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
숙종(肅宗)은 조선의 제19대(재위: 1674년~1720년) 왕이다.
개요[편집]
- 숙종은 조선 제19대 왕이다. 대동법을 전국에 실시하여 실효를 거두었으며 임진왜란 · 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사업을 추진해 완결을 보았다. 주전을 본격적으로 실시해 상평통보를 주조, 중앙관청 및 지방관청 등에 통용하도록 했다. 영토 회복 운동을 전개했고 금위영을 추가로 설치하여 5영체제를 완결했다. 자 명보(明譜), 휘 순(焞), 현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이며 비는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이다. 계비는 민유중(閔維重)의 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김주신(金柱臣)의 딸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1667년(현종 8)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14세 때 조선왕조 19대 임금에 즉위하였다. 인경왕후 김씨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고, 희빈 장씨에게선 두 아들을 두었다. 또한 숙빈 최씨에게서는 세명의 아들을 두었고 명빈 박씨에게서는 1명의 아들(연령군)을 두었다. 주전(鑄餞)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였으며, 중앙관청 및 지방관청 등에서 통용하도록 하였다. 특히 폐한지(廢閑地)로 버려둔 압록강 주변의 무창(茂昌) ·자성(慈城)의 2진(鎭)을 개척하여 영토회복운동을 전개하였고, 1712년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로 하여금 백두산(白頭山) 정상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게 하여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국왕 호위와 수도 방위를 담당하는 금위영(禁衛營)을 추가로 설치하여 5영체제로 개편하였다. 또 재위 기간에 왕실의 족보인《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대명집례(大明集禮)》 등이 간행되었고, 법전인《대전속록(大典續錄)》, 조선 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 편찬되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에 있는 명릉(明陵)이다.[1]
- 숙종은 재위 1674(숙종 즉위년)∼1720(숙종 46).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순(李焞), 자는 명보(明普). 현종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비(妃)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이고,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仁顯王后)이며, 제2계비는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딸인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대외 관계로는 일찍부터 종래의 폐사군지(廢四郡地)에 관심을 보여 무창(茂昌) · 자성(慈城) 2진(鎭)을 설치, 옛 땅의 회복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인의 압록강 연변 출입이 잦아졌는데 마침내 인삼 채취 사건을 발단으로 청나라와의 국경선 분쟁이 일어나 1712년 청나라 측과 협상,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일본에는 1682년과 1711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 수호를 닦고 왜관무역(倭館貿易)에 있어서 왜은(倭銀: 六星銀) 사용의 조례(條例)를 확정지었다. 특히 막부(幕府)를 통하여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아 울릉도의 귀속 문제를 확실히 하였다. 정치적으로 명분의리론이 크게 성행하여 명나라에 대한 은공을 갚는다는 뜻으로 대보단(大報壇)이 세워지고,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이 복관되었다. 또 노산군(魯山君)을 복위시켜 단종으로 묘호를 올리고,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으로서 폐서인(廢庶人)되었던 강씨를 복위시켜 민회빈(愍懷嬪)으로 하는 등 주로 왕실의 충역 관계를 왕권 강화 측면에서 재정립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시호는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고, 묘호는 숙종(肅宗)이다. 능호는 명릉(明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의 서오릉(西五陵)에 있다.[2]
- 숙종은 조선의 제19대 임금이자 경종, 영조, 연령군의 아버지이다. 조선왕조에서 대대로 이어지던 장남의 수난이라는 불운을 깨부순 유일무이한 임금이다. 궁궐에서 태어나 궁궐에서 살다가 궁궐에서 죽은 인물 중 가장 장수한 케이스이다. 아버지 현종의 이른 사망으로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당시 조선은 15세가 되면 성년으로 보았다. 당시 모후인 명성왕후와 증조모인 장렬왕후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수렴청정이 가능했지만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대비전의 수렴청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친정(親政)을 했다. 이는 조선 왕조에서 매우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는 정통성을 떠나, 숙종의 총명함과 결단력이 왕가의 어른들과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모두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격이 다혈질이고 냉혹했으며, 장장 46년에 이르는 치세 동안 무수한 환국 정치를 통해 매우 강력한 왕권을 향유했던 군주이다. 숙종은 왕비를 세 번 들였고, 이 중 두 번째 왕비가 인현왕후 민씨, 세 번째가 희빈 장씨이다. 다른 국왕들과 달리 정치적 사건의 해법으로 자신의 부인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3]
