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갑문
서해갑문(西海閘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포특별시에서 서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갑문이다. 댐의 길이는 8km이고 3개의 갑문과 36개의 수문이 있으며, 5만 톤급의 선박이 통행할 수 있다. 댐은 대동강이 황해로 흘러나가는 것을 막는다. 갑문은 '4대 자연개조사업'의 일환으로 1981년부터 1986년까지 건설되었다. 위에는 도로와 서해갑문선 철도가 건설되어 남포와 황해남도를 연결한다.
서해갑문은 현재 북한에서 '노동당시대의 대기념비'로 선전되면서 주민과 외국인 관광객들의 주요 참관코스로 활용되고 있다.
개요
서해갑문은 남포시와 황해남도 은율군 송관리 사이의 대동강 하구에 위치한 북한 최대의 갑문이다. 본래 이름은 남포갑문이었으나, 완공직후인 1986년 9월부터 서해갑문으로 부른다.
서해갑문은 대동강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81년 5월 4일 착공하였으며 1986년 6월 24일 완공했다. 영남리와 은율군 피도 사이에 폭 14m, 길이 7km의 제방(흙제방 5.2km, 콘크리트제방 1.8km)을 축조하고, 피도와 송관리 간 약 800m에 3개의 갑문(5천 톤급, 2만 톤급, 5만 톤급)과 댐을 건설하는 등 총연장 8km의 방조제를 쌓았으며, 대형 선박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90m 정도의 90° 회전교량을 설치했다. 또 제방과 갑문 위에 4차선 도로와 철도를 부설했다. 미림갑문(美林閘門)·봉화갑문(烽火閘門)과 함께 북한의 3대 갑문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갑문의 건설 목적은 27억 톤의 담수능력을 지닌 인공호를 조성하여 남포항의 접안능력을 2만 톤에서 5만 톤 수준으로 향상시키는 것을 비롯해, 서해안에 새로 조성하는 총 30만 정보의 간석지 가운데 평남·황남의 20만 정보에 농업용수 공급, 남포공업지구의 공업용수 확보, 수량조절로 대동강 하류지역의 홍수방지, 내륙 수상운수 확충, 남포와 황남 간의 육로수송 단축, 남포·대동강 지역의 풍치 조성, 인공호수에서의 양식업 개발 등이다.
당초 3년 내 완공한다는 목표 아래 3개 사단 규모의 군병력 및 각지에서 동원된 청년돌격대와 장비를 투입했다. 그러나 공사규모가 방대하며 작업지역의 유속이 빠르고(초속 11m) 수심이 깊어(최고 30m) 작업조건이 극히 나쁜데다, 북한의 토목공사 기술수준이 낮아 두 차례 완공시한을 연기(1985년 4월 15일, 1985년 10월 10일)한 끝에 1986년 6월 24일 완공했다. 열악한 작업조건 속에서 정해진 시일에 맞춰 무리하게 공사를 추진하면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갑문이 건설됨으로써 미림·봉화·성천·순천 갑문과 함께 남포·평양·순천·덕천의 주요 공업·광업·농업 지역을 연결하는 운하망이 생겼으며, 남포는 이전보다 더 큰 비중을 지닌 국제항구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서해갑문의 건설비용으로 40억 달러 이상 소요되어 북한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으며, 대동강 지역의 환경오염을 유발하기도 했다.
역할
서해갑문의 기본 건설목적은 수자원의 확보였다. 북한은 1960년대부터 서해안 지역에서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벌여왔지만 간척지 내에 공급할 수자원의 만성적인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동강-청천강 사이 100 km에 이르는 구간에 폭 20 m가 넘는 하천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서해갑문을 건설함으로써 대동강의 담수자원을 늘려 온천, 증산, 은률, 은천 등 서해안 농업지대에 물을 공급하고, 기존에 평양 사동지구까지 미치던 조수의 영향으로부터 강서, 강남, 천리마 등지의 농경지를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덤으로 늘어난 수량을 활용해 전력생산에 이바지했다.
남포항 및 대동강의 통항능력 확대도 갑문 건설로 얻은 큰 성과였다. 대동강은 중상류에서 내려오는 흙과 모래 때문에 지속적으로 준설하지 않으면 강서군 보산리 이북으로는 1천 톤급 이상 선박이 통항하기 힘들었는데, 서해갑문을 통해 전체 수량이 늘어나고 평양 미림갑문, 평남 성천갑문과 순천갑문 등과 연계하여 순천까지 1천 톤급 선박이 통항할 수 있게 되었다. 육상교통이 전체적으로 부실한 북한에서 이는 상당히 중요하다. 이와 함께 남포와 황해남도지역이 도로와 철도를 통해 연결되었음도 중요하다. 대동강 위에서 이 갑문과 가장 가까운 다리인 평양 충성의 다리는 무려 62 km나 떨어져 있다.
그리고 어찌보면 평양외곽순환선(?)이라 볼수있는 단선철도 서해갑문선이 이 갑문을 통해 대동강 이남서 이북으로 통행하고 있으므로 철교의 역할도 있다.
