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행궁
화성행궁(華城行宮)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25 (남창동)에 위치해 있는 [[행궁]으로, 사적 제478호로 지정받았다. 조선 22대 임금 정조가 세운 수원화성 내부에 있는 행궁으로, 건립 당시에는 건물 21동, 576칸 규모로 지어졌다.
목차
개요
화성행궁은 조선 정조 13년(1789)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읍치 자리로 옮기고, 원래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했다.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켜 위상을 높인 한편, 1795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하여 건물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다. 1796년에 전체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되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행궁 등이 있고,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는 온양행궁이 있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화성행궁이 있다.
정조는 1790년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하였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부터 병원과 경찰서로 쓰이기 시작했고, 1920년대 병원 건물이 신축되며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는 낙남헌과 노래당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19년 3월 29일에는 자혜의원에 검진을 받으러 가던 김향화를 비롯한 기생 30여 명이 경찰서(북군영)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1980년대 말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고, 2002년에 중심권역의 복원공사를 마쳤다. 2016년부터 화성행궁 우화관과 별주의 발굴조사와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용도
주로 조선의 국왕이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정조 이외에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 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다. 평소에는 수원 부사 또는 유수가 집무하던 관아로서도 활용되던 곳이다. 화성 행궁은 조선 시대에 건립된 행궁 중 규모가 가장 크며, 수원 화성과 함께 정치적, 군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축물이다.
화성 행궁은 조선 후기 정치와 군사 및 사회 문화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며 발굴 조사 및 복원 정비 사업을 통해 조선 시대 행궁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게 된 중요한 문화 유적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역사
화성행궁은 처음부터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일시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행궁과 수원부 신읍치의 관아 건물을 확장·증측하는 가운데 조성되었다. 주로 수원화성을 건설하는데 관심을 기울이던 정조 시기에 많이 증축되었다. 이 때문에 각 건물마다 지어진 시기가 다른데, 그 과정이 《화성성역의궤》에 잘 기록되어 있다.
정조 사망 직후인 1801년(순조 1년)에는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행궁의 건물들은 무참히 헐렸으며[3], 그 부지에는 신풍초등학교를 비롯한 많은 근대 건물들이 자리잡게 되었다. 1997년에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이후로는 수원시에서 1999년부터 복원 사업을 펼쳤고, 꾸준하게 화성 행궁지의 건물들을 매입하여 철거한 뒤 행궁 건물들을 복원해 나갔다. 이미 1차적으로 복원이 완료되어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관람료는 1,500원 정도다. 2007년 6월 8일에 사적 제478호로 지정되었다.
구조
화성행궁은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 아래의 산기슭을 중심으로 경사지가 펼쳐지고, 시가지가 시작되는 곳의 평지에 위치해 있다. 구조는 앞쪽으로 긴 장방형 구조이다.
정문인 신풍루 양쪽으로 남군영과 북군영이 있으며 신풍루로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서리청과 비장청, 오른쪽으로는 집사청이 위치해있다. 서리청과 비장청, 집사청을 좌우로 지나 마당을 가로지르면 좌익문이 있고, 이를 통과하면 중앙문이 나온다. 이 중앙문을 지나면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이 나타난다. 화성행궁과 따로이 떨어져 있는 화령전은 정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신풍루
신풍루(新豊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으로, 1790년(정조 14년)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다른 고향'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때 신풍루 앞에서 정조가 친히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끓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가운데 문은 어도(御道)로, 임금만 지나갈 수 있다.
좌익문
좌익문(左翊門)은 내삼문(內三門)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으로 1790년 3칸 규모로 완공하였다. 행궁의 본전인 봉수당(奉壽堂)에 이르는 두번째 문으로 중양문(中陽門) 앞에 있다. 문의 이름인‘좌익(左翊)’은 '곁에서 돕는다'는 뜻이며, 편액은 정조의 명으로 정동준(鄭東浚)이 썼다.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된다.
중양문
중양문(中陽門)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고, 가운데의 정문과 좌우의 협문이 있고 좌우로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하였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하였고, 중앙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 있다.
