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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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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위치
상하이 위치
상하이시 행정구역
상하이시 지하철 노선도
상하이시 동방명주탑

상하이시(上海市, shàng hǎi shì)또는 상해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4개 직할시 중 하나이다. 상하이는 양쯔강 동쪽 하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황푸강도시를 관통하여 흐른다. 서북으로는 장쑤성, 서남쪽으로는 저장성과 접해 있다.[1]

개요[편집]

상하이시의 면적은 6,341㎢로 서울의 10배에 달하며 인구는 2021년 기준으로 2,489만명이며 행정구역은 단일 도시 기준 중국과 세계 전체에서 2위 규모이다.

상하이의 행정구역 체계는 황푸구(黄浦区), 쉬후이구(徐汇区), 창닝구(长宁区), 징안구(静安区), 푸퉈구(普陀区), 자베이구(闸北区), 훙커우구(虹口区), 양푸구(杨浦区), 민항구(闵行区), 바오산구(宝山区), 자딩구(嘉定区), 푸동신구(浦东新区), 진산구(金山区), 쑹장구(松江区), 칭푸구(青浦区). 펑셴구(奉贤区), 충밍구(崇明区) 총 16개의 자치구로 이루어져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핵심도시양쯔강 삼각주의 일부로서 태평양 서해안에 위치해 있다. 중국 4대 1선 도시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는 '北上广深', 즉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선전에 포함된다. 중국 수도 베이징이 '정치 핵심도시'이자 북방 문화의 중심지라면, 그에 대비되는 유일한 도시상하이는 중국의 '경제 핵심도시'이자 남방 문화의 중심지이다.

상하이시는 중국 본토에서 국내총생산이 가장 높은 도시이다. 인간 개발 지수에서 상하이는 중국 본토 행정 구역 중 베이징 다음으로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상하이는 세계적인 금융, 사업 및 경제, 연구, 교육, 과학 및 기술, 제조, 관광, 문화, 요리, 예술, 패션, 스포츠, 그리고 교통 중심지 중 한 곳이며, 상하이는 세계 1위의 컨테이너 물류량을 보유한 도시이기도 하다. 2019년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은 여객 수송에 따른 가장 분주한 공항 10위권 안에 들어갔으며, 상하이 훙차오 국제공항과 함께 상하이 대도시권과 연결된다.

상하이는 원래 조용한 어촌이자 시장이 형성되는 마을이었지만, 19세기 중국 내외의 무역 증가와 상하이의 유리한 입지 덕분에 중요도가 올라가게 되었다. 1840년 제1차 아편 전쟁 이후 조약항 5개 중 하나에 포함된 상하이는 유럽 열강에 의해 강제로 개항하였으며, 상하이 공공 조계와 상하이 프랑스 조계가 뒤이어 상하이에 설립되었다. 1930년대 상하이는 아시아의 주요 상업 거점이자 금융 거점으로 번창하였다. 중일 전쟁 때에는 상하이 전투의 주요 전장이었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본토를 점령하면서 상하이의 국제 무역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로 제한되었고, 상하이의 국제적 위상도 추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 사이에 현대적인 무역이 시작되었고, 1978년 개혁·개방 정책 이전까지 사회주의 국가들의 도시 중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1990년대 덩샤오핑이 도입한 경제 개혁으로 금융 회수와 외국인 투자를 통해 푸둥 신구를 비롯한 상하이의 대대적인 재개발이 이루어졌다. 상하이는 이 때부터 국제 금융 및 무역의 중심지로 재부상하였다. 현재 상하이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증권거래소 중 하나인 상하이 증권거래소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첫 자유 무역지구인 상하이 자유 무역지대가 있다. 2020년 GaWC는 상하이를 세계 1급 도시인 Alpha+로 규정하였으며, 국제금융센터지수에서는 뉴욕과 런던 다음으로 경쟁력 있고 가장 큰 금융센터를 가진 도시로 평가했다. 상하이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지하철 노선을 보유하고 있으며, 거주하는 억만장자의 수가 세계에서 5번째로 많고, 세계에서 마천루가 5번째로 많으며, 도시 내에 포춘 글로벌 500에 속하는 기업이 세계에서 5번째로 많고, 과학 연구 보고 역시 세계에서 5번째로 많다. 상하이에는 푸단 대학, 상하이 자오퉁 대학, 퉁지 대학, 화둥 사범대학, 상하이 대학 등 순위 높은 대학이 다수 있다.

