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김홍도(金弘道)는 조선 후기의 풍속 화가이다.
개요
- 김홍도는 조선 시대의 화가. 영.정조의 문예부흥기부터 순조 연간 초기에 활동했다. 어린 시절 강세황의 지도를 받아 그림을 그렸고, 그의 추천으로 도화서 화원이 되어 정조의 신임 속에 당대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았다. 산수, 인물, 도석, 불화, 화조, 풍속 등 모든 장르에 능하였지만, 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김홍도는 왕의 어진에서 촌부의 얼굴까지, 궁중의 권위가 담긴 기록화에서 서민의 삶의 애환이 녹아 있는 속화까지 신분과 장르를 아우르며 그림을 그렸다. 화가 신분으로 종6품에까지 오르는 세속적 출세를 맛보았고, 비록 말년에는 가난과 고독 속에 생을 마감했으나 일생동안 시를 읊고 고졸한 멋을 즐길 줄 아는 진정 위대한 화인이었다. 김홍도의 작품은 조선시대 우리 문화와 역사를 고찰하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으며, 동시대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아들인 양기(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 김득신(金得臣), 김석신(金碩臣), 이인문(李寅文), 이재관(李在寬), 이수민(李壽民), 유운홍(劉運弘), 이한철(李漢喆), 유숙(劉淑)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작품에는 《자화상》(18세기 중반), 《군선도》(1776), 《서원아집도》(1778), 《행려풍속도》(1778), 《송월도》(1779), 《꽃과 나비》(1782), 《단원도》(1784), 《사녀도》(1784), 『금강사군첩』(1788), 《연꽃과 게》(1789), 『을묘년화첩』(1795), 『병진년화첩』(1796), 《마상청앵도》(18세기 후반), 『단원풍속도첩』(18세기 후반), 《염불서승도》(1804), 《추성부도》(1805) 등이 있다.[1]
- 김홍도(1745년 ~ 1806년)의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취화사(醉畵士)·첩취옹(輒醉翁)이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는 그의 호 단원을 따온 이름이다. 정조 시대 때 문예부흥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여겨진다. 그는 산수화, 풍속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화가였지만 고사인물화 및 신선도, 화조화, 불화 등 모든 분야에서 독창적인 회화를 구축한 화가이기도 하다. 주로 어명·고관의 명, 양반의 청탁을 받아 그림을 그렸지만, 일반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그린 풍속화가로 우리에게 주목받고 있다. 또한 그는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고, 시도 써서 아들 김양기가 출판한 《단원유묵》이라는 문집도 있다.[2]
- 김홍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1745년 아버지 김석무(金錫武, 1711년 ~ 1780년)와 어머니 인동 장씨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하급 무관에 대대로 출사하던 무반 가문으로, 5대조 김득남(金得男, 1603년 ~ 1632년)은 수문장(守門將)을, 고조부 김중현(金重鉉)은 별제(別提), 증조부 김진창(金震昌, 1662년 ~ 1722년)은 만호(萬戶)를 역임했다. 신윤복과 마찬가지로 춘화도 꽤 많이 그린 편인데 운우도첩의 경우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춘화도첩으로 꼽힌다. 신윤복은 정말로 풍속화만 남겼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타 작품은 전무한 반면에 김홍도가 그렸다고 알려진 작품은 엄청나게 많다. 작품이 현재까지 전해져 온다는 것은 당대부터 엄청난 네임밸류를 쌓아왔다는 증거다. 김홍도는 한반도 전통 화단의 정수라고 평가받는데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비롯하여 탱화, 산수화, 인물화, 영모화 할 것 없이 모든 장르에서 완벽한 화풍을 보여주며 정물화인 책가도 또한 잘 그렸다고 전해지지만 아직까지 실물이 발견된 바는 없다. 조선 시대에는 시서화라 하여 시, 서예, 그림 3가지를 모두 취미로 삼거나 단련하는 문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 장르에 통달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또한 장르 하나에 국한된 '문인 화가'들이 많았던 반면 김홍도는 '직업 화가'로서 그림에만 충실했으며 재능이 더해져 장르에 국한 받지 않고 다재다능하게 소화한 조선 시대 통틀어서 유일무이한 화가다.[3]
- 김홍도는 조선 후기 「군선도병」 · 「단원풍속화첩」 · 「무이귀도도」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취화사(醉畫士)·첩취옹(輒醉翁). 만호를 지낸 진창(震昌)의 종손이자 석무(錫武)의 아들이다. 도석인물화와 더불어 그를 회화사적으로 보다 돋보이게 한 것은 그가 후기에 많이 그렸던 풍속화이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점경이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 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더불어 표현되고 있다.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한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더불어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 준다. 그가 이룩한 한국적 감각의 이러한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양기(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김득신(金得臣)·김석신(金碩臣)·이명기(李命基)·이재관(李在寬)·이수민(李壽民)·유운홍(劉運弘)·엄치욱(嚴致郁)·이한철(李漢喆)·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등 한국화 발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개인 소장)·「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간송미술관 소장)·「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단원도(檀園圖)」(개인 소장)와 「섭우도(涉牛圖)」·「기노세련계도(耆老世聯稧圖)」·『단원화첩』(삼성미술관 소장)·「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4]
김홍도의 생애
- 김홍도(金弘道)는 1745년(영조 21)에 태어났다. 출신 가문은 원래 무반에서 중인으로 전락한 집안이라는 것만 확인되고,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그의 나이 7, 8세 때부터 경기도 안산에 있는 강세황(姜世晃)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어린 시절을 안산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강세황은 당대의 감식가이며 문인화가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로 시작하여 다음에는 직장의 상하 관계로, 나중에는 예술적 동지로 강세황이 세상을 떠나는 1791년, 김홍도의 나이 47세까지 이어졌다.
