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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에 처음으로 도래한 사람들은 빙하기 시절 [[베링 해협]]을 통해 [[북아시아]]에서 육로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시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많은 역사학자, 고고학자, 고인류학자들은 약 3만 년 전에 처음으로 북미 대륙이 인류에게 발견됐고, 1만 5천 년~2만 년 전 대규모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마지막 빙하기를 필두로 [[아프로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육로는 완전히 끊어졌고, 곧 아메리카 대륙 전체로 퍼진 고대인들은 다양한 문화와 문명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 북아메리카에 처음으로 도래한 사람들은 빙하기 시절 [[베링 해협]]을 통해 [[북아시아]]에서 육로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시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많은 역사학자, 고고학자, 고인류학자들은 약 3만 년 전에 처음으로 북미 대륙이 인류에게 발견됐고, 1만 5천 년~2만 년 전 대규모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마지막 빙하기를 필두로 [[아프로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육로는 완전히 끊어졌고, 곧 아메리카 대륙 전체로 퍼진 고대인들은 다양한 문화와 문명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 ||
2023년 3월 2일 (목) 10:4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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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Canada)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국가이다. 수도는 오타와(Ottawa)이고, 최대 도시는 토론토(Toronto)이다. 1763년 영국이 프랑스와 맺은 파리조약 이후 영국의 식민 상태로 있다가 1867년 캐나다자치령으로 독립하였다. 1951년 정식국명을 캐나다로 변경하였다.
개요
캐나다는 북아메리카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연방국이다.
태평양 상의 밴쿠버 섬에서 오대호에 이르는 북위 49도선 이북을 통치하고 있는 나라로, 총 10개의 주(Provinces)와 3개의 준주(Territories)로 이루어져 있다. 지리적으로는 빙하기 당시 그린란드와 육로로 이어져 있었던 만큼 북극과 가장 가까운 나라 중 하나이며, 대표적인 상징은 국기에도 그려져 있는 사탕단풍(설탕단풍, Sugar maple)과 비버(아메리카비버, C. canadensis)다.
정치적으로 캐나다는 영국을 본따 입헌군주제와 내각제를 채택했지만, 땅이 넓은 관계로 이웃 미국의 제도를 모방해 연방 국가가 되었다. 이 모델은 호주 연방 결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독립된 연방국체로서의 캐나다는 1867년 3월 29일 영국령 북아메리카 법(British North America Act)이 통과되며 온타리오, 퀘벡,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가 연합해 결성한 캐나다 자치령(Canadian Confederation)에 근간을 둔다. 이후 시간이 지나며 인근 자치령들을 흡수, 1949년 마지막으로 뉴펀들랜드 자치령이 가입하여 현재의 영토를 이룬다. 1982년에는 캐나다 법(Canada Act 1982 / Loi de 1982 sur le Canada)이 통과되어 영국 국회의 간섭 없이 헌법을 수정할 수 있는 고도의 주권이 성문법적으로도 보장되었고, 캐나다는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된다.
정부수반은 캐나다 총리로 2022년 현임자는 제23대 쥐스탱 트뤼도이다. 명목상 캐나다의 국가원수는 캐나다 국왕이며, 이는 영연방에 속한 동군연합으로서 영연방 왕국 구성국들의 국왕인 찰스 3세가 맡고 있다. 엄밀히 캐나다를 기준으로 영국 왕과 동일인물을 '캐나다 국왕'으로 둔 나라일 뿐, '국가 원수가 영국 왕'은 아니다. 그러나 영국 국왕이 런던에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영국 왕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영국과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효율적인 업무를 위해 캐나다 현지의 저명 인사가 캐나다 총독으로 임명되어 국가원수의 대리를 맡는다.
캐나다의 국토는 대략 1천만 제곱킬로미터에 육박해 러시아의 뒤를 이어 세계 2위의 면적을 자랑한다. 중국의 1.04배, 미국의 1.01배이며, 남한의 99.5배, 일본의 26.4배 정도 되는 면적을 가지고 있다. 또한 러시아를 제외한 나머지 유럽 나라들을 모두 합친 면적의 0.98배이며, 캐나다가 소속된 영연방과 프랑코포니 두 기구를 통틀어 가장 영토가 넓다. 앵글로아메리카에서 면적으로는 1위이고, 인구수도 미국에 이은 2위다. 다만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북극권과 가까운 영토 북부는 본격적으로 사람이 살기 너무 춥기 때문에, 실제 가용 면적은 생각보다 적다.
인구는 약 3,800만 명으로 국토의 1%에 불과한 남한보다도 적어서, 전체 국토면적으로 봤을 때는 인구 밀도가 매우 낮은 나라다. 가장 인구 밀도가 적은 주는 곰이 사람 넷 당 하나 비율로 있다고 할 정도. 하지만 인구의 대부분은 국토 남부의 도시권역 및 미국과의 국경지대에 몰려 있어서, 실질 인구밀도는 그리 낮지 않다.
수도는 오타와이다. 과거 프랑스계 인구 비율이 높은 몬트리올과 영국계 인구 비율이 높은 토론토가 수도 자리를 두고 다투다, 국가의 균형 발전을 위해 아예 인구 2만이 채 될까 말까 한 마을 하나를 수도로 정해 개발했다. 또한 최대도시는 토론토, 두 번째로 큰 도시는 몬트리올이며 그 외 주요 도시로 밴쿠버, 캘거리, 에드먼턴, 퀘벡 시티, 위니펙, 핼리팩스, 새스커툰 등이 있다.
2022년 기준 국가별 명목 GDP 순위는 8위이며, 국가별 1인당 명목 GDP 순위는 11위로 (인구 천만명 이상 국가중에서는 3위, 3천만명 이상 2위) 세계 최상위권 경제 대국이다. 또한 의외라면 의외겠지만 세계 3위의 산유국으로, 아랍 산유국들보다도 석유가 많이 난다. 다만 석유나 천연가스 같은 자원의 경제적 가치는 단순한 매장량뿐 아니라 채굴 비용도 많은 영향을 끼치는데, 캐나다는 중동 국가들에 비하면 채굴 비용이 많이 높은 편이다. 그렇다고 미국처럼 셰일가스 기술이 한참 앞서있는 것도 아니라 국가 경제가 유가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일례로 2015년 유가가 급락하면서 캐나다 경제가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등 침체에 들어갔던 적도 있다.
영연방 왕국의 회원국이지만, 사실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 국가보다는 미국과 더 많이 닮아 있다. 캐나다의 주요 공항마다 미국 출입국 심사대가 따로 있고, 반대로 미국은 캐나다인들을 아예 자국민 심사대와 같은 곳으로 받는다. 결정적으로 다른 영연방 국가와는 달리 차량이 미국처럼 오른쪽으로 다닌다. 원래 지역에 따라 차량이 좌측통행을 하는 곳과 우측통행을 하는 곳이 나뉘어 있었는데, 미국을 왕래하는 수요가 많다 보니 결국 우측통행으로 통일시켰다. 마지막까지 좌측통행을 했던 유명한 지역으로 1949년 들어서야 캐나다 연방에 가입한 뉴펀들랜드(현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주)가 있다.
국가 상징
국호
국호 '캐나다'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연맹인 이로쿼이 연맹의 말 '카나타(kanata, [kana:taʔ])'에서 유래하였으며, '정착', '마을' 등의 뜻이 있다. 신항로 개척 시기, 훗날 퀘벡 시가 될 이로쿼이 부족 정착지 스타다코나(Stadacona)에 도착한 자크 카르티에가, 정착민들에게 "여기가 어디인가?"하고 물어봤고, 주민은 "마을이다(카나타)."라고 대답했다. 자크 카르티에를 위시한 프랑스 탐험가 일행은 그걸 지명이라 생각했고,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 전부를 '카나다(Canada, /ka.na.da/)'로 명명한 것. 이것의 영어 발음이 '캐나다(Canada, /ˈkænədə/)'이다. 지금도 오타와 근교에 카나타(Kanata)라는 작은 마을이 존재한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캐나다라는 명칭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을 영국인들과 구분하여 부르는 말이었다. 근간이 퀘벡 시 근교를 일컫는 명칭이었기도 했고, 실제로 몬트리올의 아이스하키 팀 레 카나디앵 드 몽레알 등 그 흔적들이 여럿 남아 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영국령 북아메리카가 대영제국 최초로 자치령(dominion)을 구성하게 되면서, '캐나다'를 퀘벡만이 아닌 연방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삼게 되었다. 당시 캐나다 외에 명칭 후보가 여럿 있었다. 라틴어로 '남쪽의 땅/나라'를 뜻하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대칭을 이루게 Borealia(북쪽의 땅/나라)로 하자는 제안도 있었고, 그레이트브리튼의 옛 이름인 알비온(Albion)에서 딴 Albionoria(북쪽의 Albion) 또는 New Albion으로 하자는 제안도 있었고, 심지어 Efisga로 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캐나다의 공식 명칭은 심플하게 캐나다로 -국(國), -공화국(共和國), -연방(聯邦)과 같은 별도의 수식어가 없다. 과거 명칭은 'Dominion of Canada/Dominion du Canada'로 한국어로는 '캐나다 자치령'이라고 부른다. 이후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과 함께 주권이 보장되고, 1982년에 영국 의회와 함께 캐나다 법(Canada Act 1982)을 통과시키며 완전한 주권 국가가 되자 본래 명칭에서 자치령(dominion)을 뺀 '캐나다'를 공식 국호로 쓰게 됐다. 다만 이 캐나다 법에서 국호에 대한 정식 수정은 없었고, 처음 국호를 결정하였던 1867년의 영국령 북아메리카법(British North America Act of 1867)도 여전히 유효하므로 법률상의 국호는 캐나다 자치령이다. 물론 오늘날까지 자치령이 들어간 국호를 사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이 국호가 법률상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본래 자치령 설립 논의 당시, 캐나다 현지의 영국계 주민들이 원한 명칭은 Kingdom of Canada, 즉 캐나다 왕국이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이 제안을 듣고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괜히 옆에 있는 미국과 쓸데없이 마찰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 당시만 해도 미국은 영국의 왕정 체제에 커다란 반감이 있었다. 적대 관계는 아니었지만, 서로 독립 전쟁과 미영전쟁을 치른 지 50년이 조금 지난 시기였기 때문. 쓸데없는 마찰을 피하고 싶었던 영국은 결국 Dominion of Canada를 정식 명칭으로 결정했다.
