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란고원
골란고원(영어: Golan Heights, 아랍어: هضبة الجولان, Haḍbatu 'l-Jawlān 또는 مرتفعات الجولان, Murtafaʻātu l-Jawlān, 히브리어: רמת הגולן, Ramat ha-Gola) 혹은 시리아고원은 중동의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고원으로 평균 해발 1,000m, 1,800km²의 암석 고원이자 전략적 요충지이다. 안티레바논산맥 서쪽 끝에 있으며 국제법상 시리아의 영토이나,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 지역 3분의 2를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 대부분 국가는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을 인정하지 않으며 불법 점령으로 보고 있다. 구약 성경에 바산(Bashan)이라고 여러 번 나오는 지명이 바로 오늘날의 골란고원이다.[1]
목차
개요
골란고원은 중동에 위치한 광대한 고원 지역으로, 본래 시리아 영토였으나 1967년 3차 중동전쟁 결과 이스라엘에 병합됐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전쟁 직후 이스라엘의 해당 지역 점령을 불법으로 규정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시리아는 1973년 4차 중동전쟁을 일으켜 골란고원 탈환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974년 이스라엘과 시리아 양국은 1974년 골란고원 접경 일부를 비무장지대로 하고 이곳에 유엔군 주둔을 합의했다. 이후 이스라엘은 1981년 의회에서 자국 법을 골란 지역에 적용하는 '골란고원법'을 통과시켜 사실상 자국 영토로 합병했으나, 유엔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해발 2000m에 위치해 있는 골란고원은 갈릴리 일대를 조망할 수 있으며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는 6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전략적 요충지이다. 특히 주요 하천들의 근원지이기도 해 수자원 확보라는 측면에서 매우 긴요한 지역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국민 식수의 3분의 1을 책임지는 바니야스강의 발원지가 골란고원이며, 이스라엘 대형 식수의 공급원인 갈릴리 호수도 골란고원에서 3분의 1이 기인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1,200 km²만큼의 대지를 통치하고, 유엔 평화유지군이 235km²만큼의 대지를 통치하며, 시리아가 365km²만큼의 대지를 통치한다. 현재 약 12만 명이 거주하는데, 이들 대부분은 드루즈인과 이스라엘에서 이주한 유대인이다. 매년 약 300만 명이 찾는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2]
골란고원은 국제법상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영유권이 모두 인정되지 않는 영토 분쟁 지역이다. 영국령 팔레스타인과 프랑스령 시리아의 국경은 1920년대에 영국과 프랑스의 국경협정에 따라 서부 방면의 영국령 20%와 동부 방면의 프랑스령 80%로 분할하여 설정했고, 1920년대의 국경협정은 1947년 이전에 영국이 나서서 국제법으로 재승인했다. 1946년에 프랑스령 시리아를 대체한 시리아 정부는 동쪽 방면의 프랑스령 80%를 인수했으며, 1948년에 이르러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이슈브(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유대교도 자치정부)가 이제 막 인수한 서부 방면의 영국령 20%를 침략하여 점령했다. 이리하여 약 20년간 시리아가 실효 지배하였으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골란고원의 80%를 점령하여 현재까지 실효지배 중이다. 1949년~1967년에는 시리아 아랍 공화국의 쿠네이트라 주의 쿠네이트라 지구 및 피크 지구에 속하였고, 1970년대 이후에는 이스라엘국의 북부 구(區)의 라맛하골란 군(郡)에 속한다. 