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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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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

초가집(草家, Grass-Roofed House)은 볏짚·밀짚·갈대 등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이은, 자연친화적인 이다. 단열이 잘 되기 때문에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하지만 여름철에는 벌레가 생기기 쉽고 화재의 위험이 많다. 또한 썩기 쉬워 한두 해마다 바꿔주어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 초가는 선사 시대 집이 생겼을 때부터 짓기 시작해서 20세기 중반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서민 주택이다.[1]

개요[편집]

볏짚, 밀짚, 갈대 등으로 지붕을 엮어 만든 집. 선사시대에 본격적인 집의 형태가 생겨날 때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주로 서민들이 짓고 살았던 주택 형태이다.

조선의 가옥중 70~80%를 차지할 정도로 대중적이던 집으로 양반, 평민 가리지 않고 살던 곳이다.

한자 표기가 '초가'(草家)이므로 '초가집'은 잘못된 표현처럼 보일 수 있으나, '집'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의미상 중복되는 말을 더하여 사용한 것이다.[2]

초가집의 구조[편집]

초가집의 구조

구조는 모임지붕 형식으로서 도리에서 치마 끝까지 서까래를 건너지르고 이것을 골조로 여기에다 잡목이나 대나무 발을 엮어서 새끼로 묶고 그 위에 흙을 물에 개어 얹고 고른다.

갈대나 새를 엮어 인 지붕을 새 나리 지붕이라고 하며, 비교적 수명도 길고 깨끗하나 주로 농촌에서는 볏짚을 사용하였다.

지붕을 볏짚을 엮어서 만든 이엉을 밑에서부터 이는데 처음에는 뿌리 쪽이 밑으로 가게끔 돌리고 그 위에 이삭 쪽이 밑으로 가게 차례로 이며 용마루에는 볏짚을 틀어 지네처럼 엮어 만든 용마름을 덮고 그 위를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새끼로 얽어맨다.

초가집의 벽은 얼핏 보기에 흙만으로 되어 있는 것 같지만, 벽 안에는 격자형으로 짜 넣은 벽체 틀이 숨어 있습니다. 벽체 기둥과 기둥사이에 뼈대를 만들고 안과 밖에서 흙을 발라 흙벽을 만듭니다. 흙에는 점성이 있는 황토 흙과 볏 집을 썰어서 섞어 더 쉽게 달라붙게 만들었다.

그 종류별로 살펴보면.여기에 사용하는 흙은 점도가 높은 흙(차진 훍)을 사용하며, 여기에 볏짚을 잘게 (4~5센티 정도) 썰어 혼합하여 사용한다.

흙벽돌을 만들어 잘 말린 다음, 이 흙벽돌을 쌓아서 벽을 만들기도 하고, 흙으로 "토담"을 쳐서 벽을 만들기도 한다. 나무 기둥이 있는 경우에는 기둥과 기둥사이에 버팀대(지지대)를 가로나 세로로 연결 시킨 후, 이곳에도 작은 나무 가지나 수수깡을 엮어 놓은 후, 이곳에도 앞뒤에 흙을 붙여 두툼하게 입혀 놓는다.

이상과 같은 "초가집"의 지붕과 벽의 구조로 보면, 지붕과 벽을 통한 외부 온도의 흐름은 완전히 차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운 외부 날씨에 노출되어 있다가 방으로 들어가면, 다른 집보다 더욱 따뜻하게 느껴지며, 더운 경우에도 동일한 반대의 효과와 느낌이 든다.[3]

특징[편집]

