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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金剛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금강군 · 고성군 · 통천군에 걸쳐있는 산이다. 태백산맥에 속한 높이 1,638m의 이 산의 이름 금강은 불교에서 유래했다. 불교에서 금강은 불퇴전(不退轉), 즉 물러나지 않는 진리를 향한 굳은 마음을 뜻한다. 금강은 산스크리트어의 바지라(산스크리트어: वज्र, 번개와 금강석을 모두 가리킨다)를 훈역(訓譯)한 단어이다. 대한민국의 강원도 속초시와는 약 50 km 떨어져 있다. 옛날 정조 김만덕의 공으로 소원을 빌게 해주었는데 이루고 싶은 소원이었다는 설도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인에게는 한반도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산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며, 신라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많은 문학과 예술의 배경이자 인기 있는 관광지였다. 한때는 영어로 의역하여 '다이아몬드 마운틴(Diamond Mountain)'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개요
금강산은 예로부터 국내외에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대대로 많은 예술가들의 표현 대상이 되었다. 봄의 이름인 금강을 포함해 여러 가지 이름이 있지만 현재는 대개 금강산이라 불리며,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신선이 사는 산 중 하나),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 단풍 든 큰 산, 楓岳山 단풍 언덕 산),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 바위 뼈 산)으로 불렸다. 동서로 40킬로미터, 남북으로 60킬로미터, 총면적 530제곱킬로미터로 수많은 봉우리, 오랜 기간의 지질 활동과 풍화 작용으로 생긴 기암괴석 및 폭포, 바다를 낀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침엽수림과 활엽수림으로 덮여 있다. 흔히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나뉘며, 때로는 외금강의 남쪽 지역이 신금강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1998년부터 잘 알려진 3개 코스가 외부에 개방되었으며, 점차 개방되는 코스가 늘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의 현대아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동으로 관리 및 개발 중에 있다. 해마다 외부 관광객 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여러 방면에서 단순히 관광 이외에도 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풀이된다. 금강산 관광을 위해서는 현대아산 혹은 대리점에서 예약을 하고 화진포 아산 휴게소에서 수속을 마쳐야 한다.
2008년 7월 11일에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이 일어나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다.
명칭
오랜 옛날부터 이미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국내외로 유명하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으로 알려졌다. 또한 전국의 명산, 명소들이 금강산에 빗대어 별명이 붙여지기도 하였다. 각종 문헌과 기록에 등장하는 금강산의 별칭은 모두 9가지이며, 대체로 계절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려 왔다. 금강은 온 산이 새싹과 꽃에 뒤덮일 때인 봄의 이름이며, 여름에는 녹음이 깔리므로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일만 이천 봉이 단풍으로 물들어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낙엽이 져서 바위들이 앙상한 뼈처럼 드러나므로 개골산(皆骨山)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이처럼 많은 이름을 가진 산이 금강산으로 널리 알려진 이유는 이곳이 불교의 영지(靈地)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금강'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의 바이아라(번개와 다이아몬드)와 통한다.
형성
금강산을 만든 것은 이 지역의 독특한 기후와 특유의 지질 활동과 관련이 깊다. 금강산 일대는 비와 눈이 비교적 많이 내리는 지역으로, 고도와 심지어 동서의 위치에 따라서도 기후가 다르며, 금강산의 지질층은 태고계로부터 신생계에 걸친 오랜 지질시대에 속하는 여러 종류의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널리 분표된 암석은 두 종류(운모가 섞인 것과 얼룩이 진 것)의 화강암으로 지역에 따라서는 화강-편마암 수정 지대가 형성돼 있다. 암석들은 가로세로로 나고 가지가지 방향으로 절리가 생겨 특이한 지형과 기이한 바위를 형성하는데, 이들은 오랫동안 지각활동과 풍화작용으로 침식, 삭박됨에 따라 형성되었다. 이들 작용은 1천만 년 전부터 현세까지 진행된 궁융상지괴응기 운동으로 형성되었다.
