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왕촨푸

위키원
(王传福에서 넘어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왕촨푸(王传福)
비야디(比亚迪)

왕촨푸(王传福, wáng chuán fú, 왕전복, 1966년 2월 ~ )는 중국 신에너지 자동차배터리 회사인 비야디(BYD)의 창업자이자 회장이다. 왕촨푸 회장은 배터리 업계에서 7년 만에 세계 '배터리왕'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었으며 자동차 문외한이었던 그는 그로부터 채 4년도 되지 않아 중국 최대 전기자동차 기업 총수 자리를 꿰차며 찬란한 성공 신화를 세웠다. 2019년 기준 재산 가치 43억 달러를 보유함으로써 포브스(Forbes) 글로벌 억만부호 리스트에서 452위를 차지했으며, 2019 후룬 100인 부자 리스트에서는 96위를 차지했다. 2020년 2월 26일 340억 위안 재부 순위 2020년 시마오션강 국제센터, 후룬 글로벌 부자 리스트에서는 493위를 차지했다.[1]

타고 월렌트 대형 가로 배너.jpg
이 그림에 대한 정보
[타고] 1개월 단위로 전기차가 필요할 때! 타고 월렌트 서비스

생애[편집]

왕촨푸는 1966년 2월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우후시(蕪湖市) 우웨이현(無為縣)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목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남 6녀의 많은 형제자매 중 2남이다. 13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어머니도 갑자기 사망하셨다. 이와 함께 가세도 급격히 기울어 극심한 가난의 늪에 빠졌다. 결국 왕촨푸는 성적이 좋았지만 빨리 취업해 돈을 벌기 위해 명문고 대신 일반고를 선택했다. 또한 가족의 불행으로 왕촨푸의 형 왕촨팡(王传方)은 18세에 학업 중단하고 일하여 돈을 벌어 왕촨푸를 공부하게 하였으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비와 생활비를 담당하였다. 이와 함께 왕촨팡의 아내, 즉 왕촨푸의 형수인 장쥐슈(張菊秀) 또한 남편을 도와 왕촨푸의 공부와 생활을 뒷바라지하는 데 물심양면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왕촨푸는 1987년 중난대학(中南大学) 야금물리화학과를 졸업하고 그 해에 베이징 유색금속연구원에 들어가 1990년 석사를 마치고 연구원에 남아 일하였으며 2년 후 부주임으로 승급하였다. 1993년 연구원은 선전에 배터리유한회사를 설립하고 왕촨푸를 부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왕촨푸는 배터리를 엄청난 투자 기회로 보고 1995년에 사직하고 부동산 사업을 하던 사촌 형 뤼샹양(吕向阳)으로부터 거금 250만 위안을 빌려 비야디를 창업하고 본격적인 배터리 사업에 뛰어들었다.[2][3][4]

사업[편집]

배터리[편집]

1983년 왕촨푸는 현 중난대학의 전신인 창사에 소재한 중난채광야금대학 야금물리화학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이후 1987년 베이징 유색금속 연구총원에 입학한 왕촨푸는 본격적으로 배터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왕촨푸는 그저 효율이 좋은 배터리를 만들고 싶어 하는 기술이 좋은 연구 인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대학원 졸업 후에도 연구실에서 근무하여 배터리 전극 이용 효율과 배터리 용량의 기술적 한계를 극복했다. 또한 지도교수와 친구들이 왕촨푸의 유학을 적극적으로 권하기도 했지만 왕촨푸는 배터리 연구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유학의 꿈을 접었다. 결국 1993년 왕촨푸는 선전 배터리 회사의 책임자로 발탁되어 배터리 사업에 대한 실전 경험을 쌓았다. 이 기회로 왕촨푸는 배터리 분야에 숨어 있는 무궁무진한 기회를 발견했다. 이후 왕촨푸는 일본 기업이 포기한 니켈 카드뮴 배터리 제조에서 틈새 시장을 포착했다. 다만 그가 몸담은 연구소는 그의 바람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다. 결국 왕촨푸는 29세 때인 1995년 안정적인 직장을 뒤로하고 창업자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마침내 왕촨푸는 부동산사업을 하던 사촌 형 뤼상양으로부터 거금 250만 위안을 빌려 비야디를 창업해 본격적이 배터리 사업에 뛰어들었다.[3]