상나라 궁전

초가삼간이라 하여 방마다 3~4평으로, 원룸과 비슷하다. 보통 주방1, 방2의 구조였고 가난한 백성들은 주방1, 방1의 그 좁아터진 집에서 많은 가족들이 엉겨서 살아야 했다. 대부분 단층으로, 그 이유는 한옥 문서에도 나오지만, 2층 가옥이 극소수인 이유는 시베리아만큼 상당히 가혹한 겨울과 온돌바닥의 무거운 무게를 2층 이상에는 설치하기 힘들었던 것, 너무 센 가격 때문이었다. 재료가 재료인만큼 동아시아 3국의 집들 중 그나마 싼 편에 속한다. 혹여나 ㄱ자로 단 한 칸이라도 붙는 순간, 그 집은 꽤 사는 집이라는 얘기이다. 다만 초가집을 짓는데도 규제는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원칙대로라면 일반인들은 많아봐야 10칸이 한계였다. 물론 여유가 없는 집안이라면 알아서도 잘 지켜야 했지만, 잘 사는 집에서 이런 규제를 우회해서 눈에 확 띨 정도가 아니라면 무시하곤 해서 딱히 잘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단열이 잘 되어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지만, 풀 특성상 지붕이 수시로 썩기 때문에 6개월에 한 번씩 갈아줘야 했다. 거기에다가 방역도 잘 되지 않던 시절에는 벌레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굼벵이류였다. 지붕 이은 지 조금만 오래되어도 천장에서 한 마리씩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이 벌레들은 짚을 먹고 자란 깨끗한 곤충으로, 약용이나 식용으로 좋아서 간식으로 꽤 먹었다고 하며, 가뭄이나 홍수로 작황이 안 좋았다거나 하는 이유로 보릿고개가 찾아왔을 때 구황식품으로 먹었다고도 한다. 물론 저런 벌레들이야 위험할 것도 없고 먹을 수도 있었다지만, 문제는 지네 같은 독충들도 떨어진다는 것. 지네 자체가 상기한 대로 잡아먹을 곤충이 많고 따뜻한 썩은 지푸라기에 잘 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VJ특공대에서 관광지용 초가집 지붕을 보수하는 일꾼들이 오래된 초가 지붕에서 나오는 이런 벌레 및 애벌레들을 기름에 볶아서 좋아라 먹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그 중 나이가 많은 일꾼은 "어릴 적 초가집 살 때 지붕 고칠 때마다 이런 벌레 나오는 걸 볶아먹는 추억이 흔했는데, 이젠 이런 관광지용이나 와야지 먹을 수 있다"며 아쉬워했다.

워낙 흔했기 때문에 현대에 와선 초가집 자체가 옛 조선 민중들의 상징처럼 되었다. 다만 김수로왕이 초가로 집을 지어서 살았다는 기록을 보면 삼국시대 초기까지는 지배층들도 초가집을 지어서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기와가 지배층들 사이에서 널리 보급되면서 초가집은 서민들의 주거지로 인식이 확 달라졌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화재에 취약하다는 인식도 강했기 때문에 신라에서부터 고려, 조선 시대 때 아예 화재 위험을 이유로 도성의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교체하도록 장려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1426년 한양 대화재로 인해 1,780채나 되는 집이 불에 탔을 때 그 과반수가 초가집이었을 정도로 화재에 상당히 약한 게 흠이었다.

또한 기와가 발명되기 전에는 왕궁조차도 초가집 형태였다. 대표적인 예시가 상나라의 왕궁으로서, 중국에서 기와는 그 이후인 주나라 시기에 발명되었다. 물론 우리가 아는 그런 초가집은 아니고, 위 사진처럼 지푸라기를 검정색으로 칠해 기와집처럼 반듯하게 덮어놓았다. 고조선 궁전도 아마 이랬을 것이다.

볏짚을 구하기 어려웠던 일부 지역에서는 볏짚보다 덜 썩는 갈대와 억새를 사용하기도 했다. 갈대집이든 억새집이든 초가와는 비교가 안 되게 오래 간다. 초가의 경우 최소한 1년에 한 번은 지붕을 교체해 줘야 하지만 억새나 갈대의 경우 잘 이으면 40~50년도 간다고 할 정도다. 다만 지붕을 얹을 만큼 대량으로 구하는 게 어려워 재료를 대량으로 구하기 가능한 곳에서만 볼 수 있다. 이를 샛집이라고 하는데, 지리산 지역에서 주로 지어졌으며 현재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회덕마을에 원형이 보존된 샛집이 남아 있다. 갈대는 주로 강가 지역에서 많이 보였다.[2]

현재[편집]