지리
금강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고성군, 금강군, 통천군에 걸쳐 있으며, 또한 일부 지역은 대한민국 강원도 인제군까지 걸쳐 있고, 동서로 40킬로미터, 남북으로 60킬로미터, 총 면적 530제곱킬로미터로 백두대간의 허리 부분에 있다. 주분서령을 기준으로 서쪽은 내금강, 동쪽은 외금강으로 분류한다. 또한 외금강 동쪽에 있는 지역은 해금강이라고 한다. 금강산의 주봉은 비로봉이며, 1천 미터 이상의 봉우리는 무려 60여 개로, 크고 작은 봉우리를 모두 합치면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이며, 선조들은 일만 이천 봉이라 했다. 이 지역의 많은 명승지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외금강의 남쪽 지역을 신금강이라고도 한다. 탐승 구역은 외금강 11개, 내금강 8개, 해금강 3개가 있는데, 아직 이들 모두가 개방되지는 않았다.
내금강
예로부터 금강이라 하면 주로 내금강을 뜻했으며, 주분서령의 서쪽에 있는 지역으로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과 여러 폭포가 있다. 내금강은 만폭동(萬瀑洞) 구역, 태상동 구역, 백운대 구역, 비로봉 구역, 명경대 구역, 망군대 구역, 구성동 구역 등으로 나뉜다. 내금강에 있는 봉은 비로봉 외에 영랑봉(1,601m), 중향성(1,520m), 영추봉·백운대(969m), 향로봉(1,030m), 법기봉·혈망봉(1,372m) 등이 있으며, 백천동·태상동·구성동 골짜기 등의 유명한 폭포가 많다.
주변 경관뿐만 아니라 표훈사(表訓寺)로 가는 길목 길가의 큰 자연석에 미륵, 석가, 아미타불 상존입상을 조각한 특이한 구성으로 고려 시대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자랑하는 삼불암, 높이가 40미터나 되는 거대한 암벽에 조각된 마애불인 묘길상, 팔담의 하나인 분설담 위에 세워진 독특한 암자인 보덕암(普德庵) 등의 중요한 역사 유적이 있다. 이 지역은 군사 보안을 이유로 개방되지 않다가 2007년 6월부터 외부에 개방되었다.
외금강
내금강의 동쪽에 있으며, 동해안을 따라 펼쳐진 지역을 포괄한다. 크게 구룡연, 만물상, 수정봉, 천불동, 선하 구역으로 나뉘며, 수정봉(773m)을 비롯한 문주봉(1,027m), 호봉(1,264m), 상등봉(1,227m), 옥녀봉(1,424m), 세존봉(1,160m), 채하봉(1,588m), 집선봉(1,351m) 등의 산봉우리가 있다. 구룡연(九龍淵)에 있는 구룡폭포는 개성의 박연폭포, 설악산에 있는 대승폭포와 더불어 조선 3대 폭포로 꼽히며, 높이는 74미터, 너비 4미터에 달한다.
폭포 절벽과 바닥이 한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비봉폭포는 이것보다 더 높은 139미터에 달하며, 장쾌한 물줄기로 이름나 있다. 만물상 구역에는 삼선암, 독선암, 귀면암 등의 기암괴석이 펼쳐져 있으며, 여러 바위마다 독특한 전설을 담고 있다. 수정봉 구역은 외금강과 동해의 절경을 함께 감상할 수 있으며, 천불동 구역에는 3단 폭포, 선인굴, 육선암, 연주폭포, 금강천지(金剛天池) 등 저마다 독특함을 자랑한다. 선하 구역에는 용바위, 흔들바위, 선하폭포, 백련폭포, 채하폭포, 바리소, 무지개 다리, 집선봉 등이 있다.
