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산후안 (푸에르토리코)

위키원
Asadal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월 21일 (일) 16:14 판 (같이 보기)
이동: 둘러보기, 검색
산후안
산후안 위치

산후안(영어: San Juan, 스페인어: San Juan)은 카리브해에 있는 미국푸에르토리코수도이자 최대도시이다. 정식 명칭은 산후안바우티스타 자치시이다. 푸에르토리코의 북동부 해안에 위치한 도시이며 스페인인들이 건설하였으며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시대에는 서인도 제도유럽을 잇는 거점이었다. 구도심 지역은 에스파냐 식민 시대에 건축된 방어 시설이 잘 남아 있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1]

개요

산후안은 푸에르토리코의 중북부 해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푸에르토리코의 수도이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다. 인구는 약 34만 명으로 푸에르토리코의 최대 도시이며, 라틴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소득 수준이 높은 도시이기도 하다. 산후안 광역 도시권에는 푸에르토리코 전체 인구의 3분의 2가 거주하고 있으며, 국가 전체의 산업과 서비스 기능 역시 대부분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1508년 에스파냐에 의해 현재의 도심보다 남쪽에 처음으로 정착지가 건설되었으며, 1521년에 항구의 효율적인 방어를 위해 대서양에 면한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에스파냐와 신대륙을 잇는 항로상의 무역 거점이자 군사 기지로 이용되었으며, 다른 유럽 국가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올드 산후안으로 불리는 구도심 지역에 대규모의 방어 시설이 건설되었다. 이 때 건설된 방어 시설은 현재까지도 잘 보전되어 있어, 1983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세기 초까지는 구도심 지역 내로 도시 공간이 한정되어 있었으나, 20세기 들어 이촌향도 현상이 나타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도시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도심 지역은 심각한 교통 체증 문제가 부각되고 있으며, 교외 지역에서는 미국 본토의 광역 도시권과 유사한 교외화와 스프롤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구시가지와 도로로 연결되어 있는 신시가지는 근대적 도시로 식품가공업, 시멘트, 섬유 등의 공업이 활발하고 설탕, 잎담배, 커피 등이 적출된다. 푸에르토리코대학이 있다.[2]

명칭

산후안(San Juan)이라는 지명은 을 처음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세례 요한을 기리는 뜻으로 산후안바우티스타(San Juan Bautista)로 명명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하지만 산후안이라는 이름이 처음부터 도시의 이름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원래 산후안은 현재의 푸에르토리코섬(Puerto Rico) 전체를 가리키는 지명이었으며, 오히려 오늘날 산후안에 해당하는 도시 지역의 이름이 푸에르토리코였다. 이 이름은 1508년 현재의 산후안 구도심보다 훨씬 남쪽에 있는 과이나보(Guaynabo) 지역에 만들어졌던 카파라(Caparra)라는 이름의 초기 정착지가 152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면서 에스파냐 어로 ‘풍요로운 항구’라는 뜻의 푸에르토리코라고 이름을 붙인 것에서 유래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섬과 도시의 이름이 자주 뒤바뀌어 불리다가 1746년에 공식적으로 섬 이름을 푸에르토리코, 도시 이름을 산후안으로 결정하였다.

지리 및 기후

산후안은 푸에르토리코섬의 북해안에 대서양을 바라보고 입지해 있다. 남쪽으로는 카과스(Caguas)와 트루히요알토(Trujillo Alto), 서쪽으로는 과이나보, 동쪽으로는 카롤리나(Carolina)와 접하고 있다. 산후안 만(灣)의 북쪽 입구에 돌출해 있는 바위섬인 산후안 섬의 서쪽 지역을 중심으로 산후안 구도심이 형성되어 있으며, 20세기 도시 공간의 확대에 따라 산후안 섬을 넘어 만 주변과 동쪽과 남쪽 방향으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푸에르토리코섬은 전체적으로 기복이 심한 산악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산후안이 있는 북해안은 좁은 해안 평야가 길게 이어져 있으며, 모래로 이루어진 해변이 발달해 있다. 산후안 만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으며, 산후안 만의 동쪽으로는 천연 석호인 콘다도(Condado) 호와 산호세(San José) 호, 로스코로소스(Los Corozos) 호가 있다. 구도심이 있는 산후안 섬이 대서양에 면한 산후안만 북쪽을 가로막고 있어 만 전체가 훌륭한 자연항을 형성하고 있다. 산후안 남쪽에 있는 그란데데로이사(Grande de Loiza) 강 유역의 카과스 분지는 푸에르토리코 섬 최대의 평야 지대이다.

