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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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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s1208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2월 3일 (금) 10:25 판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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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생가
남산 정상 만경대
만경대에서 바라본 동평양화력발전소

만경대(萬景臺)는 평양 시내의 지명이다. 서쪽으로 12km 떨어진 대동강 하류 부근에 위치한 곳이다.

일찍이 경승지로 알려져 있다. 또, 김일성이 여기에서 보존되고 있는 김일성 생가 등은 혁명의 성지로 여겨진다. 케리포터라는 유투버에 따르면 실제로 많은 외국인들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1억명 이상의 관광객이 다녀간 곳이다.

김일성 생가 바로 앞에는 남산이 있다. 이 곳이 만경대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바로 남산의 정상에서 만가지 경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요[편집]

만경대는 북한의 체제선전시설이다.

김일성이 태어난 집으로 알려져 있으며, 북한 정권과 해당 주민들에게는 '성지'처럼 떠받들여지고 있다.

북한을 방문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 금수산태양궁전, 대성산혁명렬사릉, 애국렬사릉,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이유라도 방문해서는 안 될 곳 중 하나에 해당된다.

특징[편집]

보통 사적이나 명승지 정도로 오해하는 경우도 가끔 발생하는데, 북한 정권이 등장하기 전에도 경치가 좋고 강물의 수심이 깊어 배 대기 좋은 곳으로 평양에서 이름있는 명승지는 맞았다. 하지만 이 곳에 있는 집 하나가 문제인데, 이 집은 김일성이 유년 시절을 보낸 집이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 기준에서는 중요한 사적지가 맞기는 한데 남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찝찝한 느낌이 드는 곳. 김일성이 태어나기 전에도 평양에선 경치가 좋은 곳으로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북한에서는 당연히 이 곳을 절대 성역으로 여기고 깨끗하게 복원, 단장하고 초가집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금수산태양궁전과 함께 김씨 가문 우상화의 상징이며,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무조건 이 곳을 관람해야 했다. 한국 NL 통일운동 인사 중에 방문 사례도 있었는데, 2001년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방북 당시 이 곳을 방문 후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식의 문구를 써서 한국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으며, 그는 귀환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바 있었다. 결국 2010년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김일성 생가 인근에는 '천석식당'이라고 해서 1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식당이 있다. "내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한테 국수 한 끼라도 대접할 곳은 있어야 한다."라는 김일성의 명령으로 1972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며, 옥류관과 함께 잘 알려진 평양의 식당으로 주로 냉면과 온반, 비빔밥, 감자맛탕(감자정과) 등 한식을 취급하지만 빵도 같이 판다.

김일성 우상화의 영향으로 북한에는 이 곳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명이나 조직이 많이 있다. 유명한 것만 봐도 평양시의 행정구역인 만경대구역부터 시작해서 평양 지하철도 만경대선, 만경대혁명학원,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만경대유희장 등이 있다. 그 밖에 "만경대OO공장" 따위는 워낙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만경대혁명사적관[편집]

평양시 만경대구역의 김일성 생가 인근에 세워진 사적관이다.

1970년 김일성 탄생 58돌에 즈음하여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고향집' 인근에 개관된 혁명사적관이다. 만경대와 관련된 김일성 및 그 일가의 혁명업적을 통하여 북한 주민을 교양하기 위해 세워졌다.

만경대혁명사적관은 김일성 생가 '만경대 고향집'에서 오른쪽으로 150m 가량 떨어진 둔덕에 자리 잡고 있다. 개관 당시 6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었는데, 사적관 1호실에는 김일성이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로부터 애국주의 교양을 받는 모습을 형상화한 석고상이 설치되어 있다. 2호실에는 김일성이 어린 시절을 보내던 1910년대의 만경대 전경을 보여주는 사판과 함께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 할아버지 김보현, 할머니 리보익에 관한 자료와 아버지 김형직의 청소년시절과 교육활동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3호실에는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과 삼촌 김형권, 동생 김철주, 사촌동생 김원주의 혁명활동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4호실에는 김일성이 만경대에서 태어난 이후 혁명가로 성장하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5호실에는 '배움의 천리길'과 '광복의 천리길'에 관련된 자료와 '타도제국주의 동맹' 결성과정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마지막 6호실에는 광복 후 김일성이 만경대를 찾아 친지들과 상봉하는 자료와 김정숙, 김정일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통일 이후 보존 가능성[편집]

철거의 관점[편집]

일명 '만경대 고향집'은, 오로지 북한 정권의 체제선전 목적에 방점이 찍혀있을 뿐만 아니라 유적지 내지 사적지로서 보존가치도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대척점에 놓여진 시설물이기에, 훗날 보존 여부를 판단할 때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깎아먹으며 굳이 보존해야 하는가 하는 정치적 판단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통일 이후에도 여전히 북한 정권에 충성을 다하여 암약하고 있는 반군 또는 게릴라 세력에 의해 마치 네오 나치들이 하듯이, '성지'처럼 떠받들여져서, 향후 북한 지역의 치안이 안정화되지 않을 경우 이곳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극단적인 사회 혼란 사태를 유발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북한의 소위 '혁명사'와 정치체제·사상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역사학적 관점에 치중한 채 섣불리 이 시설물의 보존을 말하는 것은 위험한 주장이다.

같은 관점에서 판단해볼 수 있는 것으로,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와 정일봉이 있다.

만약 북한 주민이 외부 문물을 접하고 나서 김일성의 부하들이 자신을 착취했다는 관념 등이 생겨나면, 히틀러 생가처럼 이곳을 철거시키거나 우상화의 폐해를 알려주는 공간으로 조성하려고 들 수 있다. 북한의 청소년은 김일성을 옛날 할아버지로 여긴다는 증언도 있고, 탈북자의 경우 김일성을 매우 싫어해서 위키백과의 김일성 문서를 보면 악에 받친 서술이 있다.

보존의 관점[편집]

왜성, 청태종공덕비 등 유적 보존이 꼭 역사에 긍정적인 부분만 보존하는 것이 아니므로 통일 후에는 한국사에 좋든 나쁘든 한 획을 그은 김일성이라는 인간의 생가라는 특성상 일단 유적지로 남아있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 사례를 보면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포리 화진포에도 김일성 별장이 관광용으로 남아있다.[5]

또한 북한 주민들 입장에서는 김일성의 이미지가 나름 좋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철거한다는 입장을 표했을 때 민심 이반 현상이 어떤 식으로 발현될 지 누구도 장담하기 힘들다라 하지만, 전두환을 누가 키워 놨는가를 생각하면, 전범 동정하는 잠재적 전범들 심기나 살핀다는 비아냥이 가능해서, 보존을 주장한다면, 이 소리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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