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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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턴(Charleston)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남동부에 있는 도시이다. 인구는 약 15만 명이며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1861년 4월 남북전쟁이 시작된 곳이기도 해서 남북전쟁 배경의 작품에 자주 언급되는 도시이다. '찰스 왕의 도시'라는 뜻으로 영국의 찰스 2세를 기념하여 붙여진 지명이다.[1]
개요
찰스턴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남동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며 찰스턴 카운티의 군청소재지이며 애슐리강과 쿠퍼강어귀 사이의 반도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찰스턴 대도시 지역의 인구는 약 80만 명이다. 오늘날의 찰스턴에서 11㎞ 떨어진 서쪽 제방에 1670년 영국인 취락이 건설되었으며, 찰스 2세를 기념해 찰스타운(Charlestown)이라 명명했다. 그 후 1680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고, 인디언과의 교역 중심지로 발달했다. 1690년에는 찰스턴이 북미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였고 인구조사에 따르면 1840년까지 미국에서 10개의 큰 도시 안에 들었다. 1722년 찰스시티앤드포트로 인가를 받았고, 곧이어 1783년 찰스턴으로 재인가를 받았다. 찰스턴의 노예 무역상들은 최초로 왕립 아프리카 회사의 독점을 뚫고 18세기 대규모 노예무역을 개척했다. 미국으로 수입된 노예의 거의 절반이 찰스턴에 도착했다. 한때는 미국의 주요 면화 적출항이었으나 남북전쟁 후는 활발하지 못하다. 1942년 가까운 샌티-쿠퍼강 유역에 착수한 수력발전 사업으로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비료, 화학, 철강, 종이, 펄프, 정유, 금속가공, 석면, 고무 주형, 의류 등 다양한 제조업이 발달했다. 1996년까지 미해군 제6지구와 공군방위사령부의 본부가 이곳에 있었으며 찰스턴대학(1770),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의과대학(1823), 시터들군사대학(1842), 찰스턴박물관 등이 있다. 남북전쟁의 발단이 된 섬터 요새를 비롯하여 모리스요새, 찰스턴성채 등의 사적들이 있으며, 헤이워드 워싱턴 저택(1770), 조지프 매니골트 저택(1803), 독 스트리트 극장(설립 1736, 복원 1937) 등 유서 깊은 역사적인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밖에 배터리 공원과 사이프러스 공원, 18세기 중반의 조경 양식으로 조성된 미들턴플레이스 정원, 진달래와 동백나무가 많은 매그놀리아 공원 등이 근처에 있다. 매년 열리는 진달래 축제는 인기있는 행사이며, 1977년부터 음악 예술 축제인 스폴레토축제가 열린다. 식민지 초기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어 최근 관광지로 각광받고있다.[2]
지리 및 기후
도시는 제1차 세계 대전 때만 해도 10-13km²에 들어섰지만, 이후 애슐리 강을 건너 제임스섬과 존스섬 일부를 포함하며 크게 확장되었다. 도시 경계는 또한 다니엘섬과 케인호이 지역을 포함하여 쿠퍼강을 가로질러 확장되었다. 현재 도시의 총면적은 351.0km²이며, 이 중 297.9km²는 육지이고 53.0km²는 물이다. 찰스턴 항구는 대서양에서 남동쪽으로 약 11km 떨어져 있으며 평균 너비는 약 3.2km이며 입구를 제외한 모든 면이 둘러싸여 있다.
찰스턴은 습한 아열대 기후(Köppen climate climate climate Cfa)로 겨울이 온화하고 여름이 덥고 일년 내내 상당한 강우량을 보인다. 여름은 가장 습한 계절이다. 일년 강수량의 거의 절반이 6월부터 9월까지 천둥번개가 치는 형태로 발생한다. 가을은 11월 중순까지 비교적 포근하다. 겨울은 짧고 온화하며 가끔 비가 오는 것이 특징이다.
역사
찰스 2세는 1663년 3월 24일에 8명의 충실한 친구들인 영주들에게 캐롤라이나 지방을 부여했다. 1670년 윌리엄 세일 주지사는 버뮤다와 바베이도스에서 온 정착민들을 위한 배를 마련했다. 이 정착민들은 오늘날의 도심에서 북서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애슐리강 서안의 앨버말 포인트에 당시 찰스타운(Charlestown이라고 불렸던 곳을 세웠다. 찰스타운은 13개 식민지에서 종합적으로 계획된 첫 번째 마을이 되었다. 통치, 정착 및 개발은 존 로크(John Locke)가 그랜드 모델(Grand Model)로 알려진 비전 계획을 따르는 것이었다.
유럽 식민지 시대 당시 이 지역에는 원주민 쿠사보(Cusabo)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정착민들은 1671년 10월 전쟁을 선포했다. 정착민들은 처음에 인디언을 노예로 거래하던 북부 원주민 부족인 웨스토(Westo)와 동맹을 맺었다. 정착민들은 1679년에 웨스토와의 동맹을 포기하고 대신 쿠사보와 동맹을 맺었다.
초기 정착지는 빠르게 줄어들고 사라졌고, 1672년경 애슐리강과 쿠퍼강이 합류하는 오이스터 포인트에 정착민들에 의해 세워진 다른 마을이 번성했다. 이 두 번째 정착지는 공식적으로 1680년에 원래의 찰스타운을 대체했다. 두 번째 장소는 방어가 더 용이했고 훌륭한 자연 항구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도시는 1690년까지 북아메리카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1698년에 천연두가 발생했고, 1699년 2월에 지진이 이어졌다. 지진으로 인해 도시의 약 3분의 1이 파괴되었다. 재건하는 동안 황열병이 발생하여 나머지 주민의 약 15%가 사망했다. 찰스타운은 18세기 전반에 걸쳐 5~8번의 주요 황열병 발병을 겪었다.
