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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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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증기선 SS Ukkopekka

증기선(蒸氣船)은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증기력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를 말한다. 간략히 기선(氣船)이라고도 한다. 증기선은 선박명 앞에 선박 접두어 "SS"를 붙인다.

1780년대 이후에 많은 기술자들이 증기선에 도전했는데, 최초의 상업용 증기선을 개발한 사람은 로버트 풀턴이었다. 그가 개발한 노스리버호(클러몬트호)는 1807년 8월 11일에 뉴욕올바니왕복으로 운항했으며, 그것은 '증기선의 시대'를 개막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1820년이 되면 미국 동부의 거의 모든 하천에서 증기선이 운항되었고, 1838년에는 증기선으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꿈이 실현되었다. 증기선이 서양인에게 편리한 교통수단이었다면, 동양인에게는 식민침략에 의한 억압과 굴욕의 무기에 다름 아니었다.

증기선은 증기를 공급하는 보일러, 증기로 운동에너지를 얻는 엔진, 추진장치, 선체설계 등을 포함하는 복잡한 기술이다. 1780년대에 많은 기술자들은 증기선을 발명하면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증기선에 대한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곳은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던 미국이었다.

개요[편집]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선박을 발명하려는 시도는 1780년대부터 본격화했는데, 1807년 미국인 로버트 풀턴이 증기선을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처음 강물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큰 배로 만들어진 증기선은 곧 바다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1838년 두 척의 증기선이 대서양 횡단에 성공했고, 1845년에는 철제 선체를 가진 증기선이 출현했다.

조선 연안에 처음 나타난 이양선은 유럽식 대형 범선이었으나, 19세기 중반부터는 증기선, 또는 증기범선이 출몰했다. 1866년에는 대동강한강에도 미국과 프랑스의 증기선이 나타났다. 1871년 신미양요 때에는 미군이 조선군 포로들을 군함에 승선시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기선이라는 단어는 1876년 개항 이후부터 사용되었다. 그해 11월 일본 미쓰비시 기선회사가 매월 나가사키-쓰시마-부산을 잇는 정기항로를 개설했다. 1885년에는 서울 한강변 상인들이 대흥회사를 설립하고 미국 기선을 사들여 강운(江運)과 해운(海運)에 투입했다. 이듬해에는 정부 기관 전운국도 기선을 구입하여 조세곡 운송을 개시했다.

조세를 배로 운반하는 조운제도로 인해 포구와 나루가 잘 발달된 편이어서, 기선을 이용한 운수업은 개항 이후 가장 빨리 발전한 산업이었다. 외국의 신사상도 기선을 거쳐 도입되었다. 비행기 여행이 일반화하기 전까지 나라 밖으로 나가는 여행은 말 그대로 해외여행, 즉 기선으로 바다를 건너는 여행이었다. 한국인들이 분 단위 시간표에 익숙해진 것도 기선 덕이었다.

오늘날 증기선은 사라졌지만 다른 연료를 사용하는 동력선들이 전세계 바다를 누빈다. 기선은 육지 곳곳에 흩어진 채 나뉘어 있던 세계를 뒤섞어 하나로 만든 대표적인 물건이다.

역사[편집]

세계 최초의 상업용 증기선인 노스리버 호(클러몬트 호)를 복제한 모습(1909년)
풀턴의 노틸러스 잠수함 설계도(1800)

증기선은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스크루 프로펠러나 외륜을 회전시킴으로써 추진하는 배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증기선이라고 하면 석탄을 연료로 하는 고전적인 배를 가리키고, 증기터빈이나 원자력에 의한 증기기관을 가진 배는 증기선이라고 부를 수 없다.

증기선의 등장은, 그때까지 대형선박의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범선을 실용선으로서의 무대에서 최종적으로 표면상 구축하게 되지만, 실제로 증기선도 외륜선시대에서는 범선과 실용성에서 그 우열을 다투고 있었다. 실제 이 시기에, 증기기관을 갖춘 범선 (기범선, 汽帆船)이 많이 건조되었다.

