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청계천(淸溪川)은 서울의 한복판 종로구와 중구와의 경계에 흐르는 하천이다.
서울 내의 모든 물이 여기에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현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와 군자차량사업소 사이)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쳐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빠진다.
서울의 도시개발 역사를 상징하는 하천으로도 유명하다. 전근대시기 자연하천에서 시작하여 여러 개천사업을 거쳐 직선화와 복개 작업이 이루어졌고, 청계고가도로가 건설되었을 당시에는 아예 사라졌다가 이후 복원이 이루어져 자연하천과 인공하천이 혼합된 형태의 하천으로 재탄생되었다.
발원지는 인왕산 수성동계곡을 지나는 옥류동천이라는 설과# 자하문 부근 백운동천이라는 설이 있다. 수성동 계곡 안내판에 청계천 발원지라는 표시가 있기는 하지만, 정설로 공식 확인된 바는 아니다. 옥류동천은 70년대에는 항시 물이 흘렀으며, 90년대까지도 갈수기 외엔 물이 흘렀지만 2019년 현재 발원지 추정 두 개울은 모두 건천으로서 장마 때만 잠시 물이 흐른다.
목차
개요
청계천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내부에 있는 지방하천으로, 한강 수계에 속하며 중랑천의 지류이다. 최장 발원지는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한 '백운동 계곡'이며, 남으로 흐르다가 청계광장 부근의 지하에서 삼청동천을 합치며 몸집을 키운다. 이곳에서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서울의 전통적인 도심지를 가로지르다가,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옆에서 중랑천으로 흘러든다.
발원지에서부터 잰 본류의 길이는 10.92 km, 유역 면적은 50.96㎢이나, 백운동 계곡 언저리를 제외한 상류 2.50 km 구간은 일제강점기 이래 전면 복개되어 타 용도로 전용되는 등 사실상 하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현재는 서울 이곳저곳에서 취수한 물을 중류의 청계광장에서 하루에 40,000 세제곱미터씩 인공적으로 방류하는 형태로 하천을 유지하고 있다.
발원지의 계곡은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청계광장에서 중랑천 합수머리까지의 중·하류 8.12 km 구간은 서울시설공단의 관리 하에 공원으로 쓰인다.
역사
조선~일제강점기
본래의 명칭은 개천(開川)이었다. 조선의 한양정도(漢陽定都) 당시 청계천은 자연하천 그대로여서 홍수가 나면 민가가 침수되는 물난리를 일으켰고, 평시에는 오수가 괴어 매우 불결하였는데, 태종이 박자청에게 개거공사(開渠工事)를 맡겨 처음으로 치수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후 영조 때에는 자원한 자들에 국가에서 품삯을 주고 고용한 고공들을 동원해 준설, 양안석축(兩岸石築), 유로변경 등 본격적인 개천사업을 시행, 이 공사로서 구불구불하던 내의 흐름이 비로소 직선화하였다.
이렇게 공사를 해도 자연하천이지만 건천에 가깝고, 서울 시내를 관통하며, 생활오수가 많이 들어오는 관계로 주기적으로 보수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때문에 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도 준설공사는 계속되었으며, 심지어 국권피탈 후 일제강점기 초반 청계천으로 이름이 바뀌고도 근대적 도시계획의 성격을 띤 대대적인 준설공사는 계속 이루어졌다.
청계천 정비는 1917년 경성부에서 제1기 하수도 개수계획을 입안하고 정비 예산을 책정하며 그 시작을 알렸으나, 그 직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 불황이 덮치면서 계획대로 진전되지 못했고, 1920년대 내내 청계천으로 인한 위생 문제와 교통 방해 문제는 경성부협의회의 가장 큰 '처리되지 않은 현안'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930년대 중반 조선총독부와 경성부가 각각 조선시가지계획령을 제정하고, 경성시가지계획을 시행하며 본격적인 도시 계획을 추진하며 투입 예산을 늘리며 해결될 기미를 보였다. 1935년 경성부가 청계천의 지류를 완전 복개, 본류를 일부 복개하여 도로를 확충하고 하수도를 설치하는 방안을 발표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1936년 개최된 경성부 도시계획조사위원회에서는 해당 방안을 확정했고, 총독부에서는 1937년 연말부터 원안보다 청계천 연안 도로의 너비를 2배로 확대하여 청계천 본류도 전부 복개하는 방식으로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의 태평양 전쟁 개전으로 시정의 방향이 병참기지화 정책 중심으로 흘러감에 따라 공사 속도는 점점 더 느려졌고, 결국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며 자연스레 중단되었다가 1950년대 후반 대한민국 정부의 주도 하에 재개되었다.
