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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릉'''(宣靖陵, 사적 199호)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조선]] [[왕릉]]으로 세 개의 능이 있다고 하여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이 곳에는 조선 9대 임금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인 '''선릉''', 11대 임금 중종의 무덤인 '''정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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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릉'''(宣靖陵, 사적 199호)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조선]] [[왕릉]]이다. 세 개의 능이 있다고 하여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이 곳에는 조선 9대 임금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인 '''선릉''', 11대 임금 중종의 무덤인 '''정릉'''이 있다.
  
 
== 개요 ==
 
== 개요 ==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합쳐 선정릉(宣靖陵)이라 하는데, 선릉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1495년에 성종의 능인 선릉을 세웠고, 그 뒤 1530년에 성종의 제2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을 선릉의 동쪽에 안장하였다. 이는 왕과 왕비의 능을 정자각 배후 좌우 두 언덕에 각각 한 봉분씩 조성한 경우로 동원(同原) 이강(異岡) 형식이라 한다. 그 후, 1544년에 만들어진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이 1562년에 [[문정왕후]]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원당리의 풍수지리가 좋지 않아 옮긴 것인데, 이곳 또한 매년 여름이면 능이 침수되어 재실에 물이 들어가는 피해를 입었다. 결국,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던 문정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홀로 안장되어 있다. 선정릉은 임진왜란 때 왜병(倭兵)에 의해 파헤쳐지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으나, 현재까지도 도심 한가운데에 남아 보존되고 있다. 사적 제199호이고, 2009년 6월 30일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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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합쳐 선정릉(宣靖陵)이라 하는데, 선릉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1495년에 조선 [[성종]]의 능인 선릉을 세웠고, 그 뒤 1530년에 성종의 제2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을 선릉의 동쪽에 안장하였다. 이는 왕과 왕비의 능을 정자각 배후 좌우 두 언덕에 각각 한 봉분씩 조성한 경우로 동원(同原) 이강(異岡) 형식이라 한다. 그 후, 1544년에 만들어진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이 1562년에 [[문정왕후]]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원당리의 풍수지리가 좋지 않아 옮긴 것인데, 이곳 또한 매년 여름이면 능이 침수되어 재실에 물이 들어가는 피해를 입었다. 결국,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던 문정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홀로 안장되어 있다. 선정릉은 [[임진왜란]] 때 왜병(倭兵)에 의해 파헤쳐지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으나, 현재까지도 도심 한가운데에 남아 보존되고 있다. 사적 제199호이고, 2009년 6월 30일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선정릉은 빌딩숲이 빽빽하게 자리 잡은 강남에서 흔치 않은 녹지인데다가 부지 규모도 매우 큰 편이다. 테헤란로, 봉은사로, 선릉로, 삼성로 사이 거의 한 블록이 다 선정릉 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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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릉은 빌딩숲이 빽빽하게 자리 잡은 [[강남]]에서 흔치 않은 [[녹지]]인데다가 [[부지]] 규모도 매우 큰 편이다. [[테헤란로]], [[봉은사로]], [[선릉로]], [[삼성로]] 사이 거의 한 [[블록]]이 다 선정릉 부지이다.
  
 
선정릉의 능침사찰로는 같은 삼성동 안에 [[봉은사]]가 있는데, 도보로는 1.5km(23분 소요), 차량으로는 1.8km(6분) 정도가 소요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때문에 관광 동선을 짤 때에는 코엑스 - 봉은사 - 선정릉을 하나로 묶는 편이다. 다만, 선정릉은 관람이 유료(1,000원)인데다가 큰 길가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는 편이라 사람들이 그리 많이 찾지는 않는 편이다.
 
선정릉의 능침사찰로는 같은 삼성동 안에 [[봉은사]]가 있는데, 도보로는 1.5km(23분 소요), 차량으로는 1.8km(6분) 정도가 소요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때문에 관광 동선을 짤 때에는 코엑스 - 봉은사 - 선정릉을 하나로 묶는 편이다. 다만, 선정릉은 관람이 유료(1,000원)인데다가 큰 길가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는 편이라 사람들이 그리 많이 찾지는 않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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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릉(宣陵) ==
 