봉수당
봉수당(奉壽堂)은 화성행궁의 정전이자 화성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정조는 17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하였다. 이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인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또 혜경궁 회갑연을 마치고 9년 뒤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진찬례는 조선 최대의 궁중 행상로 당시 커다란 화제거리였으며,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이 건물은 1789년(정조 13) 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에 복원되었다.
유여택
유여택(維與宅)은 평소에 화성유수가 기거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건물이다.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원래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년)에 건립되어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건물은 동향으로 왼쪽에 공신루(供宸樓)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하였다.
1795년 행차 시에 정조는 유여택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경룡관
경룡관(景龍館)은 장락당의 바깥문으로도 사용했던 부속건물이다.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당 태종이 거처한 궁궐 이름에서 따 왔다. 정조는 당 태종의 궁궐 이름을 차용한 이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선의 태평성세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1794년(정조 18)에 2층 구조로 만들었다. 건물의 2층은 모두 마루를 깔아 누마루를 만들고 1층은 널문 3칸을 만들어 지락문(至樂門)이라 이름붙였다.
장락당
장락당(長樂堂)은 혜경궁의 침전이다. 장략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자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 온 것으로, 정조가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실제로 1795년(정조 19) 을묘원행 시에 혜경궁은 여기 머물렀는데, 정민시가 지은 상량문에서는 '빛나는 궁궐이 처음 이루어지는 때를 당하여 다행히 태우께서 먼저 납시는 것을 보았네'라고 하였다.
1794년(정조 18) 화성 서역 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동향으로 세워졌다.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다.
복내당
복내당(福內堂)은 행궁의 내당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해 있다. 좌우 건물 두 채로 이루어져 있다. 상량문은 1796년(정조 20) 11월 민종현이 지었다.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1790년(정조 14)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건립하였고, 1794년(정조 18)에 세웠다.
낙남헌
낙남헌(洛南軒)은 일제 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그대로 남은 유일한 건축물이다. 낙남헌이라는 이름은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남궁(南宮)'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1795년(정조 19) 을묘원행 때 각종 행사가 이곳 낙남헌에서 치러졌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과 양로연을 여기서 하였고,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까지 여기서 하였다.
1794년(정조 18)에 완공되었다.
노래당
노래당(老來堂)은 정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다는 건물로,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열리는 여러 행사 도중 휴식을 취하는 데 사용하였다. 화성 행궁의 정당인 봉수당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나오는데, 곱은 ㄱ자형으로 배치한 초익공(初翼公) 양식 팔작지붕집이다. 1794년 행궁을 증축할 때 5량 7칸 규모로 새로 지었으며, 편액은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나 전하지 않는다. 북쪽으로 낙남헌과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득중정과 통한다.
노래(老來)란 말은 '늙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살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득중정
득중정(得中亭)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정조는 행차 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정조 14)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네 발 쏘아 네 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이라고 하였다. 득중정은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라고 한 구절에서 '득'자와 '중'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편액은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짓고 썼다.
집사청
집사는 주인을 모시고 그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들로서, 행궁의 집사청(執事廳)은 궁궐의 액정서(掖庭署, 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궐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 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신풍루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에 있다. 좌익문 밖 동북 담 안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세웠다. 화성행궁의 대부분의 건물과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 때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2002년 7월에 건물 두 채로 복원되었다. 집사청 앞에는 행궁이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던 수령 6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다.
북군영
북군영(北軍營)은 장용영 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 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를 마주보는 쪽에서 우측에 있다. 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 2, 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이나 되는 규모를 갖추었다.
남군영
남군영(南軍營)은 북군영과 같이 장용외영 친군위 200명이 살면서 지키는 건물이다. 남군영은 신풍루를 마주보는 쪽에서 보면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1789년(정조 13년)에 처음 지어졌고, 1794년에 증축되었다.
서리청
서리청(書吏廳)은 서리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서리란,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해 있으며 남향이다. 예전의 금도청(禁盜廳)건물을 이청으로 쓰게 하고, 그 건물을 증축해서 사용하였다. 1795년 을묘원행 때는 수라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비장청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비장청(婢將廳)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도 앞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원래는 1789년(정조 13)에 세웠는데 1796년(정조 20)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미로한정
미로한정(未老閒亭)은 행궁 후원(後苑)에 만든 정자이다. 후원 서쪽 담안에 있었는데 미로한정이라는 말은 '장래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이다. 노래당과 함께 갑자년(1804)에 세자에게 양위(讓位)하고 화성으로 가리라던 정조의 뜻이 담긴 이름이다.