산후안은 쾨펜 기후 구분에 따르면 열대 몬순 기후(Am)에 해당하며, 기온의 계절적 차이가 크지 않다. 평균 기온은 27℃ 정도이지만, 습도가 높아 실제로는 더 무덥게 느껴진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북동 무역풍의 바람맞이 사면에 해당하여 연평균 강수량이 1,431㎜로 푸에르토리코 남부 지역에 비해 비가 많이 내리는 편이다. 연평균 강우 일수가 198.5일에 달할 정도로 일 년 내내 비교적 일정하게 비가 이어지지만, 짧은 시간 동안 내리기 때문에 일조 시간 역시 연간 3,000시간에 이른다. 1월부터 3월까지는 다른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가 적게 내린다.

역사

에스파냐 식민지

푸에르토리코섬 일대에 처음으로 거주한 부족은 1000년경 정착한 아라와크(Arawak) 인디언의 일족인 타이노 족(Taino)이다. 이들은 부족장을 중심으로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파인애플, 고구마 등의 작물을 재배하였다. 1493년 콜럼버스는 자신의 제2차 항해에서 소앤틸리스 제도과들루프(Guadeloupe) 섬에 상륙하였다가, 이 섬의 카리브(Carib) 인디언에게 잡혀 있던 타이노족 인질들을 풀어주면서 이들을 따라 푸에르토리코섬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게 되었다.

1493년 11월 19일 푸에르토리코섬의 서해안에 상륙한 콜럼버스는 섬을 산후안 바우티스타(San Juan Bautista)로 명명하고 에스파냐의 영토로 선언하였다. 하지만 이후 15년간 가끔씩 주변을 지나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상륙하는 선박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조치 없이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

1508년 콜럼버스 탐험대의 일행이기도 했던 에스파냐의 탐험가 후안 폰세 데 레온(Juan Ponce de León)은 섬 전체를 탐사하던 중 북해안에서 훌륭한 항구로 개발할 수 있을 만한 지형을 발견하고 오늘날 산후안 광역 도시권 서부의 과이나보(Guaynabo)에 해당하는 카파라(Caparra)에 에스파냐 정착지를 건설하였다. 이 정착지는 아메리카에서 도미니카 공화국의 산토도밍고(Santo Domingo)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들어진 유럽인들의 정착지이다. 정착지는 1521년에 다시 항구 북쪽 입구의 바위섬으로 옮겨가면서 이름을 푸에르토리코로 변경하였으며, 나중에 섬의 이름과 도시의 이름이 뒤바뀌어 오늘날과 같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6세기 초 산후안은 에스파냐 인들이 신대륙의 새로운 지역으로 탐험을 떠나는 출발 지점이었다. 신대륙에서 다수의 식민지를 확보한 에스파냐는 16세기 중엽부터 신대륙에서 나는 금과 은을 유럽으로 운송하는 데 있어 산후안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멕시코 광산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활용하여 산후안을 군사 기지로 탈바꿈시키기 시작하였다.

원주민과 다른 유럽 국가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1533년부터 대규모의 방어 시설을 건설하였는데, 가장 먼저 건설된 것이 라포르탈레사(La Fortaleza)로 알려진 총독의 방어용 궁전이다. 라포르탈레사는 건설된 이후부터 푸에르토리코 총독의 관저로 이용되었으며, 현재는 푸에르토리코 지사(Governor)의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뒤를 이어 산후안 만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엘모로(El Morro)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산펠리페델모로 성(Castillo San Felipe del Morro)이 추가로 건설되었다.