- 숙종은 조선의 제19대 국왕이다. 성은 이(李), 휘는 순(焞),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용상(龍祥), 광(爌), 자는 명보(明譜), 사후 시호는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며 이후 존호가 더해져 정식 시호는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恊極神毅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다. 현종과 명성왕후의 외아들로 원비는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 계비는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제2계비는 김주신의 딸 인원왕후이다. 1674년 8월에서 1720년 7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674년 8월에서 1674년 10월까지 영의정 허적이 섭정하였으며 1674년 10월에서 1717년 3월까지 친정하였고 1717년 3월에서 1720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아들 경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재위 기간 중 강해진 신권을 줄이기 위해 환국 정치를 통해, 서인과 남인 간의 세력을 조절하고 왕권을 강화시켰다. 45년 10개월을 재위하여 조선 역대 임금들 중 영조 (51년 7개월) 에 이어서 두 번째로 재위기간이 길며, 영조(81세), 태조(72세), 고종(67세), 광해군(67세), 정종(62세)에 이어 여섯 번째로 장수한 왕이다. 숙종은 재위 46년 동안 서인과 남인 간에 당파싸움을 완화하고 왕과 신하들 간에 균형을 조절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여기에 등창이 생기고 노환까지 겹쳐 결국 1720년 7월 12일 (음력 6월 8일) 경덕궁 융복전에서 58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승하하기 전, 시력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배가 심하게 부풀어 오르는 증상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구토를 한번 크게 한 뒤 승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4]
숙종의 생애[편집]
-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1667년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8월에 즉위하여 재위 46년 되던 해 6월 8일 경덕궁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하였다. 즉위한 이듬해 북방의 참략에 대비하기 위해 개성 천마산에 폐허로 남아있는 고려시대 산성인 대흥산성(大興山城)을 다시 축성하여 완성하였고 용강(龍岡)의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재수축하였다. 인조 때 일어났던 병자호란과 같은 혼란을 막기 위해 국방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강화도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49곳에 돈대를 쌓았다. 또한 청나라를 의식한 일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산성도 수축(숙종 38년)도 결행하였는데 국방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숙종의 치적으로 평가된다. 또한 군제를 개편하여 금위영(禁衛營)을 창설하여 5군영 체제를 갖추었지만 이는 외척과 서인 세력의 집권 안정화를 위한 정치적 목적이었고 실질적인 조선 군사력 강화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 숙종이 집권한 당시 조선의 조정은 예론(禮論)에 치우쳐 논쟁이 분분하였고, 당쟁이 심하여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파쟁이 극심하였다. 1680년 역모사건이 일어나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경신환국)하였으며 이때 기호학파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두고 서인 남인은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세력이 치명상을 입고 실각하자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분파하여 당쟁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의 영향력으로 정계는 경직되었고 주희의 사상을 맹신하지 않는 사상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숙종은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대립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나라를 병들게 한다고 개탄하였지만 당쟁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 숙종은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가 사망하고 둘째 왕비인 인현왕후를 맞았지만 아들을 얻지 못했다. 궁녀 출신인 숙원(淑媛) 장씨(張氏:장희빈)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昭儀)로 승격시켰으며, 이듬해 장씨에게서 왕자 이윤을 낳았다. 왕자가 출생한지 3개월째 명호(名號)를 정하고자 하였는데 왕자의 명호를 정하게 되면 세자로 책봉되는 길이기에 송시열을 위시(爲始)한 서인들이 이를 극렬하게 반대하자 송시열 ·김수항(金壽恒) 등 서인의 실세들에게 유배형을 내렸고 결국 송시열은 이 일로 사사되었다. 숙종의 의지대로 왕자의 명호를 정하였고 숙종 사후 경종(景宗 1688~1724)으로 왕위에 올랐다. 또한 왕비 인현왕후를 투기죄로 폐위하자 이를 반대하는 박태보(朴泰輔)·오두인(吳斗寅) 등을 국문하여 유배형에 처하거나 처형하였고, 희빈(禧嬪)으로 승격된 장씨를 1690년에 왕비로 책봉하였다. 이 일로 서인에게 염증을 느낀 숙종이 서인세력을 대거 실각시키고 남인들이 다시 기용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유교의 성인을 모시는 문묘(文廟)에 종사되어 서인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던 이이와 성혼의 위패가 거두어져 출향(黜享)되었다.
- 인현왕후 폐위를 인정하지 않고 폐비복위운동을 꾀하는 서인들의 결집하자 우의정 민암 등이 타도하려고 시도하다 서인들의 역공으로 숙빈 최씨를 독살한다는 모함에 걸려 남인들이 대거 실각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숙종은 장희빈보다 궁녀 최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1694년 숙종은 남인을 추방하고 다시 서인을 등용시키고(갑술환국) 폐비 민씨를 복위시켰다. 이어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1701년에 장씨가 민씨를 무고(誣告)하였다는 죄로 사사(賜死)하였다. 왕의 재위 기간은 조선왕조에서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으나 대외적인 전쟁이 없어 사회가 점차 안정기로 접어든 때였다. 선조 때 제기된 대동법(大同法)을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하여 실효를 거두었으며,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사업을 추진하여 완결을 보았다. 말년에는 인조 때 소현세자빈 강씨의 억울한 죽음을 측은하게 여겨 강빈을 신원하여 명예를 회복시켰다.
