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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양]]으로 환도한 [[선조]]는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의 사저(私邸)를 개수하여 임시 궁궐로 사용했고 그곳을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 선조는 경복궁 대신 창덕궁부터 우선 중건하도록 결정하여 1605년부터 창덕궁 중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사실 선조는 경복궁 먼저 중건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착공에 들어갔지만, 경복궁 터가 너무나 황폐화되어 복구하는 데 엄청난 물자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되자 결국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이후 [[한양]]으로 환도한 [[선조]]는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의 사저(私邸)를 개수하여 임시 궁궐로 사용했고 그곳을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 선조는 경복궁 대신 창덕궁부터 우선 중건하도록 결정하여 1605년부터 창덕궁 중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사실 선조는 경복궁 먼저 중건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착공에 들어갔지만, 경복궁 터가 너무나 황폐화되어 복구하는 데 엄청난 물자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되자 결국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광해군]]은 즉위 후 중건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창경궁]]]을 재건하였고, 새로 [[경희궁]]과 인경궁을 짓는 등 궁궐병이라 불릴 정도로 여러 궁궐을 동시 다발적으로 지었지만, 경복궁은 끝내 중건하지 않았다.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경복궁 중건을 일부러 피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경복궁은 조선 후기 내내 중건되지 못했고 궁궐 터는 일반인 출입금지 지역으로 묶인 채 270여 년간 벌판으로 방치되고 있었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의령남씨가전화첩의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를 보면 영조가 근정전이 불타고 남은 축대 위에서 신하들에게 하례를 받는 모습이 있어, 그냥 아무 관리 없이 방치된 것은 아니고 나라에서 관리는 지속해온 것으로 보인다.경복궁은 울창한 산림에 둘러싸인 주변 환경에 힘입어 조선 시대에 이어 구한말까지 범의 주요 출몰지역 중 하나였다. 또 조선시대에 호랑이라 기록되던 '범' 중 일부는 표범이었는데, 조선시대 한양에서 서식했던 '도시표범'에 대한 연구를 이어오던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과 런던동물원은 한양에 출몰하였던 이러한 '도시표범'들이 300년의 세월 가까이 비어있던 경복궁을 은거지로 삼아 숨어있다가 어두워지면 한양 도심으로 나와 사냥에 나섰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버려진 경복궁은 맹수들에게 있어 이상적인 서식지였는데, 주요 사냥터인 도심지는 물론 주변의 산과도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즉 낮에는 경복궁의 폐허나 인왕산, 북악산 등에 은거하다가 밤이 되면 도시로 기어나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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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0일 (수) 20:26 판

경복궁 전경

경복궁(景福宮, Gyeongbokgung Palace)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청와대로에 있는 조선 왕조법궁(法宮, 정궁)이다. 1395년(태조 4년)에 창건하였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 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이후 그 임무를 창덕궁에 넘겨주었다가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는 등 많은 전각들이 훼손되었으나, 1990년대부터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등 복원사업을 벌인 덕분에 복원 작업은 현재 거의 완료된 상태이다.

경복궁은 《주례》 〈고공기〉에 입각하여 건축되었다. 3문 3조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외조, 내조, 연조이다. 내조는 근정전을 중심으로 하는데, 궁 밖에서 근정전까지 바깥부터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이다.

경복궁은 조선이 건국된 지 3년여가 지난 1394년 12월에 착공되어 1395년 9월 말에 1차 완공되었다. 흔히 비교되는 명나라자금성보다 먼저 지어진 궁전이다. 자금성은 1406년에 착공되어 1420년에 완공되었다.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景福)을 모시리라.'라는 시(詩)를 외우고,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고 이름 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정도전,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1395년) 10월 7일 정유 2번째기사 中

구조 및 지리

경복궁 위성사진
북궐도형(北闕圖形), 1907년 제작

원래는 신진사대부가 계획한 궁궐이기 때문에 '검이불루 화이불치'(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유교 이념을 반영하여 이전 왕조들의 궁궐에 비해 화려한 장식 없이 수수하고 검소한 형태로 지어졌었다. 배치는 유교적인 관점에 따라 삼문삼조의 형태로 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전 조선 전기 동안 조선 왕조의 법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경복궁은 법궁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엄정한 기하학적 공간 분할, 반듯한 축선 상의 건물 배치, 정연한 대칭 구조로 설계되었다. 이궁인 창덕궁(+창경궁)과 양궐 체제를 갖췄는데, 임금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두 궁궐을 번갈아 가며 사용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그 자리만 출입이 금지된 채 200여년 동안 재건되지 못하다가 흥선대원군이 재건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참고로 흥선대원군이 지은 경복궁과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경복궁의 모습은 다소 차이가 있다. 세종이 왕자 시절 2층에서 자다가 병이 났다는 등 다층 건물에 대한 기록이 눈에 띈다. 또한, 근정전에 청기와를 얹었다는 언급 등 차이점이 보이며,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 왕실에서 제작했다는 석가탄생도 등에서 묘사된 건축 양식을 통해 그 당시의 경복궁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최대 규모 5,000칸까지 서서히 확장되었던 이전 건물과 다르게 흥선대원군은 단숨에 7,400칸짜리로 중건했다. 단숨에 1.5배 크기가 된 것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해 있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경복궁역이며, 5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안국역이나 광화문역에서도 걸어갈 수 있다. 경복궁 앞길에는 각종 관청이 있어 육조 거리라고 불렸으며, 이 길이 오늘날의 세종대로다. 당대에도 국가의 중심 거리였기 때문에 육조 거리는 지금의 세종대로의 폭과 거의 같은 폭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현재 세종대로 중앙에는 광화문광장이 있다. 주변에는 청와대, 헌법재판소, 정부서울청사, 주한미국대사관, 세종문화회관 등이 있으며, 인사동거리도 경복궁에서 꽤 가깝다.

역사

과거의 모습을 반영한 경복궁도 (서울역사박물관)

조선 전기

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즉위 3년 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년(태조 3년)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 및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 처음 새 궁궐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남경 이궁(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협소하여,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웠다. 새 궁궐 경복궁은 태조 4년(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 29일에 1차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해인 1395년 음력 10월 태조는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이 지어졌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 높이 20자 1치, 둘레 1813보(步: 6尺)의 담을 쌓고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을 두었다. 조하를 받는 정전인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을 비롯한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은 편전이며,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에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실록 내용을 통해 창건 당시 경복궁의 기본 배치를 짐작하자면, 경복궁은 남북축 선상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문, 정전, 보평청, 연침의 순서로 남북 직선축을 따라 중심 전각이 나란히 놓이고, 중심 전각 주변에는 행각이 좌우 대칭으로 네모반듯하게 감쌌으리라 추정된다. 그리고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보는 외전은 궁궐 앞쪽에, 내전은 뒤쪽에 배치하는데, 내전의 각 전각과 정전은 천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의 외곽 울타리인 궁성을 건설한 것은 궁궐을 완성한 지 3년 뒤인 태조 7년(1398년)의 일이었는데, 이 해 1월에 민정을 징발하여 궁성 공사에 들어갔다. 공사는 겨울 동안에 대체적인 궁성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그 해 7월이 경기 좌도와 충청도 군사 3,700명을 동원하여 궁성을 수축하였다. 궁성에는 정문인 남문 외에 동문과 서문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북쪽은 궁성과 문을 갖추지 못하고 목책으로 둘러쳐 있다가 세종대에 와서야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궁궐이 창건되었을 때 실록 기록 말미에 "(뒤에)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고 나와있어서, 궁성 문 남쪽에 의정부나 육조 등 여러 관청이 좌우로 조성된 것은 궁성과 궁문이 조성된 태조 7년 때로 추정된다.

