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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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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qinglin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4월 6일 (목) 11:2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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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영어 : Anatolia)는 서아시아 지역 중 아나톨리아반도에 있는 튀르키예 등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튀르키예 외에도 키프로스섬에 있는 북키프로스를 서아시아 아나톨리아 지역에 포함하기도 한다.[1]

개요

아나톨리아 지역 대부분은 넓은 고원 지대이다. 아나톨리아 북쪽과 동쪽일수록 산이 더 험하다. 흑해와 에게 해가 이어지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 사이에 마르마라해가 있다. 마르마라 해 북쪽은 유럽 대륙이며, 보스포루스는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준다. 이 지역의 유구한 역사 덕분에 인구 역시 매우 다양하다. 아나톨리아 남동부에 주요 무슬림 소수 집단을 이루고 있는 쿠르드족, 아나톨리아 남쪽에 주로 사는 아랍인 외에도 아나톨리아 각지에는 알바니아인, 보스니아인, 유대인, 조지아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이 소수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다. 지중해 인근에서도 손꼽히는 풍요로운 지역으로, 이 지역은 꽤 오랜 기간부터 문명이 꽃피운 곳임에도 아직까지 생산력이 창창하다. 동로마 제국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천년 세월을 버텨냈고 현대 튀르키예도 여기 덕분에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농산물을 수출하기까지 하는 몇 안 되는 국가일 정도이다. 아나톨리아와 비슷하게 고대 문명의 발상지였던 메소포타미아 지방이나 이집트 및 북아프리카 지대는 과거엔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우수한 생산력을 뽐냈으나, 계속되는 농경 활동에 현재는 지력이 고갈되어 사막화가 진행되었다.[2]

역사

한반도의 약 3.5배 정도 되는 크고 아름다운 영토에 오래전부터 식량이 풍부하게 생산되었고, 그리스, 페르시아, 러시아를 잇는 초원길과 비단길이 지나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땅으로 여러 문명들이 흥망을 거듭했다. 고대에는 서부 해안을 이오니아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종교적으로도 자주 언급되는 지역으로 아브라함이 야훼의 명령을 받기 전에 살던 땅은 이곳의 동남부에 위치한 하란이었다. 이곳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모두의 성지로 사이좋게 교회와 모스크가 들어서 있다.

고대

기원전 1만 년 무렵, 아직 인류가 수렵 생활을 할 때부터 괴베클리 테페 같은 거대 석조 구조물을 지었는데, 이는 현재 발견된 인공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기원전 7100년 즈음 아나톨리아 동남부 오늘날의 콘야 근처 차탈회위크(Çatalhöyük)에서 야생 밀을 개량하여 본격적인 밀 재배를 시작했다. 차탈회위크의 인구는 5-7천여 명 정도, 최대 수용 가능 인원은 1만여 명 정도로 학자들에 따라서 이를 세계 최초의 도시라고 보기도 한다. 유전자 검사 결과 여기에 살던 사람들 중 일부가 영국으로 건너가 스톤헨지를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

히타이트

기원전 1900년경 무렵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청동기 시대 문명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었으며, 구 아시리아 제국을 무너트리고 고대 이집트와 대립한 히타이트가 이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했다. 히타이트는 기원전 1170년대 후반, 의문의 바다 민족에 의해 멸망한다. 히타이트가 멸망한 뒤에는 신 아시리아 제국, 리디아, 메디아, 프리기아, 파플라고니아 등이 뒤를 이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리디아는 최초로 본격적으로 금속 화폐를 주조하여 사용한 나라라고 한다.

페르시아 / 헬레니즘 제국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에 밀레토스, 에페소스, 페르가몬 같은 그리스계 도시들이 번성했으며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 리디아를 무너트린 후 이 지역을 차지하며 그리스계 도시 국가 상당수에게 조공을 받았다. 알렉산드로스 3세 이후에는 폰토스 왕국 등 헬레니즘 국가들이 이곳에 위치하였으며, 페르가몬 왕국 등이 유명하다.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서면서 에게 해 연안 일대에서만 거주하던 그리스계 주민들이 동쪽으로 대거 진출해 원주민들을 그리스계로 동화하면서 로마가 아나톨리아를 정복할 때쯤 되면 아나톨리아 전체가 그리스 문화권의 일부로 편입된 상태가 되었다. 또한 헬레니즘 왕국들이 불러들인 켈트족들이 아나톨리아 내륙에도 정착했는데 해당 갈라티아 지역은 고대 후기까지 켈트어 계통 언어가 사용되었다 한다.