증기선과 범선의 경쟁과는 별개로, 항구내의 협소한 수로에서의 거룻배나 인력거의 수송 등을 행하고 있던 히키후네(육지에서 줄로 끌고가는 배)는, 그때까지 사람의 힘 또는 을 이용한 바람의 힘으로 추진되었으나, 증기기관의 등장함에 따라 신속하게 소형증기선이 도입되어갔다

이윽고, 스크루 프로펠러의 등장에 의해, 증기선은 실용선으로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해 간다.

증기선 개발을 위한 4파전[편집]

미국에서 최초로 증기선을 만들어 운항한 사람은 존 피치(John Fitch, 1743~1798)였다. 그는 1788년에 성공적으로 증기선을 건조해 이듬해 델라웨이강에 뛰웠다. 피치의 증기선은 30명의 승객을 태우고 필라델피아에서 뉴저지 벌링턴까지 3,200km를 시속 11~13km로 운항했다. 피트는 배를 운항하기는 했지만 사업엔 실패, 결국엔 파산하고 말았다. 운임이 연료비용을 충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치가 고전할 때 제임스 럼지(James Rumsey), 존 스티븐스 2세(John Stevens II)도 증기선을 디자인하며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럼지와 스티븐스는 배를 만드는데 실패하고 피치와 특허분쟁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다.

미국에서 증기선 사업자들이 이전투구를 하고 있을 때 로버트 풀턴(Robert Fulton, 1765~1815)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풀턴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석세공인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하다가 한 동안 화가로 일했다. 그는 23세에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 영국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기계 발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풀턴은 영국 최초로 내륙 운하를 건설한 브리지워터 공작(Duke of Bridgewater)을 알게 되어 운하에 관해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1796년에 <운하 항해의 개선에 관한 논고>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풀턴의 책자에 큰 관심을 보인 곳은 프랑스였다. 프랑스 정부는 풀턴을 초청해 그의 운하 방식을 활용하려 했다. 풀턴은 1797년부터 파리에 머물면서 각종 기술적 문제에 대한 자문을 제공했으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알게 되었다.

당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과 전쟁을 벌이면서 신무기 개발에 주력하고 있었다. 풀턴은 잠수함이라고 명명한 배를 설명하는 각종 도식과 그림을 나폴레옹에게 내 놓았다. 그는 그 배가 물 밑으로 항해하면서 수면에 있는 배를 공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폴레옹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100% 신뢰하지 않았다. 어떻게 물 밑에서 불을 피워 동력을 만들며, 그런 배를 어찌 선원들이 조종할수 있다는 말인가. 나폴레옹은 풀턴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풀턴의 또다른 발명품에는 관심을 가졌다. 풀턴이 제시한 제2의 아이디어는 "추진력 없이 접촉 시에 폭발하는 부력 제로의 탄약"인데, 지금의 어뢰(魚雷)를 말하는 것이었다.

풀턴은 1800년 7월 29일 나폴레옹의 지원금으로 노틸러스(Nautilus)라는 잠수함 시제품을 제작했다. 노틸러스 호는 센 강에서 3시간 동안 잠수하는 데 성공했으나 속도가 너무 느려 군용으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증기선 시대 개막[편집]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하던 중에 풀턴은 미국 대사로 파리에 온 로버트 리빙스턴(Robert R. Livingston)의 눈에 띠었다. 리빙스턴은 미국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로 워싱턴 정가에 영향력이 있었고, 뉴욕주를 가로지르는 허드슨강에 운항독점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리빙스턴은 파리에서 풀턴을 붙잡아 계약부터 했다. 그 계약은 미국 허드슨강에서 운항할 증기선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풀턴은 리빙스턴의 지원으로 증기선에 대한 연구에 주력하고, 1803년에 보나파르트(Bonaparte) 호로 명명된 증기선을 제작했다. 그 배는 8마력의 증기기관을 장착하고 선체 길이는 20m에 달했다. 풀턴은 그 증기선을 센 강에 띄웠지만, 선체가 너무 약해서 금방 부서지고 말았다. 나폴레옹 밑에 있을 때 영국인이라면 치를 떤다고 말했던 풀턴은 1804년 충성심을 바꿔 영국으로 갔다. 그는 윌리엄 피트 총리의 주문을 받아 어뢰를 개발했다. 그의 어뢰는 1805년 트라팔가 해전(Battle of Trafalgar)에서 넬슨 제독의 승리를 안겨주었고, 나폴레옹에겐 재앙을 만들어주었다. 영국에 봉사하던 풀턴은 1806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프랑스에서 만났던 리빙스턴을 만났다. 리빙스턴의 허드슨강 운항 독점권을 놓고 뉴요커였던 스티븐스가 덤벼들었지만, 리빙스턴은 결국 풀턴에게 운항권을 주었다. 게다가 리빙스턴의 조카이자 대부호인 월터 리빙스턴의 딸 헤리어트(Harriet)와도 결혼했다.