== 선릉(宣陵) ==
조선 제9대 왕 성종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으로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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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의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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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은 조선 9대 [[성종]]과 왕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다.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성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비릉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고, 다른 석물들은 왕릉과 같으며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왕릉에는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그안에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한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난간석은 12칸이며 밖에 양석·호석·망주석·문석인 등의 석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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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성종의 능침은 『국조오례의』의 예를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정현왕후의 능침은 병풍석만 생략하였을 뿐 성종의 능침과 같은 형태이다. 난간 석주의 윗부분에는 초기 난간석의 부드러운 맛이 그대로 남아 있고, 문무석인은 윤곽과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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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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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4년(성종 25)에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95년에 광주 학당리(현 선릉)에 능을 먼저 조성하였다. 원래 이 자리는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선릉이 조성되면서 광평대군묘역은 현재 강남구 수서동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530년(중종 25)에 성종의 왕비 정현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선릉은 유독 수난을 많이 겪었다. 그 첫 수난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에 일어났다. 『선조실록』 1593년 4월 13일자의 기사에는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라는 경기좌도관찰사 성영의 치계와 "이 서장을 보니 몹시 망극하다. 속히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치하게 하라."는 선조의 명이 기록되어 있다. 1625년(인조 3)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고, 그 다음해에는 능침에도 불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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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종(成宗)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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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재세 : 1457년 음력 7월 30일 ~ 1494년 음력 12월 24일, 재위 : 1469년 음력 11월 28일 ~ 1494년 음력 12월 24일)은 추존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1457년(세조 3)에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인 세조가 잠시 궁중에서 키웠는데, 성품이 돈후하고 서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461년(세조 7)에 자산군에 봉해졌고, 숙부 예종이 1469년(예종 1)에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의 명으로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을 7년 동안 받았으며, 1476년(성종 7)에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성종은 법령을 정리하여 세조대에 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을 1485년(성종 16)에 반포하였고, 1492년(성종 23)에는 『대전속록』을 완성하여 유교적 통치의 전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했다. 세조 측근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진 사림세력을 등용하여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후 1494년(성종 25)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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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은 백성들이 사는 것을 둘러보기 위해 미행(임금이 변복을 하고 궁궐 밖에 나가 민정을 살피는 것)을 자주 했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성종이 궐 밖을 다니며 겪은 일화들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왔다. 어느 해 겨울, 성종이 여느 때처럼 미행을 나갔을 때, 남산골 초라한 오막살이에서 글 읽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담은 무너지고 서까래가 썩어가는 누추한 곳이었는데, 『춘추좌전』을 읽는 소리가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성종은 등불이 꺼져 불을 얻고자 한다는 핑계를 들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글을 읽던 선비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지은 문집을 읽어본 성종은 선비의 해박함과 그 문집의 명문에 깜짝 놀랐다. 훌륭한 학식을 갖춘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어려운 살림을 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성종은 선비 몰래 쌀과 고기를 그 집에 보내고, 예정에 없던 과거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선비의 문집에서 본 글을 과제로 내걸고, 선비가 과거에 응시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선비의 문집에 있던 글이 제출되자, 성종은 더 살펴볼 것도 없이 그 글을 장원급제를 시켰다. 그런데 글을 지은 사람의 이름이 그 선비의 이름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여겨 장원급제자를 들이라 하였는데, 주인공은 선비가 아닌 새파란 젊은이였다. 자초지종을 묻자 젊은이는 “그 분은 저의 스승이었는데, 이번 과거를 꼭 보시려고 했으나, 며칠 전 굶주리다가 갑자기 먹은 고기 때문에 크게 병이 나서 돌아가셨다.”고 답하였다. 성종은 안타까움에 크게 탄식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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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현왕후(貞顯王后)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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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왕비 정현왕후 윤씨(재세 : 1462년 음력 6월 25일 ~ 1530년 음력 8월 22일)는 본관이 파평인 영원부원군 윤호와 연안부부인 전씨의 딸로 1462년(세조 8)에 신창 관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윤창년(尹昌年)이다. 1473년(성종 4)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 종2품)에 봉해지고, 1479년(성종 10)에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되자 이듬해인 1480년(성종 11)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당시 정계에 떠오르던 아버지 윤호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외척 한명회를 견제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최후를 바라본 정현왕후는 성종에게 매우 관대하였다. 이에 성종은 ”다행히 어진 왕비를 찾아 마음이 평안하다.”고 흡족해 하였다. 연산군 즉위 후 자순왕대비가 되었으며, 1506년(중종 1)에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의 즉위를 허락하기도 하였다. 그 후 1530년(중종 25)에 경복궁 동궁 정침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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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된 이후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정현왕후는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웠고, 연산군 역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그러나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의 능지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견(尹起畎)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고는, 자신이 친어머니로 알고 있던 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 윤호(尹壕)를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질 만큼 폐비 윤씨의 존재를 몰랐다. 이 질문에 승지들이 비로소 윤기견과 폐비 윤씨에 관한 일을 아뢰었고, 연산군은 그때서야 자신의 친어머니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연산군일기』 1495년(연산군 1) 3월 16일자 기사에는 "왕이 비로소 윤씨(폐비 윤씨)가 폐위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일기』 1504년(연산군 10) 3월 20일자 기사에는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죽음에 연루된 귀인 정씨와 엄씨를 잔인하게 때려죽인 뒤 장검을 들고 정현왕후의 처소로 들어가 "어서 밖으로 나오라"며 행패를 부린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해치지 않았고, 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가 폐비 윤씨의 복위를 앞장서 반대했음에도 정현왕후에 대한 예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 정릉(靖陵) ==
 