금강산 온천
금강산(또는 온정리) 온천은 외금강에 있으며, 신라 시대에 발견되었다는 오래된 온천이다.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그 존재가 언급되고 있는데, 왕족이나 관리들이 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함유 물질로는 라돈, 메타규산이 광천의 한계량 이상 들어 있으며, 탄산 및 염소 이온과 나트륨, 칼슘 이온도 들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천연기념물 22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관광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편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해금강
이 지역은 대해 때문에 세상에 알려진 지 300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숙종 24년(1698년) 고성 군수로 있던 남택하(南宅夏)가 찾아내고 "금강산의 얼굴빛과 같다." 하여 해금강이라 이름 붙였다. 본래 해안 암벽, 바위섬, 자연호, 모래사장, 하천이 어우러진 경승지다. 이중 개방된 곳은 삼일포와 향로봉이며, 관동 팔경의 하나인 총석정은 개방되어 있지 않다. 삼일포는 남한의 화진포와 송지호같이 석호(潟湖)이며, 총 넓이는 0.79km2에 달한다. 이 호수에는 전설에 따르면 신선 또는 화랑들이 경치가 너무 좋아 3일 동안 머물고 갔기 때문에 삼일포라 한다. 봉래대에서 삼일포 전경을 볼 수 있다. 소가 누운 모양이라고 해서 와우섬이라 이름 붙은 큰 섬을 비롯해, 3개의 작은 섬이 떠있다. 또한 삼일포 기슭에는 4명의 신선이 놀고 간 것을 기념해 세웠다는 사선정터가 있다. 향로봉은 바다의 해만물상이라 불리며, 바닷가에 육지와는 거리를 두고 홀로 솟아 있는 봉우리이다. 비바람에 씻기고 바닷물에 깎이어 독특한 모양을 지니고 있다.
신금강
외금강의 남쪽 지역을 신금강이라 칭하기도 한다.[3] 이곳은 전체적으로 전나무와 소나무로 구성된 원시림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곳에 있는 십이폭포는 금강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폭포로 수직 높이는 289미터, 폭포 길이 390미터, 너비는 약 4미터에 달한다. 그밖에도 온선대, 칠보대, 직류폭포, 채하폭포, 바리소, 무지개다리, 송림굴, 소연소, 구룡소, 선담, 유점사, 반야암 등의 볼거리가 있다.
역사
고대 중국의 역사서에도 자주 등장할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화랑들이 금강산을 유람했고[11] 지금도 영랑봉 등 지명에 흔적이 남았다. 영험한 산이라 믿어 신라 중심지에서 거리가 먼 데도 불구하고 사찰 백수십여 곳을 창건했다. 신라가 멸망할 때에도 신라의 마지막 태자이던 마의태자가 고려에 투항한 아버지 경순왕을 따라가지 않고 동생과 함께 금강산으로 가 여생을 보내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고려시대에도 명성은 이어져서 11세기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도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소동파가 직접 하진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일단 조선왕조실록 태종 4년(1404) 9월 21일자 1번째 기사에 '중국의 사신이 오면 꼭 금강산을 보고 싶어 하며, 고려에서 태어나 친히 금강산을 보는 것이 소원이다(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라는 말이 중국에 있을 정도'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꼭 소동파가 아니라도 금강산의 명성이 중국에서도 널리 알려졌음은 분명하다. 대저 '금강산은 중국에서도 보고 싶어 한다.'라는 아이디어는, 중국의 문화적 수세에 있던 조선에서 '금강산만큼은 우리가 대륙에 비길 수 있다.'라는 문화적 자신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수궁가의 일개한퇴(별주부가 토끼를 유인하는 대목)에서, 토끼가 나열하는 유수의 명산 이름 중에 유일하게 우리나라에 있는 산이 금강산이다.
조선시대 수많은 문인들이 금강산을 읊은 작품들이 수없이 많다. 신정왕후 조씨의 조카 조성하(趙成夏)가 고종 2년(1865) 43일간 금강산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그는 《금강산기金剛山記》라는 책을 지어 자기 여정과 당시 금강산에 있던 고적들에 얽힌 이야기를 적었다. 이 책은 상당히 널리 퍼져서 1931년 경성 주재 영국인 외교관 아처(C.H.Archer)가 금강산 비로봉을 등산한 뒤 남긴 기록에서 영어로 번역하여 인용했을 정도였다.
일찍이 금강산의 경치는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도 잘 알려졌다. 조선시대에는 태종이 명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자꾸 금강산 타령을 해서 귀찮아한 이야기도 있다. 대동여지도에도 백두산과 함께 다른 산과 달리 화려하게 그려놓았고,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한반도 최초의 전기철도[14]인 금강산선을 직접 건설하고, 일본 본토에 있는 일본인들이 일부러 서울까지 찾아와서 관광열차를 타고 금강산을 여행했을 정도로 금강산 관광산업을 적극 육성하였다. 일례로 일본의 국민적 가인 와카야마 보쿠스이 또한 금강산을 여행하고 노래를 남겼다.
