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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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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

우륵(于勒)은 신라 가야금의 악성(樂聖)이다.

개요[편집]

  • 우륵은 대가야의 악사이다. 가야의 가실왕이 중국의 악기인 쟁(箏)을 모방해 가야금(伽倻琴)을 만든 후, 우륵에게 명하여 가야금 12악곡을 짓도록 했다. 이후 신라 진흥왕(眞興王)에게 귀부하여 대가야의 음악을 신라에 전수하였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조선의 박연과 함께 한국 3대 악성(樂聖)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삼국사기》에 가야금과 노래, 춤을 배웠는데, 우륵이 전수한 12곡을 음란한 음악이라며 5곡으로 줄여버렸다. 우륵은 이에 분노했지만, 음악을 들어보고 나서 "즐거우나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다"고 평하며 그들이 바꾼 음악을 인정하였다. 한편 신라의 대신들은 진흥왕에게 "가야를 망친 망국의 음악 따위는 본받을 것이 못 됩니다."라고 가야악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간언하였지만, 진흥왕은 "가야왕이 음란해 망한 것이지 음악이 무슨 죄가 있는가. 성인(聖人)이 음악을 만드신 뜻은 사람의 감정에 호소해 법도를 따르게 하고자 한 것이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못 다스려지고는 음악과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라며, 결국 우륵이 전수한 가야악이 신라의 궁중 음악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악사 성열현 사람 우륵(樂師省熱縣人于勒)" 이외 구체적인 지명을 명시하지 않으면서 음상사학적(音相似學的)으로 해석하여 유사한 지명을 비정하고 있는 추세이다.[1]
  • 우륵은 가야의 가실왕 때 「하가라도」, 「상가라도」, 「보기」 등 12곡을 지었고, 진흥왕 12년(551)에 신라에 망명한 가야의 음악인. 생몰연대 미상. 가야국 성열현(省熱縣)에서 살았다고 한다. 우륵의 나라 가야는 6가야 중에서 대가야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551년 이후 562년에 멸망한 가야가 대가야이기 때문이다. 한때 가실왕이 우륵에게 이르기를, '모든 나라의 방언도 각각 서로 다른데, 성음(聲音)이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가얏고를 위해 악곡을 지으라고 하여 12곡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가얏고를 들고 제자 이문(泥文)과 함께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였는데, 왕은 그를 맞아 국원(國原 : 지금의 충주)에 안치시키고 계고(階古)·만덕(萬德)·법지(法知) 등을 보내어 그의 업(業)을 전습하게 하였다. 우륵은 이 세 사람의 재주를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얏고, 법지에게는 노래, 만덕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쳤다. 일찍이 우륵이 지은 12곡명은 「하가라도(下加羅都)」·「상가라도(上加羅都)」·「보기(寶伎)」·「달기(達己)」·「사물(思勿)」·「물혜(勿慧)」·「하기물(下奇物)」·「사자기(獅子伎)」·「거열(居烈)」·「사팔혜(沙八兮)」·「이사(爾赦)」·「상기물(上奇物)」이다. 이 중에서 「보기」·「사자기」·「이사」를 제외한 나머지 9곡은 당시의 군현명과 같아서 해당 지방 민요의 성격을 띤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2]
  • 우륵의 출생과 성장 및 구체적인 활동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 '악지(樂志)'에 성열현(省熱縣)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고기(古記)에 가야국 가실왕(嘉實王)이 당의 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왕이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니 어떻게 일정하게 할 것인가?라면서 악사 성열현 사람 우륵에게 명하여 12곡을 짓게 하였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1. 하가라도(下加羅都) 2. 상가라도(上加羅都) 3. 보기(寶伎) 4. 달이(達已) 5. 사물(思勿) 6. 물혜(勿慧) 7. 하기물(下奇物) 8. 사자기(師子伎) 9. 거열(居烈) 10. 사팔혜(沙八兮) 11. 이사(爾赦) 12. 상기물(上奇物)이다." 여기에서 보이는 우륵 12곡은 가야 각국의 방언을 일원화한 것으로 각 지역의 음악을 이해하고 이를 기본으로 편곡하여 대가야 국왕의 치적을 찬양하는 곡이었을 것이다. 이는 노래 가사를 짓는 데 국가 의례의 절차 및 규범과 왕실 역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가능한데, 우륵은 이러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여기에는 불교적인 색채도 보인다. 12곡 중 8번 사자기는 불교 사원에서의 사자춤을 가리키는데, 우륵 역시 불교의 악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면 우륵은 당대의 대가야 문화를 대변할 수 있는 학문적 소양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3]
  • 우륵은 가야, 신라의 음악가이다. 원래 가야 성열현(省熱縣) 출신으로 대가야 가실왕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중국 남제와의 교역에서 얻은 쟁을 개량해서 가야의 이름을 본떠 12현금(絃琴)을 만들었으며 12현금으로 연주곡 12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530년대 이후 후기 가야 소국들은 중앙 집권적 영역 국가로 발전한 백제와 신라 사이에 껴서 국력에 밀리고 분열과 쇠퇴를 거듭했고 그도 551년 제자 이문(尼文 혹은 泥文)과 함께 가야에서 신라로 넘어왔다. 그는 신라 진흥왕 앞에서 신곡을 연주하게 되고 진흥왕의 찬사를 받아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인 국원경에서 살게 됐고 552년 신라에서 대나마 계고(階古), 법지(法知), 만덕(萬德) 세 사람에게 우륵의 음악을 배우도록 했다. 그는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 가야금, 법지에게 노래, 만덕에게 춤을 가르쳤다. 야사에서는 제자들이 자신의 곡 일부를 편곡하여 밝고 웅장하게 바꾼 것을 칭찬함과 동시에 멸망한 고국 가야를 그리워하며 가야금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며 그 후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고 한다. 충주의 탄금대도 그와 관계된 지명으로 그가 이곳에서 가야금을 탄 것에서 따 왔다. 국악계에서는 추앙받는 인물이다. 생몰년 자체가 미상이고 생애 전반에 걸친 행적이 묘연한데도 여러 접근 방식으로 관련 사업이 빈번한 편이다. 왕산악, 박연과 더불어 한국사 3대 악성으로 불린다.[4]

