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
명동성당은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74 (명동2가)에 자리한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한국 천주교 최초의 본당이자 한국 가톨릭의 본산이다. 건축 양식은 네오 고딕을 따르고 있다.
주보성인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무염시태, 無染始胎)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당의 정식 명칭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성당' 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이고, 줄여서 '명동대성당', '명동성당'으로 부른다. 1898년에 건립된 유서 깊은 유적지로 사적 제258호에 지정되어 있다.
목차
역사
성당의 건설
성당이 있는 명동 언덕은 한국 천주교에서 상당히 중요한 곳으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의 집이 있던 곳으로 '명례방'이라 불렸던 곳이다. 이곳은 한국에서 처음 천주교 전례가 거행된 장소이기도 하다.
김범우 토마스는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 베드로, 정약전 안드레아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고 자체적으로 공소예절을 드렸다. 포도청 당국이 이를 적발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명문가 자제라서 적당히 훈방 조치했지만, 김범우는 중인 계급이라 고문을 받고 귀양을 가다가 사망했다. 이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해인 1886년부터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나서 새로 성당을 짓기 시작한 것이 이 명동성당이다.
건축 당시에도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명동성당의 언덕 아래에 왕실의 어진을 모시는 영희전(永禧殿)이 있어서 풍수상 곤란하다"며 반대해서 건축이 지연되었다. 또한 성당을 짓는 실무 기술자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왔는데,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이 기술자들이 중국으로 귀국해버려서 지연되는 일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에 가톨릭 교회는 빌렘 신부가 안명근 야고보 야고보의 고해성사 때 얻은 정보를 일제에 밀고한 대가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성당 주위의 부지를 하사 받았다. 그 결과 일제는 안명근을 포함하여 신민회 소속 독립운동가 105명을 일망타진하며 신민회를 해산시겼다. 명동성당은 하사 받은 부지로 대대적인 증축을 하였으며 해당 부지는 아직도 명동성당의 일부이다. 그리고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15일에 (황국) 국위선양 평화미사를 거행하고 황군 위문금을 모금한 역사가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각종 민간 쇠붙이 생필품이나 철로 등과 마찬가지로, 군수품으로 쓴다며 종탑의 종을 공출당할 뻔했다. 이에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는 종을 치는 끈을 거두고 종탑을 폐쇄했다. 그래서 종은 무사했지만, 대신에 성당 제대 앞에 있던 철재 영성체 난간이 뜯겨져 목재로 교체했다. 6.25 전쟁 때는 성당 전체가 폭격으로 날아갈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전쟁 당시 성당 인근에 주둔하던 인민군을 몰아내기 위해, 미군 측에서는 "명동 일대를 싹 폭격한 뒤에 성당을 새로 지어주겠다"고 한국 가톨릭에 제안했다. 하지만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등 한국 가톨릭에서 결사반대해서 무산되었다. 이후 1947년, 1973년, 2009년에 보수공사가 있었다.
그렇다고 20세기의 부끄러운 역사만 있는 장소는 아니어서, 개신교 신자의 독립운동이 이루어진 역사는 있다.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12월 22일에는 개신교 신자 이재명 의사가 가톨릭 교회가 주도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미사에 참석하고 빠져나오던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을 성당 언덕 아래의 길가에서 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력거꾼인 박원문이 이를 가로막았다가 칼에 찔려 그가 대신 죽고 실패했다. 이완용도 칼에 찔렸지만, 당시 최고 흉부외과 의학 기술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다. 이때 이완용이 죽었다면 역사가 묘하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민주화 운동
대표적인 것이 197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의 성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명동성당에서는 1976년 3.1 민주 구국선언이 발표됐고 특히 그 유명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1971년 성탄 자정미사 강론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조작을 폭로했던 1987년 5.18 7주기 추모미사가 거행됐고 6월 항쟁 당시에는 대학생 농성단의 은신처로 역할을 다했으며, 6월 항쟁 이후에는 항쟁 희생자들을 기리는 각종 미사들이 집전되었다.