1807년 8월 11일에는 풀턴은 노스리버(North River Steamboat)호를 제작했다. 배의 길이는 43m, 용적은 150톤였다. 이 배는 후에 클러몬트(Clermont)호로 바뀌었다. 노스리버 호는 허드슨 강을 따라 뉴욕과 올버니 사이 240km를 운항했다. 상류로 거슬러 가는데 32시간, 돌아서 내려오는데 30시간이 걸렸다. 당시에 범선으로 같은 거리를 항해하는 데 4일이 걸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노스리버 호는 약 3배의 빠른 속도로 운항한 것이다. 풀턴의 노스리버호는 바야흐로 '증기선의 시대'를 개막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서양을 횡단한 증기선[편집]

1810년에는 풀턴의 배 3척이 허드슨 강과 래러턴 강에서 운항되고 있었다. 그의 증기선은 기존의 범선을 대체하여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를 성공적으로 횡단했다. 당시에 풀턴은 선미와 선수를 똑같은 형태로 만듦으로써 선박이 회항(回航)을 위해 회전할 필요가 없도록 했다. 이어 1811년에는 풀턴의 배가 피츠버그에서 건조되어 미시시피 강에 투입됨으로써 미국의 증기선 운항은 동부 연안을 넘어 중부 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풀턴은 1812년에 세계 최초의 증기군함으로 평가되는 데몰로고스(Demologos)를 설계하기도 했다.

신생 미국에 교통 혁명[편집]

풀턴이 허드슨강에서 증기선 운항에 성공하면서 미국에선 증기선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풀턴과 리빙스턴은 허드슨 강에 여러 척의 증기선을 추가했고, 뉴저지 브리턴강(Raritan River), 뉴욕~캐나다 동부 뉴브런스윅(New Brunswick)을 운항하는 증기선을 띄웠다. 오대호에도 1806년 온테리어호에 증가선이 운항을 개시했고 운하가 열리면서 1929년 이리호와도 연결했다. 곧이어 미시시피강, 오하이오강에도 증기선이 운항되었다. 애팔라치아 산맥에 가로 막혀 개발이 지연되었던 미국 중부가 이때부터 개척되기 시작했다. 1817년에 애팔라치아 산맥 서쪽에는 17척의 증기선이 운항되었는데, 3년후에는 69척, 1855년에는 727척으로 늘어났다.

증기선은 미개척지가 많은 미국에서 교통 혁명을 일으켰다. 이전에는 바지선으로 운행되던 주요 수로들에 증기선이 들어가면서 사람과 물류 이동이 편리해졌다.

1824년 미국 법원은 증기선 운항에 대한 풀턴과 리빙스턴의 독점을 무효화하는 판결을 내리면서 누구나 시장에 참여할 길이 열렸다. 이로써 미국 사람들은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증기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미시시피강 운항비용이 곧 4분의1로 떨어졌다. 허드슨강 운항비용은 1814~1854년 사이에 90% 하락했다.

피츠버그에서 뉴올리언스까지 가는데 전에는 한달 이상 걸렸지만 증기선이 다니면서 2주가 채 걸리지 않았다. 내륙도시 피츠버그는 강을 통해 바다로 연결되면서 공업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외륜선[편집]

외륜의 아이디어는 로마시대부터 있어왔던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인력(人力)'을 이용한 추진방식으로는, '노'를 저어 배의 추진동력을 얻는 것이 당시로서는 가장 적합한 방식이었다.

