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아르헨티나(Argentina)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쪽 끝에 있는 국가이다. 정식 명칭은 아르헨티나 공화국(스페인어: República Argentina 레푸블리카 아르헨티나, 과라니어: Tetã Argentina)이다. 수도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이다. 주요 도시로는 코르도바, 바이아블랑카, 마르델플라타, 라플라타 등이 있다.
16세기 중엽부터 스페인의 식민이 시작되었으며, 1810년 5월 독립을 선언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후 내란을 거쳐 1816년 7월 9일 투쿠만 회의에서 중앙집권적 공화국(라플라타 합주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목차
개요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연방 공화국이다. 서쪽에는 안데스 산맥을 경계로 칠레와 붙어있고 북쪽에는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동쪽에는 브라질과 우루과이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특히 북쪽으로 볼리비아와 접하는 안데스 산맥 일대는 과거에는 잉카 제국의 영향에 속해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라틴어로 '은(銀)'이란 뜻이며, 탱고와 목축으로 유명하다.
인구 밀도가 15.6명/㎢ 으로 호주, 캐나다, 몽골, 칠레, 나미비아 등과 유사하게 매우 낮다. 땅은 넓은데 인구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어서 대부분의 땅이 나대지이며 고층빌딩은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나 볼 수 있다.
인구의 대부분이 백인계로 구성되어 남미의 백인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인의 97% 이상이 스스로 백인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유전자 분석을 보면 아르헨티나인 유전자의 60~80%은 유럽 및 중동의 백인으로부터 오긴 했지만 나머지 20~40% 정도는 토착 원주민과 흑인의 유전자로부터 왔다. 도시 지역에는 특히 유럽 이주민 후손 비율이 높고 이들이 완전히 혼혈되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대부분이 백인이나 백인 비슷하게 보이게 된 것. 백인 이외에는 지방을 중심으로 남미 원주민이 소수 존재하지만 과거 아르헨티나 정부에 의해 학살되었고, 또한 백인과의 통혼으로 혼혈, 동화되었다. 흑인들은 아프리카로부터 건너와 도시 지역에 거주했으나 백인과 혼혈되면서 현재 아르헨티나에 흑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아르헨티나 이민자 출신 국가를 보면 이탈리아, 스페인이 70% 이상을 차지하며 특히 이탈리아가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다. 그밖에 프랑스계, 독일계, 러시아계, 영국계 순인데 이탈리아계와 스페인계에 비하면 매우 소수이다. 영국과 전쟁을 해서 영국인이 많이 없을것 이란 추측들을 하지만 사회 각계각층에 영국인, 영연방국의 후예들이 분포한다. 국가(아르헨티나)의 운명이 위태로울때 아르헨티나의 편이 되어 싸우기도 했다. 퍼거슨 왕세자비의 어머니도 아르헨티나에서 농장을 운영하였고 영국과 전쟁전에는 영국왕실의 왕족,귀족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수도 외곽 '올리보스'나 '산이시드로' 지역엔 영국인이 사는 부촌이 형성되어 있고 카페나 인적이 있는 길거리에서 간간히 영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아르헨티나는 또한 영국의 해외 영토로 인정되고 있는 포클랜드 제도와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남극의 일부인 아르헨티나령 남극에 대한 영유권도 주장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구매력 대비 1인당 GDP 3위, 인간개발지수 2위의 국가로 조사되었고, 명목 GDP는 세계 30위, 구매력을 고려한 GDP는 세계에서 23위이다. 세계은행에서는 이 나라를 국민총소득 중상 수준의 국가 혹은 신흥 시장으로 분류했다. 아르헨티나는 메르코수르, 남미 국가 연합, 세계은행 그룹, G-15, G-20에 속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2022년 1월부터 아르헨티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다.
국가 상징
국호
아르헨티나(Argentina)라는 나라 이름은 라틴어로 '은(銀)'을 의미하는 '아르겐툼(Argentum)'에서 유래한 것이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는 스페인어로 '은'을 뜻하는 '라 플라타(La Plata) 식민지'로 불렸는데 이는 스페인 사람들이 이 땅에 처음 이르렀을 때 라 플라타 강 상류에 은으로 된 산맥이 있다고 믿었던 것에서 유래하여 강의 이름을 붙이고 이를 지역명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독립 이후 스페인어 지명 대신 이를 라틴어로 의역한 아르헨티나를 국명으로 채택해 지금에 이른다.
크라잉 넛의 룩셈부르크에서는 애석하게도 '아리헨티나'로 나온다.
한자문화권에서 음차표기로는 '아연정'(亞然丁)', '아이연정(亞爾然丁)', '아근정(亞根廷)' 등으로 표기하였다. 다만 이 표기를 두문자로 줄일 경우 亞로 줄여야 하는데, 이렇게 쓰면 아시아의 두문자와 겹치기 때문에 현대에는 쓰이지 않고 사장되었다. 현재 중국에서는 '아근정(阿根廷)'이라고 표기한다.
국기
아르헨티나의 국기는 1812년 2월 27일에 제정되었다. 하늘색, 하얀색, 하늘색으로 구성된 가로 줄무늬 바탕 가운데에 32줄기의 햇살을 가진 5월의 태양이 그려져 있다. 5월의 태양 디자인은 1818년에 국기에 추가되었다. 민간기와 상선기는 5월의 태양 디자인이 생략된 형태의 기를 사용한다.
하늘색과 하얀색은 아르헨티나 독립 전쟁이 일어나던 1810년 마누엘 벨그라노 장군이 이끌던 아르헨티나 민병대들이 로사리오 근처에서 스페인 식민지군을 무찌르고 승리한 것을 기념해 국기의 색으로 사용한 색으로 당시 병사들의 군복 색상이었던 하늘색과 하얀색에서 유래되었다. 5월의 태양은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계기가 된 1810년에 일어난 5월 혁명을 의미한다.