영국의 여행가이자 작가로서 아시아 각국을 여행하고 조선에 대해서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을 쓴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세계 어느 명산의 아름다움도 초월한다"며 금강산을 극찬했으며,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왕세자 시절에 한국에 방문해 1926년에 금강산을 방문하여 금강산의 경치에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 활용했던 금강산 전철은 하필이면 노선 대다수가 민통선 및 비무장지대와 일치하는 바람에 지금도 복구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 일부 구간은 금강산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자세한 것은 금강산선 문서 참고.
일제강점기 그 시절인데도 금강산 관광객의 출입관문격이었던 장전항은 관광도시가 되어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여관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장전항은 한국전쟁으로 북한 치하에서 쇠퇴했다.
북한치하에서 금강산은 여전히 휴양지로 이름이 높기는 하다. 문제는 여유있게 관광할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지만(...). 원래 여행의 자유가 없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금강산의 바로 밑에 남한령 강원도 고성군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성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아시아 불교계는 금강산을 성지로 여겼다. 법기보살(法起菩薩), 또는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금강산에 거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인도의 보타락가산[보타산(普陀山)]에 관세음보살이 머물듯, 우리나라의 금강산에도 법기보살이 거한다고 여겼다. 아마도 원래부터 금강산을 영험한 산으로 여겼을 텐데, 불교가 전래된 뒤 금강산을 불교적 성지로 윤색한 결과일 것이다.
애초 금강산의 '금강(金剛)'이라는 말이 불교 경전인 『화엄경』에 "해동에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고 적힌 데서 연유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위 설명에 덧대어 "풍악(楓嶽)이라는 속칭이 있으나, 승려들이 『화엄경』에 근거하여 금강산이라 불렀기 때문에 이 이름이 고정된 것 같다."라고 추측한다.
화엄경에는 '바다 가운데 산이 있는데 여기에 법기보살이 거한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바다 가운데 있는 산'을 금강산이라고 여긴 것이다. 현대의 지리관으로는 납득이 안 되지만, 과거에는 중국에서 신라를 갈 때[18] 배를 타고 당항포에 닿거나 청해진을 거쳐 울산광역시로 도착했기 때문에 중국 쪽에는 이런 인식이 붙었다. 심지어 이 시기 아랍 지도에는 신라가 섬으로 나온다(...).
아무튼 이 내용을 근거로 금강산은 점점 불교의 성지가 되었다. 금강산 봉우리가 1만 2천이라고 말하는 것도, 법기보살의 권속 1만 2천이 있어 저마다 봉우리 하나씩에 거한다고 여긴 데서 나왔다. 여러 봉우리들 중에서도 특히 담무갈봉은 그 자체로 법기보살이라고 여겨 나옹화상(懶翁和尙)[19] 등 고려의 고승들이 예경을 올리기도 하였다.
중국에까지 금강산의 명성이 퍼진 데에도 이런 믿음이 영향을 끼쳤다. 승려나 불자들은 법기보살의 성지를 순례하고자 찾아왔고, 그래서 절도 많이 들어섰다. 금강산에 법기보살이 있다는 믿음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늦어도 12세기 말에는 분명히 있었다. 고려 신종 2년(1199) 건립된 '발연사진표율사장골탑비'에 화엄경의 내용을 근거로 금강산이 법기보살의 성지라고 썼기 때문이다. 충렬왕 33년(1307)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금강산에서 법기보살에게 예경하는 모습을 묘사한 불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금강산을 법기보살과 연결짓는 인식은 고려 초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 불화는 후대의 금강산 - 법기보살 신앙을 고려 초까지 소급하여 그린 것이다.
원나라 황실도 금강산에 법기보살이 거처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자를 보내어 금강산에 있는 사찰과 승려들에게 시주하고 예배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유점사에 있는 53불도 금강산이 불교적 성지가 되는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인도에서 문수보살이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여러 불상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그 중 형상이 온전한 불상 53좌를 골라 큰 종(鐘)에 넣어 바다로 띄웠는데, 종이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다가 금강산 근처까지 도착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유점사 자리에 절을 세워 불상을 안치했다는 것이다. 불이 나서 사찰이 소실되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불상만큼은 따로 빼내어 보존될 수 있었다 한다.
