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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 혁명(1836)은 미국 인구가 전체 인구의 10%도 안 되는 작은 지역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지역은 멕시코와 체결한 조약의 일부로서 텍사스에 의해 주장되었고, 텍사스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엘파소와 그 주변 지역으로 구성된 마을들은 본질적으로 자치적인 공동체로 남아 있었고 멕시코와 텍사스 정부의 대표자들은 텍사스가 1846년에 되돌릴 수 없는 지배를 받기 전까지 지배권을 위해 협상을 했다. 1836년부터 1848년까지의 이 공백기 동안에도 미국인들은 계속해서 이 지역에 정착했다. 멕시코-미국 전쟁 동안, 엘 브라시토 전투는 1846년 크리스마스에 근처에서 벌어졌다.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은 효과적으로 미국 강 북쪽 기슭에 정착지를 만들었다. 현재의 뉴멕시코-텍사스 경계는 엘파소를 텍사스 쪽에 두고 있으며 1850년 타협안에 그려졌습니다. | 텍사스 혁명(1836)은 미국 인구가 전체 인구의 10%도 안 되는 작은 지역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지역은 멕시코와 체결한 조약의 일부로서 텍사스에 의해 주장되었고, 텍사스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엘파소와 그 주변 지역으로 구성된 마을들은 본질적으로 자치적인 공동체로 남아 있었고 멕시코와 텍사스 정부의 대표자들은 텍사스가 1846년에 되돌릴 수 없는 지배를 받기 전까지 지배권을 위해 협상을 했다. 1836년부터 1848년까지의 이 공백기 동안에도 미국인들은 계속해서 이 지역에 정착했다. 멕시코-미국 전쟁 동안, 엘 브라시토 전투는 1846년 크리스마스에 근처에서 벌어졌다.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은 효과적으로 미국 강 북쪽 기슭에 정착지를 만들었다. 현재의 뉴멕시코-텍사스 경계는 엘파소를 텍사스 쪽에 두고 있으며 1850년 타협안에 그려졌습니다. | ||
− | 엘파소는 1848년 | + | 엘파소는 1848년 [[미국]]에 양도될 때까지 [[멕시코]] 공화국의 일부로서 뉴멕시코에서 가장 큰 정착지로 남아 있었는데,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에 따라 국경은 엘파소 데 노르테 북쪽의 시우다드 후아레스 대성당 주변으로 지정되었다. |
엘파소 카운티는 1850년 3월에 설립되었으며 샌엘리자리오 가 첫 번째 카운티 소재지가 되었다. 미국 상원은 텍사스와 뉴멕시코 사이의 경계를 32도선으로 확정하여 역사와 지형을 대체로 무시했다. 군사기지가 1849년 프랭클린 정착지 옆에 있는 쿤스 랜초에 설립되었으며, 이는 미래 텍사스주 엘파소의 핵심이 되었다. 1851년 군대가 떠난 후 목장은 불이행 상태가 되어 압수되었다. 1888년 엘파소 델 노르테(El Paso del Norte)가 후아레스로 개명되기 전까지 국경을 넘는 도시 이름의 예로서 엘파소라는 이름을 가진 우체국이 란초에 설립되었다. 두 번 더 손을 바꾼 후, 1859년에 엘파소 회사가 설립되었고, 앤슨 밀스를 고용하여 마을을 조사하고 배치하여 현재 엘파소 시내의 거리 계획을 만들었다. | 엘파소 카운티는 1850년 3월에 설립되었으며 샌엘리자리오 가 첫 번째 카운티 소재지가 되었다. 미국 상원은 텍사스와 뉴멕시코 사이의 경계를 32도선으로 확정하여 역사와 지형을 대체로 무시했다. 군사기지가 1849년 프랭클린 정착지 옆에 있는 쿤스 랜초에 설립되었으며, 이는 미래 텍사스주 엘파소의 핵심이 되었다. 1851년 군대가 떠난 후 목장은 불이행 상태가 되어 압수되었다. 1888년 엘파소 델 노르테(El Paso del Norte)가 후아레스로 개명되기 전까지 국경을 넘는 도시 이름의 예로서 엘파소라는 이름을 가진 우체국이 란초에 설립되었다. 두 번 더 손을 바꾼 후, 1859년에 엘파소 회사가 설립되었고, 앤슨 밀스를 고용하여 마을을 조사하고 배치하여 현재 엘파소 시내의 거리 계획을 만들었다. |
2024년 2월 8일 (목) 17:41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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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패소(스페인어: El Paso)는 미국 중남부 텍사스주에 있는 도시이다. 엘파소라고도 쓴다. 엘패소(El Paso)는 스페인어로 통로(the pass)라는 의미이다. 텍사스주의 서남쪽 끝에 위치하며 엘패소군의 군청 소재지이다. 인구는 약 68만 명으로 텍사스주 서부에서는 가장 큰 도시이며 텍사스주에서는 6번째, 미국 전체로는 22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1]
개요[편집]