국장
아르헨티나의 국장은 1813년에 공식 제정되었으며 현재의 국장은 1944년에 제정되었다. 국장 위에는 황금색 5월의 태양이 그려져 있는데 5월의 태양은 아르헨티나의 여명을 의미한다.
국장 가운데에는 아르헨티나의 국기를 구성하는 색인 하늘색과 하얀색 두 가지 색의 타원이 그려져 있다. 타원 안에는 나무로 만든 창을 두 개의 손이 잡고 있는 형상의 디자인이 그려져 있으며 창 위에는 빨간색 프뤼기아 모자가 올려져 있다. 하늘색은 하늘을, 하얀색은 라플라타강을 의미한다.
악수를 하고 있는 두 개의 손은 아르헨티나를 구성하는 여러 지역의 단결을 의미한다. 손과 프뤼기아 모자가 가까이 놓여 있는 것은 아르헨티나의 나라 표어인 "통일과 자유"(스페인어: En Unión y Libertad)를 의미한다. 손은 통일을, 창은 힘을, 프뤼기아 모자는 자유를 의미한다. 국장 양쪽을 월계수 가지로 만든 화환이 감싸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의 국기 문양의 리본이 이를 묶고 있다. 월계수 가지는 승리와 영광을 의미한다.
국가
국가는 1813년 제정된 아르헨티나 국가인데 상당히 방대한 규모라서 국제 스포츠 경기 때 종종 생략되고 있다.
앞의 전주가 우루과이보다 길다.
지리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원뿔꼴 지역(Southern Cone)에 위치해 있으며, 국토 면적은 276만 km²로 세계 8위이다. 유럽은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아르헨티나보다 면적이 넓은 나라가 없으며 아프리카는 아예 없다. 그린란드(2,166,086km²)도 아르헨티나보다 작은 편이다. 다만 남아메리카 내에서는 브라질이 가장 넓기 때문에 면적으로는 콩라인이다. 아시아에서도 더 넓은 나라가 중국(959만km²)과 인도(328만km²) 뿐이며 카자흐스탄(271만km²)이 약간 작다. 한반도(22.2만 ㎢) 면적의 약 12.5배, 그리고 남한(9.9만㎢) 면적의 약 28배에 이른다. 국경은 11,968km로 서쪽으로 칠레, 북쪽으로 볼리비아, 북동쪽으로 우루과이·브라질·파라과이 그리고 남동쪽은 대서양에 면해 있다. 특히 안데스산맥을 경계로 한 아르헨티나-칠레 국경은 5.308km로 남미에서는 가장 길며, 세계에서도 세 번째로 긴 국경이다. 4,989km의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최대 남북길이 3,700km, 최대 동서길이 1,700km이다. 아르헨티나는 고원 지대와 사막을 포함하여 열대우림에서부터 한랭 지대까지 전 지구상에 있는 모든 기후 지역을 갖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남극에서 아르헨티나령 남극이라는 969,464 제곱킬로미터의 지역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는데, 일부는 칠레(칠레령 남극)와 영국(영국령 남극)의 영유권 주장 지역과 겹친다. 그러나 이 주장은 1961년 체결된 남극 조약에 의해 공식적으로 유예되어 현재까지 실효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팜파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서쪽과 남쪽에 펼쳐진 중앙의 대평원이다. 습한 팜파라고도 하는데, 부에노스아이레스주와 코르도바주의 대부분과 산타페주, 라팜파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라팜파 주의 서쪽 부분과 산루이스주도 대체로 평야(건조한 팜파)인데, 건조해서 주로 초지로 쓰인다. 이름이 같은 코르도바주 지역의 시에라데코르도바 산맥은 팜파스에서 가장 지리적으로 두드러지는 지형이다.
이 지역과 우루과이 사이에는 길이 약 4,700km의 라플라타강이 흐른다. '은(銀)의 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어귀의 강폭은 약 220km 가량이다.
팜파스는 농업에 적절한 비옥한 땅으로 쇠고기·양모·밀·옥수수 등을 많이 산출하며, 이 나라의 중요 경제 지역이다. 제조 공업도 여기에 집중하고 있다.
북부의 아열대 평원 그란차코 지역은 계절에 따라 건조하거나 습해진다. 주로 목화를 재배하고 가축을 방목한다. 이 지역에는 차코주, 포르모사주가 있다. 간간히 아열대 우림, 관목림, 습지가 자리잡고 있으며 수많은 식물과 동물의 서식지이다. 산티아고델에스테로주는 그란차코에서도 건조한 지역이다.
메소포타미아는 파라나강과 우루과이강 사이에 위치한 곳이다. 이 지역에는 코리엔테스주와 엔트레리오스주가 있다. 목축과 식물 재배에 적합한 평야 지역으로, 코리엔테스 중부에는 이베라 습지가 있다. 미시오네스주는 더 더운 지역으로, 브라질 고원의 지형적 영향을 받는다. 아열대 우림과 이과수 폭포가 있다.
아르헨티나 남부의 네그로강에서 마젤란 해협에 이르는 파타고니아의 스텝 초원에는 네우켄주, 리오네그로주, 추부트주, 산타크루스주가 있다. 이 지역 대부분은 북쪽으로는 반건조 기후에 추우며, 남쪽으로는 건조하다. 그러나 서쪽 경계에는 숲이 자라며 여러 호수가 있다. 그리고 대륙의 돌출부 끝에는 칠레와 절반씩 영유하는 티에라델푸에고 제도가 있으며, 바다의 영향으로 서늘하고 습하며, 온화하다. 파타고니아 북부(네그로 강 남쪽, 네우켄)은 코마우에 지역이라고도 한다.
파타고니아는 목양지로서 유명하며, 석유 자원 지대로서도 중요하다.