== 정릉(靖陵) ==
조선 제11대 [[중종]]의 [[무덤]]으로, 선릉과는 달리 중종 홀로 묻힌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는데, 조선왕릉 중 왕만 홀로 묻힌 경우는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선릉의 석물제도를 본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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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의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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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능이다. 단릉의 형식으로 한분을 모신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선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석양과 석호의 전체적인 자세는 선릉과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조금 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문무석인은 높이가 3m가 넘을 정도로 큰 편이며, 얼굴의 퉁방울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어 정릉의 수난을 상기시켜 준다.
  
정릉은 원래 중종의 두번째 왕비(제1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세번째 왕비(제2계비)문정왕후는 그곳이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인 선릉 옆으로 옮기고 훗날 본인도 하세하면 정릉에 중종과 함께 묻히길 바랐으나, 정릉 근처가 지대가 낮아[4] 여름에 비만 오면 침수되었다 하여 결국 강남의 정릉이 아닌 노원구의 태릉에 묻혔다. 당시 침수가 되면 정자각 앞에 배가 떠나닐 정도였다고 한다. 침수가 잦자 다시 묏자리를 옮기려고 하였으나 "거듭해서 묏자리를 옮기는 것은 불가하다"는 이유로 상소가 쏟아져서 중단되었을 정도로 당시에도 그런 이야기는 별로 먹히지도 않았다. 풍수지리가 맞건 틀리건 생전에 그만큼 문정왕후가 아들을 죽도록 들볶아 댔던 탓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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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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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4년(중종 29)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545년에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靖陵)이라 하였다. 그러나 17년 후인 1562년(명종 17)에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에 의해서 중종의 능을 선릉 부근으로 천장하였다. 문정왕후는 봉은사 주지였던 보우와 논의하여, 중종의 능침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선릉 동쪽 언덕이 풍수상 길지라 하여 천장한 것이었으나,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홍수 피해가 자주 있던 자리였다. 결국 중종과 함께 묻히기를 바랐던 문정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 후 정릉은 임진왜란 때 선릉과 함께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 문정왕후의 무덤을 정릉으로 정했는데, 마침 한강에 큰 물이 들어 정릉이 잠겼다. 그러자 명종은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묻히길 거부하시는구나!' 하며 결국 태릉으로 묫자리를 옮겼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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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종(中宗)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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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재세 : 1488년 음력 3월 5일 ~ 1544년 음력 11월 15일, 재위 : 1506년 음력 9월 2일 ~ 1544년 음력 11월 15일)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로 1488년(성종 19)에 태어났다. 1494년(성종 25)에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고,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1506년 박원종이 성희안, 유순정, 신윤무 등과 함께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어 반정을 일으켰다. 그들은 밀약 후 연산군이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1506년 9월 1일, 반정 세력들은 훈련원에 무사들을 집결시켰다. 훈련원을 출발한 반정세력은 창덕궁 어귀의 하마비동에서 유순, 김수동 등을 만나 함께 진을 치고 경복궁에 있는 대비(정현왕후 윤씨)에게로 가서 거사의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대비는 신료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추대를 허락하는 교지를 내렸다. 교지를 받은 반정 주도세력들은 먼저 권신 임사홍, 신수근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창덕궁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창덕궁에 들어가서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사태가 기울었음을 안 연산군은 옥새를 내주었고, 반정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도착한 진성대군은 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왕위에 올랐다.
  
