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해인사(海印寺)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중턱에 있는 사찰로서 양산 통도사(불보사찰), 순천 송광사(승보사찰)와 더불어 한국 삼보사찰로 불리고 있다. 3보란 불교에서 불(佛), 법(法), 승(僧)을 뜻하는데, 해인사는 법보(팔만대장경), 통도사는 불보(진신사리), 송광사는 승보(수계사찰) 사찰이기 때문이다. 더하여 부산광역시의 범어사, 구례군의 화엄사 등과 함께 5대 사찰로 꼽히기도 한다. 팔만대장경이 세계기록유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 150여 개의 말사(末寺)를 거느리고 있다. 불교의 삼보사찰 중 법보(法寶) 사찰로 유명하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본존불은 비로자나불이다.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의 완공/제작 연도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분명히 다르다. 본래 강화도에 보관하던 대장경을 조선 태조 때에 옮겨오면서 장경판전이 내부에 지어졌다. 해인사라는 사찰 자체는 신라 시대에 지어졌고, 팔만대장경은 고려 시대에 편찬이 됐지만, 이를 보관하는 해인사 장경판전 건물은 조선 시대에 지어졌기 때문인지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낚시 문제로 나온 적도 있다.
목차
개요[편집]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합천 해인사는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따온 이름이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한국불교의 성지 중 하나인 해인사는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을 품고 있다. 무엇보다 합천과 해인사를 상징하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곳이라 수많은 여행객과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주불전 뒤 언덕에 세워진 해인사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목조건물로 15세기 무렵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바닥 흙에 숯 등을 이용해 습기 등이 잘 빠져나가도록 해 목판들이 아직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이 놀랍다. 일반인들은 건물외형과 건물 사이의 마당까지만 출입이 허용되지만, 목조창틀 사이로 팔만대장경의 모습을 살짝 볼 수는 있다.
역사[편집]
남북국 시대 802년 신라 애장왕 3년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했다. 그들은 가야산에 초막을 세우고 참선을 했는데 등창으로 고생하던 애장왕의 왕비의 병을 낫게 해주어 애장왕이 절을 창건하도록 했다. 순응과 이정 이후 '결언대덕'이란 승려가 사찰 창건을 계속했고 주지가 되었다.
935년 11월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막내아들 김덕지(金德摯) 왕자가 화엄종에 귀의하여 법수사(法水寺)와 이곳 해인사(海印寺)에 드나들며 도(道)를 닦으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신라 말 '승통희랑'(僧統希朗, 889~967)이라는 당시 주지가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쳐 고려 왕조를 세우는데 일조를 하여 고려 건국 후 태조가 국찰(國刹)로 삼고 전답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후 해인사는 5차례가 넘는 화재로 인해 여러 번 중창되었으며, 그에 따라 창건 당시의 건축은 알 수 없고, 현재의 전각은 대부분 조선 말기 때의 것이며, 3층 석탑·석등 등이 현존한다.
1481년 조선 성종 12년 이후 8년간 중건하였고,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국보로 지정된 장경판전(藏經板殿)에는 유명한 《고려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
고려 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속장경》의 간행을 시도한 곳이기도 하며, 1993년에 성철 스님이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한국전쟁[편집]
해인사는 광복 후 한국전쟁 때 위기를 맞게 된다. 1951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대한민국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퇴각하지 못하고 남은 1천여 명의 북한군 잔당들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게릴라 전을 전개했다. 이에 UN군에서는 폭격기 4대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당시 공군 편대장이었던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소실될 것을 우려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로써 해인사는 폭격당할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김영환은 그 공으로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했고, 현재 해인사 경내에는 그를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2002년 이후로 해인사에서는 김영환 장군을 기리는 추모제를 매년 연다.
가람[편집]
해인사에는 대장경판전, 대적광전, 명부전, 독성각, 응진전, 응향각, 퇴설당, 해행당, 심검당, 궁현당, 경학원, 적묵당, 관음전, 구광루, 보경당, 대장경보전연구소, 명월당. 사운당, 청화당, 범종각, 우화당, 해탈문, 천왕문, 일주문 등 많은 전당이 있다. 부속암자로서는 원당암을 비롯하여 홍제암, 용탑선원, 백련암, 지족암, 희랑대, 삼선암, 금선암, 약수암, 국일암, 보현암, 금강굴, 길상암, 고운암, 간월암, 청량사 등이 있다.