교황의 방문
1984년 명동성당은 성당 건립 이래 가장 큰 손님을 맞는다. 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을 주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교황은 행사 당일인 5월 6일 대회장에 가기에 앞서 오전 8시 명동성당을 방문했다. 교황은 성당 오른편에 있는 명례방 집회 성화와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인 이벽 세례자 요한ㆍ이승훈 베드로ㆍ김범우 토마스 성화, 교황 방한 기념 부조를 축복했다. 이어 제대 앞에 마련된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한국 천주교회와 한민족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2014년 사목방문차 한국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일정의 마지막으로 명동성당을 방문하였다. 교황은 명동성당 내 꼬스트홀에서 한국 종교 지도자들과 만남을 가진 후 대성전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주례하면서 남북한의 용서와 화해를 촉구하고 전쟁이 아닌 평화를 기원했다.
건축
한국에 있는 고딕 양식 계열의 성당 중 가장 큰 규모를 가지고 있다. 본당의 높이는 23m, 신랑 높이 약 19m, 탑의 최고 높이는 46.7m, 성당의 전체 길이가 약 68m, 폭 28m다. 정확한 건축 양식은 전통적인 고딕 양식을 근대에 되살린 네오 고딕(고딕 리바이벌) 양식이다. 중림동 약현성당을 설계한 코스트(E. J. G. Coste) 신부가 후에 명동성당을 설계하였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재정지원을 받아 1892년 5월 8일 정초식을 가졌으나 도중 코스트가 사망하여 푸아넬(Victor Louis Poisnel, 1855~1925)이 이어받아 1898년에 완성하였다. 때문에 구조적, 양식적으로 약현성당과 유사한 편. 약현성당에 대한 이해 20여종의 붉은색, 회색의 구운 벽돌을 섞어 지었다.
평면은 고딕 양식의 가톨릭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랑(nave)이 긴 라틴 십자가형 평면을 가지고 있다. 다만 십자가의 양 날개 부분인 익랑(transcept)이 다소 짧아 평면이 직사각형에 가깝다. 입구를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중앙의 통로에서 천장이 높은 곳이 신랑(nave)이라고 하며, 좌우의 낮은 통로는 측랑(aisle)이라고 하는데, 측랑의 폭이 익랑에 맞먹는다.
실내 천장에 리브볼트(Ribbed vault)[13]를 사용한 점은 고딕양식에 충실한 점이지만, 전형적인 고딕 성당은 볼트가 석재로 되어 있는 반면, 명동성당의 볼트와 종탑 지붕은 하중을 줄이기 위해 목재로 되어 있다. 성당이 건설되다가 붕괴 사고가 발생했던 것의 영향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리브볼트가 기둥을 좌우로 밀어내는 힘을 감당하기 위한 외부 구조물인 공중부벽(flying buttress)은 건물 내부에 감추어져 있다. 측랑 상부 2층인 트리포리움에 올라가보면 공중부벽이 보인다.
그리고 건설 중의 붕괴 사고 때문에 원 설계안보다 기둥이 굵고 작은 창을 가지게 되어, 고딕보다는 그 이전의 육중한 양식인 로마네스크적인 분위기를 살짝 풍기기도 한다.
2014년 보수 때 성당 앞에 있던 예수상이 성당 서편의 교구청 사도회관으로 옮겨졌다. 이 예수상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유명한 조각가인 최종태 요셉이 제작했다. 최종태는 혜화동 성당의 성모 마리아상 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자로서 서울 길상사의 관세음보살상까지 제작한 독특한 이력으로 유명하다. 사적 제258호이기 때문에 실측 자료를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볼 수 있다.
