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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8일 (월) 23:23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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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프랑스어: Haïti, 영어: Haiti)또는 아이티 공화국(프랑스어: République d'Haïti, 영어: Republic of Haiti)은 북아메리카 카리브해의 섬나라이며, 수도는 포르토프랭스, 언어는 프랑스어와 아이티어이다. 국명 아이티는 '높은 산들의 나라'(land of high mountains)를 뜻하는 타이노족의 말인 Haiti(Hayti)에서 유래되었다.
개요[편집]
- 수도: 포르토프랭스
- 면적: 27,750 km²
- 인구: 11,680,288 명 (2022년)
- 공용어: 프랑스어, 아이티어
- 정치체제: 공화제, 이원집정부제
- 대통령: 아리엘 앙리 (대행)
역사[편집]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섬을 발견한 이래, 섬의 원주민이던 타이노 족과 아라와칸 족 등 토착민들이 학살과 질병으로 인해 몰살당하자,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들을 데려와 일하게 하였으며, 이들이 현 아이티 인들의 선조이다.
독립 투쟁[편집]
처음에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나 1697년의 《라이스윅 조약》으로 섬의 서쪽 3분의 1은 프랑스가 점령하였다. 프랑스는 이곳을 프랑스령 생도맹그(Saint - Domingue)라고 불렀다.
프랑스 혁명(1789년)과 프랑스 인권 선언에 고무된 생도맹그의 유색인종과 흑인은 억눌린 자유와 시민들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1791년 8월 22일 아프리카계 다수민족들이 시작한 혁명은 투생 루베르튀르, 장자크 드살린, 앙리 크리스토프 등이 이끄는 흑인 반군은 백인 지주를 처형한 뒤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다.
1793년,영국군이 생도맹그를 침공하였다. 1793년 8월에 산도밍고의 저항군은 영국함대를 격퇴시켰다.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의 처형되고 유색인종과 흑인 노예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프랑스인 판무관 송토나와 폴베렐은 본국의 의회에 승인을 받지도 않고, 식민지에서 노예제도 폐지를 선언했다. 6개월 후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당이 이끄는 국민 공회는 노예제도 폐지안을 승인하고, 1794년 2월 4일 이를 프랑스 전 식민지로 확대했다.
나폴레옹은 1801년 11월에 3만명의 아이티 원정대를 통해 식민지 재탈환과 노예제 부활을 시도하였으나 아이티 인들은 프랑스의 침공을 물리쳤으며 1804년 1월 1일 정식으로 독립하였다. 이로써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 탄생하였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독립하였으며, 노예제 폐지를 법령화한 최초의 북아메리카 국가가 되었다.
미국 점령[편집]
세계 최초로 흑인노예들에 의해 주도된 민중혁명과 헌법에 의해 수립된 흑인 공화국이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을 틈타 침공해 온 미국에 의해 1915년 ~ 1934년까지 점령되었다.
1915년, 미국은 채무 상환을 구실로 해병대를 아이티에 보내 점령하고 1947년까지 아이티의 대외 재정을 미국이 계속 관리하였다.
1934년 세계 공황의 영향과 니카라과의 산디노 군에 고전을 하자, 루즈벨트 대통령의 선린 외교 정책으로 인해 아이티에서도 해병대가 철수하였다. 미국 점령 이후 몇 명의 뮬라토 대통령이 공화제 하에 교체되었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계속되었고, 1946년에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듀마르세 에스티메가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사회 보장 및 노동 정책의 개선, 다수파 흑인의 정치적 자유 확대 등 다양한 진보적인 개혁을 시도했지만, 개혁은 뮬라토와 흑인과의 충돌 등 국내 혼란을 초래했다. 1950년 에스티메는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시도하였기 때문에, 뮬라토 층과 흑인 엘리트들에 의한 쿠데타로 흑인 엘리트 군인이었던 폴 마그로워에 의한 군사 정권이 탄생했다. 그의 시대, 경제는 커피와 미국에서 관광 등 경제에서 한때 호황을 누렸지만, 또 다시 재선을 시도한 것을 계기로 전국에서 총파업이 일어나 혼란을 겪은 가운데 1956년 말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1957년 쿠데타로 탄생한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민정 이양과 대통령 선출을 놓고 총파업과 쿠데타가 반복되는 정치 혼란, 9월에 열린 총선을 계기로 흑인 다수파를 대표하는 의사이자, 포퓰리스트 정치인으로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58년부터 독재자의 길에 들어 서면서 경찰과 국가 재정 등을 사유화시켜, 현대에서도 보기 드문 최악의 군사 독재 체제를 탄생시켰다.
뒤발리에는 계엄령을 발동하여 언론과 반대파를 탄압하고, 비밀 경찰 통통 마쿠트를 발족시켜 많은 국민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며, 살해했다. 1971년에 뒤발리에가 사망하자,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베이비 독")가 뒤를 이었으며 1986년까지 장기에 걸쳐 뒤발리에 부자 주도 아래 암흑 시대가 계속되었다.
쿠데타와 민주화[편집]
- 클로드 뒤발리에가 축출당하고 망명하자, 앙리 낭피 중장이 권력을 잡았다.
- 1988년 1월에 새 선거가 실시되어 의회와 민간인 대통령을 뽑았으나, 6월 낭피는 정부를 무너뜨리고 자신을 군사 정권의 우두머리로 선언하였다.