요즘은 거의 쓰이지 않지만, 한자 음차로는 '가나다(加那陀)'로 쓴다. 언론 기사 헤드라인 등에서 '加'라는 약호가 쓰여 있으면 '캐나다'로 생각하면 된다. 관련 기사. 한편 한국에서는 일례로 1970년 캐나다-중공 수교를 다룬 기사에서도 조선일보는 '캐나다', 동아일보는 '캐너더', 경향신문은 '카나다'라고 표기할 만큼 표기가 제각각이었다가 80년대 말엽까지 카나다라고 통일해서 불렀고, 현재는 캐나다로 불린다. 중화권에서는 '가나다(加拿大)'로 쓴다.
국기
캐나다의 국기는 단풍잎기(The Maple Leaf 메이플 리프) 또는 하나의 잎(l'Unifolié 뤼니폴리에)로 알려져 있다. 빨강 바탕에 가운데 흰색 정사각형이 있고 여기에 붉은 단풍잎이 그려져 있다. 1964년 국민 공모로 제정되어, 1965년 2월 15일, 캐나다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승인을 받아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1965년 이전에는 왼쪽 위에 영국의 국기가 삽입되고, 오른쪽에 캐나다 각 주의 상징을 넣은 상선기(Civil Ensign)을 사용했다. 상선기와 형태는 같으나 빨간색 배경 부분이 파란색으로 그려진 기는 정부기(Government Ensign) 및 해군기(Naval Ensign)로 사용했다.
좌우에 있는 빨강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중앙에 있는 단풍잎은 캐나다의 상징목인 단풍나무의 단풍잎으로 캐나다가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에 있음을 알리고 있다.
국장
캐나다의 국장은 1921년 11월 21일에 처음으로 제정되었으며 전체적으로 영국의 국장과 비슷하게 생겼다.
국장 가운데에 그려져 있는 방패에는 5개로 나뉜 작은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방패 위의 왼쪽에는 빨간색 바탕에 세 마리의 금색 사자와 오른쪽에는 노란색 바탕에 빨간색 사자가 그려져 있고 중앙의 왼쪽에는 파란색 바탕에 하프와 오른쪽에는 파란색 바탕에 3개의 노란색 백합 문양이 그려져 있으며 방패 아래에는 하얀색 바탕에 3개의 단풍잎이 달린 잎가지가 그려져 있다.
방패 왼쪽에는 영국의 국기를 든 금색 사자가 그려져 있으며 오른쪽에는 파란색 바탕에 3개의 노란색 백합 문양이 그려진 기를 든 하얀색 유니콘이 그려져 있다. 국장 위쪽에는 왕관이 그려져 있으며 왕관 아래에는 오른쪽 발에 단풍나무 잎을 든 왕관을 쓴 사자가 그려져 있다. 사자 아래 투구의 좌우에는 10개의 빨간색과 하얀색 두 가지 색의 단풍나무 잎이 장식되어 있다.
방패 뒤쪽에는 캐나다의 훈장의 표어인 "더 좋은 나라를 바란다"("desiderantes meliorem patriam")라는 문구가 쓰여 있으며 국장 아래쪽에 있는 리본에는 캐나다의 나라 표어인 "바다에서 바다로"("a mari usque ad mare")라는 문구가 라틴어로 쓰여 있고 리본 아래쪽에는 장미꽃과 엉겅퀴, 세잎 토끼풀과 하얀색 백합꽃이 그려져 있다.
국가
캐나다의 국가는 〈오 캐나다(O Canada / Ô Canada)〉이다. 이 곡은 1880년에 퀘벡 주 부총독(Lieutenant Governor)[22]인 테오도르 로비타유(Théodore Robitaille)의 의뢰로 판사이자 작사가인 아돌프바질 루티에(Adolphe-Basile Routhier)에 의해 프랑스어로 작사되었으며 작곡가 칼릭사 라발레(Calixa Lavallée)에 의해 작곡되었다. 이후 1901년도부터 여러 영어 가사가 존재하였으나 몬트리올의 변호사인 로버트 스탠리 위어(Robert Stanley Weir)가 1908년에 쓴 영어 가사가 가장 큰 사랑을 받았으며 1927년부터 널리 통용되었다. 약간의 수정을 거쳐 1980년에 국가로 공표되었으며 2018년에 가장 마지막으로 수정되었다. 프랑스어 가사는 원본 그대로이다.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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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캐나다는 유럽 전체보다 땅이 넓어서 러시아 다음으로 큰 나라이다. 그러나 국토의 북쪽 절반은 메마른 툰드라 지대이고, 실제로 사람이 활동하는 지역은 동서 약 6,000km에 걸쳐 뻗쳐 있으며, 미국과의 국경에서 200∼300km 사이에 있는 지대에 한정된다. 약 200만 개의 호수가 있다. 캐나다는 여섯 지형구로 나뉜다. 먼저 동부 대서양 연안의 애팔래치아산계, 서부 태평양 연안의 코르딜레라 산계, 국토의 중앙의 북쪽에서 허드슨만이 파고들어 이루어진 허드슨만 저지, 이것을 둘러싸고 국토의 절반을 차지하는 캐나다 순상지, 동쪽의 세인트로렌스강 연안 저지, 서쪽의 내륙평원인 프레이리 등이다. 이들 대지형의 배열은 대규모의 지각 변동에 따라 형성되어 제각기 다른 지형을 구성하였으나, 캐나다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는 빙하의 영향을 받은 점이 전체적으로 공통된 점이다. 또한 나무가 우거진 곳이 많다.
캐나다는 15개의 육상생태권과 5개의 해상생태권으로 나누어진다. 이 생태권들에는 약 8만 개가 넘는 캐나다 고유 야생종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이와 비슷하거나 더 많은 수의 야생종들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캐나다 정부 차원에서 타국에 비하여 생태계 보전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인간 활동으로 인하여 자연이 훼손되는 것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다보니 약 800여 종의 동물들이 멸종 위기에 놓여 있으며 더 많은 종들이 위험 위기에 처해있다. 현재 캐나다 국토의 절반 넘게가 아직까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처녀지이며, 각종 환경 규제를 통하여 그 자연환경을 보호받고 있다. 캐나다의 타이가 숲은 그 규모가 약 300만 제곱킬로미터가 넘어가며 도로, 도시, 공장 따위 로 더럽혀지지 않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처녀림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캐나다의 전체 국토 가운데 약 42% 정도가 숲으로 덮여있으며, 덕분에 전세계 숲 면적의 8%를 캐나다가 차지하고 있다.