우륵의 활동사항[편집]

  • 우륵은 대표적인 국악기인 가야금을 만들고 많은 가야금 곡을 지어 우리음악을 빛낸 대가야국 사람으로 신라에 투항한 후 제자들에게 가야금, 노래, 춤을 가르쳤다. 우륵은 박연, 왕산악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악성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탄생, 성장과정, 음악적 업적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사료적 기록은 <삼국사기>뿐이다. 우륵이 가야국에서 지은 12곡은 <상가라도(上加羅都)> <하가라도(下加羅都)> <보기(寶伎)> <달기(達己)> <사물(思勿)> <물혜(勿慧)> <상기물(上奇勿)> <하기물(下奇勿)> <사자기(獅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 등이며, 이들 곡이름은 대부분 당시의 군, 현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 우륵은 대가야국이 멸망하기 11년 전, 진흥왕 12년에 가야금을 갖고 신라로 귀화하였다. 진흥왕은 가야금을 후세에 전하려 하였고, 그리하여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우륵의 가계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태어난 성열현은 경상남도 의령군 신반, 대구광역시 불로동 일대, 고령설 등이 있지만 의령설이 가장 유력하다. 우륵은 520년을 전후하여 가실왕의 부름을 받아 대가야 왕경(王京)으로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대의 대가야 문화를 대변할 정도의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있어 가실왕이 그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540년 이후 백제와 신라의 압박이 현실화되는 가운데 가야 제국의 자구 노력은 실패하고, 가야 소국들은 각기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가야 내부마저 기강이 문란해지고 외부 위협에 둔감해지는 등의 정치적 혼란으로 우륵은 신라로 망명하였다. 진흥왕은 우륵을 국원경(國原京)에 살게 하면서 계속 악사로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악곡을 만들어 진흥왕 앞에서 연주를 하기도 하고, 왕으로부터 명을 받은 제자들에게 전수하기도 하였다. 신분적으로도 상당한 대우를 받았으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12곡이 제자들에 의해 5곡으로 정리되어 신라의 대악으로 지정되었는데, 대악은 국가 의례에 사용되었던 음악이다. 그의 음악은 대가야뿐만 아니라 신라에서도 빛났지만, 그는 온전한 대가야인으로서도 신라인으로서도 활동하지 못하고 주변인의 삶을 살았다.

우륵박물관[편집]

  • 우륵박물관(于勒博物館)은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에 있는 우륵과 가야금을 테마로 한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우륵이 활동했던 정정골에 지어졌으며 2006년 3월 31일 개관하였다. 대지 면적 9,098㎡, 건축 면적 965㎡의 지상 2층 건물로, 박물관의 외관은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을 형상화하여 지어졌다. 관리는 대가야박물관에서 맡고 있으며, 전시실은 우륵을 찾아서, 고대 가야금의 세계, 가야의 혼을 지킨 우륵, 한국의 전통악기, 가야금의 변천사로 구분되어 있다. 박물관 건물 밖의 단독건물로 지어진 우륵국악기연구원으로 불리는 가야금공방과 가야금줄 제작 체험장이 있으며, 5년간의 건조과정을 거쳐 가야금의 울림통으로 쓰이는 오동나무 건조장이 있다. 야외에는 가야금을 만들던 곳이라는 뜻의 금장지(琴匠址)비석과 우륵시비가 있다.

우륵당[편집]

  • 우륵당(于勒堂)은 충청북도 충주시 호암동에 있는 국악 전문 문화공간이다. 신라 진흥왕 때의 악사로 12현금(가야금)을 만든 우륵(于勒 ?~?)의 얼을 기리고, 국악예술을 계승·발전·보급시키기 위해 건립된 국악공연장 겸 전통문화교육 공간이다. 1997년 6월에 건립되었으며 부지면적은 3,028m², 건축 총면적은 1,422㎡이다. 지하 1층·지상 2층 규모의 누각 형식 한옥 건물로, 공연장·전시실(국악기 전시)·연습실·분장실·악기보관실·의상실·사무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부에는 야외무대로도 활용되는 넓은 광장과 잔디밭이 있고, 외삼문 형식으로 만든 출입문, 연못, 우륵상 등이 조성되어 있다.

가야금[편집]

  • 가야금(伽倻琴)은 한국의 고유한 전통 현악기. 울림통에 명주실로 꼰 줄을 얹어 만든 사부(絲部)에 속하는 악기로 '가얏고'라고도 한다. 12줄로 되어 있으며, 술대를 이용하는 거문고와 달리 맨 손가락으로 줄을 뜯어서 소리를 낸다.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전통 현악기 가운데 하나로 소리가 부드럽고 아름다워 다양한 전통 악기와의 합주뿐 아니라, 가야금 산조와 가야금 병창 등에도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현대 음악에 맞추어 표현력을 높이기 위해 15현, 17현, 18현, 22현, 25현으로 줄의 수를 늘린 개량가야금도 나타나고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우륵〉, 《위키백과》
  2. 우륵 (于勒)〉,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우륵〉, 《향토문화전자대전》
  4. 우륵〉,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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