배터리 사업의 진화

왕촨푸가 설립한 비야디는 심천 국경 근처에서 휴대폰과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배터리 제조 회사로 첫발을 디뎠다. 비야디 창업 초기, 비야디는 선전시의 낡은 차고에서 직원 20명과 함께 시작했다. 인력 부족으로 인해 왕촨푸는 매일 새벽 1~2시가 되어서야 일과를 끝낼 수 있었다. 퇴근도 잊은 채 잠깐 의자에서 눈을 붙인 뒤 다시 일에 매달리는 날도 많았다 심지어 자신의 딸이 태어났을 때도 며칠 만에 귀가해 새 가족의 탄생을 축하할 정도였다. 당시 배터리 업계는 일본이 장악했고 중국 기업은 조립 정도밖에 하지 못했지만, 왕촨푸는 자신이 가진 기술력을 이용해 충전용 배터리 핵심부품 생산을 시작했다. 이렇게 일에만 몰두한 결과 하루에 니켈 카드뮴 배터리 4,000개를 생산할 수 있는 라인을 구축했다. 그러다 일본이 용량도 적고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니켈 카드뮴 전지 생산을 중단하자 왕촨푸는 이를 기회로 여겼다. 일본이 손을 뗀 니켈 카드뮴 전지로 사업을 넓혀 대규모 생산 시설을 세운 것이다. 이러한 비야디 배터리의 생산원가는 일본보다 40%나 낮았고 성능도 더 좋았다. 당시 중국의 많은 기업은 무조건적인 현대화를 추구하며 거금을 들여 해외의 선진 생산라인을 도입했다. 하지만 왕촨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체 연구개발 제품만을 고집했다. 더불어 자동화 생산에 의존하기보다는 수작업 방식을 채택하는 동시에 품질 향상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이 과정을 통해 수천만 위안이 들어야 하는 설비를 100만 위안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 1997년 비야디는 이미 연 매출 1억 위안에 달하는 중기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왕촨푸는 이 성공에 힘입어 리튬 배터리 생산에 대규모로 투자해 2000년에는 모토로라(motorola)에 리튬 배터리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창립 이후 3년간 매년 100% 성장률을 달성한 결과였다. 특히 니켈 카드뮴 배터리의 경우 3년 만에 전 세계 시장 점유율 40%를 접수했다. 이러한 성공은 왕촨푸가 당시 중국 내 휴대전화 사용자들이 급증한다는 점을 파악하고 배터리 분야가 향후 엄청나게 성장할 것으로 확신한 결과이다. 왕촨푸는 이렇게 배터리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 이후 배터리 수요가 폭증할 것이라는 그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이후 비야디는 시장 점유율 2위까지 치고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왕촨푸는 2002년 비야디를 홍콩 증시에까지 상장하게 되었다.[5]

자동차[편집]

왕촨푸는 비야디가 설립되고 7년 뒤 돌연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왕촨푸는 2003년 국영기업인 시안친촨(西安秦川) 자동차의 지분 77%를 매입해 자동차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하지만 자동차 사업에 뛰어든 것은 큰 모험이었다. 왕촨푸는 자동차 산업에 대한 비전문가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경험과 기술이 부족했다. 그래서 자동차 사업은 투자자와 주주 대부분이 반대했다. 이러한 여론은 증시에도 반영되었다. 비야디가 친촨자동차를 인수한 뒤 회사 주가는 무려 21%나 급락했다. 하지만 왕촨푸는 뜻을 꺾지 않았다. 자동차 사업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왕촨푸는 부족한 기술과 시설을 자체적으로 키우고 구축하는 작업을 해나갔다. 또한 사내 기술자들과 함께 유명 자동차 브랜드를 해체해 자체적으로 기술을 쌓아 나갔다. 더불어 특허침해 소지를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틈새 기술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비야디는 다른 브랜드를 모방한 자동차 기업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은 소비자의 선택을 얻어 사업은 점차 성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비야디는 전기자동차를 다른 회사의 절반 가격에 판매한다는 특별한 원칙을 세웠다. 다른 자동차와 성능은 비슷하지만, 가격은 절반 정도의 제품을 시장에 출시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비야디는 인지도를 넓혀갔다. 특히 전기차의 3대 요소로 꼽히는 배터리와 모터, 전자제어 장치를 모두 자체 조달하는 기업은 비야디가 유일했기 때문에 이를 통해 비야디는 원가 절감을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전기차 한 대에 최대 10만 위안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하고 차량 가격의 10%에 달하는 세금을 깎아주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책을 펼쳤다. 결국 2005년에는 지분율을 99%까지 끌어올리며 미래 신에너지 자동차 사업을 위한 포석을 깔았다. 자동차에 대한 왕촨푸의 자신감은 대단했다. 이후 2014년은 중국 신에너지 자동차 분야가 급진적으로 성장한 시기로 비야디 또한 비약적인 발전을 거둘 수 있었다. 2014년 한해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누계 판매량이 1만 4,700대에 달하며 달마다 평균 1,100대 정도를 팔았다. 이는 비야디가 중국 신에너지 자동차 판매량 1위에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비야디는 2016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전기자동차를 판매한 기업으로 되었고 대한민국에도 2015년 삼성전자㈜(Samsung)와 합작으로 지사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진출 채비를 하고 있다. 전기버스 생산으로는 세계적인 품질을 자랑하며 미국뉴욕영국런던 등의 선진국 대도시의 시내버스로 쓰이고 있다.[5]