로마 제국

헬레니즘 시대 이후에는 폼페이우스, 루쿨루스 등의 장군들이 폰토스 왕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로마 공화정의 동방 속주가 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외침이 적고 부유했고, 일찍부터 고급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따라서 로마 제국에 편입된 이후에도 번영을 누렸다. 특히 고대부터 유명했던 그리스계 도시 에페소스, 밀레토스, 페르가몬 등은 계속해서 번영을 누렸는데, 로마 제정의 대표적인 통치술로 알려진 황제 우상숭배 정책을 맨 처음 아우구스투스에게 건의해 이를 관례화시킨 지방도 위의 에페소스, 페르가몬, 밀레토스 등 아나톨리아 서부에 위치한 아시아 속주였다. 워낙 부유하고 문화 수준이 높았던 지방인데다, 예로부터 지중해 연안과 흑해 일대에는 그리스계 이주민들이 많고, 고대 여러 민족들의 융합 속에 번영을 누렸다. 따라서 원수정(프린키파투스)이 안정화되고, 속주 출신의 부유한 권력가들이 원로원 의석을 차지할 때부터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로마 중앙정계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 결과, 그리스계 로마 원로원 귀족 디오 카시우스와 같은 서기 2세기 세습 원로원 귀족들을 배출하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 혈통의 아나톨리아 주민들이 아닌, 아나톨리아 출신들도 마찬가지인 터라 아나톨리아 태생으로 오늘날 터키 남부에 위치한 시리아 속주 태생 인재들도 끊임없이 로마 주류층에 편입됐다. 특히 네로, 도미티아누스,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 당시, 아나톨리아가 고향인 로마인들은 이들 세 황제의 총애를 받아 제국의 요직을 꿰찼고,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하드리아누스 시대 이후부터는 아프리카 속주(오늘날의 북아프리카 튀니지), 그리스, 시리아 속주와 함께 로마 원로원 내에서 부와 권력을 모두 쥔 권세가들과 기사계급 태생의 원로원 신참자들을 수없이 배출했다. 따라서 서기 3세기에는 아나톨리아의 옛 프리기아에서 발흥한 고르디아누스 가문과 같은 신흥귀족들을 비롯하여, 2세기 말 ~ 3세기를 지배한 황제, 근위대장, 고위 행정가들은 거진 아나톨리아 출신들과 연을 맺은 이들이거나 아예 아나톨리아 출신들로 이 일대에 근거지를 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서기 3세기 이후 고트족들이 흑해를 넘어 아나톨리아를 약탈하고 로마 제국 동부에서 새로이 흥기한 사산 왕조가 아나톨리아 동부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중세

동로마 제국

서기 2세기 이래, 로마 제국 동부 일대에서 부와 권력을 모두 쥔 대표지방답게, 동, 서로마 제국 분단 이후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제국의 핵심 인적, 물적 기반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과거 게르만족 병사들에게 지나치게 의지하던 대신, 병력 상당수를 아나톨리아 남부 이사우리아인으로 충원하기 시작했다. 이라클리오스 치세 당시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영토였던 시리아와 이집트를 사산 왕조에게 점령당하고 발칸 반도 지역이 아바르 칸국에게 초토화된 상황에서도 아나톨리아 해안 지대를 건사한 덕분에 제국은 금새 복귀할 수 있었고, 이후 7세기 이슬람 세력에게 다시 시리아, 이집트 및 북아프리카와 크레타, 키프로스 등을 상실한 후에도 아나톨리아를 건사한 덕분에 국력은 약화되었을 지언정 지역 강국 역할을 수행하는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수세기에 걸쳐서 제국군의 기반이 된 테마 제도가 처음 실시된 곳이 바로 아나톨리아 일대였다. 또한 9세기 중반부터 시작되는 제국의 중흥과 확장 시에는 제국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어 제국이 일시 단절되고 라틴 제국이 들어섰을 때,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삼은 니케아 제국이 일어나 제국을 중흥시키기도 했다. 니케아 시대 말기 및 팔레올로고스 왕조 초기 때 활동했던 사르디스의 안드로니코스 주교(Andronikos of Sardis)가 발칸 반도에서 소아시아로의 항해를 그리스(Hellas)로 귀환한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콘스탄티노플을 뺏긴 상태에서, 불가리아 제2제국, 4차 십자군 계열의 정치체들, 로마 계열이지만 지휘계통이 통일되어 있지 않은 여러 분국들이 난립해 있던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한) 발칸 반도 대신, 소아시아 지역이 확실히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었다는 점이 드러난다.[1]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아나톨리아 내륙을 튀르크 계열 국가들에게 빼앗긴 뒤로 제국은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내리막길을 걸었다.