시리아는 이스라엘과 화평조약을 맺기 위해서는 골란고원의 반환이 필수라고 주장하지만, 자국의 안전보장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은 이를 거부하고 있어 특히 1981년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병합 후에는 양측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그래서 유엔 총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골란고원에 대하여 양국의 영유권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친이스라엘 우방국들이 많은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에서는 시리아의 영유권을 거부하는 반면에, 친팔레스타인 우방국들이 많은 남아메리카와 서아시아에서는 이스라엘의 영유권을 거부하는 식이다. 다만 UN에서는 종종 시리아의 골란(Syrian Golan)이라는 표현을 쓴다. 향후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양국간 협상에서 영유권의 귀속 또는 영토의 분할이 결정될 가능성도 있지만, 2017년 이후로 이스라엘은 시리아 분할론을 천천히 실행하여 골란고원의 영유권을 강화하는 새로운 전략을 펼치고 있다. 한국은 시리아와 수교할 가능성을 고려해 형식적으로 여행금지구역에 넣었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 본토를 통해서 골란고원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곳은 반이스라엘 적대국들에 매우 가까운 최전선이라 여전히 분쟁지대이다.[3]
어원
골란고원의 아랍어 이름은 자울란(아랍어: جولان)이다. 골란이란 이름은 성서에 피난 도시로 등장한다. 19세기 작가들은 골란이란 이름을 둘러쌓인 것, 즉 구역이라고 해석했다. 그리스어 이름은 가울라니티스(그리스어: Γαυλανῖτις)이다. 미슈나에는 가블란이라고 나오는데 이는 이 지역의 아람어 이름인 가울라나, 굴라나 혹은 구블라나와 유사하다. 비잔틴 제국의 지도 제작자들은 이 지역이 고원이지만 산이라고 명시했다. 골란고원이란 이름은 19세기 이전에는 쓰이지 않았다.
지리
골란고원은 시리아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갈릴래아호, 요르단강, 헤르몬산을 관찰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지배하고 있는 부분은 400만 년 전 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북쪽에서 동쪽으로 뻗어있는 현무암 지대이다. 야르무크강의 남쪽은 요르단과 맞닿고 라카드강 동쪽은 시리아령이다. 골란고원의 남북 길이는 약 65km이고 동서 길이는 12km에서 25km이다. 지형학적으로 골란고원은 북쪽의 헤르몬산에서 해발 2,814m, 남쪽의 야르무크강에서 해발 약 40m이다. 남서쪽의 갈릴래아호는 해수변보다 약 200m가 낮다. 골란고원은 서쪽의 500m 바위 절벽, 남쪽의 야르무크강 계곡, 동쪽의 하맛 가데르 상류의 철도와 알함마를 경계로 한다. 골란고원은 군사적 요충지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물 공급의 15%를 차지한다.
역사
고대 역사
기원전 70만년~23만년 전기 구석기 시대의 호모 에렉투스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베레핫 람의 비너스가 발견됐었다. 이 지역은 기원전 제3천년기에는 아모리인들이 지배했었다. 기원전 제2천년기에 아람인들의 도시국가 아람 다마스쿠스가 골란고원의 대부분과 갈릴래아호까지 점령했다. 성서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아모리인들로부터 이 지역을 빼앗아 점령했는데, 후에 바샨으로 알려진 이 지역은 여호수아 시대에 2개의 이스라엘 부족인 단 족과 메나쉐 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골란 시는 피난 도시로 사용됐고, 솔로몬 왕이 이 지역에 각료를 임명했었다. 기원전 9세기 연합 이스라엘 왕국의 붕괴 후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아람 왕국 간의 대결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재위 BC 874 ~ BC 852)이 남부 골란에서 벤 하다드 1세를 물리쳤다.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인들이 이 지역을 지배했으나 후에 바빌로니아인과 페르시아 제국이 점령했다. 기원전 5세기에 페르시아 제국은 바빌론 유수로 인해 흩어진 유대인들이 재정착하는 것을 허용했다. 골란고원은 기원전 332년 이수스 전투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에는 마케도니아의 귀족 셀레우쿠스가 지배 하였고, 2세기 동안 셀레우시드 왕국의 일부로 남았다. 신명기에 나오는 골란이란 이름이 사용된 때가 이때이다. 이 곳에서 마카베오의 난이 일어났으나, 골란은 기원전 83~80년 알렉산더 야나에우스의 지배 아래에 남았다.