캐나다 정부는 전 국토의 약 12.1%를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해놓았으며, 이 외에도 국토의 11.4%에 달하는 면적을 또다시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어 놓았다. 호수나 강들의 경우에도 전체의 13.8%가 자연보호구역이며 8.9%가 개발제한구역이다. 캐나다의 첫 국립공원인 밴프 국립공원은 1885년에 설립되었는데, 그 면적이 약 6,641 제곱킬로미터가 넘어가며 얼음 벌판, 만년빙, 빽빽한 타이가 숲 등이 풍부하여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아름다운 국립공원들 중 하나이다. 캐나다의 슈퍼리어호 국립 해상 보호구역은 그 면적이 1만 제곱킬로미터가 넘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담수호 보호구역이기도 하다. 캐나다에서 가장 거대한 야생보호구역은 스콧 섬 해상국립 야생구역으로, 면적이 11,570 제곱킬로미터가 넘어가며 브리티시 컬럼비아에 살고 있는 야생 조류들의 40%가 넘게 거주할 정도로 생물들이 풍부하다. 캐나다는 약 18개에 달하는 유네스코 생태보존구역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지형과 지질
캐나다의 지형은 실로 다양한데, 아한대 숲이 전 국토에 걸쳐 있으며 북부 지역은 북극에 가까워 얼음으로 뒤덮인 동토로 되어있다. 캐나다 남서부는 비교적 평평한 땅을 이루고 있어 대초원을 조성하고 있는데, 이 지역에서 농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오대호는 남동쪽으로 흐르며 저지대 캐나다 경제 생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세인트로렌스강(Saint Lawrence River)의 수원이다. 약 2,000,000개 이상의 호수가 있으며 그 중 563개 정도는 100㎢(39sq mi) 규모의 큰 호수로 세계 담수의 상당량을 캐나다 호수가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캐나다 로키산맥, 해안산맥 및 북극 코딜라(Arctic Cordillera)에도 담수 빙하가 있으며, 지질학적으로 활동적이며 많은 지진과 잠재적인 활화산, 특히 미거산 대산괴(Mount Meager massif), 가리발디산(Mount Garibaldi), 케일리산(Mount Cayley), 에지자산 화산단지(Mount Edziza volcanic complex)가 있다.
크게는 동부 대서양 연안의 높지 않은 애팔래치아고지(高地), 서부 태평양 연안의 높고 험한 코르디예라 지역, 이들 사이에 끼인 로렌시아대지(臺地:캐나다 순상지), 허드슨만(灣) 저지(低地)와 북극해 제도, 세인트로렌스강(江) 연안 저지, 내륙평원(그레이트플레인스)으로 대별할 수 있다. 애팔래치아 지역은 뉴펀들랜드주(州)·노바스코샤주·뉴브런즈윅주에 걸쳐 있으며 미국 애팔래치아산맥의 연속이다.
북동∼남서 주향(走向)의 고생대층 지질구조를 반영하여, 지형도 같은 방향으로 이어지는 완만하고 낮은 구릉지와 폭넓은 골짜기로 구성되어 있다. 지표는 홍적세(世)의 대륙빙(大陸氷)에 의하여 침식된 곳이 많으나 빙퇴석(氷堆石)이 얹혀 있는 곳도 볼 수 있다. 뉴펀들랜드섬 앞바다에는 세계 3대 어장인 그랜드뱅크스가 있으며, 노바스코샤주의 펀디만은 조수 간만의 차가 14m나 된다. 코르디예라 지역은 환태평양산계의 일환을 이루는 신기조산대(新期造山帶)에 해당되며, 중생대 말기 이후의 큰 조산운동에 의하여 지층이 습곡·단층을 받아 크게 변하고 있다. 캐나다에서는 가장 불안정한 지역이다.
지형상으로는 동부산지(로키산맥)·중앙대지·해안산지(코스트마운틴스)의 3가지로 나뉘며, 높은 부분에서는 산악빙하를 볼 수 있다. 로키산맥은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유콘주 및 노스웨스트주를 향하여 북쪽으로 뻗어 있으며, 금·은·우라늄·납·아연의 광상이 풍부하다. 해안산지에는 캐나다의 최고봉인 로건산(6,050m)이 유콘주의 북동쪽에 솟아 있다. 로렌시아대지는 허드슨만을 둘러싸면서 캐나다 전체의 1/2 이상을 차지하는데,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는 선캄브리아대(代)의 편마암, 기타의 결정질암, 이를 관입(貫入)하는 화강암 등으로 구성된 안정된 육괴(陸塊)이다.
일반적으로 해발고도 200∼1,000m로 기복이 많은 고원상(高原狀)의 준평원을 이루고 낮은 부분에는 호수가 많으며, 전체적으로 보면 움푹 팬 허드슨만을 중심으로 하여 주위가 높아지는 지형이다. 이 지역은 선캄브리아대의 빙하시대에 캐나다의 거의 대부분을 뒤덮었던 대륙빙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므로 빙식작용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허드슨만 저지는 퇴적 이래 거의 흐트러지지 않고 북쪽으로 완만하게 경사지는 고생층(古生層)으로 구성된 구조평야이며, 이 연장부가 배핀섬과 엘즈미어섬으로 이어져 있다. 이들 섬의 높은 부분에는 지금도 빙하가 보인다.
세인트로렌스강 연안 저지는 주로 고생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층은 거의 흐트러지지 않았으나 지표는 대륙빙의 후퇴시에 생성된 기복 있는 지형을 나타낸다.이 유역 저지는 토양이 비옥하고 좌안의 급사면은 수력발전에 적합한데, 서부 태평양 연안과 더불어 캐나다에서는 가장 온난한 기후의 혜택을 받는 지역이므로 낙농·과수원을 비롯하여 각종 작물의 재배가 집약적으로 영위된다. 공업이 발달되었으며, 이 지역에 캐나다 전 인구의 반수 이상이 살고 있다.
내륙평원은 로렌시아대지와 로키산맥과의 사이에 펼쳐지는 광대한 평원이다. 평원에서는 고생대·중생대·제3기의 지층이 서부의 로키산맥 산기슭 부근을 제외하고는 거의 흐트러지지 않고 퇴적되어 있다. 지표는 침식되어 생긴 침식면으로 서부에서 해발고도 1,000m, 동부에서 20m의 고원을 이룬다. 지표는 빙하기에 대륙빙의 영향을 받은 미지형(微地形)을 나타낸다.
기후
지형이 다양한 만큼 캐나다의 기후 역시 다양하다. 남쪽의 온난한 기후부터 북쪽의 북극성 기후까지 크게 12기후 지구로 나뉜다. 툰드라 지역 서부는 건조한 지역으로 7월 평균기온이 10도 이하, 연평균 강수량은 250㎜ 이하다. 동부는 서부에 비해 강수량이 많으며 연평균 강수량이 500㎜ 정도이다. 내륙 북부는 겨울이 길고 6개월 이상 눈이 쌓여 있다. 오대호 남쪽 연안의 겨울은 온난하고 짧으며, 7월 평균 기온은 15도를 웃돈다. 태평양 연안은 캐나다에서 가장 온난한 지역으로 가장 추운 달의 평균 기온이 0도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1,000㎜로 비가 많이 내린다.
캐나다의 평균 겨울과 여름 최고 기온은 지역별로 상당히 차이가 난다. 특히 대륙성기후를 경험하는 내륙과 프레리 지방의 겨울은 상당히 혹독한 편이며 일평균 기온은 -15℃ 정도지만 심한 바람과 함께 -40℃(-40℉) 이하까지 기온이 떨어지기도 한다. 북쪽 지역에서는 일년 내내 눈이 오기도 한다. 브리티시컬럼비아 해안 지역은 평균적으로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는데 겨울 역시 온화하며 비가 많이 오는 것이 특징이다. 동부 해안과 서부 해안의 평균 최고 기온은 일반적으로 20℃(70 °F)이고, 해안 사이의 여름 평균최고 기온은 25~30℃(77~86℉)이며, 일부 내륙 지역의 기온은 때때로 40 °C(104℉)를 넘어가기도 한다.
캐나다 북부 대부분은 얼음과 영구 동토층으로 덮여 있는데 최근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인해 영구 동토층마저 녹아내리고 있어 기후 변화를 톡톡히 겪고 있는 나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캐나다의 연평균 기온 변화를 보게 되면 이를 알 수 있는데, 1948년 이후 1.7℃(3.1℉) 이상 기온이 상승했으며, 지역에 따라서 1.1~2.3℃(2.0 ~ 4.1℉)의 기온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기온 상승의 효과는 북쪽 동토층 지대와 대초원 지대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캐나다 남부 지역의 금속 제련, 석탄 발전 등 산업화가 그 큰 원인 이라고 할 수 있다.
생물다양성과 보전지역
지형과 기후가 다양한 만큼 캐나다의 생태계 구성 역시 매우 다양하다. 15개의 육상 생태계와 5개의 해양 생태계에는 약 80,000 종 이상의 생물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종들도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국토의 절반 이상이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이고 42%의 국토가 산림으로 덮여 있지만, 온난화와 인간 활동 등으로 약 800종 이상의 생물이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보존 지역으로 지정된 곳은 캐나다 최초의 국립 공원인 밴프 국립공원(Banff National Park), 가장 오래된 알곤퀸 주립공원(Algonquin Provincial Park), 슈페리어호 국립해양보전지역(Lake Superior National Marine Conservation Area) 등이 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오래전부터 인디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지만, 백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1678년 프랑스의 선교사 헤네핑이 폭포를 발견한 후이다. 폭포가 떨어지는 벼랑을 케스타 벼랑이라고 하는데 벼랑이 굳은 석회암으로 되어 있지만 폭포의 물이 떨어질 때 비교적 약한 바위의 아래를 깎아내리기 때문에 이 절벽은 해마다 70~110cm 정도 깎여져 나간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브라질 아마존의 이과수 폭포,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크며, 북미 대륙에서는 제1의 폭포로 여겨진다.