현대
상술된 대로 일부 구간만 끝낸 채 미완으로 남았던 청계천 복개 공사는 6.25 전쟁 이후인 1958년 6월부터 재개되어 1960년 4월에 1단계로 광교~주교(舟橋) 1~4가 간을 완공해서 지상에 너비 50m의 간선도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1967년부터 1976년까지 공사를 진행했고, 1976년 8월 15일에 청계고가도로를 개통하는 것으로 복개공사를 완료했다. 복개구간은 상류에서 성동구 사근동까지 5.4km 구간이었고, 중랑천 합류 지점까지의 2.4km 구간은 복개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당시 공사를 주도한 서울시장은 김현옥, 남산터널과 광화문 지하도, 명동 지하도, 세운상가 등을 건립한 '불도저 시장'이자 1970년 와우 아파트 붕괴 사고로 사퇴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청계고가도로 건설로 인해 청계천은 1976년부터 2003년까지 사라지게 된다.
청계고가도로 시절
청계고가도로 시절, 근처 상가에는 이런저런 특이한 물품을 취급하는 상점과 노점상들이 떼거지로 있었다. 헌책방이나 골동품 상점, 온갖 잡화를 파는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우스갯소리로 '청계천을 한번 돌면 탱크(또는 잠수함)를 조립할 수 있다'는 말도 있었을 정도였다. 강풀의 <26년>에서 전두환을 노리는 주인공이 일반 경기용 공기총을 살상용으로 개조해 달라고 의뢰한 공작소도 청계천에 있다는 설정이었다.
1970~80년대 초 무렵의 청계천 일대 전자상가는 세운상가와 더불어 한국의 1세대 컴덕후들에게는 요람과도 같은 곳이었다. 청계천 상업지구는 재개발로 철거되면서 당시 업주들에게 새 요람으로 권장한 곳이 있었는데 그것이 가든파이브였다.
각종 생물 취급도 다양했는데, 수족관 문서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동대문 ~ 동묘앞 구간의 거리는 청계천 열대어상가라고 불리며 물고기 동호인들에게는 아주 유명한 곳이었다. 심지어 복개구간 철거 직전인 2002년에는 그 안에서 새끼 악어의 사체가 나온 적도 있다. 개복이 완료된 이후에도 한동안은 희귀동물의 성지로 유명했다.
이 지역의 수족관 사이에 조류원도 중간중간 섞여있었으며, 기타 햄스터, 곤충과 파충류를 파는 애완동물 매장이 매우 많이 밀집해있었다. 악어, 거북이 정도는 약과이고, 국내에 수입되는 게 불법이어서 밀수해서만 키울 수 있는 동물들도 쉽게 살 수 있었다. 물론 그만큼 동물들의 관리상태는 매우 나빴다. 햄스터만 해도 여름이면 일사병에 걸려 침을 질질 흘리고, 서로 싸우다 살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햄스터가 있으면 가게 문 닫고 나서 내다 버리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목격되기까지 했다. 아마 위의 새끼 악어도 여기서 팔다 흘러들어갔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 2013년까지의 상황이었으나, 2014년 1월에 이 점포들이 대부분 입점해 있던 신발도매상가 D동 관리회사가 A동처럼 이 건물도 신발만 취급하는 전문상가로 전환하면서 2월까지 다수의 점포가 이전 또는 폐점하였다.