상하이는 중화인민공화국 경제의 "지표"라고 자주 묘사된다. 경제와 더불어 아르 데코 및 시쿠멘과 같은 여러 독창적인 건축 기법 덕택에 상하이는 동방명주탑, 상하이 성황묘, 예원, 2010 엑스포 중국 국가관, 와이탄 일대의 건축물과 같은 뮤지엄과 역사적 건축물, 루자쭈이 마천루로도 명성을 얻고 있다. 상하이는 이 외에도 독특한 언어와 달콤한 요리로도 잘 알려져 있다. 국제 도시로서, 상하이는 BRICS 국가들이 설립한 국제금융기관인 신개발은행이 있고, 베이징 다음으로 75개의 외국 공관이 있으며, 상하이 패션 위크, 중국 그랑프리, 차이나조이와 같이 매년 수많은 중국 국내외의 행사를 개최한다. 상하이가 관광 소득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세계에서 1위이며, 5성급 호텔이 세계에서 7번째로 많고, 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타워인 상하이 타워가 있는 도시이다. 2018년 상하이는 세계 최초로 수입을 주제로 한 국가 수준의 엑스포인 중국국제수입박람회를 개최하였다. 2019년에는 유네스코 글로벌 학습도시 네트워크에 참여했다.[2][3]

자연환경[편집]

상하이는 중국의 동해안 양쯔강 하구에 위치한 해안 도시로 북쪽으로는 장강, 남쪽으로는 항저우만, 동쪽으로는 동중국해와 접해있다. 도시의 면적은 약 6,340㎢으로 남북으로 최대 120km, 동서로 최대 100km의 길이를 보인다. 상하이는 장강 삼각주에 위치해 도시의 서남부의 낮은 몇몇 구릉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평탄한 것이 특징으로 평균 고도는 약 4m 정도이고 상하이에서 가장 높은 다진산 의 높이도 103m에 불과하다.

도시에는 여러 개의 과 사주도 포함되는데 면적 1,200㎢가 넘어 일본오키나와섬과 비슷한 크기의 충밍섬(Chongming island)은 중국에서 세 번째로 큰 이며 당나라 초기에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밖에도 창싱섬과 헝사섬, 다진산섬 등이 있다. 상하이 시내는 전국시대 춘선왕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 하천 황푸강에 의해 양분되는데 강은 서쪽으로 디안산(Dianshan) 호수로 연결된다.

특기할 점은 도시의 서부에 위치한 칭푸, 쑹장, 진산구는 약 6,000년 전까지, 자딩과 펑셴을 기준으로 한 동쪽 지역은 4,000년 전까지 바다였던 곳이라는 점과 간척사업과 장강을 따라 흘러나오는 본토의 퇴적물로 인해 서서히 면적이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상하이의 가장 쾌적한 계절인 봄은 3월부터 5월로 따뜻한 기온과 간헐적인 강우가 특징이다. 상하이의 여름은 6월부터 8월까지 이어지며 평균 최고 기온은 약 32℃이지만, 약 열흘 정도는 최고 35℃를 넘어선다. 이 시기에 뇌우와 태풍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9월부터 11월까지 지속되는 가을은 일반적으로 일평균 15~25℃ 사이 온화한 기온과 쾌적한 습도를 보여 맑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 겨울의 평균 온도는 약 5℃로 영하의 추위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으로 간혹 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도 한다. 상하이는 온난습윤기후(Cfa) 지역에 속하며 덥고 습한 여름, 시원하고 건조한 겨울, 비교적 온화한 봄과 가을 등 뚜렷한 사계절이 나타난다.