역사
유럽인 도착 이전
북아메리카에 처음으로 도래한 사람들은 빙하기 시절 베링 해협을 통해 북아시아에서 육로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시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많은 역사학자, 고고학자, 고인류학자들은 약 3만 년 전에 처음으로 북미 대륙이 인류에게 발견됐고, 1만 5천 년~2만 년 전 대규모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마지막 빙하기를 필두로 아프로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육로는 완전히 끊어졌고, 곧 아메리카 대륙 전체로 퍼진 고대인들은 다양한 문화와 문명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북미 전역에 너무나도 많은 부족과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북미 원주민 문화'라고 한 단어로 퉁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때문에 식민지 시대 이전의 역사는 짧게 정리하기 굉장히 어려워진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이들 문화는 고인디언(Paleo-Indian, 혹은 Paleo-American) 문화에 기반을 두고 발달했으며, 많은 문명이 현재 미국과 캐나다 일대의 대평원과 오대호 주변, 또한 서부 및 남부 지역에 자리잡았다. 이들은 서로 비슷한 창조 신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미시시피 호를 숭상하던 애니미즘 정서와 관련히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경, 온타리오 호수 일대에 이로쿼이 연맹이 결성된다. 현대에는 프랑스어인 '이로쿼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있지만, 정작 이로쿼이 연맹의 사람들은 부족연맹을 하우데노사우니(Haudenosaunee; 긴 집에 함께 사는 사람들)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렀다. 이로쿼이 연맹의 거주지는 현재의 미국과 캐나다 영토에 걸쳐 있었으며, 언어와 문화가 유사한 모호크족, 오네이다족, 오논다가족, 카유가족, 그리고 세네카족 총 5개 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었다.
이로쿼이 연맹은 히아와타를 비롯한 데가나위다(일명 피스메이커, Peacemaker), 지곤사세 등 각 부족의 평화주의적 지도자들이 결성한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연맹이었다. 각 지도자들은 언어적, 문화적인 특성을 깊게 공유하는 다섯 부족들이 서로 함께 평화로운 이웃 사촌으로 살아야 한다는 일념 하에 연합을 결정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히아와타는 전쟁에 시달리던 다섯 부족의 구성원들을 위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부족장들을 설득하며 설득하며 연합을 이뤄냈고, 끝내 공포정치와 전쟁을 일삼던 모호크족의 지도자 타도다호까지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히아와타는 '대평화율법'을 선포하여 다섯 부족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진다. 흔히 이로쿼이 외에도 연합의 특성에서 착안해 '오족 연합(Five Nations)'라고도 불리는데, 1722년 투스카로라족이 가입하며 잠시 '육족 연합(Six Nations)'이 되었다.
유럽인의 도래
지금의 캐나다 땅은 서기 1000년경 바이킹들의 방문 후 한동안 유럽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러나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항해와 함께 서유럽 국가들이 '신대륙'에 흥미를 가지고 아메리카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그 중에서도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현 캐나다 지역에 관심을 보였다.
영국의 개척
1497년, 영어식으로 존 캐벗(John Cabot)이라고도 알려진 이탈리아인 탐험가 조반니 카보토(Giovanni Caboto)는 잉글랜드 왕국의 헨리 7세의 재정 지원과 함께 동양으로 향하는 항로 개척을 위해 항해를 떠난다. 오래도록 바다 위를 떠돌던 카보토 일행은 마침내 육지에 도착하지만, 다다른 곳은 동양이 아닌 신대륙이었다. 이에 카보토는 지명을 뉴펀들랜드(Newfoundland; 새로이 찾은 땅)라고 명명한 후 잉글랜드 왕국의 땅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첫 탐험 이후 잉글랜드에 헨리 8세의 성공회 창립, 메리 1세의 가톨릭 진흥정책 등 온갖 종교, 정치적 혼란이 도래하며 식민지 개척은 잠시 중단되었다.
잉글랜드가 다시 아메리카 대륙 개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엘리자베스 1세 시기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83년에 험프리 길버트(Humphrey Gilburt)를 캐나다 동부로 보냈다. 본래 군인이였던 길버트는 아일랜드 일대의 반란을 진압하며 그곳에 식민지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훗날 대서양 너머 신대륙이 부상하며 자신의 못다 한 꿈을 신대륙에 실현하려 했다. 1578년 길버트는 북미 땅을 식민지화하라는 여왕의 명을 받아 지금의 뉴펀들랜드 세인트 존스(St. Johns)에 도착했다. 세인트 존스를 여왕의 땅이라 선언한 길버트는 뉴펀들랜드를 떠나 항해를 계속하지만, 항해 도중 배 한 척을 잃는 바람에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했지만, 대서양 상에서 폭풍을 만나 길버트 일행은 모두 사망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지만, 잉글랜드의 북아메리카 개척은 계속되었다. 길버트를 이어 캐나다 지역을 탐사했던 사람은 제임스 1세 시대의 잉글랜드 탐험가 헨리 허드슨(Henry Hudson)이었다. 허드슨은 대항해시대의 도래와 함께 동양으로 향하는 항로를 찾기 위해 방백으로 노력하지만,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자금 지원이 끊겼다. 1609년 결국 지원을 받기 위해 영국을 떠나 네덜란드로 향한 허드슨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서포트를 받고 러시아를 지나는 북동항로를 탐사하지만, 북극해의 부빙에 가로막혀 GG를 치고 북서항로로 기수를 돌렸다. 항해를 계속하던 허드슨 일행은 대서양 건너 지금의 노바스코샤 지역에 도착하여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만났고, 북아메리카 동부 연안을 항해하다 얼마 후 기수를 돌려 유럽으로 돌아갔다.
1610년 이번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원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허드슨은 곧바로 탐험대를 꾸려 신대륙으로 떠났다. 지금의 래브라도 북쪽에 다다른 허드슨 일행은 자신들이 알던 땅 북쪽에도 널찍한 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고, 자신의 이름을 따 허드슨 만(Hudson Bay)으로 명명한다. 북서항로 개척을 목표로 탐사를 계속하던 허드슨 일행은, 겨울이 되어 바다가 얼어버리자 탐사를 포기하고 육지에 잠시 머물렀다. 이듬해 봄이 되어 얼음이 녹자 허드슨은 다시 항해를 나서려 하지만, 계속되는 여정에 지쳐버린 선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선원들은 허드슨이 자신들의 의견을 무시하려 들자 그를 납치해 먼 바다로 나포해버린 채 영국으로 향했다.
허드슨 일행이 발견한 땅은 훗날 찰스 1세에 의해 영국 영토로 선포되고, 그의 외조카인 컴벌랜드 공작 루퍼트(Rupert)의 이름을 따 루퍼츠랜드(Rupert's Land)라 불린다. 이후 영국 내전과 올리버 크롬웰의 독재를 거쳐 즉위한 찰스 2세는 1670년 허드슨 베이 회사(Hudson's Bay Company)를 차리고, 루퍼츠랜드 일대의 모피 독점 거래권을 허용했다. 이들은 탐험가들을 초빙해 캐나다 중서부 내륙을 탐험하며 훗날 식민지가 될 땅을 개척해 나갔다.
프랑스의 개척
프랑스 왕국의 캐나다 식민 역사는, 프랑스령 북아메리카 전체를 통칭하는 이름 누벨프랑스로도 잘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첫 캐나다 지역 탐사는 1534년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가 주도한다. 카르티에는 20일간의 항해 끝에 가스페 반도에 다다르게 되고, 그곳에 "프랑스 왕 만세"라는 글귀가 적힌 깃발을 꽂았다. 이것이 프랑스의 퀘벡 개척의 시작이었다. 카르티에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가스페 반도에 살던 이로쿼이 족의 일파 세인트로렌스 이로쿼이 족(St. Lawrence Iroquoians) 족장 돈나코나의 두 아들을 배에 싣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카르티에의 보고를 받은 프랑스 왕은, 황금 어장과 빽빽한 삼림이 있다는 말을 듣고 흥분하여 2번째 원정을 보내게 된다.
1535년 다시 가스페 반도에 도착한 카르티에 일행은 우선 돈나코나의 두 아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원주민들에게 강 상류에 가면 큰 마을과 더욱 더 큰 강이 존재한다는 것을 들은 카르티에는 탐사에 나서고, 지금의 세인트로렌스 강을 발견한다. 강을 따라 항해를 계속한 카르티에 일행은 어느 날 강가의 스타다코나(Stadacona)라는 마을에 도착하게 되고, 현지 원주민들에게 이곳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원주민들은 북쪽 연안을 가리키면서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카나타(Kanata)'라고 했고, 이것이 지금의 국명 캐나다의 유래이다. 그들은 항해를 계속하여 지금의 몬트리올 일대의 마을 오슐라가(Hochelaga)까지 도달했다.
