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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

위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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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大陵園)
대릉원지구
황남대총
천마총
천마도
미추왕릉

대릉원(大陵園)은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황남동에 있는 무덤이다. 2011년 7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12호로 통합 재지정되었다.

개요[편집]

대릉원은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9 (황남동)에 위치한 옛 신라의 왕, 왕비, 귀족층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 밀집지역. 사적 제512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미추 이사금을 대릉(大陵)에 장사지냈다.'는 글귀에서 따 와 대릉원(大陵苑)이라고 지었다. 대릉원이라고 하면 좁게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황남동 고분군 쪽을, 넓게는 바깥쪽의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 등을 포함한다. 일단 규모가 큼지막한 데다가 경주시 시가지에 있어 접근하기 좋고, 천마총처럼 신라왕릉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고분도 있어[4]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은 거의 필수로 찾는 곳이다. 입장료는 2020년 성인 기준 3천 원.

경주역사유적지구의 5개 지구 중 대릉원 지구가 있다. 단, 여기에는 오릉처럼 대릉원에서 약간 거리가 있는 주변 지역이 좀 더 포함되었다.

원래는 지금의 담장둘러쳐진 구역의 대릉원은 황남리 고분군(40호)으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2011년에 문화재청에서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노서리 고분군(사적 39호), 황오리 고분군(사적 41호), 인왕리 고분군(사적 42호)을 통합하여 경주 대릉원 일원으로 사적 제512호로 재지정하였다.

역사[편집]

경주분지 한가운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신라 당시에도 수도 서라벌 시가지 가운데에 있는 국가 묘역공원 같은 모습이었으리라 추정한다. 대릉원과 바로 옆에 붙은 쪽샘지구에서 발굴조사해보니, 신라 당시의 도시 기반시설과 건물 터가 대릉원 주변지역에는 빼곡하게 차 있음에도 대릉원 일대에선 거의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시가지로 가득찬 대도시 가운데지만 대릉원부터는 건물을 못 짓게 개발제한구역으로 관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 멸망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관리가 부족해지자 조선~일제강점기에는 대릉원 무덤과 무덤 사이까지 사람들의 주거지가 생겼지만 현대에 들어 정비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대릉원의 무덤들은 문자로 표기된 기록이나 비석류가 일절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편년을 알기는 힘들다. 하지만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 때문에 도굴이 어려워서 많은 유물들이 별 손실 없이 온전하게 남을 수 있었다. 이 유물들을 측정하여 대략 4-6세기에 걸쳐 조성했다고 추정한다. 6세기 이후에는 왕릉이나 기타 무덤들을 대릉원처럼 서라벌의 중심부가 아닌 산이나 도시 외곽 쪽에 만들었기 때문에, 대릉원은 아무리 늦어도 7세기 초반 이후로는 더 확장되지 않았던 듯하다.

고분군[편집]

노동동 고분군[편집]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에 있는 고분군이다. 이들 중 봉황대는 밑둘레 230m, 직경 82m, 높이 22m로 대한민국에서는 큰 규모의 무덤이다. 봉황대 남쪽에 1924년 발굴 조사한 금령총 터와 식리총 터가 있는데, 내부 구조는 모두 돌무지 덧널무덤이다.

고분 목록
  • 125호분: 봉황대(鳳凰臺)
  • 126호분: 식리총(飾履塚)
  • 127호분: 금령총(金鈴塚)
  • 142호분: 옥포총(玉圃塚)

노서동 고분군[편집]

이 고분군에는 넓은 평지에 크고 작은 고분이 10여 기가 있다. 노동리의 봉황대 고분과 더불어 그 규모에 있고, 쌍벽을 이루는 제130호 고분을 비롯해, 1921년에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 1926년에 일본 방문 길에 스웨덴의 황태자이며 고고학자인 구스타프 6세 아돌프가 들러 발굴을 조사 참관한, 서봉총이 있다. 1946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 그릇이 발견되어, 신라 고분 연대 추정에 도움을 준 호우총과 은평총, 쌍상총, 마총 등도 있다. 쌍상총에서 토기 조각, 마총에서 말뼈와 안장 조각이 출토하였다.