쿠요(Cuyo) 아르헨티나 중서부는 안데스산맥의 영향권이다. 산맥 동쪽의 건조한 지역을 쿠요라고 한다. 고산 지대에서 녹은 물은 저지대에 있는 오아시스에 물을 공급한다. 이 지역은 멘도사주와 산후안주의 과실과 포도주 생산의 중심을 이룬다. 여기서 더 북쪽으로 가면 라리오하주의 더 덥고 건조한 기후를 만난다. 산루이스주 북쪽의 시에라팜페아나스산맥이라는 세 곳의 낮은 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 이곳 최동단 경계를 이룬다.
칠레 국경 지역에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높은 산인 아콩카과산이 있다. 안데스산맥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일 뿐 아니라 남반구와 서반구에서도 최고봉이다. 높이는 약 7,000m이다.
아르헨티나 북서부(NOA) 이 지역은 아르헨티나에서 평균 고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산맥이 뻗어 있으며, 어떤 봉우리는 6,000m에 이르기도 한다. 이 산지는 북쪽으로 갈수록 더 넓어진다. 산맥은 비옥한 강가 계곡에서 끊기는데, 가장 중요한 곳은 카타마르카주, 투쿠만주, 살타주의 칼차키 계곡이다. 더 북쪽으로 볼리비아와 가까운 후후이주는 주로 중부 안데스의 고원에 있다. 남회귀선이 이 곳 북부를 지난다.
일본, 대만, 도네시아, 뉴질랜드 등 환태평양만큼은 아니지만 지진이 꽤 많이 일어나며 특히 서부 멘도사주 지역에서 지진이 많다. 특히 지진의 나라로 악명을 떨치는 칠레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안데스 지역의 지진이 꽤나 심각하다. 아르헨티나 전체가 아닌 멘도사 주에서만도 대한민국에서 기록된 어느 지진보다 규모가 큰 지진이 10여 년에 한 번 꼴로는 일어난다. 멘도사주의 면적은 남한 면적의 1.48배인 148,827 ㎢로 그렇게 크지는 않다. 다만 1978년에야 규모까지 관측하는 지진 기록이 시작된 남한에 비해 아르헨티나는 19세기에도 규모까지 있는 지진 기록이 있음은 감안해야 할 듯. 남미에서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편이라고 알려진 칠레 옆에 붙어 있고,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만나는 안데스 산맥 근처가 태평양판과 남아메리카 판이 만나는 곳에서 가까워서 지진이 꽤 일어나는 편이다.다만 대다수의 인구가 밀집한 동부 지역은 지진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UFO가 많이 출몰하는 나라 중 하나다. 역대 UFO중에서 가장 선명한 UFO가 발견되기도 했다. 검색어 자동완성에 아예 아르헨티나 UFO가 있을 정도다.
기후
기후는 옆 나라 칠레보다 평균적으로 온화한 편이며, 인구의 97%가 남위 40도 이북의 아열대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만 하더라도 연 평균기온이 서귀포보다 높다. 상하이, 도쿄보다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연 평균기온이 높으며 연교차는 더 작아서 겨울에는 위 지역들보다 더 따뜻하다.
북부 파라과이 접경지역은 1월 평균기온 28℃, 7월 평균기온 17℃, 연평균기온 23℃ 로 베트남북부내륙과 비슷한 기온이 나타나며, 남쪽 끝 우수아이아는 1월 평균기온 10℃, 6월 평균기온 2℃, 연평균기온 6℃ 로 북해의 페로 제도와 비슷한 기온이 나타나, 연평균기온으로만 보았을 때는 이북의 자강도와 비슷한 편. 이렇게 남북으로 뻗는 넓은 국토임에도 불구하고 기후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이유는 사막과 초원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바람의 기압차로 차가운 공기가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국토 전체의 연평균기온은 15.4℃ 이며 최한월 8.5℃, 최난월 22.2℃ 이다. 그러나 남위 40도에서 50도 사이에는 사막이 존재하더라도 전형적인 온대기후의 기온을 보이기 때문에 사막치고는 덥거나 춥지 않은 편에 속한다.
강수량은 동부지역에서는 비교적 고르고 풍족한(1000mm)편이며 , 파타고니아 사막과 서부 건조지역에서는 사막성 기후로 비가 드물게 내린다.
역대 최고 기온은 북부지역에서 기록한 48.9℃ 이며, 역대 최저기온은 추부트에서 기록한 -32.8℃이나, 신뢰성에 큰 의문이 있어 실제 역대최저기온은 파타고니아 산악 또는 북서부 안데스 산맥에서 기록되는 -25℃~-30℃ 정도일 것이다.
남반구에 있으므로 4계(四季)의 시기는 북반부와 정반대여서 1년의 시작인 1월 1일은 여름이 된다.
생태계
북쪽의 그란차코 지역은 Dalbergia속의 브라질리안 로즈우드나 퀘브라쵸, 카로브 나무 등의 아열대식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안데스 근처의 더 메마른 곳에는 사바나와 비슷한 지역이 존재한다. 수생식물들은 아르헨티나의 습지에 잘 자란다. 아르헨티나의 중부에 있는 습윤팜파스는 톨그래스 초원이다. 원래의 팜파스에는 사실상 나무가 없으나 양버즘나무와 유칼립투스 등과 같은 수입종들이 길이나 마을, 시골의 사유지(에스탄시아) 등에 자란다. 유일한 팜파스 원산지의 나무는 피토라카이다. 팜파스 토양의 표면은 진한 검은색으로 주로 흔히 부엽토로 알려진 몰리솔로 되어있다. 이것은 이 지역을 세계에서 가장 생산적인 농업지로 만들었지만 또한 상업적 농업으로 인해 이 지역의 본래 생태계를 심하게 훼손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비가 적게 오는 서쪽의 팜파스는 건조팜파스로서 짧은 풀이 자라는 평원이거나 스텝지역이다. 29개의 국립공원이 있다.