경복궁과 광화문의 축을 북한산과 관악산을 연결하는 축선과 일치하도록 서쪽으로 틀어지게 지었는데, 무학대사가 '관악산은 불(火)의 산이기 때문에 관악산과 북한산을 축으로 하면 도시가 화를 당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광화문 앞길 130m 구간만 경복궁과 같은 축선으로 배치하고, 그 다음부터 종로 입구까지는 도로의 중심이 동쪽으로 최대 39m 가량 틀어진 구조로 조성하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1399년 정종이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4년 만에 경복궁은 빈 궁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후 1405년 태종이 한양 재천도를 단행했는데, 태종은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창덕궁을 새로 건설하여 이곳으로 들어왔다. 태종은 경복궁을 매우 꺼려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했다. 태종이 1405년 한양으로 재천도를 명하고 개성을 떠나 한양에 도착했을 때 아직 창덕궁이 완공되지 않아 입궐이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이때 태종은 경복궁에 들어가지 않고 민가에서 일주일 정도 숙박한 후에 창덕궁에 입궐했다. 태종이 경복궁을 얼마나 꺼렸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당시 창덕궁은 꽤나 짧한 일정 속에 지어졌는데, 경복궁에 비해 매우 작은 규모였고 정전(正殿)인 인정전은 3칸 규모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1411년 태조가 승하한지 3년이 지나자 사간원에서 ‘태조께서 지으신 경복궁을 비워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요지의 상소를 올려 태종에게 경복궁에 다시 거처하라고 주청한 일이 있다. 그러나 태종은 꽤 솔직하게 ‘내가 무인년에 말하기 부끄러운 일을 했는데 어찌 차마 경복궁에 거처할 수 있겠느냐’며 거부하였다. 관련 실록 기사 그러나 태종은 사신 맞는 등 큰 의례나 행사가 있을 때 경복궁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태종 본인도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라 여겼고, 본인이 계속 창덕궁에 거처한다면 후세 왕들도 경복궁에 거처하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결국 태종은 경복궁으로 이어할 뜻을 밝히고 박자청에게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추가적인 중수 공사를 명하였다. 1412년에는 연못에다가 어찌 건물을 올릴 수 있느냐는 신하들의 우려도 불구하고 경회루 건설을 지시했고, 박자청은 이를 실현시켰다. 왕세자 양녕대군이 친필로 직접 경회루의 현판을 써서 태종을 기쁘게 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다만 태종대에 건설된 누각은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현재의 것보다는 작은 규모였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경회루 하단의 석조 기둥들은 태종대에 만들어진 것이 임진왜란 때 불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경복궁 터를 묘사한 그림을 보면 황폐한 가운데 경회루의 석조 기둥들은 남아있는 것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태종은 핑계를 대며 미루다가 1413년 5월말 드디어 경복궁으로 이어했다. 그러나 불과 두달 만에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창덕궁으로 돌아와서는 멋쩍었는지 신하들에게 "더위를 피해 경복궁에 머물렀느니라"라고 말했다. 이후에도 가끔 경복궁으로 이어했지만 주로 창덕궁에 머물렀던 곳으로 보인다. 그래서 태종 실록에만 경복궁으로 이어, 창덕궁으로 환어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후 세종실록부터 임진왜란 때까지는 경복궁으로 환어했다는 표현이 실록에 지속되므로 경복궁이 계속 왕들의 거처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세종대부터는 경복궁은 다시 왕이 실제 거처하는 정궁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세종은 상왕 태종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주로 창덕궁에 거처했지만, 태종이 승하한 후 세종은 경복궁 공사를 명하였고, 집권 중기 이후부터는 거의 경복궁에 머물면서 정사를 돌봤다. 특히 비만 및 눈병으로 고생하던 후기에는 거의 경복궁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경복궁에서 세종의 왕도정치의 흔적이 녹아 있는 상징적인 건물 중 하나가 집현전 전각인데, 왕이나 왕족이 사용하지 않는 궐내각사에 불과한 건물임에도 불과하고 집현전은 경복궁에서도 근정전과 경회루 다음 가는 규모의 크고 아름다운 건물로 건설되었다. 세종대에 여러 전각이 새로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초기에 다소 작게 건설된 사정전 등의 기존 건물들을 중수하기도 했다. 1431년에는 광화문이 세워졌다.

이처럼 경복궁은 세종대를 거치면서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 전기 경복궁의 기본적인 형태는 세종 때 완성되었다. 이후 경복궁은 조선 전기 내내 조선의 정궁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세종대 이후에도 경복궁은 여러 왕을 거치면서 지속적인 증·개축을 거쳤다. 근정전과 광화문에는 청기와가 올라가기도 했다.

이후 중종 때 화재로 동궁전이 불타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전 경복궁에 일어난 가장 큰 화재는 명종 때 발생했다. 명종 8년(1553년) 9월에는 강녕전에 큰 불이 나서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을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역대로 내려오던 진귀한 보배와 서적, 왕과 왕비의 고명, 의복, 거마 등이 불타버렸다. 불이 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1554년 봄에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9월에 낙성하였다. 이때 동원한 인력은 부역 2,200명, 품팔이꾼 1,500명이었다고 한다. 명종 15년 때 건립한 경복궁을 그린 ‘한양 궁궐도’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

임진왜란과 조선 후기

임진왜란

명종 때 중건된 지 38년 만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선조가 파천을 떠나자 도성이 아노미가 되면서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들은 일본군이 입성하기도 전에 백성들의 손에 이미 모조리 불에 타 소실되고 말았다. 선조실록에서는 선조수정실록처럼 왜 궁궐에서 불이 났는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 같지는 않다.

거가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보물(寶物)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노비의 문적(文籍)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景福宮)·창덕궁(昌德宮)·창경궁(昌慶宮)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 창경궁은 바로 순회세자빈(順懷世子嬪)의 찬궁(欑宮)이 있는 곳이었다.
- 선조수정실록 26권 28번째 기사

왜란기의 경복궁은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대로 선조가 파천하자마자 성난 군중들이 궁성과 형조, 장례원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방화 주체가 조선 백성들이 아닌 일본군이라는 설도 제기되기도 한다. 일단 인조대에 쓰인 선조수정실록은 《징비록》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적었는데, 당시 파천에 함께했던 류성룡도 직접 보고 쓴 기록이 아니라는 한계를 가지는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파천 당일 폭우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궁궐에 화재가 날 수 없다는 점을 내세운다.

한성 함락 당시 경복궁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일본 측의 기록이 나오면서 일본군이 방화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도 있지만, 해당 기록의 출처인 《조선정벌기》는 정작 임진왜란 때 참전도 하지 않은 저자 오제키가 후대에 상상력을 가미해 쓴 군담소설에 가깝기 때문에 경복궁을 보았다는 진술은 신뢰하기 어렵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본 것은 4대문과 종묘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정벌기 뿐만 아니라 문화재청에서 간행한 《경복궁 변천사》에서 당시 일본군에 종군한 승려인 제다쿠가 쓴 《조선일기》라는 책에 한성에 입성하고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기록도 있다.

환도 후에는 월산대군의 옛 집(광해군 3년 이후로 경운궁, 지금 덕수궁 일부)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이후의 왕들은 대부분 창덕궁에서 정무를 본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서울에서 퇴각하면서 대량 학살과 방화를 한 기록이 있다.

왜적이 경성 백성을 대량 학살하였다. 행장(行長) 등이 평양의 패전을 분하게 여긴 데다가 우리나라 사람이 밖에 있는 명나라 군사와 몰래 통하는가 의심하여 도성 안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였다. 오직 여인들만이 죽음을 면하였으므로 남자들 중에는 혹 여자 옷으로 변장하고 죽음을 면한 자도 있었다. 공공기관의 건물이나 개인의 가옥도 거의 불태워버렸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월 1일

지다쿠가 입성해 경복궁 답사기를 썼을 때만 해도 궁궐의 화재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으나, 고니시가 서울에서 퇴각할 때는 대대적인 방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후 한양으로 환도한 선조는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의 사저(私邸)를 개수하여 임시 궁궐로 사용했고 그곳을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 선조는 경복궁 대신 창덕궁부터 우선 중건하도록 결정하여 1605년부터 창덕궁 중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사실 선조는 경복궁 먼저 중건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착공에 들어갔지만, 경복궁 터가 너무나 황폐화되어 복구하는 데 엄청난 물자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되자 결국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광해군은 즉위 후 중건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창경궁을 재건하였고, 새로 경희궁인경궁을 짓는 등 궁궐병이라 불릴 정도로 여러 궁궐을 동시 다발적으로 지었지만, 경복궁은 끝내 중건하지 않았다.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경복궁 중건을 일부러 피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경복궁은 조선 후기 내내 중건되지 못했고 궁궐 터는 일반인 출입금지 지역으로 묶인 채 270여 년간 벌판으로 방치되고 있었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의령남씨가전화첩의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를 보면 영조가 근정전이 불타고 남은 축대 위에서 신하들에게 하례를 받는 모습이 있어, 그냥 아무 관리 없이 방치된 것은 아니고 나라에서 관리는 지속해온 것으로 보인다.경복궁은 울창한 산림에 둘러싸인 주변 환경에 힘입어 조선 시대에 이어 구한말까지 범의 주요 출몰지역 중 하나였다. 또 조선시대에 호랑이라 기록되던 '범' 중 일부는 표범이었는데, 조선시대 한양에서 서식했던 '도시표범'에 대한 연구를 이어오던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과 런던동물원은 한양에 출몰하였던 이러한 '도시표범'들이 300년의 세월 가까이 비어있던 경복궁을 은거지로 삼아 숨어있다가 어두워지면 한양 도심으로 나와 사냥에 나섰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버려진 경복궁은 맹수들에게 있어 이상적인 서식지였는데, 주요 사냥터인 도심지는 물론 주변의 산과도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즉 낮에는 경복궁의 폐허나 인왕산, 북악산 등에 은거하다가 밤이 되면 도시로 기어나왔다는 것이다.