오슐라가 일대의 특성과 원주민들의 언어를 메모한 카르티에 일행은 스타다코나로 돌아가 머물지만, 너무나도 추운 날씨 탓에 선원들 사이에 괴혈병이 도는 바람에 이듬해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아들들이 아닌 추장 돈나코나 본인을 납치한 채로 말이다. 돈나코나는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카르티에 일행과 프랑스 왕에게 카르티에가 발견한 땅 북쪽에 금은보화가 가득한 '사그네 왕국'(Kingdom of Sagney)이라는 신비의 땅이 존재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혹해버린 프랑스 왕은 1541년, 사그네의 보물을 탈취하고 세인트로렌스 강 일대에 영구 정착지를 건설하라는 명령과 함께 다시 한 번 카르티에 일행을 캐나다로 보냈다.
스타다코나에 다다른 카르티에 일행은 스타다코나에서 수 km가량 떨어진 곳에 정착지를 건설하고 샤를부르-로얄(Charlesbourg-Royal)이라 이름지은 뒤 지역을 요새화한다. 이후 돈나코나가 말한 사그네 왕국을 찾으러 떠나지만, 석영과 황철석 등 당시 기준에서 쓸모없는 광물들만 잔뜩 발견한 채 돌아온다. 그러나 오랜만에 다시 찾은 샤를부르 일대도 평화롭지만은 않았는데, 주변에 살던 이로쿼이 족이 프랑스인 정착지를 침범하며 충돌을 일으키는 바람에 일대가 혼란해져버린 것. 결국 카르티에 일행의 세 번째 여정은 상처만을 남긴 채 1542년 프랑스로 귀국하며 마무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왕국은 퀘벡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머지 않아 리슐리외에 의하여 일백조합인상사(Compagnie des Cent-Associés)가 설립되어 식민지 교역을 독점하였고, 지속적으로 원주민과의 모피 교역을 확장해 나갔다. 당시 프랑스의 교역과 함께 발전한 도시가 몬트리올이다. 이들이 정착한 캐나다 북동부는 훗날 아카디(Acadie)/아카디아(Acadia)라고 불리게 된다. 하지만, 야심차게 시작한 식민지 운영은 지나치게 적은 인구로 인해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1660년 당시 프랑스 정착민들의 인구는 겨우 2500명이었다. 17세기에서 18세기 중반까지 상당수의 프랑스 정착민들이 신대륙으로 향했지만, 적응에 실패해 죽거나 프랑스로 되돌아가는 수도 많았다. 오늘날 캐나다와 미국에 거주하는 프랑스계 1천만 명은 초기 정착민 2,600명의 후손들이다.
영국령 북아메리카
위트레흐트 조약과 7년 전쟁
한편, 루퍼츠랜드 일대에 식민지를 개척하던 영국은 프랑스가 차지한 퀘벡과 아카디아를 욕심내기 시작했다. 영국 입장에서는 본국에서 캐나다 내륙으로 들어가기 위해 프랑스 땅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못마땅했다. 무엇보다 이 지역의 거대한 어족자원 역시 탐나는 자산이었다.
1714년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에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위트레흐트 조약이 맺어지게 된다. 주된 조약 내용은 스페인 및 프랑스 왕국의 유럽 내 영토와 식민지를 타국에 할양라는 지시였으며, 이 과정에서 프랑스 영토였던 루퍼츠랜드와 뉴펀들랜드 섬, 노바스코샤 지역이 영국으로 넘어갔다. 이로서 영국은 아카디아 전역을 손에 넣게 되었다. 영국은 한동안 프랑스인들을 계속 아카디아에서 살도록 허락했으나, 얼마 후 7년 전쟁이 일어나자 아카디아 거주 프랑스인들의 충성심을 의심해 모두 쫓아내 버렸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프랑스인들은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가거나 노바스코샤 일대 케이프 브레턴 섬 및 생피에르 미클롱 섬 등으로 도망쳤고, 일부는 루이지애나 등 북미 대륙 남쪽으로 추방되었다. 노바스코샤에서 일어난 아카디아인 축출 등의 사건은 캐나다 동부의 아픈 역사의 일부이다.
아카디아가 넘어가고 나서도 프랑스는 퀘벡을 포함한 대부분의 캐나다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1756년 일어난 프랑스-인디언 전쟁으로 나머지 지역마저 모두 영국에게 넘어갔다.
전쟁 초기 미국의 오하이오 지역에서 영국군과 충돌한 프랑스군은 루이 조제프 드 몽캄(Louis-Joseph de Montcalm) 장군의 지휘 하에 주요 전투에서 승리를 하며 영국군을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온타리오 지역의 영국 주요 교역소였던 오스위고 요새(Fort Oswego)마저 프랑스군에게 함락당하는 등 전황은 영국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영국군은 좌절하지 않았고, 1758년 제임스 울프(James Wolfe) 장군과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역공을 개시했다. 울프의 전장 투입과 함께 루이스버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국군은, 머지않아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을 손에 넣고 퀘벡 공격 계획을 세웠다. 1759년 9월, 제임스 울프가 이끄는 영국군은 퀘벡 주의 아브라함 평원으로 들어서고, 울프 장군을 잃는 처절한 혈전 끝에 프랑스군을 퀘벡 시까지 격퇴시켰다. 퀘벡 시의 요새에서 영국군을 방어하던 프랑스군은, 9월 14일 지휘관 몽캄의 전사하자 끝내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한편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몬트리올 일대로 퇴각하며 본국에서의 지원을 기다린다. 당시 캐나다 총독이었던 보드레이유 후작(Marquis de Vaudreuil)은 전투 패배의 책임을 모조리 몽캄 장군에게 돌리며 퀘벡 시를 되찾으려 했다. 1760년 4월 퀘벡의 영국군이 전투 후유증과 괴혈병에 시달리며 골골대던 그 때, 보드레이유는 군대를 이끌고 퀘벡 시로 향한다. 전투 대비가 미비했고 병사들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던 영국군은 전투를 피하고 후퇴하려 하지만, 사령관 제임스 머레이(James Murray)의 지시 하에 전투를 감행한다. 전투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으나, 퀘벡에서 버티기에 들어간 영국군은 한 달 후 키브롱 만 해전에서 프랑스의 수송선을 쳐부수고 넘어온 영국 해군의 지원을 받아 반격을 시도했다. 당황한 보드레이유 군대는 몬트리올로 퇴각해 방어에 들어가지만 사방에서 밀려오는 영국군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1759년 최후의 보루였던 몬트리올마저 함락되며 퀘벡 전역이 영국의 차지가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파리 조약을 체결하여 공식적으로 퀘벡 일대를 손에 넣었다.
합병 이후에도 퀘벡에 남아 있던 프랑스인들은 영국 왕실에 매우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통치 초기부터 반란 등 충돌이 잦았다. 당시 미국 독립전쟁으로 골머리를 앓던 영국은 퀘벡 일대 캐나다 지역이 독립전쟁에서 미국의 편을 드는 것을 우려했고, 이에 1774년에 퀘벡 조약을 맺어 퀘벡의 프랑스계 주민들이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 프랑스어를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특권을 인정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
1770년대 벌어진 미국 독립전쟁은 캐나다 일대마저 전장으로 만들었다. 당시 미국 독립군은 영국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노바스코샤와 퀘벡 일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에게 자신들과 손을 잡고 같이 미합중국을 이루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꽤나 진지하게 논의되었던 모양인지, 미군은 추후 독립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미합중국에 가입할 식민지 목록에 노바스코샤와 퀘벡을 위한 빈 칸 두 개를 남겨두기도 했었다. 소수의 캐나다인들이 미국 독립을 지지했으나 프랑스계를 포함한 대부분은 중립을 선언하였으며, 노바스코샤와 퀘벡 식민지 정부 역시 미국 독립 정부의 제안에 공식적으로 답하지 않았다.
1775년, 미국 독립군은 리처드 몽고메리(Richard Montgomery)와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장군의 지휘 하에 퀘벡을 공략하기로 했다. 당시 퀘벡은 북미 대륙에 주둔하는 영국군을 갈라놓을 수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방어선이 허술했기 때문. 손쉽게 몬트리올을 점령한 몽고메리 장군은 곧이어 캐나다 측 지휘관 가이 칼튼(Guy Carleton) 장군이 피신한 퀘벡 시를 공격하려 한다. 몽고메리 군대는 우선 물자 재보급을 위해 보급병력을 지휘하던 아놀드 장군을 기다렸으나, 메인 주에서 병력을 보트에 태워 강을 따라 빠르게 퀘벡으로 향하려 했던 아놀드 일행은 거센 강물 때문에 빠른 이동은 커녕 대부분의 보트가 침몰하였고, 부족한 물자에 더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겨울이 가까워지며 폭설이 내렸다. 그럼에도 두 장군은 승리를 위해 무리하게 퀘벡 시 공격을 강행했으나, 결과적으로 크게 패했다.