이에 따라 "도사" 하면 "계룡산 도사"를 꼽듯이, 조선의 승려는 금강산에서 수련하는 것을 제일로 여겨 스스로를 '금강산인', '금강상승'이라고 칭했다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표훈사 주지가 주도하는 '금강산불교회'도 존재했다고 한다. 표훈사 주지 최원허(崔圓虛)는 1935년 9월 5일 불교잡지 《금강산(金剛山)》을 간행하기도 했다.
팔만구암자
금강산은 한민족의 신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영산이자 명승이기 때문에,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라는 말과 같이 사찰 또한 많이 자리했다. 다만 6.25 전쟁 도중에 금강산의 많은 상징적 산사가 소실되었다.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로 꼽히던 장안사, 석왕사, 유점사나 정양사, 마하연사, 장연사, 문수사, 발연사, 송림사, 도산사, 금장사, 삼장사, 건봉사 등 수 많은 암자와 사찰이 그렇게 사라졌다.
2022년 현재 북한 측이 관리하는 금강산 내 사찰들은 문화유적지로 건물만 복원해둔 것이거나, 남북 교류 차원에서 남측과 협력해 새로 지은 것들이다. 그 외 대형 사찰 외의 작은 암자들은 6.25 전쟁 때 소실되었거나 아예 철거된 것들이 많다.
- 표훈사 : 남아있는 유일한 4대 사찰.
- 신계사 : 복원되었다.
- 보덕암
- 정양사 : 폭격으로 파괴되고 일부만 남았다. 일제강점기 흑백사진이 남아있기 때문에 복원 떡밥이 있다.
- 장안사 : 폭격으로 파괴되고 터만 남았다. 여기도 복원 떡밥이 있다.
관광
예전부터 그 명성은 대단했지만 그 수려한 경관은 여전해서, 지금도 금강산을 한 번 다녀온 사람들은 그야말로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1998년 11월 18일부터 현대아산을 통해 한국에서도 직접 금강산 관광이 가능하였으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2008년도에 발생한 금강산 피격 사건 이후 14년째 대한민국 관광객 단 1명도 금강산 관광지구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다만 금강산의 진면목이 모든 관광객에게 개방된 건 아니었다. 초창기에는 북한의 군사지역이 많은 내금강이 개방이 안 되었는데, 문제는 조선시대, 일제강점기까지 금강산 여행 하면 내금강을 말하는 것일 정도로 비중이 높은 곳이었다. 내금강은 2007년 5월부터 제한적으로 열렸지만, 정상 비로봉 코스는 결국 금강산 관광이 폐지되는 날까지 일반 관광객에게는 개방되지 않았다. 즉 2000년대에 금강산을 가본 사람이라고 해도 금강산의 핵심을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금강산 관광의 시초는 1988년에도 정주영 회장이 추진하였으나 남북고위당국자 예비1차회담에서 북한이 팀 스피리트 훈련의 무조건적인 중단을 주장하는 어거지를 써서 실패하였다. 지금이야 이야기거리지만 북한이 군사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금강산 관광을 시작하지 않을 거라는 우려는 1999년에도 있긴 했다. 그러나 결론은 그나마 10년간 관광.
당시 금강산 관광의 대상자는 한국 내국인에게 국한되었고, 외국인은 내국인의 관광상품을 이용하는 것으로 한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산을 관광하는 도중에 외국인을 만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홍보가 덜 되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홍보를 제대로 하고 외국인 관광코스도 마련한다면 아마 외국에서도 반할 것이다. 그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2007년을 기준으로 1박 2일, 즉 호텔 1박은 최성수기 + 주말에 인당 금강산 호텔 34만 원, 해금강 호텔 29만 원이었다. 물론 비수기 평일로 하면 이 가격은 28만 원, 23만 원까지 낮아지지만 결코 싼 가격은 아닌 것은 분명했다. (2박은 초기에 인당 80만 원 정도였다고 한다. 그나마 육로 관광으로 낮아진 가격이 인당 35만 원.) 덤으로 점심, 저녁식대(각각 10달러)와 온천욕(12달러), 교예공연관람(25달러), 삼일포관람(1만 원)이 옵션이었다. 게다가 새벽 6시까지 강원도 고성군에 알아서 도착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금강산 관광 인원의 상당수는 정부 보조를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아산이 50년 동안 독점하고자 6년 3개월 동안 9억 4,200만 달러, 실제로는 4억 9,000만 달러이라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내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만약 5천억 원을 50년으로 나누어 계산하면 10년에 1천억 원 꼴인데, 이건 실제 관광객 10만 명으로 나누면 인당 100만 원씩 부담한 셈이다.