경영 철학[편집]

왕촨푸의 성공은 그의 경영 방식과 관계가 깊다. 만약 왕촨푸가 전통의 화석연료 자동차 제조만을 고집했다면 비야디의 성장은 힘들었을 것이다. 왕촨푸는 자신의 길을 가는 기업가이기도 했지만, 시장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사업 전환을 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렇기에 세간에서는 비야디의 성장을 로켓에 비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왕촨푸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다. 그는 장기적으로 세밀하게 전력과 전술을 기획하는 기업인이다. 큰 그림을 그리되 그 과정으로 가는 선과 면의 디테일을 자신이 가진 강점으로 채워 나간다. 기업의 역량과 시장의 동향을 동시에 저울질하여 치고 나갈 때 속도를 내는 그의 경영방식에서 성공의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왕촨푸의 도전정신을 비야디 성장의 근간이 되었다.[2]

글로벌 입지[편집]

워렌 버핏의 투자
왕촨푸 회장과 워렌 버핏

비야디가 세계에서 주목을 받았던 것은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렌 버핏(Warren Edward Buffett)이 투자를 단행하면서부터이다. 워렌 버핏은 글로벌 금융 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중국의 전기자동차 업체인 비야디의 지분 10%를 사들였다. 워렌 버핏은 2008년 9월 비야디 지분 9.9%인 2억 2,500만 주를 주당 8홍콩 달러에 매입하고 2020년까지 주가는 22배 가까이 상승했다. 화제를 몰고 다니는 워렌 버핏의 투자였기에 비야디의 주가는 상승했고 단숨에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는 기업이 되었다. 하지만 비야디가 몇 해 적자를 기록하고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며 매해 적자를 기록하자 잘못된 투자이자 실수라는 혹평을 들었다. 그런데도 워렌 버핏은 비야디의 경영에는 일절 관여를 하지 않았다. 이후 중국의 전기자동차 시장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워렌 버핏의 선택을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비야디는 워렌 버핏이 유일하게 보유한 중국 기업이며 매수한 지 12년이 지나도록 주식을 한 주도 팔지 않았다. 이러한 워렌 버핏에게 비야디를 추천한 사람은 워렌 버핏의 단짝이자 오랜 사업 파트너인 찰리 멍거(Munger) 부회장이다. 멍거는 워렌 버핏에게 왕촨푸 회장이 발명가 에디슨과 경영의 귀재 잭 웰치를 합쳐 놓은 인물이라고 소개했다고 하며 망설이던 워렌 버핏에게 멍거는 계속해서 비야디를 추천했고 결국 버핏은 비야디 주식의 25%를 매수하기 했다.[2][6]

대한민국 진출

왕촨푸 회장은 2018년 5월 25일 대한민국 언론 중 대한민국 진출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왕촨푸 회장은 제주도 우도에 전기버스 20대를 투입했는데 운영 상황이 매우 양호하다며 비야디의 목표는 제주도 전체를 전기차가 운행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전 세계 모든 도시에 전기자동차를 보급하겠다는 전력을 구체화하려는 계획의 일환 중 하나로 제주도를 전기차 거점 지역으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이다. 이와 함께 특히 삼성전자㈜와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왕촨푸는 삼성전자㈜와 전기차 관련 전장사업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도 나타냈다. 더불어 왕촨푸는 삼성전자㈜는 비야디의 대단히 중요한 투자자 중 한 곳이라고 말했다.[7]

각주[편집]

  1. 王传福〉, 《百度百科》
  2. 2.0 2.1 2.2 조상래, 〈비야디 왕촨푸는 어떻게 중국 최대 부자가 되었나.〉, 《플래텀》, 2017-04-17
  3. 3.0 3.1 이지연 기자, 〈(중국경제리더) 배터리에 감전된 전기차 왕 '왕촨푸' 비야디회장〉, 《뉴스핌》, 2016-08-05
  4. 전순기 통신원, 〈(China 석세스 스토리①) 배터리 대왕에서 머스크 꿈꾸는 비야디의 '왕촨푸'〉, 《뉴스퀘스트》, 2019-08-30
  5. 5.0 5.1 허미담 기자, 〈'배터리 대왕'에서 '전기차 제국' 꿈꾸는 中 비야디 (히든業스토리)〉, 《아시아경제》, 2021-02-10
  6. 김재현, 〈테슬라 대신 中 전기차 BYD 투자한 워런 버핏…주가 22배 껑충〉, 《머니투데이》, 2020-11-04
  7. 전병득, 김대기, 김세웅, 조성호, 김유신 기자, 〈中 BYD 왕촨푸 회장 "제주를 전기차 거점으로"〉, 《매일경제》, 2018-05-27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왕촨푸 문서는 자동차 인물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