미국 대륙군은 퀘벡 전투의 패배로 대부분의 병사들과 몽고메리 장군을 잃었으며, 아놀드 장군 역시 부상을 입고 물러났다. 한편 성공적으로 퀘벡을 방어한 칼튼 장군과 영국군은 본토에서 온 지원 병력과 함께 대륙군을 몬트리올까지 퇴각시켰다. 계속해서 대륙군을 쫓아가던 영국군은 1776년, 추가 병력을 확보한 미국군과 뉴욕 주 챔플레인 호수 일대에서 맞붙는다. 발쿠르 섬 전투로 알려진 이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머지않아 또다시 겨울이 찾아오자 칼튼의 군대는 몬트리올로 돌아간다. 그러나 퀘벡 점령 당시 벌였던 대륙군의 횡포 탓에 미국 독립군의 이미지는 크게 추락했고, 소수나마 캐나다에 남아 있던 독립군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리게 되었다.
독립전쟁이 끝난 이후 약 75,000명의 미국 내 왕당파(영국 지지자)들이 캐나다로 피신하면서 캐나다는 명실상부한 친(親)영국 국가가, 미국은 반(反)영국 국가가 되었다. 한동안 총과 칼을 들고 싸우던 두 나라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롭게 왕래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특히 비옥한 캐나다 동부의 토양에 관심을 가진 미국 농부들이 캐나다로 이민을 오기도 했다.
식민지 정부
미국 독립전쟁에서 패배한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승인한 후 1791년 헌법 (Constitutional Act of 1791)을 제정하여 남은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행정을 재편했다. 영국 의회는 당시 캐나다에 위치한 영국 식민지를 프랑스계 지역 하류 캐나다(Lower Canada)[4]와 영국계 지역 상류 캐나다(Upper Canada)[5] 2개 주로 나누고, 주별로 정부를 형성하여 영국의 허락 아래 자체 법률을 통과시키는 것을 허용했다.[6] 또한 영국은 부총독(Lieutenant Governor)을 임명해 캐나다로 파견을 보냈고, 부총독은 현지의 행정을 도맡을 장관들을 임명했다. 여기에 현지 주민들로 구성된 의회가 차려져 부총독에게 민의를 전달하기 시작했지만, 실질적인 주권은 부총독과 그의 내각에게 있었다.
미영전쟁
자국군을 꺾고 독립을 한 미국이 아니꼬왔던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이 터지자 영국군 탈영병들을 수색한다는 핑계로 미국 상선들을 맘대로 수색하여 압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더해서 미국인 상인들을 탈영병으로 몰아 영국군에 강제로 징집하거나 프랑스군과 내통한다는 누명을 씌워 미국 상선들에 발포까지 하기도 했다. 이에 화가 난 미국인들 가운데서 영국과 다시 싸우자는 강경파 여론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동시에 아직 영국령이었던 캐나다에도 반미 여론이 감돌며 두 나라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당시 초강대국인 대영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독립 초기 미국에게 다소 무리한 도박이었지만, 미국은 영국이 나폴레옹과 싸우느라 다른 곳에 파견할 여유 병력이 부족한 틈을 타 전쟁을 일으킨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해군을 가진 영국의 본토를 직접 공격하기 어려워 영국령 캐나다가 그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에 1812년, 미영전쟁이 발발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영국의 지원 병력이 없던 캐나다는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했고, 미국에게 오대호 지역과 토론토, 그리고 몬트리올까지 함락당한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전쟁을 터뜨린 미국 역시 준비가 잘 안된 상태였으며, 특히 영국의 지원을 받고 미국의 원주민 탄압에 대항하던 테쿰세가 본격적으로 캐나다 방어를 돕자 전쟁은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미국은 영국 본국이 나폴레옹에 정신 팔린 틈을 타 빠르게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폴레옹을 잡은 영국군이 캐나다로 향하는 걸 허용했고, 본토 군대의 지원에 아메리카 원주민까지 등에 업은 캐나다군은 순식간에 미군을 몰아낸 뒤 미국 본토를 침공했다.
영국령 캐나다 군은 순식간에 뉴욕을 함락시키고 빠른 속도로 남진, 수도 워싱턴 DC를 점령하고 백악관까지 불태워버렸다. 미국 역사상 워싱턴 DC가 적군에게 점령당하고 백악관이 전소한 적은 이때가 유일하다. 하지만 미군의 반격도 예상보다 거셌기에 영국군은 유의미한 승리 없이 각지에서 피해를 입으며 손해를 누적시켰다. 결정적으로 교착 상태가 한창이던 와중에 나폴레옹이 유배지 엘바 섬을 탈출하면서 영국 본토가 또다시 전쟁터로 변했고, 이에 계속되는 전쟁에 지쳐버린 미국과 황급히 종전 협약을 맺으면서 캐나다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각지의 반란
상술한 바와 같이 영국령 캐나다는 실질적으로 영국에서 파견된 부총독 및 그의 내각의 독재로 굴러갔는데, 시간이 지나며 이러한 권력구조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특히 하캐나다(퀘벡)의 경우 소수의 영국계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프랑스계를 제치고 권력을 독점하면서 많은 프랑스계가 불만을 품고 있었다. 상캐나다(온타리오)라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았는데, 성공회 교도 중심으로 이루어진 상캐나다 식민지 정부가 비(非) 성공회 교파 소속 주민을 차별한 것이다.
이로 인해 1830년대 캐나다 전역에서 수많은 현지 주민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1837년과 1838년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퀘벡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반란을 일으키지만 곧 무참하게 진압당했고, 온타리오에서도 1836년에 반란이 일어났다가 철저하게 진압당했다. 하캐나다의 반란은 미군의 지원까지 받으며 제법 끈질기게 이어졌지만, 상캐나다의 반란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반란 이후 하캐나다에서는 영국군에 의한 보복이 횡행했으며, 영국 정부는 반란을 계기로 하캐나다의 프랑스계를 영국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프랑스어 사용을 금지하는 초강경 정책을 도입했다.
더럼 보고서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잇따른 반란에 놀란 영국 정부는, 제1대 더럼 백작 존 램턴(John Lambton)을 캐나다에 파견해 캐나다 식민지 통치의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해 보고서를 올리도록 했다. 명을 받고 캐나다를 둘러본 더럼은 영국으로 귀국해 더럼 보고서(Durham's Report)를 발간한다. 보고서의 내용은 영국 정부의 양캐나다 통합 정책에 찬성하지만, 동시에 현지의 민심을 무시하는 식민지 정부와 프랑스어 탄압 정책은 지속적인 반란을 낳을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었다.
더럼 보고서는 영국 정권계에 큰 논란을 일으켰고, 특히 토리당 인사들을 중심으로 많은 정치인들이 그의 자유주의적 사고관이 담긴 주장을 비판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그의 보고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1841년에 상캐나다 정부와 하캐나다 정부를 하나(Province of Canada)로 통합했다. 영국은 또한 통합 캐나다 정부의 휘하에 서캐나다(Canada West, 온타리오), 동캐나다(Canada East, 퀘벡)이라는 행정구역을 두었고, 이전처럼 총독을 캐나다 현지에 파견하되 행정권은 현지 의회에서 선출한 총리와 장관들이 행사하도록 했다. 이는 영국 식민지 최초의 책임정부(Responsible Government, 자치정부)였다. 물론 퀘벡 탄압 정책도 완화되어 프랑스어도 다시 허용되었다. 한편, 별도의 식민지가 꾸려져 있던 노바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뉴펀들랜드, 뉴브런즈윅에도 캐나다와 동일한 이유로 자치 정부가 만들어졌다.
양 정부의 통합으로 캐나다는 수도를 다시 정해야 했는데, 온타리오와 퀘벡은 자신들의 영역에 수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캐나다 주 정부는 킹스턴, 몬트리올, 토론토, 퀘벡 시티 등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빅토리아 여왕의 중재 끝에 온타리오와 퀘벡 중간의 오타와가 수도로 정해지면서 오타와에 정착했다.