역사[편집]

고대[편집]

춘추시대에는 오나라의 동쪽지역에 속했으며, 전국시대에는 초나라에 속했다. 일찍이 초나라 춘신군의 봉토였으며, 그 흔적은 현재 상해를 관통하는 황포강의 옛 명칭인 춘신강(春申江)과 상해에 대한 약칭 중 하나인 신(申)에 남아 있다. 그리고, 삼국 시대 오나라의 항구 도시였으며, 오나라 황제 손권의 형인 손책이 회계 전투에서 이겨 이 곳을 차지하였다. 손권은 이 곳의 아름다운 바다 경치를 지나칠 수가 없어, 자신의 별장을 만들어 구경하였다고 하는데 이 별장의 위치가 와이탄 주변에 있다. 서기 4, 5세기 진나라 때 송강(松江)(지금의 소주하ㆍ蘇州河)과 임해 일대의 주민들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았고, 대나무로 “호(扈)”라고 부르는 낚시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고, 또 당시 장강의 지류가 바다로 이어지는 곳을 “독(瀆)”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송강 하류 일대(현재 소주하와 황포강이 만나는 지대)를 “호독(扈瀆)”이라고 불렀다. 이때, “호(扈)”를 “호(滬)”라고 부르게 되었다( 상해는 오송강(吳松江) 하류에 위치해 “상해포(上海浦)”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당나라 중엽에는 화정현(華亭縣)의 일부였고, 송나라 말에 상해진(上海鎭)이 형성되었으며, 1292년 상하이현(上海縣)이 되었다. 명나라가 흥성하던 1553년에 왜구에 대항하기 위해 성을 쌓았고, 남경지구 쑹장 부 관할이 되었다. 송강부 관할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큰 면방의 중심지였다. 청대에는 명의 제도를 답습하여 장강 이남의 송강부에 귀속시키고, 상해 세관을 설립했다.

근대[편집]

청나라 시대[편집]

아편전쟁이 끝난 1842년에 중국영국 사이에 체결된 난징조약에 따라 상하이는 1843년 중국의 5개 대외 무역항 중 하나로써 개항되었고, 영국미국, 프랑스는 계속해서 상하이에 거류지를 형성했다.

1842년 8월에는 아편전쟁에 패한 중국은 굴욕적이고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을 체결하였고, 1843년 10월에 후먼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인의 주거지와 임대조건에 대하여 합의하여 상하이 시내에 거주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게 되었다. 1843년 11월 14일 첫 번째 영국 영사인 조지 밸푸어가 상하이에 도착하면서 11월 17일에 정식으로 상하이의 개항을 선포하였다. 이후 100년 동안 상하이에 조계지가 존재하게 되었다.[20]

1854년 태평 천국전쟁 중에 자치행정기구를 설립하면서 공식적으로 청나라 정부의 행정과 사법관할권 밖의 독립된 조계지가 되었다. 그 후에, 상해는 2개의 상하이 조계지와 중국지방정부가 분할 관리하게 되었는데 지금의 상하이 황푸구, 징안구, 훙커우구, 양푸구는 상해 공동 조계였고, 창닝구는 상하이 공동 조계 밖에 구역이었다. 또 루완구와 쉬후이구는 프랑스의 조계지였다.

자베이구와 난스구는 중국이 관리하던 지역이었으나 조계 때문에 연결할 수 없는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뉘었다. 개항 후 상하이는 극동에서 가장 번창한 항구로써 경제와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고 아시아의 유일한 국제도시로 발전하였다. 상하이는 조계 때문에 전화가 미치지 않았고, 독립적인 위치에서 충분한 국제관계를 향유할 수 있었고, 이것이 근대 상하이의 번영을 가져왔다.