엘패소는 리오그란데강 연안에 있으며, 리오그란데강은 이 도시부터 하구까지 그대로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이루게 된다. 엘패소는 멕시코 국경에 있는 도시 중에서는 가장 크다. 리오그란데강 건너편에는 멕시코 치와와주의 시우다드후아레스가 있는 국경도시이다. 시우다드후아레스와는 리오그란데강을 가로지르는 여러 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멕시코와의 교역량이 많으며, 주민 중에는 히스패닉이 많다. 1827년 에스파냐인이 건설하였으며, 1848년 멕시코의 지배에서 벗어나 미국 영토가 되었다. 1881년 철도가 개통되자 근대 상공업도시로 급속히 발전하였으며, 현재는 멕시코를 중심으로 한 대외통상과 교통의 요지이다. 텍사스주 서부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며 부근에는 석유의 매장량이 많아 석유산업도 발달되어 있다. 구리 정련을 비롯하여 석유정제, 유리, 섬유, 식품가공 등의 공업이 활발하다. 멕시코계 주민이 많고 라틴아메리카적 색채가 짙다. 기후가 온난, 건조하고 국립공원, 경승지 등이 많아 관광, 휴양지로서도 알려져 있다. 부근에는 에스파냐 식민령 시대에 건립된 성당 등이 있다. 대규모의 군사기지가 있어 군사도시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미국 남부와 서부, 멕시코의 문화가 혼합된 독특한 분위기를 즐기려는 관광객도 많이 모여든다.[2]
지리 및 기후[편집]
엘패소는 텍사스주 서남부의 표고 1,100m의 고원지대에 위치한다. 콜로라도에서 발원해 뉴멕시코를 가로지른 리오그란데강이 엘패소와 시우다드후아레스 경계를 지나면서 그대로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이루어 멕시코만의 하류로 빠진다. 주변은 치와와 사막 지대로 매우 건조한 기후다.
주변은 건조한 고원지대로, 여름철은 꽤 더우나, 건조하므로 비교적 견디기 쉬우며, 겨울철에는 가끔 추운 날씨도 나타나나 전반적으로는 온화하다. 최고 기온 기록은 45.5°C이며, 최저 기온 기록은 -22°C이며, 기후 변화는 불규칙적이다. 연 강수량은 218mm에 불과하다. 연중 평균 맑은 날씨는 302일에 달하며, 이로 인해 선 시티(The Sun City)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겨울철 날씨는 매우 들쭉날쭉한데, 어떤 겨울에는 상당히 춥고 심지어 폭설이 내리기도 한다.
역사[편집]
엘파소 지역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정착해 왔다.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만소, 수마, 그리고 주마노 부족이 그 지역에 거주했다. 이들은 이후 멕시코 중부에서 온 이민자들, 코만체리아에서 온 포로들, 다양한 민족 집단의 지니사로스들과 함께 메스티조 문화에 통합되었다.
카무스카도 원정대와 로드리게스 원정대는 현재의 엘파소를 거쳐 리오그란데강을 건너 1581년에서 1582년 사이에 현재의 뉴멕시코 땅을 방문했다. 이번 탐험은 프란시스코 산체스(Francisco Sánchez)와 프레이 아구스틴 로드리게스(Fray Agustín Rodríguez)가 이끌었는데, 이들은 리오그란데강을 따라 걸으며 40년 전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 Francisco Vásquez de Coronado) 이후 푸에블로 인디언을 처음 방문한 것으로 알려진 스페인 사람이다. 스페인 탐험가 돈 후안 데 오냐테(Don Juan de Oñate)는 1598년에 엘패소 근처의 리오 그란데(Rio Grande)에서 10일 동안 휴식을 취하고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뉴 멕시코 탐험가였다. 1680년 작은 마을인 엘파소는 푸에블로 반란의 결과로 스페인이 뉴멕시코 영토를 통치하기 위한 임시 기지가 되었고 1692년 산타페가 재정복되어 다시 수도가 되었다.
텍사스 혁명(1836)은 미국 인구가 전체 인구의 10%도 안 되는 작은 지역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지역은 멕시코와 체결한 조약의 일부로서 텍사스에 의해 주장되었고, 텍사스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엘파소와 그 주변 지역으로 구성된 마을들은 본질적으로 자치적인 공동체로 남아 있었고 멕시코와 텍사스 정부의 대표자들은 텍사스가 1846년에 되돌릴 수 없는 지배를 받기 전까지 지배권을 위해 협상을 했다. 1836년부터 1848년까지의 이 공백기 동안에도 미국인들은 계속해서 이 지역에 정착했다. 멕시코-미국 전쟁 동안, 엘 브라시토 전투는 1846년 크리스마스에 근처에서 벌어졌다.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은 효과적으로 미국 강 북쪽 기슭에 정착지를 만들었다. 현재의 뉴멕시코-텍사스 경계는 엘파소를 텍사스 쪽에 두고 있으며 1850년 타협안에 그려졌습니다.