산후안 만의 요충지에 건설된 방어 시설은 1595년 드레이크 경(Sir Francis Drake)과 1598년 3대 컴벌랜드 백작(Earl of Cumberland)인 조지 클리퍼드(George Clifford)가 각각 이끈 영국군의 공격을 훌륭히 막아 냈다. 1625년에는 보도인 헨드릭(Bowdoin Hendrik)이 이끄는 네덜란드 병력의 공격으로 마을이 불타기도 했지만, 엘모로를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하였다.

에스파냐는 이후 대서양 방향인 북동쪽에 추가로 산크리스토발 요새(Fuerte San Cristóbal)를 건설하였는데, 이것은 에스파냐가 신대륙에서 만든 가장 큰 규모의 요새이다. 또한 1634년부터 1638년까지 도시의 남부 지역을 가로질러 항구와 마주하게 높이 8m, 두께 5m의 성벽을 세웠으며, 1765년부터 1783년까지 망루와 성벽을 대대적으로 추가하면서 도시 전체를 요새화하였다. 산후안은 카리브 해 지역에서 우위를 유지하려는 에스파냐에 의해 군사적 요새로서의 중요성은 점점 더 높아졌지만, 상대적으로 상업이나 농업의 발달은 소홀히 다루어졌다.

근대, 현대

에스파냐-미국 전쟁(Spanish-American War)의 초기인 1898년 5월, 윌리엄 T. 샘슨(William T. Sampson) 장군이 이끄는 미국 해군이 산후안을 공격하고 이에 맞서 산크리스토발 요새의 화포들이 교전을 시작하면서 두 나라 간의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전쟁은 수개월 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이 났고, 같은 해 12월 푸에르트리코는 파리 조약(Treaty of Paris)에 따라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푸에르토리코가 미국령이 되면서 이전까지 군사 요충지로서의 의미가 강했던 산후안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미국의 기업들이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산후안 주변의 농지를 대규모로 사들였고, 사탕수수의 재배가 본격화되면서 수확물의 운송을 위해 산후안 주변의 육상 교통망이 확충되었으며, 산후안 항(Puerto de San Juan)의 상업과 무역 기능이 확대되어 경제 도시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갖추기 시작하였다.

20세기 들어 푸에르토리코의 이촌향도 현상이 심해지면서 산후안의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었고, 구도심의 성곽 내로 한정되어 있던 도시의 범위는 빠른 속도로 성벽을 넘어 교외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처음에는 성벽이 없이도 상대적으로 안전이 보장되는 남동쪽 내륙 깊숙한 곳의 리오피에드라스(Río Piedras)에 새로운 거주지가 생겨났으며, 주로 해방된 흑인 노예들이 거주하고 있던 구도심과 리오피에드라스 사이의 산투르세(Santurce) 지역을 중심으로 판자촌 형태의 빈민 거주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1951년 산후안은 당시 푸에르토리코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았던 리오피에드라스 전체를 통합하면서 도시 면적은 4배, 인구 규모는 2배로 증가하였다. 1980년까지 산후안의 동서로 인접한 행정 구역까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산후안 광역 도시권은 푸에르토리코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현재는 3분의 2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20세기 후반부터 구도심의 혼잡에 따른 탈집중화 움직임으로 대부분의 연방 정부 청사와 기관들이 산후안 만 건너편 지역으로 이전하였고, 현재는 지사 관저를 비롯한 일부 기관만 구도심에 남아 있다.[3]

경제

산후안은 푸에르토리코의 경제와 산업 중심 도시로, 2012년 기준 1인당 소득 수준이 25,451달러에 달해 개별 도시로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브라질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소득 수준이 높은 도시이다. 산후안 광역 도시권 내에는 석유 화학과 제약, 철강, 양조업 등의 제조업 시설이 입지하고 있으며, 주요 생산 품목으로는 표백제와 청소 용품 등의 화학제품, 의약품, 럼, 비료, 전자 제품, 의류 등이 있다. 또한 산후안은 푸에르토리코의 금융 중심지로 특히 하토레이(Hato Rey)의 라미야데오로(La Milla de Oro) 지구는 ‘카리브의 월스트리트’로 불릴 정도로 많은 외국계 은행과 금융 회사들이 사무실과 지점을 개설하고 있다.

