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조계사'(曹溪寺)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수송동)에 위치한 사찰이다. 조계사는 조계종 절로 1395년에 지어졌다. 1910년에 승려들의 모금으로 설립된 각황사가 모태이다. 1938년에는 태고사가 설립되었고, 1954년에 조계사로 개칭되었다. 대한민국 불교의 1번지이자,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본산(總本山), 봉은사와 함께 서울 시내 시주 많이 들어오는 사찰로는 쌍두마차이다. 사찰 규모는 굉장히 아담하지만 대한민국 불교 최대 종단의 본사(本寺)답게 경복궁 근정전에 맞먹는다는 크고 아름다운 대웅전이 있고, 입구에는 '大韓佛敎總本山曹溪寺(대한불교 총본산 조계사)' 현판이 걸린 거대한 일주문이 정문 역할을 한다. 경내 대중전 옆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백송(Pinus bungeana)이 자라고 있는데, 500년 이상으로 늙은 데다 도심지라 생장 환경이 안 좋아 상태가 영 좋지 않다.
역사
삼각산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조선 태조 이성계 재위 4년(1395)에 창건되었다고 말하나, 실질적 창건은 구한말 순종 융희 4년(1910)에 되었다. 한국 근대사가 그렇듯, 조계사도 역사는 짧지만 매우 복잡하다.
대한제국 시절, 한국불교에는 구심점이 될 종단이 없어 계속 들어오는 일본불교 세력에 밀리기만 하였다. 이런 상황에 개탄하여 만해 한용운 등 민족적 불교인사들이 새 종단을 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1902년, 흥인지문 밖 지금의 창신동 창신초등학교 자리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하고, 1908년에 각 도의 사찰 대표 65인이 원종(圓宗) 종무원을 설치한다.
원종의 주 목표 중에는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우는 것도 있었다. 조선왕조 내내 유교 성리학을 숭상하고 불교는 억제하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멀쩡한 절도 산자락으로 추방당하거나 방화로 사라지는 판에, 한양도성 사대문 안에 절이 생기는 건 조선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게다가 1895년까지는 승려는 천민급 신분으로, 도성 출입마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이 때문에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운다는 것은 억압받던 한국 불교계에 있어 의미가 컸으며, 또한 시대가 달라졌음을 뜻했다.
이에 3개월 동안 백미 1천 석, 6천여 환을 모아 중부 박동(薄洞)[4]에 있던 동녕위궁(東寧尉宮)을 3천 환에 사서 허물고 1910년, 그 터에 각황사(覺皇寺)를 세웠다. 이 자리는 현 조계사의 바로 옆이며, 이 각황사가 조계사의 전신이다. 각황(覺皇)이라는 이름은 '깨달음의 황제'라는 부처의 별명이기도 하지만, 승려 도성 입성 금지를 해제하고 도성 내 절 설립을 허가한 대한제국 황실에 감사한다는 뜻도 있었다. 그런데 원종의 창종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 각황사를 설립하고 원종 종무원의 설립인가를 한성부윤에 신청했는데, 서류 처리 도중 나라가 망했다.
그런데 원종 종무원의 대표격이었던 이회광(李晦光)은 잘못된 결단을 내리고 만다. 일본불교의 힘을 빌어 원종을 인정받고자 했다. 일본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를 원종 고문으로 추대하고, '연합맹약'이란 것을 맺어 연합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조동종 밑에 원종이 들어가는 꼴이었다. 이회광은 인품이 훌륭하다는 글도 전해지는 승려였지만,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보지 못하고 친일행적을 저질렀다.
이 소식을 듣고 전라도 백양사의 박한영(朴漢永), 화엄사의 진진응(陳震應), 북쪽에서는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이회광의 경솔한 행위를 규탄하였다. 이들은 경상도와 전라도에 있는 각 사찰에 통문을 돌려 1911년에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열어 임제종(臨濟宗)을 설립했고, 북의 원종과 남의 임제종이 양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원종의 신청을 기각도 승인도 하지 않고 싸움을 지켜보다가, 1911년에 사찰령 등을 내려 한국불교를 조선총독부가 직접 관할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더 이상 일본불교를 앞세워 조선침략을 꾀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한국불교마저 총독부가 직접 통제하려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이듬해부터 해인사를 시작으로 30본사를 선정, 사법을 인가함으로써 조선총독부 직할체제인 30본말사제를 시행했고 곧 임제종과 원종이란 명칭을 못 쓰게 했으며 임제종은 저항 끝에 강제 해산되었다. 이회광과 원종은 곧 '조선불교선교양종각본산주지회의원'으로 바꾸고 존속하려고 했으나, 조선총독부는 이 쓸모없어진 원종의 기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원도, 승인도 안 해줬고 결국 1912년에 원종은 사라진다. 원종의 친일적 주지승들은 '삼십본산연합사무소'로 들어가 종명이 '조선불교선교양종'이 된 한국불교 30본사 전체를 총괄하게 된다.
한편 강제해산당한 한용운 등 임제종 승려들은 '임제종중앙포교당'을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찰령에 의거한 30본산제도에 대응하는 한국불교계의 새로운 대표기관을 세우고자 '조선불교회'와 '불교동맹회' 등을 조직하고자 했으나, 조선총독부가 방해하여 실패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불교에 대한 적극적인 발전과 포교를 지원해주겠다고 교묘하게 회유하였으니, 과거 조선시대 600년 동안 천민 취급을 받던 승려들은 이에 감격하여 많은 수가 친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 역시 30본산제 체제의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용운 등 지각 있는 승려들은 서서히 민족적인 사상을 가다듬으면서 3.1 운동, 만당(조선불교청년총동맹) 등을 주도하며 일제에 저항을 계속 이어나갔다.
광복 이후인 1954년에는 대처승과 같은 왜색불교 정화운동의 과정 중 안국동의 선원에 있던 비구승들이 태고사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서로 갈등을 빚어 원래의 태고사란 이름과 비구승들의 조계사라는 이름이 같이 붙게 되었는데, 결국 1954년 이러한 감정은 '비구승 vs 대처승 분규 사건'으로 폭발하였고, 이승만 등의 지원에 힘입어 비구승들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비구승의 주도로 1962년 통합종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이 세워지자 태고사 역시 조계사로 개칭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비록 과정은 좀 문제가 있었지만, 전통적인 비구승들이 일본의 영향을 받은 대처승들을 몰아냈다는 점은, 불교계가 전통적인 것으로 부분회귀하는 것에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후 조계종은 내부분규 사태나 지나치게 순수불교를 지양하면서, 정작 전통불교에서 멀어지거나 무리한 불사 등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근본주의 항목 참조.
조계종과 조계사 그리고 한국 근대 불교의 역사는 친일 행적과과 민족적 행적이 뒤섞인 모습이다. 전체를 친일이냐 민족이냐로 규정하기 전에 상당히 불행했던 역사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역사를 창피하게 느끼는지 많은 글에서 조계사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간략하게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조계종/태고종이나 조계종/태고종 주도로 펴낸 불교관련 서적과 일반 학자들이 쓴 불교사 책를 비교해 보면 여러 부분에서 차이가 있지만, 특히 이 부분에서 차이가 크다. 일반 학자들이 쓴 책이 중도적인 입장에서 서술한다면, 각 종파 측에서는 유혈충돌 부분은 최소화하면서 자기 종파의 정통성 강조에 특히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시설
대웅전
동영상
참고자료
- 조계사 공식 홈페이지 - https://www.jogyesa.kr/
- 조계사 공식 유튜브 - https://www.youtube.com/user/jogyesa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