기원전 4년에 헤로데 1세가 죽은 후 아우구스투스는 헤로데 1세의 아들 헤로데 2세가 골란고원의 사분 영주라고 판결했다. 기원후 34년 헤로데 2세가 죽은 후 로마인들이 골란고원을 시리아 지역으로 편입시켰으나 칼리굴라가 37년에 다시 헤로데 1세의 손자 아그리파 1세에게 반환했다. 44년 아그리파 1세가 죽은 후 로마인들이 다시 시리아 지역으로 편입시켰으나, 51년 토지 교환의 한 부분으로 클라우디우스가 아그리파 2세와 교환 협정을 맺었다. 골란고원의 유대인 공동체들은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유대인 편에 섰고, 전쟁 초기에 점령당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의하면 거주민들은 집단 자살을 했다.
250년경, 예멘의 아랍인 기독교도인 가사니드인은 남부 시리아와 트랜스요르단을 포함하는 왕국을 세우고, 골란고원의 자비야에 수도를 정했다. 후기 헤로데 일파처럼 가사니드인은 비잔티움 제국의 예속 평민처럼 지배를 하였고, 614년 사산 왕조가 침략하기 전까지 골란고원을 지배할 수 있었다. 헤라클리우스때 잠시 반환됐으나 다시 되찾았고, 636년 야르무크 전투 이후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게 됐다.
중세 시대
야르무크 전투 이후 쿠라이시 족의 무아위야 1세가 골란고원을 포함하는 시리아의 통치자가 됐다. 그의 친척인 우스만 이븐 아판의 암살 이후 무아위야 1세는 스스로 칼리프임을 칭했고, 우마이야 왕조를 세웠다. 이후 골란고원은 아바스 왕조, 시아파 파티마 왕조, 셀주크 제국, 쿠르드인 아이유브 왕조 순으로 많은 왕조의 변화를 겪었다. 십자군 전쟁 동안, 골란고원은 십자군에게 강력한 장애물이었고 점령할 수 없었다. 1259년 몽골 제국이 점령했었으나, 1260년 맘루크의 술탄 쿠투즈가 아인 잘루트 전투 후 빼앗았다. 중세 시대, 수세기동안 유목 민족들이 정착민들과 함께 살았고, 중앙 정부는 유목민들을 정착시켜 영구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려 했다. 집권층의 힘이 약해진 압바스 왕조 때에는 베두인족의 공격으로 많은 농촌이 버려졌다.
16세기 오스만의 지배
16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시리아 지방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골란고원은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 편입됐다.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몇몇 드루즈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1868년 보고에 따르면 이곳은 거의 황야였다고 한다. 1877년 일어난 러시아-튀르크 전쟁때 많은 캅카스 출신 피난민들이 유입됐고, 오스만 제국은 이들을 남부 시리아의 골란고원으로 이주시켰고 12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1884년에는 골란고원의 저지대 사이에 경작되지 않은 땅이 많았으나 1890년대 중반에는 저지대의 대부분이 경작지가 됐다. 이 즈음부터 20세기 초까지 골란고원과 하우란의 땅의 일부를 시오니스트 유대인들이 사들이기 시작했다. 1880년 로렌스 올리판트가 골란고원에 대규모 유대인 이주 계획을 세운 책인 길레아드의 땅(Eretz ha-Gilad)을 출판했는데, 1886년 사페드의 올드 이슈브 회원들은 벳 예후다 공동체를 만들고 골란고원 중앙의 람타니야에 땅 14,000두남(약 14 km2)을 사들였다. 그러나 재정적인 문제와 토지 대장 발급이 늦어져 몇 년 후 버려졌다. 그러나, 이후 공동체는 재결합했고 골란고원 남쪽의 베두인족 마을 비르샤쿰 근처의 땅을 매입했다. 그들이 세운 마을인 브나이 예후다는 1920년 거주민들이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고 떠날 때까지 존재했다. 1944년 JNF가 유대인 소유지로부터 브나이 예후다 땅을 사들였으나, 유대인 소유권에 대해 비르샤쿰의 아랍인들이 벌린 소송에서 패해 땅을 잃었다.