로마가 아나톨리아 수복에 썩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반란이 꾸준히 발생했던 점이 있다. 아나톨리아를 기반으로 한 군사 귀족들은 유사시엔 이란/아랍/튀르크 세력을 막아주는 기반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콘스탄티노플의 중앙정부에게 자주 반란을 획책하는 것으로 경계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오히려 옛 동로마 제국의 중추지 총대주교구인 안티오키아의 수복에 관심을 두었는데, 군사 요충지인 아나톨리아 없이 그게 될 리가 없다. 또한 경제적인 측면에서 아나톨리아 내륙 지방의 상실이 제국에 큰 타격이 아니었던 점도 있다. 아나톨리아의 인구와 농업 생산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곳은 튀르크족이 장악하기 시작한 내륙 고원 지역이 아닌 서부지역 및 해안지역이었기 때문인데, 실제로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의 콤네노스 왕조 시기에 오히려 제국의 경제력은 절정에 달했다.

다만 이러한 인식이 얼마나 정확한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다. 만지케르트 전투의 패배로 아나톨리아를 상실한 이후, 그 탈환이 중요한 과제로 다뤄진 시기는 소위 콤네노스 삼현제의 제위 기간인 1081년~1180년의 딱 100년인데[2] 이 시기 동로마 제국은 분명 국력, 경제력, 문화적 역량 모두 유럽-지중해-근동의 최강국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는 강대국이기는 하였으나, 군사적 측면에서는 그렇게까지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아나톨리아 내륙에 자리잡은 셀주크계 룸 술탄국을 보더라도 (대체로 동로마 제국이 국력면에서 우세한 입장이기는 하였으나) 간단하게 제압할 정도로 만만한 적수는 아니었고, 동로마 제국의 역사 내내 제국을 괴롭혔던 양면 전선 문제는 이 당시에도 여전했다. 즉, 제국의 서방과 북방을 위협하는 노르만족이나 헝가리, 페체네그족 등을 일단 제압해 놓지 못하면 동방의 대 이슬람 전선에 총력을 기울일 수 없었던 것. 이런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무슬림 세력을 상대하기는 어려운 나머지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명분삼아 서유럽 세력까지 끌어들여야 했던 것이 당시 동로마 제국의 입장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등장한 십자군 세력에게 있어서 아나톨리아 내륙은 중근동의 대도시이자(막대한 전리품) 5대 총대주교좌 도시(예루살렘뿐 아니라 여기도 성지)라는 강력한 유인을 가진 안티오키아에 비해 전혀 매력적인 목표가 아니었고, 따라서 동로마 제국이 '자국의 안정과 국방력 확보를 위해' 아나톨리아 내륙의 수복을 우선시하는 입장을 취했다면 십자군으로서는 그에 협력할 이유가 크지 않았던 것이다.

알렉시오스 1세의 치세 초기, 극도로 위태로워진 로마 제국의 회복에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일단 경제의 중심지인 아나톨리아 해안지역 수복을 우선시하고, 서유럽 세력의 협력을 얻어낼 수 있는 안티오키아 수복을 그 다음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콤네노스 황제들이 아나톨리아 수복에 완전히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마누일 1세 치세 말기의 미리오케팔론 전투에 이르기까지, (그 노력이 충분했는가, 즉, 군사적 요충지인 아나톨리아 내륙의 수복의 가치에 걸맞게 우선시했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겠으나) 아나톨리아 수복 자체에는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왔음을 생각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즉, 아나톨리아의 내륙 상실 이후 제국이 탈환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못 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근세

오스만제국

로마 제국이 물러난 자리에는 각종 투르크계 아나톨리아 베이국이 난립하다가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통일했다.