참고로 서울 성북구에 있는 정릉(貞陵)은 이와는 다른 능으로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가 안장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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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은 연산군대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새로운 개혁정치를 표방한 조광조를 내세워,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사림을 등용하였으나, 소격서 폐지, 위훈삭제 등 급진적인 정책이 큰 반발을 불러와 기묘사화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향약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유교적 향촌질서가 자리를 잡았으며, 인쇄술의 발달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으며, 사치를 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544년(중종 39)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 교통 ==
 
== 교통 ==
 
부지 남쪽으로는 테헤란로과 서울 지하철 2호선이, 북쪽으로는 봉은사로와 서울 지하철 9호선이 지나가고, 서쪽으로는 선릉로와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이 지나간다. 선정릉역보다는 선릉역에서 내리는 게 입구에서 가장 가깝다. 멀지 않은 곳에 삼성중앙역도 있다.
 
부지 남쪽으로는 테헤란로과 서울 지하철 2호선이, 북쪽으로는 봉은사로와 서울 지하철 9호선이 지나가고, 서쪽으로는 선릉로와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이 지나간다. 선정릉역보다는 선릉역에서 내리는 게 입구에서 가장 가깝다. 멀지 않은 곳에 삼성중앙역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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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호선, 분당선 선릉역 10번출구 (도보 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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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호선, 분당선 선정릉역 3번출구 (도보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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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람안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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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람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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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wikitable width=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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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center colspan=2|3월 ~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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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center colspan=2|11월 ~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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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center colspan=2|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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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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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center|매표시간
 +
!align=center|관람시간
 +
!align=center|매표시간
 +
!align=center|관람시간
 +
!align=center|매표시간
 +
!align=center|관람시간
 +
|-
 +
|align=center|06:00~20:00
 +
|align=center|06:00~21:00
 +
|align=center|06:30~16:30
 +
|align=center|06:30~17:30
 +
|align=center|06:00~17:00
 +
|align=center|06:00~18:00
 +
|}
 +
* 관람소요시간 : 1시간
 +
* 휴일 : 매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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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간에는 조명이 설치된 부분만 관람 가능.11월~2월은 관람객의 안전을 위해 야간관람 중지(2018년 1월 1일부터 적용)
 +
 +
=== 관람요금 ===
 +
* 내국인
 +
:{|class=wikitable width=800
 +
!align=center|대상
 +
!align=center|개인
 +
!align=center|단체(10인 이상)
 +
|-
 +
|align=center|만25세 ~ 만64세
 +
|align=center|1,000원
 +
|align=center|800원
 +
|}
 +
* 외국인
 +
* 내국인
 +
:{|class=wikitable width=800
 +
!align=center|대상
 +
!align=center|개인
 +
!align=center|단체(10인 이상)
 +
|-
 +
|align=center|만19세 ~ 만64세
 +
|align=center|1,000원
 +
|align=center|800원
 +
|-
 +
|align=center|만7세 ~ 만18세
 +
|align=center|500원
 +
|align=center|400원
 +
|}
 +
※ 「문화재보호법」 및 「궁·능원 및 유적 등에 관한 규정」 개정에 따라 지역주민(서울 강남구 주민)이 신분증 등 증빙 제시시 50% 관람료 할인 적용(2015.1.29.시행, 중복 할인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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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월 마지막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로 무료관람(내·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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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료관람대상자 ===
 +
* 만 6세 이하 어린이, 만 7세~24세 이하 청소년, 만 65세 이상 국민(신분증 지참)
 +
* 만 6세 이하 및 만 65세 이상 외국인
 +
* 다자녀를 둔 부모로서 지방자치단체에서 발급한 다자녀(다둥이)카드를 소지한 부모
 +
* 「모자보건법」제2조에 따른 임산부와 보호자 1인
 +
* 국빈 및 그 수행자, 외교사절단 및 그 수행자
 +
* 국 · 공립기관에서 정양 중에 있는 상이군경
 +
* 공무수행을 위하여 출입하는 자, 한복을 착용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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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인솔 등 교육활동을 위해 입장하는 초·중·고 교원(유치원 및 보육시설 교사 포함)
 +
* 독립유공자 및 배우자, 애국지사, 선순위 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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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유공가 및 배우자, 상이(장애)1~3급자와 동행하는 보조인 1인, 선순위 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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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민주유공자와 배우자, 선순위 유족 및 특수임무유공자와 배우자, 선순위 유족, 참전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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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엽제후유증 등외자 및 수당지급 후유의증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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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 및 문화관광해설사 자격증을 패용하고 단체관람객 인솔·안내를 위해 입장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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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행 장려 및 지원법」에 따른 효행우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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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에 의한 기초생활수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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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상위계층 중 자활급여, 건강보험료 경감대상, 장애수당, 한부모 가정 중 하나 이상의 급여를 받고 있는 자 및 기타 보건복지부장관이 인정한 차상위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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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무청 발급 병역명문가증 소지자(본인), 군복을 입은 현역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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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및 전수교육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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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위원 및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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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궁능유적본부장 또는 해당 궁능유적기관의 장이 인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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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료관람대상자는 반드시 관련 증빙을 제시하여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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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해설은 신청자 인원수에 상관없이 실시(단, 10인 이상 단체는 사전 예약 필수 - 전화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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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해설 단체 사전 예약 문의 : ☎ 02)568-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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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해설(선릉관리소)은 휴관일(월요일)을 제외한 평일, 공휴일에 연중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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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2일 (월) 20:36 기준 최신판