초기의 증기선은, 배의 측면 또는 후면에 석탄을 연료로 하는 '레시프로케이팅(줄여서 레시프로) 기관'의 동력에 의하여 움직이는, '외륜' 또는 '외차'라고도 불리우는 커다란 추진기를 가진 외륜선, 외차선 (패들 휠러) 이었다. 좌우 배의 측면에 배치된 외륜은, 구동축의 설계와 제조가 간단한 대신에, 파도나 유빙 등으로 외륜이 파손되거나, 파고(波高)와 선체의 기울기에 따라서 좌우의 추진력이 일정하게 작용하지 않고, 또 보일러가 효율이 낮기때문에 소비되는 석탄을 대량으로 배에 실어야 하는 등의 문제가 있어, 원양항해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 후, 석탄공급지의 정비와 증기기관의 개량등에 의해 항속거리가 늘어나, 대양을 횡단할 수 있게 되었다.

​1829년에 프랑스의 엘리안 갤러웨이는, 패들이 항상 수직이 되도록 개량한 외륜을 고안하였다.

군함과 상선[편집]

상선(商船)은 빠르게 범선에서 외륜증기선(Paddle Steamer)으로 대체되어 갔으나, 배의 중앙부분을 증기기관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범선에 비해서 선창(배의 창고)은 작아지게 되었고, 증기기관 앞뒤 공간에 연료창고와 함께 선창이 배치되었다.

한편, 대형 군함에 증기기관이 채용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었다. 19세기 초엽에, 해전의 주력은 전열함과 프리깃이었다. 특히 프리깃은, 폭넓은 임무의 실행력과 쾌속력을 겸비하여,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각국에서 건조되었으나, 증기기관을 이용한 프리깃의 대대적인 운용은 늦어지고 있었다. 그 이유로, 배의 양 측면에 크고 두드러지게 노출되어 있는 외륜은, 적의 공격에 취약하여, 공격을 조금이라도 받으면 쉽게 손상되어 함선의 추진수단을 상실할 우려가 있었고, 또한 전열함, 프리깃을 포함한 당시 군함의 유력한 공격수단이었던 대포를 설치할 때, 배의 건현(Freeboard)에 대포의 포문을 설치할 공간이, 커다란 외륜에 의해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있었던 2건의 해전 사례에서 보면, 당시 증기선은 배의 양쪽에 붙어있는 외륜 중 한쪽이 고장나서 사용할 수 없어도, 속력을 줄이면서 큰일없이 자력항행이 가능하였으나, 실제로 증기선 프리깃(군함)이 각국 군대에 보급된 것은, 증기기관 그 자체의 성능향상과 스크루 프로펠러의 실용성이 일반적으로 확실히 인정되고나서부터였다.

그러나 아편전쟁, 그에 이은 애로호전쟁에서 증기선 군함이 백하강을 거슬러 올라간 일이나, 제3차 버마전쟁에서의 하천이나 근해 전투에서 증기선의 우위가 증명된 일 등으로, 각 국에서 병력수송선이나 하선(河船, 강에서 다니는 배), 소형 포함의 기선화(汽船化)가 함대의 주력함보다 앞서서 추진되었다.

대서양을 횡단한 증기선[편집]

증기선의 사용이 확대되면서 많은 기술자들은 증기선으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꿈을 가졌다. 그것은 1838년에 영국에서 만들어진 두 척의 증기선에 의해 실현되었다. 로버트 멘지 사(Robert Menzies & Sons)가 제작한 시리우스(Sirius) 호와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Isambard Kingdom Brunel)이 설계한 그레이트 웨스턴(Great Western) 호가 그것이다. 이어 1845년에는 브루넬이 만든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 호가 대서양을 횡단했는데, 그 배는 철로 만들어진 선체에 스크루 프로펠러를 장착하고 있었다.

스크루 프로펠러의 등장[편집]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에 걸쳐서, 다수의 스크루 프로펠러가 고안되었으나 실용적으로 사용되지는 못하였다.