다만 당시 현대아산 임직원 및 가족은 사원복지 차원에서 금강산 관광을 갈 수 있었고, 전국 사회(역사 포함) 교사들을 차례로 선발하여 금강산 관광을 보내 주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대체로 편히, 그나마 덜 비싸게 갈 수 있었다.
대북경색 이후에는 중국에 관광사업이 넘어가기도 했다. 30여 명이 한 팀이 되어 북중 접경 도시 길림성 룡정시 삼합에서 함경북도 회령군을 거쳐 어랑군으로 들어가 전세기로 평양국제비행장, 다시 버스로 금강산을 가는 복잡한 코스다. 4박 5일 8,500위안(157만 원 상당)으로 북한의 아리랑 공연을 보는 것까지 고려하면 저렴한 편이지만 (기사에 따르면 2배로 뛴 가격으로 추정) 그럼에도 여전히 비싼 편이다.
금강산 관광 재개 가능성은 2013년 남북회담에서 점쳐졌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2015년 12월 정부 당국자는 UN의 대북제재를 무시하고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관광 재개 수익금이 WMD(대량살상무기)와 무관하다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
박근혜 탄핵 이후 정국이 조금씩 해빙되면서 다시금 남북간 금강산 관광 재개가 점쳐졌으나 동일한 이유로 국제사회의 눈치가 보여 지지부진한 상황이고, 김정은은 초조해진 것인지 2019년 10월 22일에는 남측과 합의 하에 관리가 안 된 시설들을 철거하라고 지시하였다. '너절하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진다'는 디스도 덤. 이후 2022년부터는 호텔해금강을 시작으로 골프장 등 남측 시설들을 무단으로 철거하기 시작하였다.
일각에는 금강산의 관광가치를 두고 한국인들이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과대평가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경치 좋고 기암괴석이 흔한 산은 많다는 것이다. 정부의 관광수요 예측을 두고도 일부 보수 언론의 비판이 있다. 다만 금강산 관광이 햇볕정책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2020년 상황에서, 금강산의 관광자원 평가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간에 각자 지지하는 쪽으로 정치적인 의도가 들어있을 가능성도 높으므로 적당히 걸러 듣는 게 좋다.
주요 관광지
신계사
장안사, 유점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로 6.25때 모든 전각이 소실 되었으나, 남북 불교계가 힘을 합하여 복원사업을 추진해오고 있으며 현재 대웅보전이 복원되어 새로운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구룡폭포
조선의 3대 폭포인 구룡폭포는 150m의 깎아지는 절벽에서 흘러내리는, 동방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폭포이다. 폭포가 떨어지는 아래 있는 못은 옛날 금강산을 지키는 아홉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구룡연이며 물깊이는 13m이다.
상팔담
구룡폭포 위 담소 8개가 이어져 있어 상팔담이라 부르는데 위에서 보면 마치 크고 작은 그릇에 담아놓은 것 같이 보인다.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내려오는 곳으로 상팔담을 보기 위해서는 구룡대라 하는 전망대까지 올라야 한다.
삼선암
약 30m 높이의 봉우리 세 개로 이루어진 삼선암은 신선 세 명이 돌로 굳어졌다하여 이름 붙여진 바위이다. 상선, 중선, 하선 중 저만치 떨어져 독선암이 되어 있는 하선의 모습이 이채롭게 펼쳐진다.
망양대
세지봉 끝에 위치한 망양대에서는 세지봉 줄기에 있는 온갖 형태의 기암괴석들과 서쪽 오봉산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기 좋은 곳이다. 동해와 해금강 일대의 섬들은 물론 남측의 산들과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봉래대
바위산인 봉래대는 삼일포 호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다. 16세기의 시인이며 서예가인 양사언 선생이 이곳에 와서 공부 했다고 하여 그의 호를 따 봉래대라 하였다.
연화대
삼일포에서 보면 5개의 바위들이 마치 연꽃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연화대라한다. 이곳에 오르면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을 볼 수 있다. 연화대 바위 위에 세워진 연화각이 운치를 더해주는 곳이다.
