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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그데르주의 면적은 16,434.12㎢이며 인구는 306,849명(2019년)이며 주도는 크리스티안산이다. 남쪽으로는 [[스카게라크 해협]], 서쪽으로는 [[로갈란주]], 북동쪽으로는 [[베스트폴오그텔레마르크주]]와 접한다. 25개 지방 자치체를 관할한다 | + | 아그데르주의 면적은 16,434.12㎢이며 인구는 306,849명(2019년)이며 주도는 크리스티안산이다. 남쪽으로는 [[스카게라크 해협]], 서쪽으로는 [[로갈란주]], 북동쪽으로는 [[베스트폴오그텔레마르크주]]와 접한다. 25개 지방 자치체를 관할한다. |
이름이 비슷한 크리스티안순은 북쪽의 [[뫼레오그롬스달주]]에 있는 [[해안도시]]다. | 이름이 비슷한 크리스티안순은 북쪽의 [[뫼레오그롬스달주]]에 있는 [[해안도시]]다. |
2024년 6월 28일 (금) 15:5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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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데르주(노르웨이어: Agder fylke)는 노르웨이 서부에 위치해 있는 주이다. 2020년 1월 1일 에우스트아그데르주와 베스트아그데르주가 통합하여 설립된 주이다.[1]
개요
아그데르주의 면적은 16,434.12㎢이며 인구는 306,849명(2019년)이며 주도는 크리스티안산이다. 남쪽으로는 스카게라크 해협, 서쪽으로는 로갈란주, 북동쪽으로는 베스트폴오그텔레마르크주와 접한다. 25개 지방 자치체를 관할한다.
이름이 비슷한 크리스티안순은 북쪽의 뫼레오그롬스달주에 있는 해안도시다.
아그데르주에는 그림 같은 해안도시와 아름다운 섬이 많고, 내륙의 산악 지역은 여름철에는 하이킹, 겨울철에는 스키의 명소로 꼽힌다. '노르웨이의 리비에라'라고 불린다.
아그데르 일대는 1900년경부터 남쪽 지방을 뜻하는 쇠르라네 지방으로 불렸으나 종종 서쪽의 로갈란주와 묶어서 서부 노르웨이로 분류되기도 했다. 중세시대에는 소왕국을 형성했던 곳으로 노르웨이 통일 이후 주로 바뀌면서 에그다퓔키 또는 아그데시덴으로 불렸다.
1962년 이후 몇 개 지역으로 분할되면서 '아그데르'란 지명이 사라졌다가 1919년 두 개의 주로 분리되어 동쪽은 아우스트아그데르주, 서쪽은 베스트아그데르주가 되었다. 2020년에 분리된 두 개주가 다시 합쳐졌다. 통합 이전부터 두 주는 대학과 교구, 법원, 경찰서 등의 명칭 전후에 '아그데르'란 호칭을 붙여 사용해 왔다.
1656년 지어진 린데스네스 등대는 노르웨이 최남단의 등대로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1915년 개축되었다. 린데스네스에는 노르웨이 최초의 수중 레스토랑이 있다.
아그데르 서부의 반세, 리스타, 파르순, 크비네스달 일대는 과거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되돌아온 이민자가 많다. 여러 분야에서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반세에는 노르웨이 이민자가 많았던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이름을 딴 브루클린 광장이 있다. 이곳에서 매년 6월 마지막 주에 아메리칸 페스티벌이 열린다.[2]
자연환경
아그데르주는 스카게락 해협 인근의 노르웨이 남부 해안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그림 같은 해안도시와 아름다운 섬이 많고, 내륙의 산악 지역은 여름철에는 하이킹, 겨울철에는 스키의 명소로 꼽힌다. 아그데르주의 해안 지역은 '노르웨이의 리비에라'라고도 불린다.
아그데르주 해안 지역의 기후는 북부 스칸디나비아 일대의 노르딕 국가들보다 온화하며 비교적 일조량이 많은 편이다. 해안과 달리 내륙과 고원지대는 춥고 눈이 많이 내린다.
교통
아그데르의 중심 공항은 크리스티안산공항이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덴마크, 영국 등지를 운항하는 국제항공편이 있다. 시엔과 산네 피오르에도 공항이 있다.
E18 고속도로가 해안을 따라 오슬로와 아그데르의 해안도시들을 이어주는 중심 도로이다. 크리스티안산에서 서부 로갈란주의 스타방에르까지는 E39 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오슬로와 아그데르 연안도시를 잇는 버스가 자주 다닌다. 지역 철도노선인 남부철도가 크리스티안산과 여러 도시를 연결한다.
크리스티안산
크리스티안산(Kristiansand)은 노르웨이 남단 오트라강 하구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17세기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에 의해 도시로 본격 개발되었다.
