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석굴암(石窟庵)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의 토함산 중턱(진현동 891)에 있는 석굴(石窟)로서 국보 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당시 51세였던 김대성이 만들기 시작했고 20여년 후 완성되었다.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이 반영되어 있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으나, '석굴', '조가절' 등의 이름을 거쳐 일제강점기 이후로 석굴암으로 불리고 있다. '석불사'라는 현판도 발견되었다 석굴암에 있는 모든 것 중 하나 빼고 다 대칭이다. 뒤에 위치한 광배이다. 이 광배가 비대칭인 이유는 아래에서 바라볼 때 원이 대칭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광배는 160cm 높이에서 바라보면 정확한 원으로 보이는데, 이를 바탕으로 신라인들의 키는 일반적으로 160cm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세계에서 유일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화강암 석굴이며, 1913년 이후로 일제가 수차례 해체·조립·수리하기 전까지는 원형을 유지하였다. 현재는 부실 복원에 따른 습도 문제로 유리벽으로 막아 보존되고 있다.
석굴암은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적인 가치와 독특한 건축미를 인정받아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한 불국사와 함께 전생의 부모를 위한 석불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서 불국사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점을 참작하여 석불사가 현재의 석굴암으로 여겨지고 있다. 석불사에는 신림(神琳)·표훈(表訓)의 두 성사(聖師)를 각각 청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한다.
그 뒤로는 기록에 등장하지 않다가 조선 중기 이후로 중수하거나 방문한 기록이 남아 있고, 정선은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목차
개요
석굴암은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의 토함산 중턱에 있는 신라의 호국사상을 잘 나타내는 암자이다. 석굴은 남북국시대에 통일신라의 김대성이 만들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석굴사원으로 불교 문화재의 걸작이자 국보 제 24호. 현대에 그 예술성과 가치를 인정받아서 토함산 아랫자락의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입장료는 성인 기준 6천 원으로 불국사와는 별도의 요금이다.
관람 시 실제 석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유리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 밖에서 지나가면서 보는 것만 가능하다. 습기와 바람에 따른 문화재 훼손을 막기 위해 내부에는 현대 과학의 산물인 공기 순환 설비가 돌아가고 있다. 다만, 매년 단 하루 부처님 오신 날에만 예외적으로 차단막 안으로 들어가 옛날 신라인들이 했던 것처럼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이마저도 내부에선 사진 촬영은 금지된 상황이다.
통로에 '경내 설명 금지'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는데, 좁은 석굴 안에 사람 몇명만 말을 하기 시작해도 소리가 울리며 매우 시끄러워지기 때문. 그냥 서서 오래 구경하는 건 제한이 없다.
- 문화재 설명
-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대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삼층석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 한편, 현재 석굴암은 내부 전면 공개 관람 시 항온항습 등의 문제가 우려되어 1976년부터 유리벽을 통한 외부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역사
신라 ~ 조선시대
신라 불교 예술의 전성기를 이룬 경덕왕 시기, 재상이던 김대성과 이성룡이 창건해서 774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석불사로 불렸으며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도 석불사로 언급된다. 석굴암은 불교의 전래 경로였던 인도와 중국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반도는 조각 난이도가 높은 돌인 화강암과 청석류가 많고 기후도 달라 저들 나라만큼 석굴이 많이, 크게 지어지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 신라에서는 군위군의 삼존석굴(일명 제2석굴암), 골굴사의 12개 석굴, 양산시의 미타암, 남산 칠불암 등 한국사에서 손꼽히게 석굴사원이 많이 지어졌다. 그 중에서도 석굴암은 가장 정교하게 제작된 곳이다.
고려 건국 이후 귀족세계에서 멀어진 석굴암은 그 존재감이 약해져 일부 기행문에서 간간히 언급된다. 17세기~18세기 정시한의 산중일기, 정선의 교남명승첩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이 때까지는 어느 정도 석굴암이 관리되었고, 산중일기를 보면 전주에서 불국사와 석굴을 보러 오는 사람이 언급되므로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참배객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숙종 29년(1703), 영조 34년(1758)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말기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이 크게 중수했다고 한다.