명릉[편집]
- 명릉(明陵)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번지 서오릉 안에 있는 조선 제19대 왕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두 번째 계비 인원왕후의 무덤이다. 5개의 조선 왕릉(경릉·창릉·명릉·익릉·홍릉)으로 이루어진 고양 서오릉 경내에 있으며, 오릉은 1970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2009년에는 명릉을 포함한 40기의 조선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701년(숙종 27) 숙종의 첫 번째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사망한 후 명릉이 처음 조성되었고, 이후 1720년(숙종 45)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인현왕후의 능 옆으로 숙종의 능을 조성하여 쌍능의 형식을 취하였다. 1757년(영조 33)에는 인원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났는데, 인원왕후는 생전에 미리 묻힐 자리를 정하였으나, 영조는 이를 따르지 않고 명릉의 서쪽 언덕에 인원왕후의 능을 조성하였다.
-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놓여 있고, 인원왕후의 능은 다른 쪽 언덕에 단릉(單陵)으로 모셔져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이다. 동원이강릉의 오른쪽 언덕을 왕이 차지하는 일반적인 왕릉과는 달리 가장 낮은 서열의 인원왕후가 가장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명릉은 숙종의 명에 의해 능역 조성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하여 부장품을 줄이고, 석물의 치수도 실물크기에 가깝게 하는 등 간소하게 조성되었는데 이는 이후 왕릉의 형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봉분에는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으며, 팔각 장명등도 사각으로 바뀌었다. 쌍릉의 두 봉분을 감싸고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난간석에는 방위표시를 하는 문자를 새겼다. 봉분 주위에 상석 각 1좌, 망주석 1쌍,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이 있고, 봉분 아랫단에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과 장명등, 가장 밑단에 무인석·석마 각 1쌍이 있다. 인원왕후의 능도 쌍릉과 같은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공주 숙종대왕 태실비[편집]
- 공주 숙종대왕 태실비(公州 肅宗大王 胎室碑)는 충청남도 공주시 태봉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석이다. 1992년 12월 8일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조선 19대 임금인 숙종(재위 1674∼1720)의 태실에 세운 비석 2기로, 태봉동 태봉산(120m) 꼭대기에 있다. 2기 중 하나는 1661년(현종 2)에 숙종의 태(胎)를 처음 이곳에 안치할 때 세운 것이며, 다른 하나는 숙종 즉위 9년 후인 1683년에 건립한 것이다. 1661년에 세운 비석은 높이 159㎝, 비신 너비 54㎝, 두께 15㎝이고 좌대는 높이 50㎝, 너비 93㎝, 두께 59㎝이다. 즉위 후에 건립한 비석은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고 비신 전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 새겨져 있다.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을 조각하고 그 등에 비석을 세운 것으로 보아 숙종의 무운 장수를 기원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비의 크기는 총 높이 188㎝, 너비 62㎝, 높이 31㎝, 귀부는 길이 210㎝, 너비 120㎝, 높이 105㎝이다. 1869년(고종 2) 비석만 남긴 채 태와 태실은 경기도 양주로 옮겨갔다.
숙종어필 칠언시[편집]
- 숙종어필 칠언시(肅宗御筆 七言詩)는 조선 제19대 왕 숙종이 문집 《백헌집》을 본 감회를 담아 쓴 칠언시의 글씨. 2010년 1월 4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서예와 회화 애호가였던 숙종의 어제어필(御製御筆; 왕이 짓고 쓴 글)로, 〈관백헌집유감부시 觀白軒集有感賦詩〉라는 제목의 칠언율시를 종이에 쓴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글씨의 내용은 숙종이 인조 때 삼정승을 두루 지낸 백헌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의 문집인 《백헌집》을 읽은 느낌을 시로 표현한 것으로,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시문집인 《열성어제》에도 수록되어 있다. 글씨를 쓴 종이는 한 장의 어찰지(御札紙; 왕의 편지지)로, 종이 오른쪽 하단에는 모란으로 보이는 꽃무늬가 찍혀 있다. 크기는 대략 가로 58cm, 세로 30cm이다. 숙종은 이 글씨를 이경석의 후손에게 하사하였고, 이경석의 후손들은 뚜껑에 ‘肅宗聖製寶墨(숙종성제보묵)’이라고 전서체(篆書體)로 음각한 작은 나무상자에 넣어 보관하였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숙종(조선)〉, 《나무위키》
- 〈숙종 (조선)〉, 《위키백과》
- 〈숙종(肅宗,1661~1720)〉, 《두산백과》
- 〈숙종(肅宗)〉,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대교육, 〈숙종의 업적 조선 19대 임금〉, 《네이버블로그》, 2024-09-06
- 언제나 봄, 〈숙종실록 박시백 조선왕조실록〉, 《네이버블로그》, 2024-08-30
- 북스고, 〈(역사 괴담) '장희빈 - 숙종 - 인현왕후' 삼각 로맨스 뒤에 숨겨진 괴담 이야기〉, 《네이버블로그》, 2022-10-11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