- 대적광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화엄종 사찰의 중심 법당이다.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처럼 우주에 가득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자체를 상징하는 불상이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은 대적광전 이외에도 화엄전과 비로전이 있다. 이곳은 대적광전은 802년(애장왕 3)에 순응,이정 두 스님이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의 명칭은 비로전이었으나, 1488년(성종 19)에 왕실의 지원에 의해 학조대사가 중창하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의 건물은 1817년(순조17)에 불타버려 이듬해 중건한 것을 1971년에 지관스님이 다시 중수한 것이다. 큰 절의 중심 불전에 걸맞게 정면5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한 우람한 모습이다. 정선이 그린 해인사 그림에는 대적광전이 2층으로 그려졌는데,1817년의 화재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큰 건물이었을것이다. 지금 이 모습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다포계 팔작집으로서 중수과정에서 많이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당 안에는 용기사에서 옮겨온 중앙의 큰 비로자나불을 비롯해 법단의 좌에서 우측으로 법기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비로자나불(대), 비로자나불(소),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순으로 일곱분의 불보살님이 봉안되어 있는데 비로자나불과 지장보살이 함께 모셔진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주변지역의 불타버린 법당에 있던 지장보살을 옮겨 놓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해인사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석등은 부처님이 계신 사찰에 어둠을 밝히기 위해 만든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등 공양과 관계된 것이므로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과 함께 법당 앞에 설치된다. 이 석등 역시 원래 석탑 앞에 있었지만 현재 위치로 옮겨놓았다. 옮겨진 이유와 시기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석등은 받침돌과 기둥돌, 등불을 놓는 화사석, 지붕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돌이 원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의 크기는 알 수 없다. 맨아래 네모난 받침대에는 코끼리 눈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었으며, 8각형의 아래 위 받침대에는 8장의 연꽃잎을 각각 따고 하늘을 향하도록 새겨넣었다. 화사석에는 4개의 창을 두었는데, 창 사이의 모서리 4면에 각각 사천왕상을 돋을새김한것이 이채롭다.지붕돌은 역시 8각으로 처리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었으며 맨 위에는 둥근 구슬을 올렸다. 새겨진 눈 모양과 연꽃무늬의 우아한 조각수법, 그리고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볼 수 있다.
- 해인사 3층석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이 탑은 2중 기단과 3층의 탑신 및 지붕돌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원래 이 탑의 받침은 신라 석탑 양식인 2중이었으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하면서 받침을 확장하고 한 층을 더 올려, 본래 지니고 있던 조화미를 상당 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4면의 각 모서리에 기중을 새긴 것 외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다. 지붕돌받침은 신라 석탑의 전형인 5층으로 되어 있고, 지붕돌 추녀 끝은 살짝 들어올려져 완만하게 처리되었다.지붕돌의 각 모서리에는 작은 종이 달려있는데, 본래의 것은 없어지고 나중에 다시 매단 것이다. 탑의 꼭대기 역시 일부가 소실되어 꼭대기를 떠받치는 받침대와 위로 핀 연꽃, 바퀴만 남아있다. 1926년 6월에 이 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상층 받침의 돌 함 속에서 9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석탑을 수리하고 나서 이들 불상을 다시 탑 안에 봉안하였다. 또 이 석탑 앞에는 코끼리의 눈모양을 형상화했다는 안상과 연꽃무늬가 조각된 배례석이 있었으나 수리하는 과정에서 석등 앞으로 옮겨졌다. [조선불교통사] 에는 태조가 즉위하여 이 탑을 수리할 때, 대장경을 탑 안에 봉안하면서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평안을 빌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할때 대장경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조가 수리한 탑이 이 탑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더욱이 근래의 사찰 보수 때 경학원 근처에서 신라 석탑의 재료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또 다른 석탑이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하겠다.
문화재[편집]
세계기록유산, 세계문화유산[편집]
해인사에 보존되어있는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은 현재 세계기록유산, 세계문화유산으로 각각 지정되어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동양 각국의 대장경과 비교할 때 오탈자가 거의 없다시피 하고 글꼴이 한 사람이 새긴 듯이 일정해서 자체가 예술품처럼 느껴지는 고려대장경이다.
해인사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장경판전도 외양의 아름다움은 물론 그 안에 숨겨진 과학적 지혜가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 두 가지 요소로 인해 해인사는 법보종찰이라 불린다. 불법승 삼보 가운데 부처님의 말씀을 간직한 곳이라는 뜻이다.