대부분의 파타고니아는 안데스 산맥에 의한 비그늘이 형성되어 건조한 지역에 맞는 식물군들이 존재한다. 이 지역의 토양은 딱딱하고 바위가 많아 강이나 계곡 근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 파타고니아의 서쪽과 티에라델푸에고섬에는 침엽수림과 활엽수림 등이 있다.
쿠요에는 가시가 있는 식물이나 다른 건조지역에 사는 식물들이 풍부하다. 강을 따라서는 몇몇 종의 나무와 풀들이 자란다. 이 지역의 조건은 포도가 자라기 적합한 조건이다. 아르헨티나의 북서쪽은 다양한 종의 선인장이 존재한다. 약 4000m의 고도의 지역에는 초목이 자라지 않는다.
북쪽의 아열대 지역에는 많은 종의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재규어, 퓨마, 오셀롯 등의 고양이과 동물들, 고함원숭이와 같은 영장류, 악어와 같은 거대한 파충류 등이 서식한다. 맥, 페커리, 카피바라, 들개 등과 다양한 종의 거북 등도 서식하고 있다. 다양한 종의 조류 역시 서식하고 있는데, 특히 벌새, 홍학, 큰부리새, 제비 등을 꼽을 수 있다.
아르헨티나 중부의 초원에는 큰개미핥기, 아르마딜로, 팜파스 고양이, 갈기늑대, 마라, 기니피그 등의 포유류와 레아가 서식한다. 매와 왜가리과의 새, 그리고 티나무 역시 이 지역에 서식하고 있다. 팜파스 사슴, 팜파스 여우 등도 서식한다. 이들 중 몇몇 종들은 파타고니아에도 서식하고 있다.
서쪽의 산지에는 다른 동물들이 산다. 라마나 구아나코, 비쿠냐 등의 남미의 특징적인 종들이 서식한다. 또한 여우나 비스카차, 안데스 고양이, 그리고 아메리카의 날 수 있는 새중에서 가장 큰 안데스콘도르 등 역시 서식한다.
아르헨티나 남부는 퓨마, 안데스 사슴, 푸두(세계에서 가장 작은 사슴), 그리고 도입종인 멧돼지 등의 서식지이다. 파타고니아의 해안가에는 코끼리물범, 물개, 바다사자, 그리고 다양한 종의 펭귄 등이 서식한다. 조금 더 남쪽은 가마우지가 있다.
아르헨티나의 영해에는 돌고래, 범고래, 그리고 남방참고래와 같은 고래 등 다양한 바다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정어리, 만새기, 연어, 그리고 상어 등의 바다물고기가 서식하고 또한 티에라델푸에고섬에는 오징어와 같은 것도 서식한다. 아르헨티나의 강과 개울에는 다양한 종의 송어 역시 서식한다. 보아나 매우 독성이 강한 살모사 등도 서식한다. 1928년 조사 이후 호르네로가 아르헨티나의 국조로 선정되었다.
역사
아르헨티나의 역사는 크게 콜럼버스 이전의 시대 또는 초기 역사(16세기까지), 식민지 시대(1530년~1810년), 국가 건설 시기(1810년~1880년), 현대 아르헨티나의 역사(1880년경)로 나눌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선사 시대는 약 13,000년 전 파타고니아 남단에 최초의 인류 정착지로 시작되었다.
1516년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의 스페인 연대기 작가들이 라플라타강 원정에 도착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1776년에 스페인 국왕은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을 세웠는데, 1810년 5월 혁명과 함께,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라고 불리는 것을 포함한 몇몇 독립 국가들의 점진적인 형성 과정을 시작했다. 1816년 7월 9일 독립 선언과 1824년 스페인 제국의 군사적 패배로, 오늘날 아르헨티나 공화국으로 알려진 연방 국가가 1853~1861년에 형성되었다.
콜럼버스 이전 시대
아르헨티나에 최초로 인간이 정주한 증거는 파타고니아에서 발견되며 기원전 11000여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지역에는 국가 없이 인디오들이 부족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15세기 초반부터 파차쿠텍 왕이 통치하던 잉카 제국은 1480년에 공격을 시작하여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북서부를 정복해서 코야수유 지역에 포함시켰다. 과라니족들은 유카, 고구마, 예르바 마테 농업을 발전시켰다. 중부와 남부 지역(팜파스와 파타고니아)는 유목민들이 지배했으며 17세기에 마푸체인들이 통일시켰다.
식민 시대
1516년 이 땅에 유럽인들이 들어왔다. 스페인은 1542년, 남아메리카 대부분을 아우르는 페루 부왕령을 설립했다. 그들이 현재 아르헨티나 지역에 처음 정착한 것은 1527년 파라나강 근처의 지역이었다. 그들은 153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처음 영구 식민지를 건설했으나, 원주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스페인은 15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영구 식민지를 다시 건설하였다.
이 지역은 주로 스페인 이민자들과 크리오요라는 그들의 후손과 메스티소, 토착민과 아프리카 노예의 후예들의 나라였다. 식민 시대 정착민 중 1/3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나 다른 도시에 모여 살았으며, 나머지는 가우초라 하여 팜파스에서 살았다. 나머지 지방에는 원주민들이 살았고, 파타고니아와 그란차코의 대부분 지역은 원주민 지배하에 남았다.
1776년, 전의 페루 부왕령의 영토였던 지역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하여 리오 데 라 플라타 부왕령이 설치되었다. (이 영향으로 스페인어가 아르헨티나의 공용어로 쓰이고 있고 기독교(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요한 종교이다.) 영국이 1806년~1807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두 번 침공했으나 후에 대중적 지지를 얻어 총독이 되는 프랑스 장교 산티아고 리니에르에 의해 두번 다 저지당했다.