- 김홍도는 강세황의 추천으로 이른 나이에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다. 20대 초반에 이미 궁중화원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1773년에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그리고 1774년 감목관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에서 근무했다. 1781년(정조 5)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을 그릴 때 한종유(韓宗裕), 신한평(申漢平) 등과 함께 동참화사로 활약했으며, 이에 대한 포상으로 경상도 안동의 안기찰방을 제수 받았다. 이 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서 단원(檀園)이라 스스로 칭했다. 이는 이유방이 지닌 문사로서의 고상하고 맑은 정신과 기묘하고 아취가 있는 그의 그림을 사모한 데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 조희룡의 『호산외사』에 의하면 '(김홍도는) 풍채가 아름답고 마음 씀이 크고 넓어서 작은 일에 구속됨이 없으니 사람들은 신선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강세황 역시 「단원기」에서 '단원의 인품을 보면 얼굴이 청수하고 정신이 깨끗하여 보는 사람들은 모두 고상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김홍도는 회화에서뿐 아니라 거문고, 당비파, 생황, 퉁소 등을 연주하는 음악가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일찍부터 평판이 높았던 서예가이고, 빼어난 시인이었다. 그의 작품에 고졸한 아취가 흐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멋과 문기(文氣)가 번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김홍도는 1791년에는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일에 또 한 번 참여하게 되었고, 1791년 12월 포상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발령받았다. 이는 중인 신분으로 그가 오를 수 있는 종6품에 해당하는 최고 직책이었다. 정조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홍도는 충청위유사 홍대협(洪大協)이 조정에 올린 보고가 발단이 되어 만 3년 만에 연풍현감 자리에서 파직되었다. 1795년 서울로 돌아온 김홍도는 그림에 전념했다. 그의 나이 51세로 원숙기에 접어든 그는 이때부터 단원화풍이라고 불리는 명작들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으로 행차하는 광경을 그린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조선 시대 기록화의 기념비적 대작이고, 《을묘년화첩》과 《병진년화첩》은 한국 진경산수의 온화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표현한 명작이다. 김홍도는 이전의 작품에서 보여준 화원다운 치밀함과 섬세함 대신 대가다운 과감한 생략과 스스럼없는 필묵의 구사로 단원 산수화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 김홍도는 만년에 이르러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사경(寫景) 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 영모 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배인 일상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그는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했는데, 화원이었던 그가 도석인물화를 많이 그리게 된 것은 당시 서민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도석신앙과 관계가 깊다. 굵고 힘차면서 투박하고 거친 느낌의 선이 특징인 그의 도석인물들은 후기에 오면서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단아하면서 분방한 필치를 띄게 되었다. 김홍도는 산수, 인물, 도석, 불화, 화조, 초충 등 회화의 모든 장르에 뛰어났지만 특히 풍속화를 잘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조선 후기 농민이나 수공업자 등 서민들의 생활상을 소재로 하여 길쌈, 타작, 대장간, 고기잡이 등 그들이 생업을 꾸려가는 모습과 씨름, 무동, 윷놀이 같은 놀이를 즐기는 모습, 빨래터와 우물가, 점심 등 서민의 삶과 정서에 밀착된 일상의 모습을 간략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그의 풍속화에는 박진감 넘치는 구성과 예리한 관찰, 그리고 인간적인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으며, 활달하고 건강한 한국적 해학과 정감이 묻어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흰 바지와 저고리를 입은 둥글넓적한 우리 서민의 얼굴이 한국적인 정취를 흠씬 느끼게 한다.