흥선대원군 중건

그 후로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다가 1864년 고종의 섭정 자격으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집권 이듬해인 1865년,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경복궁 중건에 착수했다. 2년 후인 1867년에 마침내 경복궁이 중건이 완료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은 7,225칸 규모였다. 경복궁 중건에 소요되는 재원은 당시 조선 1년 예산의 10배 가량 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이를 조달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원납전을 걷고 당백전까지 발행하는 등 무리한 정책을 펼쳤는데, 당백전은 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조선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고 이는 결국 그의 실각 원인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국력을 크게 소모해 가면서까지 중건한 경복궁이지만, 정작 실거주자인 고종은 신축된 경복궁을 좋아하지 않았다. 경복궁에 입주한 지 5년만인 1873년에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 몰래 경복궁 북쪽 구석에 민가 형태의 건청궁을 지은 후 아관파천 때까지 거의 줄곧 그곳에 거처했다. 을미사변이 벌어진 장소도 건청궁 안 곤녕합이다. 개항 후에는 전등을 설치하고, 러시아인 건축가인 사바틴을 초빙해 건청궁 내에 있던 관문각을 2층 크기의 양관으로 바꾸는 등의 현대화 작업도 진행되기도 했다.

결국 을미사변 후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을 단행했다. 아관파천 후 1897년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했고, 그해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환궁 당시 경운궁은 민가를 개조한 전각 두 채만 달랑 남아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고종은 1896년부터 1902년에 걸쳐 6년간 대대적으로 경운궁을 궁궐화하는 공사를 벌였다. 확장 공사라기보다도 그냥 궁궐을 새로 짓는 수준이었다. 공사 당시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다가 경운궁 전각을 세웠다.

경복궁과 다르게 창덕궁 전각은 전혀 헐리지 않았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경운궁 전체가 홀라당 타버렸을 때 고종과 조정은 창덕궁으로 이어할지, 경운궁을 재건할지 두 가지를 놓고 고민했지만, 경복궁을 사용하는 방법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쯤 되면 경복궁에 대한 고종의 태도는 거의 혐오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보인다.

한일합방조약 직후 일장기가 근정전에 걸린 것으로 알려진 바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06년의 근정전  
1906년의 경회루  

일제강점기

조선물산공진회 개최 당시의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선 시기의 경복궁

1910년에 한일 강제 병합 이후 경복궁은 훼손되어 본 모습을 잃게 된다. 1910년 이후 경복궁 내의 여러 건물을 헐고 민간에 팔던 일제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이른바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 안에서 개최하면서 건물 4,000여 칸을 헐고, 그 자리에 5,200여 평에 달하는 18개소의 상품 진열관을 설치하였다. 전시회가 끝나자 일제는 경복궁 안에 궁궐 시설과 무관한 각종 석탑, 부도, 석등, 불상 등을 전국 각지에서 옮겨 배치하고 음악당을 설치하였으며, 1916년부터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에 큰 화재가 나서 침전이 모두 불타버리자, 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 교태전, 연길당, 함원전, 경성전 등을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헐어내어 창덕궁의 침전 복구공사 재목으로 썼으며, 1918년부터는 왕권의 상징인 근정전,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을 유물 전시실로 이용하였다. 1916년부터 근정문 앞에 있던 흥례문과 영제교 등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26년에 완공하였다. 총독부 청사 신축을 두고 조선내에서는 물론이고 일본인들까지 맹렬히 비난하여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1927년 9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헐어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

이 밖에도 일본인들은 1929년 5월에는 융무당(隆武堂), 융문당(隆文堂) 등을 헐어 한강로에 용광사를 지었으며, 1932년에는 선원전을 헐어 장충동에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비는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를 지었다. 1940년에는 건청궁터에다 미술관(옛 전통공예전시관)을 지으며 수많은 내전 건물들을 헐어버렸다.

일제 시대를 거치며 경복궁에 남게 된 건물은 1865년(고종 2년)에 건설한 건물로 건춘문, 천추전, 신무문, 동십자각이 있고, 1867년 건설한 건물로는 근정전, 사정전과 주변 회랑 및 행각, 제수합, 함화당, 경회루, 수정전, 경안당 등이 있으며, 1873년에 지은 건물로는 향원정, 집옥재, 협길당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흥례문 터에 지어진 조선총독부 청사 및 집옥재 일대에 총독 관저의 경비를 맡은 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집옥재 일대의 경우 8.15 광복 이후에도 이 잔재가 남아서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30경비단 병력이 경복궁 내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는 1996년 30경비단이 33경비단과 통폐합해 제1경비단을 창설하고 부대를 이전하면서 해결하였다.

1929년 조선박람회 회장도.

광복 이후

1965년 8월의 경복궁 전경. 국립박물관이 건설되지 않은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수탈로 수난을 당했던 경복궁이었으나, 광복 이후에도 격동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며 경복궁은 수 차례 수난을 당해왔다. 경복궁에 남았던 대표적인 수난의 흔적인 조선총독부 청사는 광복 이후에도 미 군정청사, 한국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의 참모본부, 휴전 이후부터는 정부중앙청사로 쓰였다. 대한제국 황실이 몰락하고 조선총독부가 물러난 이후에도 경복궁은 대한민국 역사의 중심에 다시 섰던 셈이다.

1950년대에 대통령 이승만의 낚시터로 경회루 북서쪽에 조선시대 기법의 목조건물 하향정(荷香亭)을 설치했으며, 1961년 5·16 군사 정변 당시 출동한 30사단 1개 대대병력이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대대로 명칭을 바꾼 뒤 태원전 권역에 머물렀다. 30경비대대는 주둔 후 천막막사를 사용하였으나, 1965년 경복궁 서북쪽 일대에 간이건물 20동과 콘크리트 블록 5동 등 반영구막사를 건설했으며 30경비대대 구조물은 1996년 철수까지 이용되었다. 1963년 1월 21일 경복궁 일대를 사적 제117호로 지정 보호하였으나, 그 해 10월 문화재관리국이 한 해 3백만원의 입장료 수입으로는 현상유지도 힘들다며 경회루 동쪽 약 7천평의 잔디밭을 헐어 골프장과 휴게시설·식당·주점·잡화점 등의 신축 계획을 발표했고 이는 여론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966년 1월 8일 정부는 선원전 영역에 문화재의 외형을 모방한 건물 외형을 조건으로 하는 국립종합박물관 현상설계를 공고했다. 같은 해 착공하여 1972년 완공했으나 고종 2년(1865년) 건립돼 해방 이후에도 남아있던 건물인 경안당, 대향당, 정훈당(동당) 등 9동 106칸의 전각을 철거했다. 1970년 5층 철근콘크리트조로 제2별관을 건설하였으며 후에 문화재연구소로 활용되다 2004년 철거되었다. 1979년 3층 철근콘크리트 건물인 후생관을 완공하였고, 문화재관리국청사 및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용되었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을 용산구로 이전하면서 덕수궁 석조전에 있던 궁중유물전시관을 옮겨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82년에는 '역사상 수난의 현장에 대한 교육시설계획' 방침에 따라 건청궁 영역에 한식목조건물로 을미사변기록화전시각(2007년 건청궁 복원 시 철거)을 설치했다.

광화문은 1950년 한국 전쟁으로 문루가 타버리고 석축만 남아있던 것을 1963년에 원래 위치쪽에다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였다.

경복궁은 1995년 문민정부가 시행한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재조명받게 된다. 문민정부는 과거사 잔재 청산을 내세우며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였고 12.12사태의 주역이던 30경비단을 통폐합하여 이전했다. 이후 정부와 서울시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과거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

복원사업

1990년에 들어서 2030년 완료를 목표로 경복궁 복원사업을 시작하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 미술관으로 건립되어 공진회 이후 박물관으로 사용된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1995년 철거하였으며, 1926년 건립된 조선총독부 청사를 1997년 철거, 1935년 건립된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1999년 철거, 일제강점기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 수정전 남측의 한식 건물인 무명각을 1998년 철거했다. 다만 조선총독부 박물관 창고로 건립(1915년)된 부속 건물은 현재 경복궁 관리소로 사용 중이다. 2010년 기준으로, 경복궁 1차 복원정비사업이 완료되어 89동 8987m²(2720평)의 건물이 복원됐다. 일제의 철거를 피해 남아 있던 건물 36동을 포함해 현재 총 125동의 건물이 들어서 고종 당시 경복궁 건물 500여 동의 약 25% 수준에 도달하였다. 2010년 9월 이후 광화문 권역이 완전 개방되었다. 2011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경복궁 전각을 76%까지 복원하는 2차 복원정비사업이 추진 중으로 1차 복원이 중심 건물들로 경복궁의 뼈대를 갖추는 것이었다면, 2차 복원은 임금의 수라간과 궐내각사 등 많은 부속건물을 지어 살을 붙이는 과정이다.