1891년과 1894년 사이에 에드몬드 드 로스차일드 남작은 유대인 거주를 위해 시리아 남부에 8만 두남(약 80 km2)을 사들였다. 수년동안 이 땅에 정착하기 위한 노력은 일부분만 성공적이었고 유대인들이 드문드문 거주했다. 러시아의 아구다트 아침 조직은 농장이 있고 유칼립투스 숲이 자라고 있던 질린의 피크와 다라 지역의 일부분을 샀다. 또 유대인들은 훌라 호에서 무자이립에 이르는 도로를 건설했다. 뉴욕을 본거지로 하는 샤베이 시온 조직은 사함엘졸란에 도시 티페렛 빈야민을 세웠으나 1896년 오스만 제국이 비 튀르키예인 가족 17호를 추방했을 때 버려졌다. 시리아 유대인, 튀르키예인과 함께 한 시도도 실패했다. 1899년 다마스쿠스의 파샤가 모든 로스차일드 영토로부터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1904년과 1908년 사이, 크리미아 유대인 무리가 베트사이다 계곡에 쿠르드인 소유자의 소작인으로 들어와 정착했으나 쇠퇴했다. 이 지역에 정착하기 위한 유대인의 노력은 아랍인들의 적개심, 오스만 제국의 관료, 질병,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실패했다. 프랑스의 위임 통치를 받은 1921년부터 1930년 사이에 PJCA는 로스차일드 땅의 토지 대장을 획득했고 그곳에 살던 아랍인 농민들로부터 임대료를 거두며 지속해 나갔다. 1944년 시리아 토지 정착 운동은 해외 소유인 PJCA의 합법적 토지 소유권을 부정했고 시리아 정부는 유대인이 시리아 땅을 갖는 것은 정책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보상 없이 땅을 몰수했다. JNF는 아직까지도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1920년대 위임 통치령
영국은 산레모에서 열린 연합국 이사회에서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를 승낙했으나 그 때에 국경은 정해지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 통치령 사이의 국경은 1920년 12월 프랑스-영국 국경 합의때 정해졌다. 골란고원의 대부분은 프랑스령에 속했다. 두 나라는 또한 국경의 세부 사항을 명확히 하기 위해 공동 위원회 수립에 합의했다. 공동 위원회는 마지막 보고를 1922년 2월 3일에 제출했고, 1923년 3월 7일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몇몇 예고 기재와 함께 승인했다. 같은 과정에 따라서 텔단 유적지와 단강 근원지를 포함하는 주변 구역이 1924년 초 시리아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양됐다. 와지나와 바니아스를 포함한 골란고원이 프랑스 위임 통치령 시리아의 일부가 됐고, 갈릴래아호는 전부 영국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의 일부가 됐다. 1944년 프랑스의 시리아 위임 통치가 끝났을 때, 골란고원은 신생 독립국 시리아의 일부가 됐고 시리아는 골란고원을 쿠네이트라주로 편입했다.