와우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와우도라 하는데 소나무가 많아 송도나 솔섬이라고도 한다.
해금강
동해안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해금강은 해안가의 기묘한 절벽들과 소나무가 우거진 많은 바위섬 등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하늘이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집선봉
동석동을 거쳐 산행을 하다보면 집선연봉을 볼 수 있는데 병풍같이 반듯하고, 날카로운 바위들이 장관을 이룬다. 신선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영선대, 강선대, 승선대가 있다.
세존봉 전망대
험한 세존봉 코스의 정상에 위치한 전망대이다. 관광하면서 들렀던 온정리, 고성항은 물론 삼일포, 해금강, 남측의 동해까지 볼 수 있는 곳이다.
비둘기바위
날개를 쫙 펼친 모양의 '비둘기바위'는 금방이라도 '푸드덕' 날아 갈 것처럼 보인다. 보는 각도에 따라 큰비둘기 곁에 작은 새끼 비둘기의 모습도 보여 이채로운 광경을 연출한다.
수정문
금강산에서 가장 큰 자연 돌문으로 그 생김새가 마치 사람이 일부러 세운 것처럼 웅장하게 펼쳐진다. 수정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수정봉 전망대에 이를 수 있다.
수정봉 전망대
병풍처럼 펼쳐진 집선봉, 채하봉 등 외금강의 산세와 장전항의 푸른바다를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금강산 최고의 전망대이다.
표훈사
신라 문무왕 10년, 서기 670년에 창건된 표훈사는 금강산의 4대 사찰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사찰로 역사적인 사료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현재 반야보전 등 7개의 건축물이 남아 있어 삼국시대 건축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보덕암
최초 건물은 고구려 시대(서기 627년)에 세워졌고, 소실 후 17세기에 재건되었다. 20M가 넘는 절벽에 7.3M의 구리기둥 하나로 받쳐 짓고, 쇠줄로 바위를 고정해 지어놓은 보덕암은 구리기둥 하나에 의지하여 심한 바람이 불거나 4~5명이 마룻바닥을 걸으면 움직임이 심하나 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았다.
묘길상
언덕 위 대패로 민듯한 암벽에 높이 18.2m, 귀의 길이 1.5m, 손의 길이 3m, 발의 길이 3m의 거대한 마애불이다.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소박하면서 입체감도 있으며, 특히 웃음을 머금은 입술이 미묘하고 밝은 햇빛을 이용하여 얼굴 부분 두드러지게 새긴 기법이 주목할 만하다.
만폭팔담(진주담)
외금강의 상팔담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금강산의 명물로 내팔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5번째 담인 진주담은 장쾌한 남성미의 못으로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시선을 잡으며 주변 바위에 한시 등의 흔적을 남겨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삼불암
나옹화상의 원불로 조각된 삼불암은(높이 8m, 너비 9m) 오른쪽이 미륵불, 가운데가 석가불, 왼쪽이 아미타불인데 손 모양이 조금씩 다릅니다. 장안사터에 멀지 않은 곳에 있고, 꾀꼬리의 서식지로도 유명하다.
장안사터
신라 23대 법흥왕의 발원으로 진표율사가 서기 551년에 창건하였다. 유점사와 더불어 금강산 2대 사찰로 꼽혔으나, 현재는 폐허가 되어 '장안사터'라는 푯말만 있다.
지도
동영상
참고자료
- 〈금강산소개〉, 《현대아산》
- 〈금강산〉, 《위키백과》
- 〈금강산〉, 《나무위키》
- 〈금강산(金剛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조정훈 기자, 〈"세계적 휴양관광지로 금강산의 가치는 대단하다"〉, 《통일뉴스》, 2015-12-01
- 조홍섭 기자, 〈한겨레 환경생태 전문 웹진 - 물바람숲 - 금강산 기암 절경은 산악빙하가 깎아낸 ‘작품'〉, 《물바람숲》, 2020-04-22
- 김준옥 기자, 〈포토뉴스 금강산은 아름답다〉, 《SPN 서울평양뉴스》, 2021-10-26
- 〈北김정은 철거지시 한달…금강산관광은 여전히 불투명〉, 《한경닷컴》, 2019-11-22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