역대 주임신부
- 마리장구스타브 블랑 (1882~1890)
- Doucet (1890~1892)
- 빅토르루이 푸아넬 (1892~1926)
- Marie Pierre Paul Villemot (1926~1942)
- 이기준 토마스 (1942~1950)
- 장금구 요한 크리소스토모 (1950~1957)
- 양기섭 베드로 (1957~1962)
- 이종순 라우렌시오 (1962~1963)
- 신인식 바오로 (1963~1964)
- 황민성 베드로 (1964~1965)
- 이계중 요한 (1965~1968)
- 이문근 요한 (1968~1971)
- 최석우 안드레아 (1971~1972)
- 김몽은 요한 (1972~1978)
- 경갑룡 요셉 (1978~1982)
- 김수창 야고보 (1982~1986)
- 김병도 프란치스코 (1986~1988)
- 정의채 바오로 (1988년~1988)
- 조순창 가시미로 (1988~1994)
- 장덕필 니콜라오 (1994~1999)
- 백남용 바오로 (1999~2003)
- 이성만 토마스 (2003~2004)
- 박신언 라파엘 (2004~2010)
- 여형구 미카엘 (2010~2013)
- 고찬근 루카 (2013~2018)
- 조학문 바오로 (2018~ )
결혼식장
명동성당은 천주교 신자인 부부들이 혼인성사를 하길 가장 선망하는 성당이어서 결혼식 수요가 엄청나게 많다. 당연히 이 수요를 모두 감당할 수 없어서 사전에 선별해야 하는데, 복권처럼 추첨해서 선별한다. 신앙이 독실한 신자를 선별하기엔 신앙심을 점수로 계산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헌금 내는 순서로 한다면 이건 말 그대로 성당을 돈 받고 빌려주는 꼴이어서 더더욱 불가능하기 때문. (예시-2020년도 혼인미사 추첨 공지) 물론 대부분은 거리 등의 이유로 소속 교구 내 혼인성사가 가능한 인근 성당으로 향한다.
대성전
고딕 양식의 웅장하고 성스러운 분위기와 상징성 덕분에 천주교 신자들의 혼인성사 장소로는 최고로서 각광받는 곳이다.
토요일, 공휴일에는 정오 12시와 오후 15시에, 금요일에는 오후 13시에 예식 집전이 가능하다.
혼인 비용 - 주교좌 명동대성당 : 기본 5,000,000원(사진 앨범 1,100,000원 포함) + 선택비용(폐백, 냉난방비, 동영상) + 주례감사예물(주례신부님께 직접 전달)
파밀리아 채플
세련되고 아담한 분위기가 장점이며, 비용은 대성전 혼인성사보다는 저렴하다.
토요일, 공휴일, 주일에는 11시, 13시, 16시에 예식 집전이 가능하다.
혼인 비용 - 파밀리아 채플 : 기본 2,500,000원(사진 앨범 1,100,000원 포함) + 선택비용(폐백, 냉난방비, 스크린, 동영상) + 주례감사예물(주례신부님께 직접 전달)
혼인 피로연
예식이 대성전인 경우 프란치스코홀(금요일)과 문화관 1층(토요일, 공휴일)을 파밀리아 채플인 경우 프란치스코홀을 이용한다.
미사
(※ 2022년 9월 1일부터 적용)
교통
도시철도
명동성당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철도역으로, 8번 출구와 가까이 있는 옛 계성여자고등학교 후문 쪽으로 와서 옆길을 이용하면 빠르게 갈 수 있다. 그 길로 가다보면 '명동성당 지름길' 이라며 간단한 안내 표시도 나온다. 고속·일반철도를 이용해 서울역과 (신)용산역에서 환승해 갈 수 있다.
고속버스로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센트럴시티 그리고 SRT를 이용해 수서역에서 승하차할 경우 한큐로 3호선을 이용해 을지로3가역 9·12번 출구로 나갈 수 있다. 고속터미널로 갈 때, 143번을 이용해 롯데영프라자 정류장에서 하차하는 대안경로가 있다.
버스
지도
참고자료
- 명동대성당 공식 홈페이지 - http://www.mdsd.or.kr/
- 〈명동성당〉, 《나무위키》
- 〈명동성당〉, 《위키백과》
- 〈서울 명동성당(─明洞聖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혜민 시민기자, 〈명동성당, 알고 보면 더 새롭다〉, 《내 손안에 서울》, 2021-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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