경복궁 복원 사업.png

1차 복원정비사업

지난 1990년 시작하여 당초 2009년 완료될 예정이었던 1단계 종합정비 사업은 총 1789억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강녕전 등 93동 10,743.85 m²(3250평)를 복원할 계획이었다. 사업기간을 1년 연장한 2010년 기준으로 1572억원의 예산이 투입되어 89동 8987 m²(2720평)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일제의 철거를 피하여 남아 있던 건물 36동을 포함하여 현재 총 125동의 건물이 들어서 고종 당시 500여 동의 25% 정도 수준까지 도달하였다. 사업기간 중만성 옛 조선총독부 청사와 옛 조선총독부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 옛 조선총독부미술관(전통공예전시관) 등을 철거하고 광화문을 이전 복원한 데서 나타나듯 일제의 유산인 네거티브 문화재를 철거하고 조선 정궁의 기본 궁제(宮制)를 완비하는 것이 1단계 종합정비 사업의 목표였다.

이에 따라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정전(正殿)과 편전(便殿), 침전(寢殿), 동궁(東宮), 빈전(殯殿) 등 경복궁 중심축의 복원이 추진되었다. 구체적으로 침전 권역(1990∼1995) 사업을 통하여 강녕전 등 12동의 건물이 복원됐으며 동궁 권역(1994∼1999) 사업 당시 자선당 등 18동의 건물이 세워졌다. 또한 근정전이 일제강점기때 축이 틀어진것을 고치려고 '근정전 정비공사'(200년~2003년)까지 복원을 하였고,흥례문 권역(1996∼2001) 사업 당시 흥례문 등 6동의 건물이, 태원전 권역(1997∼2005) 사업으로 태원전 등 25동의 건물이 각각 복구되었다. 끝으로 광화문 및 기타 권역(2001∼2010) 사업으로 광화문과 건청궁 장안당 등 28동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 1단계 (1990년 ~ 1995년 12월) : 침전 권역 복원 (강녕전, 교태전 등 12동 794평 복원)
  • 2단계 (1994년 ~ 1999년) : 동궁 권역 복원 (자선당, 비현각 등 18동 352평 복원)
  • 3단계 (1996년 ~ 2001년) : 흥례문 권역 복원 (흥례문 등 6동 517평 복원)
  • 4단계 (1997년 ~ 2005년) : 태원전 권역 복원 (태원전 등 25동 496평 복원)
  • 5단계 (2001년 ~ 2010년) : 광화문 및 기타 권역 복원 (광화문, 건청궁, 함화당, 집경당 등 32동 1,091평 복원)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 (2006년 ~ 2010년) : 광화문 권역 복원

2차 복원정비사업

문화재청은 2010년 1차 복원 정비 사업이 완료된 후 2011년부터 2030년까지 20년 계획의 제2차 경복궁 종합정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계획기간을 6단계로 구분하여 단계별 세부시행계획을 수립 및 추진하며, 총 254동을 복원하고 총 사업비는 약 5,400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중심 전각을 전면 복원하며 상대적으로 복원 의미가 떨어지는 지역으로 판단한 102곳은 기단 및 초석으로 복원할 계획이다.

사업이 완료되는 2030년까지 전체 379동으로 원래 규모의 75.8% 수준으로 복원하며, 5단계 선원전 일대 복원에서는 복원지의 대부분인 73동을 기단·초석으로 복원해 미복원한 상태로 둔다. 2013년 5월 중 문화재청은 예산의 효율적 활용이 필요하며, 관람객 동선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를 들어 2010년에 수립된 기존의 계획을 대폭 삭감하는 "경복궁 2차 복원정비계획 조정안" 연구 용역에 착수했다. 권역별 대표 건물만 복원하고 부속 건물은 복구하지 않으며, 국립고궁박물관 철거 계획도 빠지는 것이 주 내용이다. 2015년 소주방 영역(내•외소주방등 18동)이 복원되었다.

단계별 사업 계획은 다음과 같다.

  • 1단계 궁중생활권역 (소주방 및 흥복전 권역 등, 2011년 ~ 2021년) : 소주방 영역(내·외소주방, 대전생물방), 흥복전 영역(흥복전, 영훈당)등 총 28동 원형 복원, (빈궁소주방, 다경합, 원역처소)등 기단·초석으로 복원.
  • 2단계 제왕교육권역 (동궁 및 오위도총부 권역 등, 2019년 ~ 2023년) : 동궁영역(계조당), 건춘문영역(수문장청 등), 오위도총부 영역(상의원, 오위도총부 등) 총 14동 원형 복원, (춘방, 계방, 별군직청)등 기단·초석으로 복원.
  • 3단계 궁중통치권역 (궐내각사 권역 등, 2026년 ~ 2034년): 영추문 영역(영추문 및 수문장청 복원), 궐내각사 영역(빈청, 정원, 의약청), 등 총 14동 원형 복원 (국별장직소, 선전관청, 내반원) 등 기단·초석으로 복원.
  • 4단계 궁중의례권역 (혼전 및 선원전 권역, 2031년 ~ 2042년): 문경전 및 회안전 영역(문경전), 신무문 영역(수문장청 등 3동, 측간 1동), 만경전 권역, 선원전 권역(선원전, 경안당), 등 총 23동 원형 복원, (회안전 영역, 제수합 행각, 만화당 영역, 건복합) 등 기단·초석으로 복원.
  • 5단계 궁중방어권역 (동·서십자각 및 내사복 권역, 2040년 ~ 2045년): 서십자각 영역(서십자각 1동, 궁장복원), 동십자각 궁장 복원.

건축물

궁성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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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光化門)

경복궁의 정문. 1395년(태조 4년) 처음 지어질 때는 사정문(四正門)이라 했다가 1425년(세종 7년) 광화문으로 개칭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1864년(고종 1년) 중건했으나,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1927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한 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문루가 소실되었다. 이후 복원 공사에 들어가 1968년 12월 11일 준공했지만 원자리에서 조금 벗어나 있고 철근 콘크리트 구조라는 한계 때문에 2006년부터 다시 이전·복원 공사에 착수해 2010년 8월 15일 준공했다.

자세한 내용은 광화문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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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춘문(建春門)

경복궁의 동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으며, 왕족·외척·상궁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1865년(고종 2년) 12월 25일 상량했다. 여담으로 봄(春)과 동쪽(東)은 예로부터 세자를 뜻하는 말이었다. 건춘문 근처에 동궁전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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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추문(迎秋門)

경복궁의 서문. 연추문(延秋門)이라고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으며, 일반 관원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1865년(고종 2년) 10월 25일 상량했다. 1926년 4월 27일 궁성 주변에 부설된 전차의 진동으로 인해 무너졌다가 1975년 원 자리에서 40m 내려간 남쪽에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되었다. 2018년 12월 6일에 43년 만에 개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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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문(神武門)

경복궁의 북문. 태조가 창건할 때는 없었으나 1443년(세종 15년) 궁성의 사대문을 맞추기 위해 건설했다. 다만 풍수지리적인 문제 때문에 자주 닫혀 있었다.[1] 조선 시대에는 신무문 바깥으로 경복궁의 후원과 연결되었지만 청와대가 들어선 다음부터는 경호 문제로 비공개되었다가 2007년 9월 29일 건청궁 복원 공사 완료에 맞추어 45년 만에 민간인에게 개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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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십자각(東十字閣)

궁성을 수비하는 망루로서는 경복궁에 현존하는 유일한 전각. 7단으로 이루어진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이 세워져 있다. 1867년(고종 4년) 지어졌으나 1924년 도로를 확장할 때 궁장을 헐면서 길 한복판에 섬처럼 놓이게 되었다. 광화문과 남쪽 궁장을 복원하면서 일제 때 헐려나간 궁장을 동십자각과 연결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교통 문제 때문인지 실현되지는 않았다. 참고로 서쪽 맞은편에 있던 서십자각은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 철거되었는데, 이쪽은 복원하지 않고 남쪽 궁장을 서쪽 궁장과 맞바로 연결해버렸다.