조선시대를 거치며 경주도 평범한 지방도시로 위상이 떨어지고 불교도 숭유억불 정책으로 차츰 세가 줄어드는 와중에 석굴암도 해발고도 565미터 산중턱에 있다는 점까지 겹쳐 차츰 잊혀지고 방치되었다. 특히 조선 말기에는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활발해 깊은 산 속의 치안이 불안해져 스님들이 산 아래로 내려가 비어 있는 절이 많았다고 한다. 1902년 8월 세키노 타다시, 1906년 이마니시 류 등 당대의 일제 유수의 사학자들이 불국사를 보러 와서 사진도 찍고 조사했지만 석굴암은 방문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 뒤로 얼마나 한국 유적지 이곳저곳을 활발하게 조사했는지 보면, 불국사를 가놓고도 석굴암엔 안 갔음은 석굴암의 존재를 몰랐다는 증거로 보아야 자연스럽다.
현대의 재발견
조선 후기 문인들의 기록들에 석굴암에 대해 언급되고 있고, 1891년 풍양 조씨 가문에 의해 풍양 조씨 가문에 의해서 석굴암이 중수되었다는 '토함산 석굴중수 상동문' 등, 석굴암이 잊혀진건 아니었다.
하지만 1891년 수리된 것을 마지막으로 16년간 방치되었고, 토함산의 동산령을 넘어 동해안 지대로 배달가던 우체부가 범곡 근처에서 능 같은 것을 발견해 보고하면서 1907년 일제가 석굴암을 '재발견' 했을때는 "본존불의 코가 깨졌고 연화대 또한 심하게 갈라져 파손되었으며, 천장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겨 그 구멍에서 흙이 들어오고 있어 그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극히 불량하였다.
그래서 1910년 조선통감부는 처음엔 산간 벽지에 있는 석굴암을 해체해 경성부로 옮길 계획을 세웠지만 막상 해체를 시작해보니 돌들의 무게가 워낙 무거워서 이전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이전을 포기하고, 1913~1915년, 1917년, 1920년~1923년까지 세 차례 전면적 수리를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 데라우치가 이곳을 시찰한 뒤 석굴암을 보수하기로 결정하면서 일제의 야심찬(?) 유적 복원이 시작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잊혀진' 유적을 발굴해 복원하는 게 국가 위신을 위한 사업으로 크게 유행했기에 당연히 일본도 이 트랜드를 따라 석굴암 복구를 한 것이다. (상술 했듯 석굴암 이전이 불가능했던 것은 물론, 이미 조선이 일본의 일부가 됐으므로 어디 있든 일본 정부의 재산이니 반출할 필요가 없었다.)
1913년 10월부터 감개돌을 고정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으로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하였고, 1914년 8월 말 돔형 지붕을 분리하여 완전 해체한 후, 1915년 5월 석굴을 재조립하는 등 1915년 9월까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복원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야침차게 거액을 들여 준비한 복원 사업은 예상외로 잘 풀리지 않았다. 수리 과정에서 불상을 습기로부터 보호하고 석병을 보강하기 위해 콘크리트를 타설했었었지만 아름다운 화강암을 이용해 당대 최신 건축 기법을 이용한 첨단 수리 방법이었다.
문제는 콘크리트가 방수에는 탁월해도 방습에는 취약하다는 것. 당대에는 콘크리트의 물성에 대해 지금처럼 정밀하게 이해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기에 일어난 참사다.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CO2)와 칼슘(Ca)이 화강암 벽을 손상시킴을 몰랐던 것도 문제였다. 21세기에는 시멘트의 단점을 잘 알기 때문에 외국에서 시멘트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건설했다면, 적어도 건물이 준공된 후 2∼3년 동안은 작품을 전시하지 않는다. #] 하지만 당대에는 대부분은 이걸 몰랐다.
또한 공사를 주도한 것이 석공 전문가가 아니라 철도를 놓던 터널 공사 전문가였던 것도 문제였다. 당연히 석굴암에 의도된 설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이들이 방습을 위해 도입한 조치가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석굴암은 지하수 샘물이 솟아나는 암반 위에 있는데, 이것은 냉각 기능을 하는 아주 중요한 설계였다. 수분은 0.1도 차이만 있어도 차가운 쪽에서 물 분자 이동이 저하돼 결로 현상이 일어나므로, 샘물로 석굴암 바닥을 냉각해 일부러 바닥에 결로를 일으켜 습기를 배출하게 한 것이다.