그러나 길목의 이점을 포기할 수 없으므로 이전한 업소들은 대부분 먼 곳이 아니라 한 블록에서 두 블록 정도 안쪽으로 들어가 있고, 청계천변의 옛 점포 자리에 새 점포로 가는 약도를 붙여 놓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길어야 이사한지 1~2달 정도 갈 게 뻔하므로, 관련 업소를 자주 드나들던 위키러라면 아무 생각 없이 방문했다가 어디로 갔나 당황하지 말고 전화로 이전 여부 및 이전 위치를 확인한 후 방문하기를 권한다.
일단 그 시절은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이고 PC통신도 마니아틱한 느낌이 있었기에 오프라인 쇼핑이 대세였다. 그때 청계천은 불법물도 구할 수 있고 각종 진귀한 것들을 구할 수 있는 매트릭스 같은 은밀한 통로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주말에 구경하러 가곤 했다. 지금이야 인터넷 쇼핑이 대세로 자리 잡아 해외직구도 발전하여 오래 전에 단종되어 해외 현지에서도 발품팔아 구하기 힘든 구식 게임기라도 해외 옥션이나 아마존닷컴 중고품을 검색하여 클릭 한번이면 집까지 배달해주는 시대니 실감이 나지 않겠으나, 그 시절만 해도 희귀한 것은 발품을 팔아야 구할 수 있는 시대였다.
지금이야 유튜브에서 클릭 한번으로 전세계 각종 진귀한 영상이나 음악 등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지만, 그 시절은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해외 문화나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발품을 팔아야만 했는데, 이태원동이나 청계천은 당시 밀수로 해외의 희귀한 음반과 영상을 구할 수 있는 통로였다. 서태지와 아이들도 이태원에서 해외음악을 접하며 꿈을 키웠다고 했는데,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고급정보였다. 지금이야 일본 문화 개방으로 합법적으로 수입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기에 평범한 일본 연예인들에 대한 정보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당시 부산 일부 지역에서는 일본 전파가 잡히기도 해서 그것만 봐도 마치 한국에서 북한 방송을 보는 듯한 문화충격 같은 느낌이었는데, 청계천에서는 일본의 성인물까지도 보따리 상인들이 어떻게든 들여와 거액으로 거래를 하기도 했다.
조악한 흑백폰을 쓰던 때의 청계천에서는 조그마한 휴대용 흑백 TV를 비싸게 팔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런 휴대용 TV가 있으면 산에서도 TV를 볼 수 있겠다"며 갖고 싶어 했다. 지상파 정도만 수신되고 주머니에 넣을 수 없는 탁상용 시계 정도의 크기이나, 배낭에 넣을 수는 있으니 TV를 가방 안에 넣어가지고 다닐 수 있단 사실만으로 파격적인 '첨단'제품처럼 선망하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TV를 어디서든 볼 수 있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이 숨을 쉬듯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청계천 시절에는 상상만으로 가능한 꿈의 기계였다. 당시 청계천에선 흑백 휴대용 게임기(게임보이)도 비싸게 팔렸고, 해외에서 밀수된 사진기도 비싸게 팔렸는데, 그 시절에 그런 것들을 소유했다는 것은 나름의 특권이나 다름없었다.
과거 환상의 느낌이었던 청계천이 개발로 인해 사라져서 안타까워하는 시선이 있으나, 과거에야 해외에서 몰래 들여온 진귀품을 파는 보따리 상인들의 집결지란 것만으로 희소성이 있었어도 클릭 한번으로 집에서 해외품을 받아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이상 설사 인위적으로 몰아내지 않았어도 자연스레 시장에서 도태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당시엔 만물백화점 같은 곳으로서 선망의 대상이었으니 과거 청계천을 계속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추억의 장소로 남아있다.
복원
청계천 복원 사업
1990년대에 들어 청계천의 복개 구조물과 노후한 청계고가도로의 안전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되었다. 이에 이명박 당시 서울특별시장 후보는 청계천 복원을 공약하였고, 32대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2003년 7월 1일에 청계고가도로의 철거가 시작되었고,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부터 성동구 신답 철교에 이르는 약 5.84km의 구간을 복원하는 공사는 3867억3900만원을 들여 2005년 9월 30일에 완료되었다. 복원된 청계천의 통수단면 위쪽을 흐르는 물은 잠실대교 부근의 자양취수장에서 취수한 한강물과 도심의 지하철역 부근의 지하수를 정수·소독 처리하여 조달하며, 통수단면 아래쪽을 흐르는 물은 도심의 오·폐수이다.