가을빛 자태 뽐내는 선정릉.
선릉 정릉

선정릉(宣靖陵, 사적 199호)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조선 왕릉이다. 세 개의 능이 있다고 하여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이 곳에는 조선 9대 임금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인 선릉, 11대 임금 중종의 무덤인 정릉이 있다.

개요[편집]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합쳐 선정릉(宣靖陵)이라 하는데, 선릉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1495년에 조선 성종의 능인 선릉을 세웠고, 그 뒤 1530년에 성종의 제2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을 선릉의 동쪽에 안장하였다. 이는 왕과 왕비의 능을 정자각 배후 좌우 두 언덕에 각각 한 봉분씩 조성한 경우로 동원(同原) 이강(異岡) 형식이라 한다. 그 후, 1544년에 만들어진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이 1562년에 문정왕후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원당리의 풍수지리가 좋지 않아 옮긴 것인데, 이곳 또한 매년 여름이면 능이 침수되어 재실에 물이 들어가는 피해를 입었다. 결국,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던 문정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홀로 안장되어 있다. 선정릉은 임진왜란 때 왜병(倭兵)에 의해 파헤쳐지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으나, 현재까지도 도심 한가운데에 남아 보존되고 있다. 사적 제199호이고, 2009년 6월 30일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선정릉은 빌딩숲이 빽빽하게 자리 잡은 강남에서 흔치 않은 녹지인데다가 부지 규모도 매우 큰 편이다. 테헤란로, 봉은사로, 선릉로, 삼성로 사이 거의 한 블록이 다 선정릉 부지이다.

선정릉의 능침사찰로는 같은 삼성동 안에 봉은사가 있는데, 도보로는 1.5km(23분 소요), 차량으로는 1.8km(6분) 정도가 소요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때문에 관광 동선을 짤 때에는 코엑스 - 봉은사 - 선정릉을 하나로 묶는 편이다. 다만, 선정릉은 관람이 유료(1,000원)인데다가 큰 길가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는 편이라 사람들이 그리 많이 찾지는 않는 편이다.

역사[편집]

1494년, 성종이 승하하면서 당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저자도리에 안장되었고 1530년에는 계비 정현왕후가 승하하면서 같은 곳에 왕릉으로 안장되어 지금의 선릉이 만들어졌고 이후 1544년에는 중종이 승하하면서 바로 한 울타리에 있는 왕릉인 정릉에 안장되어서 선정릉 및 삼릉이 형성되었다.

서기 1593년, 임진왜란 와중에 정릉처럼 도굴당했다. 선정릉 도굴사건 항목 참조. 그래서 빈 무덤이다.

1963년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일대가 서울특별시 성동구로 편입되었고 1975년 강남구로 분리되면서 이 지역일대가 개발되었다. 그러나 선정릉 및 삼릉 일대는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개발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오늘날에는 이러한 영향으로 지금은 도심 한복판에 있는 왕릉이 되었다.