- 1988년 9월에 아이티의 대통령 경호원 부대들은 낭피를 축출시켰다. 프로스페르 아브릴 중장이 대통령이 되어, 독재자로 정권을 잡았다.
- 1990년 3월 아브릴 대통령은 그의 통치에 반항하는 데모에 의하여 사임하였다.
- 1990년 12월 아이티 국민들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 1991년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선출된 좌파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 1991년 9월 라울 세도라 장군의 군부 쿠데타로 아리스티드를 축출했고, 그는 해외로 망명하였다.
- 아리스티드 지지파인 《아이티의 진보와 발전을 위한 전선》은 많은 이들이 살해되었다. 그 조치로 미주 기구(OAS)는 아이티와 무역에 보이콧하였으며 유엔과 미국은 아이티 정부에 경제 제재 또는 군사적 압력을 주었다.
- 1994년, 세도라 장군이 하야하고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에 복귀했다.
- 1996년, 아리스티드파인 르네 가르시아 프레발이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다.
- 2001년에는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 아이티는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안정을 겪으면서 2004년에 쿠데타로 쫓겨난다. 그 후 아리스티드는 아프리카로 피난갔다. 다국적군으로 구성된 평화유지군이 다시 아이티에 도착하였고, 과도적 정부가 수립되었다.
- 2006년 아이티 국민들은 의회를 뽑았고, 2월에 대통령 선거를 통해 르네 프레발이 51%의 득표율로 당선하였고, 5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프레발은 가난한 아이티인들을 후원하는 희망당의 당원이었다.
- 2008년 포르토프랭스와 레카이에서 식품 가격의 인상을 항의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의회는 자크-에두아르 알렉시 총리를 면직시키는 투표를 하였고, 9월 미셸 피에르-루이가 아이티의 두 번째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해에 몰아닥친 열대석 폭풍과 허리케인에 의하여, 수백명의 국민과 수천명의 노숙자들이 사망하였다. 고네이브(Gonaives)가 크게 파괴되었고, 아이티의 농업은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 2010년, 미셀 마르텔리가 농민행동당(Repons Peyizan)을 창당하고, 대선 출마를 하여, 2011년 4월 20일 제4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지리[편집]
아이티는 대앤틸리스 제도의 서쪽 지역에 있는 섬으로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아이티는 카리브 제도에서 쿠바와 도미니카 공화국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나라이다. 쿠바와는 8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아이티의 지형은 산세가 드센 편이고 해안 지대에는 작은 평원과 강, 계곡이 있다. 가장 큰 농업 생산지이자 비옥한 계곡은 플랜 드 라르티보니트(Plaine de l'Artibonite)이다. 섬의 중앙과 동부 지역은 높은 고원이 있다. 가장 높은 곳은 픽 라 세예(Pic la Selle)로서 2,680 m이다. 도미니카 공화국과는 360km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
1925년 아이티는 열대우림 기후로 열대림으로 우거진 천국이어서 60%가 산악 지대를 이루어 숲이 많았다. 그 이후로 숲은 단지 2%만 사라져 그 지역은 비옥한 농토로 바뀌었다. 근래에 들어서는 침식이 산악 지대 인근에 심해지는데다 벌목이 주요 산업으로 떠오르고 있어 환경 파괴가 심각해지기도 했다. 때문에 아이티의 삼림 채벌 문제가 국제적으로 이슈가 되기도 하여 숲을 일구려는 지원이 있기도 했다. 성공적이지는 않지만 아이티는 단위 면적 당 생물다양성이 가장 높은 지역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환경단체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무려 6,000여 종 이상의 식물이 아이티에 살고 있으며 이 중 35%가 위기종이다. 새의 경우 220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21종이 멸종위기종이다. 이렇게 생물 다양성이 높은 이유는 섬 내에도 해발고도와 지형적 요인으로 소기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주민[편집]
오래전 아프리카에서 유럽인에 의해 노예로 끌려온 흑인이 대부분이며 혼혈민족 및 백인 등도 소수 있다. 아이티 사람의 약 95%가 아프리카계이고 나머지의 대부분은 물라토(백인과 아프리카인의 혼혈)이다. 엘리트인 물라토 및 기타 흑인 간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격차가 현저하다. 그리고 독립 후 중동에서 이민온 아랍계 아이티 사람들도 있다. 식민지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아이티에 끌려온 사람들의 뿌리는 세네감비아(현재 세네갈과 감비아), 월로프인, 밤바라인, 풀라인, 만딩고인과 같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과 황금 해안(지금의 가나)의 환티인, 노예 해안(현재 나이지리아, 베냉)의 폰인, 이보인, 요루바인, 또는 콩고인, 앙골라인 등 매우 다방면에 걸쳐있지만, 아이티 흑인 문화 주류가 된 것은 다호메이 왕국(현 베냉) 출신의 폰인의 문화이며, 부두교와 조상 신앙 등 다호메 문화가 아이티에서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아프리카 각지에 뿌리를 가지고 대립하고 있던 노예들은 다호메의 부두교를 통해 유대를 달성했다.
또한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외로 이민한 난민도 적지 않고, 미국의 마이애미와 뉴욕(아이티 미국인), 캐나다의 몬트리올(아이티 캐나다인), 프랑스의 파리, 바하마, 도미니카 공화국에 큰 아이티 이민자 사회가 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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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카리브해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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