일제의 건축공들은 이 샘물을 습기의 원인으로 오인해서 아연관을 설치해 배수 해버렸다. 그러자 바닥의 온도가 높아져 정교한 조각이 있는 석굴 벽면 표면에 결로가 생기기 시작했다. 덕분에 공사가 끝나자마자 엄청난 결로와 이끼가 출몰했다. 습기에 노출된 시멘트 콘크리트에서 탄산염과 칼슘염이 누출되어 화강암을 시키기 시작한것은 덤이다.
1917년 누수 현상과 습기 등으로 바닥과 천장 위로 물이 스며드는 문제가 나타나자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장의 방수를 위해 아스팔트를 바르고 석실 지하 아연 배수로의 방향을 바꾸는 보수 공사를 실시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1927년에는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을 했다. 당시 보수 공사 비용은 당시 돈으로 2만 2726원. 지금 가치로 대략 38억 원 정도 된다. 이끼가 또 생겨 1934년에도 증기 세척을 했는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거친 처리로 본존불을 비롯한 조각들이 많이 마모됐다.
무엇보다 당시 일본 실무진들은 대형 고대 석조 문화재 지식이 거의 전무했다. 특히 이들은 당시 현지의 석공 장인들에게 조언[8]을 구하거나 이들을 공사에 참여시키지도 않았다. 게다가 현장의 조선인은 잡역 인부를 빼고는 모두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또한 조선인들도 16년간 방치된 석굴암의 '제대로 된 사진'이나 '기록'은 당연히 없었다. 복원 이전에 남긴 사진이나 자료들은 대체로 일본인이 남긴 것이다.게다가 복원공사를 하며 어떻게 해체했는지 기록하지 않았기에 사진조차도 제대로 남은 게 없다. 남은 사진과 자료들은 지금의 복원 작업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있었다면 해방 후 보수공사마저 이런 꼴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만약 해체 보수를 매뉴얼대로 제대로 했다면 이 석재들은 다시 제대로 조립되었든지, 아니면 최소한 어느 지점에 있던 몇 번 석재 같은 메모라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일제는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제대로 조사기록을 남기지도 않고 주먹구구로 해체공사를 추진했다.
결국 일제의 야심찬 복원 계획은 거액만 쓰고 망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해방 이후 혼란한 사회 속에서 방치되어 오다가 석굴암은 말라붙은 새똥과 이끼, 곰팡이가 피고 말았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2년간 문화재관리국의 주도로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다. 일제가 바른 시멘트로 인해 습도와 온도 유지가 어려워지고, 내부에 맺힌 물이 시멘트를 녹여 결과적으로 화강암으로 된 조각상들을 침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기존의 시멘트 구조물 위에 약간의 공간을 두고 그 위에 돔을 덮었다.
그리고 이때 외부 습기를 차단하기 위해 유리로 봉인하고, 습기제거장치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렇게 밀폐된 공간 속에 관람객들이 배출한 이산화탄소와 이물질이 갇혀 화강암을 손상시키는 점이 지적되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목조에 기와를 덮은 전실전각이 설치되었다. 그때부터 짐승과 조류, 벌레 등의 침입을 막게 되었고, 악천후가 차단되어 연중 예불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것이 석굴암의 통풍을 막는 요소라고 지적되고 있다. 그래도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자 196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김효경 교수는 석굴암 우측에 환풍기를 설치했다.
1970년부터 또 다시 앞지붕을 짓고 입구에 유리로 설치해 실내의 습도가 항상 조절되고 있지만, 일반인은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매년 석가탄신일에만 석굴암 내부까지 공개된다.
구조
방형 전실(前室)을 지나 통로를 지나면 원형 굴이 나타난다. 천장은 돔형으로 밖에서 보면 그 위에 흙을 덮은 모양이다. 너비는 좌우 약 6.7미터, 전후 약 6.6미터, 입구의 넓이 3.35미터로, 치밀한 건축적 계산 하에 설계되어 만들어졌다.
본존불
십일면관음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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