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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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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박영효(朴泳孝)는 조선의 정치가, 갑신정변의 주역, 개화파이자 조선의 마지막 부마이다.

개요[편집]

  • 박영효는 한말의 정치가이다. 급진개화파로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유대치를 중심으로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 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정치적 혁신을 추구했다.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방어하고자 했다. 1861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반남(潘南)박씨이다. 그의 부친은 진사 출신인 박원양(朴元陽)이며 초명은 무량(無量)이었다. 1907년 약 13년간의 오랜 망명생활 끝에 다시 귀국,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궁내부대신(宮內部大臣)에 임명되었다가 고종의 양위에 앞장선 대신들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1년간 제주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한국인 회유정책으로 주어진 후작(侯爵)을 받았으며 1918년에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이사에 취임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 사장, 1926년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 부의장에 있을 때 죽었다. 저서에 《사화기략(使和記略)》(1882)이 있다.[1]
  • 박영효(1861년 6월 12일 ~ 1939년[2] 9월 21일)는 조선 경기도 광주유수 겸 수어사 직책을 지낸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인, 사상가, 작가로 급진개화파이다. 그는 철종의 부마(사위)로 고종의 친척 매제가 되며 금릉위 상보국숭록대부에 올랐다.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갑오개혁을 주도했으며 모두 실패해 도합 20여 년이 넘는 일본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1882년 도일(渡日) 중 배에서 고종의 명으로 제작된 '이응준 태극기' 중 4괘(卦)의 좌·우를 바꿔 재도안했고 이것이 태극기의 원형이 됐다. 1884년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 등 동문수학들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했다가, 청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을 등에 업고 귀국해 다시 갑오개혁을 주도했다. 장정 13만 8천 자에 달하는 개혁 상소문을 올려 세상을 놀랬지만 호응을 얻지 못하고 개화파들과 함께 일본으로 다시 쫓겨갔다. 일본 망명 기간 고종의 폐위를 기도했다고 모함을 받았지만 외려 1907년 고종 황제 양위를 막으려다 친일파들의 손으로 투옥, 유배되기도 했다. 경술 국치 사건 후 일본정부에게 받은 은채 공사금 28만 원으로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기업과 은행 활동에 전념했으며, 이후 중추원 고문과 귀족원 의원,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 편수회 고문도 지냈다. 이 때문에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수록됐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됐다. 어릴적 이름은 무량(無量), 자(字)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 현현거사(玄玄居士), 본관은 반남이며, 일본식 이름은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로,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할 때 치토세마루 호 선원 츠지 도쥬로(辻藤十郞)가 지어줬다 한다.[2]
  • 박영효는 일제강점기 내부대신, 후작,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1861년 6월 12일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은 박무량(朴無量), 자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 필명은 현현거사(玄玄居士)이다. 일본에 망명했을 때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박원양(朴元陽)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고, 큰형은 박영교(朴泳敎), 작은형은 박영호(朴泳好)이다. 1872년(고종 9) 2월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별하였다. 금릉위(錦陵尉)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에 봉해졌다. 조선 말기에 한성판윤, 내부대신, 궁내부특진관,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 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후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귀족회 회장 · 조선식산은행 이사 · 중추원 부의장 ·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 9월 21일 사망했다.[3]
  • 박영효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모란공원에 묘가 있는 개항기 관료이다. 박영효의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오창공(梧窓公)파 11세손이다. 초명은 박무량(朴無量), 자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 필명은 현현거사(玄玄居士)이다. 일본 망명 때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흥덕현감, 공조참의, 도총부도총관, 공조판서를 지낸 박원양(朴元陽)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다. 3남 2녀 중 막내로, 첫째 형 박영교(朴泳敎)는 홍문관수찬을 지냈으나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청나라 군대에 의해 피살되었다. 1872년 철종의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혼인해 부마(駙馬)가 되었는데, 영혜옹주는 가례식을 올린 지 4개월 만에 사망했다. 이후 부마 제도의 관습에 따라 재혼을 하지 않았고, 소실 범씨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어린 시절에 전통 유학 교육을 받았고, 이후 박규수(朴珪壽)·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의 지도를 받아 국제 정세와 선진 지식을 익혔다. 일본에 망명해 있던 1888년 도쿄 소재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영어과를 졸업했다. 1882년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와 일본 견문록인 『사화기략(使和記略)』을 저술했으며, 일본에 망명해 있던 1888년 고종에게 올리는 상소문 형식의 건백서(建白書)를 저술해 국가 개혁 구상을 피력했다. 1939년 사망 직후 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다대리[현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묻혔으나 이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모란공원으로 이장되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 1915년 11월 다이쇼천황(大正天皇)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 1924년 2월 훈1등 서보장(瑞宝章), 1928년 11월 쇼와천황(昭和天皇)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 1935년 10월 시정(始政) 25주년 기념 표창, 1939년 9월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받았다. 1934년 3월 만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장(建國功勞章)을 받았다.[4]

박영효의 생애[편집]