에스파냐 식민 시대 동안 푸에르토리코 섬은 지형적으로 불리한 조건과 부족한 천연자원으로 인해 주목받지 못했지만, 산후안만큼은 에스파냐의 무역 거점으로 오랫동안 번성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는 각종 세제 혜택 등 정부의 지원 정책과 값싼 노동력 등을 바탕으로 미국계 기업을 중심으로 외국 기업들의 진출이 이어져 섬유, 식품, 신발 등의 경공업 위주로 제조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푸에르토리코에서도 미국 본토의 최저 임금 기준이 적용되면서 노동 집약적인 제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제약, 전자, 화학 등 고급 기술 기반의 제조업이 조금씩 발달하고 있다. 미국과의 경제 통합에 따라 푸에르토리코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미국 시장에서 관세가 면제된다는 점이 산후안 일대의 제조업 성장 과정에서 큰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관광업 역시 산후안 지역 경제의 주요 요소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미국 관광객들을 집중적으로 유치하면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1983년 유네스코(UNESCO)의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올드 산후안 지구와 콘다도(Condado)를 중심으로 대서양 해변을 따라 들어서 있는 고급 리조트 호텔 밀집 지구는 산후안의 관광 거점으로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산후안 항에서 출발하는 카리브 해 크루즈를 즐기기 위한 관광객들 역시 연간 140만 명을 상회할 정도로 많이 방문하고 있어 산후안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되고 있다.[4]

교통

푸에르토리코의 첫 번째 민선 지사의 이름을 딴 루이스무뇨스마린 국제공항(Aeropuerto Internacional de Luis Muñoz Marín)은 산후안 구도심에서 남동쪽으로 13㎞ 외곽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 구역상으로는 인접한 카롤리나(Carolina)에 속한다. 루이스무뇨스마린 국제공항은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주요 허브 공항으로, ‘카리브 해의 관문’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카리브 해 일대에서 연결성이 가장 좋은 공항이다. 뉴욕마이애미를 비롯한 미국 내 10여 개 도시와의 직항편이 개설되어 있으며 런던, 프랑크푸르트, 마드리드 등 유럽 주요 도시와 베네수엘라, 파나마, 콜롬비아,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아이티, 자메이카, 앤티가바부다 등 중앙 및 남아메리카, 카리브해 지역과도 수시로 항공편이 운항되고 있다. 공항 내에는 미 공군의 군사 시설도 같이 들어서 있다.

구도심의 바로 남쪽 수로 건너편에 있는 페르난도리바스도미니치 공항(Aeropuerto Fernando Luis Ribas Dominicci)은 푸에르토리코에서 가장 처음 만들어진 공항으로, 예전에는 이슬라그란데 공항(Aeropuerto de Isla Grande)으로 불렸다. 1955년 루이스무뇨즈마린 국제공항이 개장하기 전까지는 산후안과 푸에르토리코의 관문 공항으로 이용되었지만, 현재는 일부 국내선과 전세기, 항공 학교의 실습용 항공기 등이 주로 이용하고 있다.

산후안만에 있는 산후안항은 훌륭한 입지 조건을 갖춘 자연항으로 화물 터미널과 크루즈 터미널로 모두 이용된다. 산후안 항은 카리브해 일대를 운항하는 주요 크루즈 선의 모항(母港)으로, 14개 이상의 크루즈 노선이 이 항에서 출발하거나 기항하고 있어 아메리카 지역에서 마이애미에 이어 두 번째로 규모가 큰 크루즈항이다. 또한 이와 동시에 대서양 항로와 카리브 해 지역의 화물 운송에서 중축이 되는 상업항이기도 하다.