엘파소는 1848년 미국에 양도될 때까지 멕시코 공화국의 일부로서 뉴멕시코에서 가장 큰 정착지로 남아 있었는데,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에 따라 국경은 엘파소 데 노르테 북쪽의 시우다드 후아레스 대성당 주변으로 지정되었다.
엘파소 카운티는 1850년 3월에 설립되었으며 샌엘리자리오 가 첫 번째 카운티 소재지가 되었다. 미국 상원은 텍사스와 뉴멕시코 사이의 경계를 32도선으로 확정하여 역사와 지형을 대체로 무시했다. 군사기지가 1849년 프랭클린 정착지 옆에 있는 쿤스 랜초에 설립되었으며, 이는 미래 텍사스주 엘파소의 핵심이 되었다. 1851년 군대가 떠난 후 목장은 불이행 상태가 되어 압수되었다. 1888년 엘파소 델 노르테(El Paso del Norte)가 후아레스로 개명되기 전까지 국경을 넘는 도시 이름의 예로서 엘파소라는 이름을 가진 우체국이 란초에 설립되었다. 두 번 더 손을 바꾼 후, 1859년에 엘파소 회사가 설립되었고, 앤슨 밀스를 고용하여 마을을 조사하고 배치하여 현재 엘파소 시내의 거리 계획을 만들었다.
남북전쟁 동안 남부 연합군은 1862년 8월 캘리포니아 연합군에 의해 점령될 때까지 이 지역에 주둔했다. 당시 이곳은 1863년 8월부터 1864년 12월까지 캘리포니아 제5연대 의용 보병의 본부였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텍사스인들이 마을로 계속 이주하면서 마을의 인구는 증가하기 시작했다. 1873년에 통합된 엘파소 자체는 강을 따라 발달한 작은 공동체 지역을 포함했다. 1870년대에 비히스패닉계 백인 23명과 히스패닉계 150명의 인구가 보고되었다. 1881년 남태평양, 텍사스, 태평양, 애치슨, 토페카, 산타페 철도가 개통되면서 인구는 1890년 인구 조사에서 10,000명으로 급증했으며 많은 영국계 미국인들, 최근 이민자들, 옛 히스패닉 정착민, 그리고 멕시코에서 온 이민자들이 있었다. 엘파소의 위치와 더 많은 사나운 이민자들의 도착으로 인해 도시는 무법천지로 변했으며 폭력적이고 야생적인 붐타운이 되었다. 실제로 성매매와 도박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성행하였는데, 그때 육군부가 엘파소 당국에 악덕 단속을 압력을 가했다. 악덕 무역의 억제와 도시의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여 이 도시는 미국 남서부 최고의 제조, 운송 및 소매 중심지로 계속 발전했다.
1909년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와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íaz)는 텍사스주 엘파소와 멕시코 시우다드 후아레스에서 정상회담을 계획했는데, 이는 미국 대통령과 멕시코 대통령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자 미국 대통령이 국경을 넘어 멕시코로 들어간 첫 만남이었다. 그러나 암살 위협을 포함하여 국경 양쪽에서 긴장이 고조되어 텍사스 레인저스, 4,000명의 미국 및 멕시코 군대, 미국 비밀경호국 요원, FBI 요원, 미국 보안관이 모두 소집되어 보안을 제공했다.
1910년에는 도시 인구의 압도적인 수가 미국인이 되어 정착 환경을 조성했지만, 멕시코 혁명이 도시에 큰 영향을 미치고 난민과 자본의 유입을 가져왔기 때문에 짧은 기간이었다. 스페인어 신문, 극장, 영화관,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많은 곳이 번성하는 멕시코 난민 중산층의 지원을 받았다. 특히 1913년에서 1915년 사이에 많은 성직자, 지식인, 사업가들이 도시로 피신했다. 궁극적으로 멕시코 혁명의 폭력은 엘파소로 도망친 거대한 멕시코 디아스포라를 뒤따랐다.
동시에 텍사스인과 미국인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1920년에는 미군과 함께 인구가 10만 명을 넘어섰고, 다시 한번 비히스패닉계 백인들이 확실한 다수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서는 비히스패닉계 백인을 포함하여 멕시코인과 멕시코계 미국인 간의 분리를 강화했다. 미국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공황 시대가 도시에 전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엘파소의 인구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감소했고, 인구 감소의 대부분은 비 히스패닉계 백인 공동체에서 비롯되었다.