중화민국 시대[편집]

1912년 중화민국 성립 전후에는 청나라의 구세력이 아직 철저히 제거되지 않았고, 새로운 세력조차 미숙한 상태였다. 군벌이 난립해 중앙에서 지방까지 군인이 정권을 잡았고, 덕분에 정부와 사회는 혼란한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그 시기에도 상하이의 조계는 평화로웠고, 경제와 인구 등 각 방면에서 오히려 빠른 발전을 보였다. 1912년부터 1936년까지를 상하이 조계지가 번영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중화민국 초년에 조계 외에 자베이와 난스 지역은 장쑤성에 포함되었다. 1927년 중화민국 정부는 조계지 이외의 지역을 상하이 특별시를 세우고, 중화민국과 행정원을 직속 관할로 귀속시켰다. 동시에 장쑤성의 상하이현(上海縣)과 보산현(寶山縣)의 17개 도시를 편입했다. 1930년 7월 상하이시로 개칭했다.

20세기 초, 상하이에는 중국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사건이 계속 발생한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 대회가 상하이에서 개최되었으며, 이것으로 인해 중국공산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어 1922년 7월과 1925년 1월 중국 2대와 4대 대표대회가 개최된다. 1925년 5월 30일, 일본계 방적공장의 공장주가 파업노동자를 총살했고, 이에 상하이 학생과 시민들은 상하이에서 가장 번화한 상업가인 난징루(南京路)에 모여서 항의를 했다. 이에 대한 영국경찰의 발포로 오삼십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전국적인 반영(反英)운동을 야기했다. 1927년 4월 12일 상하이 자베이에서 4·12 사건이 발생했다. 국민혁명군이 노동자 규찰대에 대해 무장해제를 강행하여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졌고, 중국공산당은 분열되었다. 그 후에도 중국공산당(1921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비밀리에 성립)의 중앙기관은 공동 조계 중립구역인 윈난로에 숨어 있다가 1933년 강서 해방구가 안정된 후에 그곳으로 옮겨왔다.

1932년 1월 28일 일본이 중국동북에서 일으킨 만주사변 후에, 상하이에서 일본 승려가 중국 노동자에게 구타당한 것을 구실로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상하이 자베이 구에서 중국과 일본 양국의 격렬한 군사 충돌이 한 달 남짓 계속되었고, 국민정부가 잠시 뤄양으로 옮겨가기까지 했다. 1937년 8월 13일, 일본 제국군은 상하이를 다시 침공하여 상하이를 수비하던 국민혁명군과 전투를 치렀다. 상하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큰 대가를 치렀지만 끝내 일본군에 패하고, 일본군이 무력으로 상하이 조계 외의 지역을 점령한다. 이 기간에 상하이 공동 조계의 북쪽 절반, 즉 지금의 훙커우 구와 양푸 구는 일본군의 방어지역과 일본 세력의 범위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에 일본은 영국과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로 상하이 조계를 공격했고, 상하이는 일본에 의해 점령당했다. 후에 일본은 조계를 그를 돕던 왕징웨이 정권에 반환했고, 미국과 영국도 조계지를 포기했다. 1942년부터 조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100년 간 지속되던 조계시대는 끝이 났다.

1945년 상하이는 중화민국이 탈환하여 관할하게 되었고 1949년 5월까지 상하이는 국민정부가 통치하였다. 그 후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국부군과 중국공산당의 인민해방군 사이에 대규모 내전이 발생한다. 1949년 5월 27일, 인민해방군이 국부군을 패배시킨 후 상하이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그 기간에 국민정부와 중국국민당, 외국기관, 그와 관련된 많은 인원과 재산이 상하이를 떠났다.