문제점
- 서해갑문은 北 몰락의 기폭제
서해갑문은 북한 남포항에 입항할 수 있는 선박의 규모를 높인 것은 사실이지만 초대형 선박이 입항할 수 있는 국제적인 규모라는 것은 북한의 선전에 불과하다. 홍수조절 기능도 이번 여름 수해에서 알 수 있듯이 서해갑문 때문에 오히려 악화됐다고 탈북자들은 말한다.
서해갑문은 북한과 특히 김정일 위원장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곳이다. 서해갑문 건설의 발기 및 감독, 공사책임자가 사실상 김정일 이고 또 이후 북한의 경제난과 밀접한 연계가 있기 때문이다.
서해갑문 건설공사가 북한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마지막 자원까지 소진하게 만드는 등 10년 후 일어나게 될 '고난의 행군'의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공사기간중 예상치 않게 발생한 1984년 남한의 수해에 대규모 전쟁비상물자까지 털어내면서 이후 북한 주민들의 궁핍한 삶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북한이 90년 대 중반부터 겪은 격심한 경제곤난과 수백만의 대량아사가 어느날 한 순간에 찾아온 것이 아니라 김정일의 실정이 쌓이고 쌓인 결과임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한 일본인 건설기술자의 추산에 따르면 북한이 서해갑문 건설에 쏟아부은 건설비는 총 60억 달러다. 이는 총 40억 달러의 거금이 들었다고 공식 발표한 북한의 발표보다 20억 달러가 더 많은 금액이다.
북한이 서해갑문을 건설한 목적은 27억 톤의 담수능력을 지닌 인공호를 조성하여 남포항의 접안능력을 2만 톤에서 5만 톤 수준으로 향상시키는 등 대동강 홍수 조절과 농경지 확보, 항만 개발을 위함이다. 하지만 당시 북한 주민들 속에서는 서해 백령도에서 직접 대동강을 통하여 침투하는 남한 간첩(특수부대)들을 차단하고 김일성과 김정일이 있는 평양의 치안을 지키려고 건설했다는 설이 파다했다.
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직접 받는 대동강을 바다로 부터 차단하려는 북한 당국의 의도도 한 몫 했다는 것이다. 실제 남한에 침투하던 북한의 연락소 요원(간첩)들은 밀물과 썰물만 잘 이용하면 별도의 힘을 들이지 않고도 한강하구 서울쪽에 침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서해갑문은 지난 1981년 공사를 시작해 5년만인 1986년 완공됐다. 북한은 당초 3년 내에 완공한다는 목표 아래 1개 군단 규모의 군병력과 각지에서 동원된 수만 명의 노동자를 투입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북한이 공사기한을 3년으로 잡은 것은 아니다. 초기 북한 설계자들과 관계자들은 서해갑문 건설시기를 20여년으로 잡았다. 이는 낮은 북한의 토목공사기술과 워낙 방대한 공사규모를 감안했기 때문이다. 또 20여리 날바다를 막아야 하는데다가 공사현장 작업지역의 유속(물흐름)이 초속 11m로 빠르고 수심또한 최고 30m로 깊어 작업조건이 지극히 나빴던 것도 한 원인 이었다. 하지만 김정일은 당시 70세를 내다보던 김일성의 나이를 감안하여 "수령님이 살아생전 보지 못하는 공사는 그 의미가 없다”고 일축하고 “남들이 10년, 20년 걸려서 하는 공사라면 우리는 3년, 5년 내에 할 수 있다"고 공사단축을 지시했다. 이후 대규모의 인민군 건설부대들이 투입되어 수많은 인명사고를 내는 무모한 공사를 추진했다. 북한은 수중용접이나 위험한 작업에 군인들의 자원참가를 높이기 위하여 ‘영웅’칭호를 내세우기도 했다. 서해갑문 건설이 끝나고 북한에 많은 '영웅'들이 생겨난데서도 알 수 있다.
다시말하여 생명의 위험이 따르는 위험한 작업에 참가하는 군인들을 '영웅'칭호와 각종 '훈장'들로 이용한 것이다. 서해갑문 공사에 관여한 탈북자에 따르면 공사 기간 동안 하루 평균 적게는 2∼3명에서 7명까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고 한다. 특히 가물막이 공사 때는 피해가 극심했다고 한다. 공사기간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수천명에 달한다는 것.
서해갑문은 북한에서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한 대표적인 공사 중 하나로 꼽힌다.
김일성과 김정일도 직접 건설현장을 찾아 군인들과 건설자들을 위로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등 서해갑문 건설에 전 인민적 참여를 강요했다. 또 각지의 공장과 사회단체들도 정기적으로 지원물자(빵, 육류 등 식료품 위주)를 가지고 서해갑문 건설현장을 찾도록 강요했다.
특히 배고픈 군인들을 위하여 밀가루 베게빵을 많이 지원했는데 오죽하면 서해갑문 건설공사에 동원된 북한군 군인들이 서해갑문은 빵으로 만들어 졌다고 할 정도였다.
북한은 온갖 무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해갑문 완공시기를 두 차례(1985년 4월 15일, 1985년 10월 10일)나 연기한 끝에 1986년 6월 24일 완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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