1948년 이후 영토와 호수 소유권 분쟁
1948년과 1949년 사이에 일어난 제1차 중동 전쟁 후, 골란고원은 이스라엘-시리아 휴전 협정에 따라 부분적으로 비무장화됐다. 그 후 국경에서는 수천번의 유혈 사태가 일어났다. 양 측 모두 휴전 협정을 어겼다. 분쟁의 근본 원인은 영토 내 경작과 수자원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한 비무장지대의 합법적 상태의 불찬성이었다. 시리아는 어떠한 쪽도 비무장지대에 주권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은 휴전 협정이 단지 군사적 문제만 다루었고, 이스라엘이 비무장지대의 정치적, 합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1923년 국경에 이르기까지 훌라호와 갈릴래아호의 배타적 권리, 대수로를 위해 요르단강으로부터 물줄기를 바꾸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주장했다. 1950년대에 시리아는 갈릴래아호 남쪽의 알함마를 둘러쌓고 사실상 갈릴래아호의 동쪽 기슭을 지배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요르단강의 지류를 바꾸기 위한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시도는 1966년 7월 군사적 변화를 자극했다. 팔레스타인의 조직 파타는 시리아의 지원을 받고 1965년 초 이스라엘 영토에 공습을 가했다. 초기에 군인들은 레바논이나 요르단을 통해 들어왔으나 두 나라가 그들을 막을 협정을 만들었고, 시리아를 통한 공습이 증가했다. 이스라엘의 반격은 계속된 보복이었는데, 1966년 11월 요르단의 사무에 대대적 공격을 가했다. 1967년 4월 시리아가 골란고원의 이스라엘 마을에 맹포격을 가한 뒤, 이스라엘은 시리아 공군의 MiG기 6기를 격추시켰고 시리아에게 미래의 공격에 대하여 경고했다.
국경 분쟁
전 이스라엘의 대장 마티야후 펠레드는 1967년 전쟁 전 일어났던 국경 충돌의 반 이상은 비무장지대 내 최대 한도 정착의 안보 정책의 결과라고 말했다.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침입을 발포로 대응했다. 이스라엘은 차례로 군대를 이용해 보복했다. 1976년 모셰 다얀도 회견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당시 UN 시찰자였던 얀 뮈런은 이스라엘이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한 전략으로 대부분의 국경 충돌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전 영국의 수상 알렉 더글러스흄 경은 그가 1967년 전쟁이 발발하기 몇 달 전 갈릴래아호를 방문했을 때 골란고원에 있는 소련제 요새에서 주기적으로 가끔 민간인 피해를 주장하며 마을로 포격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1973년 전쟁이 끝난 뒤 양측의 합의문은 반드시 그러한 공격적 행동을 멈추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6일 전쟁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
1967년 6월에 터진 6일 전쟁 후 시리아의 포격이 매우 격렬해졌고 이스라엘은 6월 9일~10일에 골란고원을 점령했다.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통치하게 된 지역은 골란고원 1,070km²와 헤르몬산 언덕 100km² 두 지역이었다. 양측 사이의 새 국경은 '퍼플 라인'이란 이름이 붙었다. 6일 전쟁 동안 8만 명에서 13만 1,000명에 이르는 아랍 드루즈인들과 체르카시 사람들은 골란고원에서 피난갔고 7천 명 정도는 이스라엘이 점령한 영토에 남았다. 이스라엘은 안전 문제를 거론하며 원거주민들의 귀환을 거부했다. 이스라엘인들은 전쟁 후 곧 골란고원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1967년 7월 도시 메론골란을 세웠다. 이스라엘과 미국 난민 및 이민 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10만 명 이상의 지역 인구가 전쟁 때문에 피난갔다고 했다. 시리아 정부는 그들중 다수는 추방당했다고 말했다.
알론 계획
1970년대 이스라엘의 정치가 이갈 알론은 이스라엘의 점령지를 포함한 시리아의 쿠네이트라주에 드루즈인 국가를 세우는 계획인 이른바 알론 계획을 제안했다. 알론은 1980년 죽었고 그의 계획은 구체화되지 않았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동안 시리아군은 이스라엘군의 반격에 의해 밀려나기 전까지 남부 골란고원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양국은 1974년 휴전 협정에 서명했고 골란고원의 거의 모든 지역이 이스라엘로 편입됐다. 1974년 휴전선 동쪽의 500km²와 이스라엘군이 철수한 100km²는 시리아에 남았다. 1975년 이스라엘은 1974년 휴전 협정에 따라 좁은 비무장지대를 시리아에게 반환했다. 몇몇 난민들은 그들의 집으로 돌아왔고 시리아 정부는 쿠네이트라를 제외한 마을의 재건을 도왔다. 1980년대 중반 시리아 정부는 '해방된 마을 재건 사업'을 펼쳐나갔고, 2007년 말 약 7만 9천 명이 이 지역에 정착했다.