서쪽으로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의 선릉이 있고 동쪽으로 중종의 정릉이 있으며 선릉과 정릉이 멀리 떨어져있지만 한 울타리에 있었고 강남 한복판에서도 보기 드물게 소나무숲과 야산 등이 있기 때문에 개발 이전의 옛 광주군 언주면 시절의 강남을 말해주고 있다.

선릉(宣陵)[편집]

능의 구성[편집]

선릉은 조선 9대 성종과 왕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다.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성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성종의 능침은 『국조오례의』의 예를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정현왕후의 능침은 병풍석만 생략하였을 뿐 성종의 능침과 같은 형태이다. 난간 석주의 윗부분에는 초기 난간석의 부드러운 맛이 그대로 남아 있고, 문무석인은 윤곽과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능의 역사[편집]

1494년(성종 25)에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95년에 광주 학당리(현 선릉)에 능을 먼저 조성하였다. 원래 이 자리는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선릉이 조성되면서 광평대군묘역은 현재 강남구 수서동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530년(중종 25)에 성종의 왕비 정현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선릉은 유독 수난을 많이 겪었다. 그 첫 수난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에 일어났다. 『선조실록』 1593년 4월 13일자의 기사에는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라는 경기좌도관찰사 성영의 치계와 "이 서장을 보니 몹시 망극하다. 속히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치하게 하라."는 선조의 명이 기록되어 있다. 1625년(인조 3)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고, 그 다음해에는 능침에도 불이 났다.

성종(成宗) 이야기[편집]

성종(재세 : 1457년 음력 7월 30일 ~ 1494년 음력 12월 24일, 재위 : 1469년 음력 11월 28일 ~ 1494년 음력 12월 24일)은 추존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1457년(세조 3)에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인 세조가 잠시 궁중에서 키웠는데, 성품이 돈후하고 서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461년(세조 7)에 자산군에 봉해졌고, 숙부 예종이 1469년(예종 1)에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의 명으로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을 7년 동안 받았으며, 1476년(성종 7)에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성종은 법령을 정리하여 세조대에 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을 1485년(성종 16)에 반포하였고, 1492년(성종 23)에는 『대전속록』을 완성하여 유교적 통치의 전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했다. 세조 측근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진 사림세력을 등용하여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후 1494년(성종 25)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종은 백성들이 사는 것을 둘러보기 위해 미행(임금이 변복을 하고 궁궐 밖에 나가 민정을 살피는 것)을 자주 했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성종이 궐 밖을 다니며 겪은 일화들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왔다. 어느 해 겨울, 성종이 여느 때처럼 미행을 나갔을 때, 남산골 초라한 오막살이에서 글 읽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담은 무너지고 서까래가 썩어가는 누추한 곳이었는데, 『춘추좌전』을 읽는 소리가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성종은 등불이 꺼져 불을 얻고자 한다는 핑계를 들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글을 읽던 선비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지은 문집을 읽어본 성종은 선비의 해박함과 그 문집의 명문에 깜짝 놀랐다. 훌륭한 학식을 갖춘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어려운 살림을 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성종은 선비 몰래 쌀과 고기를 그 집에 보내고, 예정에 없던 과거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선비의 문집에서 본 글을 과제로 내걸고, 선비가 과거에 응시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선비의 문집에 있던 글이 제출되자, 성종은 더 살펴볼 것도 없이 그 글을 장원급제를 시켰다. 그런데 글을 지은 사람의 이름이 그 선비의 이름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여겨 장원급제자를 들이라 하였는데, 주인공은 선비가 아닌 새파란 젊은이였다. 자초지종을 묻자 젊은이는 “그 분은 저의 스승이었는데, 이번 과거를 꼭 보시려고 했으나, 며칠 전 굶주리다가 갑자기 먹은 고기 때문에 크게 병이 나서 돌아가셨다.”고 답하였다. 성종은 안타까움에 크게 탄식하였다고 한다.