김홍도의 풍속화
- 김홍도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풍속화는 거의 대부분 그가 30대에 그린 것이다. 그의 풍속화는 그가 34세인 1778년 그린 8폭의 〈행려풍속도〉 병풍과 30대 중후반에 그린 25점의 〈풍속화첩〉(모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전해지고 있다. 〈행려풍속도〉는 김홍도가 풍속화에 눈뜨고 관심을 가지게 된 초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행려풍속도〉 병풍은 강세황이 각 폭마다 그림을 설명한 평을 써넣었고, 비단 위에 연한 담채와 수묵으로 섬세하게 농어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행려풍속도〉는 필력과 화면의 짜임새가 미숙한 대로 흑립을 쓴 선비와 관료, 머슴과 농어부들의 생활상 등 일상 속에서 흔한 소재로 현장감 있는 배경처리와 함께 회화적으로 이끌어내려 한 김홍도의 의욕이 배어있다. 〈행려풍속도〉보다 더 완성된 형태의 인물 소묘력이 보이는 작품으로 〈풍속화첩〉이 있다. 한 폭의 크기는 27.0X22.7cm이고 전체 25점으로 꾸며진 이 화첩은 배경을 생략하고 소묘풍에 약간의 담채를 가해 종이에 그린 것으로 본격적인 풍속 그림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풍속화 스케치북 형태이다.
- 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金弘道 筆 風俗圖 畵帖)은 김홍도필(金弘道筆) <풍속도 화첩(風俗圖 畵帖)>은 조선 후기의 화가인 김홍도가 그린 그림책 형태의 풍속화 25점이다. 단원 김홍도(1745∼)는 신선그림이나 초상화, 산수화 등 다양한 주제로 그림을 그렸지만, 풍속화가로 더 유명하다. 풍속화는 종이에 먹과 옅은 채색을 하여 그렸는데, 각 장의 크기는 가로 22.4㎝, 세로 26.6㎝ 정도이다. <씨름>, <대장간>, <글방> 등과 같이 서민사회의 일상생활 모습과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이 구수하고도 익살스럽게 표현된 그림들이 실려 있다. 풍속화의 대부분은 주변의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을 중심으로 그렸는데, 특히 인물은 웃음 띤 둥근 얼굴을 많이 그려 익살스러움을 한층 더하였다. 선이 굵고 힘찬 붓질과 짜임새 있는 구도는 화면에 생동감이 넘치게 하는 한편 서민들의 생활감정과 한국적인 웃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풍속화들은 활기차게 돌아가는 서민들의 일상생활의 사실성과 사회성을 그 생명으로 삼았고, 또한 서민의 일상생활을 주제로 한 것이어서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김홍도미술관
- 김홍도미술관은 조선후기 화원이었던 단원 김홍도 기념미술관이다.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충장로에 위치하며 미술관 대지면적은 11,315㎡, 건축면적은 2,717㎡이다. 단원 김홍도의 영인본(影印本) 작품을 전시하는 본관이 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원이었던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는 7~8세부터 약 20세가 될 때까지 안산에서 살았다. 스승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안산에 살았기 때문에 그의 집에 기거하며 그림과 글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김홍도가 안산에 살았던 인연으로 이곳에 미술관이 세워졌다. 김홍도는 풍속화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산수화에도 매우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20대 초반에 도화서 화원으로 발탁되어 영조(英祖)와 정조(正祖)의 초상화(어진)를 그렸다. 이후 만년에는 소박한 서민들의 삶을 표현하는 풍속화를 많이 그렸는데 그의 풍속화들은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조선 후기 미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술관 명칭은 설립 당시 단원미술관이었다가, 2022년 3월 김홍도미술관으로 변경되었다. 영인본관 외 전시장은 1,099㎡의 면적을 가진 제1관, 그리고 598㎡ 면적으로 소규모 전시를 개최하는 제2관, 813.57㎡ 규모의 복합전시관인 제3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김홍도〉, 《위키백과》
- 〈김홍도〉, 《나무위키》
- 〈김홍도(金弘道,1745~1806?)〉, 《두산백과》
- 〈김홍도(金弘道)〉,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정자 기자, 〈안산문화재단, 제5회 김홍도문화제 성공적으로 마무리… 5일간 15만 8000명 참여〉, 《천지일보》, 2024-10-23
- 문인호 기자, 〈미술사학자 최열, “단원 김홍도는 안산 출신 확실”〉, 《신아일보》, 2024-10-09
- 이태호 기자, 〈서울예대, ‘김홍도의 그림 속으로’ 라이브 퍼포먼스 화제〉, 《중부일보》, 2024-10-03
- 루루, 〈안산 아이와 방문한 단원 김홍도미술관 전시〉, 《네이버블로그》, 2024-06-28
- 김예나 기자, 〈30대의 김홍도가 완성한 예술 세계…'서원아집도 병풍' 보물됐다〉, 《연합뉴스》, 2024-04-25
같이 보기