1981년 골란고원법
골란고원은 1967년부터 군의 관리를 받고 있었다. 1981년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에 이스라엘의 법, 사법권과 행정권을 적용한 골란고원법을 통과시켰다. 골란고원법이 사실상 골란고원을 이스라엘로 합병시켰으나, 공식적으로는 합병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을 북부 지역으로 관리했었다. 이스라엘의 행동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이 점령한 영토로 규정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242호는 계속 적용된다.
UN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242호의 협상 때, 미국의 국무 장관은 미국의 영구적 국경 안정 지원이 미국이 영토 변화를 지원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UN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의 교섭과 밑바탕의 책임이 있던 UN 영국 대표는 이스라엘 정부의 골란고원 식민지화와 정착 행동은 UN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242호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라고 발언했다. 시리아는 제1차 중동 전쟁때 획득했던 갈릴래아호의 동쪽 기슭을 포함한 1967년 6월 4일 국경으로 이스라엘군이 철수하는 것을 계속해서 요구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곧 안전 문제가 해결된다면 시리아와의 관계 정상화의 보답으로 철수를 고려했다. 2000년이 오기 전, 시리아의 대통령 하페즈 알아사드는 관계 정상화를 거부했다.
1999년 평화 협상
미국이 중개한 1999년 평화 협상에서,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관계를 정상화하는 보답으로 이스라엘군이 철수하는 평화 협상에 대해 논의했다. 협상의 막바지에서 의견의 불일치를 보인 것은 갈릴래아호 문제였다. 이스라엘은 1948년 이전 국경으로 철수하는 것을 제안했고, 시리아는 1967년 국경을 주장했다. 1948년 이전 국경은 시리아가 인정한 적이 없고, 시리아는 그 국경이 제국주의적 힘에 강요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67년 국경은 시리아의 침공때문에 이스라엘이 거절했다. 두 국경의 차이는 주요 부분에서 100m도 채 차이가 나지 않으나, 이스라엘이 유일한 담수호이자 주요 물 공급원인 갈릴래아호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2003년 말,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는 이스라엘과 평화를 위한 대화를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에서 북부 이스라엘의 마을과 군 기지를 공격하는 헤즈볼라의 무장 해제와 호전적인 팔레스타인인 무리와 그 본부의 집결을 멈출 것을 요구했다. 양측은 대화를 시작하지 않았다.
2006년 이스라엘-레바논 전쟁의 영향
2006년 시리아와 이란의 지원을 받은 헤즈볼라 무장정파(政派)와 이스라엘과의 전쟁은 골란고원의 문제를 다시 야기시켰다. 시리아가 군사 행동을 진지하게 검토중이라는 이스라엘 정보부의 보도가 있은 후 이스라엘은 전쟁의 위험도를 격상시켰다.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는 이스라엘과 평화 협상을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으나 평화를 깨고 싶다면 전쟁만이 유일한 해결책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총리 에후드 올메르트는 평화 협상을 고려하는 제안을 거절했고 골란고원은 영원히 이스라엘에 남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시몬 페레스와 에후드 올메르트의 대변인 아사프 샤리브를 포함한 다른이들은 바샤르 알아사드의 정직성에 의심을 가졌고 바샤르 알아사드의 말은 그의 정권의 국제적 비판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요성
골란고원은 갈릴리 호 북쪽에서 가파른 경사를 이루며 올라가 주변 지역을 대부분 감제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로 이곳을 점령하는 쪽이 군사적으로 갈릴리 지역의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다. 좀 더 북쪽에 위치한 헤르몬 산도 중요하다. 특히 이 점은 이스라엘 측에게 더 강력하게 작용하는데 제3차 중동전쟁 이전까지는 골란고원 서부의 깎아지른 절벽에 구축된 시리아군의 영구진지에 손도 못 대고 피해만 신나게 입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골란고원이 돌파되면 그 후에는 그냥 이스라엘의 심장부가 회쳐지는 순서만 남게 된다. 반면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이 잡고 있을 경우엔 역으로 시리아의 요충지를 단박에 접수할 수 있다. 실제로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시리아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공세로 전환하면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진격로를 확보하고 다마스쿠스에 장거리 포격까지 가했지만 진격 개시 전에 협상을 통해 종전되기도 했다.
