」와 한시 「연자루(燕子樓)」가 있다. 맹사성선생묘(孟思誠先生墓)는 경기도 광주시 직동 산27번지의 곧은골 또는 직동(直洞)이라고 부르는 곳에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었다.[4]
맹사성의 생애[편집]
- 맹사성은 충청남도 아산 온양 출신으로 맹희도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말에 관직을 역임하고 수문전제학에 이르렀던 아버지 맹희도는 조선 건국 이후에도 검교한성윤에 임명되었으며 사후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그는 모친을 여읜 뒤 어린 나이에 3년간 시묘를 하여 훗날 그의 이야기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됐다. 1386년(우왕 12)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이 되었다. 이어 전의시승(典儀寺丞) · 기거랑(起居郎) · 사인(舍人) · 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수원판관이 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때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된 이래, 정종 때 간의우산기상시(諫議右散騎常侍) · 간의좌산기상시가 되었다. 태종 초에 좌사간의대부(左司諫議大夫) · 동부대언(同副代言) · 이조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1407년(태종 7)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어,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에 가는 세자를 시종관(侍從官)으로서 수행하여 다녀왔다.
- 맹사성은 1386년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춘추관검열이 되었고, 그 뒤 전의시승(典儀寺丞), 기거랑(起居郎), 사인, 우헌납 등 여러 벼슬을 거쳐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자 관직을 사퇴하였으나, 조정에 출사하여 후배들을 지도하라는 동료들의 권고로 조선에 출사했다.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사위였는데 처조부인 최영을 본받아 인생의 사표로 삼았다. 또한 그의 재능을 특별히 눈여겨 본 이성계는 그가 자신의 정적 최영의 손녀사위임에도 연좌시키지 않고 중용하였다. 1392년 조선 개국 직후 태조로부터 예의좌랑직을 제수받았다. 1408년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역모 사건을 취조하는 중에 태종에게는 보고도 하지 않고 태종의 부마이자 조준의 아들인 조대림을 고문했다.[이 사건으로 맹사성은 왕과 왕족을 능멸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 직전까지 가게 되었으나 당시 영의정이던 성석린과 황희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다.
- 1411년 다시 기용되어 판충주목사로 임명되었다. 그러자 예조에서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인 맹사성이 음률(音律)에 정통하므로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울에 머물게 하여 바른 음악을 가르치도록 건의하였다. 그 이듬해에도 풍해도도관찰사(豐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자, 영의정 하륜(河崙)이 음악에 밝은 맹사성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도록 아뢰었다. 1416년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다. 1417년 생원시에 시관(試官)이 되어 권채(權採) 등 100인을 뽑았으며, 왕이 친림한 문과 복시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었다. 1416년 노부(老父)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원했으나 윤허되지 않고, 역마(驛馬)와 약을 하사받았다. 이어 호조판서가 되어서도 고향의 노부를 위해 다시 사직을 원했다. 그러나 왕은 충청도도관찰사로 삼아 노부를 봉양하게 하였다. 1418년 공조판서가 되어 또다시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1419년(세종 1)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이 되고, 1420년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21년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역임하고 1427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우의정 재임 시에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 감관사(監館事)로서 감수하였다. 1432년 좌의정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가계와 추모[편집]
- 맹사성의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이다. 신창맹씨(新昌孟氏)는 중국 맹자(孟子)의 40세손인 맹승훈(孟承訓)이 당나라 말기에 신라로 넘어와 충청남도 아산 지역 신창에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후손인 맹의(孟義)는 신창맹씨 1세조로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예부시랑(禮部侍郞)을 거쳐 예부전서(禮部典書)에 오른 인물이다. 당대 학자로도 유명했던 맹의는 조적(曹頔)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고, 충선왕 때 신창백(新昌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신창을 본관으로 하였다. 명문세도(名門勢道)의 가문으로, 맹사성의 할아버지는 맹유(孟裕)로 이부상서(吏部尙書)였다. 아버지는 고려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 맹희도(孟希道)이며, 최영(崔瑩)의 손녀사위이다.
- 맹사성의 시호는 문정이며,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 마을 입구에는 신창맹씨 문중 효자 4명의 효행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旌閭)가 있는데, 정려 4기 중 하나가 맹사성의 정려이다. 2017년 6월 1일에는 고불맹사성기념관을 배방읍 행단길 22[중리 275]에 개관하여 맹사성의 청백리 정신을 이어받아 공무원은 물론 학생들의 교육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전세 맹고불 유물[편집]
- 전세 맹고불 유물(傳世 孟古佛 遺物)은 조선 초기의 재상 맹사성(孟思誠:1360~1438)의 유품이다. 1990년 10월 10일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옥적·백옥방인·채석포도문일월연·수정죽절비녀·목칠도형배 등 5점이다. 고불은 맹사성의 호이다.