현대[편집]

1949년, 상하이는 직할시가 되었고, 후에 중국공업의 중심이 되었다. 1930년대에 중국작가연맹의 주요 활동지였던 상하이는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사인방의 장춘차오와 왕훙원 등의 주요한 활동 기지이었으며, 많은 중요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1980년대 중국의 개혁 개방 실시 이후에 상하이는 중국 대륙의 경제 중심지로써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또한 남방 지역, 특히 경제 특구 건설로 인해 새로운 도전을 받기도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하이는 다시 경제와 금융, 무역에 있어서 중요한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1993년, 푸둥(중국어 간체자: 浦東)의 개방으로 시의 발전은 가속화되었다. 현재 연간 일인당 평균 GDP가 6%이상의 성장을 유지하고 있고, 상하이는 국제적인 경제, 금융, 무역, 항운의 중심이 되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푸동과 푸시를 연결하는 도로의 건축도 상하이의 발전진행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황푸강과 장강 양안의 공동 발전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1971년에는 쏭푸대교(松浦大橋)의 건설로 다리가 없던 황푸강 역사를 다시 썼다. 1991년 12월 1일에는 난푸대교(南浦大橋)를 개통했다. 황푸강에는 이미 6개의 다리가 건설되었다. 양푸대교 (1993), 수푸대교 (1996년), 루푸대교는 2002년 완공된, 세계에서 가장 긴 아치 교량 중의 하나이다.

동시에 1970년 9월에는 다푸루(打浦路)터널이 건설되었고, 1989년 10월 24일에 옌안(延安)동로 웨장(越江)터널이 개통되었으며, 2003년 9월 29일에 다롄루(大連路)터널이 개통되었다. 터널의 개통으로 시내 금융무역지구에 큰 변화가 생겼다. 1994년 11월, 동방명주탑이 완공되었다. 1999년 3월 18일, 진마오 빌딩이 영업을 시작했다.

1999년 8월에는 상하이 국제회의센터가 문을 열었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거행 전에 중국에서 가장 높은 상하이 세계금융센터가 건설되었다. 상하이는 푸동 개방 후에 많은 국제회의를 주관해왔고, 국제적인 영향력도 증가했다. 동시에 중국대륙의 경제와 사회도 빠른 발전을 보이고 있다. 2001년 10월 21일 상하이에서 제9회 APEC 지도자 비공식회의가 열렸고, 2006년 6월 15일에는 상하이 협력 성원국의 원수 이사회 회의가 상하이에서 개최되었다. 2010년에 상하이는 2010 상하이 엑스포를 개최했고, 그 외에 매년 다양한 주제의 크고 작은 전시회가 상하이에서 개최된다. 이런 사업은 이미 상하이의 중요한 산업 중 하나가 되었다.

1949년 상하이의 면적은 636㎢였다. 1958년, 장쑤성의 상하이(上海), 바오산(宝山), 자딩(嘉定), 쑹장(松江), 난후이(南匯), 칭푸(靑浦), 펑셴(奉賢), 충밍(崇明), 진산(金山), 촨샤(川沙) 10개현이 상하이에 편입되면서 상하이시 직할구의 범위가 5910㎢로 확대되었고, 2003년 말에 이르러 상하이 면적은 6340.5㎢가 되었다.

경제[편집]