전쟁 중과 전쟁 후, 이 지역의 군사적 팽창과 페름기 분지에서의 석유 발견은 1900년대 중반에 급속한 경제적 성장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구리 제련, 정유, 저임금 산업의 확산이 도시의 성장을 이끌었다. 또한 대부분 히스패닉계 백인이 아닌 지역 농촌 인구가 엘패소와 같은 도시로 이탈하면서 단기적으로 자본과 노동력이 급증했지만 이는 중산층 미국인이 다른 지역으로 추가적으로 이탈함으로써 균형을 이루었다. 결과적으로 지역 기업들은 값싼 멕시코 노동력이 제공하는 기회를 남쪽에서 찾았다.[3]
인구[편집]
인구는 약 68만명으로 미국에서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은 도시 중 하나다. 인종 구성은 2020년 기준 히스패닉 82.8%, 백인 11.8%, 흑인 3.9%, 아시아인 1.3%으로 히스패닉계가 많이 거주하고있는데, 이는 미국으로 이민온 멕시코인들이 국경 근처에 거주하는 성향을 띄기 때문. 원래 미국-멕시코 국경 도시들은 히스패닉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거기에다가 엘패소는 미국-멕시코 국경 도시들중 가장 큰 도시인것도 한 몫 하기도 한다. 또한 멕시코계 미국인들이 많은 특성상 인구의 45%가 가톨릭을 믿고있으며 그 외는 거의 다 무종교이다.
시내 인구는 많은 편이지만 한쪽은 외국이고, 주변은 미군 부대의 주둔기지 아니면 사막이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교외 지역의 확장은 미국의 다른 도시에 비해 덜한 편이라 시내도 상대적으로 덜 번화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도시권 인구도 약 84만 명 정도로, 시내 인구에 비해서 크게 많지 않고 도시권 인구 순위도 미국 68위에 그친다. 다만, 멕시코의 시우다드후아레스 도시권까지 포함하면 270만 명까지 불어난다.
치안[편집]
엘패소는 미국 대도시 중에서 치안이 가장 좋은 도시 중 하나로 다양하게 평가받고 있다. 이유는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경도시인지라 경찰과 군병력이 삼엄하게 도시 전체를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샌디에이고를 제외한 나머지 미국-멕시코 국경도시 중에서 제일 큰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번화한 도시도 아닌지라 미국 어느 지역에나 있는 평범한 도시처럼 보인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전체적으로 멕시코계 미국인들도 많고 여러 시스템들이 상대적으로 평안하게 발전한 지역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엘패소는 작은 규모에 비해 생각보다 유명한 도시인데, 그 이유가 하필이면 이곳 국경을 넘는 순간 나오는 도시가 현실의 고담이라고 불리는 멕시코의 시우다드후아레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사이에 두고 천국과 지옥의 비교가 가능한 곳인데, 엘패소 국경지역을 지나 멕시코로 입국하는 순간 소매치기를 당하는 것은 예사고, 재수없게 총격전에 휘말려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멕시코 경찰들도 마약 카르텔의 보복이 무서워서 그들에게 총질 한 번 못하고, 멕시코쪽 국경사무소에서는 아예 마약이 대놓고 통과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어떤 국경도시들보다 넘사벽급으로 경찰병력이 배치되어 있으며, 미군도 상주하고 있을 정도로 국경지역의 경비가 정말 삼엄하다. 애초에 도시권 인구가 100만 명이 되지 않고 같은 주에 유명하고 더 규모있고 인구 많은 도시가 네군데나 더 있는데도 FBI 사무실이 있는 동네이다.
남쪽 상황이 너무나도 카오스한지라 엘패소의 국경지역은 멕시코 시민들이 항상 밀입국을 시도하는 지역인데다가, 남쪽 도시인 시우다드후아레스는 마약 카르텔들이 지배하는 도시나 마찬가지여서 마약사범들이 웬만한 군대는 우습게 보일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조직들이 미군에게 개길 정도의 수준은 절대 아니다. 애시당초 지하 터널을 이용하는 이유가 미군이 국경지대에 주둔하고 있으니 마음 놓고 밀입국과 마약 밀매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멕시코와 인접한 국경지역은 마약이 밀수되는지 짐을 검사하는 절차가 무작위인 것에 비해, 엘패소의 국경지역에서는 거의 모든 차량이 검사를 받는다. 버스 승객은 예외적으로 더 삼엄한데, 다른 멕시코 국경을 통과할 때에도 모든 승객이 하차한 후 CIQ를 거친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 등 일부 ESTA 이용자들은 해당 버스편을 놓치고 다음 차를 타거나 운수회사의 지시에 따라 환승해서 가야하는 경우가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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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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