1790년(정조 14)에 세워졌는데 1칸 6각정으로 '육면정(六面停)'이라고도 한다.
내포사
내포사(內鋪舍)는 행궁의 뒷담 안 왼쪽 기슭의 미로한정의 북쪽 50보(59.4m)쯤 거리에 위치하였다. 높이는 7척 5촌(2.32m)이다. 다만 온돌 1칸만을 놓았으며, 앞으로 반칸을 물려서 벽돌을 깔았다.
1796년(정조 20) 9월 9일에 준공되었다.
외정리소
외정리소(外整理所)는 장차 1795년에 있을 을묘원행에서 치를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다.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 명명하고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행사를 준비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의 정리소는 장용영 내영에 있었는데 1796년에 행궁이 완성되면서 유여택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편액을 달았다. 외정리사는 호조판서가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화성에서는 화성 유수가 겸직하였다.
화령전
사적 제115호인 화령전(華寧殿)은 1801년(순조 원년)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건물로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영전(影殿)이다. 영전은 보통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구별되는 건물로,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추모하던 곳이다. 화성에서 '화'자와 『시경』의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歸寧父母]'라는 구절에서 '령'자를 따서 이름 붙였다. 화령전은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검소하면서도 품격 있게 만든 조선시대의 대표적 영전이다.
훼손 및 복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엄청난 훼손을 당했지만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복원 사업이 이뤄질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옛 모습을 상당 부분 되찾았다. 현재도 복원이 진행 중이며 2003년 7월 말 봉수당, 득중정, 궁녀와 군인들의 숙소 등 482칸의 복원을 완료한 1단계 공사가 끝났다. 수원시나 해당 지역구 국회 의원의 복원 지원도 적극적인 편이라 조만간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복원 논란
수원시와 수원교육지원청은 행궁 복원 2단계 사업을 2014년까지 완료하려고 계획을 잡았다. 이를 위해 신풍초등학교를 2013년까지 광교신도시로 폐교 후 재신설 이전하겠다고 한 것. 그러나 신풍초등학교 역시 2014년 기준 117년이나 이어진 학교인데다 사실상 학교 이전이라기보다는 폐교나 다름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학교 관계자 및 동문들은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가 2012년 12월 28일 수원시와 신풍초등학교 간의 합의가 이루어져 수원교육지원청에서 171억원 가량의 신풍 초등학교 분할 납부 방식의 토지 매매 계약을 체결하고, 올 5월까지 계약금과 매매 대금 86억 7,200만원을 지급하면서 늦게나마 2차 복원을 잡았고, 2013년 3월부로 신풍초등학교는 광교신도시로 이전, 기존 교사(校舍)는 더 이상 신입생을 받지 않고 임시로 분교장 형식으로 운영하다가 폐지되었다.
한편 화성 행궁 2단계 복원 사업은 2022년 우화관, 별주, 장춘각을 비롯한 나머지 94칸이 복원과 함께 끝난다.
기타
- 무예24기보존회의 공연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며 대장금 등의 사극 촬영지로서 자주 쓰이고 있다.
- 화령전의 정문은 닫아 놓은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닫혀있더라도 화성 행궁을 통해 화령전까지 갈 수 있다.
- 화성행궁에 큰 행사가 있어 종로의 도로가 통제되면 심각한 교통 체증이 생긴다. 장안동 정류장에서 팔달문 정류장까지 30분 가까이 걸릴 수도 있다.
- 멀리 산 위에는 거대한 불상이 보이는데 대승원이라는 절이다. 하지만 절은 의외로 작다.
- 오산시에서 진행하는 오산 시티투어의 코스 중 융건릉과 함께 둘 뿐인 오산시외 탐방코스다. 대부분의 시티투어 코스가 시내 구간을 도는 것을 감안할 때 특이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 홍상수의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장면 일부를 화성행궁에서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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