독립과 통일
19세기 초 영국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침공을 시민들의 힘으로 물리친 사건을 계기로 독립의지가 촉발되었고 이후 호세 데 산 마르틴의 5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1810년 5월 독립을 선포하고 임시정부를 수립, 1816년 7월 9일에 투쿠만 회의에서 중앙 집권적 공화국으로 성립되었음을 선언했다. 처음에는 라플라타 부왕령 자체가 그대로 라플라타 합주국으로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합주국의 내부 다툼이 격해져 상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던 볼리비아, 우루과이 그리고 파라과이가 이탈하게 된다. 이후 하나의 강력한 중앙정부를 원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앙집권주의자들과 자치권을 지키려는 지역들의 연방주의자들 사이에 마찰이 심해 독립 직후부터 투닥투닥거리게 된다.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Bernardino Rivadavia)가 중앙집권주의자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와 동시에 최초의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라플라타 강 하구에 위치해 아르헨티나의 무역을 독점하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국유화하고 그 수입을 통합된 국가 전체를 위해 사용하고자 하였으나, 지방의 연방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중앙정부가 나타나는 것을 반대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주들 역시 자신들이 독점한 무역 특권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결국 1827년 리바다비아는 대통령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제대로 된 지도자 없이 산발적 내전에 휩싸이게 되며, 각 주의 주지사들이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아르헨티나 연합국(Argentine Confederation)이라는 큰 틀의 국가는 존재하였으나 사실상 유명무실하였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가 상당히 큰 권력을 행사하는 매우 느슨한 연방체제가 성립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가 쿠데타와 반목으로 마구 교체되는 사이, 1829년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기존 중앙집권주의자 주지사를 제거하고 연방주의자의 리더로서 주지사에 오른다. 이후 그는 강력한 독재정책과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함으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아르헨티나 연합국의 확립과 안정을 가져오게 된다.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중앙집권주의자들에 대한 철저한 숙청이 이루어져 이들은 전부 지방으로 도망가고, 힘을 모아 로사스에게 대항하기도 했지만 철저하게 박살나버렸다. 이렇게 로사스는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안정적 독재 체제를 구축하게 되며, 자신의 가문이 아예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를 독점하게 하려 했다. 물론 그의 잔혹한 통치와 권력 독점 야욕은 그의 인기를 계속 떨어뜨려 말년에 그는 암살의 위험을 고려해 자신의 집무실과 관저에서 나가지 않았다.
로사스가 장기 집권하는 도중 우루과이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이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페드루 2세의 브라질 제국과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브라질과 전쟁을 하게 되고, 이에 남아있던 중앙집권주의자 잔당들이 합세하여 대 로사스 연합을 형성하게 된다. 로사스는 여기에서 대패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로부터 쫓겨나고,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에 1853년 아르헨티나의 각 주지사들이 모여 새로운 헌법 제정에 찬성하고 아르헨티나를 연방국가로 만드는 데 동의하게 되어 엔트레리오스 주의 호세 우르키사가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신헌법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세관의 수입을 모든 주가 공유하도록 된 것에 반대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이를 거부하고 1852년 9월 11일 혼자 아르헨티나 연합국을 탈퇴, 부에노스아이레스국(Estado de Buenos Aires)을 선포한다. 아르헨티나 연합국은 수도를 파라나에 두었다.
그로부터 무려 7~8년 간 아웅다웅 계속해서 다투다가, 결국 여러 분쟁을 거쳐 1861년 파본 전투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바르톨로메 미트레(Bartolomé Mitre)가 최종적으로 내륙의 아르헨티나 연합국을 제압하게 된다. 이후 모든 주가 참가한 의회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세관을 국유화하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수도 지위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수입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합의가 이루어졌고, 1862년 미트레가 통합된 아르헨티나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렇듯 1814년부터 1880년까지 66년간 일어난 일련의 분쟁들을 묶어 '아르헨티나 내전'으로 분류한다.
전성기
아르헨티나는 넓은 토지와 초원이 있었으나 농사를 짓기에는 강수량이 모자라 많은 생산량을 보장하지 못했고, 때문에 목축업이 가장 크게 발달한 국가였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 당시에는 냉동기술이 없어 소와 양을 수출하려면 살아 있는 채로 실어야 했기에 비용이 크게 증가했고 이는 유럽 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졌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냉장 기술이 개발되어 소고기 등을 도축해도 적도를 통과할 수 있게 되자, 아르헨티나 경제는 크게 부흥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랜 내전이 끝나게 되면서, 그동안 미루어 두어 통제하지 못하고 있던 원주민 영토를 향한 정복 및 식민에 착수한다. 180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 대규모 정복사업은 아르헨티나의 영토를 2배 이상 뻥튀기 해놓았으며, 남부 파타고니아 지방을 제외하고는 전부 농업과 목축업에 쓸만한 땅들이었기에 아르헨티나의 1차산업은 크게 부흥하였다. 이에 지주들의 자본 축적이 이루어져 1880년 이후부터는 초기적인 산업화가 시작되었고, 해외 자본, 특히나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이 유입되어 최초로 근대적 공장이 세워지는 등 아르헨티나는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1900년 이후부터는 그렇게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문화와 사회가 크게 발전하여, 본격적으로 '남미의 프랑스'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은의 여왕', '남미의 파리' 등 화려한 명칭을 갖게 되었다. 철도와 기간사업이 건설되었고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지하철을 건설하였다. 급진주의당이 정권을 잡고 운영한 10여 년 동안은 사회정치적 문제에도 크게 관심이 대두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보장하였고 사회안전망에 대한 기초적 작업이 이루어졌다. 목축업과 농업은 물론 타 산업도 발달하기 시작해 1910년 무렵부터 1970년대까지는 세계 15대 경제 대국으로 늘 빠지지 않았고, 1910년대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프랑스, 이탈리아보다 높은 세계 8위권으로 벨기에와 비슷했다. 이때의 아르헨티나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이었으며,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구입하고 독립 초기 주변국인 브라질과 파라과이와의 전쟁에서 승전할 정도로 중남미에서는 강대국이기도 했던 나라였다. '아르헨티나인처럼 부자이다.'라는 관용구가 프랑스에 생길 정도였다.