성철스님 이래 현대 한국불교사에서는 법보뿐 아니라 법통까지도 해인사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단위사찰 가운데 가장 많은 스님이 머물고 배출되면서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한국불교의 중심이자 상징 같은 절이 바로 해인사이기 때문이다.
- 장경판전
해인사 장경판전은 15세기에 건립되었으며 대장경 목판 보관을 목적으로 지어진 세계에서 유일한 건축물이다. 효과적인 건물 배치와 창호 계획을 고려하는 동시에 경험을 통해 얻은 다양한 방식을 활용함으로써 대장경판을 오랜 기간 효과적으로 보존하는 데 필요한 자연통풍과 적절한 온도 및 습도 조절이 가능한 구조를 갖추었다. 건물 안에 있는 판가 역시 실내온도와 습도가 균일하게 유지되도록 배열되어 있으며, 이러한 과학적 방법은 600년이 넘도록 변형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대장경판의 보존 상태에서 그 효과가 입증된다.
장경판고(藏經板庫)는 팔만대장경이 새겨진 8만 개의 목판들을 보관하는 네 군데의 보관소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의 형태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왕조의 성종이 통치하던 1481년에 왕비가 복구를 명했고, 1488년에 복구 작업이 완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 보관소들 중의 하나인 수다라장(修多羅藏)은 1622년에 복구되었고, 또 다른 주 보관소인 법보전은 1624년(1964년 복구 작업 중에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알려짐)에 복구되었다. 보관소들은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남아 원래의 기능을 해내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전 세계에서 가장 완전하고 정확한 불교 경전의 집성인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다. 이 대장경은 고려 현종 재위(1010~1031) 당시에 새겨진 최초의 팔만대장경(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목판을 교체하기 위해 새겨졌으며, 몽골과 거란족의 침입으로부터 고려를 지키고자 하는 바람을 담고 있다. 첫 목판들은 몽골이 침략한 1232년에 만들어졌다. 기나긴 항전이 시작된 그해에 고려 왕실은 강화도로 옮아가, 1237년에 2종 113권으로 시작된 작업은 12년 후에 완료되어 목차만 3권에 달하는 1,496종 6,568권의 대장경이 탄생했다.
- 팔만대장경
고려 시대의 국가사업으로 제작된 팔만대장경은 그 내용의 완전성과 정확성, 판각 기술의 예술성과 기술성의 관점에서 볼 때 전 세계 불교 역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갖는다. 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과 연관해 이해해야 하며 건축적, 과학적 측면에서 목판의 장기적 보존을 위해 15세기에 고안된 탁월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한자로 새겨진 현존하는 대장경들 중에서 가장 정확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대장경 제작을 담당했던 수기대사(守其大師)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 등 당시에 볼 수 있는 모든 불교 경전들을 철저히 비교함으로써 오류를 교정하고 누락된 한자들을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그의 교정 작업은 30권에 달하는 『교정별록(校正別錄)』에 기록되어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북송관판과 거란본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유일한 대장경으로, 「법원주림(法苑珠林)」,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내전수함음소(內典隨函音疏)」 등의 경전은 팔만대장경에 실리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팔만대장경은 경상남도 남해에서 제작된 뒤, 강화산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다. 1251년에는 제작을 마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1318년에 강화도의 선원사로 옮겨졌다가 고려 말기의 빈번한 외침 때문에 1398년에 현재의 보관소로 옮겨졌다. 기록에 따르면 국왕이 대장경의 이송을 직접 감독하기 위해 용산강(지금의 한강)으로 행차했다고 전해진다.