고분 목록
  • 128호분: 금관총(金冠塚)
  • 129호분: 서봉총(瑞鳳塚)
  • 131호분: 우총(牛塚)
  • 133호분: 마총(馬塚)
  • 137호분: 쌍상총(雙床塚)
  • 139호분: 은령총(銀鈴塚)
  • 140호분: 호우총(壺杅塚)

황남동 고분군[편집]

경주시내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안에 있다. 일제 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 151~155호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30기의 무덤이다. 큰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이고 주변에는 봉문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 대릉원 안에는 전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이 있다.

1973년에 발굴조사된 천마총은 지름 47m, 높이 12.7m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 당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천마총'이라 이름하여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된 황남대총은 남북길이 120m, 동서길이 80m, 높이 23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남자의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나왔다. 북쪽 무덤에서도 금관과 부인대라는 글씨가 있는 은팔찌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 북쪽 무덤의 주인은 여자로, 부부의 무덤을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분 목록
  • 98호분: 황남대총
  • 100호분: 검총
  • 106호분: 경주 미추왕릉
  • 155호분: 천마총
  • 계림로 고분군

황오동 고분군[편집]

이 곳 황오동에는 크고 작은 신라시대 무덤들이 밀집되어 있다. 오랜 세월 관리가 되지 않아 봉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고분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10여 기에 이른다.

이 무덤들은 인접 지역에서 발굴된 무덤 구조로 미루어 볼 때, 주로 4~5세기경의 왕족 또는 귀족을 묻은 돌무지 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추정된다.

고분 목록
  • 월성로 고분군
  • 쪽샘지구

인왕동 고분군[편집]

이 고분군은 월성(月城)의 북쪽 지대에 분포하는 황오동 고분군(皇吾洞 古墳群)에서 동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경주 중심부 평야지대에 남아 있는 고분군 가운데는 가장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13기(基)(경주 고분의 일련 번호 19∼27, 147∼150호)의 봉토분(封土墳)이 확인되었고, 새로 10기의 고분이 더 분포하고 있는 것이 조사되었다. 고분들 가운데 19호분, 20호분, 149호분과 나중에 확인된 고분 가운데 1기(156호분)가 발굴조사되었다. 그리고 1977년에는 19호분과 20호분의 북편에 화물주차장이 건립됨에 따라 그 일대가 발굴조사되어 삼한시대(三韓時代)의 목곽묘(木槨墓), 옹관묘(甕棺墓)를 비롯하여 삼국시대의 수혈식 석곽묘(竪穴式 石槨墓),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등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곳에는 황오동 고분군과 같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봉토가 남아 있는 삼국시대의 고분들은 대부분 적석목곽분으로 출토유물이나 유구의 크기 등으로 보아 신라 귀족들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인왕동 19호분

19호분의 조사에서는 모두 12기의 묘곽이 확인되었는데 이 가운데 1기(A곽)는 단일원분(單一圓墳)으로 조성되었으나 나머지 11기의 묘곽은 외견상 하나의 봉토 안에 축조된 다곽식(多槨式)의 봉분(封墳)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묘곽의 크기는 큰 것이 길이 4.5m, 너비 2m 정도였다. 20호분은 봉토의 크기가 동서 지름 18m, 남북 지름 16m, 높이 4.2m로 단일원분이며 내부에는 길이 5m, 너비 1.8m인 하나의 목곽이 들어 있는 단곽식(單槨式)이었다. 149호분은 단곽식으로 묘곽의 크기가 길이 3.95m, 너비 1.45m 정도였다. 이들에서 출토된 유물은 금제 이식(金製 耳飾), 경식(頸飾), 은제 과대(銀製 銙帶) 등의 장신구와 은장 환두대도(銀粧 環頭大刀) 등의 무기류, 등자(鐙子), 행엽(杏葉) 등의 마구류(馬具類), 그리고 토기류가 있다.