익히 알려진 동화 '엄마찾아 삼만리'에서 이탈리아인 주인공 소년이 엄마 찾아 가던 곳이 바로 아르헨티나였다. 즉 유럽에서 아르헨티나 드림을 찾아 이민을 왔다.
대공황, 아르헨티나 몰락의 시작
그러나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을 시작으로 세계 경제가 큰 타격을 받으면서 목축업과 농업에 쇠고기, 곡물 수출에만 의존하며 부를 쌓던 아르헨티나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때 국내 위기의 혼란을 틈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에 개입하게 되면서 아르헨티나는 여타 중남미 국가들처럼 잦은 군부 쿠데타와 군부 독재 등 군부의 정치 개입이 반복되는 등 경제적, 정치적으로 끝 없는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시기
아르헨티나에는 나치 독일의 전횡을 피해 도망친 유럽 이주민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일례로 볼펜을 발명한 신문기자 비로 라슬로(Bíró László) 역시 원래는 헝가리 사람이었으나 나치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도망쳤다.
이렇게 아르헨티나는 나치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몰린 나라인 데다가 세계적인 농업국인 덕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아르헨티나'라는 나라 자체가 연합국의 군량고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나치의 주동자들도 종전 직전 아르헨티나로 도망쳐오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아돌프 아이히만. 이 때문에 히틀러가 사실 도망가서 아르헨티나의 시골 구석에서 잘먹고 잘살고 있다는 음모론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페론 집권기: 논란의 시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6년 육군 대령 출신 노동부 장관 후안 페론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되면서 정세는 어느 정도 안정화되기 시작했고 대통령이 된 페론은 노동자와 빈민층을 위한 사회 복지 정책을 펼쳤다. 흔히 말하는 포퓰리즘의 대명사인 '페론주의'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에비타'로 잘 알려진 영부인 에바 페론은 빈민의 어머니로 추앙받으며 어찌 보면 페론보다 국민들의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47년 그녀는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사회 복지를 실시했다. 이것은 아르헨티나 최초로 정부가 사회복지에 관심을 두게 된 사건이었으며, 기존의 과두정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에비타는 무뚝뚝한 페론과 그의 지지자 사이의 "사랑의 다리"로 여겨졌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을 얻어냈으며, 페론주의 여성당을 창립하기도 했다.
1900년대 초반의 아르헨티나는 분명히 잘 사는 부국이었으나 사회문제는 심각했다. 산업화는 부분적으로 이루어져 제대로 된 중산층이 형성되지 못했고, 극단적으로 부자여서 해외 진출을 통해 돈을 쓸어 모으는 지주층과, 그 밑에 소속된 노동자들로 사회가 극단적으로 이원화 된 것이다. 중산층이라고 해 봐야 공무원, 사무직 정도였으나 농업 위주 아르헨티나 경제 및 사회상에서 주류가 되지 못했다. 결국 수많은 빈민들이 거리를 맴돌며 일자리와 월급을 요구했고, 이는 단순노무직에 사람들이 집중되어 비참한 삶의 질을 낳게 되었다. 후안 페론의 정책들은 이런 빈민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고, 빈민가 출신인 에바 페론의 사회 활동까지 합쳐저 엄청난 인기로 이어진 것이다.
후안 페론이 실행했던 경제정책이 특별히 이상했던 것은 아니고 당대의 트렌드를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미국에서도 케인즈주의 경제학을 반영해서 경제정책을 짰고 소련의 계획경제 체제가 성공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었기에 서구 선진국이든 갓 독립한 제3세계 국가에서도 계획경제 제도를 반영하거나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후안 페론도 그런 경우이다.
페론이 포퓰리즘으로 나라 말아 먹었다고 욕 먹는 것에 비해 의외로 80년대까지 페론주의 정당은 집권기간이 짧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급진시민연합과 반 페론파 성향의 군부가 집권했고, 그나마도 1955년 쿠데타 이후로 페론주의자들의 선거출마가 금지되어있던 상황이었으며, 이후 선거출마금지조치가 풀려서 페론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것도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단 3년 정도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민주화 직후에는 급진시민연합(라디칼당) 소속의 라울 알폰신이 집권했고, 페론당 소속으로 집권한 카를로스 메넴도 대통령 당선 당시에는 페론주의적 공약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대통령에 당선되고나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민영화도 대대적으로 단행하여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아르헨티나가 경제위기에 빠졌을 때 더 이상 팔아치울 공기업이 남아있지 않다고 표현될 정도로 철저하게 감행했다.
페론의 업적을 재평가하는 쪽에선 1949년부터 1976년까지 그가 통치하던 시대에 아르헨티나의 국민총생산은 127%의 성장을 기록했고, 개인소득은 230%의 성장을 기록하였으며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의 발전을 도모했다는 측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1945년 4,000달러 정도이던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1975년에는 8,000달러를 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다른 나라들의 GDP는 아르헨티나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상승했다. 페론이 집권한 1946년에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브라질과 일본(2차 대전 직후라서)의 세 배가 넘었다. 그러나 1975년에는 브라질의 두 배로 격차가 줄어들고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벌어졌다. 1946년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OECD 평균에 근접했으나 1975년 무렵엔 OECD 평균의 70%정도까지 떨어졌다.