외조

정전 권역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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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례문(興禮門)

광화문을 지나면 나오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이다. 1395년(태조 4년) 지어졌으며 1426년(세종 8년) 홍례문(弘禮門)이라 했다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867년(고종 4년) 중건하면서 청나라 건륭제의 이름인 홍력(弘曆)을 피휘하여 흥례문으로 개칭했다. 1916년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건설하면서 철거되었다가 85년 뒤인 2001년 10월 26일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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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제교(永濟橋)

경복궁의 금천교이다. 1395년(태조 4년) 9월, 경복궁이 창건될 때 만들어졌고 세종 대에 ‘영제교(永濟橋)’라는 이름을 붙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폐허가 되었으나 영제교는 돌로 만들어서 큰 훼손 없이 남아있었다. 이후 270여 년 간 방치되었다가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궁궐의 금천교 역할을 수행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흥례문과 주변 행각이 철거될 때 같이 헐렸다가, 1990년대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고 흥례문 일곽을 중건할 때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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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문(維和門)

근정문에 들어서기 전 그 서쪽에 있으며, 궐내각사로 통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이다. 유화문도 흥례문과 마찬가지로 1916년에 철거되었다가 2001년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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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문(勤政門)

근정전의 정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로 1867년(고종 4년) 중건되었으며 일곽의 행각과 함께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의 임금들은 여기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다음 근정전의 옥좌에 앉아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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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勤政殿)

경복궁의 정전으로, 국가적인 대례를 거행하던 장소이다. 다포식 건축으로는 현존하는 것 중 국내 최대 규모이며, 2단의 석축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의 2층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천장에 있는 금박 입힌 2마리의 목조 용 조각의 발톱이 7개인 것이 특징이다. 1395년(태조 4년) 건설되었다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867년(고종 4년) 중건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도 철거당하지 않았으며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편전 권역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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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전(思政殿)

왕의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돌보는 편전으로 사용하던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내부의 바닥이 마루였기 때문에 주로 여름에 사용했다. 1395년(태조 4년) 지어진 뒤 1553년(명종 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했지만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모두 전소되었고, 이후 1867년(고종 4년) 중건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전각의 사방이 벽 없이 창과 문으로만 된 점이 특징이며, 내부의 어좌 위에는 운룡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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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춘전(萬春殿)

사정전의 동쪽에 자리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부속 전각이다. 온돌이 시설되어 있어서 주로 봄에 사용했다. 그 때문에 궁궐의 온돌 시설을 살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이었다. 전각이 세워진 뒤 불탔다 중건되는 과정은 사정전과 동일하나 만춘전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어 주춧돌만 남은 적이 있었다. 1988년 원 자리에 건물이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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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전(千秋殿)

사정전의 서쪽에 자리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부속 전각이다. 만춘전과 마찬가지로 내부에 온돌이 시설되어 있어서 주로 가을과 겨울에 사용했다. 1452년(문종 2년) 5월 14일 문종이 37세를 일기로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궐내각사 권역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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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전(修政殿)

근정전 서쪽에 자리한 전각이다. 월대 위에 있는 정면 10칸, 측면 4칸으로 된 꽤 큰 건물로, 궁궐에 부속된 관청이 밀집한 궐내각사 권역의 중심이었다. 세종 때는 집현전이 있던 곳이었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867년(고종 4년) 중건했고, 고종 때는 군국 기무처와 내각이 이곳에 있었다. 주변에 있던 2백여 칸의 다른 궐내각사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때 모두 철거되어 현재는 수정전만 남아있다. 2차 복원 정비 사업의 2단계가 진행될 2013년~2018년에 주변 건물들을 복원할 예정이다. 허나 최신 위성 사진으로봐도 복원은커녕 별 진척도가 없어보인다.

내조

침전 권역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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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녕전(康寧殿)

임금의 침전으로 사용한 정면 11칸, 측면 5칸의 전각으로 건물 앞에는 월대가 시설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강녕전의 소침인 연생전·경성전·연길당·응지당이 있다. 강녕전진찬도(康寧殿進饌圖)에는 강녕전과 4채의 소침이 회랑을 통해 서로 이어진 것으로 나오지만 현재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다만 소침의 툇마루 등을 통해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395년(태조 4년)에 세워질 때 정도전이 명명한 전각 중 하나이며, 1553년(명종 8년) 화재로 불탔다가 1년 뒤에 중건했지만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터만 남았다가 흥선대원군이 다시 중건했다. 고종 때 중건된 강녕전은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내전 권역이 소실되자 1920년 이건되어 창덕궁 희정당이 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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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생전(延生殿)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이고 1395년(태조 4년) 경복궁 창건 때 제후 3침의 제도에 따라 강녕전 오른쪽에 동소침으로 지어졌으며, 서쪽에 있는 서소침인 경성전과 마주보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이 연길당을 지어 회랑을 통해 강녕전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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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전(慶成殿)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이고 1395년(태조 4년) 경복궁 창건 때 제후 3침의 제도에 따라 강녕전 왼쪽 서소침으로 지어졌으며, 동쪽에 있는 동소침인 연생전과 마주보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이 응지당을 지어 회랑을 통해 강녕전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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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당(延吉堂)

흥선대원군이 새로 영건한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강녕전 오른쪽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과거에는 강녕전과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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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지당(膺祉堂)

흥선대원군이 새로 영건한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강녕전 왼쪽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과거에는 강녕전과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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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태전(交泰殿)

정면 9칸의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 뒤쪽에 있는 왕비의 침전.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부속 전각으로 동쪽에는 원길헌(元吉軒), 서쪽에는 함홍각(含弘閣), 동북쪽에는 아미산을 바라볼 수 있는 누마루인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고종 때 중건된 교태전은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 대화재로 내전 권역이 소실되자 1920년 이건되어 창덕궁 대조전이 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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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峨嵋山)

경회루의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2]으로 교태전의 뒷편에 있다. 백두대간과 한북정맥을 경복궁까지 이어서 교태전에서 낳는 왕세자와 대군들에게 백두산의 기를 주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3단의 화계(花階)로 된 출입구에는 2.6m 높이의 육각형 벽돌 굴뚝 4개가 있는데, 교태전의 온돌방에서 나오는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각 굴뚝의 여섯 벽면에는 다양한 길상문으로 아름답게 꾸며 그 예술적 조형미와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선장문 안쪽의 실제 아미산 영역은 출입불가이며 입구 계단인 아미산 굴뚝 주변도 올라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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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경각(欽敬閣)

교태전 서쪽에 자리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1438년(세종 20년) 세종대왕이 장영실에게 명해 지은 일종의 천문 관측소이다. 이곳에는 각종 천문 관측 기구가 있었으나 1553년(명종 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했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고종 때 중건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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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원전(咸元殿)

교태전 서쪽에 자리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 세종대왕이 내불당(內佛堂)을 설치해 불사를 거행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888년(고종 25년) 중건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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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방(燒廚房)

동궁의 북측과 자경전의 남측 사이에 있으며, 궁궐 내 음식물을 보관·조리·제공하는 식생활 공간으로, 수라상을 비롯해 왕실 잔칫상 등을 만드는 궁중 요리원이다. 대전(大殿)의 음식을 만들던 곳이다.[3] 드라마 대장금에서 상궁들이 음식을 하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1395년 경복궁 창건 이후 궐내 제반 시설을 정비하면서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고종 2년(1865년) 경복궁 재건 시 다시 지어졌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조선 물산 공진회가 개최되면서 여러 전각들과 함께 헐려 없어졌다. 2015년 2월 16일 복원했다. 2015년 5월 8일부터 10일까지 개방, 궁중 음식을 시연하는 행사를 열었다. 2018년 현재, 궁중 다과와 전통차를 판매하는 찻집으로 개수되어 운영 중에 있다. 굳이 차를 마시지 않더라도, 경복궁 내에서 별도의 허가 없이 실내에 들어 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전각이라는 점에서도 경복궁을 방문한다면 한 번쯤 들러 볼 만하다.