정현왕후(貞顯王后) 이야기[편집]

성종의 왕비 정현왕후 윤씨(재세 : 1462년 음력 6월 25일 ~ 1530년 음력 8월 22일)는 본관이 파평인 영원부원군 윤호와 연안부부인 전씨의 딸로 1462년(세조 8)에 신창 관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윤창년(尹昌年)이다. 1473년(성종 4)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 종2품)에 봉해지고, 1479년(성종 10)에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되자 이듬해인 1480년(성종 11)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당시 정계에 떠오르던 아버지 윤호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외척 한명회를 견제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최후를 바라본 정현왕후는 성종에게 매우 관대하였다. 이에 성종은 ”다행히 어진 왕비를 찾아 마음이 평안하다.”고 흡족해 하였다. 연산군 즉위 후 자순왕대비가 되었으며, 1506년(중종 1)에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의 즉위를 허락하기도 하였다. 그 후 1530년(중종 25)에 경복궁 동궁 정침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된 이후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정현왕후는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웠고, 연산군 역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그러나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의 능지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견(尹起畎)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고는, 자신이 친어머니로 알고 있던 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 윤호(尹壕)를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질 만큼 폐비 윤씨의 존재를 몰랐다. 이 질문에 승지들이 비로소 윤기견과 폐비 윤씨에 관한 일을 아뢰었고, 연산군은 그때서야 자신의 친어머니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연산군일기』 1495년(연산군 1) 3월 16일자 기사에는 "왕이 비로소 윤씨(폐비 윤씨)가 폐위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일기』 1504년(연산군 10) 3월 20일자 기사에는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죽음에 연루된 귀인 정씨와 엄씨를 잔인하게 때려죽인 뒤 장검을 들고 정현왕후의 처소로 들어가 "어서 밖으로 나오라"며 행패를 부린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해치지 않았고, 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가 폐비 윤씨의 복위를 앞장서 반대했음에도 정현왕후에 대한 예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릉(靖陵)[편집]

능의 구성[편집]

정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능이다. 단릉의 형식으로 왕 한분을 모신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선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석양과 석호의 전체적인 자세는 선릉과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조금 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문무석인은 높이가 3m가 넘을 정도로 큰 편이며, 얼굴의 퉁방울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어 정릉의 수난을 상기시켜 준다.

능의 역사[편집]

1544년(중종 29)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545년에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靖陵)이라 하였다. 그러나 17년 후인 1562년(명종 17)에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에 의해서 중종의 능을 선릉 부근으로 천장하였다. 문정왕후는 봉은사 주지였던 보우와 논의하여, 중종의 능침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선릉 동쪽 언덕이 풍수상 길지라 하여 천장한 것이었으나,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홍수 피해가 자주 있던 자리였다. 결국 중종과 함께 묻히기를 바랐던 문정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 후 정릉은 임진왜란 때 선릉과 함께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중종(中宗) 이야기[편집]

중종(재세 : 1488년 음력 3월 5일 ~ 1544년 음력 11월 15일, 재위 : 1506년 음력 9월 2일 ~ 1544년 음력 11월 15일)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로 1488년(성종 19)에 태어났다. 1494년(성종 25)에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고,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1506년 박원종이 성희안, 유순정, 신윤무 등과 함께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어 반정을 일으켰다. 그들은 밀약 후 연산군이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1506년 9월 1일, 반정 세력들은 훈련원에 무사들을 집결시켰다. 훈련원을 출발한 반정세력은 창덕궁 어귀의 하마비동에서 유순, 김수동 등을 만나 함께 진을 치고 경복궁에 있는 대비(정현왕후 윤씨)에게로 가서 거사의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대비는 신료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추대를 허락하는 교지를 내렸다. 교지를 받은 반정 주도세력들은 먼저 권신 임사홍, 신수근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창덕궁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창덕궁에 들어가서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사태가 기울었음을 안 연산군은 옥새를 내주었고, 반정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도착한 진성대군은 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왕위에 올랐다.

중종은 연산군대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새로운 개혁정치를 표방한 조광조를 내세워,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사림을 등용하였으나, 소격서 폐지, 위훈삭제 등 급진적인 정책이 큰 반발을 불러와 기묘사화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향약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유교적 향촌질서가 자리를 잡았으며, 인쇄술의 발달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으며, 사치를 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544년(중종 39)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교통[편집]

부지 남쪽으로는 테헤란로과 서울 지하철 2호선이, 북쪽으로는 봉은사로와 서울 지하철 9호선이 지나가고, 서쪽으로는 선릉로와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이 지나간다. 선정릉역보다는 선릉역에서 내리는 게 입구에서 가장 가깝다. 멀지 않은 곳에 삼성중앙역도 있다.