1949년 이전, 상하이에는 많은 외국 은행과 회사가 있었다. 상하이는 당시 중국의 경제무역 중심이었다. 상하이는 중앙은행, 중국은행, 교통은행, 중국농업은행, 사대정부은행 뿐만 아니라 가장 많은 국가자본과 더불어 관료 자본 금융기관과 그 밖에 또 외국 화교 금융기구가 모여들고 있었다. 외탁부근에 각국의 힘 있는 은행들이 모여들어 영국 HSBC, 독일 덕화은행, 일본 횡빈정금은행, 러시아 화아도승은행, 프랑스 동방회리, 미국 시티은행, 벨기에 화비은행 등은 “동방화니가”를 구성했다. 여전히 많은 개인 자본 경영의 은행, 전장(개인이 운영했던 개인 금융기관)과 신탁회사(이하 약칭 사영행장공사)를 보유하고 있다. 1927년부터 1937년에 이르기까지 “황금시기”의 발전을 경험했다. 항일전쟁 발발 전, 상하이의 사영행장공사는 이미 105개에 달했다. 그러나 항일전쟁을 겪고 해방전쟁시기 1949년 5월 상하이 해방 시, 상하이사영금융업의 전체자금력은 실제로는 이미 대폭 약화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119개의 사영은행, 80개의 전장과 5개의 신탁공사가 있었다. 하지만 1952년 말, 상해사영금융기구의 수가 60여 개까지 급락하였다. 1956년 초, 정부는 회사공영정책을 실행하였고, 끝내 모두 통일된 회사공영 은행연합 총관리처로 합병되었다.

1949년 이후, 상하이의 자본가 일부분은 모두 이미 홍콩, 대만으로 빠져나가거나 해외의 다른 지만으로 빠져나갔다. 또 다른 일부분은 상하이에 남아 계속 경영되었다. 마지막으로 1956년 초, 모든 회사가 공동으로 경영되었다.

상하이는 중국 대륙에서 경제가 가장 발달된 도시 중 하나이다. 2004년에는 1인당 GDP가 6661달러였으며 10년 연속 연평균 경제성장율 8%를 초과했다. 3차 산업은 상하이 경제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는 금융업과 부동산업, 보험업 그리고 운수업 등을 포함한다. 푸둥 신구에 위치한 루자쭈이(陸家嘴)(금융무역구)는 상하이의 신흥 금융 중심이다. 중국 인민은행 총본부는 2005년 8월 상하이에 계열회사와 사무소를 설립했다.

상하이 공업발달은 국민정부시기와 계획경제 시기에 상하이의 공업 발전 수준이 이미 전국의 선두에 섰다. 개혁개방 초기, 중앙 정책 원인으로 말미암아, 중국 동남 지역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상하이의 공업은 한 차례 변연(가장자리)화 위기에 직면하였지만, 90년 중반 이래, 푸동 신해방구의 개발에 따라, 아울러 재정은 지불비중을 감소하는 등 많은 방면의 원인을 바꾸었다. 상하이의 공업은 또 다시 생존의 기회를 진작했다. 상하이 공업은 전국 총생산의 10분 1을 차지하고 있다. 주요 산업으로는 경공업과 방직산업을 아울러 중공업, 야금, 석유화학, 기계, 전자공업을 위주로 그 밖에 자동차, 항공, 우주항공 등의 공업이 있다.

교통[편집]

대중교통[편집]

상하이의 택시는 넘쳐나고 시장의 경쟁은 보통수준의 거주자들을 위해 택시 요금을 알맞은 가격으로 내리도록 의도했다.

1990년대 이전 자전거는 상하이에서 가장 보기 쉬운 교통수단이었지만 시정부가 많은 도시의 주요도로에 자전거를 금지하면서 혼잡이 완화되었다. 하지만 많은 도로는 이미 자전거 이동도로를 가지고 있고 교차로는 안전한 도로주행을 제공케 하는 교통 협력가들에 의해 검토되고 있다. 더욱이 중국의 대부분의 검토자들은 자전거주행에 찬성하는 사람들이고 그것들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 또 시 정부는 향후 몇 년 만에 180km에 달하는 자전거 주행도로를 추가하겠다고 약속했다.

수입이 높아짐에 따라 최근 상하이의 개인 자동차 소유주는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 자동차의 수는 제한되어있지만 사용가능한 자동차 번호판은 경매를 통해 구입할 수 있다.