물론 빈민구제가 경제개발보다도 우선시했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경제성장은 좀 더뎠어도 후안 페론 치세기간의 아르헨티나는 적어도 빈민율만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후안 페론은 우선 빈부격차부터 줄이고 차후에 경제를 발전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안 페론이 죽은 지 2년 후 호르헤 비델라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직후부터 국채를 남발하고 자국의 기업들을 헐값에 처분하는 등 아예 경제를 망치려고 작정한 행보로 인해 아르헨티나는 완전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페론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아르헨티나의 경제부진이나 파탄의 책임을 페론에게만 전가하기는 어렵다. 아르헨티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경제력이 절정에 달해 프랑스, 독일과도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게된 이후에는 쭉 내리막길이었다. 페론의 영향이 남아있던 1950년대라면 몰라도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의 아르헨티나의 성장부진을 온전히 페론의 영향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경제부진이나 파탄의 책임은 군부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하다 못해 페론의 정책을 뒤집어보려 했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에게도 있다. 완전한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려 했지만 오히려 부작용만 키워버리면서 차라리 안 건드린 것만 못한 수준으로 경제가 무너져 버렸다.
페론주의에 긍정적이거나 또는 중립적으로 생각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페론보다는 오히려 페론 실권/사후에 집권한 아르투로 프론디시와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레오폴도 갈티에리, 라울 알폰신, 카를로스 메넴, 페르난도 델라루아 같은 후임 아르헨티나 전 대통령들의 경제 정책이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경제 악화에 더 악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도입하고 실행했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천문학적인 외채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파탄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또한 1966년부터 1973년까지 7년밖에 안되는 기간에 쿠데타가 무려 세 번이나 일어날 정도로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으니 국가적인 차원에서 경제성장에 에너지를 쏟아붓기가 어려웠고, 197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비델라 정권부터 외자 도입을 위해 공기업에 외채를 떠안게 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현재의 외채 위기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오히려 페론 정권은 외채에 의존하는 경제발전을 경계했으며, 외채 제로를 선언하며 집권하자마자 바로 영국 은행에 지고 있던 10억 달러의 외채를 갚는 등 자신의 임기동안 외채를 꾸준히 줄이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페론의 기조가 유지됐다면 막대한 외채로 인한 외환위기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아르헨티나의 공업이 농업에 비해 낙후되었고 과거 라틴아메리카의 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가 그의 통치를 거친 이후 몰락했다는 주장도 학자들 사이에서 나름 설득력을 얻고 있는지라 그의 평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될 것이다.
결국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르헨티나 군부가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군사독재
이사벨 페론(페론 1974년 7월에 죽고 남편의 뒤를 승계한 그의 셋째 부인이자 부통령)은 1976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를 합참의장격인 전군총사령관에 임명했는데 군대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비델라는 쿠데타를 통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되었다. 좌우익 극단주의자 사이의 폭력 사태와 재정위기가 일어나자 1976년 3월 24일 군사 쿠데타로 이사벨도 축출됐다.
군부는 스스로의 정권을 국가재건과정(Proceso de Reorganización Nacional)이라 칭하고 좌파와 페론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벌이며(일명 "더러운 전쟁") 국민들의 대대적인 반감을 사게 되었다. 군사정권은 수천명의 반정부 인사들과 시위 참여자들을 쥐도새도 모르게 잡아들인 후 재판 없이 고문 사형하였다. 뿐만아니라 수만 명의 시민이 실종되거나 국가보안군에 의해 살해, 대서양에 수장 되었다.
자국 기업들을 헐값에 매각해 얻은 비자금을 이용해 FIFA로부터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의 개최권을 사실상 돈주고 사왔다. 그렇게 1978년 6월에 월드컵을 개최했는데 이건 완전히 제2의 베니토 무솔리니라 불릴만했다. 말 그대로 무솔리니가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했던 짓을 그대로 따라했고 결국 아르헨티나를 억지로 우승시켰다. 이로 인해 프로파간다에 성공한 비델라는 5년동안 집권했으나 월드컵의 열기가 식자 국민들의 불만을 견디다 못해 1981년 퇴임하고 같은 군장성 출신인 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Roberto Eduardo Viola)로 돌려막기를 했다. 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 역시 몇 개월 못하고 결국 레오폴도 갈티에리로 돌려막기를 시전하고 퇴임했다.
그리고 레오폴도 갈티에리도 호르헤 비델라처럼 프로파간다를 위해 뭔가 일을 만들고자 했다. 영국과의 영토분쟁 지역인 포클랜드 제도를 무력 '수복'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에게 참패를 당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와 있던 외국자본도 포클랜드 전쟁 직후에 대거 빠져나갔으며, 이자율 상승까지 겹쳐서 외채를 도저히 갚지 못하게 되어 경제가 파탄위기에 직면하자 명분을 잃은 군부는 민주 정부에 정권을 이양했다.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킨 레오폴도 갈티에리가 대통령직에서 사퇴하고 아르헨티나 군사정부는 1년 정도 레이날도 비뇨네가 이어 받았다가 결국 이듬해인 1983년에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불러 일으켜 사퇴했다. 군부는 결국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급진시민연합 소속의 라울 알폰신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민주화 이후
라울 알폰신은 민주화를 위해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아우스트랄 프로젝트를 통해 화폐부터 개혁하고 여러가지 경제정책을 내세워서 집권 초기에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오는가 싶었다. 그러나 임기 말년에 초인플레이션 현상을 막지 못한 채 임기를 6개월 남겨놓고 결국 사퇴하고 말았다. 이어서 선거를 통해 페론주의 정당인 정의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카를로스 메넴]은 기존의 페론주의와는 반대되는, 이전 군부정권이 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초기엔 이러한 약빨이 먹어서 물가가 안정화되었고, 외자유치에 적극적이었다. 또한 돈이 되는 기업들이 대거 민영화되었다. 그래서 당장은 돈이 들어왔다. 빈부격차는 커졌지만 저환율 정책으로 초인플레이션이 진정되었기 때문에 일단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덕분에 1995년 대선에서도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2기 집권시에 1기 집권시 정책의 부작용으로 빈부격차가 급속히 확대되었다. 저환율로 수출경쟁력이 떨어져 무역적자가 급속히 커지는 등의 부작용을 겪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쐐기타를 맞고 부정부패마저 횡행하면서 3선까지 노렸던 카를로스 메넴은 지지율 추락으로 3선을 포기하고, 1999년에 임기를 마치며 퇴진했다. 그 이후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었다.