크리스티안산은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사이에서 북해와 발트해를 잇는 스카게락(Skagerrak) 해협의 북단에 위치하고 있어 독일 내륙을 관통해 북해와 발트해를 연결하는 키엘 운하(Kiel Canal)가 1895년 개통되기 전까지 지정학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9~10세기 노르웨이 왕 하랄드 (Harald Fairhair) 왕실 거주지로, 이후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요새로, 이어 수비대의 주둔지로 사용되었다. 유럽 대륙의 관문 도시로 덴마크를 오가는 페리와 남노르웨이의 철도 노선의 종착점이다. 북동쪽 수도 오슬로(Oslo)와 북서쪽의 스타방에르(Stavanger)까지 이어지는 4개의 주요 간선 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크리스티안산은 여름철 휴양지로 인기가 많아 관광은 이 도시의 주요 산업이다. 도심 해변 비스트란다과 함레산덴 해변에 여름 휴양객이 몰린다. 크리스티안산 외곽에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큰 쇼핑몰 쇨란센테레(Sørlandssenteret)가 있다.
크리스티안산은 무역과 조선을 거쳐 석유산업과 연관된 해양산업, 첨단소재산업이 발달했으며 관광도 주요 산업으로 삼고 있다. 19세기부터 검역소를 본격 운영하면서 의료분야와 실버타운이 발달했다.
1996년 크리스티안산 인근 지방에서 발견된 기원전 6500년경의 여성 유골을 근거로 선사시대부터 이 일대에 인류가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크리스티안산은 14~15세기 이 도시의 오트라강 하구에 작은 마을을 형성하면서 활발한 항구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플레케뢰이섬의 항구는 16세기 초부터 스케가락 해협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개발되었다.
플레케뢰이섬은 1555년 노르웨이와 덴마크 왕을 겸했던 크리스티안 3세(Christian III)때 처음 요새화되었고 1635년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는 내륙의 아우스트아그데르(Aust-Agder)에서 이 섬의 네데네스로 이주하여 왕궁을 세우도록 했다.
1641년 크리스티안 4세가 해안으로 돌출한 숲이 우거진 모래 위에 도로와 르네상스풍 건물을 지었고, 왕의 이름과 모래사장에서 비롯된 ‘Christiannsand’이라 명명되었다. 1889년 철자개혁으로 현재의‘Kristiansand’이 되었다.
크리스티안 4세는 도시를 건설하면서 아그데르주 전역의 상인들을 이곳으로 이주토록 하는 대신 그들에게 10년간 면세권을 포함한 다양한 교역 특권을 부여했다. 이 도시는 1666년 요새화되면서 방어군 주둔지가 되었다.
1682년 크리스티안 5세 때 스타방에르로부터 주교관할권이 조정되어 신생도시이면서도 가톨릭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크리스티안산은 1666년 첫 번째 대화재로 도시가 황폐화되었으나 18세기 미국독립전쟁을 시작으로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 조선업이 활황을 이루었다.
이 무렵 잦은 해전과 대륙붕 봉쇄로 조선업에 점차 타격이 가해졌다. 이후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프랑스와 영국 간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영국으로부터 무자비한 공격을 받았다.
크리스티안산의 경제는 침체에 빠졌다가 1830년대 들어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조선 산업의 성장이 도시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04년 크리스티안산은 오데뢰이(Odderøy)섬에 검역소를 개설해 입출항자들에게 검역을 실시하고 콜레라 환자를 본격적으로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방역정책 덕분에 콜레라 환자 발생과 사망자 수가 주변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고 의료산업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사망자 수는 노르웨이 서해안 드라멘(Drammen)의 336명에 비교하면 훨씬 적은 15명에 불과했다(1833~1866).
1881년에는 노르웨이에서 두 번째인 국립 정신과 연구원이 설립되어 숙련된 전공의를 불러들이고 이 지역 여성들에게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의료분야는 지역 경제를 활성화했다. 은퇴자들의 노후복지를 위한 11개의 실버타운이 있으며 모두 11개의 재활센터, 15개의 피트니스센터, 10개의 병원, 25개의 약국이 입주민들의 건강증진과 질병 치료를 지원한다.
노르웨이의 지형적 특성을 활용한 남부의 수력발전소 개발과 더불어 크리스티안산도 산업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1910년 니켈 정제소를 설립했고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때 중립국 선적 항구로서 무역 활황의 시기를 맞이했으나 1920년 금(gold)본위 정책 도입과 1930년대 세계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침체되기도 했다.
이 무렵 러시아 혁명운동가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i)가 크리스티안산의 섬에서 1년가량 유배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80년대 도심 화재의 영향 등으로 경제가 가라앉았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 해양, 심해시추, 보안 산업을 기반으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3]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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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아그데르주〉, 《위키백과》
- ↑ 〈유럽지명사전 : 노르웨이 아그데르주〉, 《네이버 지식백과》
- ↑ 〈유럽지명사전 : 노르웨이 크리스티안산〉,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 〈아그데르주〉, 《위키백과》
- 〈유럽지명사전 : 노르웨이 아그데르주〉, 《네이버 지식백과》
- 〈유럽지명사전 : 노르웨이 크리스티안산〉,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북유럽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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