화물주차장 부지에서 조사된 고분들은 적석목곽묘 9기, 옹관묘(甕棺墓) 6기, 수혈식 석곽묘(竪穴式 石槨墓) 10기와 목곽묘로 추정되는 묘곽(墓槨) 2기 등이었다. 이 가운데에는 대형의 적석목곽분 3기(A군 1호, B군 1호, C군 1호)도 포함되었는데 이 중 2기(B군 1호, C군 1호)가 각각 일제 강점기때의 21호분과 147호분으로 추정된다. 이 대형의 적석목곽분들에서는 금동관(金銅冠), 금제 이식(金製 耳飾), 곡옥 부 경식(曲玉 附 頸飾), 은제 과대, 은장 환두대도 등의 화려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현재 봉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인왕동 새터마을(구 인교동사무소 서편)에 22호ㆍ23호ㆍ24호가 있으며, 첨성대 북편에 27호가 있다.

관람 포인트[편집]

12만 6,500㎡의 넓은 땅에 23기의 신라시대 고분이 모여 있는 대릉원을 중심으로 그 일대에 고분유적이 산재해 있다.

대릉원 내부만 꼼꼼히 둘러보아도 제법 시간이 소요된다.

주목해서 보아야 할 고분은 제13대 미추왕릉과 거대한 표형분(쌍분)이 눈길을 사로잡는 황남대총, 고분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천마총이 있다.

봄날 벚꽃놀이 명소로도 유명한 미추왕릉에는 댓잎군사 설화가 전한다.

신라 초기, 이서국에서 신라를 침입했을 때 머리에 댓잎(대나무잎)을 꽂은 군사들이 몰려와 그들을 물리쳤는데 군사들에게 꽂혀 있던 댓잎이 미추왕의 무덤 앞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 사람들은 그 후 미추왕릉을 별칭으로 '죽장릉'이라 불렀다.

황남대총은 두 개의 고분이 쌍봉낙타의 등처럼 남북으로 이어져 있는데, 경주에서 가장 큰 고분이다.

1970년대 발굴조사 당시 5만 7천여 점에 달하는 유물이 나왔다. 북쪽 무덤에서는 금관을 비롯한 '부인대'라는 여자 허리띠와 목걸이, 팔찌 등의 장신구가 나왔고, 남쪽 무덤에서는 남자의 뼈와 금동관과 무기 위주의 유물이 발견되어 남녀의 무덤, 나아가 부부의 무덤이라 추정한다.

대릉원을 대표하는 또 다른 고분, 천마총이 황남대총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옥황상제가 하늘에서 타고 다닌다는 말이 지상에 내려온 듯 상서로워 보이면서도 경쾌한 천마의 그림. 말다래에 그려져 있던 '천마도'가 바로 이 무덤에서 나왔다. 그렇게 제155호 고분은 천마총이란 이름을 가졌고, 고분 내부를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덤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고분 사이에 목련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모습이 그림 같은 포토존도 놓치치 말아야 할 대릉원의 관람 포인트다.