근현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터키가 패배하자 그리스 왕국에서 스미르나를 확장기지 삼아서 아나톨리아 서부를 고토회복(메갈리 이데아)하고자 침공하였다가 튀르키예 독립전쟁에서 패해 현재는 튀르키예 공화국의 영토이다. 튀르키예어로는 그리스어의 '아나톨리아'를 음차해 아나돌루(Anadolu)라고 부른다.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현재는 그리스인들이 발칸 반도 남부 끝자락서 주로 분포하고 있지만 소아시아 해안가 일대는 고대부터 그리스인의 활동무대였으므로 아나톨리아에도 20세기 초반까지 그리스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1923년 종교를 기준으로 민족분류를 한 뒤 실행된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당시 이스탄불 인구의 3분의 1이 그리스계였고 그 이전에는 더 많았다. 소아시아 서부 연안과 흑해 연안에는 전통적으로 그리스인들이 많이 살았다. 한편으로 카파도키아 지역의 일부 그리스인은 중세 이후부터 튀르키예어를 사용하였다.

이슬람교를 믿는 투르크 정복 후 기독교도들은 세금의 일종인 지즈야를 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당장의 생활이 힘들 만큼 과중하지는 않았지만 납부 방식이 농촌 주민들에게 상당히 번거로웠기 때문에 주로 농촌 지역부터 빠른 속도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결과를 낳았다. 17세기에 이르러 카파도키아의 정교도(그리스인)들은 차츰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기독교도들의 영향력이 비교적 강했던 시노페와 트라브존 등의 폰토스 지역도 18세기 이후부터 기독교도 비율이 점점 줄어들었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들은 대부분 튀르키예인에 동화된다.

그리스와 튀르키예 사이의 반목, 20세기 그리스-튀르키예 전쟁 시기 그리스인들은 소아시아에서 이즈미르와 트라브존 시노페, 에게해 제도, 카스타모누, 삼순같은 몇몇 해안지역들에 분리된 채 남아있었으며 이것마저도 전쟁 후 튀르키예 독립전쟁에서 그리스가 패배하고 1923년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으로 150만 명의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인들이 튀르키예에서 추방됨으로써 그리스로 넘어간 에게 해 지역을 뺀 나머지는 완전히 사멸하게 된다.[4] 아나톨리아에서 그리스인 비율은 극소수로 떨어지게 됐다. 이 때 추방된 그리스인들은 아테네 인근과 마케도니아 지방에 주로 정착하여, 그들의 원래 살던 지명을 따서 새 정착촌을 세웠다.

그리스와 튀르키예간 인구 교환이 종교에 따라 진행됐기 때문에 이슬람교를 믿는 그리스인들은 튀르키예인으로 분류되어 여전히 튀르키예에 남았다. 한편 1923년 인구교환 때 그리스에서 튀르키예로 이주해온 이슬람교도들도 있다.

지역별 차이

중동과 인접한 동남부, 그리스와 에게 해를 사이에 둔 서부, 캅카스와 인접하고 우크라이나와 마주보는 흑해와 접한 북부 지역의 문화가 각기 다르다. 주로 서구 세계에 많이 알려진 지역은 고대 그리스인 활동 지역과 겹치는 서부이고 지중해성 기후라 자연 풍광도 그리스와 비슷하다. 흑해 주변 동북부 지역에는 러시아의 캅카스 정복 당시 피난 온 이주 정착민 인구[5]가 많으며 차가 재배된다. 흑해 인근지역은 습윤한 해양성 기후로 에게해 인근과 달리 자연 풍광이 조지아나 동유럽과 비슷한 편이다. 동남부 지역은 현재도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인, 동북부는 쿠르드인 인구가 많으며 문화적으로 좀 더 보수적이다. 물론 위에 나온 지도에서처럼 동남부 지역을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제외하고 보는 경우도 있다.

지도

튀르키예 행정 지도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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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1. 아나톨리아〉, 《위키백과》
  2. 아나톨리아〉, 《나무위키》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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