  • 박영효는 1861년 생원 박원양과 이윤행(李潤行)의 딸 전의 이씨의 아들로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광해군 때 의금부판사를 지냈던 오창 박동량의 후손으로, 인조 반정 이후 200여 년의 노론 집권 기간 동안 명문 거족 반남 박씨의 일익을 담당했다. 북학파 박지원, 박규수, 개화당 동지 박정양, 후일 갑오개혁 실패 후 망명객이 된 박영효를 사면복권시키는 박제순 역시 모두 같은 일족이었다. 친부 박원양은 세 번 결혼했는데 그는 마지막 후처인 전의 이씨의 소생이었다. 위로는 누나 두 명, 형 박영교와 박영호(朴泳好)가 있었다. 증조부인 박해수(朴海壽)는 음서로 통훈대부 품계에 진안현감을 지냈고, 조부 박제당(朴齊堂)은 벼슬이 없었으나 아버지 박원양은 생원시에 합격 후 박영효가 8세가 되던 해에 음서로 현감을 지냈다. 대과에 급제하진 못했으나 현감 재직 시 선정을 베푼 것이 암행어사의 눈에 띄어 음서직으로는 드물게 승진까지 했다.
  • 박영효는 12세 때 박규수(朴珪壽)의 천거로 철종의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하여 부마(駙馬)가 되고 금릉위(錦陵尉)의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영혜옹주가 결혼 석달이 채 되지 못해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소실(小室)을 맞아들였지만 그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1879년 혜민서(惠民署) 제조, 1881년 의금부(義禁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임명되었다. 일본 수신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그 공로를 인정받아 1882년 한성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박규수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접하게 되었으며 유대치(劉大致)를 중심으로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 인물들과 교류했다. 유교사상을 부정하고 평등과 민권사상 등 정치적 혁신을 주창하며, 급진적 개화사상가가 되었다. 특히 박영효는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는 데 주력했다.
  •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파견되는 수신사(修信使) 대표에 임명되어 민영익 ·김옥균 등과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개혁을 시도했다. 도로를 관장하는 치도국(治道局), 경찰업무를 담당하는 경순국(警巡局), 신문발행을 담당하는 박문국(博文局) 등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민태호(閔台鎬) 등 민씨 세력의 견제를 받았으며 민씨 척족과 김병시(金炳始) ·김병국(金炳國) 중심의 수구파 세력이 집권하자 그와 개화파는 정치적 어려움을 겪게되었다. 이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서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落成宴)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 신내각이 조직될 때 친군전후영사겸좌포장(親軍前後營使兼左捕將)이 되어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삼일천하(三日天下)로 그쳐,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서재필, 서광범과 함께 도미(渡美)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야마자키(山崎永春)로 개명하고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 입학, 영어를 배우고, 유학생들의 기숙사로서 친린의숙(親隣義塾)을 경영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죄가 용서되어 귀국,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에서 김홍집 ·박영효의 연립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박영효는 일본의 힘을 빌어 정계에 복귀하였지만 이후 일본에 역이용되었다. 박영효는 내무대신으로 있으면서 자주적 개혁을 꾀하였으나 1895년 반역음모사건으로 재차 일본에 망명했다. 1898년 중추원 회의에서 그를 정부요직에 다시 기용하자는 건의가 나올 정도로 영향력이 컸고 이런 움직임을 반대파에서는 박영효 대통령설을 유포시켜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 데 이용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정치적 변동은 친일 세력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 1939년 11월 일본의 사회단체인 흑룡회가 선정한 일한합방 조선측 유공자 추도회를 할 때 이완용, 이용구, 송병준 등과 함께 합병 공로자로 추천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지탄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 그의 묘소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박영효의 묘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었으나 그의 손자 박찬범이 묘터를 팔고, 유골을 영혜옹주와 함께 화장하였다. 그 뒤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마석리 모란공원에 안치되었다. 옆에는 서자 박일서, 서손 박찬범의 묘소가 옆에 있다. 1962년 계몽,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이 감안되어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으로 선정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후작 등을 제수받고, 일제강점기 중반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제수한 중추원과 관직을 역임한 점이 감안되어 서훈대상에서 제외되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 수록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갑신정변[편집]

  •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에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 등 개화당파들이 청나라에 의존하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일종의 쿠데타 사건이다. 진압 후, 갑신난 또는 갑신전란으로 불리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이를 '갑신혁명당의 난'(甲申革命黨의 亂)이라 불렀다. 12월 4일 저녁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고종 민비를 경우궁으로 피신시킨 뒤 민씨 척족들을 축출하거나 일부 처형하고 12월 6일 오후, 중국 간섭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인민 평등권 확립, 조세 제도 등의 개혁 정책을 내놓았다. 개화파가 당시에 내놓은 정책 중 현재 전하는 기록은 14개 조항이나, 일설에는 80개 조항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12월 4일 민씨 정권은 이미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고, 민비는 창덕궁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김옥균이 일본에 의존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해 12월 말 조선 조정에서는 예조참판 서상우 등을 특차전권대사로 파견, 갑신정변 과정에서 일본 측의 개입을 문제 삼았다가 오히려 한성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다른 이름으로는 갑신의거, 갑신사태, 갑신봉기 등으로 부른다. 그밖에 3일만에 끝났기 때문에 '3일 천하', '3일 혁명' 등으로도 부른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박영효(朴泳孝,1861~1939)〉, 《두산백과》
  2. 박영효〉, 《위키백과》
  3. 박영효(朴泳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박영효〉,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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