20세기 후반 도시가 급격히 성장함에 따라 교통정체 문제가 산후안 광역 도시권의 주요 현안 중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 자동차 중심의 교통 체계를 개편하기 위해 1990년대 후반부터 지하철망 구축에 들어가, 2004년 도시 철도인 트렌우르바노(Tren Urbano) 1호선이 개통되었다. 트렌우르바노는 산후안 도심의 바야몬(Bayamón)에서 산투르세(Santurce) 남쪽의 코라손(Corazón)까지 총 17.2㎞의 구간을 운행한다. 그러나 도시 철도는 개설 당시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여 도심의 교통 정체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시내버스는 구도심의 크루즈 선착장 부근에서 터미널을 중심으로 주요 노선이 운영되고 있으며, 구도심 내에는 무궤도 전차 트롤리버스(trolleybus)가 24개의 주요 지점을 연결하고 있다.

관광

라포르탈레사(La Fortaleza)와 산후안 역사지구(Sitio Histórico Nacional de San Juan)는 산후안의 핵심 관광 자원으로, 구도심인 올드 산후안 지역 전체를 가리킨다. 이 지역은 1949년 푸에르토리코 정부에 의해 산후안 국립역사지구(San Juan National Historic Site)로 지정되었으며, 1983년에는 유네스코(UNESCO)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6세기부터 에스파냐가 카리브 해 지역에서의 무역 거점의 확보와 신대륙 항로의 보호를 위해 건설한 군사 요새로, 산후안 만 입구의 산후안 섬에 세워졌다. 18세기까지 지속적으로 망루와 성벽 등이 보강되면서 완전한 성채 도시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내부 지역의 가로망 및 건축물 등이 잘 보존되어 있어 에스파냐 식민 시대의 도시 구조를 잘 살펴볼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점 때문에 역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가진다.

주요 건축물로는 가장 처음 건설된 방어 궁전인 라포르탈레사(La Fortaleza)를 비롯하여 산 펠리페델모로(San Felipe del Morro), 산크리스토발(San Cristóbal), 산후안데라크루스(San Juan de la Cruz, El Cañuelo) 등의 요새가 있다. 라포르탈레사는 요새, 무기 공장, 감옥 등으로도 이용되다가 현재는 푸에르토리코 지사의 관저로 이용되고 있으며, 산후안 만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엘모로와 산크리스토발 요새는 완벽한 방어진을 갖춘 보루들로 17~18세기 군사 건축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

역사지구 내에는 이외에도 수많은 기념비적 건축물들이 남아 있는데, 1521년 건설된 후 1540년과 1802년에 다시 지어진 산후안 대성당(Catedral de San Juan)은 푸에르토리코와 산후안을 처음 개발한 후안 폰세 데 레온(Juan Ponce de León)이 묻힌 곳으로도 유명하며, 레온 일가의 저택이었던 카사블랑카(Casa Blanca)는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1532년에 지어진 산호세 교회(Iglesia de San José)는 신대륙에서 현재까지도 계속 이용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축제

산후안의 주요 축제로는 1956년부터 매년 2월에 개최되는 클래식 음악제인 카살스 축제(Festival Casals)와 1월에 개최되는 산세바스티안 거리축제(Fiestas de la Calle San Sebastián), 6월에 열리는 산후안 축제(Fiesta de San Juan) 등이 있다.[5]

지도

카리브해 국가 지도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동영상

각주

  1. 산후안 (푸에르토리코)〉, 《위키백과》
  2. 산후안(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푸에르토리코 산후안〉, 《요다위키》
  4. 산후안의 경제〉, 《네이버 지식백과》
  5. 산후안〉, 《나무위키》

참고자료

같이 보기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산후안 (푸에르토리코) 문서는 북아메리카 도시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