청계천 장통교 옆 벽면에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을 행차하는 것을 그린 반차도(班次圖)를 타일로 옮겨놓은 벽면 예술, 다산교와 영도교 사이에 복원해 놓은 복개 이전에 아낙네들이 빨래를 했던 '청계천 빨래터', 청계천 복원 사업에 맞추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에 만든 타일 벽인 '소망의 벽' 등이 시설물로 설치되었다. 또한 '존치교각'이라는 이름으로 옛 청계천 고가도로의 교각을 3개 남겨 놓았다. 청계천 입구의 청계광장에는 팝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가 설계하여 KT가 서울시에 기증한 소라탑이라는 작품이 설치되었다.
=== 청계천 재복원사업
2013년 서울시는 2014년부터 2050년까지 장기적으로 청계천을 재복원한다는 '청계천 2050 마스터플랜'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2014년~2018년까지의 단기, 2019~2030년까지의 중기, 2031~2050까지의 장기계획으로 나뉘어 있다.
단기적으로 2018년까지 청계천의 보(湺)를 철거, 직선화 되어있는 청계천 물길의 곡선화, 인공 구조물 구간에 수림대를 조성하여 옛 청계천 수목과 비슷한 나무를 심어 자연에 가까운 하안(河岸)을 유도해나갈 계획이며, 수표교를 원위치에 돌려놓기 위해 안전진단과 부지매입을 실시하겠다고 한다. (수표교는 1955년 복개공사 당시부터 이전해 장충단공원에 보관되어있다.) 2050년까지 수표교, 광통교, 오관수문 재복원과 백운동천, 중학천 같은 옛 물길을 되살려서 청계천에 연결시켜 물 공급을 안정화시키고 보행자 우선가로와 주변 시설 정비를 끝으로 이 계획은 완료된다.
청계천 2050 마스터플랜은 복원공사 초기 때부터 지적되어왔던 역사성의 부재와 생태 문제, 유지비 문제 등을 일정 부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청계천의 수원이 되는 하천 모두가 현재 건천이므로, (복개한 위에 도로와 집이 들어섰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무시하고) 복개한 것을 까내고 나무 심고 흙 뿌려 정비한다고 해도 자연 상태로 청계천에 물이 흐르게 만들 방법은 없다. 역사적으로도 "갈수기에 건천-여름에만 흐름-토사가 쌓임- 가끔 홍수에는 범람" 이라는 특성을 지닌 하천인데, 물이 흐르게 만드는 방법은 현재의 한강물+지하철 지하수를 퍼다 붓는 것 뿐이다.
원래 수량이 불안정한 데를 항시 물이 흐르게 하겠다는 계획 자체가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고 현실성이 전혀 없는 것. 다만 원래 하천이라는 것의 특성상 해마다 물 길은 조금씩 바뀐다. 따라서 하천에 역사를 운운하는 것도 현실성이 없는 얘기이다. 우리나라에 현재 '자연 그대로의 물길'을 유지하고 있는 하천은 없다고 봐야하고 이는 전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인간의 효용에 맞게 물길을 고정시키는 방식으로 공사를 했고 꾸준히 그것을 유지보수해오고 있다.
의의
당시 청계고가는 지어진지 30년이 넘은 노후된 곳이었고 붕괴위험이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 전문가도 있었다. 특히 청계천 고가도로 건설당시 물길 위에 뚜껑을 덮은 형태로 만들어졌고 주변에서 생긴 오염물질이 쌓이면서 복개내부에 메탄가스가 가득차게 되고 이 가스가 복개내부에 쌓여 터질 위험에 처하자 서울시가 곳곳에 환기구멍을 뚫어 가스를 내보냈으나 이는 임시방편에만 불과했고,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했다. 당시 2001년 즈음 미군에서는 청계고가를 지나지 말라는 경고가 있었다.