이 시기부터 세계 각지에서 캐나다(온타리오, 퀘벡, 동부 지역)로 향하는 이민이 본격화되었다. 마침 아일랜드 대기근이 터지는 바람에 많은 수의 아일랜드인들이 캐나다로 유입되었고, 영국에서도 수많은 하층민들이나 고아들이 캐나다로 유입되었다. 또한 미국이 여전히 노예제를 유지하던 시기 미국의 몇몇 흑인 노예들도 지하철도 등의 반노예제 비밀결사들의 도움에 힘입어 18세기에 이미 노예제를 폐지한 캐나다로 도망쳤다. 이때 미국에서 흑인 노예들을 다시 잡아들이려 노예 사냥꾼을 캐나다에 파견하기도 했는데, 이들이 캐나다에서 난동을 부려 외교 문제로 번지기도 했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한편 별도의 정부가 꾸려지지 않았던 캐나다 서부 및 루퍼츠랜드, 북서부 변방 지역에도 이민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지역은 태평양에 맞닿아있어 온타리오나 퀘벡에 비해 개척이 늦었지만, 제임스 쿡에 의해 영국에서도 브리티시 컬럼비아 지역이 알려지고 소수의 이민자들이 밴쿠버 섬에 자리잡으면서 이 일대를 관할하는 작은 식민정부가 세워졌다. 얼마 후 브리티시 컬럼비아 내륙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었고, 이에 따라 내륙으로도 이민자들이 유입되자 영국 정부는 재빠르게 브리티시 컬럼비아 지역에도 식민정부를 수립했다. 한동안 남남이었던 두 식민정부는 밴쿠버 섬 쪽이 재정난을 겪으면서 하나의 식민정부인 브리티시 컬럼비아로 통합되었다.
캐나다 자치령
1800년대 들어 미국이 빠르게 발전하자, 영국은 캐나다가 미국에 합병되는 것을 막기 위해 행정, 정치적 통합에 나섰다. 이에 따라 1867년 기존 캐나다 지역이었던 퀘벡, 온타리오에 대서양 일대의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를 더해 총 4개 주로 이루어진 캐나다 자치령이 출범했다.
캐나다에 자치 정부를 수립한 영국 정부는 장차 영국령 북아메리카, 곧 지금의 캐나다 전 지역이 하나로 통합되길 바랐으나, 서로 다른 경위로 구성된 캐나다 주(온타리오, 퀘벡)와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뉴펀들랜드간의 이해 관계 충돌로 통합은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캐나다 거주민들은 미국이 미국-멕시코 전쟁을 벌인 다음 명백한 운명 등의 주장을 하는 걸 보고, 점차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국이 엄연한 주권국 멕시코를 찍어누르고 땅을 뺏는 행위를 정당화하자 어쩌면 자신들도 멕시코와 똑같은 신세가 될 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 남북전쟁의 발발과 함께 북군의 아일랜드인 병사들 일부가영국령 캐나다에 침입해 난동을 피운 것을 계기로,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 통합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1864년,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 정부 대표들은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정부가 있는 샬럿타운에 모여 통합을 논의했고 이중 캐나다 주,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는 통합에 찬성했다.
1867년 영국 의회에서 영국령 북아메리카법 (British North America Act of 1867)이 통과되며 대영제국 최초의 자치령인 캐나다 자치령(Dominion of Canada)이 창설되었고, 서, 동 캐나다로 불리던 주는 각각 온타리오와 퀘벡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캐나다 자치령은 대영제국의 자치령으로써 영국 정부의 허가 아래 헌법을 수정할 수 있는 높은 권한을 받았으며, 통합된 각 식민지 정부 역시 자치령 휘하의 주 정부가 되어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국가로써의 캐나다는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되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법안이 통과된 7월 1일은 현재 캐나다의 건국을 기념하는 국가 공휴일인 캐나다의 날(Canada Day)로 지정되어 있다.
캐나다 자치령은 1870년 허드슨 베이 컴퍼니에 30만 달러를 지불한 뒤 루퍼츠랜드를 매입했다. 캐나다는 같은 해 현 캐나다의 유콘 주, 북서부 준주, 누나부트 준주의 일부가 되는 북서부 지역도 사들이고, 이듬해 머나먼 대륙 반대편의 브리티시 컬럼비아까지 통합한다. 당시 브리티시 컬럼비아 통합을 위해 캐나다 정부가 내건 정책은 꽤나 파격적이었다. 우선 브리티시 컬럼비아 영토 내 영국 해군 태평양 기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통합 이전 식민지 정부의 부채를 전액 탕감해주기로 한다. 여기에 10년 내로 대륙 횡단 철도 건설까지 약속해버리자 혹한 브리티시 컬럼비아 정부는 통합을 승인해버린다. 한편 브리티시 컬럼비아 가입 후 2년이 지난 1873년,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가 연방에 가입한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는 원래는 캐나다 연방 창설을 위한 회담에도 참여했지만 정작 연방 결성에는 불참했는데, 철도를 놓아준다는 조건으로 1873년 뒤늦게 연방에 가입했다.
캐나다 자치령이 이처럼 온갖 혜택을 다 주면서까지 브리티시 컬럼비아를 끌어들이려 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만약 영국령 북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태평양과 접한 브리티시 컬럼비아가 미국에 붙는 순간 태평양 해안선은 모조리 미국의 차지가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한창 미국을 견제하던 영국 입장에서도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에 어떻게든 브리티시 컬럼비아를 캐나다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이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캐나다 자치령은 태평양을 손에 넣지만, 가입 당시 약속한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을 차일피일 미뤄버린다. 이에 화가 난 브리티시 컬럼비아 정부 내에서 탈퇴 논의까지 오가자, 캐나다 정부는 민간 자본 투자를 받아 캐네디언 퍼시픽(Canadian Pacific)이란 철도 기업을 설립해 가입 14년만인 1885년에 대륙 횡단 철도를 완성했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통합과 함께 캐나다는 영토 확장과 인구 증가를 위해 서부 개척에 나섰다. 우선 메티스인들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매니토바 주를 창설하고, 서부 내륙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서스캐처원, 앨버타 주가 창설되었다. 이로써 현대 캐나다를 구성하는 10주와 3준주 중 뉴펀들랜드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자치령에 가입했다. 당시 자치령 가입을 거부한 뉴펀들랜드는 캐나다와 별도의 자치령으로 승격한다.
한편 미영전쟁 이후 캐나다와 미국의 관계는 천천히 회복세에 들어섰으며, 양국의 발전과 함께 많은 사람들을 주고받았다. 1800년대 초반에는 캐나다 서부에서도 골드러시가 일어나 많은 미국인들이 캐나다로 건너왔었고, 1800년대 후반 부터는 미국의 캐나다보다 훨씬 빠른 산업화로 인해 수많은 캐나다 사람들이 미국으로 떠나기 시작했으며, 1870년대에는 약 캐나다 인구의 1/6이 미국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또 여러 미국 기업들이 캐나다에 진출하여 캐나다 시장에서 점유율을 넓혀 갔다. 또한 20세기 들어서 캐나다에 라디오가 보급되자 미류 열풍이 불어 라디오 방송 시간의 대부분을 미국 노래들이 차지하기도 했다. 미국 문화의 영향력에 의해 캐나다 현지 문화가 잠식될 위기를 느낀 캐나다 정부는, 자국의 문화 예술 발전을 위해 여러 협회를 창설하고 캐나다 최초의 방송국을 개국하였고, 이것이 지금의 캐나다 공영방송 CBC의 시작이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19세기 후반
캐나다 자치령 정부는 1867년 이후 완전한 내정 자치권을 얻었지만, 정작 외교권과 군사권은 계속 대영 제국 정부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본국 정부와 캐나다의 이해관계가 계속 충돌하면서, 남아 있는 외교 및 군사권도 가져와야 한다는 여론이 캐나다에서 일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은 독일 제국이 부상하며 점차 아메리카보다는 유럽 대륙에 집중했고, 따라서 가급적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려고 했다. 이때 영국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867년과 1903년 벌어진 미국-캐나다 국경 분쟁이다.
당시 영국은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와 미국 워싱턴 주, 그리고 캐나다와 미국 알래스카 주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미국의 입장을 많이 들어주며 자기들 멋대로 분쟁을 해결해버렸다. 당연히 이는 현지 캐나다인들의 공분을 샀고, 캐나다 내에서 자주적인 외교와 군사 운용을 향한 목소리가 커지는 계기가 되얶다. 이후 1909년 들어 자치령 독자 외무부를 설립하며 점차 영국으로부터 외교권을 가져오게 되었고, 1926년 밸푸어 선언이 발표됨으로써 마침내 캐나다가 독자적으로 외교권을 발휘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밸푸어 선언 발표 직후 1927년에는 워싱턴 D.C. 주재 캐나다 대사관이 문을 열었으며, 당해 체결된 미-캐나다 어업 협정도 캐나다 수산 장관이 직접 서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캐나다인들 사이에서 자주 독립의 여론이 생겨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전쟁 초기 자치령 주민들은 캐나다가 영연방의 일원으로서 의무적으로 참전한 사실에 대해 당연히 영국을 도와야 한다며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며 많은 수의 캐나다인들이 전사하였는데도 연합군 병력이 모자라자, 1917년 캐나다 정부는 자치령 일대에 징병령을 내려버린다. 갑자기 내려진 징병령에 캐나다인들, 특히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간 퀘벡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본인들이 자치령 소수민족으로써 영국계와 비교해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자신들과 별 관련도 없는 영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여기에 캐나다인 군부대들이 프랑스어를 금지하고 영어만을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등 차별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프랑스계 캐나다인들 사이에서 민족주의 및 반전 여론이 급속도로 퍼지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전쟁을 계속하고 싶던 정치권은 전쟁에 호의적이었던 영국계 캐나다인들을 등에 업고 징병령을 통과시켜버렸다. 이에 차근차근 쌓여 가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불만이 임계점을 넘어버리며 민족주의 폭동으로 번졌다. 1918년 퀘벡 전역에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폭동이 발발했고, 캐나다 정부는 군사를 동원해 무력으로 폭동을 진압하기에 이른다. 1917년 징병 위기(Conscription Crisis of 1917)라고 불린 이 폭동으로 캐나다 사회는 큰 상처를 입었으며, 당시 줄기차게 징병제를 밀어붙였던 캐나다 보수당은 폭동 이후 한동안 퀘벡 지역 선거에서 쓴맛을 봐야 했다.