연침 권역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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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慈慶殿)

원래 이 자리에는 자미당(紫薇堂)이 있었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헌종의 어머니이자 고종의 양어머니인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지만 1873년(고종 10년) 화재로 소실되어 1888년(고종 25년) 중건했다. 동쪽 정면은 정면 10칸, 측면 4칸의 자경전이고, 여기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청연루(淸燕樓)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맞닿아 있으며, 서쪽 뒤쪽으로 정면 2칸, 측면 6칸의 방실이 연결되어 있다. 경복궁에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부터 남아있는 연침 건물이며,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0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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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 꽃담

자경전 서쪽에 있는 담장으로 황토색 전돌과 흰 삼화토를 사용해 만든 벽면에 각종 길상문자와 길상도안, 기하학적 문양을 장식했다. 서울특별시가 '서울 10대 대표색'을 선정하면서 이 꽃담의 색깔을 '꽃담황토색'으로 명명해 포함시켰다. 서울 시내의 택시 중 꽃담황토색으로 도색된 차량이 종종 보이는데, 도입 초기에는 X색 같다며 거부감이 많았지만 지금은 친근해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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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 십장생 굴뚝

자경전 내부의 온돌방과 연결된 여러 개의 굴뚝을 하나로 모아 만든 굴뚝이다. 전돌을 쌓아 만든 담장 벽면의 중앙에는 장수를 의미하는 소나무·거북·사슴·불로초 등의 십장생과 그 밖의 각종 길상을 상징하는 동물들을 배치해 자경전의 주인인 대왕대비 조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미학적 가치가 뛰어나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었다. 자경전과 합쳐서 지정된 게 아니라 굴뚝만 독립적으로 지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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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복전(興福殿)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처음 지어졌으며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창의궁의 함일재를 옮겨 지었다고 전한다. 침전 건물이었으나 사신 접견 및 임금이 학문을 연마하는 경연과 양로연 장소로도 사용됐다. 대왕대비 조씨가 1890년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제 기능을 상실했다가 1917년 소실된 창덕궁 침전 권역을 재건할 때 옮겨져 사라지고 해당 자리에는 일본식 정원이 들어섰다. 2015년 복원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시공업체가 복원 기준을 어기고 벽체와 지붕에 시멘트 20포대 분량을 섞은 재료를 쓴 사실이 드러나 2018년 4월부터 석 달 간 재공사를 시행하여# 2019년 복원을 완료하였고 단청은 2020년대 초에 칠할 예정이다. 내부에는 현대식 화장실과 냉난방, 전기 시설 등을 최초로 갖춰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동궁 권역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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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문(원각사지 정문)

경복궁 주차장에서 동궁 영역으로 출입하는 문으로, 본래 한국 최초의 극장인 원각사의 정문이다. 이후 국립 국악원 정문으로 이용되었고, 영추문의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1975년 영추문을 콘크리트로 재건하면서 현자리에 자리하게 되었는데, 문화재청에서는 이를 원각사의 정문으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정문이라는 이름도 동쪽에 있는 출입문이라며 임의로 부르던 명칭이며, 건물 내역에 대한 관련 표지판조차 없다. 따라서 원 자리인 원각사 터로 이전 복원하겠다는 얘기는 나오지도 않는 상황. 원각사 터는 종로구 신문로1가 57번지에 자리한 대우 건설 빌딩 일대이다. 과거 모습 사진에 나오는 흰색 근대식 건물은 1939년에 건청궁 터에 건립한 구 총독부 미술관 건물이다. 해방 후에는 경복궁 미술관, 전승공예관 등의 전시시설로 활용하다가 건청궁을 복원하기 위해 1998년 철거했다.

2020년 5월 경복궁 계조당 복원사업으로 해체되었고 부재는 문화재청 전통건축부재보존센터로 이관될 예정으로 계획하였으나 실제로 어떻게 처분되었는지는 공개하지 않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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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당(資善堂)

1427년(세종 9년) 세자의 생활 공간으로 지어진 정면 7칸, 측면 4칸의 동궁(東宮)으로 세자였던 문종이 단종을 얻고 아내 현덕왕후 권씨를 잃은 곳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고종 때 중건되어 순종이 세자로서는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지냈다. 아관파천 이후 주인을 잃었으며 1914년 오쿠라 기하치로가 일본으로 뜯어간 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불타 기단만 남은 채 방치된 유구가 1995년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원래는 반환된 유구를 복원에 사용하려 했지만 훼손이 심각해 건청궁 뒤쪽에 갖다놓았는데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1999년 복원한 자선당도 원래의 모습과 차이가 있다. 여담으로 이 자선당 건물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현대식 난방용 보일러를 개발하는 데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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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현각(丕顯閣)

1427년(세종 9년) 세자의 공부방 겸 집무실로 지어진 정면 6칸, 측면 2칸의 전각이다. 자선당의 오른쪽에 자리해 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고종 때 중건되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9년 복원했다.

내전 권역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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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화당(咸和堂)과 집경당(緝敬堂)

교태전 아미산의 북쪽에는 흥복전(興福殿), 광원당(廣元堂), 다경각(多慶閣), 함화당, 집경당, 영훈당(永熏堂) 등의 여러 전각들이 늘어서 있었으나 함화당과 집경당을 제외하고 모두 사라졌던 것을 2006년 함화당과 집경당을 연결하는 복도각과 주변의 행각만 복원해 2009년 1월 24일 일반에 개방했다. 1890년(고종 27년)에 지은 함화당과 집경당은 고종이 외국 공사를 접견하던 곳이자 궁중의 서화를 수장하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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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慶會樓)

1395년(태조 년4)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1412년(태종 12년)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해 동서 128m, 남북 113m의 방지(方池)를 조성하고 경회루를 세웠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에는 누각을 지탱하는 돌기둥에 용 조각을 새겼다고 하지만 1867년(고종 4년) 중건할 때는 무늬 없는 통돌로 바뀌었다. 지금의 경회루는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으로 현존하는 한국의 목조 건축 중 규모가 가장 크며,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10000원권 지폐 구권의 뒷면 도안이기도 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경회루 문서 참조.

빈전・혼전 권역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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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전(泰元殿)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 지은 전각으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했다. 남쪽에는 건숙문(建肅門)과 경안문(景安門)이 있고, 영사재(永思齋)가 태원전 오른쪽에 있으며 그 남쪽에는 고종이 집무실로 사용했던 공묵재(恭默齋)가 있다. 태원전 서북쪽에는 간의당(簡儀堂)이 있고, 동서 양쪽에는 각각 세답방(洗踏房)이 있으며, 주변에는 행각이 둘러져 있다. 명성황후 민씨의 빈전이 설치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의 모든 건물들이 헐렸다가 2005년 복원되었다.

건청궁 권역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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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당(長安堂)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중건이 끝난 뒤 고종이 흥선대원군 모르게 궁궐의 내밀한 북쪽에 국고가 아닌 사비로 지은 '궁 안의 궁'이다. 실제로 1873년부터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기 때문에, 건청궁 건설은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행보라는 해석이 있다. 장안당은 고종이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사랑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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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녕합(坤寧閤)

명성황후 민씨가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안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에게 명성 황후 민씨가 시해된 장소이며, 시신은 곤녕합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했다가 곧 건청궁 뒷쪽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졌다. 이곳 역시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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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옥재(集玉齋)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 왼쪽은 팔우정(八隅亭), 오른쪽은 협길당(協吉堂)과 연결되어 있다. 원래는 창덕궁에 있었으나 1888년(고종 25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건물을 이건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국풍 벽돌 건물로 지어졌다. 고종은 이곳을 서재, 어진 봉안처, 외국 사절 접견소 등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이 주둔하는 바람에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6년에 수도 경비 사령부 30경비단이 부대 이전을 함으로써 이후 복원 작업을 실시하여 2006년에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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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정(香遠亭)

건청궁 남쪽 연못의 섬에 있는 2층의 누각. 건청궁의 후원 역할을 하는 장소였기에 건너가기 편하도록 건청궁에서 향원정을 향해 다리가 놓여 있다. 이 다리는 6.25 전쟁 때 불탄 후 1953년에 재건할 때 자리가 바뀌어 향원지 남쪽에서 향원정으로 향하게 놓여져 있었으나 2020년 복원 공사를 통해 다시 원래 자리를 찾았다. 현재는 창덕궁 부용정과 함께 국전[4] 출품작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였다. 2017년 5월부터 전면 해체 보수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2년간 진행될 예정이며 헐거워진 목재 접합부, 토사가 쓸려내려가 약해진 지반 지지력를 강화하고 다리를 원래 자리인 북쪽으로 옮긴다고 한다. 1887년 3월 6일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이 경복궁에 설치되었을때 발전기 냉각수를 확보하기 위해 향원정에 발전기가 설치되었던 역사가 있다.