국보[편집]
- 국보 제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 국보 제52호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 국보 제206호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
보물[편집]
- 보물 제128호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 보물 제129호 합천 월광사지 동ㆍ서 삼층석탑
- 보물 제222호 합천 치인리 마애여래입상
- 보물 제264호 합천 해인사
- 보물 제518호 합천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 보물 제734호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
- 보물 제999호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 보물 제1208-2호 춘추경좌씨전구해 권60~70
- 보물 제1242호 합천 해인사 길상탑
- 보물 제1253호 해인사 동종
- 보물 제1273호 해인사영산회상도
- 보물 제1300호 합천 해인사 홍제암
- 보물 제1301호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
- 보물 제1697호 합천 해인사 감로왕도
- 보물 제1777호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
- 보물 제1778호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복장전적
- 보물 제1779호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
- 보물 제1780호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복장전적
- 보물 제1799호 합천 해인사 지장시왕도
- 보물 제1806호 합천 해인사 내전수함음소 권490 목판
기타 문화재[편집]
- 사적 제504호 합천 해인사
- 명승 제62호 가야산 해인사 일원
- 천연기념물 제541호 합천 해인사 학사대 전나무
- 중요민속문화재 제3호 광해군 내외 및 상궁 옷
기타[편집]
현재 대한민국 조계종에서는 출가하여 스님이 될 사람을 모집하기 위해 홈페이지까지 만들었는데, 그 홈페이지에서 처음으로 행자교육원을 소개했던 MBC 다큐멘터리를 이 해인사에서 찍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계종 소속의 절이면서 정작 조계종에서 중시하는 지눌과 관련된 교학을 승려 기초 교육 시 가르치지 않는데, 이는 이곳에 계셨던 성철 스님이 "지눌은 마구니다" 라고 하면서 불교 내에 대논쟁을 일으켰었기 때문이다. 특히 성철이 지눌과 관련된 것들을 가르치지 말라고 한 게 발단이 되었다. 성철 스님에 따르면 지눌은 돈오점수를 주장했는데, 성철 스님은 수행이 필요하다면 이미 깨달았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돈오돈수'를 주장했다.
노무현 전 대한민국 대통령과도 인연이 깊은 사찰인데,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독실한 불자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해인사에 머무르던 조계종 법전(法傳) 종정으로부터 보살계와 '대덕화(大德花)'라는 법명을 받았고, 노 전 대통령도 재임 기간 동안 세 번이나 해인사를 찾았다. 2005년에 해인사 대비로전(大毘盧殿)에 봉안된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현존 국내 최고(最古)의 목조 불상임이 확인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휴가를 틈타 해인사에 들러 "비행기 사고 없이 잘 날아다니고 우리 제품을 잘 팔아달라"고 기도하면서 대비로전 건립에 30여억 원을 국고 지원하겠다고 즉석에서 약속했고, 2007년 11월 24일 해인사 대비로전(大毘盧殿) 낙성 대법회에 영부인 권양숙 여사와 함께 참석해 축사를 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 덕분에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사건 당시 해인사에서 하안거 중이던 승려 300명이 하안거를 깨고 봉하마을의 빈소를 찾았다고. 여담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약속했던 30억 원의 특별 국고 지원금으로 대비로전을 수리하면서 화재에 대비한 재난대비장치로 비로자나불을 모신 불단 지하에 공간을 마련해 화재발생 시 4분여에 지하 6 m로 대피시킬 수 있는 안전장치도 마련되었다고 한다.
2012년 5월 17일엔 해인사 주지스님이 보증을 섰다가 100억 원대의 빚을 지게 되어 불상까지 압류당했다는 기사가 났다.
2014년 11월 24일, 경내 전각에서 낙서가 된 것이 발견되었다. 주요전각 17곳의 벽면에 천도교에서 사용하는 삼칠주(三七呪)를 한자로 적어두었다. 다행히도 대장경이 보관된 장경판전은 화를 면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최제우가 지은 삼칠주를 천도교 등 동학계 종교단체만이 아니라 증산 계통의 종교에서도 사용하는데, 증산계 종교에서는 천도교 등과 달리 주문의 선후를 바꾸어 외운다. 전각에서 발견된 낙서는 증산계 종교의 순서를 따라 썼기 때문에 범인이 그쪽 종교인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이 있었다. 나중에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범인은 삼칠주를 적으면 귀신을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 했다고 한다.
2017년 10월 16일 15세기 목조아미타불좌상 내부에서 고려 우왕 1년(1375)에 인출(印出)한 서적 '성불수구대다라니'와 고려 후기에 고려대장경으로 찍은 '대방광불화엄경' 28책이 발견되었다. 또한 목조아미타불좌상과 함께 삼존불(三尊佛)을 이루는 좌우의 관음보살입상과 지장보살입상을 X레이로 촬영한 결과 지장보살입상에서는 금속장식이 있는 족자형 사경(寫經·손으로 베껴 쓴 경전)이 발견되었고 관음보살입상에서는 종이 뭉치와 경전 사이에 병풍처럼 접었다 펼 수 있는 책인 절첩본(折帖本)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해인사에서 가야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으며 해인사입구정류장으로 와서 보면 바로 건너편에는 '소리길'이라는 탐방로가 있다. 해당 탐방로로 대장경테마파크까지 차량통행의 방해 없이 이동이 가능하다.
2022년 12월 11일 SBS 예능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가 월드컵 특집 : 미우새 VS 해인사으로 방영이 되었다.