- 옥적은 길이 50.5㎝, 지름 2.7㎝로, 백옥으로 만든 젓대이며 횡적(橫笛)이다. 일제강점기 때 네 도막으로 부러졌는데 백동관으로 감싸서 수리하였다. 옥은 약간 황색과 옥색이 돌며 대나무의 마디 세 개를 깎아 새겼다. 구멍이 7개인데 소리는 대금소리와 다르고, 우수한 작품이다.
- 백옥방인은 총높이 8.2㎝, 인면(印面) 4.2㎝×4.1㎝로, 손잡이에 사자가 앉아 있는 모양을 크게 새긴 옥으로 만든 도장이다. 사자는 머리가 크고 큰 귀를 늘어뜨렸으며 수염까지 새겼다. 인면에는 가운데 죽관(竹觀)이라는 글자를 각각 원 안에 음각하였고, 오른쪽과 왼쪽에는 만산명월(萬山明月), 일사화풍(一事和風)의 두 구절을 전서로 새겼다.
- 채석포도문일월연은 25㎝×15.5㎝×2.5㎝로, 자색의 벼루이다. 채석이라는 명칭은 연푸른빛의 돌 사이에 황백색의 돌켜가 두께 약 7mm로 끼여 있는데 이것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조각하였기 때문이다. 연면 주위에 단풍나무에 포도덩굴을 올렸고, 풀숲의 개구리, 포도송이, 덩굴에 매달린 원숭이와 바위 위에 있는 원숭이 두 마리를 사실적으로 양각하였다.
- 수정죽절비녀는 전체 길이 23.8㎝, 수정 길이 8.3㎝, 머리 지름 3.15㎝로, 수정을 대나무 밑둥치처럼 다듬어 머리를 만들고 몸통에 구리판을 끼웠는데, 원래는 수정제 끝부분이 있었으나 없어졌다. 수정으로 된 머리 부분에 촉을 만들어 구리관 속에 3㎝ 정도 꽂았으며, 구리판은 말아서 주석으로 땜질하였다.
- 목칠도형배는 높이 5.2㎝, 지름 9.3~8.8㎝의 표주박으로 휴대용 물잔이다. 해당화의 밑둥치의 안을 깎아 옻칠을 하여 만들었다.
맹사성고택[편집]
- 맹사성고택(孟思誠古宅)은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에 있는 고려 말, 조선 초 문신 맹사성(孟思誠)이 살던 가옥이다. 고려 말의 무신 최영이 지은 집으로 그의 손자사위인 맹사성의 부친 맹희도가 물려받은 후 수백년간 대를 이어 살아오며 보존되었다. 신창맹씨 종중 소유로 후손 맹흥렬이 관리하고 있다. 고택은 설화산을 등지고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ㄷ자형 맞배지붕집이다. 뜰에는 맹사성이 심은 수령 600여 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마주 서 있으며, 은행나무 아래서 강학(講學)했기 때문에 맹씨행단이라고도 불렸다. 이 고택과 구괴정, 은행나무를 포함하여 아산맹씨행단이라 불리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 고택 뒤에는 맹사성과 부친, 조부 등 맹씨 3위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 세덕사와 정각이 함께 있으며, 맹사성의 유물을 모아 전시하고 있는 유물 전시관이 세워졌다. 이곳에 고불맹사성유물일괄(중요민속자료 225)이 보관되어 있다. 맹사성은 고려 우왕 때 장원 급제하고 청렴하면서도 강직한 관직 생활로 선비정신을 드높였는데 세종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주변에 현충사, 온양온천, 외암리민속마을, 아산온천, 도고온천, 이충무공묘, 온양민속박물관, 삽교천방조제 등의 관광지가 있다.
강호사시가[편집]
-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는 조선 초기에 맹사성(孟思誠)이 지은 최초의 연시조(連時調)이다. 맹사성이 만년에 벼슬을 내놓고 강호에 묻힌 자신의 생활을 춘·하·추·동 사철의 자연의 변화와 결부시켜 각 한 수씩 4수로 읊었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 전해지는데, 봄을 노래한 내용을 보면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탁료계변(濁醪溪邊)에 금린어(錦鱗魚) 안주로다. 이 몸이 한가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로서, 각 수의 종장마다 '역군은이샷다'가 꼭 붙어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맹사성〉, 《위키백과》
- 〈맹사성〉, 《나무위키》
- 〈맹사성〉, 《향토문화전자대전》
- 〈맹사성(孟思誠,1360~1438)〉, 《두산백과》
- 〈맹사성(孟思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박상진 기자, 〈(온양문화원) 고불 맹사성 청백리 혼 이어지다〉, 《스타데일리뉴스》, 2024-10-26
- 영맨, 〈고불 맹사성 기념관, 그리고 맹씨행단 (24.6.29)〉, 《네이버블로그》, 2024-07-12
- 이범구 기자, 〈청백리 맹사성 후손들이 어쩌다가…종중 땅 매매하면서 수십 억 뒷돈 받아 회장∙총무 구속〉, 《한국일보》, 2023-11-23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