​영국의 프랜시스 페티 스미스가 1836년 5월 31일에 스크루 프로펠러의 특허를 취득하고, 「프랜시스·P·스미스」 호 (6톤) 를 건조하여 2피치의 긴 스크루 프로펠러 실험을 시작하였다. 우연히 수중에서 프로펠러가 파손되고나서 배의 속도가 올라가는 것을 발견, 그 후, 이에 착안하여 1피치의 프로펠러로 변경하여 5.5노트까지 배의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많은 투자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스미스는 쉽프로펠러 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스크루선의 건조를 시작하였다. 스미스는 그 후, '래틀러호'의 스크루 프로펠러를 설계하였다.

같은 시기에, 스웨덴인 존 에릭슨은 스미스가 특허를 취득한지 6주 후에 특허를 취득하여, 다음해인 1837년에 배길이가 14m인 「프랜시스·B·오그던」 호를 건조하여 런던의 템즈강에서 100톤의 석탄거룻배 4척을 5노트의 속도로 끄는 모습을 선보였다.

다음해인 1838년에는 36톤의 「로버트·F·스톡턴」 호를 건조하였으나, 영국에서는 더 이상 진전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1839년에 돛을 달아 범선의 동력을 이용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스톡턴호는 프로펠러를 2개에서 1개로 하는 개조를 받은 후에, 델라웨어주의 예인선으로 사용되었다. 에릭슨 자신은 그 후, 미해군의 조선사업에 협력하였다.

​그 후, 서서히 스크루 프로펠러를 갖춘 배가 만들어졌으나, 아직까지는 범선이 주동력원이었고, 증기선이라고 해도 스크루 프로펠러가 아닌 외차(외륜)에 의해 동력을 얻어 배가 추진되는 것이 대부분이였다. 1850년의 전세계 선박 총 톤수 통계에서, 범선은 90%였는데 반하여, 증기선은 10퍼센트의 비율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래틀러 vs 알렉토[편집]

1845년 3월, 영국 해군은 스크루 프로펠러와 외륜의 성능을 비교하기 위하여, 스크루 프로펠러를 갖춘 867톤의 래틀러호와 800톤의 외륜증기선 군함 알렉토호를, 풍향이 바뀔때의 성능, 돛을 달고 2가지 동력원으로 항행했을때의 성능 등의 여러가지 조건을 가지고 배를 경주시켜서 성능을 비교하였다. 어느 성능비교에서나 모두 래틀러호가 승리하였고, 최종적으로 배들간의 줄다리기 실험을 해본 결과, 래틀러호가 2.8노트의 속도로 알렉토호를 예인해버리는 결과가 나오게 되어, 래틀러호의 스크루 프로펠러 동력이 외륜 동력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영국 해군에서는, 1809년에 건조된 74개의 포문을 가진 범선 전열함 '에이잭스호'가 1846년에 스크루 프로펠러로 추진되는 증기선 전열함으로 개조되었다. 프랑스 해군에서는 90개의 포문을 가진 증기선 전열함 '나폴레옹호'가 1850년에 완성되었고, 이에 뒤이어 영국 해군에서도 1852년에 최초로 91개의 포문을 가진 증기선 전열함인 '아가멤논호'가 취역하였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증기선 군함의 광범위한 건함(建艦)경쟁이 시작되었다. 양국이 1853년의 '크림 전쟁'에 참전하는 요인이 되었던 '시노프 해전', 그리고 과거의 '아편 전쟁' 등, 선박이 강이나 하천에서 항행할 때 낮은 수심으로 인한 극심한 기동력의 저항에 부딪쳤을 경우에, 흘수(배가 물에 잠기는 깊이)가 얕은 증기선 포함(砲艦)이 기동력 측면에서 범선보다 확실히 유리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제국주의의 도구가 된 증기선[편집]

증기선이 서양인에게 편리한 교통수단이었다면, 동양인에게는 억압과 굴욕의 무기였다. 1840년에 시작된 아편전쟁을 위해 영국은 네 척의 네메시스(Nemesis) 호를 보냈다. 네메시스 호의 포탄 몇 방에 청나라의 정크선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한 척의 네메시스 호가 15척의 정크선을 제압한 일도 있었다. 영국의 전투 병력이 신속하게 중국의 내륙지방에 침투할 수 있었던 것도 양쯔 강 대운하를 타고 운항한 증기선 덕분이었다.