철도[편집]

자기부상열차[편집]

상하이 당국과 상해 고속철도 개발 회사의 협력으로 독일 트란스 라피드는 2002년 푸동(浦東)의 상하이 롱양 지하철역에서 푸동 국제공항을 잇는 고속철도가 구상되었고 2003년에 시행되었다. 30km의 여행이 최대 431km/h의 속도로 최대 7분 21초만에 도착한다.

철도[편집]

상하이에 있는 두 개의 철도교차점은 난징을 지나는 징후 철도와 상하이-항저우(杭州) 철도이다. 상하이에는 주요 철도역이 두 군데 있는데 각각 상하이 철도역과 상하이 철도남역이다. 고속철도는 2007년에 건설예정인 항주를 지나고 북경으로 가는 초고속 철도 또한 작업 중이다.

지하철[편집]

상하이 지하철은 1호선, 2호선, 3호선, 4호선, 5호선, 6호선, 8호선, 9호선, 10호선, 11호선, 12호선, 13호선, 16호선이 개통되어 운행 중이다.

고속도로[편집]

베이징과 상하이 주변지역의 6개 이상의 고속도로가 도시를 연결하고 상하이에는 도시 중심과 18개 도시의 고속도로에 6개의 통행료 무임인 고속도로가 있다. 상하이 도시중심의 충밍다오(崇明縣)을 잇는 고속도로를 건설한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다. 상하이의 터널과 다리는 푸시와 푸동을 잇는 데 사용된다.

공항[편집]

상하이는 두 개의 공항을 갖는데 상하이 훙차오 국제공항(上海虹橋國際機場)과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上海浦東國際機場)이다.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은 베이징 수도 국제공항과 홍콩 국제공항을 이어 세 번째로 중국에서 가장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공항이다. 2006년 베이징의 1260만명에 비해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은 1715만명의 국제고객이 왕래해 베이징 수도 국제공항보다 더 많은 여행객들이 이용했다.

항만[편집]

2005년 12월 새롭게 출항된 상하이의 양산심수항(洋山深水港, 양산 선수이강)은 세계에서 가장 큰 항구이다. 총 32.5km에 달하는 둥하이 대교(東海大橋)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세계적으로 긴 다리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상하이의 양산섬으로 가는 대륙을 잇는다.

문화[편집]

중국의 핵심 항구이자 경제수도로 불리는 상하이의 문화와 관광 인프라는 매우 풍부한 편이다. 상하이의 문화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대상이 바로 민간 주택의 상징 석고문(石库门)이다. 석고문은 베이징의 사합원(四合院)에 비견되는 상하이 고유의 건축 형태로, 외국 조계지들이 형성되기 시작하던 시기인 1870년대 초에 민간 주택 형태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상하이의 눈부신 발전이 서구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졌듯 상하이의 근대 주거 형태도 동서양의 문화가 서로 어우러지며 발전되었다.

석고문은 19세기 말 이후 20세기 내내 여러 변화를 거쳤지만, 주로 논의되는 일반적 형태는 다음과 같다. 중국 양쯔강 남부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여러 개의 방으로 둘러싸인 작은 안뜰이 있고, 그 뒤에는 거실이, 그 뒤에는 또 다른 안뜰과 방들이 있는 전통적인 중국 주택구조에 2~3층의 고층 건물과 외벽 및 입구 문에는 서양식의 화려한 문양을 새겨 넣고, 또 대개 고층에는 유럽식 타운하우스 형태의 돌출 발코니를 포함하고 있는 구조이다. 석고문 건축은 20세기 초 상하이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특히 구도심에 많이 건축되었다. 과거 많은 석고문 건물이 철거되거나 황폐화되었지만 개혁개방 이후 상하이 시정부의 노력에 따라 중요한 문화 유산으로 보존 및 복원되고 있다. 석고문은 건축학적 중요성 외에도 상하이의 사회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석고문에는 과거 주로 일반 노동자 가족이 거주했고, 이웃들이 안뜰에 모여 안부를 묻고 또 아이들이 건물과 건물이 연결되는 좁은 골목길에서 함께 뛰어노는 공동체 생활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상하이에는 항구 도시이자 국제도시로서 풍부한 문화 흐름이 만들어져 왔다.