지어질 당시에야 종로 등 사대문 안이 서울의 도심이었지만 서울 전체가 발전하고 특히 강남 등 새로운 도심으로 떠오르며 종로 등 구 도심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교통량이 청계고가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점도 제시되기 시작했다. 또한 도시 내의 고가도로가 도시를 단절시키고 미관을 해친다는 시민의 의견도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고가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철거하는 쪽이 이득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계천 복원사업은 애물단지였던 청계고가를 허물고 복원을 통해 시민들에게 도심 내의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새로운 관광명소를 만들었다는 데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실제로 청계천 개장 후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0년간 약 1억 9천만명의 내외국인이 방문하였다.
또한 환경적 측면에서는 바람길을 열어내면서 도심 대기환경을 개선하고 주변부보다 온도를 3도 이상 낮추어 도심의 열섬 현상을 감소 및 완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자면, 컴퓨터의 수랭 쿨러가 돌아가는 원리를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환경적 영향은 보다 엄밀한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최소한 고가도로보다는 나은 결과를 보였다. 또한 이때까지 폭우가 쏟아지면 청계천 일대가 물에 잠기는 현상이 자주 발생했는데 청계천 정비후 이런 현상이 줄어들었고 이를 청계천이 막아냈다고 한다. 기사에서도 나와있듯이 비가 와서 물이 넘치게 되면 청계천 산책로가 먼저 잠기도록 건설되었다고 한다.
청계천 복원 사업의 가장 직접적인 기대효과는 도심 정비였다. 슬럼화가 진행되고 쇠퇴하기 시작하던 구도심을 청계천을 통해 주위 환경을 개선시켜 다양한 업종의 입지 매력도를 상승시킴으로써 주변 지역의 토지 이용을 다양화시켰다. 지가 역시 상승했으며 이를 통해 얻은 경제적 효과 역시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홍수예방에도 탁월한 성능을 발휘했다. 과거 종로구는 상습 침수 지역이었으나 청개천 복원 후 일대의 물이 청계천을 통해 방류되면서 600mm가 넘는 폭우에도 홍수가 일어나지 않아 홍수 예방에 탁월함을 증명하였다.
이외에 다른 도시에서도 도심지 하천 정비가 유행처럼 번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여러 가지 효과를 낳았는데, 인구밀도가 희박한 군지역 읍지역이라도 하천만 있으면 국비를 요청해서 정비하려 했다. 한편으로는 방치돼있거나 무허가 개발되던 하천부지를 정비해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많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일부 지자체에서는 무리하게 진행하는 탓에 논란이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부산의 초량천이며 공사를 할 수록 추가로 들어가는 비용이 계속 발생하는 바람에 예산이 부족하게 되어 10년 넘게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청계천 복원 사업에 대해 해외에서는 상당히 좋은 평을 받고 있으며 미국의 도시계획가 제프 스펙은 청계천 복원 사업을 두고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도 성공적인 도시 공원의 예로 등장했다. 서울에는 한강이 있지만, 서울 구도심에는 원래 있던 작은 개울들 대부분이.복개되어 도로가 되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도시도 마찬가지. 그렇게 다른 나라의 수도에는 있는 고만고만한 하천이 보이지 않다가 다시 생긴 셈이니 랜드마크가 되었다.
청계천 다리
조형 설치물
동영상
지도
참고자료
- 서울특별시 서울시설공단 청계천 - https://www.sisul.or.kr/open_content/cheonggye/
- 〈청계천〉, 《나무위키》
- 〈청계천〉, 《위키백과》
- 최유진, 〈굴곡진 역사와 함께 한 서울의 얼굴 청계천〉,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scaadmin, 〈도심재생과 청계천 복원계획(2002-2006)〉, 《서울정책아카이브》, 2015-05-28
- 최원철 한양대 부동산융합대학원 특임교수, 〈재개발 활발한 서울, 청계천 지하에 고속도로 짓는다면 (최원철의 미래집)〉, 《한경닷컴》, 2022-05-29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