  • 2호선, 분당선 선릉역 10번출구 (도보 7분)
  • 9호선, 분당선 선정릉역 3번출구 (도보 16분)

관람안내[편집]

관람시간[편집]

3월 ~ 10월 11월 ~ 1월 2월
매표시간 관람시간 매표시간 관람시간 매표시간 관람시간
06:00~20:00 06:00~21:00 06:30~16:30 06:30~17:30 06:00~17:00 06:00~18:00
  • 관람소요시간 : 1시간
  • 휴일 : 매주 월요일
  • 야간에는 조명이 설치된 부분만 관람 가능.11월~2월은 관람객의 안전을 위해 야간관람 중지(2018년 1월 1일부터 적용)

관람요금[편집]

  • 내국인
대상 개인 단체(10인 이상)
만25세 ~ 만64세 1,000원 800원
  • 외국인
  • 내국인
대상 개인 단체(10인 이상)
만19세 ~ 만64세 1,000원 800원
만7세 ~ 만18세 500원 400원

※ 「문화재보호법」 및 「궁·능원 및 유적 등에 관한 규정」 개정에 따라 지역주민(서울 강남구 주민)이 신분증 등 증빙 제시시 50% 관람료 할인 적용(2015.1.29.시행, 중복 할인 불가)

※ 매월 마지막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로 무료관람(내·외국인)

무료관람대상자[편집]

  • 만 6세 이하 어린이, 만 7세~24세 이하 청소년, 만 65세 이상 국민(신분증 지참)
  • 만 6세 이하 및 만 65세 이상 외국인
  • 다자녀를 둔 부모로서 지방자치단체에서 발급한 다자녀(다둥이)카드를 소지한 부모
  • 「모자보건법」제2조에 따른 임산부와 보호자 1인
  • 국빈 및 그 수행자, 외교사절단 및 그 수행자
  • 국 · 공립기관에서 정양 중에 있는 상이군경
  • 공무수행을 위하여 출입하는 자, 한복을 착용한 자
  • 학생인솔 등 교육활동을 위해 입장하는 초·중·고 교원(유치원 및 보육시설 교사 포함)
  • 독립유공자 및 배우자, 애국지사, 선순위 유족
  • 국가유공가 및 배우자, 상이(장애)1~3급자와 동행하는 보조인 1인, 선순위 유족
  • 5.18 민주유공자와 배우자, 선순위 유족 및 특수임무유공자와 배우자, 선순위 유족, 참전유공자
  • 고엽제후유증 등외자 및 수당지급 후유의증환자
  •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 및 문화관광해설사 자격증을 패용하고 단체관람객 인솔·안내를 위해 입장하는 자
  • 「효행 장려 및 지원법」에 따른 효행우수자
  •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에 의한 기초생활수급자
  • 차상위계층 중 자활급여, 건강보험료 경감대상, 장애수당, 한부모 가정 중 하나 이상의 급여를 받고 있는 자 및 기타 보건복지부장관이 인정한 차상위계층
  • 병무청 발급 병역명문가증 소지자(본인), 군복을 입은 현역군인
  •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및 전수교육조교
  • 문화재위원 및 전문위원
  • 기타 궁능유적본부장 또는 해당 궁능유적기관의 장이 인정하는 자

※ 무료관람대상자는 반드시 관련 증빙을 제시하여야 함.

시간제 및 상시관람권 안내[편집]

대상 시간제관람권 점심시간관람권(10회) 상시관람권
이용기간 1년 3개월 1개월
이용시간 - 조기시간 : 06:00~09:00

(11월~2월 : 06:30~09:00)

- 점심시간 : 11:30~13:30

11:30~13:30 관람시간동안

자유로이 이용가능

이용요금 30,000원 3,000원 10,000원

해설 및 능침개방, 비공개지역 안내[편집]

구분 내용 비고
정기해설

(선릉관리소)

시간 10:00, 14:00 소요시간 : 약 50분
집결장소 재실
정기해설

(한국의재발견)

시간 3월 ~ 12월

토 10:00, 14:00

10명 이상 단체는 사전 예약 필수
집결장소 수표실 맞은 편
능침개방 개방 능 선릉
개방시간 상시

(능침 옆 관람로 개방)

비공개지역

※ 정기해설은 신청자 인원수에 상관없이 실시(단, 10인 이상 단체는 사전 예약 필수 - 전화문의)

- 정기해설 단체 사전 예약 문의 : ☎ 02)568-1291

※ 정기해설(선릉관리소)은 휴관일(월요일)을 제외한 평일, 공휴일에 연중 실시

동영상[편집]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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