어찌됐건 캐나다 병사들은 캐나다군이 아닌 영국군으로써 1차 대전에 참전했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여러 번 승리를 쟁취하며 활약했다. 전쟁 당시 독가스가 처음으로 쓰인 제2차 이프르 전투(Second Battle of Ypres)에서, 캐나다인 병사들은 영국군의 지원이 올 때까지 오줌 적신 수건을 코와 입에 댄 채 독가스를 막고 전선을 사수했다. 1917년의 비미 리지 전투(Battle of Vimy Ridge)는 처음으로 작전 입안부터 실제 동원병력까지 거의 95% 이상이 캐나다군이었던, 캐나다가 주도한 첫 전투이다. 부활절 다음날인 월요일, 캐나다 병사들은 따뜻한 음식과 럼주로 배를 채우고 전투를 시작했다. 이후 포병의 지원사격을 받은 1만 5천 명의 본대가 독일군 제1진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독일군의 격렬한 반격을 뚫고 진흙 구덩이, 철조망, 지뢰를 넘으며 전진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캐나다 병사들은 최전방 방어선을 넘었는지도 모른 채 제2차 방어선까지 진격하며 독일군을 무너뜨렸다.
비미 리지 전투의 승리 이후 캐나다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영국군이고 프랑스군이고 왕창 깨졌던 요충지를 비교도 안 되게 적은 희생으로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캐나다 병사들이 항상 입에 달고 다녔던 말이 "Who won at the Vimy?"였을 정도였다. 상술한 여러 번의 전투에서 성과를 거둔 캐나다 병사들은 서로 출신지에 따라 '온타리오 주 파병 군단', '매니토바 주 파병 군단'으로 구분짓기를 그만두고, 하나의 '캐나다군'으로 생각하며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전쟁의 활약상은 캐나다 본토에도 널리 퍼져나갔으며, 통합과 함께 상호간에 이질감을 느끼던 자치령 주민들에게 '캐나다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확립시켜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자국에 대한 캐나다인들의 자부심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고, 점차 캐나다인들 사이에서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온전한 자주 국가를 이루자는 의견이 우세해졌다. 종전 이후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당시 캐나다 총리였던 로버트 보든(Robert Borden)은 유럽 열강들에게 캐나다의 전쟁 피해를 강조하며 캐나다를 영국 자치령이 아닌 독립 국가로써 대우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를 포함한 주요 열강 지도자들이 승낙했고,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과 함께 캐나다는 국제 사회로부터 독립국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후 캐나다는 국제연맹에도 자발적으로 가입했다.
한편 전쟁이 끝나 가던 1918년, 본국 영국에서의 서프러제트와 함께 캐나다에서도 여성참정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당시 여성 인권 신장에 호의적이었던 보든 총리는 1917년 우선 전쟁 미망인들과 군인 남편, 아들을 가진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듬해 보든은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여성들에게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줄 것을 약속하고, 뒤이은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연임에 성공했다. 1918년, 보든은 마침내 퀘벡을 제외한 캐나다 전 지역의 여성들에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했다. 이후 1921년 온타리오에서 캐나다 최초의 여성 의원 아그네스 맥페일(Agnes Macphail)이 당선되고, 1940년에는 퀘벡 주도 완전한 여성참정권을 보장하며 지금에 이르게 된다.
전쟁과 함께 캐나다 자치령은 사실상의 독립국으로 인정받지만, 행정상으로는 여전히 영국에 소속된 자치령에 불과했다. 이처럼 독립국도, 속령도 아닌 캐나다의 지위는 1926년 들어서야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당시 자치령 총독 줄리언 빙(Julian Byng)이 총리 매켄지 킹(Mackenzie King)의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요구를 거부하면서, 캐나다 정계는 자치령 내의 헌법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로 왈가왈부하기 시작했다. 이번 일로 크게 데인 매켄지 킹은 당해 제국회의(Imperial Conference)에서 영국 자치령의 지위를 재정의하자는 의제를 올렸고, 논의 끝에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과 함께 모든 자치령이 영국과 동급의 주권을 가지게 되었다. 밸푸어 선언의 내용은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Statute of Westminster)의 제정과 함께 법률로 명시되었다. 이로써 캐나다를 비롯한 모든 영국 소속 자치령이 실질적인 주권 국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1차대전의 활약상과 함께 온전한 주권국가가 된 캐나다는, 곧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국회 회의를 통해 연합군으로써 참전을 결정했다. 1943년 12월, 연합군은 이탈리아 전선의 오르토나라는 마을에서 독일 공수부대를 상대로 크게 고전했는데, 좁은 골목과 길거리로 가득한 마을 곳곳에 독일군이 매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착화된 전투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캐나다군은 쥐구멍(mousholing) 전술을 고안, 캐나다군은 시가지 건물마다 몰래 폭탄으로 구멍을 뚫어 진입로를 만들었고, 도시 전체에 걸쳐 이 과정을 반복한 결과 안전한 통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캐나다군의 쥐구멍 작전은 현대전에서 자주 쓰이게 된다.
익히 알려진 오마하 해변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하지만, 캐나다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큰 활약을 했다. 다른 연합군 병력과 함께 주노 해변에 상륙한 캐나다군은 상륙한 지 불과 15분만에 독일군의 저항을 분쇄해버리고 해변을 점령했다. 캐나다군은 여기서 더 나아가 영국군이 고전하고 있던 골드 해변의 후방을 우회기동으로 차단하고 조여들어가 독일군을 포위 섬멸하였다. 덕분에 영국군은 1시간 먼저 상륙을 시작한 미군보다 더 일찍 해변을 장악할 수 있었다.
캐나다군이 너무나도 빠르게 독일군을 격파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주노 해변의 방어가 허술한 게 아니었냐는 의견도 나오는데, 당시 사상자 수를 보면 골드 해변의 영국군 사상자가 약 400여명, 주노 해변의 캐나다군 전사자가 359명에 부상자가 574명이였고, 소드 해변의 영국군 및 자유 프랑스군은 683명의 사상자를 기록하였으며, 유타 해변에서는 200여명의 사상자만을 기록했다. 즉 주노 해변은 사상자 수로는 오마하 해변 바로 다음이었을 정도로 저항이 거센 해안이었다. 대전 기간에 윈스턴 처칠은 "나에게 캐나다 병사와 미국의 기술력, 영국의 장교들이 주어졌다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12]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만큼 캐나다 병사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캐나다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키워나갔다. 종전 이후 캐나다는 UN에 가입하였으며, 1949년에는 마지막까지 별도의 자치령으로 남아 있던 뉴펀들랜드가 주민투표 끝에 캐나다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1956년 수에즈 전쟁 당시 중립과 평화를 주장하여 영국의 파병 요청을 거절하며 군사, 외교적으로 영국에게서 독립된 자주국임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캐나다는 명목상 자치령으로서 헌법 수정안을 통과시킬 때마다 영국 정부의 허가를 받는 것이 필요했는데, 훗날 1982년 영국과 캐나다에서 동시에 캐나다 법(Canada Act 1982)이 제정되고 나서야 영국 의회의 허가 없이 자체적으로 법을 만들고 수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캐나다는 영국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정치
경제
인문사회
문화
동영상
참고자료
- 〈캐나다〉, 《나무위키》
- 〈캐나다〉, 《위키백과》
- 〈캐나다의 국기〉, 《위키백과》
- 〈캐나다의 국장〉, 《위키백과》
- 〈캐나다-Canada〉, 《요다위키》
- "Canada", Wikipedia
- 〈캐나다〉, 《두산백과》
- 〈캐나다의 지형과 지질〉, 《두산백과》
- 〈캐나다의 기후〉, 《두산백과》
- 〈캐나다의 생물다양성과 보전지역〉, 《두산백과》
캐나다 주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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