경제의 급성장을 상징

상위호환이던 기와집보다 더 보기 힘든 존재가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초가집을 없애고 서양식 주택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의외로 1960년대까지도 초가집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유는 당대에는 현대식 가옥이나 기와집같은 걸 건축하기에 건축비가 많이 들었는데 일제강점기 때는 인구의 다수가 소작농이었고, 독립 이후로도 한국전쟁이나 정치적 혼란 등으로 인해서, 상당기간 빈국이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현대식 가옥이나 기와집을 짓고 살만한 사람들이 적었다. 더군다나 초가집은 매우 구하기 쉽던 재료로 만들었던데다가 농촌 인구가 전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시절이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상부상조하는 게 보통이었기에 인건비도 별로 들지 않았고, 설사 도시에 살더라도 농촌 문화의 영향이 남아있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축비가 적게 들었고 초가집은 그냥 판잣집을 짓는 것에 비해서 (여름에는 벌레가 생기고 겨울에는 화재가 날 위험도 있었지만) 단열도 잘 되었다.

그래서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때 서양의 문물이 대거 들어와서 서양식 건축이 대세를 이루게 될 때에도 돈이 없던 당시 서민층으로서는 초가집을 짓는 게 집을 마련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으며, 1970년대 초엽까지는 도심 중심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초가집이 즐비했다. 다만 지붕 갈기 귀찮은 점은 존재했기 때문에 1950년대~1960년대에는 페인트 비슷한 화공약품을 뿌리기도 했다. 이걸 뿌리면 1년은 더 버틸 수 있었다고.

그러나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초가집을 가난의 상징이라며 그 많던 초가집들이 대규모로 허물어지거나 지붕을 슬레이트와 기와 지붕으로 갈아엎었기 때문에,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농촌에서도 초가집은 대부분 사라졌다. 다만 행정력이 완전히 미쳤던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일부 벽촌에서는 1990년대까지도 초가집이 남아있었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흐르면서 아예 현대식 농가주택으로 재건축되는 과정 등을 거쳐 사라졌다.

현대에는 하회마을, 양동마을, 낙안읍성 같은 일부 보존된 전통마을이나 민속촌 같은 데서나 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런 곳들은 기관에서 지원금을 받거나 관광산업으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유지하고 있는 거라고 한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의 풍납백제문화공원에도 초가집이 있는데, 이 초가집은 백제 집자리를 재현한 전시관이다.

심지어 지금은 상상이 전혀 안 되지만 1980년대 초반에는 강남구 대치동에도 초가집이 존재했는데, 이 사진은 현재의 은마아파트 뒤, 하이스턴 아파트 자리에서 촬영되었다. 여담으로, 분당신도시의 중앙공원에도 초가집이 1채 보존되어 있다.

북한도 한발 앞서서 1960년대에 도시지역에 아파트를, 농어촌 지역에는 문화주택이라는 현대식 가옥을 대대적으로 보급하면서 초가집이 사라졌다. 현대 북한에서 초가집처럼 보이는 가옥들은 대부분 겨울철 단열 목적으로 일반적인 문화주택의 지붕을 볏짚 등으로 덮은 것이며, 전통적인 초가집이 아니다. 그래도 황해도 지역에는 초가집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중국 길림성 연변에서는 조선족들이 이주한 이래로 초가집을 지어서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1970~80년대 이후로는 남한이나 북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기와집이나 벽돌 콘크리트 집으로 교체되었다.[2]

해외에서[편집]

시라카와고 마을

일본에서는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1950년대까지는 초가집(갓쇼즈쿠리)이 상당히 흔하게 존재했지만, 1950~60년대에 출산율 저하와 이촌현상으로 농촌공동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일손이 달리게 되고 삼나무 가격도 상승하는 바람에 현대식 주택으로 대부분 교체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시라카와고 마을이 대표적인 일본의 초가지붕 마을이다.

독일, 네덜란드유럽에서도 생각보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쪽은 팀버프레임이나 벽돌집에 갈대지붕을 올려놓은 형태가 많다.[2]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초가〉, 《위키백과》
  2. 2.0 2.1 2.2 2.3 초가집〉, 《나무위키》
  3. 전통 우리 초가집〉, 《네이버 블로그》, 2010-08-18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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