군사적인 문제 외에 황무지나 다름없는 유대 지역에 비해서 비옥하고 녹음이 있는 갈릴리 지역 중에서도 특히 풍광이 수려하고 인간의 생활에 유리한 지형이 자리잡았다는 이점도 있다. 중동 지역치고는 수자원이 풍부해서 폭포가 있는 등 지뢰와 군사적 충돌지대라는 위험성만 제외하면 관광지가 될 만한 곳이 많다. 또한 척박한 가나안 지방의 젖줄인 요단강의 발원지 역시 이곳이며, 이스라엘 식수의 1/3이 골란고원에서 온다. 그래서 이스라엘인 10만 정도와 시리아인 2만(마지달 샴스 지역)이 같이 살고 있다. 이스라엘의 척박한 토지 상황보다 훨씬 비옥해서 10만이나 몰려든 것이라고. 물론 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기존 거주민들을 강제로 내쫓은 탓도 크다. 하지만 막상 시리아에게 반환할 생각을 가지더라도 10만이나 되는 현지 거주민 문제가 골칫덩어리. 여기 거주 시리아인은 시리아 국적이 인정되어 국경선에서 이스라엘군이 보는 조건으로 친척끼리 만나는 자리(상봉)를 가지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나이 반도, 남부 레바논 등을 반환하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서안지구 역시 형식적으로 반환했음에도 골란고원만큼은 이스라엘이 기필코 영유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예루살렘 다음으로 이스라엘이 중요하게 여기는 땅이라 볼 수 있겠다. 시나이 반도의 경우 골란고원에 비하면 단순한 완충지이고 이집트와의 관계 문제도 고려해 이집트에게 반환하였다. 소규모지만 석유가 산출되고 전략적으로 역시 만만치 않게 중요한 수에즈 운하로 통하는 접근로라는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의 이유들과 영토 관리 문제 등이 겹쳐 이집트에게 냉큼 돌려준 것이었다. 하지만 골란고원은 아직도 이스라엘이 단단히 거머쥐고 있다. 무엇보다 갈릴리 호수 바로 인접지역이라 이스라엘 수자원의 상당 부분을 직접 통제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의 수자원은 갈릴리 호수와 요르단강에 의존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국제 하천인 요르단강에 댐을 건설하는 문제만으로도 요르단이 반발하면서 하마터면 전쟁이 일어날 뻔한 적이 있었다.
2010년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난립과 시리아 내전 여파로 시리아 난민이 우르르 몰려들어 시리아인들 거주자가 15만을 훌쩍 넘겨버렸다. 이스라엘로서는 골치아프지만 막을 수도 없는 노릇. 하레디들은 막아야 한다고 징징거리지만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다. 행여나 막다간 이스라엘도 더 욕먹을 게 뻔한데다 안 그래도 악만 남은 시리아 난민들이 순순히 당할리도 없고 죽어라 덤벼들게 뻔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골란고원이 이스라엘 땅인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렇게 되어 무력충돌이 벌어지면 팔랑헤 학살(바시르와 왈츠를에서 나온 실제 학살사건) 저리 가라할 수준의 대형 참극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이스라엘 측에선 골란고원에 한해서 일단 놔두고 있다. 그러다보니 지금도 골란고원에 무더기로 난민들이 온다. 철조망도 난민들이 죄다 부숴버렸을 정도이다. 이 당시 몇만이 넘는 시리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철조망을 부수고 진입했기에 이스라엘군도 당황하며 물러났다.