이건되어 잔존하는 건축물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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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녕전(康寧殿)

1917년 11월에 창덕궁 희정당이 대화재로 소실되자, 1920년에 복원하면서 강녕전을 헐어다 세웠다. 강녕전 모습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고, 원래는 없던 용마루를 시멘트로 올리고 트여 있던 툇간에 문을 달았으며, 창호지를 없애고 유리창을 끼우고 내부를 서양식으로 단장하는 등 상당한 변형이 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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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태전(交泰殿)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대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대조전을 복원하기 위해 1920년에 이건하였으며, 상당한 변형이 가해졌다. 대청을 거실로 삼고 거실 천장에 샹들리에가 설치되었으며 원래 우물마루였던 대청 바닥이 쪽널마루로 바뀌는 등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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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전(萬慶殿)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로 자경전의 북쪽에 있었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1868년 중건할 때 자경전의 중소침으로 지어졌다. 고종 대에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대화재 이후 한동안 고종이 강녕전을 대신하는 정침으로 사용하였다. 신정왕후의 팔순 진찬례가 열리기도 했고, 외국 공사를 접견하기도 했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내전 영역을 복구할 때 경훈각으로 변하여 현재까지 창덕궁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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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전(文慶殿)

왕이나 왕비의 장사를 마치고 종묘에 입향할 때까지 신위를 모시는 혼전(魂殿)이었다. 고종초에 중건되어 1890년 신정왕후의 국장 때 신주를 모시는 용도로 사용했다. 서쪽에 붙어 있는 회안전(會安殿)과 함께 태원전의 부속 전각으로서 기능했다. 1904년 순명효황후의 국장을 치르면서 회안전과 함께 경운궁 선원전 권역으로 이건되어 이름이 의효전(懿孝殿)으로 바뀌었는데, 이후 창덕궁 신선원전 권역으로 다시 옮겨지면서 현재까지 창덕궁 의효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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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문당(隆文堂)

원래 신무문 밖 후원지역에 있었으나 현재는 전라남도 영광군 영산성지(靈山聖地)로 옮겨져 있다. 이익공 형식의 공포에 지붕마루에 양상도회(樑上塗灰)를 하여 권위를 높였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대청이 3칸이고 양 옆에 방이 있다. 단 차이가 있는 넓은 월대를 갖추고 있으며 하대(下臺)의 넓고 큰 계단 아래에 하마석(下馬石)이 있었다. 국왕이 직접 감독하는 문전시(文殿試)나 망배례(望拜禮), 계회(契會)나 연회가 있을 때 사용했으며 군영의 사열식을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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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무당(隆武堂)

융문당과 함께 전라남도 영광군으로 옮겨져 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중앙에 대청 2칸, 좌우에 방이 1칸씩 있고 전·후퇴가 있는 구조이다. 공포는 물익공이고 지붕마루에 양상도회(樑上塗灰)를 했다. 전면에 넓은 월대가 있으나 건물의 규모와 월대 높이, 익공 형식 등은 융문당보다 규모가 작다. 무전시(武殿試)가 있을 때 사용했으며 국왕이 시사(試射)를 하거나 군사들의 연무(鍊武)를 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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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궁전(月宮殿)? 무량수각(無量壽閣)?

일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소재의 고토쿠인(高徳院)에 경복궁의 건물이라고 전해지는 간게츠도(観月堂)가 존재한다. 조선왕실에서 금융담보로 조선척식은행에 제공한 것을, 야마이치(山一) 증권의 설립자 스기노 기세이(杉野喜精)의 저택으로 옮겼다가 1924년 고도쿠인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신미년 봄 정학교(丁學敎)가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학교는 광화문 현판을 쓴 조선 후기의 명필로, 1871년경 현판을 썼으리라 추정된다. 무량수각이라는 이름 때문에 경복궁 내 명성황후의 원당(願堂)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북궐도형, 궁궐지, 경복궁배치도 등 관련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건축물이고[5], 일각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월궁전(月宮殿)이라는 이름 역시 확인되지 않아 경복궁의 전각이 맞는지조차 확인이 어렵다. 정면 3칸, 측면 2칸[6]의 아담한 전각인데 경복궁배치도 및 북궐도형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이러한 건물은 면복각(冕服閣), 수문장청(守門將廳), 문경전 재실(齋室) 등 몇 되지 않으므로 이러한 전각들 위주로 고찰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현재는 시멘트와 유리창이 발라져 있어 훼손 및 변형이 심하다. 2010년 간게츠도를 한국으로 반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2022년 현재는 흐지부지되어 소식이 없는 상황이다.

소실된 미복원 건축물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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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십자각(西十字閣)

1395년(태조 4년)에 경복궁을 처음 지으면서 같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1427년(세종 9년)에 심하게 기울어져 철거했고 이후 관련 기록은 없으나, 궁궐의 수비를 담당하는 중요한 건물인 만큼 머지않아 재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 초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복구했다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초반에 전차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일제가 다시 헐었다. 1990년대에 문화재관리국에서 경복궁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 서십자각을 복원 계획하려 했지만 교통 문제가 있어 현재까지 복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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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전(璿源殿)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1868년 창건된 이후 창덕궁 선원전의 어진을 경복궁으로 옮겼다. 선원전이 두 곳으로 늘어나면서 고종이 경복궁에 머물 땐 경복궁으로, 창덕궁에 머물 땐 창덕궁으로 어진도 함께 옮겼다.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을 훼철하면서, 1931년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를 장충단에 짓고 선원전 본채를 옮겨다 고리(庫裡)로 사용하다 1945년 11월 23일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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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안당(敬安堂)

선원전에 딸린 부속건물로, 1966년까지도 살아남았으나 문화재에 대한 인식 자체가 상당히 낮았던 당시 국립민속박물관 건립을 위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손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경안당의 자재는 일부가 1978년 향원정의 보수에 쓰인 것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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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농재(慶農齋)

궁궐 안에서 한 해 농사의 풍흉을 가늠하고 농삿일의 노고를 직접 체험하는 '관경(觀耕)'을 행하기 위한 곳이었다. 관풍루(觀豊樓)와 대유헌(大有軒) 등 부속 전각이 딸려 있어 궁궐 내부에 조성한 논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게 하였다. 고종은 경복궁 대화재 이후 경농재를 편전(便殿)처럼 사용했다. 1939년 총독 관저 신축 사업의 일환으로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행방이 묘연한 건축물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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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헌(大有軒)

'대유(大有)'는 오곡이 익어가는 모습을 일컫는 말로 풍년 기원에 관련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관풍루와 나란히 경복궁 북원에 지어졌는데, 1939년 조선총독 관저 부지 신축사업으로 인해 삼청동 약수터 부근으로 이건되었던 것으로 확인되나 그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 상황이다. 삼청동에 있는 칠보사(七寶寺)의 요사채[7]가 변형된 대유헌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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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련정(玉蓮亭)

북악산 중턱에 조성한 별원 권역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어 전망이 매우 좋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의 어제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로는 경복궁은 물론 멀리 남산까지 조망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옥련정은 총독 관저가 들어서면서 헐린 것으로 추정되는 주변 전각들과는 달리 1938년까지도 살아남았으나, 그 이후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조선총독 관저 부지의 배치도와 <경무대 소식>에서 확인되는 지형지물, 그리고 남아 있는 사진들을 대조해 보았을 때 현재 청와대 경내에 있는 오운정(五雲亭)이 옥련정일 가능성이 높다.

박물관

경복궁에는 두 곳의 박물관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경복궁 서남쪽 부근에 있는 경복궁역과 인접해 있다. 반면, 국립민속박물관은 경복궁 동쪽 구석진 곳에 자리해 있어 상대적으로 후자가 전자보다 접근성이 떨어진다.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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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國立故宮博物館,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전신은 1908년 설립된 제실박물관이다. 1909년 순종이 일반에 공개했으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이왕가 박물관으로 격하되어 덕수궁 석조전으로 옮겨간 뒤 1945년 광복 후부터는 궁중 유물 전시관으로 운영되었지만 공간이 협소해 전시와 보존에 어려움을 겪었다. 2005년 국립 고궁 박물관으로 개칭하고 경복궁 내의 구 국립중앙박물관 자리로 옮겨 4만여 점에 달하는 왕실 관련 유물을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자격루의 실물 크기 복원 모형과 창덕궁에 있던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 부부의 어차가 이곳에 있다. 경복궁 전각들은 근대 이전의 나무 건축이라 전기 배선에 노출될 경우 화재의 위험성이 있고 현대적인 난방, 냉방 기구의 설치와 전시 시설을 갖추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고궁 박물관은 왕실 유물 전시실로 그대로 존속할 가능성이 높다. 건물도 민속 박물관에 비하면 겸손하게 궁궐 건축과 어울리는 모습이라 그렇게 튀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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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

(國立民俗博物館,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전신은 1924년 일본의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세운 '조선민족미술관'이다. 1945년 광복 이후 '국립 민족 박물관'으로 출범, 남산 구 통감 관저에 있었다가 1950년에 국립 박물관에 통합되며 자취를 감췄다가 1965년에 '한국민속관'으로 재출범하면서 경복궁 수정전에 자리잡았다가 1975년에 경복궁 구 국립현대미술관 건물에 입주하였다가 1993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7,089점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정말 괴랄하게도 불국사 청운교와 백운교,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 등 대표적인 불교 사찰을 억지로 섞어서 콘크리트로 만든 기이한 외관 때문에 유교 국가의 정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10] 그냥 무식하게 불교 사찰을 때려 박은 외관 때문에 민속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에도 후술하지만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 해체되게 되었다. 또한 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 터는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어진들을 모신 건물인 선원전이 있었던 곳이다. 선원전은 일제 시기인 1932년에 장충단에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모신 절인 박문사로 팔려나갔고, 더욱이 현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을 지을 당시에 공사 과정에서 선원전의 유구가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이러한 여러 문제들로 인해 선원전과 주변 전각들의 복원을 위해 2030년에 철거될 예정이다.