1999년 12월 라디깔당(UCR)과 Frepaso당의 야당연합(Alianza) 후보인 페르난도 데 라 루아(Fernando de la Rua)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막대한 외채, 대규모 적자, 계속되는 경제침체 속에서 2000년 12월 19일 국제통화기금(IMF) 으로부터 397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받고 엄격한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그러나 개혁정책의 실패와 긴축 정책에 대한 국민의 반발로 사회가 불안해지고, 2001년 12월 3일 자본유출을 막기 위해 예금인출 제한조치(Corralito)를 발표하자, 전국에서 슈퍼마켓과 상점에서 약탈이 발생하였고 예금인출 제한조치에 분노한 실업자 운동(piquetero)과 중산층의 냄비시위대(cacelolazo)의 거리 시위가 일어났다. 2001년 12월 20일 대통령궁(Casa Rosada) 앞에서 경찰과 시위대의 유혈 충돌로 38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다친 대참사가 발생했고 데 라 루아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결국 12월 24일에 아르헨티나는 1,320억 달러에 달하는 외채상환유예(moratorium) 선언으로 국가 부도 사태를 맞이했다. 데 라 루아 대통령이 사임하고 2001년 12월 31일 의회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임명되기까지 11일 동안 3명의 대통령이 바뀌었다. 2002년 1월 1일 의회에서 에두아르도 두알데(Eduardo Duhalde)가 찬성 262표, 반대 21표, 기권 18표로 대통령에 임명됐다.
경제 상황 악화에 따른 사회불안과 IMF와의 교섭 부진 등 총체적 위기가 극에 달하자, 민심 수습책의 일환으로 2003년 4월 27에 대통령 선거를 하였으며, 페론당 내 개혁 분파인 승리를 위한 전선(Frente de la Victoria)의 네스토르 키르츠네르(Nestor Kirchner)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1세기
키르츠네르주의
네스토르 키르츠네르 대통령은 중국발 경제 호황에 편승한 수출 증가로 2006년 1월 3일 95억 3천만 달러의 IMF 부채를 조기 상환하고 높은 수준의 고용과 내수 소비 증가로 집권 기간 동안 연 9%의 경제 성장을 달성하며 키르츠네르주의(Kirchnerismo)라는 페론주의를 계승한 새로운 정치운동을 탄생시켰다.
2007년 대선에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Cristina Fernández)가 남편인 네스토르 키르츠네르에 이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아르헨티나 최초의 선출직 여성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의 부부 대통령이 됐다. 그녀는 재임 기간 연기금, 석유회사(YPF: Yacimientos Petrolíferos Fiscales), 아르헨티나 항공(Aerolineas Argentinas), 아르헨티나 상하수도회사(AySA: Agua y Saneamientos Argentinos)등을 재국유화 하였고, 저소득층에 각종 보조금을 지원하는 포퓰리즘 정책에 정부지출을 늘려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농산물에 대한 수출세 부과 및 각종 규제강화로 농업 및 기업 부문과 갈등을 겪었고, 2010년에는 중남미 최초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면서 교회와 크게 충돌했다. 빈곤률 감소와 중산층 확대로 2011년 대선에서 54.11%의 역대 최대 득표율을 획득하여 재선에 성공했으나, 2014년 헤지펀드 채권단과의 협상 실패로 디폴트 상태에 빠지고 부패, 물가상승, 치안 악화, 언론통제, 대통령 연임제한 폐지 개헌에 반대하고 알베르토 니스만(Alberto Nisman) 검사의 죽음에 대한 사법 정의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집권당의 지지율이 크게 하락했다.
신자유주의로의 복귀
2015년 대통령 결선 투표에서 변화연합(Cambiemos)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전(前)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이 집권 여당의 다니엘 시올리(Daniel Scioli) 후보를 2.8% 차이로 누르고 근소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여당의 패배는 키르츠네르 부부 대통령의 12년 장기집권에 따른 피로감과 만성적 경제침체로 유권자들의 새로운 변화에 대한 욕구 분출에 있었다. 마크리 대통령은 다수의 기업가 출신 장관을 임명하고 기업친화적 정책, 외환시장 자유화, 보호무역 정책 완화 등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높은 물가상승과 외환위기에 직면하여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57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았고, 그 조건으로 엄격한 긴축재정을 실행하면서 지지기반인 중산층마저 마크리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국가주의로의 복귀
결국 경제문제 해결에 실패하면서 마크리 대통령은 2019년 재선에 실패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운 키르츠네르주의 정치운동의 연합인 모두의 전선(Frente de Todos)의 알베르토 페르난데스(Alberto Fernández)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아르헨티나는 4년만에 다시 좌파가 정권을 회복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결선투표 없이 1차 투표에서 당선된 데에는 빈곤률 증가와 물가인상, 그리고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IMF 구제금융 신청이 있었다.
정치
경제
인문사회
문화
동영상
참고자료
- 〈아르헨티나〉, 《나무위키》
- 〈아르헨티나/경제〉, 《나무위키》
- 〈아르헨티나〉, 《위키백과》
- 〈아르헨티나의 국장〉, 《위키백과》
- 〈아르헨티나의 국기〉, 《위키백과》
- "Argentina", Wikipedia
- 〈아르헨티나〉, 《두산백과》
- 〈아르헨티나의 지리〉, 《두산백과》
- 〈아르헨티나/역사〉, 《나무위키》
-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 회복과 신자유주의 정책 실패〉, 《두산백과》
- 〈아르헨티나의 21세기〉, 《두산백과》
- 〈[url 제목]〉, 《사이트명》
- Leigh Cuen, 〈아르헨티나는 ‘암호화폐 겨울’을 모른다〉, 《코인데스크코리아》, 2019-03-04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