1853년에는 미국의 페리 함대가 일본을 위협했다. 검게 칠해진 선체에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흑선(黑船)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에 놀란 일본인들은 미국의 개항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의 경우에도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를 통해 증기군함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당시에 흥선대원군의 지시로 세 척의 증기선에 대한 실험이 전개되었지만, 실제로 사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이 올챙이 시절을 모르는 개구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서양의 과학기술을 따라잡는 데 열을 올렸다. 그 결과 일본은 개항 10여 년 만에 증기선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1875년에 윤요 호를 강화도에 보내 무력시위를 벌였다. 일찍이 미국에 당한 방식 그대로 조선의 개항을 강요했던 것이다.

외륜증기선의 종언[편집]

19세기의 대부분, 그리고 20세기의 전반에 미시시피강에서 이뤄진 무역은, 전부 외륜증기선에 의한 것이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배는 극소수로, 대부분의 선박은 혹사와 노후화로 인한 보일러 폭발로, 화재가 일어나 소실되었다. 1900년의 전세계 선박 총 톤수 통계에서 범선은 40%였던데 반해, 증기선은 60%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증기터빈의 등장[편집]

19세기말, 찰스 앨저넌 파슨스에 의해 증기터빈이 개발되었다. 20세기 초엽까지는 '레시프로식'의 증기기관을 탑재한 대형선박이 건조되어왔으나, 제1차세계대전 후에는 점점 '터빈식'이 주류가 되었다.

증기터빈은 레시프로식 증기기관에 비해 진동·소음이 적고 열효율이 높다고 하는 특징이 있다. 레시프로식에서는 '3단팽창식'을 이용하였으나, 터빈식에서는 증기의 팽창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어서 레시프로식보다 훨씬 뛰어났다. 일반적인 터빈으로는 역회전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역회전용 터빈을 따로 갖추거나 '가변피치 스크루'로 후진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하였다.

증기보일러는 처음에, '연관식'이 주류였으나, 보일러의 고압화가 진행됨에 따라 '수관식'이 주류가 되었다. '수관식'은 물때(scale)의 부착을 방지하기 위해 공급하는 정수의 품질관리가 요구되었다. 터빈을 회전시킨 증기는 바닷물로 냉각되는 복수기(復水器)에 의해 다시 액체로 변환되어 증기보일러에서 순환사용되었다. 또 이 시기에, 연료도 석탄에서 중유(원유에서 휘발유, 등유, 경유 따위를 뽑아내고 남은 검은 갈색의 걸쭉한 찌꺼기 기름)로 전환되어 갔다.

현대의 증기선[편집]

선박 추진기관의 디젤화와 가스터빈화가 진행되어, 증기에 의해 추진되는 배의 종류는 비교적 소수로 한정되어 있다.

대형LNG유조선[편집]

LNG유조선의 등장 초기부터 수송화물인 LNG가 수송중에 자연스럽게 증발한 천연가스 (Boil Off Gas, BOG)를 증기터빈엔진의 연료로 사용해왔으나, 21세기 초엽인 현재, LNG의 가치가 높아졌기 때문에, LNG의 수송액량 감소를 막기위해,서 기술의 발전으로 BOG의 재액화가 가능하게 되어, 현재는 BOG 대신 다른 대형화물선과 같이 A중유나 C중유를 사용한 저속회전 2스트로크 디젤엔진을 채용하는 배가 많아지고 있다.

원자력 항공모함, 원자력 잠수함, 쇄빙선[편집]

원자력 항공모함에서는 원자로에서 만든 고열로 증기를 발생시켜 터빈을 돌린다. 원자력 발전과 비슷한 추진플랜트는 항속력을 반영구적으로 늘릴 수 있어서 장거리를 고속이동하는 군함에 적합하다. 원자력 잠수함에서는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더 적합하다.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수 척의 쇄빙선은 군함과 마찬가지로 원자력 플랜트를 갖추고 있다.