1719년경, 도시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찰스타운(Charlestown)으로 쓰여지기 시작했으며 쿠퍼강(Cooper River)을 마주한 곳을 제외하고 오래된 성벽은 다음 10년에 걸쳐 대부분 제거되었다. 찰스타운은 사우스캐롤라이나 내륙 식민지화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1732년 조지아주가 설립될 때까지 남부 식민지의 최남단 지점으로 남아 있었다. 18세기 중반까지 찰스타운은 남부 식민지에서 대서양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다. 1770년에 이 도시에는 노예의 절반인 11,000명이 거주했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사이에 찰스턴은 적어도 사회의 최고 계층에서는 경제적 호황을 경험했다. 남부의 환금 작물로서 면화의 확대는 사회의 작은 부분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고 인상적인 건축과 문화에 자금을 지원하는 동시에 노예의 중요성을 증가시켰고 흑인 찰스턴인들에 대한 규제를 점점 더 크게 만들었다.
비록 컬럼비아가 1788년에 주의 주도로 대체했지만, 1793년에 일라이 휘트니의 면화 진 발명으로 작물의 가공 속도가 50배 이상 빨라지면서 찰스턴은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처음에는 섬유 산업을 기반으로 하여 여분의 생산을 광활하게 차지했고 면화는 19세기 찰스턴의 주요 수출 상품이 되었다.
찰스턴은 남북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추적인 도시로서 북군과 남군은 모두 그 도시를 통제하기 위해 경쟁했다. 남북전쟁은 1861년 찰스턴 항구에서 시작되었고 1865년 북군이 찰스턴을 장악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끝났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선출된 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총회는 1860년 12월 20일 연방에서 탈퇴하기로 투표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가장 먼저 탈퇴한 주였다.
1886년 8월 31일, 찰스턴은 강한 지진을 경험했다. 이 충격은 순간 진도 7.0, 최대 메르칼리 진도 X(극단)로 추정됐다. 북쪽으로는 보스턴, 북서쪽으로는 시카고와 밀워키, 서쪽으로는 뉴올리언스, 남쪽으로는 쿠바, 동쪽으로는 버뮤다까지 멀리 느껴졌다. 찰스턴의 2,000개 건물에 피해를 입혔고 도시의 모든 건물의 가치가 약 2,400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시기에 600만 달러 상당의 피해를 입혔다.
찰스턴은 20세기에 수십 년 동안 경제적으로 쇠퇴했지만, 이 지역에 대규모 연방군이 주둔함으로써 도시 경제를 부양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대부분 흑인 노동자들이 차별과 저임금에 항의했던 1969년 찰스턴 병원 파업은 민권 운동의 마지막 주요 사건 중 하나였다. 1989년 허리케인으로 28억 달러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2015년 6월 17일, 21세의 백인 우월주의자 딜런 루프(Dylann Roof)는 역사적인 에마누엘 아프리카 감리교 성공회에 들어가 성경 공부에 참가하다가 총격을 가해 9명을 죽였다.[3]
사우스캐롤라이나의과대학교
사우스캐롤라이나의과대학교(The Medical University of South Carolina)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남동부의 찰스턴에 위치한 공립대학교이다. 1823년 12월 설립승인을 받아 1824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의과대학(Medical College of South Carolina)으로 처음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에는 사립교육기관으로, 7명의 교수진과 30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이는 미국에서 10번째로 설립된 의학대학이며, 남부의 딥 사우스 지역(Deep South; 사우스캐롤라이나주를 비롯해 루이지애나주와 미시시피주, 앨라배마주, 조지아주 등 5개 주를 일컫는 말)에서는 처음 세워진 의과대학이다. 이듬해인 1825년 4월에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남북전쟁 시기(1861~1865년)를 제외하고는 지속적으로 운영되었다.
1881년 약학대학을 두었고 1910년에는 주립대학이 되었다. 찰스턴(Charleston) 시의회가 승인하여 1882년부터 운영되었던 간호실습학교(Training School for Nurses)에서는 설립 초기부터 의학대학 교수진들이 일부 수업을 강의하였는데, 1919년 이곳으로 병합되어 간호대학이 되었다. 1936년에는 약학대학 전공의 학위를 수여하였고 1953년 치의과대학 설립을 승인하였다. 1966년부터 간호대학에서는 3년제 프로그램과 4년제 학위과정을 두었고 보건의료전문대학이 설립되었다. 이듬해 1967년 치의과대학 첫 학생이 입학하는 등 1960년대까지 6개 단과대학을 갖추었으며, 1969년 현재와 같은 교명으로 변경되었다. 1973년 약학대학에 박사과정이 도입되었다. 2018년 기준으로 의과대학과 간호대학, 치의과대학, 보건의료전문대학 등 6개 단과대학이 있다. 학부와 석사, 박사 및 박사 후 과정을 두고 있으며, 메디컬센터가 있다. 1856년 설립된 로퍼 병원(Roper Hospital)이 교육과 실습을 위한 주병원으로 활용되었는데, 이후 시설을 확충하여 10층 규모의 의과대학병원(Medical University Hospital)이 새롭게 세워졌다. 메디컬센터 내에는 대학병원과 정신건강의학연구소, 어린이병원, 심장센터, 이식센터, 소화기질병센터 등의 병원과 여러 연구센터가 있다.[4]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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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찰스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위키백과》
- ↑ 〈찰스턴(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찰스턴〉, 《요다위키》
- ↑ 〈사우스캐롤라이나의과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 〈찰스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위키백과》
- 〈찰스턴〉, 《요다위키》
- 〈찰스턴(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사우스캐롤라이나의과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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