관람

매주 화요일은 휴궁일(休宮日)이다.'

※휴궁일이 공휴일(대체공휴일 포함)과 겹칠 경우 개방하며, 이 경우 개방한 공휴일 다음의 첫 번째 비공휴일을 휴궁일로 한다.

관람시간
  • 1월 ~ 2월 : 09:00~17:00(입장마감은 16:00)
  • 3월 ~ 5월 : 09:00~18:00(입장마감은 17:00)
  • 6월 ~ 8월 : 09:00~18:30(입장마감은 17:30)
  • 9월 ~ 10월 : 09:00~18:00(입장마감은 17:00)
  • 11월 ~ 12월 : 09:00~17:00(입장마감은 16:00)

기관 사정에 따라 관람시간 단축 및 조정이 있을 수 있다.

입장료

개인

(내국인)

대인(만25세~만64세) 3,000원
단체

(내국인)

대인(10인이상)

※ 무료대상자 제외

2,400원
무료(내국인) &

할인(내국인)

파일:경복궁 관람요금 감면대상자 및 감면율.pdf
  • 매월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날] 무료
외국인 대인(만19세~만64세) 3,000원(10인이상 2,400원)
소인(만7세~만18세) 1,500원(10인이상 1,200원)
무료
  • 만6세이하
  • 만65세이상 ('14.10.1.부터 시행)
  • 한복착용자
  • 매월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

특별권

구분 이용시간 관람요금 비고
3개월 중 1회

(관람시간내)

대인

10,000원

  • 구매일로부터 3개월간 사용가능
  • 4대궁 및 종묘 매표소에서 구입가능
  • 환불 : 구입한 궁에서만 환불가능

(단, 한군데라도 절취시 환불 불가능)

☞단, 창덕궁 후원 특별관람의 경우,
  • 입장 인원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통합관람권을 구매하였어도 관람당일 매표소에서 현장구매표로 선착순 교환해야 한다.

창덕궁 후원예약 홈페이지〉바로 가기

상시 관람권 한달 중 언제나

(관람시간내)

30,000원
  • 구매일로부터 1개월간 사용가능
  • 사진1매 제출
  • 구입한 고궁만 입장가능
점심시간

관람권

3개월간

점심시간중에만

12:00~14:00

5,000원
  • 구매일로부터 3개월간 사용가능(10회한정)
  • 구입한 고궁만 입장가능
  • 인근 직장인 대상(사원증 지참)
시간제 관람권 1년간 점심시간중에만

12:00~13:00

50,000원
  • 구매일로부터 1년간 사용가능
  • 경복궁만 가능
100,000원
  • 구매일로부터 1년간 사용가능
  • 경복궁,덕수궁,창경궁.14개능 입장가능
  • 동반1인 무료

칠궁

매주 화요일은 휴궁일(休宮日)이다.

※ 휴궁일이 공휴일(대체공휴일 포함)과 겹칠 경우 개방하며, 이 경우 개방한 공휴일 다음의 첫 번째 비공휴일을 휴궁일로 한다.

  • 관람방식 : 자유관람
  • 관람시간 : 09:00 ~ 18:00 / 입장마감 : 17:30
  • 관람요금 : 무료

※ 칠궁 주차장은 별도로 없으니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바란다.

※ 칠궁 관람 문의 : 02-734-7720

주차장

경복궁주차장은 ㈜아마노코리아에서 위탁 관리하는 경복궁 부설주차장이다. 문의사항은 주차장관리사무소(02-736-9536)

  • 광화문에서 삼청동 가는 길 초입 좌측편에 위치
  • 버스 50대(지상), 승용차 240대(지하)
  • 유의사항
- 주차장 운영시간: 06:00 ~ 23:00
- 장애인주차장: 지상주차장(9면)
※보행에 불편이 없으신 경우 지하주차장을 이용해 주시기 바란다.
※휠체어를 이용하시는 분은 지상주차장을 이용해 주시기 바란다.

- 유모차 이용 차량은 1층에서 유모차를 하차한 후 지하주차장을 이용해 주시기 바란다다.

주차요금(기본)

구 분 기본 2시간 초과요금(매 10분) 회전시간(30분) 비고
소형차 3,000원 800원 무료
중/대형차 5,000원 800원 무료

※ 단, 소형차량이 지상주차장 이용시 중/대형차 요금이 적용된다.

주차요금(요금감면: 중복 할인 불가)

구 분 내용 비고
감면(80%) - 장애인 차량

- 국가유공자 차량

국가에서 발급한 증명서 또는 확인서류(복지카드, 유공자증 등)를 지참하고 관련 식별표지가 부착된 차량으로 본인이 차량에 탑승한 경우
감면(50%) - 경승용차(1,000cc 이하)

- 저공해자동차(하이브리드차 포함)

- 다자녀가족 차량(3자녀 이상)

다자녀가족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다자녀카드, 가족관계등록부, 건강보험증 등)를 지참하고 신분증과 함께 제시하는 경우
감면(30%) - 다자녀가족 차량(2자녀)

※ 경차는 배기량이 1000cc미만으로써 길이 3.6미터,너비1.6미터,높이 2.0미터 이하인 차

※ 저공해 자동차는 차량출고시 저공해자동차로 등록되며, 증명서 및 발급번호를 받은 차량, 일반차량등의 LPG차량 변경등은 해당되지 않음

동선

경복궁 관람코스
1. 광화문

광화문을 들어가면 매표소가 나온다. 왼편에는 국립고궁박물관이 있다. 시간이 남으면 들러보는 것도 좋다.

2. 근정전

표를 끊고 흥례문과 영제교, 근정문을 지나면 경복궁의 법궁이자 경복궁 관람의 메인 코스인 근정전이 나온다. 여기에서 동선이 세 갈래로 나뉘는데, 좌측 문으로 가면 편전인 수정전과 누각인 경회루가, 중심의 사정문으로 가면 사정전이, 우측 문으로 가면 동궁인 자선당과 비현각이 나온다. 어느 쪽으로 가나 갈렸던 길은 사정전에서 다시 모인다.

3. 사정전

근정전 뒤의 사정문을 지나면 편전인 사정전이 나온다.

4. 강녕전/교태전

사정전 뒤로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이, 강녕전 뒤로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이 있다.

5. 자경전

교태전 뒤로는 대비전인 자경전이 나온다. 흥복전도 담 너머로 볼 수 있지만 정식 개방은 하지 않아서 들어갈 수 없다.

6. 함화당/집경당

자경전에서 북쪽으로 나가면 좌측에는 함화당과 집경당이, 우측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있다. 좌측 궁궐 동선을 더 따라가거나 국립민속박물관을 관람하는 것으로 관람을 마칠 수도 있다.

7. 향원정/건청궁

함화당과 집경당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후원 정자인 향원정과 건청궁이 나온다.

8. 집옥재/팔우정/협길당

향원정과 건청궁 사이 왼쪽 길로 들어가면 집옥재와 팔우정, 협길당이 나온다.

9. 태원전

집옥재 왼쪽으로 가면 경복궁 관람의 마지막 코스인 태원전이 나온다. 태원전 남쪽으로 난 샛길을 따라서 영추문으로 나가거나 좀 더 가서 국립고궁박물관이나 광화문으로 갈 수 있다.

행사

  • 수문장 교대의식
  • 조선시대 관리 입·퇴궐 의식
  • 궁성문 개폐의식
  • 궁중조회 상참의
  • 고궁음악회
  • 수라간 시식공감
  • 궁중문화축전
  • 야간 특별관람

한복무료관람

한복 착의자도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성별과 상관없이 복식을 입어도 된다.

교통

지하철

● 수도권 전철 3호선 - 경복궁역 5번출구 도보 5분

● 수도권 전철 5호선 - 광화문역 2번출구 도보 약 10분

버스

  • 경복궁 남측 : 109, 171, 272, 601, 606, 1020, 7025
  • 경복궁 서측 :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 6011, 9703
  • 자세한 버스노선은 서울시 홈페이지 (http://topis.seoul.go.kr/)를 참고하기 바란다.

경복궁 주소 및 연락처

  • (우: 03045)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02) 3700 - 3900~1

동영상


지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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