중국은 음식 문화로 지역이 구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상하이의 음식 문화 또한 매우 특징적이다.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샤오롱빠우(小籠包)의 기원은 현재 상하이의 자딩구 난샹진의 음식점인 고의원(古猗園) 점주가 1871년 당시 유행하던 돼지고기를 넣은 만두를 개량해 "남상대육만두(南翔大肉饅頭)"를 판매한 것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상하이의 대표적인 가을 음식으로 상하이 털게가 있다. 그리고 상하이는 서양 국가들의 조계지로서 발전했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요리 전문점들이 오래전부터 입점했고, 그 과정에서 오늘날 상하이의 많은 레스토랑에서는 중국과 세계 각국의 풍미가 혼합된 퓨전 요리들이 발전해왔다. 이 때문에 상하이의 요리들은 내륙이나 중국 북부의 '중국 풍미'에서 많이 탈피하여 외국인들도 쉽게 적응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화해왔다.

상하이는 서양의 예술과 문화가 다른 중국 도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빨리 전해지고 깊이 각인된 곳이기 때문에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루쉰(저장성 샤오싱시 출생)이 1927년부터 1936년 사망할 때까지 약 10년 동안 활동한 도시로서, 그의 문학세계로서는 과거 계몽적 활동이 전개된 전기와 달리 주로 사회비판과 문학비평을 전개하며 마르크스주의 문예론과 국민당의 반공독재를 비판하는 운동을 전개한 후기 활동이 전개된 도시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상하이에서의 루쉰은 당시 중국의 수많은 젊은 청년과 사회운동가들로부터 추앙받았다.

교육[편집]

중국에서도 가장 높은 소비수준을 보여주는 지역이라서 그런지 대한민국강남3구의 8학군 처럼 상하이는 부모들의 교육열이 대단히 높기로 유명하고, 학력수준도 중국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다. 2021년 사교육 금지 조치 이후로도 비밀과외 형식으로 사교육을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할 정도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5곳의 명문대, 칭베이푸쟈오저(清北复交浙) 중 상하이교통대학과 푸단대학이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 국제학교들 역시 중국 본토 전체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국제학교들로 알려져있으며, 세계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우승한 학생들도 많이 배출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이 상하이 학생들의 수학실력에 대한민국 학생들이 압도당해 기만 죽고 돌아왔다는 인터뷰도 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물론 학생들을 과도하게 혹사시킨다, 과도한 학업스트레스로 정신병에 시달리거나 자살이 성행한다, 교육비에 필요 이상으로 돈을 많이 썼는데 자녀들이 생각만큼 좋은 직장에 취직하지 못하거나 백수신세라서 오히려 집이 더욱 가난해지게 된다, 과도한 교육비에 부담을 느껴서 결혼과 육아에 부담을 느껴서 인구감소가 진행된다는 식으로 각종 부작용들은 지적되고있지만 그럼에도 좋은 명문대에 가야 좋은 직장에 취직하거나 출세에 도움이 된다는 관념이 위낙에 확고하여서 교육열은 여전하다.

교육열이 비싼 부동산값과 결합한 결과로 상하이는 중국에서도 출산율이 낮은 지역으로 손꼽힌다. 2022년 기준으로 중국의 출산율이 1.08명인데 상하이는 0.7명이다. 참고로 대한민국 서울의 출산율은 0.6이다. 하지만 그만큼 상하이로 유입을 원하는 인구가 많아 오히려 초거대도시화는 가속화 되가는 중인데, 이는 서울공화국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 서울 수도권과 굉장히 비슷한 현실이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상하이시〉, 《위키백과》
  2. 상하이시〉, 《나무위키》
  3. 상하이〉,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동아시아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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