관광[편집]
합천군 가야면에 위치한 대장경테마파크가 있다. 대장경기록문화테마파크를 찾는 관람객에게 천년을 이어 온 대장경의 역사적, 문명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인류 공동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재발현하는 이해와 발견의 공간으로 대장경 조판이전부터 경전의 전래와 결집, 천년을 이어왔던 장경판전의 숨겨진 과학에 이르는 역사의 시공간적 대장정을 감상할 수 있다.
해인사가 전국적, 아니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탓인지 해인사 주변에 각종 음식점과 숙박 시설 등이 즐비하다. 호객 행위도 역시 무시무시하다. 흔히 보는 산채비빔밥, 파전 같은 음식을 파는 곳은 기본이요, 관광 호텔, 유스호스텔이 있다.
이용안내[편집]
- 입장료
- 성인 3,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700원
- 주차요금
- 경차 2,000원 승용차 4,000원 미니버스 4,500원 대형버스 6,000원
- 팔만대장경관람시간
- 하절기 : 08 : 30 ∼ 18 : 00
- 동절기 : 08 : 30 ∼ 17 : 00
- 템플스테이
템플스테이는 자연환경과 불교문화가 어우러진 사찰에서 수행자의 일상을 체험하며 마음의 휴식과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일이다.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을 위한 전통사찰의 예절과 수행법을 통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개인이나 단체 등 누구나 참석할 수 있으며, 참된 나를 찾아가는 프로그램으로 마음의 평온과 활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템플스테이 자세한 안내사항은 〈여기클릭〉
교통안내[편집]
- 자가용
- 서울
- 중부내륙고속도로→ 성주나들목→ 양정삼거리 → 가야면 야천삼거리→ 가야산(해인사)
- 경부 고속도로 → 대구 → 대구광주고속도로 (4시간 소요)
- 부산.창원방면
- 남해고속국도→ 중부내륙고속국도→ 광대고속도로→ 해인사나들목→ 가야산(해인사)
- 경부 고속도로 → 대구 → 대구광주 (2시간 소요)
- 대구방면: 광대고속도로→ 해인사나들목→ 가야면→ 가야산(해인사)
- 지역간대중교통
- 서울고속버스터미널 → 서대구고속버스터미널→서대구시외버스터미널 → 해인사
- 서울고속버스터미널 → 서대구고속버스터미널
- - 배차간격 : 15 ~ 20분(첫차 : 6:00. 막차 익일 01:30)
- - 소요시간 : 3시간 40분
- - 요 금 : 일반16,300원, 우등 24,100원, 심야 26,500원
- 서대구시외버스터미널 → 해인사
- - 배차간격 : 40분(첫차 6:40, 막차 20:00)
- - 소요시간 : 1시간30분
- - 요 금 : 6,600원
- 서울남부터미널 → 고령시외터미널 → 해인사
- 서울남부터미널 → 고령시외터미널
- - 출발시간 : 10:00, 12:00, 13:20, 14:00, 15:00, 16:45, 19:00
- - 소요시간 : 4시간
- - 요 금 : 18,100원
- 고령시외터미널(054-954-4455) → 해인사
- 배차간격 : 40분(첫차 7:10, 막차 20:30) - 소요시간 : 1시간 - 요 금 : 3,900원
- 대전시외버스터미널 → 해인사
- - 출발시간 : 7:00, 12:10, 17:30
- - 소요시간 : 2시간 30분
- - 요 금 : 13,500원
- 진주(시외버스터미널 055-741-6039) ↔ 해인사 : 9:40, 14:10
- 기차
- 동대구역 하차 → 지하철 1호선(대곡방향) 승차후 성당못역에서 하차 →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해인사행 시외버스(1시간 40분 소요) 승차 → 해인사 앞 하차
- 지역내대중교통
- 합천→해인사 : 06:40, 11:00, 15:30
- 셔틀버스
- 없음
- 시간, 요금은 사전에 다시 확인 요망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 해인사 공식 홈페이지 - http://www.haeinsa.or.kr/
- 〈해인사〉, 《나무위키》
- 〈해인사〉, 《위키백과》
- 〈해인사〉, 《합천문화관광》
- 〈해인사(합천)〉, 《대한민국 구석구석》
- 〈해인사 장경판전〉, 《유네스코와 유산》
- 김상준 기자, 〈위대한 유산 팔만대장경이 있는 합천 해인사(상)-고려 민중의 혼이 담긴 ‘기록문화의 보고’〉, 《경남도민신문》, 2020-10-21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