  • 황남대총. 남북 120m, 동서 80m, 높이 23m의 거대한 쌍무덤이다. 남쪽 무덤이 남자, 북쪽 무덤이 여자의 무덤으로, 부부의 무덤을 붙여서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남쪽 무덤이 먼저 만들어 진 것으로 밝혀졌다. 남쪽 무덤에는 유골의 일부가 남아 있었는데, 60세 정도의 남자로 밝혀졌고, 덧널에 20세 전후의 여자유골 일부가 발견되어 순장된 여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자는 목걸이, 허리띠, 고리자루 칼을 착용하고 있었고, 덧널에 무기류, 안장 등 마구류, 은관, 금제 관장식 등이 묻혀 있었다. 북쪽 무덤은 남쪽 무덤의 봉분을 일부 파내고, 잇달아 만들었다. 순장은 없고, 금관, 목걸이, 허리띠, 귀걸이 등 신라 옛 무덤들 중 가장 많은 황금 장신구가 발굴되었다.
  • 천마총. 천마총은 지름 47m, 밑둘레 157m, 높이 12.7m이다. 황남대총을 발굴하기로 하였으나 큰 무덤을 발굴한 경험이 없었으므로 시험적으로 옆에 있던 작은 무덤을 1973년에 발굴했는데 기대밖으로 금관과 순금제 장신구 8,766점, 무기류 1,234점과 마구류 504점, 그릇류 226점, 기타 796점 등 11,500여 점의 수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특히 천마(하늘 말)그림이 그려진 말다래가 발견되었다. 신라시대의 그림은 천마총을 발굴하기 전까지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천마도는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천마총의 금관은 신라의 금관들 중에서 금판이 가장 두꺼운 금관이다. 천마총은 내부를 공개하고 있는데, 금관과 천마그림의 모사품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돌쌓기 무덤의 자른 면을 볼 수 있다. 신라의 옛 무덤들 중 상당수가 도굴당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돌쌓기 무덤이었기 때문이다. 사진 촬영 금지이다.
  • 천마도. 가로 75cm, 세로 53cm이다. 천마(하늘 말)은 고구려의 익마도에 나오는 날개 달린 말이나 페가수스(Pegasus)처럼 날개가 달린 것이 아니라, 구름을 타고 나는 말이다.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겹치고, 사선으로 각 14줄을 누비고 가장자리에는 가죽을 대어 만든 판에 그려져 있다. 이 판은 말다래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공예품에 그려진 말 그림이므로 전문 화가가 그린 것이 아니라 공예가가 그린 것이라 추정된다. 따라서 고구려의 날개 달린 말 그림들보다 작품성이 떨어진다고 보고 있다. 진품 천마도는 국립 경주 박물관에 있다. 국보 207호이다.
  • 미추왕릉. 지름 56.7m, 높이 12.4m이다. 다른 무덤들과는 달리 담장이 있다. 미추왕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후손으로, 신라 최초의 경주 김씨 집안 출신의 왕이다. 추측하건대, 그런 사유로 후손들이 담장을 두른 것 같다. 남쪽에 미추왕의 위패를 모신 숭혜전이 있다.
미추왕릉의 문이 세 개의 문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문을 삼문이라고 한다. 가운데 문을 신문(神門, 신이 드나드는 문), 양쪽 문을 협문(夾門)이라고 한다. 궁궐이나 관청, 향교, 서원 등에 있는 문이다. 능이나 사당 앞의 삼문의 경우 가운데 신문은 신이 드나드는 문으로 제사를 지낼 때를 제외하고는 열지 않는다. 사람들은 좌, 우의 협문을 통해 다니는 것이 예법이다. 과거에는 동협문은 유림이, 서협문은 묘지기가 출입하는 문이었다고도 한다. 요즘은 오른쪽 통행이니까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고, 왼쪽 문으로 나온다.

관람안내[편집]

  • 관람시간 : 09:00-22:00(매표마감 21:30)
  • 휴무일 : 연중무휴
  • 관람료 : 성인 3,000원 / 군인·청소년 2,000원 / 어린이 1,000원
  • 주차 : 대릉원 공영 주차장(계림로 9, 유료), 노동공영주차장(태종로 767, 유료), 쪽샘 임시주차장(원화로 181번길 진입, 무료)
  • 경주 사적지 입장권 온라인 발권 시스템 : http://gjpass.kr/

교통안내[편집]

  • 버스 터미널, 경주역에서 대릉원 후문까지 걸어 간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대릉원 후문까지 700m, 경주역에서 대릉원 후문까지 1km 정도 이다.
  • 10번, 11번 버스 : 월성동 사무소(주민센터) 버스 정류장에 내린다. 내려서 조금 걸어야 한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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