관련 뉴스
- 2022년 12월 22일(현지시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골란고원 파견 유엔평화유지군의 주둔기한을 2023년 6월 30일까지 6개월 더 연장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유엔 교전중지 관찰부대(UNDOF. UN Disengagement Observer Force)란 이름의 골란고원 부대는 1974년부터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의 정전 유지를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안보리 15개 상임이사국의 만장일치로 통과된 결의안 2671호는 유엔사무총장에게 UNDOF부대가 안전하게 주둔기한을 끝낼 수 있도록 인력과 자원을 보장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안보리는 1973년 10월 22일에 채택한 결의안 338호의 준수를 두 나라에게 요구하고 1974년의 교전중지 협약을 완전히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골란고원에서 양쪽 군대가 최대한의 자제력을 발휘해 어떤 정전 협정 위반도 행하지 않고 완충지대에서의 충돌을 피해달라면서 유엔파견군은 철저하게 중립적인 위치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안보리는 또한 쿠네이트라 국경 관문에서 유엔군 지역을 통과하는 모든 물류유통을 지원하며, 보건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코로나19 방역 규제를 해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 UNDOF 부대도 기존의 모든 장비와 인력을 동원해 부대원들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해야하며, 코로나19의 영향이 아직도 크다는 사실을 고려해서 행동해야 한다고 안보리는 요구했다. UNDOF는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이후 이를 끝내는 과정에서 골란고원의 이스라엘군과 시리아군을 분리 시키기 위해 1974년 5월에 설립되었다.[4]
- 2020년 3월 2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은 시리아와 가까운 골란고원에서 시리아 차량 1대를 타격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군은 이날 트위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북부 골란고원에서 시리아 저격수의 공격 시도를 포착했다며 이스라엘 군인들이 시리아의 공격 시도에 이용된 차량을 타격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 매체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차량을 폭탄으로 공격했다며 이 공격으로 인한 시리아 측 인명피해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이 시리아에 대한 공격을 발표한 것은 드문 일이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시리아에서 이슬람 시아파 맹주 이란과 관련된 시설을 자주 폭격했다. 이스라엘은 1967년 6월 이른바 제3차 중동전쟁(이른바 '6일 전쟁') 이후 골란고원에서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지만, 유엔은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을 불법으로 규정한다. 시리아 차량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공격은 이스라엘에서 총선 투표가 진행되는 가운데 발생했다. 이스라엘은 이날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 의원 120명을 뽑는 총선을 전국적으로 실시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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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 〈골란고원〉, 《위키백과》
- ↑ 〈골란고원〉, 《네이버 지식백과》
- ↑ 〈골란 고원〉, 《나무위키》
- ↑ 차미례 기자, 〈유엔 안보리, 골란고원 유엔평화유지군 주둔기한 연장〉, 《뉴시스통신사》, 2022-12-23
- ↑ 노재현 기자, 〈이스라엘군, 골란고원서 시리아 차량 타격…"저격수 공격 저지"〉, 《연합뉴스》, 2020-03-02
참고자료
- 〈골란고원〉, 《위키백과》
- 〈골란 고원〉, 《나무위키》
- 〈골란고원〉, 《네이버 지식백과》
- 차미례 기자, 〈유엔 안보리, 골란고원 유엔평화유지군 주둔기한 연장〉, 《뉴시스통신사》, 2022-12-23
- 노재현 기자, 〈이스라엘군, 골란고원서 시리아 차량 타격…"저격수 공격 저지"〉, 《연합뉴스》, 202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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