보존선[편집]

현재도 세계 각지의 보존단체나 애호가들에 의해 레시프로식의 증기선이 운항되고 있다. 새롭게 이들 증기선이 건조되는 사례도 있다. 일본에서는 2000년대 초반에 아오모리의 '미치노쿠 북방어선박물관'에서 『미치노쿠 로드아일랜드호』 가 운행되었다. 2016년 현재는 『아오이카제호(青い風号)』 가, '세이칸(青函)연락선 메모리얼쉽 핫코다마루(八甲田丸)' 등을 운영하는 특정비영리활동법인 "아오모리 미나토 클럽"에 의해 운행되고 있다. 그 외에 2000년대에 애호가에 의해 『PINOCCHIO호』, 『에이코마루(英光丸)』 가 건조되었다.

어트랙션[편집]

디즈니파크의 어트랙션으로서, 파크내에 닫힌 고리 모양의 「아메리카강」 을 주유하는 「증기선 마크 트웨인호」 가 운항되고 있다.

유명한 증기선[편집]

  • 시리우스호 (아일랜드, SS Sirius, 1837) - 건조단계부터 「그레이트 웨스턴」, 「브리티쉬 퀸」 를 포함한 증기선 총 3척에 의한 첫 태평양 횡단기록경주가 준비되었는데, 시리우스호가 여기서 멋지게 승리하여 1838년에는 처음으로 증기기관의 힘만을 이용하여 대서양횡단에 성공한 정기항로 증기선이 되었다. 대서양 횡단은 1838년 3월 28일 런던을 출발하여 (4월 4일 코크 기항) 4월 22일 (오후 10시 해밀턴요새 앞바다 정박) 뉴욕에 도착하여 성공하였다. 평균속도는 6.7노트였다. 석탄 450톤과 로진(rosin) 등 모든 연료가 다 떨어졌기 때문에 마지막 몇일동안은 선내의 목조가구류를 화로에 넣고 태워서 배의 동력으로 이용하였다. 그 후 1847년 1월 16일, 코크와 발리코튼 앞바다에서 좌초하여 침몰하였다. 8인승 구명보트에 탄 수십명 중 20명이 사망, 본선에 남아 다른 선박에 구조된 71명은 부상없이 생존하였다. 몇 안되는 생존자들의 소지품도 구명정에 다가온 발리코튼 인근 지역주민들에 의해 약탈되어 전부 없어져버렸다. (원래 연안항해용 외륜증기선, 총 톤수 703톤, 배길이 60.9m, 선폭 7.62m, 2개의 마스트, 320마력, 9노트)
  • 그레이트 웨스턴호 (영국, SS Great Western, 1838) - 1838년 4월 8일에 브리스톨을 출발하여, 시리우스호보다 몇시간 늦게 뉴욕에 도착하였다. (원양항해용 외륜증기선, 총 톤수 1,320톤)
  • 베가호 (스웨덴, SS Vega) - 1878년, 학자 노르덴셸드에 의해 사상 처음으로 시베리아 연안의 북동항해를 제패한 증기선이다. 1879년에 일본의 요코하마항에서 기항하여, 전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 터비니아호 (영국, Turbinia, 1897) - 찰스 앨저넌 파슨스에 의해 개발된 증기터빈기관을 탑재한 실험선이다. 당초, 해군에 구입을 제안하였으나, 해군 수뇌부가 레시프로식 증기기관에 대한 증기터빈의 우위성을 이해하지 못해서 제안을 거절당했다. 그래서 1897년 포츠머스에서 열린 빅토리아 여왕의 관함식에 갑작스럽게 참가하여 증기터빈의 실연을 선보이면서, 증기터빈의 우위성을 어필하였다.
  • 타이타닉호 (영국, RMS Titanic, 1912) - 1912년 4월 15일, 북대서양 항로에서 빙산에 충돌하여 침몰한 호화 여객선이다. 추진축 3축 중에서 양현의 2축을 고압증기에 의한 레시프로식 증기엔진으로 구동하였고, 이 증기엔진에서 배출되는 저압증기를 중앙축으로 연결시켜 증기터빈으로 구동하는 복식증기기관을 채용하고 있었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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